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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누드(nude)화를 둘러싼 다양한 시선, 편견, 금기에 대해
이 카드는 Vingle을 시작한지 열흘 정도 지난 엊그제 제 카드의 대표작품으로 올린 세미 누드 유화를 다른 것으로 교체해 달라는 댓글을 받았는데요. 그에 대한 제 의견을 밝히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분은 본인이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고 해당 작품이 불편하기에 다른 것으로 교체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일단 저는 제 편집권을 특정인의 취향에 맞춰 포기할 생각이 없었어요. 더 나아가 누드에 대해 갖는 불편함이 어떤 것인지.. 그 금기의 역사는 어땠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여 올려봅니다. 텍스트가 상당히 긴 글인 점 미리 밝힙니다. 이런 카드는 Vingle에 맞지 않는 것인지.. 제가 분위기 파악을 못한 것인지는 Vingler들의 반응을 보면 알것 같네요. <The Source>, 앵그르 비단 서두에 적은 분 뿐만 아니라 요즘도 <누드화>라는 단어만 들어도 얼굴이 붉어지고 누드 작품을 보면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성 누드화에 대한 고금의 시선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하고자 합니다. 여성의 육체를 다룬 누드화에 대한 과거 미술계 대선배님들의 논점들도 좀 살펴보고.. 현재 시점에서 우리들의 욕망/시선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해요. 평소 누드화를 보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두면 좋으실 만하게 적어 볼까 합니다. 먼저 단순한 나체(naked)와 누드(nude)의 차이가 뭔지부터 볼께요. 누드(nude)란 단순히 벗은 몸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관찰자의 시선을 의식하여 피부의 표면에서부터 체모, 머리카락 등 모든 것이 의도적으로 변형된.. "벗은 몸을 입은 상태"라고 할수 있어요. 다시 말해 자연상태의 몸이 아니라 문화적, 예술적인 몸이라고 봐야죠. 이 글을 쓰는 저나 예전에 살던 분들이나 마찬가지의 고민을 공유하고 있어요. 바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데 육체는 나의 것인 동시에 대상으로서의 남이기도 한 묘한 존재죠. 내 육체가 항상 내 것이라는, 내가 지배한다고 믿고 계신가요? 굳이 <기생수>와 같이 통제 밖의 내몸의 일부를 판타지화한 작품까지 가지 않더라도 조금만 생각해 봐도 내 육체를 타자화하여 바라본 경험들이 있으실 거에요. 육체는 나르시시즘의 일차적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금욕주의자들에게는 정신적 완성의 위험한 적이 되어오기도 했지요. 부질없는 금욕주의는 오늘날에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육체의 매력은.. 육체가 바로 이런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면서 쾌락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기도 하고 제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죠. 이성에 항거하는 에로스인 동시에 죽음의 매개체가 되는 타나토스이기도 하고요. 바로 이 육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앎의 욕구, 지식애가 시작되었고 지식욕이란 성적욕망과 호기심으로부터 나온다고 할수 있겠죠. 그런데 이 성적욕망은 무한히 허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문화에 따른 제약과 억압, 금지의 덫에 사로잡히게 되죠. 이런 심리적 기제를 정교화한 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간단하게 설명할 실력이 없어서 패쓰하고 본격적인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젊은 남자의 육체가 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 당시의 동성애적 문화는 지탄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최고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간주됐죠. 성인남성과 미소년의 자발적인 복종.. 남녀 간의 사랑은 수준이 낮은 사랑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당시의 여성은 노예와 같은 레벨로 취급되었으니깐요. - 여성의 누드는 남성 누드에 비해 드물었다고 합니다. 중세에 오면 인간의 육체는 남녀 불문하고 보는 것이 금지되었구요. 세월을 훌쩍 넘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야 다시 시선을 인간에게 돌리게 되면서 인간의 육체가 다시 재현의 주요 대상이 되긴 하지만 르네상스가 결국 그리스적 가치의 부활이며 모방이기 때문에 남자의 육체가 다시 기준이 되지요. 남성의 육체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전투나 투쟁 중의 팽팽한 근육이라던가 전투적이고 강인한 에너지를 보여주는 쪽이었죠. 물론 모든 작품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죠. 주된 흐름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술작품의 수요를 발생시키고 감상하고 논하는 것은 항상 남성이었죠. 제가 포스팅에서 그간 얘기해왔던 시선에 관한 문제로 넘어오는데요.. 남성도 남자 육체를 보면서 즐길수 있고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습니다. 여성도 여자 육체의 재현을 보면서 감탄할 수 있죠. 그런데 이런 즐거움과 감탄은 절대적인 미에 대한 찬미에 가까운.. 1차적 시각적 쾌락을 넘어서는 승화된 차원의 지적 유희에 가깝다고 봐요. 남자의 육체에 비해 여성의 누드는 처음부터 남자들의 에로틱한 응시의 대상이었지요. 누드의 예술사는 어쩌면 이 에로틱한 시선을 어떤 식으로 처리해왔고 당대의 자기검열적 기능을 어떻게 피해왔는지 혹은 기만해 왔는지의 역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카피톨리움 양식의 비너스 vs. 보티첼리의 비너스> 헬레니즘 시대부터 여성의 누드는 소위 '수줍은 비너스'(Venus Pudica)라는 전형적인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한손으로 가슴을 살짝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카락이나 천으로 아래쪽을 가리는 자세지요. 수줍은 듯 살짝 가린 자세 때문에 시선이 더욱 집중되고 감추어진 비밀이 더 궁금해지는 효과를 낳겠지요?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성 누드에서 체모는 표현되지 않지요. (물론 당대의 서브컬쳐 혹은 산업으로 일컬을수 있는 춘화/포르노그라피는 당연히 예외로 합니다) 남성의 누드 조각을 보면 체모가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여성 누드화에서는 왜인지 비너스 푸디카의 자세에서 벗어나도 그곳에는 있어야할 음모가 나타나지 않지요. 통상의 해석은 여성의 음모를 작품에 묘사하는 것은 가장 불경스러운 일에 속하는 불문율이었다는 것.. 육욕을 자극하고 퇴폐적이고 불결하다고 느껴진다는 것이죠. 이런 해석은 단지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고 보다 근원적인 의문은 계속 남네요. 앞으로 예로 들 작품에도 보면 여성의 국부는 그곳에 원래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런 흔적이 없이 깨끗하거나 에어브러시 작업을 한듯이 흐릿하게 형태가 흐려지거나 하죠. 즉, 가려졌던 손이나 천을 걷어도 그곳에는 기대했던(?) 것이 없는 상황인 겁니다. 이런 원인에 대해 제 나름대로 그간의 공부했던 내용을 더듬어 보고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바를 가지고 추론을 해볼까 해요. 쉽게 넘어가려고 하면 '털'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성의 일부이고 부드러움은 여성성으로 간주하여 문화적인 요인에 의해 여성의 육체를 재가공하여 재현한 것으로 볼수 있겠구요.. 즉, 누드화에서 음모는 여성성을 오히려 방해하는 요소로 제거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또다른 면으로 욕망이론에 기대어 해석해보면 작품에 욕망이 지향하는 목표가 노출되어 버릴 경우 그것은 더이상 욕망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욕망은 필연적으로 결여될수 밖에 없는(충족될수 없는)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 지향점을 감추거나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야 욕망을 욕망하는 사슬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요. 누드화 하나 보면서 거기서 여자 거시기(?)를 찾는 수준으로 그림 감상하느냐는 의문이 드실수도 있는데 제가 쓰는 얘기는 단지 시각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기제를 말씀드리는 거죠. 남녀의 신체의 가장 큰 차이가 눈으로 보이는 성기의 외양의 차이이고 이 "차이"로부터 앎의 충동과 호기심이 시작됩니다. 남근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것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생기는 거세의 불안감은 여성누드화를 접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관찰자에게 욕망과 두려움, 기이함의 감정을 전달하게 되지요. 남근과 달리 여성의 성기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음모도 성기의 일부로 간주하여 이를 세트로 화면에서 지우는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런 음모론(?)은 결국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에 의해 깨어지고 뜨거운 논쟁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벌거벗은 마야>, 프란시스코 고야, 1800 이런 작품이 그려진 시기가 19세기를 목전에 둔 때라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한 듯 합니다. 당시 스페인은 누드화가 철저히 금지되어 있고 발간되면 국외 추방이 내려질 정도로 엄격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스페인 귀족들은 이런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누드화를 수집하고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소규모 전시회를 갖는 등 몰래 콩깍지는 다 까고 있던 상황이었죠. <벌거벗은 마야>도 원래는 개인소장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인데 소장자가 재산 몰수를 당하면서 그만 이 작품이 공개되어 제작했던 고야까지 종교재판에 회부되게 됩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보시는 바와 같이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음모가 표현되었다는 점과 작품속 모델의 시선이 관찰자를 당당히 향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요. 이 작품을 처음 접한 관찰자는 당당한 모델의 시선에 눈을 피해 풍만한 가슴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고 이어 배꼽쪽으로 내려갑니다. 마야의 배꼽에서 시작된 희미한 세로선은 국부에 이르러 화살촉 모양의 음모와 만나 화살표를 이루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리 사이에 꽂히게 합니다. 여성의 음모를 누드화에 표현한 것은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이 나오기 전까지 매우 이례적인 것에 속합니다. 진정한 근대적 누드화로 알려질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에서조차 여성의 음모는 표현되지 않거든요. <아레오파구스 법정에서의 프리네>, 장 레옹 제롬, 1861 이제는 여성 누드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얘기를 해 볼까해요. 제가 계속 '여성'누드화라고 하는 것은 '남성'누드화는 별도의 카드로 올릴 생각이기 때문에 '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19세기의 살롱 중심이 예술가들은 눈부신 여체를 표현을 하긴 해야겠는데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흔히 차용했던 것이 역사적인 사실처럼 보이는 고대 장르였습니다. 실체적 진실이 애매한 역사적 내용이나 신화의 맥락은 화가들에게 여체를 마음껏 그릴수 있는 명분을 주었고 감상하는 남성들에게도 심적인 부담감을 덜어줄수 있었죠. 나는 실존하는 여성의 몸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 공간을 향유하는 고상한 인격이라고.... 대략 이런 심정 아니었을까요? 위의 작품 <아레오파구스 법정에서의 프리네>라는 작품은 기원전 4세기 프리네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테마로 하고 있는데요.. 자세한 사건의 배경 얘기는 생략하고 저는 작품 자체에만 집중을 해 볼께요. (아무튼 이 여성이 수많은 남성들 앞에서 완전한 나체로 서있는 이유는 과거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좀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으로 뜬금무식의 벗기기는 아니라는 전체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왼쪽의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프리네의 변론인 히페리데스입니다)이 프리네의 몸을 감추고 있던 천을 박력있게 벗겨내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화면의 빛은 프리네에게 집중되어 여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고 붉은색 옷을 입은 배심원단은 놀라는 손짓을 하는 사람도 있고 턱이 내려와 입이 떡 벌어진 사람도 있네요. 과거사에는 이 눈부신 육체가 그녀의 무죄의 증거로 인정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 되겠습니다. 이 작품 내에는 어떤 시선들이 존재할까요? 먼저 그림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화면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요. 근데 잘 보면 이 법정은 반원형이라는 것을 짐작할수 있게 되어 있어요. 오른쪽 끝을 보시면 우리쪽(화면밖)을 향해 곡선이 구부러지다가 끝나고 있고 배심원의 발도 일부 보이고 있죠? 즉 우리는 단순 관찰자가 아니라 배심원과 동일한 시선을 가질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겁니다. 프리네는 반대쪽 배심원들에게는 잘 보이지도 않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고 친절하게(?) 화면밖을 향해 육체를 드러내고 있네요. 왼쪽 아래쪽에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는 프리네를 고소한 인물로 알려진 사람이 이 장면에서 소외되어 앉아 있어요.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프리네의 빛나는 육체를 볼수 있지만 단 한사람.. 고소한 인물은 프리네를 감쌌던 천이 그의 시선을 차단하기 때문에 볼수 없는 유일한 시선이 됩니다. 그리고 프리네의 시선. 통상의 누드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눈을 아래로 깔거나 화면의 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식으로 관찰자를 의식하면서도 의식하지 않는 척(내숭이군요)을 해왔지요. (앞서 소개한 고야의 마야는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하는 거구요.) 그런데 이 작품의 프리네는 우리(관찰자)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근대적 수치감"을 화면에 표현한 최초의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음을 모델이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인식한다는 사실이 관찰자의 시선을 더욱 가학적으로 변모시킬지도 모르겠네요. <밧세바>, 장 레옹 제롬, 1889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과 밧세바의 에피소드를 다룬 내용입니다. 해당 에피소드를 초간단 요약하자면.. 다윗왕이 재상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음욕을 품고 우리아를 변방에 보내 죽게 하고 밧세바를 취합니다. 아이를 낳았으나 하나님의 진노를 입고 잃고 회개하고 둘째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지혜의 상징 솔로몬 왕입니다. 위의 장면은 밧세바가 목욕하고 있는 장면을 왼쪽 위의 난간에서 다윗왕이 보고 있는 장면이군요. 허리를 굽히고 잘못하면 난간에서 추락할 정도로 열심히 관찰하시네요~ 다른 화가가 그린 밧세바에는 다윗왕은 깨알만큼 작게 나오고 통상 밧세바의 몸을 관찰자 쪽으로 돌려놓고 있는데요.. 제롬의 버전은 육감적인 뒷모습을 관찰자에게 보이고 있고 밧세바의 앞모습은 다윗왕과 그녀 앞의 하녀에게만 노출됩니다. 관찰자의 시선은 먼저 밧세바의 뒷모습을 보고 하녀의 시선에 대입하여 앞모습을 보게 되지요. 찾다보면 다윗을 발견하고 그 시각까지 확보합니다. <로마의 노예시장>, 장 레옹 제롬 제롬은 다양한 시선 활용의 구루로 보입니다. 앞선 프리네 케이스와 밧세바 케이스의 조합이라고 볼수 있는데요. 마치 스트립쇼와 같은 장면을 화면 가득히 보여주고 있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프랑스 당대에 벌어지는 일이 아닌 예전 로마라는 exotic한 다른 세상일이라는 것이 키메시지입니다. 관찰자들은 마치 토탈리콜마냥 꿈을 여행하듯 자신의 시선을 부담없이 화면 안의 인물에게 대입할 수 있게 되죠. 어두운 배경에 대비된 여성의 뒤태에서는 에로티시즘이 묻어나네요. 개인적인 감상의 느낌은 얼굴을 가리는 행위가 수치심을 표현하는 효과도 있지만 겨드랑이를 앞에 있는 남성들에게 보여준다는 의미도 큰 것 같네요. 겨드랑이는 회화에서 큰 의미를 갖고 다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제롬의 작품들에서는 에로틱한 함의가 있는 듯 하네요. 성감대로서의 겨드랑이, 평소에는 감춰져 있는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음부의 대체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네요. 요즘도 문화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여성의 겨드랑이 제모를 강요(?)하는 분위기이고 왜인지 겨드랑이에 집착하는 페티시즘을 가진 남성들도 있는 것을 보면 겨드랑이가 가진 성적 기표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로마의 노예시장>, 장 레옹 제롬 위와 같은 상황인데 조금 다른 버전입니다. 로마시대의 노예는 재산으로서 생식력이 있는 여성 노예, 특히 젊고 아름다운 노예는 높은 값에 매매되었다고 하네요. 지금 거래되고 있는 여인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무기력한 상황인듯 하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사춘기를 지나려 하는 것으로 보이는 소녀는 반쯤 얼이 빠진 표정인듯 합니다. 잠든 아이인지 아픈 아이인지를 안고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어머니도 곧 자신에게 닥칠 수모의 시간을 무기력하게 기다리지만 주변의 어린 소녀와 남자아이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통 모르는 눈치인 것이 더 비극적이네요. <노예 매매>, 장 레옹 제롬 노예의 건강을 치아상황을 통해 검사하는 장면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짐승도 아니고 - 물론 노예를 당시에 짐승 취급은 했지만 - 이를 본다고 뭐를 알수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제 해석으로는 여성의 입은 질을 상징하고 남자의 손가락은 성기를 상징하는 구도로 해석이 되는군요. 앞선 노예시장의 장면이후의 모습일지 아니면 개인거래 장면일지 모르겠지만 직접적으로 노예가 될 여성의 육체에 손을 대고 물리적인 지배를 시작하는 장면의 긴장감이 읽힙니다. 노예여성의 오른손은 주인될 남자의 옷에 가려져서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는듯 하구요. <The Bookah lighter>, 장 레옹 제롬 이어진 여성 누드화들은 exotic한 공간을 핑계로 신화나 역사와는 무관한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목욕탕이나 화장대, 침실 등 사적인 공간까지 관음증적인 시선을 찔러넣습니다. 화면에 이제는 남성이 등장하지 않네요. 철저히 유령처럼 방심한 여성들을 훔쳐보는 시선만이 존재합니다. 위의 그림을 포함한 아래쪽의 몇가지 여성 누드화는 앙리 제르벡스의 작품인데요.. 마치 화폭 속의 여성은 화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지 않은듯 무신경한 상황인 것이 보는 사람에게 그동안의 누드화가 다른 느낌을 줍니다. 남성의 시선으로는 호기심과 관음증의 심리를 극대화시킬 것이고 여성의 시선에서는 당혹스러움과 노출심리의 떨림이 공존할 것 같네요. 몇개는 그냥 작품만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지쳤음 ㅠㅜ) 이어지는 여성 누드화는 1860~70년대 프랑스 회화에서 누드화의 절정을 이루었던 살롱 전시작 및 만국박람회 출품작들을 볼께요. 이 작품들은 당대에도 지금도 찬반이 엇갈리는 작품도 있어요. 지나치게 인공화된 여체, 핀업걸같은 선정성, 작위적 포즈 등이 문제가 되었구요. 에밀 졸라는 "장및빛과 흰빛의 과자로 만들어진 감미로운 고급창녀처럼 보인다"는 평까지 내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쭈욱 소개드릴 알렉상드르 카바넬과 윌리엄 부그로, 앵그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육체는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네.. 그냥 닥감(닥치고 감상)입니다. <목신에게 유괴당한 요정>, 알렉상드르 카바넬 살롱에 출품된 이 작품은 당시 나폴레옹 3세가 바로 구매했다고 합니다. <The Source, 샘>, 앵그르, 1856 샘의 정령으로 보이는 이상화된 여체의 여인이 끝없이 샘솟는 맑은 물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 <비블리스>,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눈물이 넘쳐서 샘이 되었다는 비블리스입니다. 친오빠를 사랑해서 마음을 고백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울고 또 울어서.. 눈물에 온몸이 녹아내려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는 슬픈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블럭의 제한 때문에 각 작품의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요. 아마 카드라는 것이 이런 스타일로 쓰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일지도.. ㅎㅎ 아무튼.. 이제 좀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네요. 19세기 중반 화단에 넘쳐난 여성 누드화는 대부분 살펴본 바와 같이 신화와 역사적 과거의 장면, 혹은 동시대라고 해도 전혀 이국적 공간을 빌려 당대의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음을 강조해 왔습니다. 모델을 보고 그렸다고 해도 화폭에 등장하는 여성은 이상화된 여체로 여신이거나 현실에서 만날 일이 없는 존재였죠. <올랭피아, Olympia>, Edouard Manet, 1863 그러던 시점에.. 널리 알려진대로 마네가 사고를 하나 칩니다.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야만적이고 외설적이라고 큰 비난을 받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다 괜찮은데 이 <올랭피아>는 안되는 이유는 다름아닌 이 여성은 실존하는 현실의 창부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죠. 당시의 남성들은 집에는 가사 관리 및 양육 담당으로의 아내가 있었고 밖에서는 고급 창부들과 즐기는 것이 하나의 문화(?)였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는데 <올랭피아>는 바로 이 불편한 곳에 돌직구를 던진 겁니다. 내가 어제밤에 안았던 비밀로 했던 그 여인이 지긋이 작품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남성들은 화들짝 놀라고 목소리 높여 비난할 수 밖에 없을테죠.. 아무튼 <올랭피아>로 인해 누드화는 현실성의 재현 가능성에 대한 답을 찾았고 이후 마네를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로 만들었지요... 이상으로 근대의 여성누드화를 중심으로 시선에 관련된 내용을 극히 일부만 건드려 봤어요.. 그곳에 있지만 있지 않기로 한 여성의 그곳을 중심으로 한 긴장은 결국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으로 시원한(?) 종지부를 찍지만 실제로 <세계의 근원>은 당대에 이슈화된 것이 아니라 20세기 중반을 넘어 자크 라캉 사후 그의 유품에서 발견되어 놀라움을 주었죠. <세계의 근원>은 당대 미술사에 실제적인 영향은 미미합니다. 다만 욕망의 끝판왕의 상징이 자크 라캉의 소유에 있었다는 것에서 심한 패러독스가 느껴집니다. ㅎㅎ 아직도 누드에 대해서 할 말은 넘쳐납니다. 오늘 작성한 카드에는 요즘으로 말하면 eye candy식으로 소비될 수 있는 클래식하고 이상적인 몸매의 여성 누드 중심으로 소개해 드렸지만 조만간 모더니즘 이후, 특히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소위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에 나타나는 비전형적인 누드들에 대해서도 소개를 드릴께요.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도 높이고 다양한 누드에 대한 감각(?)도 키울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또 하나 제가 건드려야할 영역 중의 하나는 남성 누드입니다. 남성 누드는 회화 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어려울 것 같아서 사진 예술과 함께 포스팅해야 할 것 같아요. 다만.. 남성 누드를 있는 그대로의 예술로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점은 제일 처음 얘기했던 '보수적인' 빙글러의 시선이나 과거의 자유롭지 못한 시선과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스스로의 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분명히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여성누드를 대하는 시선에 대한 얘기는 많이 푼 것 같습니다만, 아직도 편견이나 금기에 대해 충분한 검토가 되진 않은 것 같아요. 다른 카드를 통해 더 많은 얘기를 나눠보도록 할께요. 오늘은 요기까지~! Fin 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