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5시, 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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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5시, 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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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33)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13) 요즘 회사 사정이 어렵다. 분발하자는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다. 술은 화끈하게 마시고, 일은 검은 머리카락이 새치가 되도록 하는 것이 유성맨이다. “자금부 직원들의 미래는 여기 서 있는 이 부장이 책임지겠다. 자, 건배하자. 이 부장이 우리는!”이라고 외치면 여러분은 하나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다!” 부장은 이혜진을 위하여 건배를 했다. 이혜진이 예쁜 입으로 하나다! 라고 외치는 표정이 너무 섹시하다. 초고추장 필요 없이 와작와작 씹어 먹고 싶은 충동을 술잔에 타서 원샷을 했다. 본격적으로 술판이 벌어졌다. 술잔이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떠다녔다. 고기 굽는 냄새를 환풍기가 빨아들인다고 하지만 직원이 70여 명이나 되니까 병목현상을 일으켰다. 여직원들이 옷에 냄새가 밴다고 주인을 불러 옷을 넣을 수 있는 비닐봉지를 달라고 했다. 남자 직원들은 상추쌈을 와구와구 먹으면서도 연신 이혜진을 흘끔거린다. 얼굴들이 노을처럼 달아오르고, 목소리에 기름져 가면서 술판이 벌겋게 익어갔다. “자, 어서 마셔. 마시고 부장님 한 잔 따라 드려야지.” “내가 솔직히 인간성 하나는 끝내주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야. 이혜진 씨는 자금부에서 썩기 아까워. 박 과장, 안 그래?” “그, 그럼요.” 박 과장은 일부러 이혜진과 몇 자리 건너 앉았다. 뜨거운 갈비를 입안에 막 넣으려는 찰나에 부장이 묻는 말에 깜짝 놀랐다. 뜨거운 갈비를 씹지도 않고 그냥 삼켰더니 속에 불이 나는 것 같다. “비서실에서 곧 부를 것 같던데요?” “강 차장도 그런 말 들었어? 이혜진 씨가 비서실로 올라가면 자금부의 영광이지. 혜진 씨 비서실로 올라가도 나 잘 봐줄 거지?” “전 자금부가 좋아요. 부장님.” 이혜진은 반찬을 먹는 척하며 박 과장을 바라봤다. 박 과장의 얼굴이 굳어 있다. 바보 같아! 라고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웃었다. “자기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노골적으로 성추행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이 심정을 뭘로 달래. 술로 달래야지.” 김미정과 이승미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일어나려고 끝자리에 앉았다. 부장이며 차장, 과장들이 이혜진을 공주님처럼 모시는 꼴이 보기 싫었다. 연거푸 잔을 비웠더니 얼굴이 확확 탔다. “우리 오늘 기분도 더러운데 오랜만에 홍대 앞으로 나들이나 갈까?” “지랄. 금요일도 아닌데 무슨 홍대 앞이야.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나 씹어 먹자구.” “그럼 멤버 모집해 봐.” “멤버는 무슨 멤버야? 우리 둘이 가면 되지.” 부장이 술잔을 엎어 놓는 것으로 회식이 끝났다. 부장이 일어서자 차장이며 과장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숯불갈비집 앞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거나 정장 차림의 여자들이 길을 메웠다. 부장을 위시한 차장과 과장이며 대리들은 따로 서 있었다. 업무과장이 계산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오피스텔에 가서 한 잔 더^^” 박 과장은 이혜진이 보낸 카톡을 확인했다. 이혜진은 건물 앞에서 차도를 바라보고 있다. 해변에 서 있는 것처럼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결혼을 안 한 남자직원 몇 명이 삽시간에 그녀를 에워쌌다. 술을 마시니까 더 예쁘다, 우리끼리 2차 가자, 원래 고기를 먹었으면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해야 하는 거다라며 앞을 다투어 매수 주문을 냈다. 당사자인 이혜진은 남자 직원들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박 과장에게 오피스텔에서 보자고 점잖게 분식회계를 했다. “응.” 박 과장은 일단 이혜진을 오피스텔로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오피스텔에 가고 안 가고는 나중에 판단할 일이라는 생각에 짤막하게 답신을 보냈다. 부장과 대리급 이상 직원들이 2차로 생맥줏집으로 향했다, 평직원들은 뿔뿔이 집으로 가는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가볍게 한잔 더 하고 갈까?” “맥주 한 잔 정도는 더 할 수 있죠?” “요 근처에 팥빙수 전문점 있는데 가실래요?” 총각 직원 세 명이 이혜진을 따라붙었다. 이혜진은 지하철 쪽으로 갔다가 세 명이 따라붙을 것 같아서 생긋이 웃으며 택시를 세웠다. “어느 방향입니까? 합승합시다.” 자금1과의 김승철이 택시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저, 전 합정동쪽으로 가는데요.” “마침 잘됐군요. 저도 그쪽으로 갑니다. 요금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괘, 괜찮은데…” 이혜진은 얼떨결에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김승철이 옆자리에 앉으며 합정동으로 가 주세요라고 말했다. “대박! 저, 저 새끼 미친놈 아냐?” “완전 또라이네.” 김승철과 함께 이혜진의 향기에 취해 했던 두 명이 거의 동시에 내뱉었다. 상한가가 유력시되는 종목에 막 매수를 내려는 순간 정전이 되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어서 욕을 퍼부었다. 한만수 opinion@etoday.co.kr <저작권자 ⓒ 이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33)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12) “원래 그런 애가 내숭 떠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 “일가견 정도가 아냐. 도통을 했지. 고등학교 졸업장이 마르기도 전에 시집을 갔으니까.” “어머머! 임신?” “에이, 그래도 이혜진은 안 그래. 그 애는 원래 내숭이 아니라 천성이 착하잖아. 문제는 바로 그 점이야. 왜 착하냐구, 그 정도 미모면 좀 덜 착해야 되는 거 아니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잖아.” “나도 이혜진 싫어해. 그년이 남자들 앞에서 꼬리 치는 모습만 상상해도 밥맛이 없다니까. 하지만 내숭은 아닌 거 같아. 그래서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라니까. 도대체 어떡하면 좋지?” “자기가 빨리 시집을 가. 그럼 그년 얼굴 안 봐도 되잖아.” 여직원들만 화장실에서, 휴게실에서, 옥상에서 이혜진을 찢고 흔들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남자직원들도 갑자기 더 광채를 내는 이혜진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부장이 차장을 불렀다. 오늘따라 광채를 내고 있는 이혜진을 흘낏거리며 오늘 부서회식이 있으니 단 한 명도 빠지면 안 된다고 지시를 했다. “뭐 좋은 일 있습니까? 회식하는 건 좋지만…, 지난주 목요일 회식을 했잖습니까? 월요일부터 회식하면 직원들이….” “더치페이 하자는 것도 아니고, 부장이 판공비로 술 사겠다는데 싫다는 놈 있어?”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혜진을 바라봤다. 오늘 회식의 콘셉트는 갑자기 더 예뻐진 이혜진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는 것이다. 직속 부하가 상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차장을 바라봤다. “대리급 이상이야 백 프로 참석을 하겠지만 요즘 젊은 애들은 회사보다는 제 개인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토가 강하잖아요.” “까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오늘 회식 빠지는 놈은 연말에 보자구 해.” 유성홀딩스는 연말보너스를 차등 지급하고 있다. 부장은 더는 말이 필요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직원들에게 전 직원 회식은 승전보와 같았다. 전 직원 회식을 한다면 이혜진은 무조건 참석이다. 옆자리에 앉아서 건배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이혜진처럼 완벽한 여자와 한자리에 앉아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됐다. 기업에 호재가 뜨면 연타로 상한가를 친다. 개미들은 호재의 원인을 분석하지 않는다. 아니, 분석하려 들지 않는다. 호재라는 풍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분석은 뒤로 하고 아파트 대출까지 받아서 ‘묻지마’ 매수를 한다. 나름 머리가 좋다는 남자직원, 기회를 잡을 줄 안다고 호언장담하는 총각직원들은 출장을 핑계 삼아 피부관리실로 달려갔다. 이혜진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멘트를 준비하느라 틈틈이 말 잘하는 방법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도 했다. 유부남 직원들도 덩달아서 축제를 앞둔 진행요원들처럼 괜히 마음이 들떠서 콧노래를 불렀다. 예외는 있다. 박 과장은 오늘이 중요한 날이다. 출근할 때 아내가 넥타이를 바르게 매주며 와인을 준비해 놓겠다고 말했다. 일찍 퇴근해서 분위기 잡자는 뜻이다. 신혼 때는 일수 도장을 찍었다. 첫 애를 낳고 나서는 주간 도장을 찍었다. 둘째를 낳았을 때만 해도 월간 도장을 찍었다. 이혜진을 만나고부터는 부정기적으로 도장을 찍는다. 도장을 찍는 날은 아내가 결정한다. ‘젠장, 지금까지 회식은 목요일에 했잖아. 월요일부터 회식하는 부서는 자금부밖에 없을 거야.’ 술 좋아하는 부장은 2차는 햄버거고, 3차는 콜라다. 햄버거 먹고 콜라 마시지 않으면, 막걸리 마시고 안주로 맹물 마시는 것과 같다. 집에 가면 빨라야 12시다. 아내가 잠을 자고 있으면 다행이다. 만약 기다리고 있다면 아! 그 뒤로는 너무 비참해서 생각하기가 싫었다. 아침부터 벼르고 있을 아내를 달래주려면 온몸의 기를 쥐어짜야 한다. 적당히 술을 마시면 비아그라가 되는데, 3차까지 마시고 나가면 그놈이 자꾸 딴 생각을 한다. 이른바 약하그라가 되는 것이다. 박 과장은 일단 오늘은 최소한으로 술을 적게 마시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술을 적게 마시고 싶다고 해서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퇴근 시간 전에 편의점 가서 우유로 배를 빵빵하게 채워 넣어야 술이 적게 들어간다. 회식 장소는 회사 근처에 있는 숯불갈비집이다. 직원들은 부장과 차장이 앉을 중간 자리를 비워 놓고 서열대로, 친한 직원들끼리, 비슷한 주급(酒級)끼리 앉았다. 부장을 앞세워 차장이 그 뒤를 따랐다. 직원들은 반찬 간을 맛보고 있다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오늘따라 광채를 내고 있는 이혜진을 흘끔거리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자, 다들 앉지. 그리고 자금부의 마스코트 이혜진 씨는 이리로 오지. 오 대리는 저쪽에 가서 앉고.” 차장이 서른세 살 먹은 오인숙 대리를 이혜진 자리로 쫓았다. 오 대리는 결혼을 한 몸이다. 그래도 질투가 났다. 이건 성추행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짓누르며 이혜진 옆으로 갔다. “차장님께서 부르시잖아.” 오 대리는 생각 같아서는 얼굴을 꼬집어 비틀어주고 싶었다. 발끝으로 이혜진의 엉덩이를 툭 찼다. 생고무처럼 탄력 있는 엉덩이 감촉이 발끝으로 전해진다. 같은 여자가 봐도 대단한 촉감이다. “부장님 한 말씀하시죠.” 차장의 말에 부장이 점잖게 일어섰다. 한만수 opinion@etoday.co.kr <저작권자 ⓒ 이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32)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11) 박 과장도 오피스텔에 올 때마다 입는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다. 원한다면 복숭아를 씹으면서 이혜진을 눕힐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느긋한 표정으로 이혜진을 바라봤다. 이혜진은 난생처음으로 남자의 품에서 아침 해를 봤다. 햇살이 이렇게 눈부신 줄은 몰랐다. 커튼을 하얗게 물들이고 방으로 들어온 햇살은 책상을 뽀얗게 물들이고 있다.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이며, 연필꽂이, 몇 권의 책이 사진처럼 아름답다. “일어났어?” 박 과장은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이혜진을 끌어당겼다. 이혜진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혜진은 박 과장의 거친 입술이 젖가슴에 와 닿는 순간 입을 턱 벌렸다. 박 과장의 손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이혜진은 맥이 풀린 얼굴로 턱을 한껏 치켜올린 채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었던가. 박 과장의 손은 마법사의 손과 같았다. 손끝이 스쳐가는 곳마다 불꽃이 일어나는 것 같은 전율이 입을 통하여 거칠게 튀어나왔다. 박 과장의 입술이 이혜진의 둥그스름한 어깨에 질퍽한 타액을 묻혀 가면서 목덜미로 옮겨갔다. 이혜진이 목을 비틀며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익숙한 무게의 감촉이 배를 뜨겁게 누르기 시작했다. 이혜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아닌 남자의 품에서 아침을 맞은 것만이 아니다. 모닝 섹스도 처음이다. 모닝 섹스가 주는 쾌감은 모텔에서 소나기 섹스를 할 때와 차원이 달랐다. 모텔에서의 소나기 섹스가 소주 10%에 맥주 90%라면, 내 침대 위에서의 모닝 섹스는 양주 50%에 맥주 50% 수소폭탄주다. 박 과장이 아침의 기가 가득 채워져 있는 불기둥을 유감없이 흔들 때마다 이혜진은 박 과장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지 못해 파드득거렸다. 이혜진은 다른 연휴 같았으면 절망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남자. 전화를 걸고 싶어도 전화를 할 수 없는 남자. 커피를 타 주고 싶어도 커피를 타 줄 수 없는 남자가 그리워서 원망하고, 원망이 지나치면 단교를 하고, 단교의 도를 넘어서면 회사에 사표를 내겠다며 소주잔을 홀짝거렸을 것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꿈 같은 2박3일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이혜진은 박 과장과 함께 마트에 가서 카트를 끌어보지 못했다. 백화점에 가서 박 과장의 속옷을 구입하지 못했고, 운동복을 입고 나란히 아침 운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머, 혜진 씨 연휴 때 피부만 다듬었나 봐. 완전 빛이 나네. 빛이 나.” “연휴 때 좋은 일 있었어요?” 연휴 기간 엔도르핀을 충분히 흡수한 이혜진은 사무실을 환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시샘하던 여직원들은 마음속으로 질투의 칼날을 갈면서도 도저히 칭찬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같은 애가 뭐 좋은 일이 있겠어요? 대전 집에 가서 푹 쉬었어요.” “하긴 충분한 휴식만큼 좋은 화장품이 없다는 말은 들었어요.” 학력고사 전국 수석의 소감은 “학원도 안 가고 교과서하고 EBS 방송만 들었어요”라는 말이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한 달에 수백만 원씩 내고 족집게 학원에 다닌 학생들은 모두 돌머리라는 뜻이다. “자기도 아까 그년이 하는 말 들었지?” “그년?” “자금부에서 그년이 몇이나 되겠어. 딱 그년밖에 없지. 나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난 아침에 한 시간 동안이나 마사지를 하고 출근했어. 그냥 쉬고 있어도 얼굴이 예뻐진다면 우린 뭐야?”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구. 얼굴 좀 예쁘다고 우리를 반쯤 베어 먹은 쉰 깍두기로 생각하나 봐.” 여직원들은 어머머! 기가 막혀, 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이혜진을 갈기갈기 찢었다. “내가 오줌 누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냐.”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뒷말을 하던 여자들이 놀라 입을 다물었다. 화장실 안에서 나온 여직원이 점잖게 끼어들었다. “무슨 방법?” “우리가 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시집을 보내버리는 거야.” “얘 좀 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이혜진 같은 애가 남자를 알면 더 예뻐진다는 거 몰라?” “듣고 보니 그러네. 영화배우 이영애도 결혼하고 더 예뻐졌다는 말을 많이 듣잖아.” “가만! 가만! 그년 혹시 연휴 동안 남자하고 여행 다녀온 거 아냐?” 자금1과의 여직원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승승장구하는 기업이라고 해서 앞뒤 안 재보고 매수를 했다가는 깡통 찰 수도 있다. 경제라는 것이 상승곡선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승승장구하는 기업도 악재를 만날 수도 있다.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 곁을 무심히 지나쳤다가는 산불이 나서 오도 가도 못한다.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못 들어봤어? 이혜진 같은 년이 호박씨 까는 거 숱하게 봤어.” 자금1과의 여직원이 얼른 문 앞으로 갔다. 문 밖을 살펴보고 나서 숨 가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긴, 내 친구 중에 선희라는 애가 있거든. 정말 예뻐. 근데 너무 내성적이라 남자 손목도 안 잡아 본 애거든.” 한만수 opinion@etoday.co.kr <저작권자 ⓒ 이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31)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10) 오성홀딩스의 투자자들이 이 광경을 봤으면 신공항 부지에 투자를 한 땅 주인들처럼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하지만 김해공항 근처는 대박이 나지 않았는가. 잃는 투자자가 있으면 버는 투자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오늘은 좀 특별한 걸 준비했지.” 불행한 놈이 있으면 복에 넘치도록 행복한 놈도 있기 마련이다. 박 과장은 이혜진의 반바지 속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매끄러운 살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서 팬티 안으로 밀어넣으며 속삭였다. “전, 이 꽃다발도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이혜진이 간지럽다는 얼굴로 박 과장의 손을 빼면서 웃었다. “그럼 이벤트를 취소해야 할까?” “어머! 이벤트라구요?” “글쎄, 이벤트라고 하기는 좀 약한 것 같기는 한데.” 박 과장이 냉장고 앞으로 갔다. 제 집처럼 냉장고 문을 열어 캔맥주를 꺼내 들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저, 지금 감동 먹었어요. 뭐든 최상의 이벤트가 될 거예요.” 소금만 먹어본 사람에게 설탕 맛은 감격이다. 이혜진은 남자친구가 가끔 여자에게 이벤트를 해준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박 과장의 입에서 이벤트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은 처음이다. 얼른 인덕션의 불을 끄고 박 과장 옆에 앉았다. “우리 내일 바닷가 갈까?” “그, 그게 정말이에요?” 이혜진은 박 과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연휴가 축제이자 지옥인 이유는, 연휴 첫날은 밤 열두 시까지 같이 있을 수 있지만 연휴 기간은 외롭게 지냈던 까닭이다. “모레 아침까지 같이 있을 수 있어.” “고마워요, 과장님.” 이혜진은 가슴이 벅차올라서 박 과장의 목을 껴안았다. “이벤트 둘.” 박 과장이 싱긋이 웃으면서 이혜진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다. “전, 지금 행복해요.” 이혜진은 떨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눈을 감았다. “이건 내 사랑의 정표.” 박 과장이 서류가방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반 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달린 앙증맞은 디자인이다. “어머!” 이혜진은 길고 가는 목에 와 닿는 부드러운 금속성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떴다. 목걸이 끝에 매달려 있는 다이아몬드가 반짝 빛을 낸다. 그녀는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박 과장의 목을 껴안았다. “그동안 선물을 많이 기다렸지? 아무래도 평생 간직해야 할 선물이 나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 박 과장이 이혜진의 허리가 부러지도록 꽉 껴안아 주고 나서 점잖게 말했다. “저, 저는 정말이지 선물 기다려 본 적이 없어요. 과장님만 제 곁에 있으면 돼요.” 이혜진이 다시 펜던트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를 바라봤다. 만지작거리며 황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혜진이하고 매일 이렇게 살고 싶어. 내 마음 알지?” “그럼요. 제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요.” 이혜진은 매일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말에 서러움이 섞인 눈물이 났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처럼 오래가지 않았다. 조기매운탕이 끓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내가 도와줄게.” 박 과장은 집에서도 아내를 도와서 밥상을 차린다. 집에서도 차리는 밥상이니 나와서 차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매일 차려주는 것도 아니다. 연휴가 시작되는 저녁마다 차려주는 밥상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차려줄 만하다. “아이, 과장님은 그냥 앉아 계셔요.” 박 과장의 형편을 알 리가 없는 이혜진은 밥상 차려 주는 그가 몹시 고마웠다. 자신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밥상 차리는 것을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어서 드세요.” “맛있겠는데.” 조촐한 밥상이 차려졌다. 이혜진은 미안했지만 박 과장은 행복했다. 가끔 야외에서 밥을 먹을 때는 김밥도 맛있다. 마트 반찬 코너에서 만든 반찬은 아내가 만든 것보다 맛있다. 정성 들인 조기매운탕은 짜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건배!” “고마워요.” 와인도 아니고 샴페인은 더욱 아니다. 박 과장의 기호에 맞는 소주를 반주 삼아 본격적으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이혜진은 무슨 핑계를 대고 2박 3일 휴가를 받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묻는다면 박 과장은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집을 나오지 않는 이상 대책은 세워 놓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행복 가득한 눈빛으로 박 과장을 바라봤다. 박 과장은 이혜진이 묻지 않는데 아내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베트남으로 여행을 갔고, 아이들은 학교 캠프 갔다고 고백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이혜진과 맘껏 뒹굴어 보겠다는 욕망에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혜진을 바라봤다. 저녁상을 치웠다. 박 과장은 집에서처럼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이혜진이 후식으로 복숭아를 깎아 왔다. “어렸을 때부터 복숭아를 참 좋아했어요. 할아버지가 복숭아 과수원을 하셨거든요.” 이혜진은 민소매 티셔츠에 헐렁한 반바지 차림이다. 원래 글래머라 가슴골이 훤하게 드러났다. 포크로 복숭아 조각을 찍어서 박 과장의 입에 대주며 속삭였다. “복숭아를 많이 먹어서 이렇게 피부가 아름다운 거 아냐?” 한만수 opinion@etoday.co.kr <저작권자 ⓒ 이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30)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9)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집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그냥 모텔에서 자고 아침에 같이 출근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겉으로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새침을 떨며 얌전히 일하는 척했다. 머릿속은 거친 황야를 달려가다가, 인적 없는 산골의 무덤가를 배회하다가, 검은 사막을 방황하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캄캄한 사막 위를 맨발로 걸어 다니고,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 엎드려 울면서 제발 과장님이 살아서 돌아오시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박 과장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청회사라도 들렀다 오는지 태평스럽게 들어왔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아무도 없는 들판이었다면 뛰어가서 가슴에 안겨 울고 싶었다. 다른 직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화장실로 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죽여 펑펑 울었다. 매수자들이 알게 되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지만, 그녀는 박 과장이 마음 깊은 곳에 정좌하고 앉아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랑의 징조였다. 이혜진에게 연휴는 축제와 외로움이 겹치는 날이다. 달력에 빨간 숫자가 연이어 있는 달은 이혜진과 어떻게 한번 엮어 보려는 매수 주문이 줄을 잇는다. 요지부동 태도에도 그녀는 연일 상한가를 친다. “요즘 이혜진 씨 같은 며느릿감은 없어. 원통해. 정말 원통해.” 부장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혜진을 보증해줬다. 그럴수록 각종 매수가 줄을 잇는다. 극장은 기본이다. 놀이동산부터 시작해 뮤지컬, 연극, 한국관에서 벌어지는 신랑·신부 체험 등 매수 주문이 사내전화를 통해, 스마트폰을 통해, 직접 방문,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서 들어왔다. “대전에 있는 부모님과 연휴를 보내기로 했어요.” 다른 약속을 핑계 대면 질투나 하지. 이혜진은 한결같이 부모님과 연휴를 같이 보내겠다는 말로 뭇 남성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서울역까지 태워줄까요?” “마침 대전에 갈 일이 있는데 동행할까요? 마침 케이티엑스 표도 두 장이 있거든요.” “잘됐네요. 저도 대전 친척 집 방문하기로 했는데 같이 갑시다. 차비는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대전 내려가는 차니까 휴게소에 들러서 커피나 한잔 사면 됩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면 찬스가 된다. 대전은커녕 내일 할아버지 기제사라서 여행 금지를 당한 총각 사원까지 흑기사를 자청했다. “어머! 죄송해서 어쩌죠?” “죄송하기는, 전 오히려 영광입니다.” “아는 언니가 표를 샀대요. 그 언니하고 같이 가기로 했어요.” “잘됐네요. 둘이 가면 심심하니까 그 언니도 같이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언니네 가족하고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 아홉 명이….” 이혜진은 박 과장 앞에서와 다르게 다른 남자들 앞에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 남자들은 단순하다. 언니네 가족이 9명이나 될까? 하는 점은 의심하지 않는다. 아홉이라는 숫자에 질렸다는 얼굴로 포기하기 일쑤다. 이혜진은 언니네와의 약속을 핑계로 일찍 퇴근해 곧장 동네에 있는 마트로 직행했다. 새댁처럼 앞치마를 입고 주방 앞으로 갔다. 박 과장이 좋아하는 조기찌개, 혹은 해물탕 세트며 맥주와 소주, 과일을 사서 정성껏 요리한다. 팔팔 끓는 조기 냄비에 비린내가 나지 않도록 된장을 살짝 푼다. 청양고추를 어슷 썰어 넣는다. 파와 마늘, 후춧가루를 푼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고춧가루를 푼다. 두부를 넣고 팔팔 끓을 즈음 미나리를 넣어서 한소끔 끓인다. 조기매운탕 냄비를 얹어 놓은 인덕션의 열기를 줄이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박 과장일 것이다. 박 과장은 꽃다발을 들고 발소리를 죽여서 이혜진의 등 뒤로 걸어갔다. 반바지에 앞치마를 잎은 뒤태가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아내도 이혜진 못지않은 미모다. 애를 둘씩이나 낳고도 몸매가 좋아서 밖에 나가면 미스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이혜진처럼 뒤태가 섹시하지는 않다. 이혜진은 박 과장의 발소리를 들었으면서 못 들은 양 열심히 요리하는 척한다. 이윽고 박 과장의 적당히 나온 똥배가 등을 누르는 감촉과 함께 꽃다발이 갑자기 시야를 가린다. “그냥 오셔도 되는데…”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하루가 다르게 일어나고 있다. 오성홀딩스의 이혜진, 오성홀딩스 남자 직원들의 영원한 로망, 오성홀딩스의 영원한 상한가 이혜진이 감격한 얼굴로 꽃다발을 안았다. “내가 왜 그동안 꽃을 안 사 준지 알아?” 박 과장의 두꺼운 입술이 바로 다가온다. 이어 사정없이 시작되는 딥 키스. 이혜진은 꽃다발을 든 손을 늘어뜨리고 박 과장의 키스를 길게 받아들였다. “왜요?” 이혜진이 감격한 얼굴로 꽃향기를 맡으며 눈을 반짝였다. 히아신스와 튤립과 장미가 섞인 꽃다발은 왠지 한물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꽃이다. 그동안 꽃다발은 수도 없이 받아 봤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받은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에 다시 향기를 맡았다. “혜진이가 꽃보다 예쁘니까.” “몰라!” 이혜진이 응석을 떠는 목소리로 박 과장의 가슴에 안겼다. 몸을 비비 꼬며 흘겨봤다. 한만수 opinion@etoday.co.kr <저작권자 ⓒ 이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29)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8) 박 과장의 성난 그것이 낚시찌처럼 껄떡거리고 있어 민망했다.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박 과장은 불을 끄지 않았다. 이혜진은 천장의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질끈 눈을 감았다. 어머머! 어젯밤의 박 과장은 성교육 교과서에 나오는 모델이었다. 지극히 정상위 체위를 고수했다. 오늘은 죽기라도 작정했는지 발끝부터 더듬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과, 과장님. 여자에게서 으뜸으로 부끄러운 곳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오늘 밤이 지나면 이 세상은 종말이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몸의 기를 혀와 입술로 모아서 자극하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백 번 얻어맞아도 아프지 않은 입술로 그곳을 마구 때릴 때는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묘한 쾌감이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발가락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입안의 침이 바짝 말라 버렸다. “과…장님.” 박 과장의 혀가 젤리처럼 부드럽게 입안으로 빨려들어 온다. 목마른 사슴처럼 정신없이 탐했다. “혜진아!” “네.” 이혜진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대답했다. 이내, 내가 언제부터 이 남자의 여자가 됐지? 하는 생각이 혼란으로 밀려와서 눈을 떴다.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젖가슴을 애무하는 박 과장 모습이 들어 있다. 눈을 감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건, 아냐. 이건 아냐…. 박 과장이 힘찬 폐활량을 자랑하며 언덕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상야릇한 쾌감이 발끝으로부터 중심부로 빠르게 이동하는 걸 느끼는 순간 새하얀 학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눈이 부셨다. 밖은 밤일 텐데도 햇살이 방안으로 들어와서 온 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햇살이 뜨거운 혀로 더듬은 자리마다 데이지꽃이 피어났다.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떨어진 데이지 꽃잎이 몸에 닿을 때마다 숨이 멎게 하는 전율이 밀려왔다. 짜릿하면서도 몽롱하기도 하고, 몽롱하면서도 온몸이 나른하게 주저앉는 것 같은 전율은 뭐라고 형용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의 온갖 소리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온몸의 세포들이 수천 미터 심해에서 잠을 깨어 수면 위로 올라와 솟구쳐 처음 햇살을 본 것처럼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결승선에 도착한 박 과장이 괴성을 지르며 풀썩 무너져 내렸다. 이불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거울 속으로 나신이 보였다. 처음에는 거울 속의 나신이 부끄럽기만 하더니, 나중에는 방아를 찧는 박 과장의 엉덩이가 호박처럼 둥글다는 것도 알았다. 도둑이 도둑질하면서 도둑질한다고 안 하고 그냥 턴다고 한다. 사기꾼은 사기 친다는 말 대신 작업한다고 하고, 소매치기는 일꾼이라 부른다. 뇌물 먹는 공무원은 보험료 받는다고 한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비극적인 사랑을 한다고 말한다. 단, 아마추어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혜진도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박 과장이 허벅지를 더듬어 손을 잡았다. 내버려뒀다. 박 과장도 손만 잡고 가만히 있었다. “딴생각 먹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오피스텔 앞에서 내렸다. 택시 안에 앉아 있는 박 과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택시를 바라보고 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마음속으로는 두 번 다시 블랙홀모텔에 가면 이혜진이 아니고 개혜진이라고, 다짐하고 맹세를 했다. 그랬던 것이 이튿날 출근을 해서 상황이 역전됐다. 벌써 출근을 해야 했을 박 과장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과장들은 부장과 함께 모닝 커피를 마시고 있다. 박 과장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은근히 걱정됐다. 어제 말도 없이 가더니 마포대교에서 빠져 죽었나?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부장은 늦어도 8시면 출근을 한다. 차장은 8시 20분까지, 과장급은 30분 전까지는 출근한다. 박 과장은 9시가 지나도 출근하지 않았다.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대리들한테 왜 박 과장님이 출근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어젯밤 박 과장이 양쪽 젖가슴에 나란히 선명한 키스 마크를 만들어 놓지 않았어도, 박 과장의 크고 단단한 그것이 무시로 입안을 들락거리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물어볼 수도 있다. “결재 올릴 것이 있는데 과장님 왜 안 나오세요? 오늘 휴가인가요?” 어젯밤 일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물을 수가 있다. 대리들은 친절하게 대답을 해 줄 것이다. 하지만 박 과장의 부재를 물었다가는 의심의 눈초리를 번뜩거릴 것 같아서 고개를 뒤로 돌릴 수도 없었다. 어머! 과장님. 박 과장이 출근한 시간은 10시쯤이다. 만약 박 과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90%는 내 책임이다. 난 속세를 떠나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녀가 될 테지. 아아! 제발 죽지만 말아줘요. 과장님 저 수녀 되기 싫거든요. 과장님만 살아 계신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갈 수도 있어요.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사람이 껌 종이 까는 것처럼 쉽게 죽지는 않아. 아니지, 어제 나 때문에 죽는다고 하셨잖아. 내가 뭐 대단한 여자라고…. 한만수 opinion@etoday.co.kr <저작권자 ⓒ 이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28)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7) 이혜진은 비를 피하려 식당 앞에 붙었다. 박 과장이 우산을 들고 뛰어와서 머리 위에 펼쳤다. 이혜진은 자연스럽게 우산 밑으로 들어갔다. “이혜진.” “네.” 박 과장의 입에서 마늘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러나 견딜 만했다. “우리 죽자. 아니 너는 죽으면 안 되지. 하지만 나는 죽으련다.” 차도에 횡단보도가 있다. 파란불이 켜져 있는데 모든 차들이 신호위반을 하고 있었다. 우울하게 불빛이 내려앉고 있는 거리는 조용하다. 박 과장이 고기 냄새를 물씬 풍기며 비장하게 내뱉었다. “주, 죽다니. 왜 죽어요?” 평소 박 과장은 실없는 농담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혜진이 깜짝 놀라서 박 과장의 팔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혜진 씨는 죽으면 안 되지. 하지만 난 죽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혜진 씨의 몸을 더럽힌 놈이니까 죽음으로 죗값을 할 생각이다.” “저…절대 죽으면 안 돼요. 과장님, 전 괜찮다고 했잖아요.” 이혜진은 박 과장의 손을 잡으며 비통하게 애원했다. “내가 죽어서는 안 될 이유 딱 세 가지만 말해 줘. 그 세 가지가 합당하면 목숨을 부지할 테니까.” 비가 내리는데 삼겹살집 앞에서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박 과장이 삼겹살집 옆으로 갔다. 이혜진은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과장님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만 말씀해 보세요.” 이혜진은 단 한 방에 돌려막기를 했다. 가슴이 벌렁벌렁 떨렸다. 손님들이 우르르 나왔다. 창피해서 박 과장의 팔짱을 끼고 어두운 곳으로 갔다. “좋아. 난 확실히 죽을 놈이니까 세 가지가 아니라 백 가지도 말해줄 수 있지.” 삼겹살집에서 나온 남자 두 명이 바지 지퍼를 열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혜진은 남자들이 오줌을 누러 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환한 곳으로 갔다. 젊은 남녀가 팔짱을 끼고 다가오고 있다. “우리 저쪽으로 가자.” 이혜진은 박 과장이 끄는 대로 따라갔다. 골목 안에 있는 모텔이다. 어제 저녁에 시간을 보냈던 모텔이다. “어제 그 방으로 줄까요?” 여주인이 길게 하품을 하며 창문을 열었다. 단골이 생겼다는 얼굴로 실실 웃으며 물었다. “맥주 두 병에 소주 한 병 올려 보내 주세요.” 박 과장이 계산하는 동안 이혜진은 너무 부끄러워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붉은빛이 감도는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키를 든 박 과장이 올라왔다. 이혜진은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를 흘끔 바라보고 나서 의자에 앉았다. 박 과장도 의자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머! 이혜진은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다. 천장에 대형 거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 밑에서 허우적거렸던 것을 생각해 보니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주인 여자가 맥주와 소주를 들고 왔다. 이혜진은 얼른 등을 보이고 앉았다. 박 과장은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소맥을 제조했다. “어서 말씀하세요.” 이혜진은 술을 더 마시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술잔을 건들지도 않았다. 거울 때문에 고개도 들 수가 없었다. 개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첫째, 나는 이혜진을 내 숨결보다 사랑하지만, 당장 결혼할 수가 없어서 죽어야 한다.” “둘째, 나는 회사 공금 100억 원 정도를 후려내서 이혜진과 외국으로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가 없어서 죽어야 한다.” “셋째, 나는 이혜진을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죽어야 한다.” 이혜진은 박 과장의 세 번째 말이 끝나자마자 소맥잔을 들었다. 여기 나 때문에 죽으려는 남자가 눈앞에 앉아 있다. 혼란이 파도쳐서 가슴을 아프게 후려갈기는 것을 느끼며 눈을 꼭 감고 원 샷을 했다. “죽지 마세요. 목숨은 귀한 것이잖아요.” 이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취기가 거침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너무 착한 박 과장이 불쌍하다. 하루가 멀다고 성폭행 사고가 일어난다. 지하철 화장실에서, 노래방에서, 사무실에서, 골목에서, 안방에서까지 성폭행 사고가 일어난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남자가 나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울지 마. 혜진아.” 이혜진은 어젯밤이 떠올랐다. 어제 울다가 얼떨결에 모텔에 왔다.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좀 진정해.” 박 과장이 이혜진의 팔을 잡아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혼자만 눕힌 것이 아니다. 옆에 따라 누웠다. 베개가 두 개씩이나 있는데도 굳이 팔을 뻗어서 팔베개하며 끌어당겼다. “과장님이 죽겠다는데 제가 어떡하면 마음을 바꾸시겠어요?” 이혜진이 박 과장 가슴에 기대어 눈물 콧물을 쏟으며 물었다. “가만있으면 돼.” 박 과장이 눈물을 닦아줬다. 눈물만 닦은 것이 아니다. 블라우스 단추를 열더니 다짜고짜 손이 들어왔다. “가만있어 봐” 이혜진은 몸을 비틀며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박 과장이 숨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깐 머뭇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박 과장이 유부남답게 번갯불에 콩 튀겨 먹는 속도로 알몸을 만들어 버렸다. “부, 불 좀 꺼 줘요.” 한만수 opinion@etoday.co.kr <저작권자 ⓒ 이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27)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6) 이혜진이 더 크게 흐느끼니까 박 과장이 얼른 계산을 하고 왔다. 박 과장의 옆구리에 안겨서 밖으로 나갔다. 술 탓인가? 난생처음으로 공개망신을 당했던 것 때문인가? 한 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취한 눈물은 자아를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서러운 여자, 스물다섯 살 여자 중에서 가장 외로운 여자로 만들어서 멈추지 않았다. 박 과장이 이끄는 대로 훌쩍거리며 따라갔다. 그곳이 모텔인 줄 몰랐다. 박 과장이 마음껏 울라면서 맥주를 따라줬다. 맥주에 눈물을 섞어 마시며 흐느꼈다. 어느 틈에 박 과장이 옆으로 와서 어깨를 감싸고 다독거렸다. 고마웠다. 박 과장이 옆에 있으니까 그나마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고마워요.” “고맙긴.” 박 과장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 과장의 손이 등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머머! 하는 사이에 박 과장이 껴안고 침대로 뒹굴었다. 눈물을 닦는 사이에 스커트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박 과장은 여자 옷 벗기기 선수였다.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박 과장의 가슴을 떠밀거나 고함을 지를 여유도 없었다. 스커트 속으로 들어오는 손을 밀어내면, 블라우스 단추를 열고 있었다. 젖가슴을 만지려는 손을 밀어내면 스커트가 공중을 날아 바닥으로 착지하는 것이 보였다. “오, 옷 구겨져요.” 박 과장이 재빠르게 상체를 일으켜 세워서 반복된 훈련으로 옷 벗기는 속도가 몹시 빨랐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알몸이 되어 버렸다. 이불로 몸을 가리려는데 박 과장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왜 들어오세요?” “나도 옷 벗었잖아.” “이, 이러시면…” 박 과장과 알몸으로 같은 이불 속에 누워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뭐고 느낄 겨를이 없었다. 묵직한 몸이 배를 짓누르는가 했는데 어느새 젖꼭지가 박 과장 입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놀라는 사이에 입으로 혀가 들어왔다. 이건 아니라며 고개를 돌리면 축축한 혀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혀를 피해 위로 올라갔더니 배꼽을 핥는 감촉이 뜨겁게 회오리쳤다. 배꼽을 핥는 묘한 감촉을 피하려고 몸을 옆으로 돌렸더니 엉덩이를 핥기 시작했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똑바로 누웠더니 남의 살이 몸속으로 당당하게 파고들었다. “미안해.” 첫 사랑, 아니 첫 경험이다. 25년 동안 애지중지 저축해온 처녀성이 단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영수증으로 남은 것은 시트에 한 점 점으로 찍혀 있는 진달래꽃잎이다. 박 과장이 감격한 얼굴로 와락 껴안았다. 입에서 순대 냄새가 풍겼으나 참을 만했다. “저, 전 괜찮아요.” 이혜진은 박 과장의 품에서 벗어나 얼른 이불로 혈흔을 덮었다. 박 과장은 말을 하지 않았다. 입술을 다물고 심각한 얼굴로 술잔을 내밀었다. 습관이라는 건 무섭다. 이혜진은 얼떨결에 술잔을 내밀었다. 박 과장이 어서 마시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혜진은 이 술이 박 과장과 마시는 마지막 술이라는 생각에 홀짝 비웠다. 점심도 먹지 않은 빈속을 따라 내려가는 소주의 감촉이 짜르르 울린다. 기다렸다는 얼굴로 박 과장이 다시 잔을 채웠다. 이홉들이 소주 한 병에서 몇 십 잔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닐곱 잔 나온다. 더구나 마지막 이별의 잔이다. 삼겹살은 1인분도 먹지 않았는데 금세 빈 소주병이 3병으로 늘었다. 박 과장은 말이 없었다. 삼겹살을 처음 먹어 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상추에 깻잎을 얹고, 청양고추를 분질러서 한 토막 얹고, 마늘 한 조각을 올린 다음 노릿하게 익은 삼겹살 두 점을 얹었다. 그걸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 원샷! 상추쌈을 우걱우걱 씹고만 있었다. “아줌마! 동치미 국물 추가!” 박 과장이 삼겹살집에서 처음 한 말은 동치미가 들었던 빈 그릇을 용감하게 들어 보였을 때이다. 이혜진은 취기가 가슴까지 차오르면서 자꾸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거의 1년 동안 영화도 몇 번 봤고, 바닷가도 갔었고, 맛없는 순두부찌개 안주에 취하도록 마시기도 했었다. 그걸 정이라고 하는 건지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다. 아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오늘 끝장내야 해. 박 과장이 충격을 받더라도 거래를 마감할 수 있는 작전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는 과장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어젯밤 일도 벌써 잊었어요.” “과장님, 어젠 제가 실수를 했어요. 저 그런 애 아니거든요. 그러니 두 번 다시 우리 밖에서 만나지 말아요.” “만약 과장님이 계속 이상한 생각을 하시면 회사를 그만두겠어요.” “과장님, 제가 과장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웃기지 마세요. 저 원래 개그 프로 안 보는 애거든요.” 가능한 한 퍼펙트하게 단타로 이별을 통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 과장이 소스를 주지 않아서 지금 상태가 상승 중인지 급락 중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가자.” 삼겹살 2인분을 혼자 거의 다 해치운 박 과장이 일어섰다. 술값을 계산하고 와서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앞장을 섰다. “어…어딜요?” 이혜진은 이 사이에 끼어 있을 고춧가루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따라 일어섰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박 과장이 비를 맞으며 편의점 쪽으로 뛰어갔다. 한만수 opinion@etoday.co.kr <저작권자 ⓒ 이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