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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시대 금융경제의 메카, 산시성 핑야오(平遥)

산시성(山西省)의 성도 타이위엔(太原)에서 남쪽으로 60km정도 떨어진 고성 핑야오(平遥)에 가면 산서성의 상업활동과 그에 따른 부가 얼마나 엄청난 규모였는지 볼 수 있다. 평요 고성의 중심부에는 중국 최초의 은행이라 할 수 있는 일승창(日升昌)을 비롯하여 20여 개가 넘는 사설 금융기관인 표호(票号)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들 표호들의 지하에는 모두 금고들이 있는데, 금고들마다 온갖 크기의 은궤들이 가득가득하다. 이 많은 돈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중국의 산서성은 예로부터 사람에 비해 경작할 토지가 적은 곳으로 무척 가난한 지역이었다.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서성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상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산서상인은 명나라 초기부터 거대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 그 배경이 흥미롭다. 몽골족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던 명나라는 북변의 방어를 위해 만리장성을 경계로 군진을 배치(九邊鎭)하였고, 북변에 대한 보급 문제가 시급해졌다. 명나라 정부는 상인들에게 북변 지역의 보급을 위탁하였고, 상인들에게 보급받은 곡물 당 일정 비율의 소금 교환권을 지급하였다. 이것이 바로 개중법(開中法)이다. 산서상인들은 북변에 가까운 지리적 이점에 힘입어 북변의 군량을 조달해주는 대가로 다른 상인들보다 명나라 정부로부터 사실상 소금 교환권을 독점할 수 있었으며, 산서상인들은 이렇게 확보한 소금 교환권으로 장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소금 시장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중기부터 나라의 세금을 점차 은으로 걷기 시작하면서 산서상인의 밥줄과도 같았던 개중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상인들은 이제 곡물이 아니라 은을 내고 소금 교환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서 소금에 대한 산서상인들의 독점이 깨지게 되자 산서상인들은 변화를 꾀해야 했다. 따라서 산서상인의 일부는 계속 북변에 남아 식량과 무기 등의 군수용품 보급과 변방 무역에 계속 종사하는 한편, 많은 산서상인들은 남쪽으로 진출하여 전국에서 가장 큰 염장이 있는 안휘성과 강소성, 절강성 지역으로 활동범위를 옮겨왔다. 따라서 산서상인들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휘주상인들과 적극적으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되어 산서상인과 휘주상인 양대 세력의 경쟁구도가 형성되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중원에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며, 청나라는 만리장성이 의미가 없어져버린 명실상부한 동부유라시아의 대제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강희제 시기 청나라의 강역이 몽골과 티베트, 그리고 마침내 동투르키스탄 지역까지 이르면서 국내무역의 범위가 엄청나게 확장되었고, 러시아와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와의 대외무역까지 활발해지자 산서상인들의 활동 범위는 무척이나 넓어졌다. 게다가 명나라 시기부터 이미 중국 각지로 퍼져나간 산서상인들은 각 무역 거점을 잇는 장거리 네트워크를 이미 구축하고 있었다. 이처럼 산서성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몽골, 신장을 잇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각 무역 거점을 잇는 산서상인들의 전국적인 상업 무역망은 정말 대단했다. 사실 산서상인들의 번영은 명대 중엽부터 이어진 농업 생산력 증대와 특히 청 전기의 국내 정치의 안정과 외국으로부터의 은의 유입에 따른 상품경제의 발전과 국내시장의 확대에 힘입은 것이었다. 한편 상품경제의 발전은 유통 물량의 대대적인 증가를 수반하였다. 상인들이 취급하는 은의 조달과 운송액수가 점차 확대되었고 횟수도 점차 증대되며 안전과 신속한 운반의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출중한 무술과 보안인력을 기반으로 은과 귀중 물품의 운송업을 담당하던 민영 기업인 표국(镖局)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이러한 시스템에도 한계가 있게 되었고, 화폐금융에 대한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불편을 가장 체감하고 있었던 자들은 엄청나게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던 산서상인들이었다. 산서상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와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전국적인 송금망의 구축을 통해 표호(票號)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표호(票號)란 일정 수수료를 내고 은을 맡기면 어음과 같은 보증수단을 통해 타 지역에서 은을 환급받거나 다른 지역으로 송금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을 갖춘 사설은행이다. 1823년 중국 최초의 표호인 일승창(日升昌)이 설립된 이후 표호의 영업 이익이 다른 분야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된 산서상인들은 앞을 다투어 금융 업무만을 담당하는 표호로의 전환을 적극 모색하게 되었고, 마침내 산서성은 청대 말 명실상부한 중국의 금융 허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본점을 산서성에 둔 이들 표호들은 중국 각 주요 도시에 지점을 설치하여 송금과 환급의 업무를 담당하였고, 이후에는 정부의 공금 송금까지도 담당하게 된다. 청나라 광서제 시기에는 산서성에 기반을 둔 합성원표호(合盛元票號)가 조선의 신의주와 일본의 고베에 지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표호들은 타지역간 채무정산과 현금평형(现金平衡)이라는 중대한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이를 통해 중국의 상업경제는 더욱 고도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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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张学良). 만고의 역적인가, 위대한 애국자인가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일본군이 장쉐량(張學良)의 아버지인 장쭤린(張作霖)을 폭사시키지 않았다면? 만일 장쉐량이 변심하여 동북군의 깃발을 국민당의 청천백일기로 바꾼 이른바 '동북역치'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만일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협박하여 제 2차 국공합작을 이루어낸 이른바 '시안사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중국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떻게 굴러갔을까? 중국 3대 군벌 중 하나인 동북군의 수장으로 전 중국을 석권할지도 몰랐던 인물. 장제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내심 생각했던 인물. 저우언라이(周恩来)로 하여금 두 번씩이나 애타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인물. 타이완에서 60년간 감금생활을 끝에 90세가 넘어 미국 하와이로 가서 100세의 천수를 누린 인물. 중국정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끝내 건너가지 않았으나, 타이완에서는 여전히 만고의 역적으로, 중국 본토에서는 위대한 애국자로 칭송을 받는 인물. 이처럼 장쉐량은 중국 현대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인물임에 틀림없다. 절대권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1916년 여름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중국은 권력의 진공 상태가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부하였던 북양신군 장군들이 중국 전역의 군벌로 성장했고,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군벌들은 분열되어 자신의 지역을 지배했다. 강력한 중앙 권력이 사라지면 총칼을 잡은 자가 세상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중국도 이제 각 지방의 군사 지휘자가 권력을 휘두르게 되어 군벌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모두 위안스카이가 설립한 강력한 신식 군대인 북양신군의 지휘자들로 위안스카이의 내로라하는 심복들이었다. 펑궈장(馮國璋)과 차오쿤(曹錕)을 중심으로 자칭 위안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즈리파[直隸派], 돤치루이(段祺瑞)가 태어난 성의 이름을 딴 안후이파[安徽派], 그리고 장쭤린(張作霖)의 펑톈파[奉天派]가 대결하며 중앙 정부의 주도권과 외세와 연결된 각종 이권을 두고 여러 차례 내전에 가까운 계파 전쟁을 벌였다.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정권을 장악한 것은 돤치루이의 안후이파였다. 그러나 5.4 운동이 일어나며 집권세력인 안후이파에 대한 외교 실패에 대한 비난과 반대파들의 사퇴 요구가 거세어지자 이 틈을 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즈리파와, 역시 일본이 양다리 전략으로 지원하고 있던 펑톈파가 연합해 돤치루이의 안후이파를 공격해 전쟁을 일으켰다(安直 전쟁). 이 전쟁에서 안후이파가 져 돤치루이는 권력을 빼앗기고 즈리파가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즈리파가 득세하며 기존의 동맹 세력이었던 펑톈파를 배제하자 장쭤린의 펑톈파는 동북 3성의 독립을 선포하며 즈리파에 맞섰다. 결국 이 대립은 즈리파와 펑톈파의 전쟁으로 번졌다(제 1차 直奉 전쟁). 그러나 이 전쟁에서도 즈리파가 승리해 펑톈파는 만주로 쫓겨 가게 된다. 그런데 1923년 10월의 총통 선거에서 즈리파 군벌의 최고 실력자 차오쿤은 위안스카이 사후 취임한 현직 총통 리위안훙(黎元洪)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차오쿤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감행하였고, 이는 결국 공격 기회를 노리던 적대 군벌들에게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 이를 빌미로 권력에서 밀려난 안후이파, 펑톈파, 쑨원의 국민당 정부 등이 삼각 동맹을 맺고 즈리파를 상대로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였다(제 2차 直奉 전쟁).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와중에 즈리파 군벌 펑위샹(馮玉祥)은 즈리파에게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판단 하에 즈리파를 배신하고 펑톈파 군벌 장쭤린과 밀통했다. 결국 1924년 10월 장쭤린의 지원으로 펑위샹의 쿠데타는 성공했고, 이후 즈리파는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직봉 전쟁은 막을 내렸다. 펑위상은 안후이파인 돤치루이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쑨원에게 베이징으로 북상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광둥의 국민당 정부는 북벌을 계획하여, 쑨원과 새로운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는 1926년 북벌을 시작해 즈리파를 무찌르며 베이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중국 속의 독일, 산동성 칭다오(青岛)

1840년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19세기 말 중국대륙에 대한 서구열강들의 침탈이 가속화되던 청나라 말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자신들이 그토록 무시하던 일본에게까지 굴욕적으로 패함에 따라 국가적 허약함의 극치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열강들과 일본 등이 수박 쪼개먹듯 야금야금 중국대륙을 분할해 먹어들어 가면서 청나라는 사실상 반식민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1897년,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식민지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던 도이칠란드 제국도 의화단 소속 중국인에 의한 자국인 선교사 피살사건을 구실로 함대를 급파하여 칭다오(青岛)를 점령했다. 당시 변변한 전비조달조차 힘들었던 청나라는 이듬해 독일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99년간 할양하였던 것과 같이 향후 99년간 칭다오를 포함한 자오저우만(膠州灣) 지역을 조차지로 할양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 정부는 1996년까지 칭다오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당시 도이칠란드가 칭다오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는 제국 정부의 칭다오 도시계획에서 잘 드러난다. 도이칠란드 제국의 빌헬름 2세는 칭다오를 중국대륙 공략을 위한 핵심 군항이자 무역의 거점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에 따라 도시에는 현대식 항만과 철도가 들어섰고, 시가지에는 붉은 지붕과 화강암 벽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독일식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했던 그 유명한 캉요웨이(康有爲)는 칭다오에 와서 붉은 기와에 푸른 나무, 파란 바다에 쪽빛 하늘, 중국의 제일이로다(紅瓦綠樹,碧海藍天,中國第一)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1927년 이곳 칭다오에서 생을 마감했다. 작년에 칭다오에 갔을 때 도이칠란드가 칭다오를 점령하던 시절 총독부 건물이었던 칭다오 영빈관을 관람하다가 우연히 중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듣게 되었다. 칭다오는 홍수 날 염려가 없습니다.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금세 빠져나가죠. 옛날에 독일인들이 지어놓은 하수도는 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독일인들이 100년 전에 지은 건물도 여전히 튼튼해요 열심히 설명하는 중국인 가이드의 말에서는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적대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약 10년 전 칭다오 하수도의 부속에 문제가 있어서 보수공사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현재의 기술로 규격에 맞는 부속을 만들 수 없어 독일 정부에 의뢰하였다고 한다. 독일 정부는 제국 당시 칭다오 하수도의 설계도면을 찾았다. 설계도에 표시되어진 빨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리할 때 필요한 부속품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보수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칭다오의 도시계획 자체가 도이칠란드 제국 정부의 빅픽쳐였다. 하지만 독일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 어수선한 국제정세의 틈바구니에서 1914년 일본은 영일동맹을 핑계로 추축국인 독일을 공격하여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반도 일대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렇게 20년간의 독일의 칭다오 지배는 막을 내렸다. 다시 8년 뒤인 1922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중국 민국정부가 거액의 배상금을 무는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칭다오에 대한 주권과 철도 운영권을 수복했으나,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칭다오는 다시 일본에 강점되었다. 1945년 일본이 완전히 패망한 뒤에는 국민당 정부가 칭다오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자 미 해군이 칭다오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던 국민당군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때 상주 미군이 7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하지만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을 타이완으로 몰아내자 미군도 칭다오에서 철수했다. 20세기 전반기, 불과 50여 년간 칭다오의 이른바 주인님이 청나라에서 도이칠란드 제국, 그리고 대일본 제국, 다시 민국정부, 장제스의 국민당, 그리고 마침내 중국 공산당으로 숨 가쁘게 바뀐 셈이다. 그러나 그 많은 주인님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칭다오와 독일의 인연은 무척 뿌리 깊다. 중국의 고량주에 익숙하지 않았던 독일인들이 맥주를 마시고 싶어 독일에서 맥주공장 하나를 통째로 뜯어 와서 칭다오에 건립한 칭다오 양조장은 지금 중국의 대표 맥주인 칭다오 맥주가 되었고, 당시의 비스마르크 병영은 현재의 중국 해양대학교가 되었다. 또한 개혁개방 시기 칭다오의 한 중소기업은 독일 립헤르(Liebherr)사와 합작해 냉장고를 만들었고, 훗날 립헤르의 중국식 발음으로 이름을 고쳤으니, 이 회사가 바로 오늘날 최대의 백색가전 회사인 하이얼(海尔)이다. 이곳 칭다오가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가장 유럽스러운 도시라고 불리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쓰촨성 청두(成都), 푸르고 푸르던 두보초당(杜甫草堂)

사실 시성(詩聖) 두보(杜甫)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쓰촨성 청두(成都)의 '두보초당(杜甫草堂)'이다. 내가 중국에서 갔던 곳들 중 가장 좋았던 곳을 꼽자면 쓰촨 청두가 그 중 한 곳이다. 청두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귀요미 팬더를 떠올리지만, 막상 청두에 갔을 때 나를 압도했던 것은 팬더가 좋아하는 대나무와 동백나무를 비롯한 싱그러운 초목들의 푸름이었다. 그 싱그러운 푸름에 날이면 날마다 끼어있는 청두의 옅은 안개가 더해져, 항상 마치 초봄 보슬보슬 내린 첫 단비에 온 세상이 흠뻑 젖어 행복에 가득한 그런 분위기를 낸다. 온통 초록 빛깔인 청두에서 가장 그 푸름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두보초당이다. 두보가 47세이던 758년, 당나라는 안록산(安祿山)의 난에 이은 사사명(史思明)의 난으로 나라가 무척 혼란한 와중에서 수도인 장안을 포함한 기내(畿內) 지역에 대기근까지 덮치자 두보 또한 처자식을 데리고 유랑길에 올라야 했다. 결국 그는 간쑤성의 톈수이(天水), 통구(同谷) 등지를 유랑하며 겨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다가 이듬해 마침내 쓰촨성 청두(成都)에 도착하여 친구의 도움으로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의 대나무 숲속에 초당을 짓고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가 이곳 청두에서 가족들과 거처하던 초당은 방 두 칸짜리의 소박한 초가집이었고, 이마저도 태풍이 불면 여러 차례 무너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765년 친구이자 청두의 절도사였던 엄무(嚴武)가 죽고 쓰촨 지역에 다시 변란이 일어나자 청두에서 의지할 곳이 없던 두보는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어 가족들을 배에 싣고 장강을 따라 방랑하다가 770년 배 안에서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두보가 청두의 초당에서 사는 동안 일시적으로 쓰촨 지역 지방 군벌들의 내란 때문에 쓰촨 동쪽으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청두에서의 두보의 삶은 비교적 평화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인생의 대부분이 고난과 실의로 가득 찼던 두보는 이곳 초당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유일하게 마음에 안정을 찾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며 800여 수 가량의 시를 남겼다. 두보가 평생 남긴 시 1400여 수 중 반 이상이 넘는 시가 이곳에서 지어졌다. 어제도 언급했던 두보의 시 가운데 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이 유명한 시도 이곳 두보초당에서 지어진 것이다. 두보는 이 시를 통해 밤중의 금관성(錦官城, 청두의 옛 이름)에 만물을 소생시킬 봄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무척 기쁜 자신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고 있다. 푸르고 촉촉하며, 싱그러움으로 생동감 넘치는 청두(成都)의 분위기와 정말 잘 어울리는 시다. 청두에 다녀와서 이곳을 배경으로 찍었다는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을 뒤늦게 봤다. 스토리 전개를 떠나서 청두의 그 푸르고 푸른 분위기를 센치센치하게 잡아냈다는 면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주연으로 나오는 청순한 고원원(高圓圓)이 무척 예쁘게 나오기도 했고. 영화 제목에서부터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 시구 첫 구절을 따온 것을 보아하니 감독도 이 시에 분위기에 흠뻑 빠졌던 게 틀림없다.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當春乃發生 봄을 맞아 이내 모든 것을 피워내고

후난성 웨양(岳阳),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다

쓰촨분지를 도도히 흐르던 장강의 물길은 싼샤(三峽)를 만나며 격랑으로 바뀐다. 협곡을 거침없이 휘감아 도는 물줄기는 장장 300여 km. 싼샤를 막 관통한 장강은 이제야 거친 숨을 고른다. 후베이성의 후광평야에 진입하면서 장강은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며 이창(宜昌)과 우한(武汉) 사이에서 심한 사행을 되풀이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쉬어가듯 거대한 호수를 품에 안는다. 바로 천하제일호라고 불리는 '동팅호(洞庭湖, 동정호)'이다. 육지 한가운데 존재하는 바다처럼 넓은 곳. 강호(江湖)란 바로 장강과 동팅호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각각 호수의 북쪽과 남쪽이라는 이름의 후베이(湖北)와 후난(湖南)은 바로 이곳 동팅호를 기준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후난성 창사(长沙)에서 동팅호를 보러 야간열차를 타고 막 웨양(岳阳, 악양)역에 내리던 그 순간 웨양에는 거의 폭풍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서 나던 냄새. 그것은 분명 바다의 냄새였다. 역에서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의 옅은 안개 속으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시꺼먼 동팅호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폭풍 때문인지 강변으로 바다와도 같은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곳 동팅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바로 웨양루(岳陽樓, 악양루)다. 시성(诗圣) 두보는 그의 나이 57세(768년) 이곳 웨양루에 올라 그 유명한 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시구를 남겼다. 그리고 이로부터 2년 후, 결국 59세가 되던 해인(770년) 웨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강의 물길 위의 배 안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두보의 일생을 보면 시성(诗圣)으로서의 그의 명성에 비하여 어떻게 그렇게 운이 없고 비참한가라고 느껴질 정도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는 과거시험에 수차례 낙방을 거듭하며 결국 급제하지 못했고, 후에 하급관직을 얻었으나 일평생 8품 이상의 관직을 맡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평생을 끼니 걱정과 은신할 곳을 찾아 중국 전국을 헤맸다고 보면 된다. 특히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지었던 그의 생의 말엽에 그는 개인적으로 당뇨와 결핵, 중풍 등 각종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만신창이의 상황이나 다를 바 없었으며, 국가적으로는 안사(安史)의 난(亂)으로 피폐해진 당나라 후기 토번(티베트)의 침공이 계속되며 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민심은 흉흉했으며 각지에 도적이 횡횡하고 있었다. 좋은 시를 제대로 짓고자 한다면, 만 권의 책을 읽고(讀萬卷書), 만 리의 길을 떠돌아다니면서(行萬里路) 온갖 풍상을 다 겪어야 된다는 말이 있다. 비록 시알못이지만 두보의 시를 읽으면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의 시에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의 굴곡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 무척 감동적이다. 웨양루에 올라 동팅호를 바라보며 두보의 시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조용히 읊어 보았다. 사실 내가 제대로 읊을 수 있는 두보의 시는 춘야희우(春夜喜雨)와 등악양루(登岳陽樓) 단 두 수뿐이다. 쓰촨의 청두 두보초당(杜甫草堂)의 푸르고 푸르던 대나무숲 한가운데에서 읊어보았던 두보의 또 다른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무척 고독해졌다. 昔聞洞庭水 예로부터 동정호에 대하여 들었건만 今上岳陽樓 이제야 악양루에 오르게 되었네 吳楚東南瞬 오와 초는 동쪽 남쪽 갈라 서 있고

윈강석굴(云冈石窟), "황제가 곧 부처다"

4~6세기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걸쳐 민족대이동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 헬게이트를 연 주범은 바로 '흉노(匈奴)'였다. 유라시아 동부에서 당시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두 제국 '한(漢)'과 '흉노(匈奴)'가 분열하고 약화되면서 유라시아적 스케일의 민족대이동이 촉발되었던 거다. 치열한 계승 분쟁에 휘말려 흉노 제국은 결국 남북으로 갈라졌고,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유럽에서의 민족대이동을 촉발시켰다. '훈(Hun)'이라고도 불리는 이들 북흉노 세력에 의해 유라시아의 서쪽 끝인 유럽에서는 훈족의 침입과 이에 따른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로마제국의 분열과 약화, 프랑크 왕국의 탄생과 같은 일련의 역사적 대변동이 일어났다. 한편 인도 대륙에서는 굽타 왕조가 멸망하고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들로 분열되었다. 반면 남흉노 세력은 선비, 오환 등의 유목민들과 함께 중국 방향으로의 남하를 거듭하여 한(漢) 제국의 붕괴 이후에는 중국 북방까지 들어와 독자적인 국가들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당시 북중국으로 유입된 유목민 이민족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이미 1세기 중반 북중국 지역으로 남하한 남흉노 5부의 총 인구가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한(漢) 제국이 망한 뒤 3세기 후반이 되면 거의 200만 명에 달하는 흉노인들과 선비인들이 중국의 북부, 특히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지역에 분포하게 되었다. 결국 유입된 이민족들과 기존 한족들간에 큰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고 정치적 불안이 초래되는 등의 문제가 빗발치자, 곽흠(郭欽)이나 강통(江統)과도 같은 당대의 진(晉)나라 관리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민족들을 중국 밖으로 쫓아버려야 한다는 이른바 '사융론(徙戎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중국 내 이민족들은 폭동을 일으켜 진 황실을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311년 일어난 '영가(永嘉)의 난(亂)'이다. 결국 한인 왕조인 진(晉)은 수도 낙양(洛陽)을 비롯하여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의 터전이었던 중원을 이민족들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고, 남쪽으로 쫓겨가 도피 정권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야만 했다. 한편 옛 주인이 사라진 중원은 이번에는 유목민들간의 세력다툼으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서진(西晉)의 멸망(316)부터 시작된 약 130년에 걸친 이 시기는, 흉노, 선비 저, 갈, 강과 같은 이민족, 즉 '5호'들이 개창한 16개의 이르는 크고 작은 왕조들이 할거했다고 하여, 이른바 '5호 16국의 시대'라고 불린다. 그러나 거듭되는 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선비족 계통의 탁발(拓拔)부가 건설한 왕조인 북위(北魏)에 의해 5호 16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북위의 제 3대 황제 태무제(太武帝, 재위 423-452)는 마침내 하, 북연, 북량 등의 다른 이민족 왕조들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439년 중원을 장악하여 화북통일을 이루어냈다. 북위(北魏)는 화북통일 이전부터 유목민 각 부족들 간의 충돌과 갈등을 막기 위해 부족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던 기존의 부락(部落)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조치를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그리고 이들을 다시 선비 탁발부를 수장으로 하는 직속구조 하에 편입하여 명령 체계를 갖춘 강력한 군대로 재편하였다. 이를 통해 북위는 점차 중앙집권적 성격을 가진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특히 북위는 5호 16국 시대의 여타 이민족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정책적으로 적극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의 종교가 아닌 인도, 즉 이민족의 종교인 불교는 북위와 같은 이민족 왕조에게, 철저한 화이(華夷)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족들의 유교를 대체할 아주 매력적인 이데올로기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불교는 북위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한창 잘 나가던 불교는 얼마 되지 않아 일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한족 지식인 최호(崔浩, 381~450)의 화려한 등장 때문이었다. 태무제는 이민족인 자신들이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한족 지식인들의 협조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당시 한족 지식인의 대명사 최호를 필두로 화북의 한인 명문들을 적극 등용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태무제가 이룩한 화북통일을 실제로 치밀하게 설계하고 계획한 이는 바로 최호였던 것이다.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얻은 최호는 이민족 군주 아래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바로 북위를 이상적인 한족 국가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어쩌면 최호는 자신이 비록 이민족 군주를 모시고 있지만, 이 '무지몽매한' 이민족들을 한화(漢化)시키는 것이 자신의 일생일대의 사명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최호는 오랑캐의 종교인 불교를 적극 탄압하라고 태무제를 부추겼다. 공교롭게도 당시 태무제는 날이 갈수록 세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불교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민족의 종교라 막상 밀어 주긴 했는데 그 세력이 커져도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수많은 시주가 쌓이면서 불교사원들이 막대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면세혜택을 바탕으로 세금도 안 내던 이들 불교 교단의 부흥은 국가 입장에서는 재정 수입의 직접적인 타격을 의미했다. 태무제의 귀에 불교 사원에 막대한 자금과 무기, 심지어 여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자꾸 들어갔다. 게다가 태무제의 태자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그의 밑으로 불교세력들이 결집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결국 태무제는 최호의 건의에 따라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벌인다. 444년부터 451년까지 약 8년간의 기간에 걸쳐 행해진 태무제의 폐불(廢佛) 조치는 중국 최초의 국가적인 불교탄압이었으며, 짧지만 매우 가혹하고 강경한 탄압이었다. 이로서 당대의 수많은 불교 사원들은 거의 작살이 났다. 태무제는 불교를 대신하여 도교를 국교화하기에 이르는데, 이 배후에는 오랑캐의 종교인 불교를 탄압하고 중국에서 발원한 종교인 도교를 이데올로기로 삼고자 했던 최호가 있었다.
역사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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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노예무역의 중심지, 히바(Khiva)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라 불리는 중세 도시 히바(Khiva). 그 주변을 점토벽들을 쌓아서 세운 약 10m 규모의 높이, 2.4km 길이의 성벽이 빙 둘러싸고 있다. 바로 히바의 내성인 ‘이찬 칼라(Itchan Kala)’다. 이미 기원전 4세기 무렵 건설되기 시작한 이 성벽은 시대가 바뀌면서 몇 번이고 고쳐지면서 성벽 주위에는 물을 채운 해자까지 생겼다. 동서남북 사방에 위치한 4개의 성문을 통해 이찬 칼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각 성문을 경계로 마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 든다. 히바는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보전이 잘된 봉건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보존된 성벽에 더해 이찬 칼라의 내부에는 건축학적으로 통일성이 돋보이는 50개 이상의 역사적 건축물과 250개가 넘는 고택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히바의 내성인 이찬 칼라는 두 개의 중심축, 즉 남북축과 동서축을 근간으로 구획되었다. 주요 출입문인 ‘아버지의 문’이 서쪽에 있다. 서문을 통해 이찬 칼라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에메랄드 빛 푸른 타일로 덮인 아름다운 미완의 미나레트, 칼타 미노르(Kalta Minor)다. 히바 칸국의 무함마드 아민 칸(Muhammed Amin Khan, 재위 1845~1855)은 당대 서역에서 가장 높은 미나레트를 짓고자 했다. 계획에 따르면 미나레트는 원래 70~80m의 높이로 건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건설 3년 만에 아민 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첨탑은 25m 높이에서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히바에는 칼타 미노르 이외에도 두 개의 미나레트가 더 있는데, 47m 높이의 주마(Juma) 미나레트와, 우즈베키스탄에서 최대의 높이를 자랑하는 57m의 이슬람호자(Islom-Hoja) 미나레트가 그것이다. 미나레트에 올라 바라보는 히바의 전경은 일품인데, 특히 일출과 일몰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서문을 등지고 칼타 미노르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12세기에 완성된 후 17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증축된 요새인 쿠나 아르크(Kuhna Ark)가 자리잡고 있다. 내성 안에 또 하나의 성이 있는 셈이다. 이 거대한 요새 안에는 칸의 거처와 하렘, 조폐소, 병기고, 근위병들을 위한 숙소가 고스라니 남아 있다. 아르크 안에 위치한 11세기에 지어진 여름 모스크(Summer Mosque)는 19세기에 들어와 개축되며 안뜰 전체를 꽃문양으로 장식한 푸른색 자기 타일로 마감하고 기둥과 문은 섬세하게 세공한 목재로 만들었다.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식물을 묘사한 타일과, 붉은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지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찬 칼라 안에는 쿠나 아르크 말고도 칸의 거처가 하나 더 있다. 알라쿨리 칸(Allakuli Khan, 재위 1825~1842)은 쿠나 아르크를 대신할 거처로 이촌 칼라의 동쪽 끝에 토시호블리(Tosh-hovli)이라는 웅장한 궁전을 지은 것이다. ‘돌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궁전은 150개의 방과 9개의 안뜰을 가진 대규모의 건축물로서, 내부는 채색 자기 타일과 스투코, 목조 부조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접견실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있는 중앙 안뜰에는 왕의 유르트(yurt)를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칸은 유목민이었던 조상들처럼 유르트에서 휴식 시간을 즐겼던 것이다. 이찬 칼라의 종교 건축물 중 장식의 아름다움으로 치자면 시인이나 철학자이며, 이슬람교 성인이자 히바시의 수호 성인인, 파흘라반 마흐무드(Pahlavon Mahmud)의 영묘와 주마(Djuma) 모스크가 가장 돋보일 것이다. 14세기에 완성된 파흘라반 마흐무드 영묘는 페르시아 기법을 따라 손으로 직접 채색한 타일로 장식한 돔을 얹은 방이 특히 아름답다. 주마 모스크는 10세기 건물이 있던 자리 위에 18세기 말에 완성되었고 숲을 이룬 218개의 목조 기둥이 장관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러한 목조 기둥들 중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굵기와 받침대도 각기 다를뿐더러 새겨진 무늬 또한 다양하다. 그 중에는 아라비아 문자가 새겨진 것도 있고, 전형적인 히바 왕국의 문양이었던 토종 꽃과 식물의 이미지를 새긴 것도 있어 당시 목공예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성벽 안에는 16개의 마드라사들도 위치하고 있는데, 그 중 대다수는 오늘날 히바시의 역사와 예술, 전통에 관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일부 마드라사는 호텔로 개축되어 운영되고 있다. 많을 때는 약 100명 가량의 기숙학생이 머물며 공부하던 이슬람 신학교가 이제는 여행자를 위한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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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앙아시아의 자디드 운동(Jadidism)과 러시아

오늘날 중앙아시아에는 페르시아어로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 접미사 ‘스탄(stan, ـستان)’을 돌림자로 갖는 5개의 공화국들이 독립해 있다. 보통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렇게 5개의 공화국을 통칭하여 흔히 중앙아시아 5개국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이들 중앙아시아 5개국들의 국경과 민족구성은 모두 소비에트 시기의 유산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이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에 편입될 당시에는 그렇게 분명히 나뉘어 존재하지 않던 각 민족들이, 소비에트 지배기를 거치면서 5개의 독자적인 민족으로 형성되고, 마침내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 안에 각자 독립된 국가를 갖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은 20세기 전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소비에트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인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중앙아시아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에 의한 중앙아시아 지역의 식민 지배는 지역 주민들에게 적지 않은 갈등과 불만을 야기하였다.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책은 처음에는 관용성과 회유성을 띠는 것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식민 지배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러시아인의 이주 정책과 반(反)이슬람 정책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러시아화 정책은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은 러시아의 식민 지배를 이슬람 문명과 문화의 생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고, 특히 젊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러한 현실적 위기로부터 자신들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세기 후반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일어나던 범(汎)투르크주의와 범이슬람주의의 영향으로 무슬림 세계 전체에 밀어 닥친 혁신과 개혁이라는 보편적인 물결은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또 다른 자극제가 되었다. 18세기 이래 대부분의 이슬람 세계는 서구 근대 문명의 도전 앞에서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여 왔다, 이에 무슬림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슬람 자체에 대한 혁신의 요구들이 분출되었던 것이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지식인들은 러시아로 상징되는 근대 세계의 유례없는 도전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중앙아시아 무슬림 사회는 개혁에 필요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개혁의 움직임을 일컬어 ‘자디드 운동(Jadidism)’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종교와 문화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던 이러한 자디드 운동은 사회적 삶의 다른 부면들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이 절박해짐에 따라 무슬림 공동체의 거의 전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에 따라 자디드주의는 점차 무슬람 사회 전체에서 생겨나는 모든 새로운 것을 의미하기 위한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이제 자디드 운동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총체적인 사회 혁신 운동, 다시 말해 중앙아시아의 ‘근대주의(Modernism)’로 자리잡게 되었다. 새로운 사회 집단으로서 자디드 운동가들은 종교와 전통, 그리고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봉건을 타파하고 근대적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개혁을 위한 그들의 움직임은 중앙아시아의 문화나 가치에 대한 재정의뿐만 아니라 기존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의 역할에 대한 재규정을 포함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디드 운동가들의 근대적 기획은 한편으로 대중들에게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지배 집단으로부터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른바 ‘전통주의자들(kadimists)’로 통칭되는 기득권층은 자디드 운동을 이슬람 사회에서 오랫동안 누려온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와 배타적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하였고, 이슬람 원리에서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대항하였다. 대다수의 전통주의자들은 러시아로부터 반쯤 떨어져 있던 당시 중앙아시아 무슬림 사회의 현 상태에 안주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일체의 개혁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한편 러시아 차르 당국과 지역 행정가들도 개혁적인 근대적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무슬림 공동체의 혁신에 대한 요구들을 무척이나 경계하였다. 그들에게 자디드 운동가들의 계몽 활동은 분리주의를 조장하여 제국의 통합과 안전을 위협하는 명백한 정치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자신을 ‘문명의 사도’로 자처하며 중앙아시아의 지배를 정당화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중앙아시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의향이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해당 지역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슬림 공동체의 본질적 개혁을 지향하던 자디드 운동가들은 러시아의 제국의 국익에 어긋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러시아 당국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정 러시아를 크게 동요시킨 1905년의 혁명은 자디드 운동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혁명으로 인한 러시아 본토의 혼란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자디드 운동가들의 활동에 보다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아직 갑작스럽게 닥쳐온 역사적 사태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조직적 토대와 충분한 경험은 없었을지라도, 이들 자디드 운동가들은 새롭게 열린 자유의 공간을 개혁의 또 다른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자디드 운동은 더욱 활발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1907년에 시작된 제정의 반동으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개혁과 민족운동에 대한 제약이 다시 심해졌다. 이로 인하여 많은 자디드 운동의 지도자들이 외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개혁 운 새로운 방식의 학교 교육과 다양한 대중 매체, 연극을 비롯한 문예활동, 그리고 비밀 결사를 통해 꾸준히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갔고, 이러한 제반 활동은 투르크 무슬림들의 민족적 자의식의 형성과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