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증으로 인해서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현실에서 후퇴하는 작용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초자아의 비난은 그가 조그만 잘못도 그냥 건너뛸 수 없게 한다. 초자아의 명령에 자아는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병의 경우는 좀 다르다. 초자아를 무시하는 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자아는 나르시스와 함께 손을 잡고 초자아에 대항할 수 있다. 증상이 자리가 잡히기 전에는 자기관리도 안 되고 하는 모습이 정신분열증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리가 잡힌 증상은 망상을 통해서 현실에 참여한다. 약물로 눌러 두는 데는 한계가 있다.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강남살인남. 묻지마 살인사건이다. 피해자를 기억하기보다 가해자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는 그 기억에 시달릴 수 있다. 정신분석 과정은 여기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이 얼마나 내담자를 힘들게 만드는지 아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이슈'로 자리 잡히게 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더욱이 이번 사건 같은 경우는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시달릴 수 있다. 그래서 가해자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인권 타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명예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삶에 부과된 과제다. 강남살인남이란 명칭이 그의 체면을 얼마나 깎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말이 유족의 가슴에 못 박는 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신질환과 정신질환 범죄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정신질환의 문제는 삶의 효율을 많이 떨어뜨린다. 그래서 일상이 괴로워진다. 그러나 정신질환 범죄는 효율이 낮지 않다. 범죄는 효율이 낮은 행동이 아니다. 익숙하다고 할지라도 초자아는 언제나 우리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자아를 무시할 수 있다면, 도덕이나 윤리나 법 등을 어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짚고 넘어가게 되면 뭔가 께름칙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여혐'이라고 단정짓는 것 역시 위험하다. 그가 지닌 정신질환의 문제는 제 3의 피해자 집단을 양산할 가능성이 높다. 외면받는 소수자가 있다는 말이다.
강남살인남. 그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은 별로 없다. 뉴스를 뒤져봐도 신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과 과거에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4차례 입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해 동기는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했기 때문이라는 말과 애초에 아무나 찔러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성으로부터 구체적인 피해사례가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여혐'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여자를 혐오하기 때문에 일으킨 범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여성을 혐오하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가 진정 여성 혐오로 인해서 범죄를 각오한 것이었다면 그는 도망가야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범죄를 더 저질렀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여혐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건에 대한 탐구는 묻힐 것이다. 대중은 '여혐'이란 프레임으로 범죄자를 설명하고 정신질환자와 남성에 대한 위기만 가진채 이 사건에 대한 연구는 마무리 지어질 것이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이쪽이다. 겉으로는 가장 좋은 방법 인척 '가장'하는 것이다. 쉽고, 단순하게, 그리고 선입견을 만들면 그만이다. 그럼 아무 일 없는 듯 넘어갈 수 있다. 저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미리 조심하자. 그런 인식만 심어줄 수 있으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