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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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sk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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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메모
"그 도시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청춘과 꿈을 묻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청춘과 꿈의 이야기가 있기에 어떤 폐허도 가뭇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15쪽) "혼잣말처럼 기행이 말했다.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32쪽) "인생의 질문이란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인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답해야 했다 어쩔 수 없어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그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설사 그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일지라도." (38쪽)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뿐 거기에 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85쪽) "바람이 불면 빛과 그늘의 경계가 흔들렸다. 그늘은, 빛이 있어 그늘이었다. 지금 그늘 속에 있다는 건,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에게 그 빛이 아직 도달하지 않았을 뿐." (112쪽)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문학동네, 2020)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읽기 -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읽기가 주는 역량에 대해 다시 얘기하면, 긴 글을 읽는 게 지루하고 재미도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에게 중요한 능력이,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며, 단순화되지도 않을뿐더러 단순화하는 게 좋은 것도 아니에요. 단순하게 인식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선악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등의 문제가 얽혀 있어요. 학문의 세계에서는 복잡성의 과학 등이 등장하면서 진리는 단순하다는 인식을 경계하는 분위기인데,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진리는 단순하다느니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복잡한 현상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이것은 한 사람의 역량으로 볼 때도 문제지만, 한 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서도 문제적인 일이 되죠. 복잡성을 인식하기 위해서 반드시 긴 글을 읽어야 하느냐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요. 짧은 글도 충분히 복잡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죠. 시가 대표적입니다. 시는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하죠.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추상성이 매우 높습니다. 해석이 풍부할 수 있지만 동시에 난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짧은 글을 시를 읽듯이 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인터넷 중심의 글 읽기에서 상징적으로 말하는 '세 줄 요약' 같은 걸 보면 긴 글을 읽지 않을 뿐 아니라 그걸 폄하하는 분위기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길게 설명하면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라는 댓글이 붙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도 글 마지막에 "설명충이라서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읽는 이들을 위해 '세 줄 요약'을 달아주곤 하죠. 긴 글을 읽지도 않으며, 글을 길게 쓰는 것은 민폐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김성우, 엄기호,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2020, 도서출판 따비, 143-144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