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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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사실 필자는 고전 문학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물론 유명한 고전 몇 권 쯤은(돈키호테, 레미제라블, 구운몽 등) 읽어봤지만 사실 지금 시대의 소설을 읽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러다 오랜만에 고전 문학을 한 번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아볼까 하는 겉멋으로 집어든 게 바로 이 '데미안' 이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부터 아빠 미소를 지으며 읽게 될 줄이야. 데미안의 처음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한다. 중상류층 집안의 독실한 크리스찬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싱클레어는 어느 날 집이 잘 살지 못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공립 학교 학생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 아이들이 서로 자신이 한 나쁜 짓거리를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데 그에 지고 싶지 않았던 싱클레어는 자신이 과수원에서 자루 가득 사과를 훔쳐냈다는 거짓말을 한다.(어릴 적에 한 나쁜 짓은 그 당시에는 마치 영웅적인 행동으로 또래에게 비춰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그런데 공립학교 학생들 중 우두머리 격이던 프란츠 크로머가 그 과수원 주인 아주머니가 과일을 훔친 사람을 알려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면서 싱클레어를 이르겠다고 하자 싱클레어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키고 가족들에게 알려질까봐 노심초사하며 자신이 대신 돈을 줄테니 제발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돈이 부족했던 싱클레어는 결국 자신이 한 거짓말에 묶여 크로머에게 돈이 부족하단 명목으로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싱클레어는 자신이 한 거짓말로 인해 이제 영원히 자신은 이전의 착한 부모님의 아들로 돌아갈 수 없다면서 괴로워한다. 귀엽지 않은가? 요즘 시대로 바꿔보면 거짓말을 친구에게 들켜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기 이전의 착한 부모님의 아들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고 후회하고 걱정하는 초등학생 이야기로 볼 수 있으니 말이다.(물론 괴롭히는 친구 녀석은 머리를 쥐어박아주고 싶다.) 거짓말 한 번에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착한 아들이 될 수 없다며 고뇌하는 어린 초등학생이라니. 읽으면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생각보다 재밌는 소설의 시작은 고전 문학에 대한 거리감을 좀 줄여주었고 빠르게 소설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전체적인 소설의 줄거리는 앞에서 말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똑같은 고뇌를 계속해나가며 성장하는 싱클레어의 이야기이다. 싱클레어는 점점 커가면서도 자신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악, 나쁜 면을 인지하고 계속해서 고민한다. 학교에서는 평화와 행복을 노래하는 선만이 올바르고 제대로 된 길이라고 가르치는데 자신 안에는 성에 대한 호기심, 질투, 나태, 반항심과 같은 악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자신은 영원히 선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고민하는 싱클레어 앞에 어느날 나타난 데미안은 말한다. 선과 악은 원래 하나이고 뗄 수 없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악한 면을 받아들이고 선과 악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라고. 그러한 데미안의 이야기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압락사스라는 신이다. 소설 속에서 압락사스는 이렇게 묘사된다. "압락사스는 신이자 악마인 신이었다." 즉 인간 안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가 선을 대표하는 신을 섬긴다면 악을 대표하는 악마도 섬기거나 혹은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신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즘 시대에야 저러한 사상이 그리 새롭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소설이 나온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절대 선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그 가치관을 뒤흔드는 메시지를 가진 소설이 바로 '데미안'이었기에 이 소설은 위대한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전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예술은 언제나 가장 위대한 것으로 추앙받거나 가장 더러운 것으로 핍박받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읽은 고전 문학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고 흥미진진했다. 고전이 왜 고전이라 불리는지, 그것이 가지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한 번쯤 그 시대의 시대상을 생각하며 읽어본다면 '데미안'이 왜 아직도 젊은이들의 필독서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재미는 덤이다.) 주관적인 별점 : 4.8개 (재미 있는 고전 문학. 이 말로 충분할 듯 하다.)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같은 글을 같은 시간에 올리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이 더 편하신 분들은 아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읽어주세요! https://www.facebook.com/GongdaeBR/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제목은 아는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 그만큼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소설이며 개츠비적(Gatsbyesque)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소설. 처음 이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서였다. 노르웨이의 숲 안에서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시간이 꽤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고, 현대인이 읽기에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고전임에도 필자는 꽤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대단한 소설로 불리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의 시선에서 쓰였다. 닉은 소설의 등장인물이자 관찰자의 역할을 고루 수행하며 때로는 이야기의 밖에서, 때로는 안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닉을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은 개츠비, 데이지, 톰이다. 개츠비는 닉의 옆집인 엄청난 대저택에 사는 인물이다. 매일 본인의 저택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그 누구도 개츠비의 정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고 왜 이런 파티를 매일 여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톰과 데이지는 웨스트 에그(닉과 개츠비가 사는 곳) 맞은 편의 이스트 에그에 살고 있는 부부이다. 데이지는 닉의 친척이며 어릴 적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살아온 여성이고 톰은 대학생 시절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에 마찬가지로 부잣집 출신이다. 이렇게 세 인물에 닉까지 네 인물이 벌이는 이야기가 위대한 개츠비의 주 내용이다.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개츠비는 5년 전 데이지와 서로 사랑했으나 가난했던 그는 결국 데이지와 이어지지 못하고 데이지는 부잣집 도련님에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였던 톰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데이지를 잊지 못했던 개츠비는 자신의 가난함이 데이지와의 사이에 걸림돌이었다고 생각해 5년간 온갖 불법적인 일들에 손을 대 엄청난 부를 쌓는다. 부자가 된 개츠비는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 에그와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웨스트 에그에 대저택을 지은 후 매일매일 호화로운 파티를 벌인다. 언젠가 데이지가 이 파티에 와서 자신을 보게 되기를 바라며. 그러던 차 옆집에 살던 닉이 데이지와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닉을 통해 데이지를 만나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결국 톰과 개츠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톰을 선택한다. 그리고 개츠비는 데이지의 죄를 뒤집어쓴 채 죽음을 맞이하고 데이지와 톰은 죽은 개츠비를 뒤로 하고 도망친다. 가장 먼저 느낀 건 개츠비의 순수함이었다. 5년 전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으로 부를 쌓았지만 데이지의 앞에 직접 나타나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해서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개츠비. 한 번이나마 데이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뿜어지는 화려한 불빛들을 봐주기를 바라며 파티를 열던 개츠비에게 5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는 점점 커져갔다. 닿을 수 없는 꽃처럼. 그러나 다시 만난 그녀는 상류층의 지위와 위치를 버릴 수 없는 여성이었고 하류층인 데다 불법으로 돈을 쌓아 올린 개츠비를 결국에는 저버린다. 그런 그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된 개츠비. 너무나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래서 언제든지 쌓아 올린 부를 데이지를 위해 던져 버릴 수 있는 그이기에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을 개츠비의 앞에 붙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감당할 수 없는 경제 호황과 그로 인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이어지는 나날들. 물질주의가 넘쳐흐르고 그에 다른 모든 것들이 잠겨버린 사회. 그 당시의 미국 사회를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이 톰과 데이지이고 작가가 제시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 인물이 개츠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톰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데이지를 두고 다른 여인과 외도를 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결국 개츠비가 죽도록 만든다. 부잣집 도련님에 상류층의 인물이지만 부도덕하고 추잡한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다. 데이지 또한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고 그를 경멸하지만 결국 상류층의 지위를 버릴 수 없기에 개츠비를 저버리고 톰을 선택한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까지 개츠비에게 떠넘겨 버린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들과 달랐다. 톰과 데이지가 추구하던 돈, 물질, 육체적인 쾌락, 상류층의 지위와 권력보다 중요한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5년 전에 자신이 느꼈던 데이지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개츠비는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그 당시의 미국 사회는 전체가 물질주의에 찌들어 있었기에 오히려 톰과 데이지가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과 쾌락이 모든 것에 앞서는 시대이니 말이다. 한 개인이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흐름을 거슬러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한 개츠비이기에 위대한 개츠비인 것이다. 이 소설 속의 개츠비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금 미국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지금 사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만드는 경종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점이 바로 이 소설을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연애소설로 볼 수도 있기에 접근하기도 좋고 현대인에게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고전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소설이다. 다 읽어갈 때쯤 어느새 개츠비에게 이입해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개츠비는 여전히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억지로 아주 편안한 척하며, 심지어는 좀 따분하다는 듯 벽난로 장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리뷰를 원하시는 책을 댓글에 적어주시면 직접 읽고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방인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참으로 특이한 소설이다.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열 발짝은 떨어져서 관조하던 주인공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과 주변 모든 것들을 그동안 관조해왔던만큼 뼈저리게, 절절하게 체감하기 시작하고 그 감정이 독자를 덮쳐온다. 밋밋하고 건조하게 서술되던 초반부와 중반부에 익숙해져 있던 독자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는 사이 이야기는 어느새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조차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소설을 읽어보면 후반부에 다다르기 전까지 주인공은 모든 일들을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일인 듯 무미건조하게 서술한다. 여자친구인 마리와 보낸 즐거운 시간이나 레몽을 도와 아랍인 패거리와 싸운 일들, 심지어 그 아랍인 패거리 중 한 명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일까지도 뫼르소에게는 그냥 어쩌다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 후 재판에서도 뫼르소는 딱히 변호사가 하라는 대로 하거나 배심원의 감성을 자극해서 재판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사람을 쏴 죽였다는 말을 반복하며 결국 사형 판결을 받는다. 그렇게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뫼르소는 점점 자신이 죽는다는 현실을 피부로 체감하기 시작한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 동안의 무미건조한 서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인공의 감정이 해일처럼 들이닥친다. 자신을 면회하러 온 사제를 마구 비판하고 엄마의 죽음, 자신의 삶, 친구와 애인들에 대해 비로소 느끼게 된 감정과 깨달음들을 마구 쏟아낸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뫼르소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현실, 가족, 친구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아예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이방인이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세상으로부터의 이방인인 그는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엄마가 죽었더라도 바로 그 다음날 여자친구와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자신의 애인을 두들겨패고 싶어하더라도 기꺼이 도와줄 수 있다. 하늘에서 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그 위에 다시 네 발의 총알을 박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재판에서도 그냥 태양이 눈부셔서 사람을 쐈다는 주장을 그저 계속한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었고 굳이 거짓을 지어내서 말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조차 의미 없는 일일 뿐인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굳이 귀찮게 거짓을 만들어내 말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듯 모든 것을 저 멀리서 관조하던 뫼르소는 후반부에 이르러서 갑자기 변한다. 사형 집행이 다가올수록 그는 자신의 죽음, 존재의 사라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전까지 겪어본 적 없던 뜨거운 감정들과 삶의 의미, 깨달음 등을 한없이 체감한다. 지금까지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오던 뫼르소가 이방인으로써의 자신의 존재마저 사라지게 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비로소 이방인이라는 존재에서 벗어나 현실을 실감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뫼르소의 모습은 현대인의 모습과도 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많은 현대인들이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돈, 물질, 폭력과 쾌락 등에서 의미를 충족하곤 한다. 그러한 현대인의 모습은 뫼르소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이방인은 영원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돈, 물질, 폭력, 쾌락 등)을 찾길 원하며 방황한다. 결국 마지막에 이방인에서 벗어난 뫼르소처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자신의 삶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면 현대의 많은 이방인들이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인 별점 : 4.5개 (그저 책 좋아하는 일반인인 필자가 이해하기에 많이 어려운 소설이었고 제대로 이해한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이 소설 속 알렉시스 조르바의 모델은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났던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 책이 소설이라기보다 조르바스에 대한 추도사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만큼 조르바스는 작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이 소설이자 추도사 속에는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고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긴 글로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늘 책을 읽고 고뇌하며 이상을 추구하는 지식인이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치열함 속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고향인 크레타 섬으로 돌아가 갈탄 광산을 운영하기로 결심한다. 피레우스 항구에서 크레타행 배를 기다리던 '나'에게 갑자기 한 늙은 노인, 조르바가 다가와 다짜고짜 자신도 크레타 섬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자신이 있으며 수프 하나는 기똥차게 잘 만드니 자신을 요리사로라도 고용하라는 조르바. 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거지에 '나'는 왠지 모를 호감을 느끼고 결국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조르바와 함께 늙은 마담 오르탕스의 집에 머물게 된 '나'는 갈탄 광산의 현장 책임자로 조르바를 고용한다. '나'와 조르바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저녁을 먹으며 늘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조르바의 인생 이야기에는 책에만 파묻혀 있던 '나'는 알지 못하는 생동감이 넘쳐났고 '나'는 갈탄 광산이 아니라 조르바와의 대화, 저녁 식사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거침없는 말과 행동, 책 속에서 해답을 얻지 못했던 인간과 신, 여러 인생의 문제들의 핵심을 꿰뚫는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력, 평범한 것도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 등 '나'는 조르바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책 속의 글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난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조르바는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갈탄 광산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날리게 되었지만 '나'는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잃은 돈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 하지만 결국 갈탄 광산의 일이 실패하며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가끔씩 조르바를 회상하던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조르바의 부고가 날아온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알고 있는 조르바에 대한 모든 것을 글로 쓰기로 결심한다. 그 글이 바로 이 '그리스인 조르바'인 것이다. 이 소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실제로 작가의 행보가 소설 속 화자와 많은 부분에서 겹치고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소설 속 조르바의 실존 모델이 존재한다는 점도 그렇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실제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조르바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는 조르바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큰 충격을 받는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던 '나'의 물음들을 조르바는 단숨에 해결해버린다.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대로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며 그 순간의 감정들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조르바는 늘 행동보다 고민과 생각이 앞서는 나를 질책한다. 그놈의 책을 다 불태워버리면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똑똑한 두뇌란 이것저것 재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영원한 식료품 상인'이라 말한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르바는 '나'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이성적 고민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의 감정과 내면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직관을 통해 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듯이 단칼에 잘라내 버린다. 복잡하게 엉켜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고심하느라 생각이 앞서 매듭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매듭을 칼로 잘라버리는 조르바의 대답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메시지는 삶의 순간들에 대한 충실함이다. '나'가 철학적 물음과 고민에 빠져 어떤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삶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 조르바는 매 순간 떠오르는 해의 찬란한 빛, 바람에 흔들리는 꽃의 모습, 검푸른 바다의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마치 처음 경험하듯 환희에 가득 차 바라보며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끽하고, 식사 시간이면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음식의 맛과 향과 포만감에 집중해 육체를 활동할 수 있도록 가득 채우는 데 전념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 여자에게 사랑을 말하고 기쁨을 줌으로써 자신과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행복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런 조르바를 바라보며 언젠가 죽음으로 끝나게 될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법을 배우며 현실과 동떨어진 물음들에 매몰되어 책 속에만 파묻혀 있던 지식인의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다. 조르바의 모습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가깝다. 신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함을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려고만 하는, 스스로를 신의 노예로 만드는 자. 신을 부정하며 허무주의와 맞닥뜨려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는,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지 않고 삶을 긍정하지 않는 자. 조르바는 그러한 단계를 뛰어넘은 인간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고, 인간이 초월자에 의해 어떤 사명을 띠고 지구 상에 나타나 인간의 존재가 태어나는 그 순간 살아가야만 하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르바는 인간이란 무의미하고 그저 태어나 죽을 뿐인 어떤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식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내고 태어난 이래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 태양과 바다와 공기와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충실하며 그곳에서 오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충만감을 만끽하는 자가 바로 조르바다. 스스로 삶의 가치를 만들고 긍정하는, 초월한 자(초인)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과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조르바와 '나', 그리고 군중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군중은 과부가 남자들을 홀린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죽이려 든다. '나'는 과부를 죽이려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지는 하고 있으나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말리지는 못하고 관망할 뿐이다. 조르바는 군중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귀를 뜯기면서도 과부를 죽이려는 사람들들을 막아선다. 군중은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갈 곳 잃은 분노의 희생양으로 결정한다. 그 군중 속에는 과연 이 일이 맞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하며 옳고 그름을 규명하려는 자가 없다. 그저 잘못 해석되고 비틀린 기독교적 윤리관을 맹목적으로 믿는 자들, 주변의 열기와 광기와 휩쓸려 스스로 판단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과부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자들 뿐이다. '나'는 군중보다는 낫지만 적극적으로 사태에 끼어들어 과부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나'이다. 옳다고 느끼는 자신에게 즉시 충실하지 못하고 일의 합리성과 옳음에 대한 판단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의 결정을 늘 의심한다. 그런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 있는 양치기에게 그녀에 대한 자비를 베풀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군중과도, '나'와도 다르다. 조르바는 과부를 죽이려는 자들을 보자마자 뛰어들어 그들을 막아선다. 귀가 뜯기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과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결국 과부가 죽고 난 뒤 조르바는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기쁠 때는 고운 형이상학의 체로 걸러 내느라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는 그런 사내의 고통'을 겪는다. 조르바는 군중들이 과부를 죽이는 일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자마자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군중의 광기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나'처럼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고 그 일이 좌절되어 과부가 죽은 후에는 온전히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주변의 행동이나 시선, 종교적 윤리적 제도와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자, 순간순간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자,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고뇌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외면하지 않는 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살아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자, 그런 사람, 초인이 바로 조르바인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니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이 소설은 책과 먹물 속에 파묻혀 삶과 동떨어져 있던 '나'가 초인 조르바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과 정신의 세계에서 꿈꾸듯 이상만을 그리며 살아가던 '나'가 자신의 '실존' 즉, 자신이 관념의 세계가 아닌 이 시간, 이 장소, 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조르바를 통해 온 몸과 정신으로 체감하며 순간의 삶을 사는 인간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은 마치 '나'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했다. 특히 소설 후반부, '나'가 생각과 합리와 이성을 거쳐 나온 언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조르바에게 그의 언어, 춤을 가르쳐달라고 하며 둘이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드디어 '나'가 먹물과 책으로 둘러 싸인 한 세계를 깨고 나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조르바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각하고 느끼는 자다. 그에게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지금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 지금 풍겨오는 레몬과 오렌지 나무의 향기를 맡는 것, 지금 느껴지는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번뿐인 삶은 한 번 뿐이기에 소중하고 한 번 뿐이기에 온전히 경험해야만 한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조르바의 인생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는 오롯이 그 자신만으로 삶을 긍정하고 인간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는 자다. 조르바에게 "제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저 푸른 바다를 보게. 어찌 저렇게도 일렁이는지.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지 않은가?" 소설 속 한 문장 "보스 양반, 돌멩이들과 꽃과 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 에드거 앨런 포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처음 읽어 본 에드거 앨런 포의 책이다. 총 열네 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단적으로 감상을 먼저 말하자면...... 아주 별로였다.(적어도 나에게는) 장점을 꼽자면 건조한 문장과 문체,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묘사들에서 풍겨지는 분위기를 들 수 있겠다. 추리 소설, 고딕 소설, 호러 소설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인만큼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매력적이었다. 음울한 모습의 거대한 고성이라는 배경과 그 느낌을 그대로 이어받아 펼쳐지는 이야기는 꽤나 음침하고 어찌 보면 찝찝하기까지 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어김없이 일어나는 누군가의 죽음, 이해하기 힘든 인물들의 행동과 비현실적인 사건들은 궁금증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그 외에 이렇다 할 매력을 찾지 못했다. 소설에서 풍겨지는 분위기(심지어 이러한 분위기도 이후 많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되어 굳이 지금 시대에 포의 소설을 찾아 읽을 이유가 될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러한 분위기의 소설을 창시한 작가나 다름없으며 그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외에 서사, 캐릭터 등 소설의 여러 가지 요소에서 나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없었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구덩이와 추, 도둑맞은 편지, 윌리엄 윌슨 등의 작품은 서사가 매력적이었고 흡입력도 좋았다. 그러나 그 외의 작품은...... 흠. 특히 포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리지아나 검은 고양이, 아몬티야도 술통과 같은 작품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위의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내게 거슬렸던 것은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행동에 대해 전혀, 무엇 하나도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리지아에서 주인공은 첫 번째 부인, 리지아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죽은 첫 번째 부인의 환영이 두 번째 부인의 시신에서 부활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건 당연하게도 주인공의 환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첫 번째 부인의 아름다움, 지성, 기품을 예찬하는 말을 끝없이 늘어놓는데 뭐 어떡하라는 건지. 결국 그냥 얼빠였다 이건가?(이렇게 리지아를 사랑했다는 놈이 리지아의 성도 모른다.) 아무리 주절주절 말로 예찬을 늘어놓는다 한들 주인공이 첫 번째 부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일화라던가 사건이라던가 눈 앞에 보여주는 무언가가 없으니 주인공의 리지아에 대한 사랑이 와 닿지 않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두 번째 부인의 시신에서 부활하는 리지아의 환영을 목격하는 주인공의 정신상태 이상이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냥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나 라는 생각뿐. 검은 고양이나 아몬티야도 술통도 마찬가지다. 두 단편에서 주인공은 이유가 없다시피 한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다.(이유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소설 내에서 독자에게 설명되지 않는다.) 심지어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끼던 검은 고양이의 한쪽 눈을 생으로 파내기까지 한다. 검은 고양이에서는 알코올 중독과 타락에 빠져들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법이 있기에 그것을 어기고 싶어 하는 본능과 비슷한 느낌이다.)이 주인공을 미친놈으로 만들었다고 설명되며 미친 주인공은 아내를 끔찍하게 살해한 후 벽 안에 넣고 회반죽을 발라 살인을 은폐한다. 아몬티야도 술통에서는 독자에게 설명되지 않는 어떤 이유(친구가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겼다는 이유이나 자세한 내막은 설명되지 않는다.)로 주인공은 아몬티야도 포도주를 빌미로 꾀어낸 친구를 산 채로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지하묘지 벽안에 가둬버린다. 그래, 그냥 주인공들이 미친놈이라고 치자. 인간의 광기와 타락하고 싶어 하는 본성을 보여주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살인까지 이르는 과정이 전혀 흡입력이 없으며 재미도 없다. 주인공은 그냥 미친놈들이며 살인에 있어서 어려움은 하나도 없다. 뭔 놈의 사람 죽이는 게 이렇게 쉬운지. 편의점에서 컵라면 사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데 그렇다고 그 이후의 과정이 스릴 넘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멍청한 경찰들과 멍청한 친구는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에서 주인공을 의심할 생각 하나 제대로 못하는 인물들이고 심지어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은 객기를 부리다 아내의 시체와 함께 자기도 모르게 묻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인해 살인을 들킨다. 멍청한 경찰에 멍청한 주인공이다. 포의 소설은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치열하게 탐구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영...... 사건과 서사를 떠나서 생각해봐도 인물들의 심리가 내면까지 치열하게 탐구되고 파헤쳐져 묘사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주인공이 멍청하다는 것과 정신이 이상하다는 것 외에 딱히 인간 내면의 심리와 본성에 대해 감탄하거나 고뇌해볼 만한 부분은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유명한 작가고 많은 이들이 애정 하는 작가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주관적 견해의 기호품인 만큼 나에게는 매력을 느끼기 힘든 작가였다. 위에서도 썼듯이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견해를 적은 글이므로 나와 정반대로 포의 소설에 흠뻑 빠지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이 글은 재미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소설 속 한 문장 수학적 공리는 결코 일반적 진리의 공리가 아닌 것이네.
소송
"소송" / 프란츠 카프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소설 소송. 웃기고 기괴하고 불편한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한 소설이다. 90년 전 소설에서 이런 감상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은행에 근무하는 직원 요제프 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쳐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체포당한다. 희한한 점은 분명히 체포되었지만 감시자가 몇 명 붙을 뿐 딱히 일상생활에 지장도 없고 어떤 죄목으로 체포당한 것인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카는 이후 진행되는 심리에 출석해서 열심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소송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듯 하다. 카는 소송을 위해 변호사를 찾아가지만 변호사도 뭔가 이상하다. 진행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면 온갖 어려운 말들과 궤변들을 늘어놓을 뿐 위대한 변호사인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맡기라는 식이다. 카는 미심쩍은 변호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보려 하지만 법에 대해서, 법원에 대해서, 카의 소송에 대해서, 하다 못해 카가 어떤 죄목으로 체포되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예심판사, 카를 감시하는 법원의 감시인, 하급 법원의 직원들조차도 그저 자신이 맡은 조그마한 역할만 수행할 뿐 카의 소송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법 앞에서 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1년간의 소송을 거쳐 카는 사형당한다. 이 소설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건 우리나라의 행정처리였다. A가 알고 싶어서 B부서에 전화하면 B부서에서는 C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C부서에서는 D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D부서에서는 E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딱 카의 상황과 같다. 카를 체포하는 사람도, 심리를 진행하는 사람도, 변호하는 사람도, 감시하는 사람도 그냥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뿐 카의 소송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끝내면 된다는 듯이. 그렇게 법원이라는 거대 시스템 하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카의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이해와 납득이 불가능한 업무 처리 시스템이 생각난다.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된 부분들도 있지만 여전히 이 서류가 왜 필요한지, 왜 이걸 제출해야 하는지, 왜 산정 기준이 이렇고 지급 기준이 이런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국가, 정부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이미 정해져 있고 아쉬운 것은 일반 시민들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이 나서서 시스템을 바꾸는 것보다는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 편하고 현명하니까. 소설을 보다 보면 카의 행동이 점점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죄가 없으니 무조건 풀려 나겠지, 잘 해결될 거야라며 낙관하다 가면 갈수록 소송에 매달리게 된다. 그 이유는 법원과 법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법이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나오며 그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이 법이 맞는 것인가, 잘못된 곳은 없는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는 사회인 것이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법이라는 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죄가 나올 것이라 낙관하는 게 가능할까? 잘 짜 맞추어진 톱니바퀴처럼 법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톱니바퀴가 모여 만들어진 기계 자체(법)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의 유무죄에 대한 판결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체도 모르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존재(법)에 의해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카는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무의미한 노력을 계속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세계는 점점 시스템화 되어 가고 있다. 경제, 사회, 문화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지고 시스템은 그에 맞춰 거대해지며 이제 모든 개인은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작동한다. 예전에는 구두 장인 한 명이 하던 일을 수많은 단계로 분업화하여 일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구두 밑창만 붙이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구두끈만 끼운다. 이렇게 모든 개인이 철저히 시스템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편리함을 위해 만들었던 시스템이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낡은 시스템이 고장 났다면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고쳐야 하지만 이미 너무 거대해져 버린 시스템을 고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개인에게 불편함을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송은 소설 속 주인공 카의 모습을 통해 한 개인(요제프 카)이 거대한 시스템(법)의 부조리(죄목조차 알려주지 않음, 법에 대한 의문 제기조차 불가능) 앞에서 어떻게 농락당하고 짓밟히는지 보여준다. 물론 극단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실제로 법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듯하다. 90년 전에 쓰인 고전에서 현대의 시스템과 관료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카프카가 가진 미래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일 수도 있고, 2019년이 1925년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전자이길 희망하지만 후자가 맞을 것이다. 우리는 90년 전 소설가가 그린 곳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한 문장 "법원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오면 받아들이고, 당신이 가면 내버려둘 뿐입니다."
<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최근 읽은 세계 고전 중에, 아니 지금까지 읽은 모든 고전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환상과 허구, 현실과 진리에 대한 탐구가 엿보이는 깊은 사고와 아이디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그 하나하나가 경탄스럽다. 왜 그동안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지 않았었는지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픽션들>을 읽으면서 과학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번 리뷰에서는 과학에 대한 나의 생각과 엮어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배운 게 과학밖에 없기도 하고 말이다.) 먼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발생설을 주장했다. 적절한 환경만 주어지면 무(無)에서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자연발생설은 당시 정설이자 진리로 여겨졌다. 제대로 된 자연과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과학적 실험이란 당연히 없었던 시대, 썩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생기고 쓰레기에 벌레가 생겨나는 것을 본 사람들에게 자연발생설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과였다. 자연발생설은 몇 백 년간 진리로 받아들여지다 루이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두 플라스크를 잇는 아래로 볼록한 관에 물을 채워 완전히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내 생명체는 자연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이 진행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너진다. 과학은 자연발생설의 성립과 쇠퇴와 같은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지금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모든 과학적 사실들은 언젠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질 것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지식수준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큼만 현실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고 말한다. 두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몇십 년 혹은 몇 백 년 뒤면 빛이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사실조차 잘못된 해석이었음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가장 최신의 과학적 진리조차 언젠가는 그것이 환상이었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과학적 해석들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의 지식수준으로는 그것이 진리였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멀리서는 사람처럼 보이던 형체가 가까이서 봤을 때는 그저 나무 한 그루일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빛을 입자이자 파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지금의 수준으로는 나무를 10 km 떨어진 거리에서 볼 수밖에 없기에 내린 결론일 수도 있다. 인간은 진실을 추구하고자 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본능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과학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해석하고 그 원리를 알아내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의 작동 원리, 진리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우주의 원리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열 수 없는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흔들어보고, 소리가 나나 들어보고, 음파를 쏴서 되돌아오는 반향을 통해 내부를 추측해보기도 하고, 과학을 이용해 상자 안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내부에 들어있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상자 내부를 추측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부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론 내리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내린 결론이 맞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상자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다른 말로 하자면 답을 영원히 알려주지 않는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픽션들>은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린다. 우리 주변에 진실이나 진리란 없다는 것. 우리가 현실이자 사실이자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모두가 허구이자 환상일 수 있다는 것. 설령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임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픽션들>에서는 현실과 허구가 뒤섞이고, 사실과 환상이 뒤엉키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진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두 편의 단편, <바빌로니아의 복권>과 <바벨의 도서관>은 그러한 관점에서의 주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유의지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이야기를 펼친다. 신과 회사, 자유의지와 복권의 비유를 통해 사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는 서사를 펼치는데 그게 또 너무나 그럴듯하다. 결국 독자는 너무나 당연히 믿고 있던 인간의 자유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 단편 소설이 보르헤스의 창작이고 소설집의 제목 그대로 픽션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허구의 이야기로 인해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를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비유한 책, 그리고 그 책들이 존재하는 모든 우주를 비유한 도서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인식이란 영원히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이 단편 속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 적혀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 모든 책에 대한 해석들이 적힌 책도 모두 존재하고 있으며 또 그에 대한 해석들이 적힌 책들도 존재하고 있다. 도서관 안에 가능한 모든 글자 조합이 적힌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기에 인간은 찾기만 하면 된다. 해석되지 않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의 해석본을, 또 해석본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해석본의 해석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책은 무한에 가까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중 극히 일부만을 집어 들고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영원히 도서관(우주)의 모든 책(진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단편은 인간은 영원히 우주의 진실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인간에게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영원히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그건 아마 인간이 알고 있는 유일하게 틀리지 않은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듯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언젠가 인류가 지금보다 진실에 훨씬 가까운 곳에 도달할 수 있음을 믿으며 또 내가 그 발걸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0.99999..... 가 무한히 이어지면 1이라고 적듯이 말이다.(물론 0.9999.... 와 1은 다르지만 인류가 그 정도까지 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인류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과학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미 진실은 존재하고 있다. 인류는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인간이 영원히 밝힐 수 없을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오늘도 생각하고 공부하고 실험한다. 인류는 무한한 허구 속에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살아간다. 소설 속 한 문장 사실 '도서관'은 모든 언어 구조와 스물다섯 개의 철자 기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변형체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허튼소리는 하나도 없다.
<농담> 밀란 쿤데라
<농담> / 밀란 쿤데라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농담>은 말 그대로 한 농담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하나의 농담이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누군가의 별 뜻 없던 말 한 마디에 프레임과 이념의 시각이 씌일 때, 한 인간의 삶 전체가 어떻게 역사의 잔인한 농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지 보여준다. 1948년 2월(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가 일어난 시기다.) 이후의 첫 해, 체코의 청년인 루드비크 얀은 모범적인 사회주의자였다. 자신도,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개인주의자 같다거나 지식인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모두의 평가에 한 줄 쯤은 들어가는 비판은 있었지만 말이다.) 루드비크는 젊었고 당연히 아름답고 순진했던 마르케타라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루드비크는 방학 기간 중 마르케타와의 연애 사업을 진전시켜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마르케타는 그 기간 동안 당 교육 연수에 참가해버린다. 마르케타로부터 당 교육 연수가 너무나 기대되고 신난다는 편지를 받은 루드비크는 연수 때문에 훼방받은 연애사업과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마냥 신나 있는 마르케타로 인해 삐지다 못해 질투심에 활활 타오른다. 결국 마르케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루드비크.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질투심으로 별 생각 없이 보낸 이 농담 한 줄은 이후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루드비크의 인생을 삼켜버린다. 루드비크의 농담은 정말 그저 농담이었다. 질투심에 눈이 먼 젊은 청년의 치기 어린 농담. 그러나 그 농담은 시대의 이념 하에서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불순한 의도가 겹겹이 덧씌워져 마침내는 농담을 한 루드비크마저도 자신의 무의식 속에 정말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어떤 의도도 없이 단순한 질투심에서 쓰인 농담 한 줄은 루드비크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지인에게, 연인에게 버림받게 만들고, 집단 전체에서 배척받게 만들었으며, 루드비크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단순히 보면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넓게 보면 개인의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집단과 이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집단이 있고 집단의 의지 혹은 이념이 있으면 그 속에서 집단을 이루는 개인은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런 일은 국가에서도, 종교 집단에서도, 회사 내에서도, 심지어는 조그만 한 사무실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쿤데라는 개인이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없이 던진 농담 한 줄이 집단과 이념의 시각 하에서 어떻게 매도되고 잘못 해석되어, 그 속에 존재하지도 않던 새로운 의미들이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며 집단 속에서 무시되는 개인이 가지는 중요성을 일깨운다. 한 인간의 삶은 집단의 의지 하에 마음대로 유린당하고 파멸당해도 좋은 물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농담 이후로 루드비크의 삶은 그 시기에 묶여버린다. 자신을 당에서 축출하기 위해 손을 쳐들던 친구들의 모습, 하루 아침에 석탄 광산으로 내던져진 자신,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합리한 자신의 운명. 과거의 감정과 시간에 갇혀 있던 루드비크는 15년 후, 자신의 고향 모라비아로 돌아온다.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 기대를 철저히 배신하고 당에서 루드비크를 축출하는 데 앞장 섰던 제마네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제마네크의 부인인 헬레나와 성관계를 맺어 그에게 복수하려던 루드비크였지만 이미 제마네크는 다른 젊은 여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루드비크의 복수는 실패한다. 여기서 루드비크는 깨닫는다. 자신이 복수를 해야 하는 때는 15년 후가 아니라 제마네크가 자신을 당에서 축출하던 오로지 그 때 뿐이었음을. 여기서 쿤데라는 집단 속 개인의 비극을 보여줌과 동시에 개인이 그 비극을 대하는 실존적 태도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루드비크가 복수하려는 15년 후의 제마네크는 15년 전의 제마네크와는 다른 인간이다. 예전의 제마네크는 15년이란 시간 동안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제마네크의 어린 연인, 브로조바 양이다. 그녀는 15년의 시간이 지나 이전 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다. 제마네크도 그런 그녀와 연인이 될 만큼 15년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루드비크가 과거에 묶여 살아가는 동안 제마네크는 현재를 대표하는 브로조바 양의 옆에 서서 자신이 과거의 제마네크와는 다른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 루드비크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복수가 처절히 실패했음을, 아니 사실 그 복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대상이 없는 복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다. 과거의 일들이 인간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인간은 지금 살아가고 있고 그 족쇄를 떨쳐버려야만 한다. 15년 전 과거에 대한 복수, 제마네크에 대한 것인지 자신을 축출한 당에 대한 것인지 당시의 사회 이념에 대한 것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는 복수를 하러 고향에 왔던 루드비크는 소설의 끝에서 과거의 흔적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피해 왔던 자신의 진정한 친구 야로슬라프가 쓰러지자 그를 두 팔에 안으며 전율한다. 과거에 묶여 끌려왔던 고향으로의 여정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진정한 벗을 두 팔에 안은 채 현재의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끝났기 때문이다. 제마네크가 외면했던 모든 가치들은 결백했다. 고향 모리비아의 노래들, 침발롬이 있는 악단, 고향 도시 모리비아, 그에게 협박처럼 들리던 동무라는 말까지 그 어떤 것도 죄가 없다. 단지 그 결백한 가치들이 과거와 집단과 이념과 사회와 역사의 잔인한 농담에 의해서 유린당했을 뿐이다. 우리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소설 속 한 문장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