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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bi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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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타고 홋카이도:DAY 5] 삿포로-오타루. '러브레터' 촬영지를 따라 걷다보면 잊고 살던 애틋함이 피어 올랐다
고등학생 때였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를 본 것은. 처음으로 배운 일본어였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잘 있어요." 이번 홋카이도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던 곳이 러브레터의 촬영지, 오타루였음은 당연했다. 오타루로 출발하기 전 삿포로의 상징인 시계탑에 들렀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어딘가 독특한 분위기의 이 건물은 예전 홋카이도 개척기 농업학교의 연무대로 쓰였던 곳이다. 건물 안에 들어서는 순간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밖은 비가 내렸다. 삿포로에는 JR타워나 테레비타워 같은 훨씬 높은 전망대가 있지만, 이곳의 2층에서 내다보는 바깥이 훨씬 좋았다. 시계탑에서 일하는 매표원이나 안내인들은 삿포로에서 만난 어떤 이들보다도 친절했다. 이 건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 했다. 삿포로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삿포로 국제예술제의 스탬프를 모두 모으는 것. 전날 대부분의 행사장을 돌고 도장첩에는 두 개의 빈칸을 남겨둔 상태였다. 삿포로역에서 오오도리역을 잇는 지하도 전시장과 500M 미술관 두 군데를 찾아 도장을 모두 채웠다. 행사요원이 마지막 도장을 찍어주면서 밝게 웃었다. 예술제를 갓 돌기 시작한 여학생 두 명도 신기한 듯 쳐다봤다. "다 모으셨네요.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장 다 모으면 뭔가 주시나요?" "아.. 축하를..." "아, 네..." 행사요원들과 여학생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축하합니다!"라고 입을 모아 외쳤다. 뭐 기분은 좋네. 이렇게 안녕, 삿포로. 오타루는 그리 멀지 않았다. 삿포로에서 기차를 타고 불과 30여분.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도시의 번잡스러움은 사라지고 애틋함이 눈 앞을 채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에서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역앞 정문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길가를 채운 고풍스러운 건물들. 저 너머에 보이는 바다와 운하. 모든 게 완벽했다. 이 작은 마을을 너무 빨리 돌아버리면 어쩌나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먼저 일일 승차권을 샀다. 버스 정류장에서 수 분을 기다리니 복고풍의 레트로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를 타고 메르헨 교차로로 향했다. 기타이치 유리공방은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유리장식 속 일렁이는 촛불만이 드넓은 창고를 가득 메웠다. 근처에 있는 오르골박물관은 소장한 오르골이 세계 최대다. 한국의 작은 프랑스에도 앤틱 오르골이 몇 개 있지만 이곳의 소장품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근처에는 오타루의 유명한 어묵공장 가마에이 본사가 있다. 갓 튀겨낸 따끈한 어묵을 즉석에서 사 먹었다. 오타루는 미스터 초밥왕 쇼타의 고향으로 스시가 유명하지만 어묵으로 참기로 했다. 배를 채운 뒤 운하길을 걸었다. 운하도시 오타루는 과거 거대한 운하가 있었는데, 시에서 이를 메워 건물을 올리려던 걸 운하를 사랑한 시민들이 뜯어말려 운하의 절반만을 메우고 나머지 반은 남겨놨다고 한다. 이 운하가 없었다면 지금의 오타루도 없을 것이다. 기타이치 유리공방 인근을 둘러본 뒤 본격적으로 '러브레터' 촬영지 순례를 시작했다. 먼저 관광안내소인 운하플라자 옆에 있는 유리공방. 이츠키의 친구가 일하는 곳으로 나온다. 지금은 유리공방이 아닌 가죽제품 판매점으로 바뀌었다. 주인이 바뀌고 나서 옥상 전망대를 출입할 수 없게 됐다. 치사하게. 이츠키(남)의 집으로 등장한 건물은 유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었었는데, 수 년전 화재로 전소(...)했다고 한다. 묵념. 다음은 두 이츠키가 서로 마주치는 이로나이 교차로. 인근에는 과거 은행으로 쓰인 오래된 건물이 가득하다. 과거에는 이곳에 금융기관이 밀집해 '홋카이도의 월가'로 불렸다고 한다. 아직도 있는 우체국은 조성모의 '가시나무새' 뮤직비디오에 등장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조금 떨어진 구 일본유선 건물에 갔다. 러브레터 속 도서관이다. 안타깝게도 내부 공사 중으로 내년까지 휴관이어서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근처에는 운하공원과 일본 동요 '빨간 구두'의 모티브가 된 동상이 있다. 빨간 구두 동상에 달린 스위치를 누르면 동요 멜로디가 흘러나오는데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다음은 이츠키들의 학교로 나온 세이엔중학교로 향했다. 오타루 중앙로에서 3번 버스를 타고 하나조노공원 근처에서 내려 언덕길을 10분 가량 올라가면 나온다. 조금씩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언덕길에는 운동부로 보이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운동장에 서서 학교 건물을 올려봤다. 창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턱을 괸 채 먼 곳을 바라보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저 아이도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을까. 학교 안에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안 될 일이었다. 대신 근처에 있는 오타루시청과 병원을 둘러봤다. 역시 영화 속에 등장한 건물들이다. 촬영지 순례의 마지막 순서는 오타루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덴구야마산이었다. 오타루역 버스터미널로 돌아와 로프웨이 탑승장으로 갔다. 버스는 굽이길을 타고 제법 높은 곳까지 올랐다. 버스에서 내리니 한겨울처럼 추웠다. 눈이라도 내렸다면 억울하진 않았겠지만 비바람이 불었다. 로프웨이 탑승장 근처에도 유리공방이 하나 있는데, 영화 속에 나온 곳이지만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로프웨이에서 내리면 바로 영화 첫 장면의 눈밭길이다. 눈이 쌓여있지 않아 안타까웠다. 하코다테, 삿포로 모이와야마와 함께 3대 야경인 덴구야마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오타루의 야경은 다른 곳에 지지 않을만큼 아름다웠지만, 너무 추워서 오래 버티지를 못했다. 조금 걱정스러울 만큼 몸이 으슬으슬해져 탑승장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홋카이도의 대표적인 먹거리 중 하나인 스프카레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는데 분위기도, 맛도, 식당을 꾸리는 부부의 친절함도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시내로 돌아와서는 다시 운하길을 걸었다. 밤의 운하길은 낮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단순히 아름답다거나 낭만적이라기보단,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옛 생각에 푹 잠겨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거리에 눈이 쌓인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그때가 되면 누군가를 다시 그리워하게 될까. 내일은 이츠키가 '푸른 산호초'를 부르며 잠든 곳, 아사히카와 다이세츠산으로 향한다. 조금 불길한 기분도 들었다. 모쪼록 주변의 누군가에게 슬픈 기억의 장소가 되지 않기를.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