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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일기 327. 명상 명상은 어렵다.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게 되기도 어렵다. 끊임없이 부딪치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겐 그런 시간을 내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드물고 물좋고 공기좋은 곳에서 자연과 벗하고 살면 명상도 필요없다. 일상이 산책이 되고 명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되냐는 말이다. 모두 속세를 벗어나 귀촌을 해야할까? 도시에서 사는 현대인은 점차 분열된다.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사람을 구별하게 된다. 도를 닦는 수행자는 감정노동자 중에 더 많을 수 있다. 매일매일이 고행이고 고통인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각자의 취미를 찾고 소확행, 워라벨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만 되어도 살기 편한 인생이다. 결국 문제는 불안한 마음이 지속되는 것이며, 마음의 문제는 외부의 어떤 요인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마음을 비운다거나 가라앉힌다는 생각 자체가 관념이 된다. 비우면 무엇이 남는가. 비운 마음이 남는다. 마음은 채우고 비우는 그릇이 아니다. 마음은 사람으로 연결된 감정의 체계이며 그것은 내가 주고받는 주위의 사람, 알게되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 생각 모두를 통해 공유된다. 나만 비운다고 비워지는게 아니란 소리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시당하는건 기분나쁘다. 인간을 상대하는것 자체가 고역일 수밖에 없고 전달될 수밖에 없다. 어떤 상태와 중심으로 상대하느냐, 정확히 어떤 상태의 마음으로 존재하느냐가 나와 상대의 기분을 가른다.

손가락과 발가락의 퇴화

손가락과 발가락의 퇴화 현대인은 원시인보다 퇴화했다. 특히 신체기능에 있어서 현저하게 퇴화하고 말았다. 물론 수명이 연장되고 건강해지게 된 것은 위생의 개선, 의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지만, 유일하게 운동만은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신체를 퇴화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덩치크고 힘만 센 약쟁이들에게 운동을 배울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 다했다. 먼저 발부터 시작하자. 나는 내 발등의 높낮이가 다르고 길이도 다른 짝발이라는 사실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고 그걸 보완하기 위해 방법을 연구하고 맞는 신발을 찾아헤맸다. 결국엔 맨발에 가까운 베어풋 신발을 신고서야 해답을 발견했다. 왼쪽의 엄지와 검지발가락은 틈이 있고 벌어져 있는데 오른쪽의 엄지와 검지는 딱 붙어서 원래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신발을 바꾸고나자 오른발도 벌어지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그제야 내 발의 볼이 생각보다 넓고 그동안 신발에 발가락을 옥죄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뒤꿈치도 왼쪽이 더 닳고 오른쪽은 발앞꿈치를 쓴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제서야 오랫동안 고민이었던 오른 무릎의 내측광근이 처지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족저근막염이나 무지외반증은 전적으로 발가락을 압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발가락을 압박하면 충격이 발바닥이 아닌 앞꿈치로 향하고 지속적인 충격이 발 내부와 발등, 발바닥에 전반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평발과 반대인 오목발, 요족처럼 충격을 발가락으로 흡수하지 못하고 뼈로 전부받게 되는 것이다. 무지외반증은 현대판 전족이다. 하이힐을 신고 발가락 다섯개를 전부 묶어버리면 당연히 엄지발가락이 할 일을 그 뒤의 뼈가 전부 다하게 된다. 사오십킬로가 넘는 몸무게를 양쪽의 뼈가 나눠 받게 되는 것이다. 뼈는 점점 더 튀어나오고 무릎은 점점 벌어지게 된다. 발가락을 묶음으로 해서 발 무릎 허리 척추까지 충격을 그대로 받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유연성과 근력의 관계

유연성과 근력의 관계 우리가 생각하는 유연성은 극단적인 일부다. 우리가 생각하는 근력도 극히 한 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얼마나 유연하냐 얼마나 힘이 세냐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얼마나 부드럽냐 얼마나 끈질기냐가 정확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면 우리가 겪게되는 대부분의 가운데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체조선수와 스트롱맨은 양 극단에 있다. 리듬체조와 기계체조도 그 안에서 양 극단에 있다. 유연성과 근지구력은 조화를 이룬다. 유연성만 추구해서도 안되고 근력만 추구해서도 안된다. 둘의 접점은 근지구력에 있고 그 안에서의 유연성은 가동범위의 확보, 지속가능한 충격의 흡수를 뜻한다. 이게 일반인이 겪게 되는 유연성의 본질이다. 사람의 신체는 관절로 연결되어있고, 관절은 힘줄과 인대의 결합조직으로 연결된다. 힘줄은 근육으로 이어지고 근육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니까 근육은 에너지를 변환하는 장치이지 에너지를 축적하는 창고가 아니다. 인간의 신체는 기계가 아니다. 누적된 강인함은 뼈와 인대와 힘줄의 견고함, 끈질김에서 나오는 것이지 근육의 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것이 손과 손목과 아래뼈와 팔꿈치와 위뼈로 밀어올리는 것이지 근육으로 들어올리는게 아니다. 스트롱맨과 보디빌더는 그 지점에서 다르다. 스트롱맨은 뼈 자체의 강인함을 추구하고 보디빌더는 근육의 수축을 중시한다. 그러나 본질은 뼈와 관절이다. 여기서부터 각도와 자세에 차이가 나온다. 근육을 나눠서 부위별로 수축하는 방법과 밀어올린다는 또는 들어올린다는 동작 자체에 집중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턱걸이도 동작에 집중해야지 근육에 집중해선 안된다. 하체는 그러지 않는데 유독 상체는 다양한 동작에 집착한다. 이것 또한 본질에서 벗어난 생각이다. 손으로 철봉을 잡고 당기는게 중요한 것이지 등근육을 수축하고 숄더패킹을 하고 뭐가 어떻고 어떻고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다. 내가 손으로 봉을 잡고 당긴다는 행위 자체 손에 힘을 주고 당긴다는 자체가 중요하다.

척추와 중심선

척추와 중심선 인간은 이족보행을 한다. 치타처럼 사족보행을 하면 무게의 분산을 네 발로 나누고 달릴 수 있어서 척추가 유연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등쪽이 약할 수 있다. 고양이나 개과 동물도 몸통이 두껍냐 얇으냐에 따라 보행방식이 달라진다. 그레이하운드와 닥스훈트의 달리기는 다르다. 달리기에 최적화된 말의 경우 몸통도 두껍고 다리도 두껍다. 척추도 그만큼 강해서 사람이 올라탈 수도 있다. 유인원과의 인간은 애초에 달리기보다 매달리기에 적합했고 지상에 내려와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는 현저히 느리지만 대신 초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이 있다. 에너지 소비효율에 있어 지구최강의 생물로 진화한 것이다. 그 덕분에 뇌가 발달할 수 있었고 지능이란게 압도적인 종족의 특성으로 이어졌다. 에너지가 남는다는 것은 다른 일을 할 여유를 준단 뜻이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간과한다. 체력이 좋다는 뜻은 생존과 지능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이점이 된다. 똑같은 일을 해도 한 명은 지치고 한 명은 지치지 않는다면 지치지 않는 쪽이 생존에서 절대우위에 선다. 우리는 그런 경쟁의 결과물인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달리기와 걷기에 최적화되어있다. 손은 세밀하게 발달했고 근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대신 하체와 골반, 척추가 견고한 구조를 형성했다. 인간이 달리기를 못한다면 그건 부모가 운동을 시키지 않았거나 본인이 게을렀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체력의 절대치를 좌우하고 생존경쟁을 불리하게 만든다. 신체의 중심선은 척추를 따라 형성된다. 상체나 하체, 팔이나 다리가 아니라 척추를 기준으로 그 신체능력이 발달한다. 이걸 모르면 팔다리가 둔화되고 신체가 약화된다. 척추가 기준이 되지 않는 한 모든 운동은 부상을 예고한다. 역대 단거리 달리기 선수 중에 특이한 자세의 선수가 있다. 마이클 존슨이란 미국선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달렸다. 마치 다리 짧은 사람이 달리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1등을 했다.

근골격계 부상의 원인

근골격계 부상의 원인 대부분의 사람은 착각하고 있다. 인간의 신체는 생각보다 약하지 않다. 운동선수가 아님에도 근골격계 질환이나 부상에 반복적으로 시달리는 이유는, 자신의 몸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운동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방법이 문제다. 특히나 약쟁이들 덕분에 절대 해서는 안되는 방법들이 보편화되어버렸다. 일반인이 헬스를 통해 부상을 입는 이유의 절대적 요인은 로이더다. 첫째, 엘리트 선수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다. 둘째, 일반인의 한계를 전혀 모른다. 대다수의 로이더는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약을 쓰기 때문에 어느 정도 했을 때 관절에 무리가 오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횟수와 반복에 대한 정확한 기준과 데이터가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몇 회의 몇 세트, 몇 킬로에 몇 주같은 아주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일반인의 신체에 맞게 설계할 수 없음을 뜻한다. 파워리프터는 그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볼륨과 중량으로 주기화하는 프로그램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성장의 그래프이자 한계치이기 때문이다. 사실 보디빌딩의 프로그램은 이보다 더 어렵다. 2분할 3분할이 회복이 가능한 최대치다. 그리고 이것도 볼륨을 잘 조절해야한다. 볼륨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트레이닝은 당장 그만두는게 낫다. 그건 그냥 관절이 약해지고 언젠가 부상을 입겠다는 뜻이다. 열심히 하는만큼 빠르게 부상에 가까워 아니 부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복잡해서 맨몸을 기준으로 삼았다. 맨몸 밴드 가방 물통 정도면 충분히 신체를 강화할 수 있다. 어깨나 골반도 키우고 강화할 수 있다. 대신 기존의 상식을 깨야한다. 8에서 12회라는 중량식 횟수를 깨고 10 20 30 60 90 같은 고반복의 횟수를 도입해야한다.

한계와 방법

한계와 방법 현재 내 몸의 상태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왼쪽과 오른쪽의 편차가 있고 자세가 습관으로 고착화되었다. 힘의 차이와 함께 왼쪽에 의존하는 걸음걸이다. 오른쪽 다리와 골반이 덜 쓰이고 더 약하다. 얇은 신발을 신자 그 차이가 금새 나타난다. 오른쪽 무릎에 부담이 증가하고 오른발바닥이 아프다. 예전부터 짝다리를 짚으면 왼발은 괜찮았고 오른발은 아팠다. 이는 문제가 꽤 큰데 오른발이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체는 그 차이가 더 큰데 아예 왼쪽과 오른쪽의 어깨크기 자체가 다르다. 힘 차이도 크다. 그러면 이런 불균형한 상태에서 어떻게 훈련해야할까? 중요한 것은 훈련의 방법이다.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훈련법은 상향식 비대칭이다. 하향식도 안되고 별도로도 안된다. 상향평준화를 목표로 격차를 좁혀가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궁극적인 목표가 균형 또는 평등이라 하더라도 하향평준화는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수준별 학습처럼 수준별 훈련도 해결책이 아니다. 그건 그냥 서열식 차별법이고 신체는 관절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손발은 약한데 팔다리가 굵다든가 어깨는 약한데 팔만 굵다든가 골반은 약한데 허벅지만 굵다든가 다양한 불균형이 초래될 수 있다. 불균형인 상태에서 불균형인 운동까지 하면 분명히 어딘가에 부하가 집중되고 부상으로 이어진다. 불균형한 몸으로 대칭적이고 동등한 운동 을 해도 문제가 커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체의 차이와 약점을 알아야 한다. 약점을 강화하고 차이를 좁히는 훈련을 해야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자신부터 사랑하라

자신부터 사랑하라 자기개발서의 시작과 끝은 결국 자신을 믿고 사랑하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뻔한 얘기는 쓰기 싫고 사랑에 대한 분석은 영 내키지가 않아서 쓰지 않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분석이고, 그러니 사랑도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 평화 사랑에 의한 세상의 변화는 결국 사랑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아는 사랑이란 말 속엔 착각 편견 최면 세뇌 암시 모든 두뇌의 작용이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활발하게 두뇌를 활성화시킨다. 역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방법으로 다른 모든 일을 하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 시작은 자신에 대한 선택에서 비롯된다. 성공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자신감을 얻기 위해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넌 할 수 있다. 넌 멋있다. 잘 생겼다. 예쁘다며 주문을 거는 것은 어찌됐든 자기긍정의 효과다. 그보다 더 강력한 주문은 널 사랑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주문이다. 긍정적인 면을 강화하는 것보다 부정적인 면을 포용하는게 훨씬 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사람이 위기에 빠지고 시련에 처할 때는 긍정을 강화하는 힘보다 부정을 극복하는 힘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방법을 찾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그러니까 목표를 달성하는 힘은 긍정적인 자세나 태도가 아니라 부정적인 관점과 비판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는 힘이다. 긍정도 부정도 인정을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지, 인생 자체를 부정하거나 긍정하는건 수단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언제나 인정이 기준이고 긍정과 부정은 방법이다. 그게 자신을 인정하고 현실을 인정하는 사랑이다. 긍정과 부정은 인정이란 전제위에서만 제대로 사용될 수 있다. 그게 곧 현실직시다. 내가 처한 현실, 세상에서 내가 나아갈 길은 내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창조해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