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을 되찾는 심리와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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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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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움을 되찾는 심리와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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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외로운 세상의 사랑
개봉했을 때부터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냥 넘어갔던 영화. 스칼렛 조핸슨이 목소리 연기만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영화다. 근미래, 디지털에 익숙해져서인지 아날로그 감성의 손편지를 대신 써서 보내주는 기업이 있는 시대. 편지 대필작가인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OS 사만다를 구매, 설치한다.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사만다와의 관계에 빠져들며 연인사이가 되는 테오도르. 외로움에 마음이 허하던 그에게 웃음 짓는 일상이 돌아온다. 사만다는 생각하고, 걱정하고, 질투한다. 자기 몸이 없다는 것을 애석해하며, 테오도르와의 관계 뿐 아니라 네트워크망의 여러 정보를 통해 배우고 진화하며 감정을 알아간다. 그 모습에 흥미를 느끼며 사만다의 성장에 흐뭇해하고 애정을 품게 되는 테오도르. 공교롭게도 테오도르의 전아내 역시 '성장'하는 캐릭터였다. 아내 캐서린은 테오도르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몸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모습까지 나눈 사이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서로 간극이 생겨 별거 중이고, 늘 함께일 것만 같았던 아내와 헤어진 후로 테오도르는 공허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영화 내내 인간적 따스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붉은 톤이 흐른다. 그리고 차가운 단절이 연상되는 장면에는 푸른 톤이 흐른다. 테오도르의 옷이 유독 레드인 것은 그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진짜 살아있는 존재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만다와 함께 하는 장면은 따스한 붉은 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만다를 통해 인간의 가장 따스한 감정인 사랑을 느끼는 테오도르. 그들은 함께 걷고, 음악을 듣고, 같은 거리를 보며(카메라를 통해) 추억을 만들어간다. '사람의 몸'이 득시글한 해변,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사람을 관찰한다. 몸이 있다는건 어떤 느낌인지? 몸이 있다면 만질 수 있을텐데- 사만다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테오도르와 '닿고' 싶어한다. 매일 함께 하고, 누구보다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몸이 없기에 아쉽다.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반면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에 만족한다. 친구들에게 연인으로서 소개하기도 하고 같이 더블 데이트를 즐긴다. 세상엔 os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외로움의 세상이다. 잘 통하는 것 같으면 프로그래밍된 가짜라 하더라도 마음을 내주는 서글픈 세상이다. 영화는 사만다의 존재를 모호하게 그린다. 인공지능으로 학습하다보니 정말 '감정을 흉내내는 것' 이상으로 인격체가 된건지, 그저 아주 인간 흉내를 잘 내는 프로그램일 뿐인지가 헷갈린다. 사만다의 다정함과 유머감각, 사랑스러움은 인공지능도 영혼이 깃들어 사람에 준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을만큼 매력적이다. 하지만 영화 중간중간 테오도르는 '이건 가짜'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자기 작업물을 가리켜 '이건 편지일 뿐이야'라고 한다.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성을 가진 그는 많은 이를 감동케 하는 편지글을 쓰는데, 직장 동료는 늘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너무 감동적이라고. 테오도르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그건 그냥 (가짜) 편지다.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엔 마음이 없다. 의뢰자의 몇몇 사진 자료나 에피소드를 보고 작가가 그럴싸하게 다정한 어투로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사만다 역시 마찬가지다. 컴퓨터 속 방대한 자료를 우수한 연산능력으로 스캔하여, 사용자가 좋아할만한 편지를 매순간 쓰고 있는 셈이다. 이건 편지일 뿐이야. 이건 컴퓨터일 뿐이야. 그럼에도,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마음을 주고, 사랑하고, 집착한다. 마치 사만다가 사람인 것처럼. 테오도르가 가짜로 지어서 쓴 편지에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처럼.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테오도르가 즐기는 게임에 등장하는 한 캐릭터는 아이의 모양새를 하고 욕을 날리면서도 도움을 주는 귀여운(?) 녀석이다. 주거니 받거니 말도 하지만, 가상 세계 속 꼬마는 푸른색에 갇혀서 등장한다. 아무리 진짜같아도(그래픽이 실감나건, 목소리가 자연스럽건), 가짜는 가짜다. 그런데 그 가짜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교류가 일어나면, 그리고 공감 받는 것처럼 느끼면, 애정을 주는 이들이 있다. 테오도르처럼. 전아내가 테오도르에게 '당신은 진짜 감정을 감당하질 못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진짜 관계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외로움을 채우고자 가상의 관계를 만들려 하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조금 쓸쓸해지기도 하고. 하지만 또 만나는 사람이 많다고 다 의미 있는 관계도 아닌거고. 거참 쉽지 않다. <HER>는 사람과 사람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외로움에 관한 영화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감정을 얽어가며 사는 것이 사람다운 것이라고. 그 사람끼리의 부대낌이 너무나도 그립고 절실해서, 가짜임을 알아도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늉에 쉽게 손내밀게 된다고. 그러니 요즘처럼 '이미지로 소비하는 세상'에선 더욱 실제 사람의 손을 놓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SNS 등의 가상관계, 점점 리얼해지는 게임 등 가상월드. 관계도 가상으로 맺고, 텍스트 교류로 '관계 맺고 있다'고 착각하는 세상. 온기가 아닌 차가운 기계를 터치하며 만나는 관계는, 허상이 아닐까? 하지만 그 교류 속에서 느껴지는 따스함-그것이 연기라도-에 매달리게 되는 그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사만다가 그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덧. 스칼렛 조핸슨 목소리 너무 좋다.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atship&logNo=220909743054
<육아>달래는 울음 기다리는 울음
울음은 아기가 원하는 바를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 단계에선 울음, 옹알이, 표정, 몸짓이 아기의 언어나 다름없다. 그래서 엄마는 아기의 울음이 뭘 뜻하는지에 늘 신경을 쓰고, 되도록 빨리 원인을 알아내어 불편을 해결해 주고자 한다. 옹알이 단계를 거쳐 말을 하게 되면, 제법 대화가 통해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말이 통한다고 느끼는 것도 잠시, 자기 맘대로 안된다고 울어제끼는 아이를 보면 엄마는 곧 고민에 빠진다. 우는걸 달래야 하나? 공감해주라던데... 버릇 없어지지 않을까 등. 달래야 하는 울음과, 지켜봐야 하는 울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아기를 키우다보니, 아이의 울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하나는 살아 남기 위한 <생존울음>, 다른 하나는 '내 맘대로 세상'을 지키기 위한 <왕자/공주울음>이다. 생존울음-신체적, 정서적 안전을 찾기 위한 울음 배고픔, 배변으로 찝찝함, 아픔, 춥거나 더움, 놀람, 공포, 두려움 등이 느껴질 때의 울음이다. 낯설고 불쾌하고 신체에 해가 되는 상황 뿐 아니라, '세상에 혼자 남은 것만 같은/버림받은 것 같은' 정서적 위험이 느껴지는 경우도 포함한다. 아이에게 자기의 생존을 해결해주는 존재(양육자)에게 거부 당한다는 느낌은 즉각 생존의 위협과 연결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즉각 반응을 하여 불편을 최대한 해결해주고, 안심시키면 된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지 않을 때 우는 것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우는 왕자/공주 울음'이지만, '너 이러면 버리고 갈거야'라는 말을 듣고 우는 것은 엄마가 자길 버릴까봐 두려워서 우는 것이다. 그런 협박은 당장 잘 먹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생존을 위협 받는다는 것은 아이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수면교육에서 사용한다는 '울려서 재우기'에 반대한다. 졸린 것, 생소한 감각, 어둠 등에서 아기는 낯선 느낌에 휩싸인다. 그때 우는 울음은 생존과 관련된 울음이다. 그 울음을 방치한다는 것은 아기에게 생경한 감각에 낯설고 무서워 울다가 포기하는 과정을 겪게 하겠다는 뜻이다. 생존울음을 의도적으로 방치한다는 것은 생각해볼 일이다. '내 맘대로 세상'을 지키기 위한 왕자/공주울음 새로운 동작 등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아 우는 짜증 섞인 울음, 자기 욕구와 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환경(사람이나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좌절하여 우는 울음 등이 이에 속한다. 아기는 자기의 몸이 마음과 달리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늘 발견한다. 눈 앞의 장난감에 손이 잘 닿지 않고, 이동할 방법은 요원하다. 그러면 짜증이 나고, 울음이 터져나온다. 히잉-하며 짜증 섞인 울음을 울다가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움직거리고 이를 반복하기도 한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울음 한 번 울어주고, 끙끙대며 몸에 힘을 주어 시도하는, 나름 열심인 적응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울음에는 '아이고 불편해~?'하며 바로바로 안아주는 등 흐름을 끊기 보다는 만져주고 격려하거나, 멀리 있는 물건을 조금 가까이 가져다 주는 등 도움을 주는 편이 낫다. 아기에게는 소중한 연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공감할게 뭐가 있나 싶을지 모르지만, 아기용 공감은 이런 순간에 이루어진다. 아기 뿐 아니라 좀 더 큰 아이도 마찬가지다. 숟가락질이 잘 안된다고 짜증내며 울더라도, 그 짜증이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부모가 대신 해주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해내고 기뻐할 기회를 빼앗는 것과도 같다. 단, '너 혼자 해'하고 팔짱 끼고 보는 스파르타 훈육이 아니라, 지지하는 말이나 어깨 등에 손을 대고 있는 등 무언의 격려 언어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좋다. 주절주절 말할 필요는 없다. '혼자 해봐야 늘지'라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도 아이에겐 경직된 엄격함으로 느껴질 뿐이다. 교훈이나 메세지를 전달하려 하지 말고, 아이가 도전하는 그 순간에 함께 하며 과정을 지켜보고 격려하면 된다.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우는 왕자/공주울음은, 전에는 응애-만 해도 양육자가 다 해결해주던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면서 겪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좌절의 증거다. 가슴 벅찬 일이다. 내키는대로 하고 싶어서 우는 왕자/공주울음도 있다. 동생의 장난감을 빼앗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고, 날이 추운데 샌들을 신겠다고 우기는 등, 뭘 배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고 그저 떼쓰는 것으로만 보이는 울음이다. 그야말로 버릇없는 왕자노릇 공주노릇이다. 하지만 이 때에도 아이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세상이 내 맘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 이제는 내맘대로 왕국의 왕좌에서 내려와 때론 참고, 양보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소중한 기회다. 타인 혹은 세상의 규칙, 가정 내에서의 규칙이나 상황 속에서 욕구가 좌절될 때 우는 것이기에, 이 울음은 사회에 잘 적응하고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가장 초보적인 배움의 장이 열렸다는 신호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직접적인 훈계를 해봤자 이해하지 못한다. '엄만 맨날 잔소리해!'로 귀결되기 일쑤다. 그리고 기싸움으로 번진다. 그래서 필요한게 '욕구 읽어주기'다. 아이의 마음과 일종의 딜을 하는 셈이다. 어른도 맘대로 안될 때 막연히 짜증이 나다가도, '지금 내가 이래서 서운하구나/화가 났구나/슬프구나'등을 인지하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가. 아이도 마찬가지다. 어른도 공감을 받은 후 충고가 귀에 들어오듯, 아이도 공감 받은 후에 도덕이나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들을 준비가 된다. 생존울음은 되도록 즉각 반응하고 달래야 하는 울음이다. 반면 왕자/공주울음은 지켜봐야 하는 울음이다. 아이가 지금 뭘 느끼고 있는지, 도전 중인지 이기심을 채우려고 떼쓰는 중인지 등을 관찰하고 나서 반응해야 하기에 지켜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두 울음에 대한 반응을 반대로 하거나(생존울음은 방치하고, 왕자/공주울음을 받아줌), 일관성 없이 반응하거나, 공감없이 가르치기만 하는 식으로 반응하면 울음의 양상 또한 혼란스러워지고 '종잡을 수 없게' 된다. 떼쓰는 아이를 데리고 상담 받으러 가면 열이면 열 '공감'해주라, '일관성 있게 훈육하라'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울음의 종류를 파악하고 감정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일 것이다. 한발짝 물러서서 차분히 아이를 관찰하는 잠깐의 짬이, 육아를 보다 즐겁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보다 건강한 양육을 위해
때로는 내 결핍이 아이에게 스며 아이만의 빛을 바래게 한다. 5개월에 들어서는 딸 보는 재미에 푹 빠지고, 동시에 삭신이 쑤셔 '아이고~'를 달고 사는 엄마가 되었다. 아기를 보면 참 예쁘고 신통방통하다. 고사리손을 연신 들여다보고, 옹알이에 오구오구 맞장구치고, 몸을 모로 세우더니 어느새 뒤집는 것에 경탄한다. 다신 오지 않을 이 순간이 아쉬워 사진도 많이 찍어, 만든 앨범만 너댓개다. 사진 앨범을 만들고 보고 또 보면서, 아이를 대하는 것에 작용하는 내 무의식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유독 아이에 관련된 부분은 그렇지가 않다. 아이를 품고 있을 때의 초음파 사진 및 일기, 백여일까지의 사진과 코멘트를 모아 포토북을 만들었다. 많은 엄마들(특히 첫 아이 엄마)은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유난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사진을 많이 남기려는 이유는, 의식적으로는 아기에게 훗날 '엄마가 날 이렇게 사랑했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결핍감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고 있다. 즉, 애엄마가 된 지금에도, 나는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고, 원가족이 정서적으로 따스하지 않았다는 것이 슬프다. 그래서 가족의 따스함과 사랑을 아이가 느끼게끔 하는 것이 엄마인 나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겉보기엔 훈훈한 엄마의 정성이지만, 그 뒤에는 내가 부모에게 받지 못한 것에 집착하며 이를 보상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결국 나의 결핍으로 아이를 키우는 셈이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주면서 당연히 좋아할거라 여기는 것이라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게다가 아이가 여기에 별 반응이 없을 때, '(나는 이렇게 해주는데) 너는 왜 좋은 줄을 모르니-!'라는 불필요한 마음을 품을 위험이 있다. 잘 먹어야 한다,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등 저마다 '꼭 이것만은 해주겠다'고 여기는게 있을 것이다. 혹은 '난 죽어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거야'일수도 있다. 나의 경우라면 '가족의 따스한 추억을 최대한 느끼게 해주겠어' 또는 '아이가 잘 할때만 관심 갖는 일은 절대 없을거야' 같은 것을 꼽을 수 있겠다. 그것이 좋은 부모, 좋은 육아를 향한 무언가로 보이더라도, 결핍을 바탕으로 아이를 대하다가 이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이를 보고 화가 나거나 서운하다면, 그런 결심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아이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을텐데도, 내가 바라는 것을 줘놓고 아이도 만족하길 기대하는 것은, 감정의 강요이자 아이를 숨막히게 하는 일이다. 교육에 미련이 있는 부모가 아이에게 최선의 교육환경을 주면서 아이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넌 이렇게나 지원해주는데도 왜 이것밖에 못하니?'라는 원망감을 가질 수 있다. 사람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부모는 아이를 통해 내 결핍을 채우려 하지만, 아이는 내가 아니기에 애초에 그 논리(내게 중요한 것이 아이에게도 중요하다)가 성립이 불가능해서 그렇다. 부모 입장에선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을 줬는데 아이가 시큰둥해 보이니 서운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를 키울 때 배제해야 하는 가장 큰 것은 양육자의 결핍이다. 부모자식간의 갈등 중 많은 부분이 부모의 기대에 아이가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발생한다. 부모 자신의 결핍이 클수록 기대도 커지고 행위에도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아이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이에게도 상처나 결핍이 생긴다. 결핍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어차피 완벽이란 있을 수 없기에 아이는 어딘가에서 서운해할게다. 하지만 내 문제를 아이에게 투사해서 거기에 또다른 서운함을 더할 필요는 없다. '내 아이만은 이런 서러움을 겪게 하지 않고 최대한 꽃길만 가게 하고 싶다'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으로 하는 행위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가장 원치 않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본인은 부인할지 모른다. 자기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키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부모는 흔치 않다. 오히려 '난 아닌데?'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일수록 나만 옳다는 식의 생각에 빠져 아이를 휘두르면서도 스스로 잘한다 착각하는 독선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가진 결핍을 들여다보고 상처를 치유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 자기성장이 필요하다. 아빠도 엄마도 한 사람으로서 결핍된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평소에 난 이것만은 꼭 (안) 하겠어!하고 다짐하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찾아보고 내게 <무엇이> <왜> 중요한지 살펴보길 권한다. 좋은 부모 되기, 훌륭한 육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치열한 자기반성과 행동교정을 위해서도 아니다. 자기 마음을 돌아보고, 인정하고, 스스로를 안아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그 치유를 통해 자기성장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을 거치면 '그럭저럭 괜찮은' 양육에 한 걸음 다가선다. 내 결핍은 내 문제로 남겨두자.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부딪힐 상대는 아이가 아니라 내 부모다.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마음이 백지처럼 펼쳐져 있어 아빠 엄마와 새로운 별도의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만 염두에 둔다면, 아이와 보다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오뚝이
흔들흔들 이리 휘청 저리 휘청이는 오뚝이. 센 힘으로 밀면 휘꺼덕 할 것처럼 뒤로 제껴지면서도, 휘청대다 기어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중심을 잡는 오뚝이를 보고 있노라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천진하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어쩜 그리도 강인한지. 역경에 처해도 넘어지지 않고 다시 서는 이들을 보고 우리는 흔히 오뚝이같다-고 말한다. 드라마틱한 역경이 아니어도,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몸과 마음을 흔드는 일들에 강인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내 마음에도 오뚝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뚝이를 서있게 하는 힘은 중력이다. 물질계를 이루고 있는 힘 중 하나인 중력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오뚝이 내부에는 이 중력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무게추가 있다. 무거운 쇳덩이는 동그란 밑바닥에 고정된 채로 무게중심을 잡고 있어, 오뚝이가 옆으로 기울어도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둥근 바닥 탓에 자연스레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게 된다. 아래에 고정된 무게추와 모나지 않고 둥글려진 바닥이, 오뚝이를 다시 서게 하는 비결이다. 마음에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무게추는 무겁고 아래에 있을수록 굳건하다. 그리고 모나지 않은 둥글림, 원과 구의 형상은 우리가 흔히 '사람 참 둥글둥글해'라고 할 때 떠올리는 긍정성, 낙천성, 포용력, 이해심, 배려 등과 관계가 있다. 무게중심이 잡힌 사람은 외부의 일, 남의 말 등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남이 좋다고 하는 것을 분별없이 따라하지도 않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도 않는다. 설령 한다 하더라도 자기화하는 소화력이 있어, 내 양분으로 사용하지 괴로움의 재료로 써먹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볼 때, 외부의 것이 내 안에 들어와 날 공격하면 내 면역력이 작동해야 할 바이러스이지만, 날 먹이고 키우는 양분이 되면 소화해야 할 귀한 음식이다. 몸의 면역세포가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구분 지어 버릴건 버리고 취할건 취해야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내 것과 아닌 것을 경계 지어 버릴 것과 받아들일 것을 거를 줄 알아야 마음의 건강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나와 너의 이원성을 극복하고 전체성을 찾는 영적인 목표가 인간에게 있지만, 융이 말했듯이 대극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전체의 합일을 이룰 수 없다. 육체가 피부와 감각으로 나와 외부의 경계를 짓고, 면역 시스템이 나-나 아닌 것을 구분해서 날 보호하고 건강을 지키는 것은, 경계 속에서 나를 찾는게 우선이라는 삶의 메세지이다.) 무게추와 둥근 밑바닥에 비유할 수 있는 마음의 무게중심과 포용의 둥글둥글함은, <소화>에도 비유할 수 있다. 외부의 것을 받아들여 나만의 버전을 구성해가는 무게중심의 힘은 소화력에 해당한다. 소화하고 흡수하여 내 몸에 양분을 공급하듯, 내 마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설령 불량식품이 들어오더라도 뱉을 것은 뱉고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다. 위장도 상한 것을 먹으면 탈이 나는데, 이 또한 '내 몸에 해가 되는걸 알아보는 힘-위장이 설정한 내 기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게중심이 잘 잡힌 튼튼한 마음은 상한 생각이 나를 공격하면 탈이 난다고 신호를 보내고, 다시 토해내 거부할 수 있다. 늘 다 좋게 여겨 즐겁기만 한 것이 건강한게 아니라, 상한 것이면 상했다고 슬퍼하고 성도 내고 토해내기도 할 수 있는게 건강한 것이다. 부모가 잘못된 생각을 주입했다 하더라도, 무게중심이 잡혀 있다면 언젠가 '이건 아니야'라며 뱉을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궁극의 소화력인지도 모른다. 부모로부터 주입받고 전수받은 생각은 너무나도 강력하게 작용하기에, 나다운 중심을 잡기 위해 소화하고 넘겨야 할 가장 도전적인 소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생 과제로 삼는다. 모방의 아동기-부모라는 음식을 섭취하고 그대로 흡수하는 시기-를 지나 판단의 사춘기가 되면 '요란스러운 소화'가 시작된다. 여태 먹었으니, 이젠 자기답게 소화를 좀 해보겠다며 엉성하게 거르고 흡수하는 초기 소화단계인 셈이다. 그래서 사춘기는 내적 부대낌이 심해지고 부모에 반발하며 자기를 찾느라 애쓰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된다. 부모는 아이의 변화를 '나름의 소화'로 이해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 아기 때 이유식을 먹이던 그 기분으로, 정신적으로 소화력을 기르는 중인 자녀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탈이 덜 나지 않을까. 부모의 태도는 아이가 오뚝이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되고, 아이는 그 오뚝이를 가지고 세상에 더 잘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반면 둥글둥글함은 소화 이전의 섭취와 관련이 있다. 오뚝이의 밑면이 둥글기에 제자리에 돌아오기 쉽기도 하지만, 휘청이기도 쉬워진다. 그것은 외부의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힘과도 같다.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능동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삶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은 긍정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그래서 나와 반대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주춤할지언정 수용할 수 있다. 그러니 겉으로는 '둥글둥글한' 것으로 보일만하다. 하지만 그게 '모든걸 다 받아들여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존중하여 '오뚝이처럼 넘어가주기는 하지만' 안으로 들인 후 내 무게중심의 소화력으로 거를 것은 걸러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받아들이는 힘과 버리는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작용하는 셈이다. 이 균형이 깨지면 소화력과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신체 반응이 나타난다. 나는 겉으론 수용적인 태도를 취했었지만 나만의 필터링이 강하여, 나와 다른 견해를 진심으로 소화하지 않고 내적으로 튕겨냈었다. 그러다보니 소화도 안 시킬 것을 잔뜩 받아들인 꼴이 되어, 신체적으로도 조금만 과식하면 소화가 안되어 위가 아팠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수용의 폭은 늘면서도 아니다 싶으면 표현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마찰 역시 껄끄럽더라도 받아들이는 힘이 생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위장질환이 현저히 줄었다. 예전엔 일주일에도 몇 번이고 위가 아파 잠을 못 이루었다면, 요새는 몇 달에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다. 위장병을 달고 살았던 시기의 나는, 사람들의 반응이나 날 어찌 생각할지가 두려워 속으론 거부감이 들어도 말도 못하고 뒤에서 괴로워하며 혼자 끙끙댔다. 지금은 그 두려움을 극복하여 직접 부딪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떳떳함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기분 좋은 것, 기분 나쁜 것도 경험의 일부로 받아들여 담백하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의 나라면 계속 신경 쓰면서 쟤가 잘했네 내가 못했네 해가며 괴로워 했을 것이다. 지금은 엔간한 것을 <그럴 수도 있음>의 영역에 두어 감정도 삶도 담백하고 단순해져서 행복지수가 올라간 상태다.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심적 변화와 신체 증상의 완화가 함께 하는 것을 체험하니 놀랍다. 이 역시 내 오뚝이가 건강해지면서 생겨난 변화다. 심신의 건강을 위해, 오뚝이를 우뚝 세우고 적극적으로 가지고 노는 일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의 무한한 유한성을 묵상케 하는 모래시계에 이어, 오뚝이도 참으로 훌륭한 물건인 것 같다. 원문 :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atship&logNo=220797817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