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난 지도 삼 개월이 넘었다. 그 사이에 자기계발을 할 시간을 가지라는 글들과, 대학에 가면 어떤 일을 할 지에 대한 글들이 잠시 빙글에 반짝거렸다가 사라졌다. 다른 sns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능이 끝났으니 내가 어떻게 놀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할 게 없었다. 내 동생은 나를 의아해했다. “왜 친구들과 놀러다니지 않아?” 귀찮아하니까. 나도 귀찮고 그 치들도 귀찮고. 거기다가 나는 순수예술을 좋아하는 특이 종자라 취미 생활을 공유하는 놈도 없어서. 같이 놀러가봤자 뭘 하지를 못 하거든. 거기다가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당구도 못 쳐, 볼링도 못 쳐...
수능 준비가 지옥같았다는 말은 사실 모든 고 3이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는 않다. 뭐 놀거리가 제한된 학교에서 놀다 지쳐서 지옥같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공부한다고 지옥이었을 놈은 실제 수험생의 1/3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아, 물론 이건 내 상상일 뿐이지. 우리 반이 딱 1/3만 공부하곤 했거든.
난 그 공부하는 축에 속했다. 매일매일 지옥같은 삶을 보냈다. 학년 초에는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곤 했다. 체력이 방전되면서 아침에 졸아버리는 일이 잦아졌고, 길어야 한 시간이던 졸기식 낮잠은 어느 새 네 시간으로 늘어났다.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계속해서 두 시까지 공부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았다. 나는 공부 시간을 열두 시까지로 줄이는 대신 쉬는 시간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지 않자 오히려 공부하는 절대량이 늘어났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자정까지만 공부해도 무려 14시간이라는 공부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 시간 내내 집중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래도 책이나 인강을 보고 있는 것은 당연히 노는 것보다는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수능이 코앞인데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쉬고 싶을 때면 수능특강을 읽었다. 수능특강 정리 노트, a.k.a 초록책은 책을 돌려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많이 없애 주었으며, 나올 만한 문장들을 추가시켜서 더욱 더 시간을 때울 수 있게 하였다. 또 수학 문제를 풀다가 지치면 설민석의 한국사 강의를 들었다. 쉬는 시간에는 좋아하는 공부, 공부 시간에는 어려운 공부. 그러다가 막바지에는 시간에 맞춰서 모의고사도 풀었다. 학교에 등교하면 잠 깨는 용으로 물리 평가원 풀고, 시간 남으면 단어 외우고. 국어 풀고, 영어 빈칸책 풀고, 수학 풀고, 밥. 영단어 외우고, 영어 풀고, 초록책읽기시간 혹은 물리/생물 평가원, 한국사+탐구 풀고, 오답체크 시작. 저녁식사 하고 물리/생물 평가원. 야자시간 시작하면 수학 풀고, 야자 끝나면 과탐.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당시 반에서 남아 있던 친구들도 거의 비슷한 일과를 보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사람 할 짓은 아니었다.
이 중에서 정말 괴물같이 공부만 하는 친구가 있었다. 주말에 내가 먼저 교실 문을 열면 30분쯤 뒤에 들어와 공부를 시작했고, 밥 먹는 시간을 줄이려 저녁식사까지 두 끼를 도시락으로 채웠다. 나도 한 끼는 도시락으로 채웠지만 두 끼
아니었다. 두 끼를 도시락으로 채운 사람은 전교에 이 친구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