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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oner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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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동거중이다.
나는 현재 동거중이다.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이미 ‘결혼적령기’ 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나의 동거인들은, 어머니, 아버지, 남동생이라는 이름의 다름아닌 가족이다. 30년 동안 혼자 살아본 경험은 없다. 군생활 기간의 2년, 친구 집에 얹혀서 1달을 제외하고는, 혼자는 커녕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생활을 영위했던 시간은, 내 인생에 없었다. 대학 시절부터 자취를 꿈꿔왔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아직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다. 이 나라의 많은 캥거루족들이 그러하듯, 내게 있어 ‘혼자 산다’ 는 것은, 어떠한 환경적 제약으로 인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다. 자취가 수반하는 다양한 형태의 책임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현실적 (또는 정신적) 대비가 선행되고서야 실행할, 반석 위에 놓인 ‘안전한 독립’ 의 문제이다. 개인적 공간 확보에 많은 제약을 지닌, 성인가족 4명이 함께하는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의 동거가 결코 쾌적하다 할 수 없음에도, 나는 아직까지 독립을 유예하고 있다. 하지만 독립하지 않음을 통해, 나는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내가 해군 수병으로 군함에서 복무했던 어느 날의 일과 후였다. 갑판 위에 서서 담배를 문 채 수평선 아래로 핑크빛을 흘리며 작아져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내가 완전히 독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을 내지 않고도 만족스런 식사를 하고 안락한 잠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동경해 마지 않았던 군함 승조원의 자격을 거의 아무런 투자 없이 이뤘으며, 주위에는 문자 그대로 ‘같은 배를 탄’ 동료들이 있었다. 경제적 평등과 복지, 복합적이고도 긴밀한 대인관계, 리스크 없는 꿈의 현실화. 이러한 것들이 나를 ‘내가 바라는 나’ 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이 시스템에는 이성관계의 부재라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 의식주와 그에 따르는 생활서비스들을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은, 현실의 풍파 속에 자칫 침식될 수 있는 ‘나’ 를 지키고, 일상의 무언가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거나, 혹은 부여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가을방학’ 이 ‘동거’ 라는 곡에서 노래했듯, “냉장고가 텅 비어 있더라도”, 혹은 “우편함이 꽉 차 있는 걸 봐도”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축복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지금의 나는 ‘독립적이고 무능한’ 사람이라는 고백이다. 무능하면서 독립적일 수 있다니. 아니, ‘무능하기 때문에’ 독립적일 수 있다니.. 새삼 놀라운 발견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중요한 발견은, 나의 ‘독립’ 에 기능하는 ‘무능함’ 의 힘은 점점 작아져 가고, 아마도 곧 멈출 예정이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수학 시간에 배웠던 ‘절대값’ 의 개념과 비슷하다. 갓 태어났을 때의 (가장 무능하고 독립적인) 내가 l-100l 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l-4l 정도 될 지 모른다. ‘0’ 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뎌져, 머지않아 독립 운동(?)은 멈출 테고, ‘0’ 을 지나면 이제는 l+1l, ㅣ+2l 로 이제는 점점 더 커져가는 ‘무능함’ 과 반(反)하는 어떠한 힘(이것을 ‘유능함’ 으로 칭해야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이 독립을 이끌 것이다. 그리고는,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방식으로. 하나하나 독립을 이뤄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 - '썸' 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늘에서 정해놓은 인연인 두 사람이 있어. 그런데 그 두 사람은 각각 자기가 상대방과 인연이란 걸 모르고 있는 거야. 이를테면 저 여자하고 나하고 하늘에서 정해놓은 인연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그런데 애초에 인연인 그 두 사람이 이제 더이상 영원히 못 보게 되는, 마지막으로 마주치는 순간이 온다 쳐. 참, 그걸 지켜보는 하나님은 되게 답답하겠지? '쟤네들 인연으로 맺어놨는데,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그냥 갈 길 가는구나' 싶으실 테니까. 아휴, 그럴 때면 절대자가 무슨 신호를 보내줬으면 좋겠어. 이를테면 아까 저 여자가 나한테 소주 받아서 돌아서는 그 순간에, 축구시합에서 심판이 호루라기 불듯이 절대자가 중지시키는 거지."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옆 산소에 성묘 온 여자가 광식(김주혁)에게 소주를 얻어간 후, 광식이 동생 광태(봉태규)에게 하는 말이다. 당시에는 그렇게 스쳐가고 말지만, 영화 말미에서 광식은 한 주점에서 우연히 그녀와 다시 마주친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가게 안의 소방설비가 오작동하고, 공교롭게도 그들 머리 위의 스프링쿨러가 터지면서 광식은 '절대자의 신호' 를 확인하게 된다. 벌써 본 지 수 년이 지난 이 영화에서도 특히 이 장면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나라는 사람은 연애관계에 있어서 다분히 운명론자인지도 모른다. '썸' 이라는 단어가 유행어를 넘어 언제부터인가 일반명사가 되었지만, 사실 '썸' 이라고 불리우기 전에도 썸은 존재했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 남녀는 언제나 썸을 타왔다.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은 언제나 유효했지만 점차 그 역할이 축소되었고, 다양한 추상적 개념들이 복합적으로 그 빈자리를 채웠다. 2차 성징을 겪은 남성들은 1년 중 특정 기간에 국한됨 없이 언제라도 상대에게 반할 준비가 되었고, 가임기의 여성들은 생물학적 짝짓기를 전제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현실적 관계와 무관하게) 누군가를 나의 무언가로 만들거나, 반대로 '누군가에게 있어서 무언가' 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느 저녁, 사람들로 혼잡한 지하철 역 안에서 환승 게이트를 지나려는데, 내 앞에서 걷던 여자애가 갑자기 동전 몇개를 바닥에 쏟는다. 나는 잠시 멈칫하고는 그대로 게이트를 지나치는데, 곧 '동전 줍는 일을 도왔어야 하나' 하는 후회가 든다. 여기서 내가 놓친 것은 다름아닌 '썸' 이다. 그리고 썸이 '썸(some)' 인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여기요"-"고맙습니다" 정도가 되었건, 만에 하나 그 이상이 되었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그것이 일시적일지언정)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주어진 가능성 앞에서 애써 등을 돌리는 태도는, (광식의 경우처럼)기껏 밥상을 차려준 절대자에 대한 무례일지도 모른다. 나만의 공주님, 또는 왕자님이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한심한 생각은 금물이다. 그 누군가가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고, 애초에 내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 단 한 명일 리도 없다. 학교 친구나 선후배, 직장 동료 중에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지하철 옆자리에서 내 어깨를 머리로 툭툭 치며 내내 졸던 그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우연찮게 매일 아침마다 정류장에서 마주치는 그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가진 책과 같은 책을 읽고 있던, 도서관의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거창하게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성을 마주하는 모든 경우가 '썸' 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시발점이며, 우리는 이러한 '잠재적 썸' 의 상황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광태가 경재(김아중)를 처음 만나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썸에 대처하는 이상적인 태도로 느껴진다. 상대를 배려하거나 자신을 방어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표현하는 광태의 태도는 더할나위 없이 솔직하고 또한 순수하다. 좋아하지도 않는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재경을 쫓아 달리고, 버스 차창을 통해 그녀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려 그녀를 향하는 광태의 '스스로의 썸에 대한 확신' 은 신기할 정도이다. 결국,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야말로 썸의 시발점이며 이상적인 관계맺음을 위한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보다 주어진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를 '썸' 을 시작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어야 하는지 모른다. 연애감정이란 언제나, 누군가의 마음 속 '의미부여' 로부터 시작되니까. 우리가 '누군가' 를 사랑한다고 말한들, 사실은 그녀(그)를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 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한철 <Tobacco Lady> – ‘담배 피우는 여자는 사랑스럽다.’
고등학생 시절에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다. 그때 나는 아직 담배를 배우지 않았고, 나보다 세 살 어린 그 애는 당시 중학생임에도 흡연자였다. 나는 그 애의 모든 것이 예뻤고, 담배 피우는 모습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 애를 좋아하는 데에 있어 그 애가 흡연자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담배야말로 내가 느낀 그 애의 매력을 구성하는 주요한 모티브였는지 모른다. 가수 이한철의 <Tobacco Lady>는 만화가 김풍의 웹툰 <찌질의 역사>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만들어진 곡이다. 작품 속 스무살의 남자 주인공이 담배를 먼저 배운 여자친구와 연애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노랫말로 그렸는데,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신선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담배 냄새가 좋았어 너의 담배 냄새가 좋았어' '낯설긴 했지만 콜록거렸지만 그땐 그저 너의 모든 게 좋았어' 이 밖에도 '내 손에 밴 담배냄새', '달콤쌉싸름한 키스' 따위의 표현들을 보곤 쿡쿡 웃음이 나왔다. 담배 피우는 여자친구와의 풋풋한 연애감정도 물론 흥미롭지만, 돌이켜 보면 이 곡이 신선함을 주는 지점은 다른 데에 있다. 여성 흡연자에 대해 공공연한 부정적 시선을 정면에서 위배하면서, '나는 담배피우는 여자를 사랑했다' 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 은, 남자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문제는, 단순히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위 남자들과 이야기해보면, 열에 아홉은 여성 흡연자에 대한 인식이 근거 없이 부정적이고, 심지어 흡연 여부를 여자의 선악(!) 여부를 판단하는 선입견의 잣대로 이용하기도 한다. 사회적 시선도 다르지 않은데, 보수적, 관료적이며 거대한 조직일수록, 여성의 흡연을 ‘반사회적 불온 행위’ 쯤으로 깎아 내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대기업의 여성 중역이나 여성 국회의원들이 담배를 피우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한 흑백논리는 절대적으로 부당하지만, 많은 남성에게 있어 주위의 시선을 무시한 채 거리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을 헤아려 본다면, '나는 담배를 피워' 라고 말하는 여자가 '내 여자친구는 담배를 피워' 라고 말하는 남자보다 훨씬 더 멋지고 용감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담배 피우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호감’ 보다는 ‘동경’ 에 가까운 감정이고, 동경할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의 매력은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물론 다분히 주관적이다.) 1. 그녀는 흔치 않다. 2. 그녀는 이성적이기보다 감상적이다. 3. 그녀는 계산적이기보다 즉흥적이다. 4. 그녀는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이다. 5. 그녀는 알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여성 흡연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점점 성숙해지고 있고, 머지않아 그녀들에 대한 선입견과 차별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아마 그녀들은 더이상 특별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들을 동경할 수 있는 이유 또한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