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처음과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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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ta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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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처음과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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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장재철 대위(3)
재철은 근무 교대와 동시에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그는 웬만하면 비행정을 이용하지 않았다. 꼭 이용해야 할 일이 있으면 비행정 택시를 타는 편이었다. 235-5 구역은 서울에서도 가장 조용한 편이었다. 미우와 재철은 이 구역에 있는 비빔밥집 ‘마루’에서 자주 만났다. 미우는 밥을 먹고 난 뒤 나오는 매실차를 특히 좋아했다. “많이 기다렸어? 퇴근하는데 출동이 하나 떨어졌지 뭐야. 눈치 보다가 거기서 바로 여기로 왔어.” “괜찮아, 많이 늦은 것도 아닌데, 뭐.” “미우야, 달왕복선 대기 확정이야. 빈자리가 없대.” 지난 2146년 터키 월드컵에서는 달 표면에서 준결승전과 결승전 경기를 볼 수 있도록 했는데, 그게 달 여행사 주장대로 대박났다. 이번에 두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 까닭도 바로 달표면에서 축구 경기 관람이라는 상품 때문이었다. “우리 여행 취소하는 거야?” 미우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구 밖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재철은 경비대로 발령나기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주 비행사였다. 재철에게 달 여행이라 해서 남다를 게 없었다. “추가 요금이라도 내고 갈까?.” “추가 요금? 그거 내면 갈 수 있어? 얼마나 더 내는데?” “우리들 달 여행 비용이 모두 7만 달러니 2만 달러 정도 더 내면 돼.” “아이쿠! 9만 달러면 내 일년치 월급이잖아. 그런데 오빠가 무슨 돈이 그렇게 많다고?” “응. 나 고백할 게 있는데.” “촌스럽게 여기서 지금 프로포즈하려고? 호호” “은하탐사선 선구자호 알지?” “응, 10월에 간다며? 그게 왜?” 미우는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설마 오빠가?” “응, 나도 거기 가. 얼마 전에 결정됐대.” “…….” “말도 안 하고 지원해서 미안. 하지만 탐사대원으로 지원하라는 건 바벨회 명령이었어. 설마 내가 뽑히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그런데 내가 뽑혔다는 거야.” 미우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덜썩거렸다. “변명하지 마. 아무리 바벨회 명령이래도 할 게 있고, 안할 게 있지. 그걸 덥썩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어떡해? 내 생각은 조금도 안들었어?” “내가 뽑힐 거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지금이라도 포기할 수 없는 거야?” “우린 군인이잖아.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어쩔 수 없어.”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뭘 후회하는데?” “오빠한테 바벨회 소개시켜 준 거.” “다들 혼자 사는데. 뭐.” “물론 나도 결국 혼자 살 거지만, 이렇게 빨리 오빠랑 떨어질 줄 짐작도 못했어.” “미우가 먹고 사는 건 걱정 안해도 돼. 좀 있으면 30년치 연봉이 일시불로 나오거든.” “그거 다 나 줄 거도 아니면서 뭐.” 재철은 이번 월드컵이 끝나면 350만 달러를 받을 예정이었다. 선구자호 탐사대원들은 30년치 연봉에 특별 보상금을 합쳐 일시불로 받기로 돼 있었다. 그는 돈 욕심은 없었다. 사실 재철은 두 달 전에 보건국으로부터 2세를 생산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는 선구자호 탐사대원으로 선발되기 전이어서, 별 생각 없이 정자를 제공했지만, 탐사대원에 뽑히고 나서는 괜히 찜찜했다. 그는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은 2세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아이 엄마에게 돈을 물려주기로 했다. 미우에게도 줄 수 있을 만큼 다 줄 작정이었다. “추가 요금을 내도 좋아. 오빠랑 같이 꼭 달에 가고 싶어.” (제3장 끝)
제3장 장재철 대위(2)
사람들은 월드컵 경기보다 아이파(IFA; 국제축구협회)가 벌이는 도박에 열중했다.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대위님, 그러고 보면 여태껏 배당률이 가장 낮은 국가가 우승했던 적은 없었군요. 지금이라도 대위님 따라 걸까요?” “그래도 배당률이 제일 낮은 팀을 고르기 마련이죠. 돈을 걸 때는 본전이 생각나잖아요.” 월드컵은 64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이변이라 할 만한 결과도 대회 때마다 나왔다. 돈벼락을 맞는 이도 생겼지만, 전 재산을 날리는 이는 훨씬 더 많았다. “첫 경기가 일본과 한국이에요. 뻔한 결과겠지만. 배당률은 뭐 그래도 갈 거 같군요.” “대위님도 참, 당연한 걸 얘기하시네요. 이제 와서 배당률이 변할 리 없죠.” “저번 월드컵 기억 안 나요?” 재철은 지난 2146년 터키 대회에서 벌어진 총격전을 떠올렸다. 그 사건은 베팅 마감을 2시간 남겨 두고 우승 후보인 프랑스와 브라질 선수들 사이에 벌어졌다. 이때 선수 11명이 사망했다. 그 중 7명은 프랑스 주전이었다. 그 전에도 이런 사고로 경기 결과가 뒤바뀌는 일이 가끔 있었기에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곳에서는 경계가 무척 심엄했다. 선수들조차 레이저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터키 대회에서 일어난 사고도 이 때문이었다. 축구란 게 몸싸움이 잦은 경기라서 선수들 사이에는 늘 일촉즉발이라 해도 될 만한 긴장이 감돌았다. 선수들끼리 벌어진 시비는 곧바로 총싸움이 되곤 했다. “그건 그때 일이고요, 이번에는 어림없을 거예요. 팀마다 경호원들이 12명씩이나 붙었다잖아요.” "김 중사 말대로 되겠죠. 그래도 우리나란데, 빼먹으니 좀 아쉽네요.” “한번 걸어보시게요? 대한민국 우승이면 현재 배당률은 82.37배입니다.” “그래도 생각보단 낮네요.” “스트라이커도 없고 감독도 신통치 않은데, 첫판 상대가 일본이라서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좀 있나봐요.” 김 중사가 바라보는 PTV에 아이파 로고가 선명한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김 중사한테 들어온 특별 정본데요.” “다들 하잖아요. 전 세 번에 100달러짜립니다. 솔직히 전 월드컵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거든요.” 1달러도 아끼는 김 중사가 1,300달러나 건 일이었다. 2148년 특별 국제의회에서는 몇몇 의원들이 월드컵 베팅액을 제한하려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지만, 아이파에 줄을 댄 몇몇 의원들이 나서는 바람에 부결되었다. “아니, 이게 뭐죠! 세상에, 일본 배당률이 8.57배예요! 점점 치솟고 있어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거죠?” “말이 보살이라더니, 일본팀 정보를 확인해 보면 어떨까요?” “대위님이 확인해보실래요? 전 돈 없거든요.” “월드컵 뉴스 하나라도 돈 아닌 게 없군요, 허허” 재철은 PTV에 자기 아이디를 입력하고 ‘일본 월드컵 대표팀’을 입력했다. 200달러 기사가 하나 있었다.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긴 한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색 하나에 200달러라니?.” “대위님이 좀 확인해주세요?.” “기왕에 약속했으니 한번 보죠, 뭐.… 이게 뭐죠? 일본 대표팀 테러 발생! 다카하시, 노무라, 이시이가 죽었대요. 또 네 명이나 부상당했고. 세상에 어떤 놈들이? 감독마저도 물러났어요.” “일본 우승에 800달러나 걸었는데, 이게 뭐죠?” “표준시 10시 53분,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한 연습장에서 호텔 웨이터 이바니치가 마지막 훈련을 하던 일본 대표팀을 공격했다. 그는 평소 경호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팀 훈련장도 마음대로 방문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쓴 모자 속에는 레이저총이 있었다. 경호원들 반격으로 이바니치는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하지만 다카하시, 노무라, 이시이는 즉사했고, 부상당한 선수 네 명도 출전하기란 불가능하다. 일본 대표팀 감독인 페드로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일부에서는 페드로 사임에 불공정한 거래가 있다고 의심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오랜 라이벌인 대한민국과 벌어질 1차전도 승리하지 못할 것 같아 페드로가 꽁무니를 뺐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김 중사는 머리를 쥐어 뜯어며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발길질을 해댔다. 이 정도면 그가 일본에 건 800달러는 날아가버린 셈이었다. “진정해요, 김 중사. 화낸다고 되무를 수도 없어요. 그런데 도대체 누가 한 짓일까요?” “러시아 치안도 허술하고, 마피아 녀석들은 돈이라면 뭐든 다 하잖아요. 아마 그 웨이터 녀석이나 경호원들 모두 돈 엄청 받아쳐먹었을 거예요. 그놈들에게 뭔가 엄청난 걸 보장해줬나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와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다니.” “일본이 탈락한다면 누가 이익을 볼까요? 마피아가 이 사건 배후에 있다면? 그럼 마피아들은 한국한테 베팅했을 거예요. 일본만 이기면 한국도 대진운이 좋으니 해볼 만하잖아요. 이 정도면 한국이 8강 이상으로 올라갈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한국 배당률 함 볼래요?” “이런! 56.2배로 떨어졌어요. 아이파 감사국에서 알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이번 월드컵 베팅액이 모두 얼마죠?” “잠시만요. 이런! 이 자식들 너무하는군. 이것도 50달러짜리군요. 어랏! 페드로가 한국 팀으로 갔어요. 그럼 한국도 충분히 해볼 만해요. 이 양변 임기응변은 우주 최고라고들 하잖아요. 참 아까 베팅 총액을 물었죠? 59조 달러를 조금 넘어요.” “김 중사, 만약 한국이 우승한다면 총배당금이 어떻게 되죠?” “일단 우승팀 몫이 15%니까, 가만 있자… , 한국이 우승이라도 한다면 9조 달러쯤 되네요. 마피아들은 1억 달러만 베팅해도 최소한 50억 달러는 가질 수 있겠는데요” “베팅 마감이 얼마 남았죠?” “표준시로 12시에 마감이에요. 43분 남았어요, 대위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본에 걸었던 건 잃은 셈치고 한국에 1,000달러 정도 걸어보세요. 나도 2,000달러 걸게요.” “접수가 잘 될까요? 세상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한국쪽으로 베팅이 엄청 몰릴 텐데요.” “김 중사도 참, 추가 요금을 내면 되잖아요. 돈이면 모든 게 다 되는 데요 뭘. 우리 베팅 금액이 모두 3,000달러니까 300달러를 내면 대기 시간 없이 바로 처리돼요.” “너무 아깝잖아요.” “그럼 기다려볼까요. 자칫하단 베팅 기회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두 시간 남았다면 나도 추가 요금 안 내고 버텨보겠지만 40분 남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나중에 1,100달러 따로 드릴 테니 제 것도 같이 걸어주세요.” “아니에요, 내가 3,300달러 줄 테니 김 중사 계정에서 다 걸어요 .” “니콥 한 잔 값으론 너무 많은데요.” “당첨금 받으면 내 걸 그만큼 챙겨주면 되잖아요, 내가 김 중사보다 두 배란 것만 잊지 않으면 돼요.”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야, 헤헤”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한국이 우승할 거라 생각하고 베팅한 건 아니니까요. 제아무리 마피아들이라 해도 승부 결과를 제맘대로 만들기란 어렵죠.” 사실 마피아가 개입했다고 속단하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잖았다. 재철도 베팅 상황을 다시 생각했다. “김 중사, 잠깐만요! 진짜로 마피아들이 개입했다면 실수한 게 아닐까요? 우리가 속았어요, 젠장! 그놈들이 베팅 마감 시간을 놓칠 리 없어요. 마감 전에 이런 짓을 하다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80배짜리를 50배짜리로 만들 이유가 없죠.” “정말 그렇군요, 마피아들이 왜 그랬을까요?” “마피아를 빼고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되면 가장 이득을 챙길 데가 어디죠? “우승후보인 미국? 미국, 아니, 프랑스나 브라질도 우승 후보니까. 여기에 판돈 건 사람들 아닐까요?” “아뇨, 오히려 난 아이파가 의심스러워요. 베팅 마감이 한 시간도 채 안 남았지만 추가 베팅 금액은 적게 잡아도 10조 달러. 그런데 총 베팅 금액 중 30%는 무조건 아이파 몫인데, 그럼 아이파는 최소 3조달러를 더 챙길 수 있어요..” “아이파를 의심해봤자 아무것도 못해요.대위님, 이제 베팅 마감시간 15분 전이에요” “금고에서 돈이 넘쳐나는 아이파가 이런 자작극을 벌일 정도로 돈에 쪼달렸을까요? 그렇진 않을 텐데……. 다른 세력이 아이파와 짜고 꾸민 일이 아닐까요? 참, 지난번에는 총격전이 벌어지고나서 두 시간 동안 전체 베팅액 30%가 몰렸죠?” “글쎄요,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적을 듯해요. 일본 팀이 테러를 당한 게 마감 1시간 전이니까. 그나저나 미안해서 어쩌죠? 제 추측 땜에 대위님 돈도 날리게 생겼어요. 저 원망 마세요.” “월드컵 몸살 한번 앓았다 생각하죠 뭐, 김 중사, 어쨌든 한국 우승 확률도 높아졌으니 괜찮아요.” 사실이 그러했다. 사람들이 월드컵 베팅에 몰릴수록 아이파 영향력은 더 커졌고, 아이파 영향력이 더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월드컵 베팅에 걸었다. 2058년 오스트레일리아 대회 때부터 아이파는 월드컵 베팅을 주관했다. 이 대회가 끝난 뒤 아이파 금고에 들어간 돈은 어마어마했다. 2062년 브라질 월드컵 우승 팀 아르헨티나가 100억 달러를 챙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22세기 이후에는 월드컵 베팅 규모가 지구 전체 총생산액의 20%에 달할 정도였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나라가 가져 가는 배당금이 국가 전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 중사, 11번 모니터 좀 봐줘요.” “235-5 구역이네요. 퇴근길에 들릴 건가요?” “여자 친구랑 거기서 만나기로 해서요.” “ 평소보다 더 한가합니다. 착륙할 거라 신고한 비행정들도 몇 대 없어요.” “다행이군요. 김 중사는 약속 없어요?” “저야 뭐 만날 사람이 있나요? 그나저나 내일이면 월드컵이 시작하니까, 팔자 좋은 녀석들은 한 달 동안을 휴양지에서 신나게 보내겠군요. 저도 이번에 당번만 아니라면 제주도라도 가서 실컷 놀고 왔으면 좋겠는데…. 대위님은 좋겠어요. 달 여행을 신청했다고 들었습니다. 달에서 보는 월드컵이라? 상상만 해도 근사한데요.” “아뇨, 달 왕복선에 빈자리가 없대요, 휴가 계획을 새로 짜야 해요. 난 월드컵 뒤가 더 걱정이에요. 파산한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뉴스는 정말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지난 대회 때는 자살한 사람이 10만 명쯤이라 했죠? 여기저기서 비행정 매물도 쏟아져 나올 거고요. 김 중사도 이번에 괜찮은 놈으로 바꾸는 건 어때요?” “아직 5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어요. 혹시 알아요? 한국이 우승이라도 한다면 우리들에게도 특별 수당이 지급될 텐데. 그게 지급된다면 다시 생각해보죠 뭐. 우리나라 인구가 7천만 명이라지만 한사람 당 최소 2만달러는 나올 거예요. 물론 지진 피해 복구 때문에 그만큼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제 최종 배당률도 확정됐죠?.” “한국 우승이 48.74배, 일본 우승이 15.14배, 미국 우승이 3.17배, 프랑스 우승이 4.24배, 러시아 우승이 14.2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지는 않았는데요. 총 베팅액이 76조 달러를 넘지 않아요.” “아이파 자식들, 테러 한 건으로 5조 달러를 그냥 꿀꺽 삼키네. 대체 그놈들은 그 많은 돈으로 뭘 하려나?” “10월로 예정된 한국의 은하계 탐사도 아이파가 뒷돈을 댄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잠깐만요, 아이파 특별 배당액이 발표됐어요. 우승국 10조 달러, 준우승국 5조 달러, 3위는 1조 5천억 달러, 4위는 1조 달러, 5위부터 8위까지는 3천억 달러예요. 정말 엄청나군요. 그리고 아이파에서 대위님 말을 들은 모양이에요. 추첨을 통해서 이번 베팅 참가자에게, 놀라지 마세요, 무려 백만 명에게 백만 달러씩 준다는데요.” “지난번에는 50만 명에게 50만 달러였잖아요. 자식들, 정말 구린 데가 있는 모양이군. 백만 달러면 십년 치 내 연봉이잖아. 한국 우승에 경품까지라. 그럼 얼마죠? 내 배당금 97,400달러에 경품 백만 달러까지 포함하면……, 세금을 제외하고도 60만 달러가 넘어!” “대위님, 꿈깨세요, 해도 해도 즐거운 상상이긴 하지만요.” 재철은 다시 니콥을 마시고 싶었다. (계속)
제3장 장재철 대위(1)
“장재철 대위님이세요? 문 드림입니다.” “녜, 지금 연락하려 했는데, 예약, 어떻게 됐죠?” “안타깝지만 장 대위님은 대기 상태입니다.” “녜? 나보다 앞선 예약 대기자가 2명뿐이라, 혹시나 했는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두 분 대기자 모두 달왕복선 티켓, 정상 구매하셨습니다. 빈자리는 없습니다. 물론 추가 요금으로 30%를 더 내신다면 가능합니다.” “추가 요금내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언제까지 알려주면 됩니까?” “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추가 요금 납부를 오늘 자정까지 결정해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다른 날로 잡아 보십시오. 9월에는 자리가 있습니다. ” “알았습니다.” 홀로그램이 꺼졌다. ‘나한테 다음이 어딨다고?’ 재철은 서울시 231-4 구역 경비를 맡고 있었다.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미우와 함께 떠나기로 달 여행이었는데, 포기하기란 너무 아쉬웠다. ‘어쩐담, 추가 요금이라도 내고 갈까?’ 달 대신 화성으로 가기는 어려웠다. 화성에 다녀오려면 적어도 열흘은 잡아야 하는데, 미우가 받은 휴가는 고작 일주일 남짓이니. 다른 이들은 한 달 짜리 휴가도 얻는다지만 경찰인 미우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북극도 떠올랐지만 거긴 미우가 이미 다녀온 데였다.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면 미우가 질색하겠지.’ 장 대위는 2주 전에 선구자호 탐사대원으로 결정되었다. 항공 경비대 일도 한 달 후면 끝나고, 선구자호 준비팀에 들어가야 했다. 이번 한 달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얻는 휴가였다. 그래서 더더욱 미우와 함께 있고 싶었다. 선구자호 발사 전까지 탐사대원들에게는 특혜가 줄을 잇고 있었다. 없는 것도 원하기만 한다면 만들 수 있었다. 달 왕복선에 자리를 만드는 일 정도는 특혜도 아니었다. 우주탐사국 큰돌 국장이라면 결코 모른 체 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재철은 탐사대원이라 해서 얻는 특별한 혜택을 주장하기 싫었다. ‘오늘만큼은 꼭 미우한테 얘기해야겠다.’ 재철은 선구자호 탐사대원으로 뽑혔다는 걸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김 중사! 니콥 남은 거 있어요?” 김명호 중사는 재철보다 한 살 어렸다. 그와 함께 근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금세 친해졌다. “대위님도 참, 얼마 전에 끊었잖아요. 저도 아침에 마셔서 한 잔밖에 없는데…….” 2084년부터 전 세계에서 금연법이 발효되었다. 어느 한 나라도 빠지지 않았다. 지구 어느 곳에서도 담배 연기를 볼 수 없었다. 남극 기지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금연법 시행 초기만 해도 불법으로 만든 담배를 피는 이가 종종 있었지만 22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마저도 사라졌다. 하지만 달이나 화성 같은 지구 밖 천체에서는 예외였다. 그곳 호텔 로비에서 시가를 물고 다니는 관광객은 드물지 않았다. 지구 밖을 여행하는 그들은 돈을 엄청 써댔다. 당연히 지구에서 할 수 없는 건 더 하려 했다. 시가를 피는 건 관광객들이 누리는 무척이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금연법이 시행되면서 나온 게 바로 니콥이었다. 니콥은 어느 누구든 하루 네 잔까지만 마실 수 있었다. 그게 법이었다. 게다가 비쌌다. 김 중사도 겨우 하루 두 잔만 신청했다. 김 중사같은 월급쟁이가 하루에 네 잔씩 마셨다가는 임대 주택에서 쫓겨나기 딱 좋았다. “좋아요. 제 걸 포기하죠. 그렇지만 이번 한번만입니다. 내일도 마시고 싶다면 니콥 회원으로 등록하세요." ‘미우가 뭐라 하든 내일부턴 나도 니콥을 받아 먹어야겠다.’ 재철은 문득 내일부터 벌어지는 월드컵이 생각났다. “김 중사는 이번 월드컵에 얼마 베팅했어요?” “일본 우승에 800달러, 미국 우승에 500달러 걸었습니다.” “일본이 대진운 하나는 기가 막히던데, 아무리 그래도 이변은 늘 있죠. 난 프랑스에 걸었어요.” “얼마 거셨어요?” “프랑스에만 2,000달러 걸었어요.” “그렇게 많이요? 대위님은 애국자잖아요. 대위님이라면 우리나라에만 걸 줄 알았어요. 하하!” “김 중사도 우리나라에 안 걸었잖아요. 베팅하고 애국심은 별개니까 뭐. 배당률이 워낙 높으니까 욕심나긴 했지만 그래도 생돈 걸기가 좀 그렇던데요.” “배당률 함 볼까요? 현재 배당률입니다. 일본 우승이 3.25배, 미국 우승은 조금 더 높습니다. 5.47배예요. 프랑스는 9.78배고, 지난번에 준우승한 브라질은 7.96배군요..” “프랑스가 우승한다면 20,000달러쯤 받겠네요. 이거 받으면 김 중사가 니콥 매일 4잔씩 먹게 해줄게요. 하하.”
제2장 주사위를 던지다(2)
“좀 있으면 우주터널을 통과한다. 우리한테 이런 일이 진짜로 벌어지다니!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우리가 처음으로 지나가는 거야, 실감은 안 나지만.” 우주터널이 앞에 있다고 말하는 김 중령 목소리에는 묘한 기대가 실려 있었다. 김 중령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답답한 게 하나 있었다. 앞서 출발한 무인탐사선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신호는 우주터널에 들어갈 무렵에 보낸 것이었다. 선구자는 그때까지도 무인탐사선이 우주터널을 통과한 뒤에 보냈음직한 어떤 신호도 받지 못했다. 이제 우주터널이 바로 앞에 있는데 이런 이유로 무를 수 없었다. 우주탐사국에서는 이 터널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통과할 것을 당부했다.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일단 부닥쳐봐야지. 아마 괜찮을 거야. 그래! 우주터널을 통과하고 보는 거야. 행성계가 존재하는 별도 찾아야 하고, 통과하고 난 뒤에는 거기가 어딘지도 알아내야 할 텐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그래도 기회는 또 있을 거야. 강제 수면에 들어가서 기다려야지. 무인탐사선이 보낸 신호를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김 중령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모두 제 위치로! 이 박사는 보조엔진을 끄고.” 김준우 중령은 침착하게 지시했다. 선구자는 그때까지 보조 엔진 하나만 작동시키고 있었다. 그는 우주터널을 수백 번 통과해본 사람처럼 행동했다. 우주탐사국에서는 지원자들 심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이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적응하느냐?’는 문제였다. 경험보다는 시뮬레이션을 수백 번 하면서 얻은 점수가 더 중요했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듯이 장재철 대위는 조금 달랐다. 항해사로서 그보다 나은 점수를 받았던 지원자도 적잖았다. 그럼에도 그가 선발된 것은 의외였는데, 김준우조차도 그런 속사정은 몰랐다. 우주터널을 맨눈으로는 알아채기 불가능했다. 다만 주컴퓨터와 연결된 화면 한가운데에는 엔트로피 임계점들이 달걀프라이 모양으로 드러나 있어서 그곳이 우주터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숨을 죽였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전 훈련에서 경험했지만 실제와 훈련은 얼마나 다를지 몰랐다.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 들었다. 탐사대원들 눈동자도 그대로 멎었다. 선구자는 이미 우주터널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라는 관측 장비를 모두 작동시켰지만 아무런 소용없었다. 선구자에 달린 시계마저 정지했으니 다른 장비는 말할 것도 없었다.우주터널 특성은 엔트로피 변화가 없다는 점이었다. “참 묘한 느낌이군.” 아라는 알 듯 모를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끝난 건가? 이런! 땀이잖아.” 시계가 다시 작동했다. 우주터널을 통과했다. 김준우 중령은 그답지 않게 그토록 긴장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지 연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며 계면쩍어했다. 우주터널을 통과하면서 선구자에 어떤 이상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는 한편으로는, 드러내진 않았지만 다시는 호흡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겼다. 다른 탐사대원들도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무인탐사선이 2150년 7월 17일 21시 41분에 우주터널을 통과하며 남긴 거군요.” 모두들 긴장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을 때 장재철 대위가 보고했다. “놓치진 않았군.” 김 중령은 여전히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무인탐사선은 여기서 또 다른 우주터널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비행했군요. 우리도 무인탐사선이 간 곳을 쫓아가면 될 것 같은데요.” “그건 나중에라도 늦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거지. 고 박사, 이거 알아볼 수 있겠소?” “짐작이 안 돼요. 여긴 완전히 엉뚱한 곳입니다.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달라요. 난 그래도 태양계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긴 아닙니다. 오히려 태양계 반대편 은하계의 끝 쪽처럼 보이는데요. 은하 중심부 별들이 너무 멀리 있고 우리 태양도 아직까진 확인이 안 됩니다.” 아라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할 수 없군. 이 근처에서 행성을 찾아 보자구. 있으면 다행이지만.” 김 중령 말을 신호로 본격적인 행성 탐사가 시작되었다. 선구자에 탑재한 장비들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것이 전파망원경과 광학망원경이었는데, 전파망원경은 1,000광년 범위 내에서 생긴 모든 인위적인 전파를 잡아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000광년 정도 떨어진 이름 모를 어느 행성에서 어떤 생명체가 문명을 이루고 산다면, 그 행성의 이름 모를 동네 방송국에서 송출한 전파도 잡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또 광학망원경으로는 우리은하계 안에 있는 별 대부분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별까지는 0.1광년 정도입니다. 행성 네 개를 거느리고 있군요.” 아라는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다. “전파망원경에 잡히는 내용은 없나?” 김 중령이 다시 물었다. “아직까진…….” “고 박사, 저건 지구에서 본 적 있던 별이오?” 정태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랬다면 지금 위치를 바로 알 수 있었겠죠.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마치 저 별은 우릴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물리량은 어때요?” “스펙트럼 K형이에요. 이런 별이면 표면온도가 태양보다 낮은 3,500도 정도로 짐작되는데, 실제로는 어떨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적색 거성은 태양과 같은 주계열성 별이 진화한 형태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별에 딸린 행성들은 오래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봐야겠는데요. 지구도 10억 년 후면 태양이 삼켜버리잖아요. 태양이 그 정도로 부풀어 오른다면 태양계 내 모든 생명체는 종말을 맞이하니까요. ” 김 중령이 다시 물었다. 다정하게 묻고 답하는 정태와 아라를 시샘했는지 나이영 박사가 끼여들었다. “언니, 폭발할 수도 있는 거예요?” “아니, 거성이 된 지 얼마 안 된 별인데. 신성으로 폭발하려면 최소한 2억 년 이상 지나야 가능할 거야.” 아라 대답이 끝나자 김준우 중령이 의기소침해져서 물었다. “그럼 저기선 우리가 살 만한 행성을 발견하기 어렵단 얘기잖아.” “그렇습니다.” 아라 대답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이럴 수가! 태양을 찾았어요. 무려 6만 광년이에요.” 아라는 경악했다. 다들 마찬가지였다. 너무나도 엉뚱한 세상이 순식간에 열렸다. “이럴 수가, 호랑이가 나오는지, 아니면 예쁜 신부감이 나오는지 모르는 문을 여는 거랑 뭐가 달라?” 정태 말에 나이영이 덧붙였다. “차라리 잘 됐어요. 돌아가는 거 포기하면 되네요, 뭐.” “다들 힘내자고, 자동 항법 장치를 믿어. 그리고 말야, 저 별은 우리가 처음으로 목표로 잡은 건데 한번 가 봐야 하지 않겠나? 0.1광년이라면 터무니없이 먼 곳도 아니고, 다행히 무인탐사선이 잡아낸 우주터널도 거기서 멀지 않은 데 있고. 태양계 말고 다른 행성계를 찾아본다는 점도 괜찮잖아?” 김 중령은 분위기를 추스려야 한다고 여겼다. 목표를 너무 빨리 정해버렸다. “좋아요, 대장! 가능성은 작지만 이건 앞으로를 위한 준비라 하죠.” 아라가 흔쾌히 찬성했다. “장 대위! 위기 상황 발생 가능성을 체크해보라구.” “…… 좋습니다. 현재로선 위기 상황 발생 가능성 0.5%입니다.” “좋았어, 운항 모드를 자동으로 설정해두고 엔진 풀 가동! 이상 없는가?… 자, 2분 후 주엔진 꺼!” “알겠습니다!” “모두 강제 수면에 들어간다. 나 박사는 280일 후에 깨어날 수 있도록 조정해요.” 나이영 박사는 조종실 밖으로 나가 각 탐사대원이 들어갈 캡슐마다 달린 수면 시간 조절 장치를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김 중령에게 물었다. “우탐이는 어떻게 하죠?” “그놈은 그냥 두라고. 이상해. 지구에서 우리랑 훈련할 때완 영 딴판이니, 그래도 남겨두면 낫겠지. 그렇지 않나, 장 대위?” 김 중령 말에 장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지 않소?” 정태는 아라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뭐가 두렵다는 거죠?” 아라가 되물었다. “너무 엉뚱한 곳에 왔잖소. 우리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런 식이면 우린 영원한 미아가 될 수 있어.” “걱정 마세요! 제가 여러분들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연료가 떨어지기 전에 우리가 살 수 있는, 지구와 같은 행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확신합니다.” 을지원 대위가 나섰다. “우탐군! 영양 캡슐을 강제 수면 장치마다 충분히 넣어둬.” 나 박사는 을지원 대위처럼 나대는 이를 한시라도 빨리 잠재우고 싶었다. 또다른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탐사대원들은 차례로 수면용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제2장 끝, 제3장에서 계속-
제2장 주사위를 던지다(1)
“혜성의 바다입니다.” 장재철 대위가 짤막하게 보고했다. 선구자에 달린 시계는 2150년 10월 27일 오후 7시 37분을 가리켰다. 자원해서 은하계 탐사에 나섰다고 하지만, 태양계를 벗어난다는 사실에 다들 기분이 가라앉았다. 태양계 안이라면 언제든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겼지만 태양계 바깥은 아니었다. 돌아갈 수 있는 길과 돌아갈 수 없는 길, 선구자는 그 경계를 지났다. “드디어 태양계를 벗어나는군!” “나가는 것보다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김 중령은 선구자 임무에서 '탐사'를 떠올렸지만 나이영 박사는 달랐다. “나 박사 말이 맞아,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면 나가는 건 아무 의미 없어. 자동 항법 장치가 항로를 기억하고 있으니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건 문제없을 거야.” “대장! 새 행성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우리가 돌아올 길을 못 찾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이젠 비우자고. 돌아갈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아. 진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그땐 정말 견뎌낼 수 없을 거야.” 정태는 은하 탐사대에 지원할 때도 지구로 돌아올 마음은 전혀 먹지 않았다. 탐사대원으로 선발된 이유도 이런 태도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선구자에서 최후를 맞아도 좋고, 얼어붙은 행성 바위 아래에서 주검이 방치되어도 좋고, 별을 향해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리 될 거라 믿었다.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는 지구로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시작인데 나중 일을 벌써부터 걱정할 거까진 없잖아.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은 법이야. 우린 시작이 좋았어. 여기까지 오는 데도 아무 문제 없었고. 그나저나 이젠 지구와 교신하는 일도 점차 더 어렵겠군.” 김 중령 말대로 태양계 끝에 다다른 선구자호는 대한민국 우주탐사국과 간단한 인사만 나누려고 해도 11시간 이상 걸릴 곳을 지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진짜 출발점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기라도 했는지 오태영 대통령이 선구자에 보낸 격려사가 때맞춰 도착했다. “대통령입니다.” 장재철은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 대통령 홀로그램이 조종실에 나타났다. “선구자 탐사대원 여러분! 좀 전에 선구자호가 지금쯤 태양계를 벗어날 거란 보고를 받았습니다. 지구에 남겨둔 사랑하는 이들, 좋아했던 것들 생각에 여러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하계 탐사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입니다. 기쁨보다는 고난으로 점철될 여러분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아무쪼록 최선을 다해 건강한 모습으로 무사히 지구로 돌아오십시오. 선구자호 발자취는 바로 인류의 진보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선구자 만세!” 홀로그램이 꺼졌다. “빌어먹을!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면 끝이군, 젠장!” 정태가 투덜댔다. 김 중령은 작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어쩌겠어. 미리 녹음해 둔 거야. 이 박사가 지금 뭐라고 해봤자 그 얘기를 들을 대통령은 선구자에 어떤 놈들이 탔는지도 잊어버리고 잊을 텐데. 이제 우리가 전부인 세상이 시작된 거야.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사람이 견딜 만한 일이 결코 아니지. 그런데 우린 선물도 받았어. 우리가 알던 모든 제도와 관습에서 자유로워졌잖아. 여길 천국으로 만드는 것도 우리고, 여길 지옥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우리야. 지구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여기선 벌어질 수 있어. 또 지구에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그냥 손 놓고 당해야 할 경우도 있을 거고. 이것저것 골치 아픈 게 한둘이 아냐. 그래서 강조하고 싶어. 여기서는 탐사대장 말이 법일 때도 있다는 걸. 언제나 내가 법은 아니지만 내 말, 내 지시를 따르지 않아서 생기는 불행만큼은 막고 싶어. 만약 내가 또라이짓을 한다면 그때는 이 박사 말이 법이네. 그걸 꼭 기억하고, 만약 이 박사마저 정상이 아니라면 그때는 고아라 박사 말이 법이야. 만약 고 박사 판단력도 흐려졌다면 장 대위와 을지원 대위는 오로라를 시행하든 지구로 돌아가든 맘대로 하게.” 김준우 중령 말대로 선구자에서 벌어질 일을 두고 이제 우주항공국에서 더 이상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었다. 정태는 오로라를 얘기하는 김준우가 안타까웠다. 둘은 동갑내기였다. 선구자 은하 탐사 계획에 참여하면서 처음 안 사이였지만 죽마고우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 “우리가 대장 지시를 따르는 건 당연한 거야. 그런데 운항 법규를 만든 이유도 생각해 봤으면 해. 사람이라면 실수하게 마련이잖아. 대장 지시든 내 말이든 잘못된 게 있을 거야. 그럴 때마다 대장을 바꿀 순 없지. 그러니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대장 지시를 따르되, 그게 운항 법규와 충돌할 때면 운항 법규를 우선으로 삼도록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물론 그래야지. 어쨌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린 지금까지 어떤 인류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거고. 모든 건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해. 스스로 결정한다는 게 말이 쉽지, 그게 되냐고?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나? 운항 법규가 해 줄 때도 있겠지만 실제론 사람이 조정해야 할 거 아냐. 탐사대장은 그런 역할을 하는 거야. 탐사대장인 내 말보다 운항 법규를 따라야 할 때 난 더 이상 여기 대장이 아닌 거지. 이 박사 생각은 잘 알고 있어. 내가 여기서 왕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니 아까 말한 것처럼 내 지시를 잘 따라 주게. 내가 원하는 건 안전, 지켜야 할 건 우리 생명, 생각해야 할 건 지구로 귀환하는 일, 이 세 가지뿐이야.” “당연히 그래야죠.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선구자에 타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요. 저희는 대장님 말을 따를 테니 우리가 다시 지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아라와 나이영 박사도 끼어들었다. 자칫하단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들이 더 날카로워질 것 같아서 그랬던 걸까. 아라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니 더 아득해졌다. 선구자에서 벗어나는 게 바로 살 길이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어린 시절 품었던 꿈을 실현하기보다 그 꿈속에 갇혀 진짜 꿈을 더 빨리 잃어버릴 것 같았다. “좋아, 고 박사나 나 박사처럼 모두 내 지휘를 끝까지 믿고 따라준다면야 뭔 문제 있겠어. 을지원 대위, 우리 임무를 말해봐!” “하나, 인류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하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한다. 둘, 인류애를 바탕으로 새로 발견한 모든 생명체를 존중한다. 셋, 탐사 과정에서 대원들끼리 서로 협조하며 다투지 않는다. 이상입니다!” 을지원 대위가 군인답게 대답했다. “그래, 특히 우리끼리 서로 협조하며 다투지 않는다, 적어도 이것만은 꼭 지켜주길 바라네.” “그런데 이 박사! 왜 선구자에 탄 거지? 이제 우리밖에 없는데 솔직히 털어나도 되잖아. 판에 박힌 얘기 말고 진짜를 말해 봐.” “더 어렵군. 출발 전에 김 중령이랑 술 마시면서 한 얘기 그대로야. 뭐 솔직히고 나발이고 없어. 우리가 살 만한 행성을 찾는 거보다 그 과정을 경험하고 싶었지. 거기엔 사람한테 일어날 수 있는 있는 최고의 드라마가 있지 않을까? 김 중령이 얘기한 것처럼 우린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거니까. 내 진짜 속내를 말해 볼까. 하하! 선구자에는 미녀 박사 두 분도 함께 있잖아. 난 남자들만 선구자 탐사대원 모집에 지원했더라면 여기 없었을 거야. PTV가 특집으로 내보낸 ‘선구자 탐사에 지원한 미녀들’ 이걸 봤지 뭔가. 지금 여기 있는 고아라 박사, 나이영 박사도 거기서 처음 봤거든. 미녀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즐겁다니까. 더군다나 우리 안에 갇힌 것처럼 도망도 못가는 미녀가 두 사람이나 늘 함께 있잖아. 하하.” “정말이세요? 이거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헤헤.” “고 박사님은 이 박사님 말을 믿는 거예요?” ”당연히 믿지. 나 박사는 이 박사님이 무서운가 봐. 나 박사, 겁먹은 것 좀 보세요!” “이 박사님은 보기보다 엉큼하세요.” “엉큼하지 않은 남자가 있다는 건 따뜻한 얼음이 있다는 거랑 비슷할 거야, 허허, 이 박사! 농담 그만하고 진짜를 말해 봐.” “나 참, 농담 아니라니까. 만약 지구에서 이 말 했다고 쳐봐. 큰돌 국장이 가만 있었겠나?” “헤헤, 큰돌 국장님 대머리와 큰 얼굴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나오네요. 고 박사님은 안 그래요?” “나 박사, 우리끼린 박사란 말 떼는 거 어때? 이 박사님이 자기더러 이영아 하고 부르는 건 싫겠지만 내가 이영이라 부르는 건 괜찮잖아. 이영이는 날 그냥 언니라 부르고. 어때? 나중에 심심해서 미칠 것 같을 때는 거꾸로 내가 나 박사를 언니라 부르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우와! 정말요? 저 진짜 고 박사님을 언니라 부르고 싶었어요.” “안 돼! 우린 놀러온 게 아냐. 명색이 인류 최초로 은하계를 탐사하는 대원인데, 언니 동생 하면 폼이 안 나잖아.” “대장님, 우리끼리만 그럴게요. 내가 나 박사를 이영이라 부르고, 나 박사는 날 언니라 부르고. 우리끼린데 좀 봐주세요. 네?” “김 중령, 까짓 거 봐주지.” “에이, 좋아! 단 여자들끼리만 그러는 거야. 이러다가 을지원이도 나더러 형이라 할까봐 겁난다니까. 이제 농담 그만하고 이 박사 진짜 이유를 듣고 싶어.” “나 참, 다 말했잖아. 다른 이들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난 지구에 있는 게 싫었어. 무작정 벗어나고 싶었거든. 그게 욕심이었어. 물론 달에서 살아도 되지만 거긴 내 자리가 별로 없고, 지구랑 다를 것도 없잖아. 하지만 선구자는 완전히 다르지. 어떤 제도와 관습에서도 자유로운 곳이니. 나같은 과학자가 선구자 탐사에 많이 지원하지 않은 게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한테 딱 어울리는 일일 테니 그랬겠지만.” “우리 임무가 사형수가 할 만한 일이라 생각하진 않아. 물론 여기 생활은 사형수들과 별 차이 없겠지. 하지만 그 사람들이 가지는 사명감과 우리가 가지는 사명감은 다르지. 사형수보단 차라리 안드로이드가 더 낫잖아. 그런데 왜 우릴까? 그것도 남자 4명, 여자 2명이야. 우린 사람이 살 만한 행성을 발견하면 어떡해서든지 지구로 돌아와야 해. 만약 우리가 새 행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 자손이라도 인류가 살 수 있는 새 행성을 발견해야 하고. 그게 오메가 프로젝트잖아.” “오메가 프로젝트를 선택하는 일도 없어야겠지. 어떤 놈 씬 줄도 모르는데, 우리가 그 녀석들을 키워야하는 건 정말 끔찍해. 우리가 남자 넷, 여자 둘인 진짜 이유는 말야, 만약 사람이 살 만한 행성을 발견했는데 지구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라면, 어때? 그럴듯하지 않아? 난 이게 진짜 오메가라고 봐. 우리한테 우주 탐사국이 준 선물이기도 하고. 우리끼리 애낳고 거기서 살면 거기가 바로 에덴동산인 거지 뭐. 에덴동산이 별갠가?” “오랜 만에 이 박사 생각이랑 내 생각이 같지만 그 뒤 얘기는 아냐. 그건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야.” 오메가 프로젝트는 우주 탐사국에서도 언급하길 꺼렸다. 탐사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오메가 프로젝트를 소개받을 때 그걸 하느니 차라리 바로 오로라를 시행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정태 말처럼 누구 자식인 줄도 모르는 아이를 좁은 우주선에서 키우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야지. 이 일은 우리가 끝내야 하는 거고." "오메가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선구자가 고향인 애라면 어쩔 텐가?" 아라는 뜨끔했다. 뭔가 모자란 사람이 아닌 바에야 이런 일을 한 번쯤은 상상했을 터였다. 선구자라는 공간에서 얼마를 함께 지낼지 생각해보면 정태 얘기는 있음직한 일이었다. "분위기가 좀 그렇네요. 그런 일이 당장 벌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없을 수도 있고요. 우리에겐 섹스용 안드로이드도 있으니 정 다급하면 그걸 이용하면 되죠. 우리끼린 이런 일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좀처럼 얘기 안 하던 장재철 대위가 끼어들자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래, 이 얘긴 이제 그만하고, 김 중령은 왜 여길 탔지. 김 중령도 했던 말 그대로인가?" "다를 건 없어. 난 이 박사처럼 무작정 벗어난다는 것관 달라. 우주 공간을 비행해보면 느낄 수 있지. 아무것도 없는, 암흑뿐인 이 세상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우주비행사의 노랠 알지? 별들이 날 부른다니까. 그러다 보면 인간이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지. 사이렌의 노래에 홀린 선원들처럼 별이 부르는 노래에 홀려본 사람이라면 짐작할 거야. 이 박사는 별이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 없어?” “글쎄, 내가 둔감해서 그런지 아니면 선구자가 너무 커서 어떨 때는 사무실에 앉아 있는 듯한 생각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 은하계 저편에서 날 부르는 노래는 듣지 못했는데.” “그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그건 그렇고 고아라 박사나 나이영 박사한테도 똑같은 걸 묻고 싶은데.” “이유라고 내세울 만한 그런 거창한 건 없어요. 연구소에서 탐사대원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선구자에 탄 제 모습을 상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꿨던 꿈이었죠. 중세 시대에 커다란 돛을 단 배가 바다를 누빈 것처럼 우주 공간을 떠돌아 다니는 거대 탐사선, 모험과 설렘이 늘 함께 하잖아요. 과학소설에서는 순간 공간 이동 (WARP)으로 우주 곳곳을 누비죠.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신날까 생각했어요. 지구에서 평소처럼 살아가나 우주 공간에서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며 살아가나, 별 차이 없잖아요. 그런데 모르잖아요. 진짜 낙원을 발견할 수도 있고요. 또 지구 밖에서도 ‘인간과 같은 동물이 문명을 이루며 살 수 있다.’고 늘 생각했어요. 이번이 아니면 그걸 확인할 기회가 더 이상 없을 것 같았어요.” “고 박사, 외계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들과 만난다면 아름다운 일만 벌어지진 않을 거야. 그건 알고 있지? 그런데 이 얘긴 옛날에도 한 거잖아. 다른 이유는 없어?” 정태는 아라가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다른 건 없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인류 외 다른 생물이 지구가 아닌 행성에서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느냐는 문제는 어릴 적부터 품었던 질문이었어요. 이건 만약인데요, 그런 생명들도 아프다면 제가 가진 의료 기술로 그들을 치료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좀 엉뚱하죠? 외계 생명체를 실험 대상으로 여기는 거잖아요. 이건 지구에서 말 안했던 거니 대답이 되었죠?” 나이영 박사도 덧붙였다. “두 번째 임무랑 충돌하는군. 무시할 수 없는 문제야. 나 박사! 인류애를 바탕으로 치료가 필요한 생명체를 돌보는 행위는 당연한 거지만 정말 실험 도구로 삼는 경우는 없어야 해." "당연하죠." "다들 외계 생명체가 우리보다 더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는데 그건 자만이야. 김 중령이 얘기한 것처럼 외계 생명체와 만났을 때 아름답지 못한 일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어. 우리가 그들 포로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나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릴 문제를 과학자라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도전할 만한 일로 삼다니……, 사람들이란 제 역할이 있게 마련인가 봐. 그럼 을지원 대위는 어떤가? 자네는 가장 마지막에 합류했잖아. 더구나 전투원으로는 유일한 지원자였고.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 텐데.” “대장님과 전 같은 군인이지만 성격이 다르잖아요. 전투원과 비행사! 그것만큼 현실에서 느끼는 갑갑함도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군인들이라면 규율에 매여 있지만 제 경우는 좀 심했습니다. 전 전투가 너무 좋았습니다. 레이저포를 쏴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쾌감은 겪어 보시면 아시리라 믿습니다. 목표물이 크면 클수록, 명중시키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쾌감은 더 큽니다. 행성 하나를 통째로 날리고 싶은 꿈도 꿉니다. 전 모의전투 성적도 언제나 최고였습니다. 백날 하는 모의전투보다는 진짜 전투가 최고잖아요. 그런데 지구 생활을 보십시오. 전투가 없는 세상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우리 선구자 앞에도 전투가 벌어지는 걸 기대했습니다. 이 박사님이 우리가 포로가 되는 일도 생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선구자에 있는 이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자신합니다.” "위험한 생각이군. 을지원 대위도 우리 두 번째 임무, 그러니까 인류애를 바탕으로 새로 발견한 지적 생명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걸 꼭 지켜주길 바라네." "평화시에는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우리가 공격 받는 경우라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하다간 우리 첫 번째 임무인 지구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한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내 지시 없이 섣불리 행동하지 않도록 해!" 김 중령은 짜증났다. 그렇지 않아도 을지원 대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전투를 위해 자원했다는 말을 다시 확인하자 실망은 더 커졌다. “장 대위도 한 번 말해 보게.” “특별히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과 잘 지내고 싶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여행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장 대위답군.” 사실 탐사대원들 지원 동기는 출발 전에 PTV를 통해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알려졌기에, 김준우의 이런 질문은 어떤 면에서는 의외였다. 하지만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진 마음가짐과 그걸 시작하고 난 뒤에 가지는 마음가짐이 다른 법이니까, 또 대중을 상대로 하는 얘기와 속내를 밝힐 만한 형편에서 하는 얘기는 다르니까. 다들 진짜 마음을 털어놓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진짜 마음이 그래서인지 지원 동기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 할 만한 이는 을지원 대위를 빼놓곤 없었다. 을지원 대위는 선구자에 닥칠지 모르는 공격을 군인답게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을지원 대위도 외계 생명이 존재한다고 믿는 모양이죠?” 나 박사가 물었다. “당연하죠. 이런 어마어마한 공간에 유독 지구에서만 생명체가 살라는 법은 없잖아요.” 전투원은 선구자에 없던 보직이었으나 만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오태영 대통령 결정 때문에 급하게 만들어졌다. “긴급 사태가 발생했다며 지구로 돌아오라는 명령은 절대 떨어지지 않겠죠?” 나 박사는 그때까지 달 여행조차 간 적이 없었다. “왜? 이영이는 지금 선구자에 탄 걸 후회해?”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이랑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있으니 선구자가 지구를 출발하기 전에 들떴던 게 이젠 죄다 없어지고, 뭐랄까요, 언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불안한 마음만 더 커지고 있다고 할까요. 좀 그래요.” “너무 속상해 마. 시간이 지나면 여기 생활도 익숙해질 거라 믿어. 이영이가 없으면 우린 어쩌라고.” “나 박사 기분도 나랑 다르지 않구만. 난 지구를 떠나면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생길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냐! 기대가 없는 것도 아닌데……,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좀 우울한 건 사실이야.” 정태가 나 박사 말에 맞장구쳤다. 태양계를 벗어난다는 게 특별한 건 아니었지만 샴페인을 터뜨릴 일도 아니었다. “태양계를 벗어난다지만 이건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야, 호들갑일랑 이제 그만 하자구.” 김 중령이 분위기를 돌리려 했지만 정태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말 해서 뭐하지만 난 어머니와 헤어질 때가 생각나. 참, 고 박사와 을지원 대위는 생체배양기에서 태어났다 그랬지. 그래도 다섯 살배기 어린애가 엄마와 헤어지는 그림을 떠올릴 순 있잖아. 바로 지금 하고 똑같아. 꼭 그 느낌이야! 내 경우는 그때 경험이 깊은 상처였거든. 그 뒤론 어머니를 볼 수 없었으니까. 지금 사정은 그때와 너무 비슷해.” 정태는 괜히 옛일을 얘기했다고 후회했다. 기분 나쁜 기억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건 가정이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행성을 진짜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난 거기서 살 거야. 지구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 날 끌고 갈 생각일랑 집어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박사님. 일 년 안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더 좋고요." 아라는 진짜 그런 행성이 나타나는 모습을 상상하는 듯 했다. 나 박사는 마지막으로 지구를 보려고 선구자 망원경을 조정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런 조작에 서툴렀다. “지구가 보여?” 김준우가 물었다. “아뇨,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도 지구를 못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되죠. 그런데 생각보단 어렵네요.” “이럴 땐 우리가 낫지.” "……." “우와! 이럴 수가! 지구예요. 대장님은 도대체 어떻게?” “비행사라면 돌아가야 할 곳만큼은 귀신같이 알아내지. 직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목 뒤를 언제나 따라 다녀. 이걸 놓치면 모든 게 끝장이야. 이런! 아직 지구로 다시 간다고 생각하고 있군. 지금 돌아갈 길을 생각하면 좀 그렇지, 허허! 이 박사 너무 뭐라 하지 마.” "있는 대로 자랑질 해놓고선 엄살 피우긴." 탐사대원들 모두 웃으면서 화면을 바라봤다. 지구는 점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멀리 있는 다른 별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선구자가 더 나아갈수록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이별이 실감났다. “우탐아! 내 수첩 좀 갖다 줘. 니콥도 하나 가져오고. 이제부턴 수첩을 품고 지내야겠어.” 고아라는 앞으로 선구자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과 심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우탐이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라는 우탐이 엉덩이를 걷어찼다. ‘안드로이드 주제에 사람 말에 웃다니, 어이가 없어, 누가 이 따위로 만들었담.’ 우탐이 얼굴에 피어난 웃음은 그대로였다. “선구자는 태양계를 벗어났다. 은하계 탐사는 이제부터다.” 니콥을 씹으며 아라는 먼 미래를 그려보려 했지만 새카만 것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간은 어떨까?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지? 강제 수면할 동안에는 늙지도 않는다는데, 진짜 예순 살 청춘이지. 앞으로 이십 팔 년 뒤, 난 예순 살, 그 무렵 난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지구에서 은하 탐험 무용담을 펼쳐 놓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아니면 새로 발견한 행성에서 이브가 된다, 아니면 죽은 채 선구자와 함께 은하계를 떠돌아다닌다?’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모습이 가장 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이크 방정식이 진짜라면 우린 죽을 때까지 헤맬 거야.’ “열 두 시간 후 우주터널을 통과합니다.” 장재철이 보고했다. “벌써?” 김 중령은 잔뜩 기대했던 일이 실제로 닥치자 김이 빠진 듯했다. “열 두 시간 후라, 좀 자둬야겠는데. 자동 항법 장치를 켜고 모두 자자고. 이건 강제 수면이 아냐.” “열 두 시간 뒤면 우린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거지, 이거 원. 가슴이 뛰잖아. 도저히 못 잘 것 같아.” “정말 아무 일 없겠죠?” 고아라는 살짝 겁이 났다. “무슨 일은 무슨 일, 과학자는 거짓말 안 하잖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우릴 신세계로 안내하는 고마운 길인데 뭘. 쓸 데 없는 걱정 붙잡지 말고 자자니까! 정 잠이 안 올 거 같으면 위스키라도 좀 마시든지.” “술 마시면 다음이 힘들어. 여기서는 특히 더, 물맛도 지랄 같은데, 숙취 감당할 자신 없어.” “그럼 알아서 하라구. 우린 자러 갈 테니.” “저도 졸리면 그때 잘게요. 지금은 잠이 안 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라와 장재철 대위가 함께 있겠다고 하자 정태는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미녀가 함께 있겠다는데 숙취쯤이야, 푸하하하!” 아라가 웃었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말게. 이 박사는 동지가 생겨 좋겠군, 허허.” “술은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고마워, 장 대위! 고 박사도 위스키?” “아뇨, 전 소주를 좀 가져다 주세요. 여기보다는 식당으로 가죠.” “알겠습니다.” 이정태와 고아라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이라고 해봤자 달랑 식탁과 의자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어쩐 일이오?” “잠이 안 와서요. 문득 제가 선구자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가 사는 길이 선구자 밖에 있다 생각하니 좀 우울하고요.” “여길 탈출하자는 얘기는 아니죠? 하하.” “그럴 수 있다면요. 그런데 불가능하잖아요. 드레이크 방정식을 좋게 해석해도 사십만 분의 일이에요.” “우주터널은 그 확률을 높여주니까.” “술 가져왔습니다.” 장 대위는 식탁 위에 술을 놓고 바로 식당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장 대위도 같이 한 잔 하지?” “아뇨, 전 술 생각 없습니다.” “그래도 여기 있어. 남자 여자 둘만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장 대위님도 좀만 마시세요.” 아라도 거들었다. "장 대위는 어때? 원래부터 말이 없었나?”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말할 만한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우와! 정말이세요. 말 많이 하는 장 대위님을 기대해도 되겠네요. 솔직히 너무 말이 없으셔서 좀 부담됐어요. 우리끼린데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입다물어 버리니, 좀 답답하고 재미없잖아요.” “이제부터라도 기대하면 되지 뭐. 장 대위는 지금 여기 있는 거 후회 안 해?” “케켁, 후회라뇨? 전, 선구자 은하 탐사대에 포함된 게, 크윽,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위스키에 밥줄이 놀랐는지 장재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 말했다. “헤헤, 건배도 안 하고 혼자 마시니 그렇죠.” “아, 그걸 빠뜨렸네요. 제가 술을 마셔보지 않아서 그런 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이 박사님은 이 독한 게 좋으신가 봐요. 사실 전 술을 못 마시거든요.” “미리 얘기하지 그랬어?” “괜찮습니다.” “그런데 좀 전에 자랑스럽다고 했잖아. 진짜? 난 이유가 궁금했어. PTV에서 장 대위가 한 그 얘길 듣고, 저건 거짓이다, 했거든.” “놀이 공원 청룡 열차를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처럼 은하계 탐사를 지원한 사람들 생각도 제각각 아닐까요?” “그 얘긴 이제 그만하기로 하죠. 그걸 따져 좋을 건 없을 듯해요.” “그러지. 그런데 좀 있으면, 여기서는 날이 밝으면이라고 못하겠군. 어쨌든 우주터널을 통과할 거란 말야. 이거 믿을 수 있을까?” “호호, 우주터널에 숨은 비밀이 있는데 우린 그 사실을 새카맣게 모른다, 이런 얘긴가요?” “고 박사는 과학자잖아. 그럼 가설을 어떻게 확인하지?” “당연히 실험하고 관찰한 결과를 봐야죠.” “그래! 바로 그 점이야. 고 박사는 우주터널이 충분하게 검증되었다 생각하나?” “그건 아니에요. 모험을 거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잘못될 확률이 낮다고 생각해요.” “잘못될 확률이 낮다, 이거 이겨낼 수 있겠어? 까딱하단 챌린저 꼴이 날 수도 있는데.” 정태는 다시 위스키를 마셨다. 취기가 살짝 올라온 걸 느꼈다. “우주터널을 통과하다가 폭발이라도 할 것 같아서요? 아깐 우리가 돌아갈 수 없다고 하시더니.” 아라는 정태가 이러는 게 살짝 언잖았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하곤 좀 다르지. 난 우리가 여기서 끝장날까봐 두려워.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랑 너무 다르니까.” “별 일 없을 거예요. 적어도 우주터널은 블랙홀이나 웜홀은 아니에요.” ”여기서 끝장날 거면 우주항공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수백 억 달러를 퍼부어 이런 짓 안했겠지.” “염려마세요. 모험을 즐기자고요. 힘내자, 이정태!” 아라는 소주를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눈웃음을 살짝 지었다. ‘이럴 때는 여자가 더 용감한 건가? 아, 이거 쪽팔려서 원.’ 정태는 창피함을 털어내려 위스키를 마셨다. 우주에서 마시는 술이라서 그런지 취기가 금방 올랐다. “이제 그만 마실까요? 좀 더 마시고 싶긴 한데, 이번만큼은 참아야겠죠?” “밤낮이 없다는 게 이토록 따분할 줄 몰랐어. 제기랄!” 은하계는 터무니없이 넓었고, 그 깊은 어두움에는 끝이 안보였다. 아라는 달끝에서 바라본 지구 모습을 떠올렸다.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 여긴 달이 아냐. 지구는 더 멀어지고 있어.’ 눈물이 아라 뺨을 타고 흘렀다. 장재철 대위는 그녀를 어떻게든 위로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정태가 식당 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나갔다. 장재철 대위와 아라도 뒤따랐다. (제2장 계속)
제1장 행성착륙(마지막)
라온에 착륙한 지 11일째였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달고 시원한 물, 살아 있는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심은 라온에 착륙한 뒤 누구나,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한 생각이었다. 아라가 김 중령 가슴 앞으로 수첩을 내밀었다. “뭘 말하라는 거야, 이거 원. 걷지도 못하는 놈들이 육지 구경나온 게 그리도 자랑스럽냐? 그냥 돌아가자.” 정태가 가만 있지 않았다. “왜 시작부터 초를 치고 그래? 어떤 놈들이 여기서 살지 김 중령은 궁금하지도 않아?” “궁금하면 어쩔 건데? 그래, 그 몸으로 한판 붙을 작정인가?” “착륙하지 않을 거라 했으니 그건 지켜야지.” “ 사실 공룡말고는 상상이 잘 안 돼. 난 상상력이 젬병이야.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놈들이라면 한 달 정도 바비큐감인데, 공룡 바비큐라, 하하!” 김 중령 얘기는 조금 엉뚱하기도 했지만 그다왔다. “바비큐라고? 여기서 우린 외계인인데, 여기 살고 있는 걸 잡아먹는다고? 지구로 온 외계인이 지구 사람을 잡아 먹는 거랑 뭐가 달라? 우린 여기서 잠깐 머물 거잖아. 아니, 여기서 눌러 살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린 손님이라구! 여기 주인이 바퀴벌레처럼 생겼어도 그들이 주인이야. 이런 식으로 흠잡고 탓하는 게 좀 지나치긴 하지만, 난 무엇보다도 우리가 정복자란 생각만큼은 꼭 버려야 한다고 여겨.” “이거, 이 박사를 흥분하게 만들었구만. 진정해! 내가 여길 사냥터로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니 안심해도 좋아. 내가 그 정도로 철없는 사람은 아니잖아.” 김 중령이 이렇게 미안함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었기에 정태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김 중령 말도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정복자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어요. 우린 조난자였어요.” 나 박사 말에 김 중령이 반박했다. “선구자가 지구를 떠난 이유는 이런 곳에서 정복자 노릇을 하라는 거였지, 조난자처럼 지내란 건 아니었어. 여길 사냥터로 생각하는 건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정복자 노릇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해. 그게 우리 임무니까!” 정태도 가만 있지 않았다. “임무? 그따위 거 엿먹어라 해. 임무라니? 이제 우주탐사국 하고 완전 끝났다고. 그 녀석들은 지구 귀환을 보장하지 못했잖아. 17년 넘게 고생해서 여기까지 와서 그 녀석들을 위해 뭘 해야 하는데? 우린 우리대로 사는 거야. 여기서 정복자가 될지 괴물처럼 생긴 녀석들 포로가 될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좋아, 우리 임무는 다음에 또 얘기하자고. 그나저나 이 박사는 SF를 너무 많이 봤어. 우리가 여기서 포로가 될 거라면 진작에 그리 됐을 거잖아.” 김 중령은 자신 있다는 투였다. “지금은 구경하러 왔으니 거기에 집중하자구. 말싸움은 질색이니까.” 아라는 김 중령과 정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바 아니란 듯 계속 땅 아래를 살펴보고 있었다. “장 대위, 카메라를 작동해 봐. 이런 식으로 계속 발아래를 쳐다보다간 목디스크라도 걸릴 것 같아.” 아라와 나 박사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장 대위는 지상관측장치를 켰다. 움직이는 게 있으면 비행정 속도와 방향을 조정해 추적 관찰할 수 있는 장치였다. “이걸 좀 봐! 맙소사…, 저게 뭐야?” 정태 말에 김 중령도 화면을 주목했다. 뭔가가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저건, 저것들이 움직이잖아!” 탐사대원들로서는 지구를 떠난 후 처음으로 동물과 맞닥뜨린 셈이었다. ‘설마했지만 바로 동물을 보다니. 하긴 이런 행성에 아무것도 없는 게 더 이상하지. 김준우 말마따나 공룡도 있는 건 아닐까? 곤충은…….’ 정태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머릿속에서는 그 잠깐 사이에도 고만고만한 의문들이 쉴 틈 없이 들락거렸다. ‘공룡이 아닐까?’ 김 중령은 공룡을 떠올렸다. 이런 행성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이라면 공룡이라야 그럴 듯하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다. “추적 상태로 바꾸고 좀 더 크게 비춰 봐.”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건 공룡이라고 보기에는 가죽이 매끈했고 생김새도 너무 순했다. “이게 뭐야? 소, 소잖아. 지구에서 보던 것보다 다리가 짧은 점만 빼면…, 소랑 너무 비슷해! 김 중령은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쉽게 인정했다. “오백 마리도 넘겠는데요. 목동이나 카우보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장 대위는 생김새나 평소 행동답지 않게, 동물들한테서 겁이라도 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 카우보이? 하긴 여기서 저걸 볼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 여긴 지구랑 비슷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겠어. 비록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그런데 이놈들은 왜 떼지어서 움직이고 있지? 먹이를 찾으려고?” 김준우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배어나고 있었다. “계속 관찰할까요?” 장 대위는 조금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럴 거 없어. 더 본다고 달라질 일도 없을 거고. 지금 착륙해서 저 녀석들이랑 부닥쳐 봤자 뭐 좋은 일이 생길 것도 아니니. 발걸음도 겨우 뗄 지경인데, 잘못 하다간 깔려 죽기 딱 좋지 뭐. 돌아가자, 돌아가는 데 불만 없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착륙할 때가 아니라 돌아갈 때였다. (제2장에서 계속)
제1장 행성착륙(4)
다음 날 아침 식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시 배양 식품이었다. 통조림은 아껴둬야 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자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체력 단련실에 모였다. 홀로그램이 지시하는 동작을 따라 하는 정태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아라는 계속 웃었다. 정태는 건강만큼은 자신했지만 오랜 비행과 강제수면을 거치면서 몸 상태는 100살 먹은 노인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몸 상태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다들 최악이었다. 그나마 장 대위가 빨리 회복했다. 시간은 금세 흘렀다. 행성 하루는 지구 시간으로 따지면 25시간 정도였다. 정태는 선구자호 시계를 새로 조정했다. 하루를 지구 시간 기준으로 24시간으로 할 건지 25시간으로 할 건지 논란이 있었지만 24시간으로 정했다. 이 행성에서 1시간은 그들이 익숙했던 1시간보다 좀 더 길었지만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해질 무렵이면 정태는 머리를 선구자 밖으로 내밀고 놀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구름과 바다는 아름다웠다. 몸을 거기에 던져 태운다더라도 고통 따윈 없을 것 같았다. 탐사대원들 모두 열심히 체력을 단련했다. 행성 이름은 “라온”으로 정했다. 아라가 원한 대로였다. 김 중령과 장 대위는 이름에 관심 없었고 정태와 나 박사도 라온이 좋다고 했다. 이전까지는 행성을 발견한 순서에 따라 X-1, X-2, X-3, 이런 식으로 행성 이름을 붙였다. 라온 이전에 발견한 행성 중 기억할 만한 건 별로 없었다. 라온은 선구자호가 12번째로 발견한 행성이었다. 탐사대원들이 육지로 가지 않고 선구자 안에 머문 이유는또 있었다. 면역약을 만들 때까지는 육지에서 잠시도 머물 수 없었다. 육지에 어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들이 있는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상륙할 수 없었다. 착륙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로 보낸 로봇이 각종 세균 정보를 수집하고 선구자 주컴퓨터는 그 정보에 따라 약처방을 준비했다. 나 박사는 약처방에 따라 약을 만들기까지 보름은 걸릴 거라 했다. 정태와 아라는 김 중령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육지를 구경하고 오자고 떼를 썼다. “비행정만 타고 갔다 오는 거예요. 착륙만 안 하면 되잖아요.” 김 중령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지만 마냥 그럴 수는 없었다. 나 박사는 틈날 때마다 바다 생태계를 관찰했다. 가끔 바닷물도 채집했다. 바다에는 예상대로 플랑크톤, 녹조류, 어류가 가득 있었다. 육지 생태계 모습도 짐작할 만했다. “좋아, 한번 갔다 오자고. 비행정 안에서 구경만 한다면야 별일 없겠지. 그래 가보자고.” 마침내 김 중령은 육지 탐사를 허락했다. 선구자가 행성에 착륙하고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대신 착륙하지 않는 조건이야.” “2호 비행정을 준비하겠습니다.” 장재철 대위는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할 건지 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사람 같았다. 그는 뭐든지 먼저 앞섰다. 강제 수면에서 깰 때도 언제나 맨 먼저였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쉽사리 안절부절 하곤 했지만 또 그만큼 쉽게 냉정을 되찾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니콥을 씹었다. 탐사대원들 모두 체력을 좀 회복했다지만 장 대위를 빼곤 제대로 걷는 이는 없었다. 그는 깨어 있을 때면 언제나 체력 단련실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다른 이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선구자호 탐사대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 중 하나는 틈날 때마다 체력 단련하는 일이었다. X-4 행성에서 아무 소득이 없자 탐사대원들 모두 무력해졌지만 장 대위는 달랐다. “우탐이는 어떻게 할까요? 여기 남겨둬야겠죠?” “그래야지. 여길 비워둘 순 없으니.” 아라는 대원들이 비행정을 타러 가는 모습을 촬영했다. 특히 정태가 어기적거리며 걷는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선구자 격납고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는 비행정 3대는 모두 새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비행정에 올라 타는 일은 탐사대원들이 라온에 착륙하고 나서 겪은 가장 힘든 일이었다. 탑승 준비를 끝낸 대원들은 장 대위 안내에 따라 비행정 앞에 줄섰다. 맨 앞에서 사다리에 올라선 정태는 아래에 있던 김 중령이 밀어 올려주는데도 한 칸 오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쪽팔려 죽겠네. 이거 원. 돌아오는 대로 체력 단련실에서 살아야겠어. 고아라나 나이영이 얼마나 비웃고 있을까, 내 참’ “하하, 이 박사,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좀 올라가봐.” “김 중령도 만만치 않구먼, 뭐.” “아니, 벌써 1분 가까이 그 자리 그대로잖아! 킥킥” 다들 겨우 비행정에 탔다. 마지막으로 장 대위가 탔다. “맙소사! 이런 몸으로 대체 뭘 하겠다고 나선 건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선구자에서 외부로 통하는 가장 큰 문은 천장에 있었다. 시동이 걸리고 주출입문이 열리자 비행정은 서서히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곧장 솔개처럼 육지를 향해 출발했다. 아라가 수첩을 꺼냈다. “행성 착륙 열하루째, 드디어 여기 라온 행성을 육지를 구경한다. 대체 어떤 녀석들이 살고 있을까? 마실 물도 있겠지. 진짜 물을 마셨으면 좋겠어.”
제1장 행성착륙(3)
탐사대원들이 모두 식당에 모이니 잔칫날 같았다. 배양실에는 세균들이 만들어 놓은 식량이 넘칠 정도도 많았다. 갓난아기 주먹만한 식사거리였지만 영양도 충분했고 뱃속에서는 포만감도 생겼다. 선구자는 먹거리를 죄다 싣고 올 수 없었다. 은하계 탐사라는 이전에 없었던 일을 하는데 식사는 골치거리였다. 우주탐사국에서는 수많은 제안 중 탐사대원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에너지로 바꾸는, 세균을 이용한 영양 배양을 선택했다. 탐사 기간이 제 아무리 길어도 먹거리를 제공하는 세균. 더군다나 대원들이 호흡할 산소를 내놓으니 금상첨화였다. 맛만 있다면 더할나위 없는 완벽한 식량이었다. 탐사대원들은 이 영양식을 먹을 때면 감미료를 뿌렸다. 정태는 가끔 소금만 뿌려 먹었다. 특별한 날이면 통조림 음식을 먹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다. 배양 음식에 질린 아라나 정태가 투정을 부려야 김 중령은 선심 쓰듯 통조림을 열곤 했다. 통조림 쌀로 만든 밥과 통조림 햄, 통조림 된장찌개를 차렸다. 이런 진수성찬은 처음이었다. 김 중령은 거기에다 소주도 4팩이나 꺼냈다. 지금껏 먹지 못한 걸 한꺼번에 먹는 즐거움은 정말 각별했다. 정태는 지구가 아닌 곳에서 이렇게 소주를 마실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오로라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선구자에 실린 술부터 다 마셔버릴 거야.' 정태는 술 생각이 날 때면 오로라를 핑계대곤 했다. 살아났다는 마음에서 살랑대는 바람을 느끼며 빛살을 담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통조림을 꺼내 먹고 소주도 마셨다.아라가 홀로그램 카메라가 있는 수첩을 꺼내면서 한 마디씩 해보라고 했다. “내일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어!” 정태가 빈 술잔을 머리 위로 들며 말했다. 아라는 다른 이들 표정도 담기 시작했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김 중령, 창피하다며 손으로 카메라를 치우라는 정태,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장 대위, 그 새 우울해진 나 박사 모습이 들어왔다. “이 행성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이 정말 궁금하네요. 우린 이제 반환점에 왔다고 믿어요.” 나 박사가 한 말은 행성에 착륙한 뒤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지구로 돌아가는 걸 확신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여긴 반환점이야. 정말 돌아갈 수 있을까? 그 사람 혼은 지구로 돌아갔을까?’ 나 박사 머릿속으로 을지원 대위가 들어왔다. “장 대위! 니콥 하나씩 어때?” 정태가 장 대위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정태와 장 대위는 니콥을 좋아했다. 지구에서는 차로 마셨지만 먹는 물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우주선에서는 언제부턴가 껌으로 만들어 씹기 시작했다. 우주 비행사들 특징으로 니콥 씹는 모습을 꼽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선구자에서 깨어 있을 때면 하루에 열 개 넘게 씹었다. 정태가 지구를 떠나 은하 탐사에 나서기로 작정했을 때 니콥을 마음껏 씹거나 마셔도 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 박사는 니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둘이서만 씹을 건가? 나도 하나 줘.” 김 중령도 끼어들자 분위기는 금세 달라졌다. “여기서도 담배나 커피가 자란다면 우린 진짜 니콥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지. 아니, 아니지. 커피는 커피대로 마시고, 담배는 담배대로 따로 피면 돼. 20세기 사람들처럼 시거를 물고 폼도 잡는 거야. 하하하. 이거 생각만 해도 신나는데. 고 박사, 노아의 방주에 실어논 커피랑 담배는 무사하겠지?” “특별히 묘목으로 열 그루씩 실었잖아요. 잘 모셔 뒀으니 걱정마세요.” 아라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도 니콥을 좋아했다. 노아의 방주에는 온갖 식물 씨앗을 보관했다. 성미 급한 김 중령과 정태가 커피와 담배만큼은 생장을 멈춘 묘목 상태로 싣자고 했다. 우주탐사국도 허락했다. “하나 더 드릴까요?” 재철이 다른 이들에게 니콥을 하나씩 나눠주곤 정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은 니콥이 얼마나 돼?” “아주 많진 않습니다.” 정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수영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아라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상상이라도 하는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전 햇빛만으로 충분해요.” 장 대위도 한 마디 거들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바비큐. 고기를 못 먹은 지 너무 오래 됐어.” “저도 영양식 말고 다른 근사한 걸 먹고 싶어요.” 나 박사도 김 중령 말에 동의했다. 저마다 한 가지씩 소망을 말했다. 죽어야 하는 자리에서 밝히는 침울한 소망보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하는 소망은 제아무리 터무니없더래도 좋았다. 니콥 씹는 소리가 식당을 채웠다. 아라는 피곤했다. “아하~, 이제 쉬고 싶어요.” 나 박사가 하품하며 말했다. 다들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무중력에 익숙했던 몸이 착륙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컸다. 게다가 몇 년 만에 술까지 마셨다. 행성에서 맞이한 첫날밤에 느낀 행복은 어느 무엇하고도 비교하기 힘들었다. 대원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강제 수면이 아닌 자연스런 잠 또한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이런, 벌써 취한 거야?’ 정태는 비틀거리며 제 방으로 걸어갔다. (제1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