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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살까 말까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될 고민거리. ‘옷을 살까 말까?’ 반복적으로 기습하는 충동에 떠밀릴 때마다 즐거운 숙제를 안은 기분으로 인터넷을 뒤지거나 쇼핑몰을 헤매고 다녔다. 답을 찾는 게 아쉬워 일부러 빙 돌아다니며 옷 한 벌 사겠다는 핑계로 수십 벌의 옷을 구경했다. 도시에는 욕망의 주기를 불필요할 정도로 앞당기는 볼거리들이 흔했다. 스마트폰에 지친 눈을 무심코 풀어 놓고 있으면 동공을 조이는 뭔가가 걸려들기 마련이었다. 다양한 색의 완벽한 조화, 탁월한 질감, 센스 있는 믹스매치. 잡지 화보에는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모델이 궁극의 미를 연출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각자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 요령껏 멋을 부린 이들이 현실적인 스타일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때는 그들과 똑같아지기 위해 애쓰다 결국은 절대 똑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좌절하던 나날도 있었다. 옷이 한 인간을 대변하는 절대적인 표상이라 믿었던 열네 살의 나는 남자애들이 이제 막 싹튼 성욕에 몸부림치듯 이제 막 싹튼 소비욕구에 쩔쩔 맸다. 당시의 나는 인생 어느 때보다 옷에 대한 욕망이 컸음에도 인생 어느 때보다 돈이 없었다. 엄마를 졸라 타낸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손에 쥐고 명동 거리의 싸구려 옷에 환장하는 게 할 수 있는 쇼핑의 전부였다.

가정주부입니다만

집안일, 출산, 육아…. 이런 말들이 유부녀를 정의하는 보편적인 단어였던 시절은 지나간 것 같지만 오늘날에도 이 몇 가지 단어의 폭 안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은 꽤 많다. 이런 몇 가지 단어들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자신에게 불만족하거나 만족하거나와 상관없이 그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버거운 이들 또한 여전히 많다. 그러나 그 버거움은 돈으로 수치화되지 않아서인지 그에 따르는 수고 또한 뭉뚱그려 추상화 되고는 한다. “집안일 힘든 거 알아. 다 알지.”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하나도 모르는 거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누군가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어보면(쇼핑몰 사이트의 회원가입을 할 때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상황에서도) 속으로는 전업주부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프리랜서’라고 말하고 다닌다. 부업으로 돈을 버니 거짓말은 아니나 프리랜서라는 용어가 없었다면 이 애매한 위치를 포장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가정주부가 뭐 어때서’라는 오기 섞인 심경(이미 여기서부터 콤플렉스가 엿보인다)으로 부러 떳떳한 발음으로 ‘주부’라고 말해봤는데 그때마다 “아~네.” 정도의 싱거운 반응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면전에서 “겨우 주부야?”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1,2초 간 드러났다가 아차차하고 사라지는 표정에서 그들에게 비춰진 나의 모습이 어떤지 대충 짐작 가능했다. 직장인들이 가정주부에 대해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는 딱히 공감대를 찾기 어렵고 이해관계가 성립하기 힘들다는 점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가족이 아닌 이상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기브 앤 테이크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사회생활이라는 네트워크 안에서 인맥을 만들려면 자기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영향력이 있을 거라고 추정하게 만드는 근거가 있어야 유리한 법인데. 친구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낯선 사람과 어울리며 지인으로 만들어 나갈 때. 꼭 치밀하게 계산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인간관계 자체가 에너지 소모이고 기회비용이 사라지는 일인데 의미 없는 만남은 한두 번은 몰라도 세 네 번까지 이어지기는 힘든 법이다. 하다못해 조직 내에서 겪는 회사생활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쉽지 않아 감정적으로도 소통하기 어려운 대상인 가정주부와 만나서 뭘 어쩌겠나. 오래된 친구가 아닌 이상 주부는 주부끼리, 엄마는 엄마들끼리 어울리기 십상이고 그 만남만으로도 관계의 풀이 채워지기 마련이지. 때문에 가정주부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직장인들은 ‘학습지 교사, 우유 판매원, 마트 영업사원, 백화점 직원, 헬스장 트레이너’ 정도로 좁혀진다. 은근히 비위를 맞춰주는 이들의 접대는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사회적 정체성을 일시적으로나마 끌어올려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해주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한다. 그래봤자 소비자지만. 소비자가 아니고서는 낄 자리가 없는 게 현실이라 혹할 때가 있다.

애비로드에 대해

존 레논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비틀스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다”는 말을 해서 욕을 많이 먹었다. 서양인들이 신으로 여기는 예수를 감히 인간과 같은 급으로 비교한 발언은 신성불가침 영역을 건드린 금기어였다. 예수는 ‘유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인류 보편의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찬송가 대신 비틀즈를 흥얼거리게 되었다고 한들, 너의 음악에 영혼을 팔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하듯 욕했을 것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예수의 흔적을 보기 위해 순례길을 떠나고는 했다. 당시의 순례는 오늘날의 여행처럼 몇 박 몇 일로 예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 험한 길을 걷다 보면 여정은 기약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드는 일이라 전 재산을 쏟아 부은 이도 많았다. 목적지는 죽은 예수나 성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당이었다. 지친 여행 끝에 도착한 성소에는 예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썩은 나뭇가지나 천 조각이 보관되어 있었다. 낡아빠진 소품 앞에서 그들이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성소 방문이란 동시대 사람들이 단체로 열망하는 집약적인 목표였다는 사실만이 추정 가능한 역사로 남아 있다. 신에 대한 대중적인 열망은 오늘날 ‘셀러브리티’로 불리는 유명인들에게로 옮겨갔다. 경건한 예배당과 비명 소리 가득한 콘서트 장은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이지만, 닿을 수 없는 영역의 대상에 대한 열망에 관해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스타에 대한 추종 심리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식당이나 거리에도 어려 있다. 미국 전 대통령 오바마가 머물렀던 식탁을 유리관에 전시해 놓은 베트남 식당의 의도는 분명하다. 유명인이 강림했던 흔적으로 손님들을 끌어보겠다는 의도가 유난스럽게 전달된다. 같은 인간을 요란하게 떠받드는 방식은 때론 굴욕적이다. 내가 앉은 자리는 일어나자마자 원상복귀 되는데 누군가의 자리는 그대로 보존되다니. 귀족을 모시는 하인 곁에 선 농부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사실 유명세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불행의 조건에 가깝다. 자신을 볼 때 끊임없이 불특정 다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니까. 대신, 죽음이 이르렀을 때. 그동안 괴롭힌 대가를 보상하듯, 만인의 뇌에 그의 이름이 자리할 특실이 마련된다. 이름이 알려진다는 건 그런 일이다. 죽으면 땅 밑에서 사라지는 법인데. 유명한 이름은 누군가의 뇌를 무덤으로 삼는다. 셀러브리티에 대한 부러움은 유치하게도, 유명인이 머물렀던 자리에 앉아 그들이 받았을 시선을 간접 체험해보는 쪽으로 흐른다. 다소 허황된 마음을 벗어나면 현실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선택을 따라해 보고 싶은 계산이 선다. ‘돈 많고 바쁜 사람이 선택한 곳'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삶의 선택권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제 3자’가 주도하는 이 기막힌 심리는 유명인의 ‘영향력’이라고 불리며 온갖 마케팅에 이용되고는 한다. 이 심리는 경매시장에서 살짝 다른 방향으로 틀어 극도로 과열되고는 한다. 몇 만원이면 살 수 있는 화장품이 마릴린 먼로의 것이라는 이유로 몇 천만 원에 팔리는 현상은 그 세계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미스테리다. 경매 시장은 유명인의 손을 닿는 건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해 버리는 동화 속의 왕과 같은 손으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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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

가까운 대상은 뚜렷하고 멀리 있는 대상은 흐릿한 상태. 난시. 가까운 대상보다 멀리 있는 대상이 잘 보이는 상태. 원시. 눈앞의 연인만 보이던, 사랑의 초창기 시절은 난시에 시달리는 환자 같았다. 초점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바람에 다른 존재들은 다소 흐릿해져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심리적인 시력 저하 상태. 그러다가도 언젠가는 겨울이 오는 것처럼. 같은 자리에서 몇 개월 격차를 두고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곁의 연인보다 멀리 있는 누군가가 차츰 눈에 들어오는 시력의 역전은 팔을 덮는 소매 길이가 그렇듯 차츰 다른 거리감으로 바뀌어 어느 순간 차창 밖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기도 한다. 누구도 아이스커피를 주문하지 않는. 한파주의보가 내린 어느 카페의 한구석으로. 작동을 멈춘 에어컨 밑으로. 함께 있는 온도가 에어컨으로 식혀야 하는 열기가 아니라는 깨달음. 그다음의 순간으로. 눈을 떠보면 먹다 남은 치킨을 데워먹는 눅눅한 아침의 식탁이다. 사랑을 속삭일 때 느꼈던 완전하고 충만한 감정이 식어버린 치킨처럼 눅눅해졌을 때. 마지막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은 팍팍한 부위를 씹어 삼킬 때처럼.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어제의 바삭함을 회복하기 어려운 닭가슴살을 먹어치우듯이 이 사랑은 대체 뭔가 곱씹어 봐야 하는, 식탐을 철학하는 시간. 치킨은 치킨으로 와서 제 몫을 끝내고 떠난다. 끝이 왔을 때. 남은 뼈다귀는 쓰레기봉투에 버리는 정도로 깔끔하게 끝낼 수 있다면. 화석이 될 리 없는 뼈다귀를 땅에 묻고는 언젠가의 발굴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재계발을 막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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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냄새

다른 인종을 알아간다는 건 그동안 정의 내려왔던 사람에 대한 개념을 부수고 개미의 영역으로 내려가 어떤 대상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기어오르며 역으로 탐구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내 나라가 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인데 그 무언가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고 절대 예상할 수 없었던, 말로 설명되지 않는 냄새가 코의 언어로 다가와 말을 거는 종류의 색다른 즐거움이 포함되어 있다. 페로몬을 교환하는 개미들처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깨인 감각기관을 달고 이 나라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냄새를 발견하는 탐험가가 된 기분. 배 멀미에 시달리는 육지 사람처럼.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거북스러운 멀미를 느끼면서도 맡아본 적 없는 암호를 해석하려 애쓰는 사람들. 여행자라 불리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린 종종 낯선 나라로 떠나 불시 착륙의 후유증을 견디며 고통과 쾌감을 차례대로 맛보고는 한다. 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냄새가 있다. 내부자들은 모르는 내부자들의 냄새. 익숙한 냄새는 무향으로 취급해 버리는 코의 권태스러운 성향 덕에 정작 본인들은 알지 못하는 그 땅에 고인 냄새. 마치 고대에 살았던 어느 폐쇄적인 부족이 미신을 믿는 마음으로 뿌렸던 액막이용 액체가 진짜로 효력을 발휘해버린 것처럼. 현지인의 냄새는 외부인과 내부인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되기도 한다. 일종의 검문소라 불러도 좋을 냄새의 벽은 공항에서의 모든 절차를 통과한 후에도 입국을 위한 비공식 절차로 남아 후미진 골목길 식당 어딘가에서 불쑥, 등장하기도 했다. 가방에 든 물건을 탐지해내는 최첨단 장치를 통과했든 어쨌든 자기 알바 아니라는 듯. 이를 테면 똠양꿍에 놓인 고수처럼. 불시에 허를 찌르며 이방인의 비위를 시험하려 들었다. 동남아 어느 나라의 식당에 앉았을 때의 일이었다. 쑥 비슷해 보이던 고명을 입에 넣고 나서야 그런 행동을 하려면 사전에 이 나라 음식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필요했다는 걸 깨달았다. 고춧가루나 마늘처럼 독하기로 유명한 재료에 단련된, 꽤 하드코어 한 미각의 소유자라는 오만에 대한 응징 비슷한 질책을 받는 느낌이기도 했다. 한쪽 분야의 레벨 높은 강도에 익숙해졌다고 해서 다른 쪽 분야의 센 강도를 견디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고수란 풀은 단순히 매운맛을 견디는 레벨로는 소화하기 힘든 완전히 다른 영역의 식물이라는 걸 일초 전의 젓가락질이 구역질 나게 후회되도록 깨달았다. 시금치나 취나물이 삼삼한 이웃이라면 고수는 이 나라 온갖 잡귀의 사무친 원한으로 코와 목에 저주를 건 듯한, 영적인 차원의 사차원 풀떼기랄까. 외국인이 홍어를 삼킨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호기심에 먹어본 생선에게 끔찍한 공격을 당한 여느 외국인의 회복을 바라는 심정으로 휴지를 뽑아 들었다. 품고 있던 독을 쏘고 죽어버린 벌 한 마리를 꺼내듯. 고통스러운 경험을 선사하고 명을 다한 풀을 뱉은 후 물 두 컵을 비우고서야 간신히 잡귀의 저주에서 풀려 날 수 있었다. 죽도록 미운 코리안이 있다면 고수를 잘게 다져 넣은 만두를 대접한 후 열 배로 복수당할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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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의 죽음

장례식장에 가면 관이 안치된 방이 죽 늘어서 있다. 무슨 여관방처럼, 아파트 호수처럼. 획일적인 배열에는 생애 최초로 죽음을 맞이한 자의 특별한 경험을 존중해주는 개별성은 없지만 지상의 삶에서 쫓겨난 망자의 고독을 공동의 경험으로 아우르는 보편의 무늬가 있다.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옆방의 어떤 할머니도 돌아가셨구나... 보편의 죽음. 보편의 생애. 효율적인 공간 대여를 위한 천편일률적인 구색은 때론 그 인간적이지 못한 무신경함으로 인간적인 위로를 준다. 모든 죽음에 위로가 필요할 만큼 슬퍼했던 건 아니다. 딱히 친하지 않은 지인의 부모상에 갔을 때. 살아있던 생명이 꺾여 스러진 소리는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건조하게 들렸다. 가을을 맞이한 나뭇잎이 바닥에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는 정도의 감각으로 장례식장 복도를 걸었다. 잎이 떨어질 때마다 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방마다 터져 나오는 곡소리에도 마음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물에 섞이지 못하는 기름처럼. 고인과 나는 따로 놀았다. 육개장을 떠넘기기 전. 부조금을 건네고 이름을 적고, 묵념을 하고 조의를 표했다. 형식적으로 배정된 일련의 순서에 안심했다. 일정한 절차가 없었다면 어떠한 위로도 소용없는 상실감 앞에서 무슨 제스처를 취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을 것이다. 자칫하면 딱히 슬프지 않은 속내가 노골적으로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아직 장례식장에서 육개장 먹어본 경험이 많지 않던 어린 시절. 열세 살의 나에게 죽음은 다이애나비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방바닥에서 뒹굴 거리며 TV나 보고 있던 주말에 전달된 한 줄짜리 속보는 짧고 명쾌했다. ‘다이애나 비 교통사고 사망’ 한 인간의 생애가 몇 마디 뉴스로 신속하게 끝나버린 상황이 당황스러워 잠시 벙 찌고 말았다. ‘사망’은 ‘숙제’나 ‘꿈’처럼 열세 살 주변에 얼쩡거리기 마련인 흔해빠진 단어가 아니었다. 굳이 누가 나에게 주입하지 않으려 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은밀히 흘러나온 일종의 암호라고나 할까. 텅 빈 집에서 딱히 물어볼 사람도 없어 혼자 해독해본 암호는 일초 만에 풀렸다. 그 말은 바로 그녀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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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셀프로 염을 한다.

고가의 안티에이징 화장품을 샀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코덕이 추천한 신박한 물건. 손가락 길이만 한 튜브를 눌러 나온 크림을 눈가와 입가에 바르고 톡톡.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뚱이에 뭔가를 바르는 행위란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셀프로 염하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모르니 멈출 수가 없다. 흙으로 컴백할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관리를 멈출 수가 없다. 아침에 바르고, 저녁에 씻고 바르고 씻고. 무한궤도의 반복. 시시포스의 바위를 들어 올리는 기분. 화장품을 바르는 일이 산 자의 품위를 위한 대책이라면 시체의 몸을 닦아주는 염은 죽은 자의 품위를 위한 절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온몸을 닦은 장의사가 얼굴에 파우더와 연지를 발라주었다. 고인의 마지막을 곱게 장식하려는 고마운 배려였지만 덕분에 싸늘하게 식은 피부는 하얗게 강조되었고 새빨간 립스틱은 요란하게 두드러졌다. 할머니가 살아 거울을 본다면 화장이 안 먹었다며 지워버렸을 메이크업이었다. 다짐했다. 내 손으로 화장을 지울 수 없는 순간이 오기 전에, 유언장에는 꼭 내 피부 톤에 어울리는 NARS 아쿠아 글로우 쿠션 파운데이션 21호를 써놔야겠다고. 그토록 세심하게 단장해봤자 며칠 후면 본격적으로 썩기 전, 땅 밑이나 화장로로 아웃. 그대로 소멸될 것이다. 소멸을 자각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소멸되어 최종적인 말살을 체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이러니한 복일 것이다. 살아서 맛본 소멸은 살아 있음을 대가로 해서 뿌리까지 쓰게 흡입해야 했다. 흙탕물 같은 한약을 들이켤 때 코를 막지 못하고 역겨운 냄새를 견뎌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죽음이란 코를 막을 수 있는 마비 상태... 가 아닐까? 살아있을 때. 젊음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 낱낱이 드러난 거울은 비극적인 무대였다. 형광등 아래 잔인하게 드러나던 기미와 잔주름. 다행히 노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스무 살에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떴더니 환갑이 되는 비약은 영화에서나 구경해 봤다. 노화의 여정은 기나긴 날들 동안 야금야금 진행됐다. 곁에 있는 이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런 면에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존재는 살짝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서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과밖에 모른다. 그리고 알고 있다. 내가 가장 예뻤던 날을. 그 날에서 뚝 떨어진 오늘을. 만약 모든 인간들에게 벤자민 버튼처럼 외모와 마음의 나이가 거꾸로 배치된다면 좀 나아지는 게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고생한 대가로 피부가 팽팽해지고 젊어서는 아직 철이 없는 죄로 쭈글거리는 피부를 견뎌야 한다면... 오래 살고 볼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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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탈의 한계

현대인의 소비 습관이 ‘소유’에서 ‘렌탈’로 바뀌어가고 있다... 고 신문기사들은 말한다. 바쁜 기자들이 전국의 현대인이 카드로 뭘 결제하는지 일일이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쓴 것일 리는 없을 것 같고... 렌탈 상품을 기획한 기업과 모종의 짝짜꿍이 있었을 법한 내용이었다. 렌탈 상품이 출시되기 시작한 타이밍에 언론이 암시한 주문은 “이젠 사지 말고 빌리자.”였는데 새로운 행동강령을 제시하기 전에 늘 그랬듯, 우리가 살아온 패턴을 까주는 걸 잊지 않았다. 왜 그러고 사니? 땅값 비싼 나라에서 좁은 집구석에 그득그득 욕심 사납게 쌓아놓고 싶니? 무소유 모르니? 지름신이 왔을 때 훅 지르고 후회하지 말고, 가볍게 빌려서 질릴 때쯤 쿨하게 반납하는 게 실용적이지 않겠니? 어떠니? 무소유 정신과 소비욕구의 콜라보. 너희들의 변덕스러운 욕망을 목돈 대신 푼돈으로 나누어 채울 수 있게 해줄게. 여기에 사인만 하면 돼. 뭔가에 홀린 듯 기사 옆 광고창을 클릭하면 렌탈 약정의 깨알 같은 법적 기준이 나열된 계약서로 가는 통로가 열리고는 했다. 소비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는 인간들에게 ‘돼지처럼 살지 말고 돼지의 삶을 빌리기만 하면 된다’는 깨우침으로 새로운 방식의 노예 라이프를 제안하는 말잔치에 깜박 속아 옷을 한 벌 렌탈해 볼까 하고 인터넷을 뒤지다 그만두고 말았다. 빌릴 게 없다. ‘이 돈 줄 거면 새로 한 벌 사는 게 낫겠다’싶은 애매한 가격대의 옷들이 애매한 디자인으로 걸려 있어 김칫국물을 묻히지 않는 조건까지 감수하며 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업 역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것 같다. 머리가 나빴거나. 렌탈이라는 구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언론 기사에 혹했던 것도 타당하다고 동의하는 주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놓고 나면 쉽게 질리는 변덕스러운 심리, 좁은 집, 단기간 사용하는 육아용품들...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헤어 나오기 힘든 소비 패턴에 고민하던 차에 렌탈 상품은 꽤 괜찮은 대안이었다. 다만, 아직까지 최적의 방법은 아닌 것 같다. 호구 짓을 할 땐 하더라도 대놓고 호구되는 기분은 느끼지 않아야 속아줄 텐데 발연기를 하면서까지 속아주기에는 허술한 부분이 많았다. 불황이 오면 이성이 깨어난다. 소비자들은 알아서 머리를 써서 소비패턴을 기획해 ‘렌탈 주고 빌릴 바에는 중고나라에서 사거나 되판다’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중이다. 중고나라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렌탈 상품이 나온다면 이 시장을 다 먹을 텐데.. 아마 언젠가는 그럴 것이다. 가족 같은 직원들을 미친듯이 족친 다음 꽤 머리를 써서 깜빡 속을 전략을 들고 나올 것이다. 기업을 믿는다기보다는 그들의 돈 욕심을 믿는 만큼 결국에는 길을 찾아낼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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