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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태극기를 설명하는 법
흰 바탕에 선명하게 그려진 태극문양, 그리고 제각각의 특별한 의미를 담은 사괘.. 너무나도 익숙한 태극기이고, 그 안에 담긴 상징을 마치 아는 듯 여겨지지만 사실 어른들도 헷갈린다. 그래서일까. SNS에 '외국인에게 태극기 설명하는 법'이라는 이름의 이미지 파일이 한창 돌아다닐 때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방법이 있냐'며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다가오는 광복절을 맞아 아이에게 태극기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함께 그려보는 시간도 가져보자. 8월 달력의 정중앙, 빨간색으로 국경일 표시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은 걸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 ‘빛을 다시 찾은 날’이라는 의미가 담긴 광복절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처럼 나라 잃은 설움을 겪어본 적도 없고 ‘헬조선’이란 말이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오르내리는 시대라지만, 그럼에도 태극기를 볼 때면 가슴 한편이 뜨거워진다. 그 뜨거운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기 ‘태극기’에 대해 알려주자. 태극기는 1883년(고종 20년) 조선의 국기로 제정되었으며, 1949년 10월 15일 대한민국 국기로 공포되었다. 흰색 바탕에 태극무늬와 건곤리감 4괘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와 함께 태극기에 담긴 의미를 배워보자. 1. 흰 바탕 “태극기의 하얀색은 밝음, 순수함, 깨끗함을 뜻해.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평화를 사랑했단다. 그래서 태극기도 이렇게 깨끗한 하얀색이야. 흰색은 우리의 민족성을 의미해.” 2. 태극문양 “원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 위는 빨간색, 아래는 파란색인데, 부드러운 물결무늬 곡선(S자)으로 맞물려 있어. 이것은 음양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뜻을 담고 있어.” 3. 4괘 “태극 둘레에 있는 무늬를 ‘괘’라고 불러. 모두 네 개가 있어서 4괘라고 부르는데, 건ㆍ곤ㆍ리ㆍ감이라는 이름을 붙였어. 건곤리감은 각각 하늘ㆍ땅ㆍ물ㆍ불 /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 동ㆍ서ㆍ남ㆍ북을 뜻해. 이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돌아간단다.” 기획 : 박시전 기자 | 일러스트 : 이현주 출처 : 다음 홈&리빙 베스트베이비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는 시체 사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 주차되어 있던 차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며 쾅 하는 굉음이 울립니다. 차위로 떨어진 물체는 놀랍게도 사람이었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6층에서 한 여성이 투신자살을 한 것이죠. 지상 86층에서 뛰어내린 시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평온한 모습입니다. 넋놓고 바라보게 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살 사진'이라고 불리는 이 사진의 주인공의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사진속 여성은 Evelyn McHale. 그녀가 자살한 그 날은, 그녀의 생일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4월 30일. 생일을 맞아 기차를 타고 약혼자를 만나러 갔던 Evelyn Mchale. 다음날인 5월 1일 아침. 뉴욕행 기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합니다. 오전 9시. 뉴욕에 도착한 그녀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갑니다. 이후 86층 전망대의 입장권을 끊은 시각 오전 10시 30분. 바로 다음순간, 그녀는 전망대에서 뛰어내려 차 지붕 위로 곤두박질 쳤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 아수라장에는 학생 작가 Robert C. Wiles도 있었고, 자살한 시체를 넋놓고 보고 있게 됩니다. 빌딩에서 떨어진, 시체라곤 믿기지 않는 Evelyn의 모습에 홀린듯 카메라를 꺼냅니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 1면을 장식할 '아름다운 시체'사진을 찍게 됩니다. 전망대의 한쪽 벽에는 그녀의 코트가 곱게 접혀져 있었습니다. 코트와 함께 발견된 것은, 가족사진으로 가득한 메이크업 가방과 유서가 담긴 작은 주머니였습니다. 유서에는 나의 가족을 포함한 그 누구도에게도 나의 시체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저를 화장시켜 주실래요? ㅡ 저를 기리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말아주세요 (“I don’t want anyone in or out of my family to see any part of me. Could you destroy my body by cremation? I beg of you and my family – don’t have any service for me or remembrance for me) 라는 유언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녀의 사진은 심지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살'이라는 슬픈 타이틀까지 얻게 되지요. 게다가 이 사진은 유명한 잡지 <LIFE> 의 “Picture of the Week” 에 오르기까지 합니다.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던 그녀의 유언과 다르게,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살한 여인이 됩니다. 무엇이 그녀를 자살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에게 기억되는 '아름다운 자살'이라니. 소름끼치면서도 자꾸 보게되는 사진이군요.
이승만, 박정희 역사왜곡과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 사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사회 역사적 논란이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정한 목적으로 정치적으로 역사를 이용하려는 세력들- 대표적으로 뉴라이트 - 과 이에 반발하는 역사학계와 시민단체들의 반응과 주장들이 얽혀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존에 새로운 연구성과와 시민 사회의 변화에 따른 논란이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뉴라이트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각각 '건국의 아버지'와 '부국의 완성자'로 일컬으며 매우 도식적인 역사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는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요? 그리고 이는 과연 올바른 역사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화에서는 이 두 인물에 대한 논란을 통해 역사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아버지다? 먼저 이승만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의 아버지라 일컫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보겠습니다. 1897년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습니다. 민중들은 이 대중 집회를 통해 국가 정책에 관해 구체적인 의지를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또 근대적 행정기관이었던 중추원을 의회로 만들려고도 했지요.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었습니다. 만민공동회의 활동 가운데 청년 이승만이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연사로 인기를 얻고 총대위원으로 선발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개인의 공을 따진다면 지도자였던 서재필이나 윤치호 등이 더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민공동회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민중의 자발적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의 풍경입니다. 만민공동회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조선 민중의 자발적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1917년에는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등의 주도로 주권이 황제에게서 국민에게 상속되었다는 내용의 대동단결선언문이 발표됩니다. 대한제국의 멸망이 일제강점기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국(民國)이 세워질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의미임을 선언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1919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도 만들어졌고요. 적법한 절차를 통해 임시 헌법을 만들고 국무총리와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그러니까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된 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의 20여 년 동안 이승만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운동가들이 분투했으며, 조선의 민중들은 깨어났던 것입니다. 다시 26년의 시간이 지나 해방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정치적 의지가 결합되어 1948년 총선거가 열렸고,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졌고, 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으로부터 1948년 정부 수립까지의 3년은 다양한 세력이 역동적으로 관계하며 역사를 만들어 온 시간이었습니다. 1945년의 해방으로부터 1948년 정부 수립까지의 3년은 간단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승만과 친일 세력만이 정부 수립을 주도한 것도 아니고 다양한 세력이 역동적으로 관계하며 끊임없이 변동하던 것이 1945년 이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1948년 건국을 강조하며 건국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세력만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차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김구, 김규식처럼 확고한 우파적 신념을 가진 민족주의자들조차 건국에 공로가 없다고 주장하지요.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이 제헌국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양심적 민족주의 세력과 중간파 세력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직 이승만의 결단과 선택에 의해서만 정부가 수립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5.10총선거 당시 그토록 뜨거웠던 민중의 참여 의지는 이승만이 만들어냈다고 하기보다는 민중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어떤 한 개인에 의해 주어졌거나 제도화된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의 산업화 덕에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어찌됐건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를 성공시켰기 때문에 민주화가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가 '압축 민주화'를 이루었다고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역사 왜곡입니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동의어가 된 예는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의 결과로 입헌주의 정치제도가 완성되었고, 그것이 식민지 경영과 맞물리면서 산업혁명의 성과를 냈습니다. 미국 역시 독립혁명 이후 산업혁명이 도래했고, 프랑스의 경우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은 독자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자유민주주의의 성장은 산업화와 별반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4.19혁명 당시 우리는 배고픔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에 반대한 6.3시위 역시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후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성장은 사실 산업화와 별반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박정희가 압축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요. 사진은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샴페인을 뿌리며 축하하는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근대화라는 단어는 결코 자유민주주의나 시민혁명과도 동의어가 될 수 없습니다. 르네상스를 통해 근대적 인간이 발견되었고, 종교개혁을 통해 종교 권력이 붕괴되었습니다. 절대주의의 역사, 신대륙의 발견, 비스마르크류의 국가 주도 성장 등등 온갖 주제가 뒤엉킨 것이 근대화의 과정이었고, 우리나라의 역사 역시 결코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근대화를 산업화와 등치 시키거나 산업화가 근대화를 낳았다는 식의 주장은 박정희에 대한 향수 또는 신드롬에 불과합니다.역사는 특정 인물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몇몇 특정 인물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한 결과물이지요. 이승만 국부, 박정희 경제 대통령을 주장하는 이들은 역사학을 정치 논리로 이야기하다 보니 기존 역사학계와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역사적 사실과 합리적인 역사 연구에 근거한 품위 있는 역사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출처 및 펀딩: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5721/episo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