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ollowing
182
Follower
0
Boost

오늘 여의도는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자주 흐뭇했다. 점점 안심이 됐다. 끔찍했던 기억은 여전히 끔찍했고, 행복했던 기억은 여전히 행복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때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용기 있는 내가 없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힘들었던 지난날에도 벅차오르는 순간들이 곳곳에 스며 있었음을 인정한다. 결코 스쳐 지나간 정류장이 아니었다. 멈춰선 자리마다 꽃이 흐드러졌고 열매가 영글었다." 김선영,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에서 주어진 순간 앞에 성의를 다한 사람이 마주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 있다고 믿으면 여전히 불확실한 오늘이 나름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 되는 것 같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일하는 마음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마음이 되고 출근하는 마음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 편이다. 어떤 순간에는, 출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망연했던 날들을 떠올릴 때 더 그렇다. 퇴사 후 막막한 내일 앞에 한 숨 잠도 이루지 못했던 날. 출근하기로 한 전날 또 불확실한 내일 앞에 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봤던 날. 그러고는 막상 다음날이 되자 또 아무렇지 않게 혹은 어영부영 혹은 어쩌다 보니 보낼 수 있었던 하루들. 그런 괜찮은 하루들 사이에 가끔 들어가 있는, '내일 출근 안 해도 됐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라든가 '이건 아니다' 싶었던 생각이라든가. 그 순간들의 상당 부분은 가볍게 휘발되어버리고는 드문드문 과정과 사이들만이 남는다. 다시 한번 얼마 전 끼적였던 '워크 앤 라이프 하모니'에 대해 생각한다. 밸런스 아니고 하모니. '이번 봄이 제법 괜찮은 계절이 될 것 같다'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을 지나 '이번 여름은 어떤 계절이 될까' 생각하는 시간들을 맞이하고 있다. 앞으로도, <컨택트>(2016)의 루이스처럼 '모든 순간들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단단함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내일 서울교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영등포고가차도도 멀쩡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0.05.26.) https://brunch.co.kr/@cosmos-j/1040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여성 영화: "미스비헤이비어'(2020) 리뷰

(...) 1970년대 실화인 <미스비헤이비어>가 2020년대에 유효한 이유 미인대회 하면 무엇을 떠올리겠는가. 수영복만 입은 여성들은 앞뒤와 좌우로 훑으며 그들의 신체 부위 사이즈를 전자 제품의 스펙처럼 계량화 하고, 그들의 몸을 '평가'하는 대회. 좋은 심사를 받기 위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성 참가자들을 상품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놀랍게도 1970년 미스 월드 대회는 달 착륙이나 월드컵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생중계로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미스 월드 대회의 주최 측은 사업적 수완을 발휘해 이를 패밀리 엔터테인먼트로 적극 포장했다. 물론 5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성의 사회적 권리에 있어서도,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참정권 등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는 데 초점을 두었던 1세대 페미니즘, 문화 등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해방을 촉구한 2세대 페미니즘, 다양한 인종과 연령, 사회 계층으로 확대한 3세대 페미니즘에 이어 여전히 여성들의 목소리는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확산되고 있다. 한 사회가 전면적인 변화를 이룩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시대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연출 방식이 영화 <미스비헤이비어>의 후반부에 드러난다. (...) 5월 27일 국내 개봉을 앞둔 영화 <미스비헤이비어>(2020)의 리뷰를 썼다. 글 전문은 브런치에 게재하였다. https://brunch.co.kr/@cosmos-j/1037
영화
영화감상
+ 3 interests

다시 만난 봄의 '라라랜드'

"낭만적이라는 말을 왜 나쁜 말처럼 해?"라고 막을 열었던 영화는. 네 개의 계절을 지나 이 '꿈꾸는 바보들과 부서진 가슴들과 망가진 삶들'을 위한 이야기가 과연 누구를 위한 이야기였나를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라는 말에 이르러 진정 생각해보게 만든다. 저 말의 원문은 "I guess we're just gonna have to wait and see."다. 기다리고 바라보기만 해야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는 경우도 있다는 말일까.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야기는 영화 안의 또 다른 영화 안에서 보여주는구나. 다른 질감과 다른 비율로 찍힌 가상의 장면들. 어떤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서 그걸 바라는 것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게 삶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경우엔 그것 자체가 해가 뜨는 다음 날을 생각하게 만들고 멈추었던 꿈을 꾸게 하며 잊었던 것을 떠올리게도 만든다고. 그렇게 노래해주는 장면들. 지나간 장르를 다시 꺼내 생명력을 부여하는 <라라랜드>(2016)의 이야기란 영화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김연수, 『청춘의 문장들』)이라고. 3년 전 겨울 극장에서 만났던 영화를 3년 후 봄에 다시 만나면서, 지금 영화가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내가 그때와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 혹은 무엇이 바뀌지 않았는지. 리알토 극장이 문을 닫고 '볼더시티여 안녕'이 막을 내리고 나서도. (2020.04.25.) (사진: 2016년 12월 7일) 글 원문: https://brunch.co.kr/@cosmos-j/1019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애가와 찬가로 가득한, 가장 사적인 타란티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야말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처음부터 만들고 싶어 했던 종류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마치 마틴 스코세이지의 <휴고>(2011)나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2018)가 그들 각자에게 지닌 의미를 생각하듯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영화와 시간 사이의 관계 때문이다. 걸어 다니는 영화 사전이 되어가면서 청년기를 보낸 그는 늘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본인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며 머릿속에 있는 꿈과 취향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내보였다. 예산과 구조와 대상이 달라져도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건 결코 가상과 현실을 혼동하거나 경계를 억지로 허무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임을 한시도 쉬지 않고 일깨우는 방식으로서만 기능했다. 자신이 유년을 보낸 시기이지만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만 접해왔을 시대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가 회상하고 추억하고 또 애상하는 방식은 연출자이자 작가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단지 낭만의 시대를 찬미하고 탐닉하기만 하지 않고 공부하고 반추해왔다는 것을 161분 내내 보여준다. 그러니까, 굳이 <대탈주>(1963) 같은 영화를 몰라도, 1960년대 말의 미국 사회상이 어땠는지를 몰라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를 감상하는 데 별 지장은 없다. 오직 알아야 할 것은, 진정으로 영화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또렷하게 들리고 생생하게 와 닿는다는 사실이다. 최근 한 팟캐스트에 출연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이야기를 소설 등 영화가 아닌 매체로도 구상 혹은 고려 중이라 언급했다. 작년 가을에는 2차 대전 참전 군인인 주인공이 할리우드 영화에 싫증을 느끼다 구로사와 아키라, 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이름들의 외화를 접하게 되는 (대강의) 이야기를 구상 중이라 말한 적도 있다. 아직 열 번째 영화가 어떤 내용일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마르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은 무엇이든 들을 가치가 있다. 비행기 안에 검을 꽂는 자리가 있는 세계(<킬 빌 Vol. 1>(2003))도 극장 안에 나치 수뇌부를 몰아넣고 불을 지르는 세계(<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도 그 세계의 범위, 즉 영화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픽션이 덧없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것들과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가득 찬 1960년대생 키드의 이야기는 영화임에도 시간을 역행하지 않고 끝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 '온다' 리뷰: 스크린을 생생하게 뚫고 나온 장르초월 엔터테인먼트

사연 같은 것 없는 영화 호러 영화를 거칠게 둘로 구분하자면 '사연 많은 영화'와 '그런 거 없는 영화'일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이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을 죽게 한 장본인에게 나타난다든지 하는 게 전자이며 후자는 사연보다는 단지 '관객이 무서움을 느끼게 하기'에만 집중하는 종류다. 호러 장르의 역사를 논할 생각 따위는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극장에서 본 호러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하나 있는데,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팔로우>(2014)다.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특정한 저주를 받은 인물 본인에게만 보이는 어떤 존재. 소리도 없이 그저 느릿느릿 걸어오지만 절대 멈추지 않고 죽지도 않는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관계를 하는 것이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배역들이 모두 10대라는 점에서 <팔로우>는 마치 '성'에 대한 미성년의 막연한 환상 내지는 두려움을 호러라는 장르를 통해 표현해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주인공을 쫓아오는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왜 나타났는지 같은 것에 <팔로우>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온다, '그것''이 아니라 '온다'에 강조점을 찍고. 원제가 'It Follows'인 <팔로우>와 지금 소개할 <온다>(2018)는 영문 제목이 'It Comes'라는 것 말고도 닮은 구석이 있다. <온다>를 연출한 나카시마 테츠야는 광고 디렉터 출신답게 능숙해진 연출력과 감각적인 영상 속에서 사연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오직 하나의 목적에 충실하다. 엔터테인먼트. (그는 실제로 한 인터뷰 중 "정말 재미있는 라이브를 보았다"라고 관객이 느끼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국 영화로 따지면 표면상 <곡성>이나 <사바하> 같은 소위 '오컬트'로 언급되는 영화들과 유사한 면이 있겠지만 <온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영매와 무당이 등장하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단서를 쥐고 있다기보다 관객에게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진짜 주인공은 되지 못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역시나 진짜 주인공은 되지 못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주인공이 누구라고? <온다>에는 서사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인물이 실질적으로는 없다시피 하다. 명시적으로 구분되지는 않지만 크게 세 부분 정도로 나눠볼 수 있는 영화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듯 보이는 화자는 세 번 바뀐다.
영화
영화감상
+ 2 interests

[1인분 영화]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 -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 (2020.03.25.)

(...)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의 영문 타이틀 중 의회를 뜻하는 ‘The House’는 뒤집어진 채로 나온다. 거기 ‘Knock Down’이 앞에 붙으니 말 그대로 이 작품은 일단 ‘의회를 뒤집어놓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소수의 신인들이 ‘기성 질서를 무너뜨린’ 일이 바로 그 ‘소수의 신인들’에게는 세상을 이제야 바로잡는 일이다. 여러 글을 읽고 영화를 보며 자료를 찾다 다시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아마도 평생 당사자가 될 일 없을 어떤 것들에 대해 온전히 통감하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견문에는 미약함과 한계가 있다. 그러니 쉽사리 ‘외면하지 않겠다’라거나 적극 나서서 의견을 표명하는 일에는 얼마간의 조심스러움이 있기도 하다. 다만 보지 못한 면들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미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달리 볼 줄 알기 위한 견문을 조금이나마 넓혀나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2020.03.25.) 이메일 영화리뷰&에세이 연재 [1인분 영화] 3월호의 열한 번째 글은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영화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2019)에 관해 썼다. https://www.instagram.com/p/B-CMTduFKQV/?igshid=1c8q1a6fomq4y
영화
영화감상
+ 1 intere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