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덕선이의 '끝사랑'은 최택일까
어쩌다 남편은 류준열이라고 확신했을까, 반성 및 현실 복귀를 위해 써보았다.
14화까지 진행된 지금, 응팔의 서사를 위주로 본 택이가 남편일 수 있는 이유. 1.응답하라 시리즈의 서사, 남편 찾기
응답하라 시리즈는 서사보다는 캐릭터가 강조되는 드라마다. <응답하라 1997>은 '열여덟, 오빠들이 내 삶의 전부였던' 시절'에 대해, <응답하라 1994>는 '팔도청춘 in 서울, 촌놈들의 전성시대'에 대해, <응답하라 1988>은 다섯 가족이 어울려 살던 골목에 대해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좌충우돌하며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극을 이끌어가는 서사는 필요하기에, 큰 줄기를 이루는 메인 서사로 여주인공의 남편 찾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응답하라 시리즈는 지금까지 초반에 등장하는 회상씬이 메인 서사를 알려주고, 그 서사의 주인공이 남편이라는 점에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응답하라 1994>
2화에 등장한 응사의 회상씬은 이 드라마가 21화에 걸쳐 풀어낸 러브라인의 주제를 압축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오빠 친구는 우리 오빠가 되었다. 나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다. 어릴적 나의 꿈은 오빠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정이의 나레이션 뒤로는 쓰레기의 테마 곡. "너의 말들을 웃어 넘기는 나의 마음을 너는 모르겠지
너의 모든 걸 좋아하지만 지금 나에겐 두려움이 앞서" 오빠와 결혼하는 것이 꿈인 한없이 순수한 나정이, 그리고 나정이에게 오빠가 되어주었기에 선뜻 남자로 다가갈 수 없었던 쓰레기의 사랑. 이것이 응답하라 1994의 메인 서사이고, 남편 찾기가 쓰레기로 귀결될 수 밖에 없던 이유이다.
후반부 극한의 남편찾기 낚시질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남편을 정해 두었던 제작진이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단 한 번만 등장시키는 어린 시절 회상씬을 이렇게 구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응답하라 1997>
1화부터 등장하는 회상씬에서 윤제와 시원의 어린시절 뒤로 깔리는 노래는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하지만 미안해 네 넓은 가슴에 묻혀 다른 누구를 생각했었어
미안해 너의 손을 잡고 걸을 때에도 떠올렸었어 그 사람을" 응칠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공유해왔던 친구가 첫사랑으로 다가오고, '다른 누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첫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서사에서 주 갈등이다. 시원의 언니를 시원에게 대입해 다가가는 태웅, 그리고 태웅을 만나다가 뒤늦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윤제라는 것을 자각하는 시원, 그리고 형을 사랑하기에 쉽게 시원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윤제의 삼각 관계가 그려진다.
이처럼 1화부터 등장한 응칠의 회상씬 역시 윤제와 시원이를 통해 제작진이 말하고 싶었던 첫사랑의 서사, 그리고 BGM을 통해 앞으로 삼각관계의 방향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응답하라 1988> *영상을 못찾겠네요. 응답하라 1988 2화 77:10부터.
그렇다면 제작진이 응팔 회상씬에서 전달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응팔의 회상씬은 택이가 이사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택이가 5인방 중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덕선이의 나레이션이 말한다. "말없는 아이와 시끄러운 넷은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그렇게 우린 다섯이 되었다." 동화같은 회상씬 뒤로 흐르는 음악은 동물원의 '혜화동'.
만약 전작들을 따른다면, 이 회상씬은 드라마의 메인 서사(=남편찾기=러브라인)를 함축해 보여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두 명의 친구가 등장하는 '혜화동'의 가사가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이 회상씬에는 5인방 모두가 등장하지만, 화자는 덕선이며 서사는 택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선우와 동룡이는 택이의 짐을 들고 먼저 출발했으며, 정환이는 자신의 소중한 보물(딱지)을 주고 앞서 가지만, 덕선이는 택이를 업고 함께 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무표정이었던 어린 아이가 여러 사건사고를 통해 결국 5인방의 하나가 되어 활짝 웃는 마지막 장면에서 포커스는 택이에게 맞춰진다.
'어남류'라고 속단하기 전에 숙고해봐야할, 제작진이 던져준 첫 번째 힌트. 왜 남편에게만 허락되며 메인 서사를 함축하던 회상씬을 덕선이를 화자로 하는 택이의 이야기로 구성했을까. 2.내 '끝사랑'은 가족입니다
첫사랑은 응팔 러브라인의 상징이다. 그런데 '끝사랑'이란다. 처음에는 응팔이 가족극을 표방하기에 나온 카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이는 중의적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제작진이 남편 낚시를 위해 '의도적으로' 숨겨왔던 응팔의 메인 서사가 11회에서 14회를 거치며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14화까지 온 지금, 응팔의 메인 서사는 '덕선이가 끝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마치 아이돌을 좋아하듯 멋지고 친절한 선우를 향했던 소녀의 첫사랑은, 선우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끝났다 (1-6화).
조심스러워진 덕선이에게 스며든 것은 정환이의 마음. 손끝만 스쳐도 터질듯한 긴장감에 가슴 뛰는, 사춘기의 두 번째 사랑이 현재진행중이다 (7-14화).
그리고 그 사이, 덕선이는 또 다른 소년 택이와 둘 만의 시간을 쌓아 왔다. 바둑을 두는 그의 세계를 접했고, 담배를 핀다는 비밀을 공유했으며, 밥을 먹지 못할까 약을 많이 먹을까 걱정이 깊어졌다. 그런데 그런 덕선이는 아직 택이가 내가 없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을 모르고, 그가 내 손바닥 안에 있는 소년이 아니라 짐작도 할 수 없는 깊이의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어른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런 덕선이에게 동룡이는 질문을 던졌다. "덕선아, 넌 어떠냐구.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거 말고, 너, 네가 좋아하는 것은 누구냐고." 덕선이는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했기에 좋아하게 된 선우, 상대가 나를 정말 좋아했기에 마음이 향하게 된 정환이를 거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서사로 본다면, 덕선이의 끝사랑이자 세 번째 사랑은 택이인 것에 무리가 없다. 아직까지 덕선이에게 자신의 패를 내보이지 않은 한 사람. 그래서 덕선이의 '끝사랑'이, 덕선이의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는 완벽한 서사를 쓸 수 있는 사람, 택이. 3.응답 커플의 공식
응답시리즈는 가족보다 가깝던 이들이, 서로에게 낯설음을 느끼고 사랑을 느껴서 결국에 진짜 가족이 되는 과정을 그려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메인 커플이 겪는 가장 큰 갈등은 '시차'였으며, 그 간격에 '가족'이 개입한다. 응칠에서 소년은 어른이 되었지만 소녀는 아직 자라지 못했던 그 때 친형 태웅이 등장해 윤제의 사랑을 멈췄다. 응사에서 나정이의 마음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쓰레기를 가로막은 것 또한 '가족과도 같은' 성동일, 이일화와의 관계였다.
'어남류'라는 말에 따라 정환이를 남자주인공으로 철썩같이 믿고 있던 1회에서 10회까지는, 응답시리즈의 전유물인 남여 주인공의 시차, 그리고 가족이라는 갈등 요인의 개입이 5인방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했다. 가족만큼 소중한 것이 5인방의 우정이기에, 초반에는 선우가 중반에는 택이가 '확실한 남편' 정환이 덕선이에게 다가가는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하지만 그럼에도,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덕선이와 정환이 둘만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의아했다. 이건 응답 제작진들이 가장 집착하는 부분 아닌가.
그런데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덕선이와 가족의 '애틋함'이 있는 독점적인 관계로 택을 그려냈다. 택은 5인방 중 덕선이네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다. 14화에서 노을이를 챙기는 모습과 택이를 챙기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 것은, 아직까지 택을 '동생처럼' 여기는 덕선이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택이를 '가족처럼' 대하는 덕선이의 모습을 보여준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택이 덕선에게 다가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혹자는 그렇기에 택은 남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끝사랑은 가족입니다'는 의미심장한 문구, 그리고 수회에 걸쳐 택이와 덕선이의 관계를 공들여 그려내는 제작진의 의도, 무엇보다 전체 서사를 생각할 때 택이가 남편일 가능성 역시 배제하기에는 섣부르다.
물론 택이 덕선의 '끝사랑'이 되려면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응답시리즈 또 하나의 불변의 공식, '낯설음'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덕선이에게 택이가 남자로 다가가야 하고, 덕선은 택이 어색하고 불편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택이는 응칠의 태웅처럼, 응사의 칠봉처럼 소중하지만 설레지는 않는 '고마운 존재'로 남고 말 것이다.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택이에게 있는 희망은 이 대사에 있다. 응칠의 태웅, 그리고 응사의 칠봉과 달리 택은 아직 자신의 진짜 모습을 덕선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제작진은 공중전화 영화 씬, 담배 씬에 이어 고백 예고 씬까지 꾸준히 택이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덕선이 택을 새삼스럽게 낯설게 여길 수 있는 바탕을 꼼꼼하게 채워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택은 예고했다. 곧,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이제 6회가 남았다. 덕선이가 가족 같던 택이를 갑자기 낯설고 불편하게 느끼고, 택이를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자신을 향하는 택이의 우주 같은 사랑을 알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완전한 끝사랑을 찾는 성장의 서사를 완성시키기에 모자람 없는 시간이다. 반면 서로의 마음 확인만 남았기에 이미 4회를 철벽과 오해로 끌어온 정환이와 덕선이의 서사는 앞으로 6회의 전개를 더 끌고 가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물론 택이는 정환이에 비해 여전히 불리한 선상에 서 있다. 택이와 덕선이에게 앞으로 쌓아갈 서사가 있다면, 정환이와 덕선이에게는 지금까지 제작진이 섬세한 연출로 쌓아준 감정들이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남류'를 외치기에는 아직 택이가 든 패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