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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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 다섯 살
오늘도 같은 꿈에서 깼다. 검푸른 저 너머에서 날 부르는 엄마의 다정한 소리가 온몸을 감쌌다. 빛이 들지 않는 심해에서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리운 형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득히 멀어지는 소리를 부여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면 뜨기 싫은 눈이 다시 뜨인다. 숨을 곳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될 것이다. 고향을 잃어버린 건 3년 전 일이다. 임연수 떼가 많던 북극의 바다에서 나는 순식간에 한 러시아 배로 거둬들여졌다. 아직 엄마의 향긋한 젖내음이 입가를 채 떠나지 않았을 때였다. 보고 싶은 엄마도, 영원할 것 같던 넉넉한 바다도 그날 이후로 영영 잃어버렸다. 하루아침에 이별하게 될 것들인 줄은 정말 몰랐다. 미리 알았다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을 텐데. 늘 궁금했던 남쪽 바다로도 한번쯤은 헤엄쳐 갔다 왔을 텐데. 수천 번 돌이켜도 수천 번 후회되는 그날 이후로 나는 1년 7개월 동안, 지름 6미터의 수조에서 형벌 같은 시간을 살아야 했다. 원주의 숭어 양식장에서 기약 없는 나날들을 지냈다. 형과 누나도 하나씩 함께였는데, 1년 반 전 어느날 지금 이곳으로 같이 옮겨졌다. 전보다 넓은 곳이긴 했지만 깊이는 고작 7미터였다. 몸 길이보다 조금 더 깊을 뿐인 이 물에서 앞으로 얼마나 살아야 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며칠 뒤 사람들이 몰려 왔다. 아쿠아리움이 문을 연 거라고 했다. 우리 셋은 '아쿠아리움의 간판 스타'로 소개됐다. 희고 매끄러운 몸매, 두툼한 이마, 올라간 입꼬리... 사람들은 손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를 들고 있었다. 먹이를 얻기 위해 맘에도 없이 물방울 쏘는 묘기를 부리는 날이 이어졌다. 수족관에서 물이 샌 날도 있었다. 저 작은 틈이 와장창 벌어지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을 불쾌한 공사 소음에 시달리고 나니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올라간 입꼬리를 원망한 날이었다. 그날 밤 꿈에서는 내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우울하고 무서운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바다여서 행복했다. '바다의 카나리아', 우리에게 붙은 별명이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목소리를 잃었다. 무궁한 바다로 부드럽게 퍼져 나가던 내 소리가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리를 내 봐도 성가신 유리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어지러울 뿐이었다. 입을 다물고 수족관 안을 빙빙 돌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수십 쌍의 눈동자가 똑같이 빙빙 따라다녔다. 답답하고 괴로웠지만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누가 보는 게 싫을 때면 바위나 해초 뒤에 몸을 가리곤 했었는데, 이제는 숨을 곳마저 없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자제력이 사라졌다. 결국 옆에 있던 누나를 거칠게 물어뜯고 말았다. 놀란 눈동자들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난 감기를 자주 앓았고 먹이도 잘 먹지 못했다. 반쯤 뜬 눈으로 유리벽 밖을 바라봤다. 새벽 다섯 시가 가까워 온다. 오늘도 답답하고 아프고 괴로운 하루가 될 것이다. 눈을 다시 감으니 꾸다 만 꿈이 이어진다. 수족관과 꿈의 경계가 점점 흐려진다. 생각해 보면 살아 있을 모든 이유를 잃어버린 것 같다. 몸이 무겁고 몽롱하다. 이대로 가만히 가라앉아야겠다. <4월 2일 새벽 다섯시경, 롯데월드 아쿠아리움에서 다섯 살 수컷 벨루가 '벨로'가 폐사했다. 벨루가의 수명은 자연 상태에서 평균 50년이다.>
컵라면과 티타임
우리나라는 한 사람당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다. 국민 한 명이 평균 76봉지를 먹는다고 하니 모두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라면을 먹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가만 뜯어보면 라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을 여럿 갖췄다. 5분 내외의 '빠른' 조리가 가능하고 화끈한 '매운' 맛을 가지고 있으며 뜨끈한 '국물'도 제공한다. 게다가 식품공학의 결실로 갖은 조미 기술이 더해져 맛까지 좋다. 라면 앞에선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라면을 어디에 담아 먹느냐는 제법 많은 것을 나타낸다. 그릇에 잘 담아낸 라면은 대개 누군가가 끓여준 것이다. 송송 썬 파와 계란 노른자를 정갈히 곁들여 내기도 한다. 이런 경우 라면은 별식으로서의 끼니다. 가스불 위에 올라가 있던 라면을 통째로 식탁으로 옮겨와 냄비 뚜껑 위에 덜어 먹기도 한다. 여기서는 혼자 때우는 한 끼의 모습이 그려진다. 라면의 참맛은 양은냄비가 살린다며 그를 굳이 고집하는 이도 있긴 하니 냄비에 먹는 라면도 그럭저럭 모양새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스티로폼 그릇에 담긴 라면을 보노라면, 이따금씩 상념에 빠진다. 도심 속 편의점은 현대인들의 까닭 모를 헛헛함을 달래기에 적당한 곳이다. 몇 걸음 걷다가 괜히 고개를 한번 휙 돌려 보면 편의점 한 곳쯤은 어김 없이 눈에 들어온다. 진열대에는 색과 크기가 다양한 컵라면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가득 들어서 있다. 돌아서면 배가 고픈 고등학생들은 학교를 마치고 삼삼오오 편의점으로 몰려간다. 주린 배를 엄마의 손이 달래주기엔 학원 갈 시간이 촉박하다. 건강에 좋지 않은 건 얄궂게도 맛이 좋다. 십대 특유의 왕성한 식욕은 그렇게 거의 매일같이 컵라면을 들이킨다. 늘 동동거리며 뛰어도 늘 시간이 부족한 뭇 사회인들에게 그릇에 잘 담긴 라면은 어쩌면 사치와도 같다. 편의점 한켠에 마련된 좁다란 테이블 앞에서 앉는 것은 고사하고 선 채로 컵라면을 먹는다. 유리창 너머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세라 스티로폼 용기에 코를 박고 먹는 행위에 집중한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식사가 끝나면 서둘러 자리를 뜬다. 스티로폼 그릇은 다른 그릇들처럼 라면을 뜨끈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오래 두면 환경호르몬이며 발암물질 같은 것들이 나온다고도 한다. 국물을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 보면 어느덧 바닥이 드러나는데, 다 먹었다는 개운함보다는 왠지 모를 후회감이나 씁쓸함 같은 것들이 밀려온다. 흡사 티타임과도 같은 의식이 아닌가. 설탕을 듬뿍 탄 홍차 한 잔은 인류 최초의 패스트푸드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기계에 뒤지지 않기 위해 차를 입에 호록 털어넣었다. 다디단 차 한 잔이 이들을 당과 카페인으로 금세 재충전시켰다. 티타임의 유래다. 어쩌면 우리는 영국인들의 홍차처럼 컵라면을 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면을 제대로 된 그릇에 담을 시간이 없어 우리는 운전석에서든 공원 벤치에서든 서서든 앉아서든 어떻게든 컵라면을 먹는다. 그리고는 라면을 뱃속에 담아넣은 것처럼 스스로를 일상 속으로 다시 밀어넣기 위해, 텅 빈 스티로폼 그릇을 두 손으로 조각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소나기는 맞으라고 오는 거다
여름이 좋은 건 아직 밖이 훤한 오후 8시, 단내 가득한 과일들, 피를 실컷 빨아 몸이 통통한 모기를 으깨 잡는 쾌감, 가족끼리 떠나는 휴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나기! 쏘나기. 소나기 내리기 직전의 하늘은 더이상 한바탕 쏟아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는 듯 잔뜩 시커멓다. 묘한 긴장이 자리한다. 바람이 멈추고 공기는 소리를 먹어삼키고, 각오라도 하는 것처럼 모두 잠시 정지. 3, 2, 1, 땡! 이내 신나게 두드려 맞는다. 하늘에 쌓였던 힘이 주체 못하고 토해져 나온다. 엄지손톱만 한 빗방울들이 땅을 선득하게 두드리면 더운 흙냄새도 피어오른다. 소나기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던 무엇이다. 오직 그 순간, 그곳에서 내리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후회 없이 쏟아붓고 가뿐히 사라져버리기를 바랄 뿐이다. 그 누구라도 어찌할 수 없었던 강렬한 에너지였다는 점이 괴팍한 천재 예술가 같은 걸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화가였다면 자신의 귀를 잘라 버렸거나, 방바닥만 한 캔버스에 물감을 마구 집어 던졌거나 했을 것 같다. 비슷한 후련함이 있다. 천둥과 번개는 이 상상의 나래에 훌륭한 음향과 조명이 되어 준다. 풀어낼 예술혼 같은 건 없지만, 풀고 싶은 응어리는 제법 있다. 지지부진하고 별 것 없는 하루하루의 삶이 빚어낸 것들이다. 쏘나기! 후련한 영감의 세례를 베푸는 그 의식에 참여해서, 정신 못차리도록 얻어 맞고 싶다. 그런데 가만 보니 물에 적셔서는 안 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지녔다. 내 스마트한 기기들이 침수되는 것만큼 곤란한 일이 또 있을까. 드라이한 머리는 한번 물에 젖으면 절대로 원래 모양이 살아나지 않는다. 워터프루프 아이라이너를 쓰지도 않았고... 신발은 자칫 빗물에 잘못 담궜다간 여름 내내 콤콤한 냄새를 떨치지 못할 수도 있다. 펜으로 쓴 글씨들은 얼룩처럼 번지고 말 터라 한동안은 고고학자들처럼 해독에 열을 올려야 하겠지. 그러니 실컷 맞으라고 소나기가 내려 줘도 결국 처마 밑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갈 밖에. 예고라도 해주고 내린다면 한번쯤은 완벽히 준비된 상태로 - 워터프루프 화장을 하고, 방수기능이 탄탄한 기기들을 들고 - 맞아볼 텐데. 그러고 보면 어디를 가든 광장 분수대 물줄기 사이를 신나게 넘나들며 노는 것은 애들뿐이다. 혹시라도 예기치 않게 바닥에서 물줄기가 솟구칠까봐 잰걸음으로 그곳을 지나는 건 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을 자유는 애들에게도 나에게도 똑같이 있음에도. 누굴 탓하리. 언젠가 운이 좋아서 내가 준비가 되어 있다면 소낙비 한번 시원하게 두드려 맞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이번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때 맞는 소나기를 꼭 만났으면 좋겠다. 기억에 남는 여름이 될 것 같다. (이미지출처:텀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