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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그래도 괜찮아서 슬프다

지난 2004년 57회 칸 영화제는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자를 낳았다. <올드보이>가 이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을 때, 최민수를 누르고 남우주연상을 따낸 주인공은 일본의 열네 살 소년 배우 야기라 유야였다. 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에서 주인공 아키라 역을 맡아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 심사위원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제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보았지만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건 아키라의 표정뿐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버림받은 네 남매의 이야기다. 한 배에서 나온 아이들은 제각각 아빠가 다르다.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는 일을 한답시고 나가면 며칠이고 집을 비우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새 남자친구가 생긴다. 엄마는 "결혼하면 다 같이 큰 집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아이들을 꽁꽁 숨겨둔 채 좀처럼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멀리 일하러 간다며 크리스마스까지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집을 나선다. 그리곤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가 떠난 뒤 집안을 책임지는 열두 살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아 분)의 일상은 내내 눈에 걸린다. 그는 엄마의 부재가 이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라는 듯 익숙하게 세 동생을 돌본다. 직접 장을 봐온 재료로 요리를 하고 설거지에 청소까지 못하는 게 없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남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단 생각에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남매의 삶이 아키라에겐 낯설지 않고, 카메라는 내내 무표정한 얼굴의 그를 좇는다. 그렇게 영화는 소년이 처한 비극적 현실 대신 이를 대하는 그의 섬뜩한 어른스러움에 방점을 찍는다. 엄마가 남긴 돈이 바닥나며 피폐해져 가는 아이들의 생활은 안타까움을 넘어 무겁게 다가온다. 너무 어려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는 아키라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주먹밥을 얻어 동생들을 먹이는 에피소드, 셋째 시게루가 자판기를 지날 때마다 잔돈 반환구를 확인하는 장면 등은 군더더기 없이 현실적이어서 더욱 뼈아프다. 가스와 전기, 물이 끊긴 뒤 동네 공원 화장실을 찾아 볼일을 해결하고 마실 물을 받아오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와중에 가장 슬픈 건 다름 아닌 아이들의 무덤덤한 천진함이다. 나름 철이 든 아키라와 둘째 교코(기타우라 아유 분), 장난꾸러기 시게루(키무라 히에이 분)와 귀여운 막내 유키(시미즈 모모코 분)도. 이들은 좀처럼 웃을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단 한 번도 우는 법이 없다. 야구 글러브를 갖고 싶은 아키라와 돈을 모아 피아노를 사겠다는 교코, 장난감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 시게루, 아폴로 초콜릿을 좋아하는 유키까지.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게 만드는 아이들의 면면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내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른'은 무관심하거나 최소한의 도움만을 제공할 뿐이다. 현관문을 연 집주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집안 전경과 거지 꼴에 가까운 아이들은 영화가 지닌 이 같은 관조성의 정점이다. 애처롭게 도와달라 부르짖는 대신 아무 말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이들의 눈빛. 그 안에는 역설적이게도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절실함이 엿보인다. 그건 스크린 밖 관객을 대하는 <아무도 모른다>의 시선이기도 하다. 마음 깊이 가득 고인 눈물을 간직한 듯한 그 먹먹한 눈빛 말이다. 2017년 2월 8일 재개봉.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 예술을 대하는 이 시대를 향한 일침

현대미술에서 예술은 아티스트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손끝에서 시작된 영감은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술작품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진가를 발견해주는 이가 없다면 관객과 만날 수 없고, 그의 작품 또한 작업실 한구석에 처박혀 잊히기 십상이다. 이런 작가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바로 아트 컬렉터다. 그들은 진흙 속에 숨겨져 있는 진주 같은 작품들을 발굴하고, 공인되지 않은 작가의 가능성만 보고 기꺼이 작품을 사들인다. 그렇게 작가는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을 걸고, 작업을 이어갈 기회를 얻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는 20세기에 큰 족적을 남긴 아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의 이야기다. '예술 중독자'(Art addict)란 부제대로 평생에 걸쳐 미술 작품들을 모으는 데 전념했던 페기의 생애를 폭넓게 다룬다. 페기의 자서전 <자유분방한 페기 구겐하임>를 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 감독이 영화화했고, 여기에 집필 당시 페기의 육성 인터뷰가 더해졌다. 아트 컬렉션이 부자들의 재테크나 재벌가의 돈세탁 수단 정도로 여겨지는 이 나라의 세태에서 영화 속 페기의 면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구겐하임 집안의 부를 상속받은 페기가 억압적인 집안 분위기를 벗어나 자유분방한 현대미술 작가들과 교류하고, 진정으로 예술과 예술가들을 사랑하게 된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잭슨 폴록, 바실리 칸딘스키, 피에트 몬드리안 등 유수의 작가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그에게서는 유능한 컬렉터이기에 앞서 누구보다 열정적인 미술 애호가이자 팬으로서의 모습이 엿보인다. 예술을 향한 페기의 애정과 교차하며 드러나는 페기의 불행한 삶은 면면히 뼈아프다. 열세 살에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 아버지를 잃고, 절친했던 언니와 5년간 동거한 연인 존 홈스에 이어 딸의 죽음까지 맞닥뜨린 페기의 일생은 기구하기 이를 데 없다. 영화는 이런 그가 마음 둘 곳이라곤 오직 예술뿐이었다는 점을 담담하게 조명한다. 페기가 평생에 걸쳐 수많은 예술가를 아낌없이 지원하는 한편 그들과 염문을 뿌린 사실은 사랑과 예술을 갈구했던 그의 고독 어린 심연을 짐작게 한다. 크게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이어지는 영화 속 페기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드라마틱하다. 그가 런던에서 자신의 첫 화랑 '구겐하임 죄느'(Guggenheim Jeune)를 열고, 2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유럽 작가들의 미국 망명을 도운 지점에서는 뭇 남성들을 능가하는 추진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내 뉴욕에서 개관한 화랑 '금세기 미술'로 미국과 유럽 미술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데 이어 베네치아에 정착해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운영하며 생을 마감하기까지, 평생 페기가 모은 작가 100여 명의 작품 326점은 그 자체로 그의 인생 여정이자 취향 그 자체일 것이다. 아트 컬렉션이란 게 원래 그렇듯 말이다. 2017년 2월 9일 개봉.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다. 미술 전체가 거대한 투기사업이 되어 있었다. 진정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속물적인 의도로, 혹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그림을 구입해 미술관에 맡겨둔다. … 몇몇 화가들은 이제 호된 세금이 매겨지는 존재가 된 탓에 1년에 한두 점만이 매매되고 가격은 비밀에 부쳐진다. 사람들은 확신이 없기 때문에 가장 비싼 것만 구입한다.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사니 감상은커녕 창고에 넣어두고 최종가를 알기 위해 매일 화랑에 전화를 걸어대는 사람들도 있다. 마치 주식을 가장 유리한 시점에 팔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600달러에도 팔기 어려웠던 화가들의 작품이 이제는 1만 200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 18년 전 미국 미술계에는 순수한 개척정신이 있었다. 나는 그 운동을 지원했고 후회하지 않는다.

<재심> "우리가 틀렸고 네가 맞았어"

2000년 8월 10일 오전 2시께,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한 택시기사가 차 안에서 살해당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기사의 사체는 발견 당시 열두 차례 칼에 찔린 상태였고, 유일한 목격자는 동네 다방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사고 당시 스쿠터를 타고 현장을 지나던 중 "한 남자가 뛰어가는 것을 봤다"라고 경찰에 증언했다. 3일 뒤 경찰은 그 소년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리곤 "소년이 택시기사와 말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그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했다"고 결론지었다. 이른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전말이다. 영화 <재심>은 바로 이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당시 용의자로 지목된 최군은 10년간 감옥살이를 한 뒤 2010년 출소했고, 지난 2016년 11월 17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영화가 다루는 건 딱 그사이의 이야기다. 살인자로 낙인찍힌 소년이 어른이 되어 사회로 돌아온 뒤 자신의 억울함을 인정받기 위해 사법 당국을 상대로 벌이는 투쟁 말이다. '한탕'을 노리는 변호사 준영(정우 분)이 현우(강하늘 분)의 재심을 맡고, 점점 진심으로 그를 돕게 되는 전개가 영화의 큰 줄기다. 극 중 준영은 다분히 세속적인 캐릭터로서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영화의 분위기를 끌어낸다. 영화는 약촌오거리 사건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현우와 경찰의 상반된 증언을 통해 다층적으로 그리는데, 이로 인해 영화 초반부 준영의 혼란은 그대로 관객에게 전해지며 진실의 모호성을 부각한다. 이런 준영이 사건을 파헤치는 와중에 '법적 대리인'에서 진정한 '변호인'으로 변모하는 전개는 의미심장하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혈혈단신으로 '마녀사냥'에 맞서는 준영의 투쟁은 퍽 감동적이고, 다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의사 결정에 있어 반성의 여지를 남기기에 이른다. 현재 진행형의 사건을 다룬 <재심>은 사회적으로 미묘한 위치를 갖는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도맡은 김태윤 감독은 언론 시사에서 "<재심>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극영화지만 완전한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화를)만드는 동안 사건이 유명해져서 영향을 받긴 했다. 하지만 극영화의 사회 고발 역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라며 "휴머니즘 영화로 생각하고 <재심>을 만들었다. 사회 고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영화가 바로 그 휴머니즘 덕분에 사회적이고 현실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영화는 여느 탐사보도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와는 또 다른 결로 '더 나은 세상'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극 중 경찰과 사법부라는 가해자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본 현우는 특별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틀렸고 네가 맞았다"는 말을 듣고, 살인 누명을 벗고 싶을 뿐이다. <재심>은 변호사 준영이 바라보는 이러한 현우의 모습을 통해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게 영화는 가장 영화다운 방식으로 관객을, 또한 대중을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 법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이라도 그가 살인범이 아니란 걸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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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쇼퍼> 미지가 자아내는 공포, 또는 희열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은 파리 패션계 셀러브리티 키라(노라 본 발드스타텐 분)의 퍼스널 쇼퍼(Persnal Shopper)다. 그는 매일같이 키라의 옷과 액세서리를 대신 구입해 그의 옷장을 채우는 한편 심장마비로 죽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를 잊지 못한 채 건조하게 살아간다. 영매였던 루이스의 영향으로 초현실적 존재를 느끼는 모린은 언젠가 루이스가 유령이 되어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 거란 생각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린은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받고, 이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점점 상대방과의 대화에 빠져든다. 영화 <퍼스널 쇼퍼>는 미지를 대하는 개인의 감정을 복합적이고도 미묘하게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 모린 앞에 잇따라 놓이는 알 수 없는 현상들에는 어떤 단서도 덧붙여져 있지 않고, 대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빈칸들이 영화의 동력이 되어 특유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공포와 스릴러 장르의 외피를 한 채 존재와 비존재,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이에서 커다란 물음표를 던진다. '퍼스널 쇼퍼'라는 정체성과 맞물려 그려지는 모린의 캐릭터는 영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어딘가에서 또 다른 어딘가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린을 뒤따른다. 그는 하루가 멀다고 출장을 다니는 키라를 대신해 부티크와 빈집을 바삐 오가고, 한편으로는 그저 막연하게 죽은 오빠를 기다린다. 공과 사, 업무와 일상의 영역에서 지극히 기능적으로만 살아가는 모린의 모습들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그는 타인을 빛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도구'이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부름을 받아야만 비로소 해방될 수 있는 수동적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모린의 자아에는 주체성이 결핍되어 있고, 그래서 희미하기만 한 모린의 속내는 그에게 '신호'를 보내는 '누군가'와도 다르지 않다. 그가 기다리는 '유령'처럼, 관객에게 있어 모린 또한 미지로 가득한 유령이 되는 셈이다. 영화 중반부, 모린이 알 수 없는 존재와 처음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시퀀스는 압도적이다. 오토바이와 기차,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오가는 그의 동선 속에서 15분여 동안 이어지는 이 장면들에서는 흔한 공포·스릴러 장르 공식과는 차별화된 긴장감이 느껴진다. 모린은 "나는 상대방을 모르지만, 상대방은 나를 안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대화에 빠져들고, 이 희열에 가까운 호기심은 스크린 밖까지도 오롯이 전해진다. 그렇게 영화는 비로소 모린을 가슴 뛰게 하고, 미지를 파고드는 대신 '미스터리'를 통해 자아를 확인하는 개인의 심리에 방점을 찍는다. 이번 작품으로 첫 단독 주연을 맡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영화에서 단연 돋보이는 수확이다. 검정 톤의 라이딩 재킷과 스키니진, 운동화 차림에 대충 쓸어 넘긴 듯한 짧은 머리카락까지. 내내 캐주얼한 스타일과 공허한 감정 연기로 중성적이고 냉소적인 캐릭터를 완성한 낸 그는 마치 모린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온갖 감정을 뭉뚱그린 듯한 그의 눈빛과 표정, 행동 하나하나 또한 영화가 지닌 감성을 완벽함에 가깝게 담아낸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겸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전작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만난 크리스틴을 통해 모린 캐릭터를 구상했다"고 말했다. <퍼스널 쇼퍼> 속 모린의 여정에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성장이 겹쳐 보이는 이유다. 2017년 2월 9일 개봉.

<폴링 스노우> 사랑과 변절, 그리고 남은 이들의 상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인 1961년. 소련 외교부에서 일하는 사샤(샘 리드 분)는 사절단으로 파견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한다. 아내 카티야(레베카 퍼거슨 분)와 함께 남몰래 미국행을 준비해 온 그는 일행에게서 벗어나 망명에 성공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내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홀로 미국에 남게 된다. 30여 년 후, 뉴욕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노년을 보내고 있던 사샤 앞에 소련 해체 소식이 들려오고, 러시아 모스크바에 초청돼 미술 전시를 열게 된 조카 로렌(레베카 퍼거슨 분)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폴링 스노우>는 냉전으로 인한 연인의 이별과 상처를 다룬 로맨스 영화다. 스파이물과 로맨스를 엮어냈다는 점에서 최근 개봉한 <얼라이드>와도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다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영국 스파이의 사랑을 다룬 <얼라이드>와 달리 <폴링 스노우>의 서사는 미국과 소련 간의 첩보전 속에 피어난 로맨스에 대한 것이다. 사샤와 카티야의 이별을 시작으로 앞뒤로 뻗어나가는 플롯 구성은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지점이다. 영화는 과거의 사샤가 미국 망명을 결정한 이유를 조금씩 드러내는 한편 현재(소련 해체 이후)의 사샤가 몰랐던 진실을 하나하나 조명한다. 양방향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통해 카티야에 대한 샤샤의 기억을 돌이키고, 그 와중에 상처를 입은 제삼자들을 현재에 이르러 소환한다. 빈칸들이 모여 긴장감을 쌓아 올린 끝에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맞닿는 영화의 플롯은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두기에 부족함이 없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이자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캐릭터는 다름 아닌 로렌이다. 부모를 잃고 고모부 사샤 슬하에서 자란 그는 냉전이 만들어낸 비극의 산물이자 사샤에게 있어 잃어버린 카티야를 투영할 유일한 존재다. 작가인 로렌이 모스크바 갤러리에 카티야의 초상화를 내걸고, 러시아 기자 마리나(안체 트라우 분)를 통해 사샤와 카티야의 흔적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들 연인의 과거 에피소드와 교차되며 기시감을 자아낸다. 특히 카티야와 로렌 두 인물을 맡아 1인 2역을 선보인 배우 레베카 퍼거슨의 연기는 영화 안팎에서 깊이 각인된다. 소련에 남은 사샤의 친구 미샤(안소니 헤드), 아버지를 잃은 마리나 등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는 영화를 단순한 스파이 로맨스물 이상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피어난 사랑이 변절을 낳고, 이것이 또 다른 피해자를 발생시키는 악순환은 '국가'와 '안보'라는 이름의 폭력성을 효과적으로 상기시킨다. 여기에 사샤와 로렌, 마리나의 삼자대면 이후 밝혀지는 진실은 카티야를 향한 사샤 개인의 기억을 '남은 이들'의 치유와 용서로 치환하기에 이른다. 과거와 현재 두 줄기로 흐르는 플롯이 재차 연인, 친구, 동료, 가족 관계로 지나치게 파편화된 점은 못내 아쉬운 지점이다. 과거의 사샤-카티야-미샤, 현재의 로렌-마리나 다섯 인물의 심리가 서사에 매몰돼 좀처럼 깊이 있게 드러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한두 명의 주인공에 집중하는 대신 폭넓게 분배된 캐릭터 설정은 100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속에서 일견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꿈꾸었던 삶을 대신해 충실히 살아갈 것"이라는 메시지만큼은 유의미하다. 앞서 언급한 <얼라이드>와 나란하게 <폴링 스노우>가 남기는 숙제는 거기에 있다. 2017년 2월 9일 개봉.

<너의 이름은> 이전, '신카이 월드' 역주행 안내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은 대상화의 세계다. 거기에는 '나'라는 이름의 주체가 있고 '내가 대하는 것'으로서의 대상이 있다. 주인공이 보고, 느끼고, 상상하고, 꿈꾸지 않는 존재들은 끼어들 틈이 없다. 여성과 남성, 청소년과 성인은 '나'에게 있어 각각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개인으로 귀결된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나 하늘 위로 흐르는 뭉게구름, 느릿하게 떨어지는 벚꽃이나 눈발은 '내'가 밟고 선 세계 위에서 아스라이 빛난다. 매일같이 지나는 전철역도, 공원도, 학교도 마찬가지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그 세상이 '나'를 규정한다. 최근 국내에 개봉한 <너의 이름은.>이 300만 관객을 돌파한 건 이러한 '신카이 월드'가 일본을 넘어 우리나라에서도 보편적 팬덤을 획득했다는 증거다. 이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는 것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작은 주인공'의 이야기란 점에서 '중2병'적 서사의 승리로도 비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녹록지 않은 현실에 지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월드'의 가장 첨단이자, 15년여간 이어진 그 세계를 돌아보는 기점이 될 만한 작품이다. 이 즈음해서 다시 꺼내어 볼 만한 신카이 마코토의 이전작 4편을 추천한다. 이건 신카이 마코토의 과거이자 <너의 이름은.>의 과거이기도 하다. <별의 목소리>(2002) "우주 너머까지 가 닿는 그리움의 세계"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유엔군에 선발돼 우주여행을 떠나게 된 소녀 미카코와 지구에 남은 소년 노보루의 교감을 다룬 작품이다. 휴대폰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던 두 사람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자가 전송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점점 길어진다는 설정이 큰 줄기다. 화성, 명왕성, 시리우스를 거치며 1일에서 1년, 8년까지 늘어나는 둘 사이의 간극은 '영원'으로 수렴하는 그리움으로 애틋하게 다가온다. "세계란 휴대폰 전파가 닿을 수 있는 곳"이라거나 "우리는 아마 우주와 지상으로 찢어진 연인의 첫 세대"라는 대사는 화룡정점이다. <별의 목소리>는 첫 단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로 두각을 드러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7개월여 만에 만든 작품이다. 성우 더빙과 음악 이외의 모든 작업을 혼자서 도맡은 만큼 최근 작품들에 비하면 만듦새는 조악하다. 그런데도 두 주인공이 함께하는 해 질 녘 풍경이나 푸른 하늘, 우주 공간과 외계 행성에 대한 묘사에서는 감독 특유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난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같은 꿈을 약속한 이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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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택트> 미지의 언어, 그 새로운 지성과 관념의 세계

미국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1884~1939)와 벤자민 리 워프(1897~1941)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고 주장했다. 언어는 무의식 속에 투사된 내적 세계를 경험의 세계로 끌어올려 실제적 경험의 토대고,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각각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대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자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시제가 존재하는 영어권과 시제가 없는 중국어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미국인의 시간 개념이 절대 불변하는 선형적인 거라면, 중국인에게 있어 시간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추상(抽象)인 셈이다. 영화 <컨택트>는 바로 이 '사피어-워프 가설'을 중심에 두고 외계와의 '접촉'을 다룬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 각지에 나타난 열두 척의 거대 UFC(미확인 비행물체)와 이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밝히려는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이른바 '셸'이라고 불리는 물체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땅 위에 가만히 떠 있고, 세계 각국은 불안감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다. 이 와중에 루이스는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 분)과 팀을 이뤄 셸에 주기적으로 들어가 외계 생물과 마주하고, 그들이 내는 소리와 써 보이는 문자들을 연구하며 의중을 파악하려 애쓴다. 18시간마다 주기적으로 외계인들과 마주하는 루이스가 그들의 메시지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전개는 영화를 견인하는 주요 동력이다. 미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미지의 생명체와 교감하는 루이스는 신세계를 접한 개인의 긴장과 환희를 스크린 밖까지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전 세계 언어 해독 1인자 루이스조차 좀처럼 알아내기 어려운 외계 언어는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이해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미지에 대한 안보 불안 속에서 차례차례 소통을 끊고 전투태세에 나서는 국가들은 이 같은 루이스의 염원을 더욱 극적으로 조명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루이스의 회상 장면들은 영화 전반에 걸친 수수께끼이자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로써 중요한 장치다. 루이스와 딸 한나의 꿈결 같은 한 때가 외계어를 습득해 가는 루이스의 서사와 교차되며 확연해져 가는 진실은 영화 말미에 이르러 아릿한 감동이 되어 가슴을 울린다. 여기에 다분히 실험적으로 쓰인 플래시백 또한 영화적으로 신선하고 과감해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루이스가 연구하는 언어가 단지 소통을 넘어 지성과 관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클라이맥스는 <인터스텔라>와 닮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SF와 드라마를 절묘하게 엮어낸다. 영화 속 길쭉한 원반 형태의 '셸'은 웅장하다 못해 신성할 정도로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섬뜩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루이스 일행이 셸 내부에서 마주치는 외계 생물들도 마찬가지다. 짙은 안갯속에서 좀처럼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에게서는 우주 괴물과 신화 속 동물의 모습이 동시에 엿보인다. 특히 그들이 루이스 앞에 그려내는 문자는 마치 물속에 번지는 잉크처럼 추상적이어서 언어라기보단 차라리 일종의 '마법진'처럼 여겨진다. 여기에 시종일관 무겁게 울리는 외계 생물들의 음성과 셸 내부의 효과음 또한 SF 장르 특유의 신비감을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컨택트>는 소설가 테드 창의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물리학도 출신인 테드 창은 이 소설로 네뷸러상, 휴고상, 로커스상 등 과학소설 분야의 유명 상들을 휩쓸며 "가장 위대한 과학 단편소설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지난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로 국내 관객과 만난 캐나다 감독 드니 빌뇌브가 이 작품을 모티브로 <컨택트>의 메가폰을 잡았다. 2017년 2월 2일 개봉.

<다방의 푸른 꿈> 걸그룹이 '음악'을 한다는 것

바야흐로 걸그룹의 시대다. 매주 가요 프로그램마다 데뷔 무대를 갖는 걸그룹이 한두 팀씩은 된다. 1990년대 말 SES와 핑클을 시작으로 본격화된 걸그룹 '리그'는 10여 년이 흘러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양자 대결로 정점을 찍었다. 최근의 대세 걸그룹이라면 'TT'로 인기몰이 중인 트와이스나 막 활동을 마친 아이오아이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점점 더 많은 걸그룹들이 다양한 콘셉트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며 경쟁은 치열해지고 수명은 짧아진다. 올해로 데뷔 6년 차를 맞은 AOA는 최근 방송에서 "우리와 같은 해 데뷔한 걸그룹이 70여 팀이나 됐다"며 "그중에서 지금까지 활동 중인 팀은 헬로비너스, 피에스타, 크레용팝 정도"라고 했다. 국내 걸그룹의 기원을 찾다 보면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9년 일본 동경 군인회관에서 열린 조선악극단 공연 전단 속 '저고리 시스터즈'라는 이름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성 가수들이 모인 저고리 시스터즈는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와 함께 일본 공연 무대에 올랐다. 애초에 그룹으로 기획됐다기보단 프로젝트 팀 형식의 걸그룹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 저고리 시스터즈를 거쳐 간 가수 중에 이난영이 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은 그가 만든 '진짜 원조' 걸그룹, 바로 김시스터즈에 대한 이야기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은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다.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가세는 기울었고 김해송은 납북됐다. 이난영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두 딸 숙자와 애자, 그리고 조카 민자를 미 8군 무대에 올렸다. 불과 열서너 살의 나이에 데뷔한 이들은 입소문을 탄 끝에 스무 살 즈음이던 1959년 미국 라스베가스에 진출했다. 이후 김시스터즈는 라이프지 특집 화보의 주인공이 되었다. TV쇼 CBS <에드 설리번 쇼>에는 (비틀즈보다도 많은)22회나 출연했다. 미국 내 1인당 국민소득이 2076달러였던 시절, 김시스터즈는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1만 5000달러의 주급을 받았다. 라스베가스에서 네 번째 고액 납세자가 됐다. 그들의 미국 진출은 국내 걸그룹 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이었다. 영화는 세 자매 중 막내인 민자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1941년생. 일흔이 넘은 나이의 그는 김시스터즈의 결성과 활동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회상하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무대에 서는 게 정말 행복했다"는 그와 자매들은 음악가 집안에서 자연스레 음악 천재로 자랐다. 열 가지도 넘는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새로운 악기를 접하면 금방 익혀 연주할 수 있었다. 'K팝스타'나 '슈퍼스타K'같은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비교해도 단연 돋보일 만한 천재다. 민자의 인터뷰 외에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김시스터즈의 공연 무대다. 그중에서도 <에드 설리번 쇼> 속 공연 장면들은 이들이 어떻게 미국의 톱스타가 되었는지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운 음색과 완벽에 가까운 하모니는 말할 것도 없고, 무대를 장악하는 퍼포먼스와 특유의 흥은 놀라울 정도다. 정해진 안무 따위 없이 스윙 템포에 몸을 흔드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음악을 대하는 날것으로서의 환희가 그대로 전해진다.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웃음을 자아내는가 하면, 아일랜드 출신인 사회자 에드를 위해 백파이프 연주 무대까지 꾸민다. "우리 병사들을 기쁘게 해주다가 직접 우리나라에 왔다"며 김시스터즈를 반긴 미국인들 사이에서, 어느새 그들은 신선한 해외 뮤지션이 아닌 익숙한 미국 팝 스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음악이 더 이상 음악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에도 영화는 적지 않은 시사점을 남긴다. 그리고 이는 섹시나 큐트, 걸크러쉬 따위의 미명 하에 '기획된' 걸그룹이 아니라, 멤버 개개인의 음악성과 개성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걸그룹에 대한 갈증이기도 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재즈 클럽에서 여전히 남편과 함께 공연 무대에 오르는 민자, 김시스터즈를 기억하며 '뮤지션'이자 걸그룹으로 고군분투 중인 미미 시스터즈와 바버렛츠. 반세기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들 사이에 보이는 영화 속 연결고리는 퍽 다행스럽다. '무대'에 앞서 '음악'을 하는 걸그룹, '퍼포먼스'가 아니라 '흥'에 취하는 관객 사이의 교감은 언젠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 <다방의 푸른 꿈> 속 '푸른 꿈'의 실체는 바로 거기에 있다. 2017년 1월 2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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