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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취향’ 복구하는 피규어 수리 장인
“돈 안되는 일 계속 하는 이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피규어 수리 장인 안경섭 씨가 말하는 ‘일의 의미’ ▼ '피규어 수리 장인' 안경섭 씨가 피규어를 복원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얼마 전 온라인에 ‘루리웹(게임 커뮤니티)의 흔한 피규어 수리 장인’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게시물 한 편. 누군가가 망가진 피규어(캐릭터 정밀 모형)를 복구하는 과정을 담은 이 게시물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엉망진창이 된 피규어가 감쪽같이 제모습을 되찾는 광경을 목도한 이들은 그를 ‘피규어계의 이국종 교수님’이라 불렀다. 이‘장인’의 정체는 피규어 파손 복구 전문가 안경섭(만 41세·사진) 씨다. 부러지거나 칠이 벗겨진 피규어를 의뢰 받아 새것과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해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온라인 상에서 '장인'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는 “처음부터 피규어 수리업으로 먹고 살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 업종을 생계 수단으로 삼을 만큼 돈벌이가 되는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은 탓이다.그럼에도 그가3년째 이 일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인의 간절한 부탁으로 시작한 일, 어느 순간 ‘직업’이 되다 만화나 영화, 게임 캐릭터처럼 가상의 존재를 실물로 구현한 ‘피규어(figure)’.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실물을 소장할 수 있다는 매력 덕에 마니아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왔다. 최근 만화를 소재로 한 히어로 영화들이 인기를 끌고, 웹툰·메신저 서비스에서도 캐릭터 상품을 앞다퉈 내놓으면서 대중에게도 친숙한 장난감으로 자리 잡았다. 피규어의 가치는 가상의 형태를 실물로 얼마나 세밀하게 구현했느냐로 결정된다. 여기서 ‘내구성’은 중요한 조건이 아닌 탓에 대부분의 피규어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러지거나 칠이 벗겨진다. 그러나 ‘관상’이 주목적인 피규어는 파손되면 그 가치가 사라지기 마련. 문제는 손상된 제품을 수리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본래 영상 편집 일을 하던 안 씨가 처음 망가진 피규어에 손을 댄 것도 수리 업자를 찾지 못한 지인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비즈업 촬영 날 작업한 피규어는 만화 <원피스>의 ‘럭키 루’. 두 무릎과 발목이 동강나 안 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 “아는 형이 집들이를 갔다가 남의 피규어를 쳐서 부러뜨렸나봐요. 다시 사 줄 수도 없는 한정판 제품이라 제게 부탁을 한 거예요. 그때 일을 잠깐 쉬고 프라모델(조립 모형)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형은 혼자 고민을 엄청 하다가 부들부들 떨면서 부탁한 건데 딱 보니까 쉽게 고칠 수 있겠더라고요. 수리를 해줬더니 주인이 굉장히 좋아하더라는 말을 들었죠. 그땐 그냥 그러고 말 줄 알았어요.(웃음)” 안 씨가 다른 모든 일을 접고 본격적으로 수리업에 ‘올인’하게 된 건 인터넷에 복구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서 부터다. 게시물이 유명세를 타면서 그에게 망가진 피규어를 맡기고 싶다는 연락이 물 밀듯 밀려든 것이다. “제각기 간절한 사연을 지니신 분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적당히 오다 끊길 줄 알고 의뢰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끝이 없는 거예요. 좀 잦아들었다 싶으면 또 밀려오고. 그러다보니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죠. 지금은 이것 때문에 다른 일을 아예 못하고 있어요.” 부러진 발목 부분에 구멍을 뚫어 황동봉을 박아 넣고 순간접착제로 종아리와 신발을 붙여 준다. “이 일이 직업이 될 줄은 몰랐다, 결코” 안 씨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이 흔히 갖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 그가 ‘엄청난 피규어 마니아일 것’, '이 일로 돈 방석에 올랐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안 씨는 오히려 ‘그 반대’라며 고개를 젓는다.  “의뢰가 들어온 피규어들은 대부분 제가 잘 모르는 캐릭터예요. 피규어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습니다.(웃음) 제가 이걸 직업으로 삼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이 일이 돈이 되는 직업도 아니거든요. 새 제품 가격보다는 낮아야 하니까 무작정 공임을 높이기 힘들어요. 손기술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박리다매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도 아니고요.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이 적은 이유죠.” 같은 방법으로 무릎 역시 몸통에 접착, 황동봉을 넣어 접착부를 지지해줘야 다시 부러질 확률이 낮아진다. 안 씨의 말처럼 피규어 수리업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좋은 직업은 아니다. 피규어를 판매하는 곳이 갈수록 늘고 있지만 전문 수리 업자는 쉽게 찾기 힘든 이유기도 하다. 게다가 창작자의 자존심 문제 역시 큰 심리적 장벽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원래 하던 영상 일도 그렇고 프라모델을 만드는 일도 ‘창작’이잖아요. 시작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완성하는 사람이었는데, 피규어 수리는 남이 만들어 놓은 걸 손대는 일이잖아요.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피규어 전문 제작자들이 복구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거고요.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방법만 알려주면서 ‘직접 해보세요’ 한 적도 있죠. 사람을 대해야 하는 일이니까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엄청나고요. 이래저래 정말 힘든 일인 건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손놓지 못하는 이유…“이 일이 가진 가치” 큰 벌이가 안되고, 아주 좋아하는 분야도 아니며, 스트레스도 만만찮은 일. 그럼에도 그가 피규어 수리를 계속하는 이유는 딱 하나, “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일단 피규어는 다시 구하기 힘든 한정판이 많고 보통 예약을 하면 6개월씩 기다렸다 받아야 해요. 그래서 배송 중에 파손이 된다거나 잘못 건드려서 망가지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거의 울면서 전화가 와요. 저한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거든요. 떨어진 곳 붙여서 사포질하고 비슷한 색 칠해주면 끝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쉬운데 아무나 못하는 거긴 하지만.(웃음)”  주변부를 마스킹 테이프로 꼼꼼히 감싸준 후 ‘비슷한 색’을 만들어 에어브러시로 칠한다. ‘비슷한 색’을 구현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안 씨에게 피규어 수리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그는 “피규어 때문에 끙끙 앓던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내 능력으로 쉽게 해결해줄 수 있는 데서 이 일의 가치를 찾는다”고 했다.  “피규어를 받아서 장식장에 진열해 놓고 고맙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복구가 잘 돼서 굉장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 좋죠. 그래서 이 일을 적당한 선에서 그만 두고 싶은데 그걸 못하겠어요. 피규어를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가 ‘이제 그 일 안합니다’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는 한 계속할 것 같아요.” 반대편 다리도 같은 과정을 반복해주면 복구 완료 안 씨가 그의 일에서 찾은 가치는 ‘생계를 위해 지속적으로 하는 일’이라는 '직업’의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진로와 직업’ 교과서에서는 ‘직업’을 이렇게 정의한다. “직업이라는 말에는 생계 유지의 뜻과 사회적 역할 분담, 그리고 자기 능력의 발현이라는 자아 실현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글·인포그래픽·영상 촬영= 비즈업 김현주 기자 joo@bzup.kr 사진·영상 촬영/편집= 비즈업 백상진 PD 지금 '아홉시' 영상 보러가기
35년째 말에 신발을 박는 국내 최고 장인, “결핍은 내 성장의 무기”
한국인 최초 국제대회 우승, 신상경 장제사가 스스로를 단련하는 방법 ▼ '세계 1위 편자 장인' 신상경 장제사가 편자를 만드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마미재분로중 인미재로동중(馬美在奔跑中 人美在劳动中·말은 뛸 때 아름답고, 사람은 일할 때 아름답다.)  중국의 한 속담이다. 말이나 사람이나 자신이 가진 능력을 드러낼 때 비로소 스스로의 가치를 발현한다는 얘기다. 말을 맘껏 달리게 함으로써 말의 존재 가치를 빛내주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도 빛내는 사람이 있다.  말이 잘 뛸 수 있도록 말에 신발을 신겨주는 사람, 신상경 장제사(만53세·마사회·사진)를 비즈업이 만났다.  장제사. 말 발굽의 모양이나 형태에 알맞게 편자를 만들고, 말 발굽에 편자를 박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말이 잘 달릴 수 있도록 말발굽에 박는 U자 모양의 쇠붙이가 ‘편자’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제사의 수는 80여명 가량. 조선시대 ‘마의’(馬醫)처럼 말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망치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대장장이의 손재주를 동시에 지녀야 장제사가 될 수 있다. 체중이 600kg이나 나가는 동물을 다루는 위험한 일이며 배우는 과정도 고되다보니, 말발굽에 편자를 박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말이 덩치만 크지 겁이 많아요. 장제 과정에서 놀란 말이 같이 일하는 동료의 발을 밟기도 해요. 그렇게 되면 최하가 골절상입니다.  누군가 크게 다치면 제가 이 일을 왜하나 싶을 때가 있죠. ” 35년 경력의 신 장제사는 국내에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을 갖춘 ‘편자 장인’이다. 대다수 장제사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표준 편자’를 다듬어 발굽에 박는 것에 그치지만 신 장제사는 다릿병 등으로 걸음걸이가 불편한 말을 위해 맞춤형 편자를 만들 줄 안다. 사람으로 치면 기성 구두가 아닌 발의 특징에 따라 맞춤형 수제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 정도의 기량을 갖춘 장제사는, 말 관련 산업이 발전하지 않은 대한민국엔 거의 없다.   “현재 과천 경마장에 말이 1,600마리가 있는데, 편자가 같은 말이 한 마리도 없습니다. 다리 길이부터 말발굽의 미세한 높이 차이, 이전에 앓았던 다릿병까지 모두 생각해 편자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말이 제대로 뛰게 하려면 각각 말에 꼭 들어맞는 수제화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같은 편자를 만들더라도 사실 매일 다른 물건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재주를 갖췄고, 그 재주를 이어받겠다는 제자도 50여명에 이르는 장인이지만 말에 신발을 신길 때 신 장제사는 매번 후회스런 감정이 밀려온다고 한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 탓이다. 다음엔 더 잘 하고 싶다는 욕망이 편자를 박을 때마다 꿈틀거리는 사람. 그래서 자신은 채워야 할 게 여전히 많은 장제사라는 게 신 장제사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박한 평가다.  “저는 제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봐요. 매일 말을 관찰하고 가장 편하게 달릴 수 있도록 편자를 만드는데 장제가 끝나고 말이 걸어나가는 것을 보면 완벽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하면 할수록 끝도 없고 매일 부족함만 보여요. ’30년 하면 알 수 있을까. 40년 하면 실력이 좋아질까.’ 그러면서 제가 느끼는 실력의 결핍을 계속 채워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신 장제사가 처음부터 장제사가 될 요량으로 경마장을 찾은 건 아니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경마 기수가 되고 싶었지만 신체조건이 맞지 않아 발길을 되돌리려는 찰나 먼 곳에서부터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기수가 되고 싶어 경마장에 찾아왔는데 키와 몸무게가 자격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고 있었거든요.  우연히 장제소라는 곳이 눈에 들어왔어요. 망치로 퉁탕거리면서 무언가 만들고 있더군요. 기수는 못해도 손재주가 좋았던 제가 할 수 있는 일 같았어요. 생소한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곳, 그게 여기였죠. 말이 넒은 들판을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작정 달려나가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장제사란 직업에 빨려들어간 것 같아요.”   그렇게 처음 손에 익힌 망치질. 지금도 그렇지만 신 장제사는 시작부터 ‘결핍’을 성장의 무기로 삼았다. 장제소에서 수련하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 실력좋기로 유명하다는 대장장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쇠 다루는 기술을 연마했다. 업무 시간 외에도 매일 편자를 망치로 두드리며 쇠 모양을 연구하는 걸 일상으로 삼았다.  경마 선진국인 일본, 영국, 아일랜드 등으로 장제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현재는 한 국립대의 수의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해  말의 몸에 대한 지식을 익히는 공부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매일 스스로를 단련했던 신 장제사의 노력은 지난해 한 국제대회에서 빛을 발했다. 호주에서 매년 한 차례씩 열리는 권위 있는 국제 대회(서호주챔피언십 국제장제사대회)에 출전,  프리스타일 부문에서 1등의 영예를 거머쥔 것. 대회에 나가기 위해 꼬박 1년간 소염제와 진통제를 먹어가며 연습에 매달린 노고를 결과로 보상받은 것이다. 국내 장제사가 국제 대회에 나가 우승을 차지한 건 신 장제사가 처음이다. “2008년에도 같은 대회를 나갔었는데, 그 때는 2위에 그쳤거든요. 그 후로 9년이 지난 다음에 나간거니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컸죠. 경마 선진국에서 출전한 장제사들은 선입견 같은 게 있어요. ‘한국 사람은 못할 것이다. 쟤들은 아직 부족하다. ‘ 이런 편견을 깨고 싶었어요.” 신 장제사의 손재주를 영상에 담으려 찾아간 1월 어느날. 사람으로 치면 무좀과 비슷한 병인 ‘의동’에 걸린 암컷 한 마리의 발이 신 장제사의 손에 얹혀있다. 표준 편자를 다듬기만 하면 되는 다리 셋의 장제 일이 한 시간이 안 돼 끝났다. 신 장제사가 말한다. “지금부터가 진짜 일하는거지.”  ‘의동’이 걸린 다리에 박을 편자 만들기는 긴 쇠막대기를 뭉텅 자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1,000번은 족히 넘었을 망치질과 그 사이를 메우는 쇠 담금질,  발에 꼭 들어맞는 편자로 만들기 위한 다듬질까지. 맞춤형 수제 편자 하나를 만드는 데, 앞선 다리 셋의 편자보다 두 배의 시간이 흘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신 장제사의 눈이 어느덧 시뻘겋게 충혈됐다. 그렇게 겨우 완성된 편자를 조심스레 말의 발에 갖다대는 신 장제사의 입에서 웃음기 가득한 말이 흘러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지? 희한하네. 재수가 좋아가지고…” 그렇게 단 한번에 꼭 맞게 수제 편자를 만드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를, 그 자부심을 ‘재수’란 말로 뭉뚱그렸지만, 신 장제사는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재수’란 단어로 치환한 자신의 손재주가 35년간 ‘결핍’을 성장의 무기로 삼아 자신을 쉴 새 없이 망치질한 결과란 사실을 말이다. 글·인포그래픽=비즈업 안원경 기자 letmehug@bzup.kr 사진·영상 촬영/편집= 비즈업 김경범 PD 지금 '아홉시' 영상 보러가기
‘조던 운동화’로 먹고 사는 남자, “덕업일치는 최고의 선택”
신발 복원 전문가 안재복 대표가 말하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 ▼ '신발 복원 전문가' 안재복 씨가 낡은 신발을 말끔하게 수선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지금이야‘나이키 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운동화의 대명사가 됐지만 1980년대초 나이키는 아디다스, 리복, 아식스 등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이키가 대역전극을 벌일 수 있었던 건 천재 농구 선수‘마이클 조던’의 시그니처 운동화가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여기‘조던 운동화’ 덕에 인생을 바꾼‘조던 덕후(마니아)’가 있다.  신발 복원·관리 용품 전문 업체‘슈케어’의안재복(만 31세・사진) 대표는‘조던 복원 전문가’다. 염색이 벗겨지거나 밑창이 갈라져 더 이상 못 신게 된 에어조던 신발을 말끔하게 수선해주는 일을 한다. 신발이 낡으면 버리고 새로 사면 그만인 시대. 그는 왜 헌 신발을 복원해주는 사업에 뛰어든 걸까.  젊은이들의 로망 ‘에어조던’, 신발 복원 전문가를 탄생시키다 안 대표의 창업 이야기는 1985년 ‘나이키 에어조던’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이키는 신인이었던 마이클 조던과 함께 그의 첫 시그니처 농구화 ‘에어조던 1’을 발매했다. 조던은 미국프로농구(NBA)에 데뷔하자마자 코트 위를 날아다녔고 에어조던 시리즈의 인기도 덩달아 고공행진을 기록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에어조던’을 사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제가 초등학생 때 9살 많은 형이 조던 농구화를 샀어요. 저는 근처에도 못 가게 할 정도로 신발을 아끼니까 조던에 대한 갈망이 생긴거죠. 나중에 형이 신발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서 신발장에 처박아놨는데 그걸 제가 신어보고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형 덕분에 일찌감치 ‘에어조던’의 세계를 접한 안 대표. 당시 에어조던 시리즈는 8~9만원대로 초등학생 신분인 그에게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발을 갖고 싶은 욕망을 조던 운동화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너무 갖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까 그냥 조던을 공부했어요. 꼬마 때부터 신발에 대한 역사와 색깔, 상징적 의미 같은 정보를 조금씩 모으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관심을 갖다 보니 헌 운동화를 싸게 사서 깨끗하게 만들어 신을 수 있는 방법도 찾게 된 거죠.” 그렇게 그는 국영수 대신 신발을 공부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된 후엔 돈을 모아 조던을 사 신고, 그동안 습득한 신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이 신던 헌 신발을 수선해 되팔기도 했다. ‘취미생활’로 조던 운동화를 만지작 거리며 신발 복원을 위한 손재주를 익힌 것이다.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이 일이 그냥 좋았어요.” 창업 전 안 대표는 외국계 패션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패션 역시 그의 관심 분야였지만 지나친 실적 압박과 장시간 근무 문화에 염증을 느껴 퇴사를 결심했다. 생활비가 필요해진 그는 한정판 신발을 사서 재판매(리셀)하는 일을 시작했다. 안 대표는 “‘신발 복원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여기서 나왔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리셀을 하니까 어느 정도 돈은 벌리는데 이걸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신발을 사면서 관리법이나 수선법을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처음엔 그냥 재미로 신발 복원하는 영상을 만들어볼까 해서 시작했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우리나라에는 조던 신발 복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예요. 이걸 할 수 있는 게 딱 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2015년부터 신발 관리 영상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다. 망가져 신을 수 없는 에어조던 신발을 복원하는 과정을 손수 촬영해 편집하고, 이를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올렸다. 이 영상을 보고 안 대표에게 신발을 맡기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났다. 심지어 세계적인 신발관리용품 브랜드‘엔젤러스’의 한국 총판에서 용품 일체를 무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연락까지 왔다. 이같은 성원에 힘입어 그는 지난 2016년'슈케어'라는 브랜드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창업에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이 일이 그냥 좋았어요.신발 만지는 걸 워낙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해주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회사를 다닐 때는 제가 선택한 일이었어도 출근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출근하는 게 두렵지 않아요.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냥 좋아요.” 그를 성공 궤도에 올려놓은 마음가짐 “나는 무조건 할 수 있어” 3년차 기업 ‘슈케어’는 현재 월 매출 4,000만 원을 달성한 ‘유망주’ 기업이다. 지난해부터는 단순 신발 복원을 넘어 관리 용품 유통·판매, 가죽 쇼파・자동차 인테리어 복원 사업에도 진출했다. 조던 운동화 복원으로 갈고 닦은 슈케어의 독보적인 기술력 덕분이다. 이처럼 거침 없는 사업 확장 능력에 대해 안 대표는 “나를 내 테두리에 가두지 않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제 자신을 믿었어요.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다’, ‘누구보다 재밌게 할 수 있을 거다’ 늘 생각했죠. 사람은 언제든 배울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데 ‘나 이거 못해’라고 포기하는 게 인생의 가장 큰 해악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신발 관리 영상을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 ‘영상 편집을 할 줄 모르니까 안 해야지’ 하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겠죠. 사실 누구보다 부족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계속 도전하려는 마인드를 갖고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어린 시절부터 갈망하던 ‘조던 운동화’를 업(業)으로 삼은 안 대표. 아무리 좋아해도 ‘일’이 되는 순간 싫어지기 마련이라지만 그는 여전히 “덕업일치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신발이 질린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워낙 많이 만지니까. 그런데 또 어느새 그 신발 가지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애증의 관계’ 같은 거예요.(웃음) 아무리 질려도 결국 그게 다시 좋아지는 거죠.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최고의 선택’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어도 좋아하는 일을 했으니까 된 거고, 좋은 성과를 내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경제적 이득도 함께 취할 수 있으니까.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글·인포그래픽·영상 촬영= 비즈업 김현주 기자 joo@bzup.kr 사진·영상 촬영/편집= 비즈업 김경범 PD 지금 '아홉시' 영상 보러 가기
카페 알바생에서 ‘바리스타 국가대표’로···“큰 꿈+작은 목표=프로의 방정식”
바리스타들의 올림픽 ‘2017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  한국 국가대표 방준배 바리스타의 성공 철학 ▼ '국가대표 바리스타' 방준배 씨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너는 배운 사람처럼 흉내는 낼 줄 아는데 아마 프로는 못 될 거야.” 음악가가 되겠다며 드럼에 쏟은 시간 7년. 꿈을 잠시 미뤄두고 군악병으로 입대한 청년에게 선임이 던진 말이었다. 그 역시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음악인으로서 뚜렷한 목표도,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학창시절을 몽땅 음악에 투자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하던 대로’ 연습용 북을 열심히 두드리는 것 뿐이었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른 지난해 11월. 청년은 콘서트장 대신‘바리스타 세계 챔피언’을 가리는 무대에 서 있었다. 각국에서 치러지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등을 거머쥔‘프로 중의 프로’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바리스타 올림픽이라 불리는‘2017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BC)’에 한국 대표로 출전한 방준배(만 33세·사진) 바리스타이야기다. 실의에 빠진 음악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어떻게‘한국 1등’ 커피 전문가가 될 수 있었을까. 눈 앞의 ‘작은 목표’, 생계형 아르바이트생을 프로로 만들다 시간을 거슬러 방 바리스타가 군대를 전역한 직후로 돌아가보자. 그는 선임의 뼈 있는 조언에도 음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스물 다섯 살의 ‘무직’ 청년은 여타 예술가 지망생이 그렇듯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방 바리스타는 ‘살기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커피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있잖아요. 걔들보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커피 만드는 연습을 따로 하기 시작했죠. 새벽부터 지원해서 바리스타 현장실습이라는 것도 나가보고요. 그러고보니까 하얀 셔츠에 조끼를 갖춰 입고 일하는 바리스타들이 너무 멋있더라고요. ‘아,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야겠다.’ 그게 제 다음 목표가 됐던 거예요.” ‘드럼’을 치던 때와 달리‘커피’는 방 바리스타의 눈 앞에 끊임없이‘작은 목표’들을 만들어냈다.“아르바이트생 중에 가장 잘하고 싶다”는 목표는‘바리스타 자격증’으로 이어졌고 어느새‘커피 강사’ 자리를 얻게 된 계기가 됐다. “드럼 연습을 손바닥만한 고무판으로 하거든요. 10분동안 두드리고 있으면‘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이상하게 카페 일은 목표의식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바리스타가 돼서 직원으로 일하다보니까 라떼아트를 잘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그때부터 연습을 하고 돈 조금 모아서 라떼아트 학원을 다녔죠. 수업을 들으면서 강사를 해야겠다는 다음 목표가 생겼고요.” 방 바리스타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2년만에 바리스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 자격을 얻었다. 바리스타 강사 생태계에 발을 들인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프로의 세계’. 그는 “동료 강사들을 통해 바리스타 경연대회의 존재를 알게 됐고 자연스레 대회 출전이라는 다음 목표가 생겼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음악을 계속 하지 못했던 이유는 목표가 너무 멀고 희미했기 때문이었어요. 바리스타를 하면서 깨달은 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바로 앞의 목표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이에요. 차근차근 작은 목표들을 이뤄나가다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남들보다 앞서 나가게 됐거든요.” ‘한국 1등’ 바리스타를 만든 큰 꿈 “나는 바리스타 세계 챔피언이 될 사람” 눈 앞의 작은 과녁을 하나씩 맞혀가며 바리스타 대회 출전 준비까지 하게 된 방 바리스타. 그러나 작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으로 모두가 한국 최고가 될 수는 없을테다. 특히 세계 대회의 관문인 국가대표 선발전은 매년 난다긴다 하는 국내 바리스타 100여 명이 지원하는 큰 대회. 그는 “바리스타 분야의 1등이 되려는 ‘큰 꿈’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커피를 공부하기 시작한 게 2010년이었거든요. 당시 카카오톡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프로필에‘월드 바리스타 챔피언 할 사람’이라고 써뒀어요. 그때부터‘세계 1등 바리스타’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모든 대회를 세계 대회처럼 준비했고요.” 방 바리스타가 국가대표 선발전인‘한국 바리스타 챔피언십(KNBC)’에 나가기 시작한 건 2011년도부터다. 이후 여러차례 대회에 출전에 출전했지만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세계 챔피언’이라는 큰 꿈이 있었기에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2013년 대회에서 10등으로 올라선 것을 시작으로 매년 등수를 줄여나갔다. 마침내 지난 2016년 열린‘2017 KNBC’에서 1등을 차지해‘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으로 가는 티켓을 따냈다. “바리스타를 하면서 ‘너 진짜 열심히 산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공부할 때, 음악할 때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거든요. 꿈이 있으니까 정말 열심히 하게 되는 거예요. 업무시간에는 일을 해야하니까 대회 준비하려고 매일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집에 가요. ‘세계 1등’이라는 꿈이 저를 한국 1등으로 만든 중요한 원동력인 셈이에요.” 그는 늘 후배 바리스타들에게 “우리나라 톱 바리스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항상 머리 속에 자기 분야의 1등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그 근처까지 가게 된다’는 것이 방 바리스타의 신념이며 커피가 그에게 남긴 또 하나의 인생 철학이다.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2017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방 바리스타는 60여개국 참가자 가운데 9위를 차지했다. 한국 대표가 준결승에 진출한 건 4년만이지만 아쉽게도 6명이 올라가는 결승전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방 바리스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내 꿈은 세계 챔피언”이라고 말한다. “저 다음 세대의 바리스타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국가대표 자리를 물려주는 게 맞아요.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시 준비를 해야죠. 그때는 진짜 세계 1등 할 각오로 준비하는 거예요. 이미 영어와 브랜딩 공부를 제 작은 목표로 세워뒀어요. 아마 3년 안에는 다시 한 번 도전하지 않을까 싶어요.” 글·인포그래픽·영상 촬영·편집= 비즈업 김현주 기자 joo@bzup.kr 사진·영상 촬영= 비즈업 김경범 PD 지금 '아홉시' 영상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