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와서 병원 첫 점심식사는 구내식당에서였다. 제주에 오기 전까지 직원 구내식당의 이미지는 예산에 맞추어 차려낸 모양이 그럴싸한 음식들을 알아서 가져다 먹는, 그럭저럭이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메뉴 중 하나는 돼지고기 고추장볶음이었다. 앞다리살 같은 퍽퍽한 살을 야채와 함께 볶아낸 것인데 생김새는 육지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고기니까 조금 더 가져가야지 하는 생각을 무심한 집게질에 더해 식판에 올리고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돼지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뒤 잠시, 나는 손을 멈칫했다. ‘아니, 구내식당 돼지고기 맛이 이 정도야?’ 육지에서 맛보던 밋밋한 돼지고기들, 맛있다는 식당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여간한 식당이나 구내식당에서는 그저 고기라는 이유로 좀 더 먹게 되었던 돼지고기였었다. 그런 고기에 대한 생각이 다른 곳도 아닌 제주의 오래되어 조금은 허름하기까지 한 작은 병원의 구내식당에서 완벽하게 깨진 것이었다. 내가 손을 멈칫하며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는 동안, 다른 직원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엔 병원이 직원 복지를 위해 식사메뉴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일까 하는, 되돌아보면 참 황당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주돼지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수학여행때였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에 와서 2박 3일의 일정동안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마 성읍에서의 일정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제주의 전통가옥을 설명해주는 누나(?)는 영화 연풍연가의 여주인공 만큼 예뻤다. 우리가 전통가옥의 통시 앞에 모였을 때, 누나는 제주토종돼지와 통시의 기능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다가 마지막 즈음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남자들은 똥을 싸다가 돼지한테 부랄을 따먹히기도 했다.’고 친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내 마음은 잠시 숙연해졌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부랄을 따먹힌 남자들’에 대한 애도때문은 아니었다. 통시 안에서 돌아다녔을 토종흑돼지의 모습은 순간 사라지며, ‘어떻게 저 예쁜 얼굴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거지?’ 하는 작은 실망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예쁜 누나에 대한 호감을 버리지 못했다. 이어진 누나의 열정적이고 친절한 권유에 부모님 몸 속 곳곳 안좋은 데 없다는 지네가루를 사든 것이다.
제주 돼지에 대한 사랑은 추억 속 기억과 첫인상을 지나 일상에서 깊어갔다. 돼지고기는 먹을 때마다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게다가 5년전의 돼지고기 가격은 정말 저렴했다. 나름의 ‘품위유지비용’면에서도 적절했기에 내가 주최하는 회식메뉴는 언제나 돼지고기였다. 먹으면서 제주돼지는 왜 육지고기보다 더 맛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왜일까.. 흑돼지가 단순히 제주토종돼지인 줄 알았던 때에는 그냥 토종돼지라 맛있는 줄 알았었고, 그럼 백돼지는? 이라는 생각이 이어지면 남쪽의 섬환경에서는 돼지들이 맛있어진다는 근거가 궁금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제주토종 흑돼지는 구경도 할 수 없을 만큼 희귀해지고,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돼지들은 제주에서 사육한 백돼지이거나 외래종과의 교배를 통한 잡종흑돼지임을 알고 있고, 맛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유를 밝히는 와중에 최근엔 돌연변이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설명하는 기사도 접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앞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돼지고기를 두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장 입안의 만족과 긴장의 느슨함에 고민이나 궁금증은 오래가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일단 맛있으니 맛있게 먹으면 되는 법. 다만, 5년전에 비해 가격은 거의 두 배가 올랐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다.
지금은 어느 식당 고기가 맛있는지 나름의 구분도 생기고, 고기를 사려면 어느 가게를 가야하는지 정보도 얻으며, 평균으로만 보아도 고기가 맛있는 이 섬 안에서 세세한 차이를 구분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고기를 익히는 다양한 방법도 경험해 보았다. 고기의 맛도 다르지만, 고기를 조리하는 방법도 육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보편적으로 참숯이나 가스불판에 얇게 손질한 고기를 올리지만, 여기서는 일단 고기가 두터워야 한다는 게 다르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두텁다못해 근고기라 하는, 고깃덩이를 통째로 불에 올려 서서히 익혀내는 모습은 그 모습에 군침부터 돌지만, 저걸 언제 다 구울까 하는 조급함까지 들게 한다. 불이 은은하게 잘 붙은 참숯에 살이 두꺼운 석쇠를 놓고 두터운 오겹살을 올리면 고기는 서서히 수축하면서 육즙을 배어내며 익기 시작한다. 그 옆에 스텐종지에 담긴 멜젓을 불 위로 놓고 취향에 따라 마늘 고추를 썰어넣은 뒤 한라산 소주를 조금 넣는다. 오겹살을 한 번 뒤집어 다시 익히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다보면 멜젓도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바삭하게 익은 돼지껍질과 조금은 누렇게 익으며 기름이 빠지고 성긴조직이 바삭해진 지방층과 불에 살짝 탄 듯 고소하게 익은 고기층이 겹겹인 고깃조각을 끓는 멜젓에 살짝 찍어 먹는 맛도 정말 일품이다. 짭짤하면서도 텁텁하면서 조금은 담백한 듯 한 멜젓과 잘 구운 돼지고기와의 궁합은 정말 좋지만, 내 짧은 혀로는 그 궁합이 어째서 성립이 되는지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처음엔 그 궁합이 어색하다가 이제는 멜젓은 돼지고기를 굽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 되어버렸다. 은은한 연탄불 위에 근고기를 올리고 익는대로 차례로 조각내어 익히는 방법은 육즙을 덜 손실시키면서 맛을 유지한다. 그것이 근고기의 정석이면서 맛의 비법이기에, 목욕탕 때밀이를 하다가 그만두고 고깃집을 차렸다는 어떤 아저씨의 집에서는 손님에게 어설픈 가위질을 맡기지 않는다고 한다. 좀 더 다른 방법은 참나무 장작화로에서 근고기를 초벌한다음 불판위에 올리는 것이다. 뜨거운 화로 안에서 초벌한 고기는 육즙 그대로 뿐만 아니라 참나무 훈연의 향이 배어있다. 그렇게 초벌한 고깃덩이를 뜨거운 불판 위에서 차례로 잘라가며 익혀먹는 근고기구이도 인상적인 조리법이었다.
나는 제주에서만큼은 소고기 위에 돼지고기가 있다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소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제주 돼지고기는 자연과 환경이 부여한 이곳만의 특별함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제주돼지는 사람들의 삶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돼지를 추렴하는 날은 돼지와 관련된 수많은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돔베고기를 시작으로 순대국에 몸국,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고기국수까지..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제주에 오면 맛볼 수 있는 메뉴들의 대부분이다.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이런 음식들과의 만남이고 그것은 나의 입맛을 까다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런 변화를 가장 강렬하게 이끄는 메뉴가 바로 제주 돼지고기이다. 훌륭한 재료의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이 보편이어서 구하기도 어렵지 않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 역시 제주돼지고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