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Piazzale Michelangelo, Firenze
장장 8시간에 가까운 장거리 여행을 끝마치고,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Firenze S.M.N.)에 드디어 발을 딛었다.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확실히 독일과 남다른 이탈리아 특유의 느낌이 기차역에서부터 풍겨져 왔다. 뜨거운 태양, 르네상스·바로크 풍의 건물들, 아기자기한 색채, 자유분방한 사람들... 그동안 머리속 이미지로만 그려왔던 이탈리아의 느낌이었다.
내가 이 곳 피렌체(Firenze)까지 오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번째로는 누구나 다 아는 일본 멜로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冷静と情熱のあいだ)>의 여운 때문이다. 주인공인 준세이가 학창시절 사랑했던 여인인 아오이와의 약속한 곳이자, 현재 준세이가 수복공방을 배우고 있는 주요 무대가 바로 피렌체였고, 영화를 통해 비춰진 두 남녀보다 그들의 배경이 된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나는 순식간에 빠져들었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나의 절친 K의 생생한 여행후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를 거점삼아서 당일치기로 여러 도시를 다녀왔지만, 피렌체를 여행하는 동안 도시의 아름다움과 황홀함에 취해 정신을 못차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다니던 일행 중 하나는 피렌체에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여권을 찢어버렸다고 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지, 피렌체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나의 기분은 다른 때보다 상당히 상기되었다. 내가 피렌체에서 머물 숙소는 S.M.N.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도보로 10분 거리. 숙소에 가는 동안, 역 근처 안내소에서 피렌체 전체 지도도 하나 챙겨갔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어느덧 저녁식사를 할 시간대가 되었다. 그래서 숙소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이 잠시 밥먹으러 들어왔었고, 그 덕분에 한 방에 함께 쓰는 사람, 옆 방 쓰는 사람 등등 한꺼번에 인사할 수 있었다. 짐은 대충 풀어놓고 숙소에서 차려 준 카레를 먹고 있는데, 두 명의 여성이 대뜸 나에게 다가와 커피원두 사러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어여쁘신 분들의 제안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기에, 허겁지겁 한 그릇 비운 뒤에 그녀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친구였던 S와 J는 남부인 나폴리에서 피사의 사탑을 보러 피사 가는 길에 잠시 피렌체를 들렀다고 한다. 그녀들도 나처럼 피렌체는 오늘 처음 왔는데, 무엇을 누구와 해야할 지 사실 잘 모르던 찰나에 나에게 말을 한 번 걸어봤다고 했다. 그녀들로부터 선택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느새 산 로렌조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을 지나 두오모(Doumo di Firenze)까지 걸어왔다. 두오모 또는 피렌체 대성당(Doumo di Firenze)으로 불리는 이 곳의 정식명칭으로는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산타 마리아 피오레 델 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다. 피렌체의 상징이기도 하다. 준세이와 아오이가 만나기로 했던 쿠폴라(Cupola)도 이 곳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꽃'이라는 의미에 어울리게 대성당 외벽은 흰색과 초록색, 그리고 붉은색 이렇게 3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졌음에도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재밌는 건, 각각의 색깔을 지닌 이 대리석들을 다른 도시들로부터 조달받았다는 점인데, 흰색은 카라라, 초록색은 프라토, 그리고 붉은색은 시에나에서 온 것이다. 피렌체 대성당은 14세기에 완공되었고, 피렌체 대성당의 상징물인 쿠폴라는 15세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완공했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과 우아한 쿠폴라를 구경하기 위해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에 신경쓰지 않은 사람들은 대성당 주위에 모여들어 감상하는 데 푹 빠져있었다. 우리 일행 또한 이 거대한 꽃의 향기에 취해 누가 얼음땡 해줄 때까지 멈춰서서 우러러 보기만 했다. 두오모의 최면술에서 가까스레 풀려난 우리는 커피원두를 사러 가기 위해 다시 피렌체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 공간은 현대화로 바뀌어가는 피렌체에서 몇 안되는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풍스런 가게들, 우리는 그 중 한 가게에 들어갔고, S와 J가 그렇게도 찾던 사향고양이 똥으로 만든 루왁커피 원두를 비교적 싸게 구매할 수 있었다. 광장 앞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회전목마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 묘하게 어울렸다. 수천개의 전구를 반짝이며 돌아가는 회전목마 위에는 어린 아이, 어르신, 커플들 구별없이 모두 다 행복해하는 표정으로 가득했다. 레푸블리카 광장에서 우리는 아르노 강 쪽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우리는 피렌체의 또다른 명소인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과 시뇨리아 광장의 주인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을 만났다. 피렌체 정치의 중심지이자 역사의 중심지인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의 현재 모습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야외 미술관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조각상들이 이 곳 시뇨리아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데, 넵튠의 분수(Fontana del Nettuno), 다비드 상(David) 등 여러 조각상들이 있다. 마치 시뇨리아 광장을 지키는 듯한 수호신처럼 광장의 모서리 등지에 포진되어 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가 만든 다비드상 진품은 아카데미아 박물관(Accademia di Belle Arti de Firenze)에 있고 시뇨리아 광장에는 진품과 똑같이 만들어낸 상이지만, 사람들은 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다비드상이 더 뛰어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곤 한다. 내가 아카데미아를 방문하진 않았지만, 시뇨리아에 있는 다비드상도 진품과 비교해서 손색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베키오 궁전 옆에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박물관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이 붙어있었다. 물론, 오후 7시가 넘어간 이 시점에는 폐관한 상태이지만, 우피치 외벽 기둥 하나하나 새겨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조각상들 - 단테,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 그들의 혼이 나에게 전달되어지는 느낌이었다. 우피치 미술관 건물 사이를 지나치는 샛길을 지나 아르노 강이 보였고, 고개를 돌리니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뒤로 석양이 비추고 있다. 그 석양을 보기 위해 우리처럼 베키오 다리에 멈춰 선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석양 한 번 제대로 보는 데 불필요하게 자리싸움을 하게 되었다. 여태껏 매번 보던 석양이었는데, 피렌체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낯선 여성들과 함께 보고 있기 때문인지 유독 이날따라 석양이 황홀함 그 자체였다. 나의 손목시계는 어느덧 오후 8시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이 피렌체에도 푸른 밤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 피티 궁(Palazzo Pitti)으로 걸어가보았다. 토스카나 대공국, 이탈리아 왕국의 왕궁으로 쓰였던 이 건물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서로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 하늘에 하나 둘 씩 등장하는 별을 보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젊은이들,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못해 함께 하고픈 무리들의 광장을 장악한 듯한 웃음소리, 그저 훈훈하고 아름다워보였다. 피렌체가 가져다주는 황홀함과 낭만적인 분위기가 우리 세 사람 사이에 뭔가 묘한 기운으로 바꿔놓았다. 그래서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야할 것 같은 의지가 생겼다.
지도를 보다가, 나는 그녀들에게 피렌체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러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으로 올라가자고 제안했고, S와 J도 망설임 없이 내 의견에 동의했다. 우리는 곧장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까지 올라가니, 어느덧 해는 지고 푸른 밤하늘이 피렌체를 덮었다. 수많은 청춘들이 광장으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점령하고 있었고, 야경을 볼 수 있는 난관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어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정도였다. 동상 아래에서는 몇몇 커플들이 피렌체의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광장 반대편에 있는 피렌체 대성당의 야경은 '꽃 중의 꽃',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부를만큼 치명적이고 계속 내 눈에 들어왔다. 임시 가판대에서 세 사람은 하이네켄 병맥주를 하나씩 구입하고 서로의 청춘을 위해 건배를 했고, 술과 분위기에 한껏 취해버렸다. 아름다운 피렌체 밤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는 서로의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다 털어놓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말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제시와 셀린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마냥 허구가 아니었다. 이 분위기라면 충분히 가능하게 만들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영화를 보면서 머리 속으로만 상상하던 판타지가 현실로 이뤄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청춘남녀가 자신들의 내면에 감춰든 판타지를 꺼내고 있을 때, 난관 아래 야외식당의 분위기는 나의 로망을 충족시켜줄 또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현악기의 운율을 배경음악 삼아서 사람들은 분위기 있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고, 난관에서 그걸 구경하는 청춘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음악과 술에 취해 뜨겁게 미켈란젤로 광장을 달구고 있었다. 우리의 피렌체 밤은 당신의 낮보다 훨씬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뜨겁다.
Amor F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