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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4)
남들 한 번 가기도 꺼리는 군대를 두 번 가겠다고 자원한 누메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첫 영화 <퍼스트 어벤저>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까요? 영화 초반에 비쩍 마른 주인공이 군대에 자원했다가 퇴짜맞는 장면이 있었죠. 1차 대전 발발 즈음엔 젊은이들 사이에서 군에 자원하는 것이 의무이자 일종의 모험 같은 것으로 여겨진 모양입니다. 낯선 유럽 대륙에 가서 군에서 선전한 것처럼 안전하고 안락한 참호에 틀어박혀 적을 노려보며 몇 개월쯤 있다보면 어느새 예정된 주둔 기한이 끝나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당시 군에 지원한 청년들이 전쟁에 대해 가진 인식은 그런 정도였죠. 그 전쟁이 수년이 넘게 이어지고 전세계 열강이 참전하는 국제전이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https://youtu.be/JerVrbLldXw <퍼스트 어벤저> 영화 트레일러. 영상 가장 앞부분에 주인공이 군에 지원했다 퇴짜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실제에 비하면 신병 지원소가 만화처럼 과장되게 표현되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누메로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호기롭게 군에 자원하러 일부러 워싱턴까지 옵니다. 막 설립한 회사 운영이 아직 채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누메로와 프레데릭에겐 전화위복이 됩니다. 워싱턴에서 누메로는 우연히 육군이 가진 고민을 알게 됩니다. 미 육군은 유럽 대륙으로 보낼 장병들을 위해 각종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수송해야 했죠. 그 보급품들 가운데는 물론 식료품이나 의약품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 상하거나 훼손되지 않고 신선하게 목적지까지 물품을 수송하자면 무엇보다도 향상된 냉동 기술이 꼭 필요했죠. 마침 누메로에겐 그들의 고민을 해소해 줄 기술이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누메로는 군에 자원하겠다는 계획을 접고 다시 서모컨트롤 사로 돌아옵니다.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 유닛을 군 사양으로 개량해 생산하기 위해서였죠. 완성해 군에 납품한 냉동 장비는 현장에서도 고장 없이 잘 작동했습니다. 미군은 정식으로 서모컨트롤 사 제품을 군 장비로 채택하기에 이르죠. 곧 미군의 식수부터 혈장에 이르기까지 온도에 민감한 모든 품목이 서모컨트롤 사의 냉동 트럭으로 미군이 진출한 모든 전역에 배송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심지어 태평양 전선에서도 누메로와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가 수송을 맡았죠. 군과 협력하면서 서모컨트롤 사는 비로소 두각을 보였습니다. 프레데릭이 완성한 기술은 단순히 트럭을 개선할 뿐 아니라, 야전병동과 병기창, 심지어 B-29 폭격기의 조종석과 엔진에까지 적용되었죠. 전쟁 동안 서모컨트롤 사가 미군과 계약한 금액은 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서모컨트롤 사는 더 이상 작은 회사가 아니었죠. 1949년 기준 직원 200명에 매출 400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회사는 냉동 기술 훈련 학교를 자체 설립해 보유했고, 미 대륙과 중동, 유럽까지 진출해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프레데릭은 대전 후 기차, 배, 트럭 등으로 쉽게 옮겨 실을 수 있는 냉장 컨테이너를 개발했고, 동업자 중 하나인 Myron Green은 전국 유통 및 서비스망을 구축해 회사의 기틀을 세웠죠. 때맞춰 1950년대 새로운 산업이 등장해 급속히 성장합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냉동 식품과 슈퍼마켓 산업이죠. 프레데릭은 이 이후로도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 특허를 내고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1955년 버스용 에어컨을 최초 개발했고, 58년에는 기존 가솔린 엔진보다 훨씬 뛰어나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디젤 엔진 냉동차 설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생전 제출한 특허만도 60개가 넘죠. 그 분야도 냉동 설비에만 국한하지 않고, 엑스레이와 엔진, 음향 설비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1944년 프레데릭은 미국 최초로 냉동 엔지니어 협회 회원이 된 흑인이었습니다. 누메로는 계속 프레데릭과 다른 동업자들 도움을 받아 회사를 키웠죠. 50년대 중반에 서모컨트롤 사는 사명을 변경, 써모 킹Thermo king coperation 사로 바뀝니다. 현재도 전세계에서 검증된 기술력과 우수한 품질로 트럭용 냉동기뿐 아니라 다양한 냉동 수송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진출해 있는 기업입니다. 써모 킹 사가 1960년에 발표한 NWD 62 모델. 현재 써모 킹 사의 냉동 트레일러 제품들의 기본 틀이 된 모델입니다. 냉동차 이외에도 프레데릭 존스는 화물 열차의 냉동 차량, 군에서 혈장이나 약물 따위를 수송할 수 있는 휴대용 냉장 장치 등도 발표했습니다. 써모 킹 사가 발표한 상품 가운데는 심지어 우유 냉각기나 골프 카트 따위도 있습니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을 본 후, 1961년 2월 프레데릭 존스는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미네소타는 1977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죠. 고아로 자라나 흑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던 그가 마지막엔 어느 누구도 그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인이 된 겁니다. 한편 사장인 조셉 누메로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사망한 후, 회사를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사에 팝니다. 1963년까지 그는 계속 사장으로 자리를 지킨 후, 동업자였던 마이론 그린Myron Green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명예 회장으로 물러납니다. 회사는 60년대 극심한 파업을 여러 차례 겪지만 흔들리지 않았죠. 하지만 66년, 써모킹 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때는 1966년 3월. 회사는 우수 딜러와 직원들을 뽑아 포상 여행을 보내 주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하네다를 거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향하는 영국해외항공 소속 911편 비행기에 75명의 임직원이 몸을 싣죠. 회사는 이들에게 17일간의 동양 여행 패키지를 제공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 도중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호놀룰루에서 도쿄 하네다로 향하던 중,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후쿠오카 공항으로 회항합니다. 후쿠오카에서 하루 대기한 후, 비행기는 다음날 원래 계획했던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죠. 기상 상황은 좋아서 후지산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비행 계획을 브리핑한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륙한 비행기는 예정대로 홍콩을 향해 날아갔죠. 그러다 문득 기장은 기수를 잠시 돌려 후지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물론 비행기 고도는 충분히 높아서 산 정상에 부딪칠 우려는 없었습니다. 탑승객들에게 하늘에서 보는 후지산 정상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하지만 정상 즈음에서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 견디지 못하고 동체가 공중분해되어 버립니다. 날개를 잃은 항공기는 후지산 동쪽 6킬로 떨어진 숲에 뿌연 연기를 내며 추락하죠. 써모킹 임직원 75명을 포함해 당시 탑승객과 승무원 124명은 모두 사망합니다. 사망한 임직원 가운데엔 임원급이 3명, 주요 딜러가 3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망한 임원 가운데엔 부사장 랄프 포터도 있었죠. 또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 여행이었기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경우가 총 5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63명의 아이가 부모를 잃었죠. 써모 킹 사 입장에선 창사 이래 최악의 참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BOAC 911편 추락 사고. 피해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써모 킹 사 임직원과 같이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난기류에 대한 주의 대응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이후로도 건재했습니다. 모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내어 알짜 기업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 1991년 누메로가 사망할 당시엔 이미 회사는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00여 명을 고용하고, 도미니카나 아일랜드, 스페인에도 공장이 있었죠. 1993년엔 일본 시장 거의 절반을 점유했고, 이듬해에는 동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딜러망이 36%나 신장했습니다. 1991년, 미리 적은대로 조시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프레데릭 존스는 이미 사망한 뒤여서 직접 훈장을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그 미망인이 행사장에서 대신 수령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이 흑인에게 수여된 건 프레데릭 존스가 최초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냉동 운송 기술을 개발해 선적과 식료품 시장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공로가 인정되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 1985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처음 수여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을 선정해 표창했습니다. 듀폰 사나 빌 게이츠, 3M 등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러한 영광을 누릴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는 대공황으로 완전히 파산하고 학점이 모자라 법대 졸업을 하지 못한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가지고 대회에 나가길 바랐던 극장 영사기사였죠.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고, 기회를 붙잡을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편의점과 마트에서, 혹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1930년대 누메로와 프레데릭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맞잡은 그 때 덕이란 생각이 듭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3)
프레데릭 존스에게도 다른 위대한 발명가들처럼 영감이 불현듯 찾아온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밤, 호숫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운전석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밤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어왔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열린 창문으로 불청객도 들어왔거든요. 모기가 들어와 윙윙거리자, 프레데릭은 짜증이 나서 창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차 안은 금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죠. 창을 열자니 또 모기가 들어올 것같고, 그렇다고 창을 계속 닫고 있자니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 때에 프레데릭에게 한 영감이 찾아옵니다. 바로 차량용 에어컨을 만들어 팔자는 생각이었죠. 그는 자기 상사이자 파트너인 누메로를 찾아가 자기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걸 만드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으니, 분명 성공할 거라고요. 누메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누메로는 프레데릭의 아이디어에 대해 시큰둥하게 굴었습니다. 어째서 누메로가 새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더군다나 당시 회사는 새로운 사업 분야를 찾아야 할 처지였는데도 말이죠. 누메로의 회사에서 개발한 극장용 음향 시스템 설비는 미 중서부 전역에서 팔려 나갔습니다. 곧 선발주자인 웨스팅하우스와 RCA가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되죠. 치열한 경쟁과 소송전이 거듭되었습니다. 상대는 미 전역에 먼저 진출한 대기업들이죠. 누메로의 회사가 저렴한 가격과 품질로 승부를 거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누메로에겐 대안이 필요했죠. 프레데릭의 아이디어가 묻히나 싶자, 곧 다른 방향에서 기회가 돌아옵니다. 1983년, 누메로는 골프 친구들과 경기를 하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개중 한 친구가 우연히 누메로가 듣는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죠. '요전번에 시카고에서 닭고기를 잔뜩 사들였는데 말야, 트럭이 길에서 퍼지는 바람에 고기가 다 상해버렸다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당시 운송용 냉각 시스템은 초보적이었고 취약했습니다. 트럭의 진동 때문에 민감한 장비는 쉽게 고장났고, 그나마도 차체와 독립된 동력원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때문에 육류나 상하기 쉬운 상품을 육지에서 수송하는 데는 한계가 따랐습니다. 누메로는 친구 말을 듣고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죠. '혹시 그 문제, 전문가가 해결 못 하면 까짓거 내가 해 버리지.' 누메로에겐 농담이었지만 친구에겐 아니었습니다. 이제 누메로가 기댈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죠. 자신이 운영하는 영사 기기 회사에서 수석 엔지니어를 맡은 프레데릭 존스가 아니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기껏 제안한 차량용 에어컨 아이디어를 걷어찬 고용주가, 뒤늦게 와서는 세상에 없는 차량용 냉각 설비를 발명해 내라고 합니다. 프레데릭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았을까요? 그의 생각이야 어쨌건, 프레데릭은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냅니다. 1938년 최초의 육상 운반용 냉동장치 모델 A의 특허를 발표하죠. 1938년 발표된 모델 A는 냉각용 핵심 부품이 차체 하단에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이 도로 사정에 따라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자, 프레데릭은 해당 유닛을 트레일러 상부로 옮깁니다. 무게가 2200파운드나 나갔던 초기 모델도 나중에는 950파운드까지 경량화하죠. 비록 우연히 이뤄진 개발이었지만, 누메로는 이 냉동 트레일러가 곧 자기 미래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입니다. 그는 곧 자신이 운영하던 극장 설비 회사 Ultraphone과 보유하고 있던 음향 설비 특허, 티켓 발권 기계 특허를 RCA에 팔아치워 정리해 버립니다. 여기에 자신의 생명보험을 담보로 1만 달러를 빌려 자금을 융통하죠. 이 돈을 가지고 누메로는 몇몇 동업자와 함께 써모컨트롤 컴패니Thermo control company를 설립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 트레일러에 올인한 거죠. 하지만 초기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전에도 냉동 트레일러 기술이 여럿 소개된 바 있지만, 사용자들이 원하는 대로 작동한 경우가 아직 없었던 거죠. 누메로는 고민 끝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육류 포장 체인인 Amour 사와 접촉한 그가 담판을 짓습니다. '저희와 거래하시죠. 처음 트럭 두 대는 아무 비용 청구 없이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우리 장비가 고장나면 그로 인한 모든 손실도 보상해 드리죠. 어떻습니까?' 상대방 입장에선 손해보는 것이 없는 거래였습니다. 상대편 사장은 누메로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Amour 사는 트럭 8대를 추가 구매합니다. 누메로와 프레데릭의 상품이 비로소 시장에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겨우 첫 시작을 끊었지만, 회사 경영은 여전히 순탄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곧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죠. 이때 회사 사장인 누메로는 진지하게 자원 입대를 고민했습니다. 이미 한 번 군대를 다녀왔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그 결심이 허풍이 아니란 듯, 누메로는 지원을 하러 워싱턴 DC로 훌쩍 떠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걸어 이제 막 반석을 닦아놓은 회사는 다시금 표류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 (2)
지난 글에선 냉동선의 등장에 대해 잠깐 다뤘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보충할까 합니다. 냉동선이 개발되기 전까지, 호주나 남미 등지 국가들은 염장이나 통조림 등으로 가공해 고기를 수출했습니다. 당연히 그 품질은 만족스럽지 않았죠. 양은 양모를 생산하고 남는 고기는 폐기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장기 보존 기술에 대한 특허만도 200여 건이 넘게 쏟아질 정도로 관심도 높았죠. 1800년대 영국은 산업 혁명과 과학 혁명을 겪으며 인구가 폭증하고, 동시에 식량 생산은 원할하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1850년 2800만인 인구가 1880년 3500만까지 증가합니다. 이 30여 년간 영국내 육류 가격은 두 배 이상 폭증했죠. 이런 추세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인 호주와 뉴질랜드에선 소와 양의 사육이 증가합니다. 1851년 소 6만 8천 두, 양 23만 두를 키우던 게, 1880년 소 70만 두, 양 1300만 두로 급증했을 정도로요. 자연히 육류 수송 문제가 각국에서 큰 고민거리가 된 겁니다. 최초 냉동 선박에서 냉매로 채택된 건 암모니아 가스였습니다. 첫 항해는 순탄치 않았지만, 가능성을 본 사람들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고기와 과일을 배에 실어 날랐죠. 호주에선 스트라스레븐 사가 영국으로 고기를 실어 나릅니다. 다른 회사인 뉴질랜드호주랜드 사는 양고기와 돼지고기 500두를 싣고 98일만에 런던에 도착합니다. 그 결과 싣고 온 상품을 현지보다 두 배 이상 이익을 올렸죠. 수익성 있는 사업엔 자연히 투자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마토라 호는 냉기 전달 방식을 개선해 에너지 효율을 높였죠. 1890년대에 이르면 선박도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바뀝니다. 1902년에 설립된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는 바나나를 운송했는데요. 바로 지난 글에서 자메이카산 바나나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했던 선원, 로렌조 베이커가 이 회사의 공동 창립자입니다. 냉동선은 과일과 육류로 전 세계를 연결했지만, 다국적 기업과 독재자의 유착 행태를 낳기도 했습니다. 과테말라 독재자 호르헤 유비코는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 등 외국 기업이 자국 농지를 사들여 농장을 여는 것을 허용했고, 이 때문에 자국민 농부들이 이들 외국 기업의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1902년은 또 다른 기념비적인 발명이 있었던 해입니다. 바로 윌리스 캐리어가 에어컨의 원리를 발명한 해죠. 처음엔 인쇄소를 위해 이 기술을 발명했다는 얘기는, 빙글에서 이미 다른 분이 올려 주신 바 있죠. 1906년 공기조절장치 특허로 업계에 인정받은 캐리어는, 1915년 여섯 명의 동업자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캐리어 사를 설립합니다. 이게 지금도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캐리어 사죠. 백화점에 설치된 세계 최초 터보 냉동기(1922년), 극장 내에 에어컨 설치(1925년), 20년대 말 발표한 소형 에어컨에 고층건물 냉방 공조 설비 발명(1939년)에 이르기까지, 캐리어는 정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캐리어 사가 에어컨 기술로 명성을 떨치고, 유사 기술을 가진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아직 이 글의 주인공은 무대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이 두 사람은 캐리어 못지않게 세상을 바꿔놓을 참이죠. 캐리어가 세계 최초 에어컨을 내놓은 후 한참이 지나 1929년, 조셉 누메로라는 한 청년은 곤경에 처해 있었죠. 상당한 엄친아 기질이 있던 그는, 일찌감치 부동산과 제조업, 금융업 등에 뛰어들어 25세가 되자 잠시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으니, 못해본 공부를 해보자는 마음이 불현듯 든 거죠. 미네소타 대에 들어가 법학 공부를 한 끝에, 그는 졸업 시험에는 합격합니다. 하지만 이수 학점이 살짝 부족한 게 발목을 잡죠. 설상가상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그 역시 파산에 이릅니다. 고민 끝에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학교를 나옵니다. 다시 사업에 뛰어들려던 그에게 한 친구가 좋은 사업 아이템을 소개해 줍니다. 그가 알려준 건 이제 막 대중에 소개되기 시작한 유성 영화 사업이었죠. 당시 업계 선두인 웨스턴 일렉트릭(호손 공장 운영하던 걔네 맞습니다), 그리고 RCA 두 회사는 비싼 영화 장비를 극장에 파는 대신 이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누메로는 이들 제품보다 덜 비싸고 품질이 나은 극장 설비를 개발한다면 승산이 있겠다고 여겼죠. 그렇게 해서 새 회사인 울트라폰 사운드 시스템 사가 설립됩니다. 야심만만한 누메로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실력 있는 기술자였죠. 그 무렵, 미네소타의 Hallock이라는 지역에선 한 재능 있는 영사 기사에 대한 소문이 극장가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독학으로 기술을 익힌 실력 있는 기사였죠. 게다가 창고에 있는 잡동사니만으로 당대 무성 영화 장비를 유성 영화용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실력자라나요? 소문을 들은 누메로가 대번에 그를 미니에폴리스에 있던 회사로 초청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소문난 기술자에겐 한가지 지울 수 없는 흠이 있었습니다. 기술자 프레데릭 존스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죠. 193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 차별은 극심했습니다. 캔터키 코빙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머니가 일찌감치 가출해 아버지 손에서 7세까지 자랐습니다. 그가 7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캔터키의 한 사제에게 보내 버렸죠. 2년 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에겐 기댈 곳이 없어졌습니다. 프레데릭은 11살 되던 해 사제에게서 도망쳐 신시내티로 갔죠. 원래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부지런히 노력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과 11세에 홀로 도시로 온 아이는 16세가 되자 이미 신시내티 한 자동차 수리점의 십장이 되었죠. 가게 주인은 자동차 경주에 관심이 많았는데, 프레데릭은 고용주를 위해 경주용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개발했습니다. 그 자신도 언젠가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갖는 게 꿈이었죠. 하지만 곧 흑인은 자동차 경주에 나갈 수 없단 걸 알고 맙니다. 상심한 나머지 그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여러 수리공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죠. 미네소타 Hallock의 한 농장에서 그는 30만 에이커 규모 농장 내 모든 장비를 수선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더트용 레이싱 카를 만들 기회가 있었죠. 한발 더 나아가 초기형 설상차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에겐 자동차에 남다른 열정과 집착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프레데릭은 기계공, 전기공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다 1919년 귀국합니다. 군대에서 익힌 기술에 폭넓은 관심까지 더해져, 그는 이후로도 잡지 등을 참고하며 독학으로 실력을 쌓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기회가 찾아오게 되죠. 당시 영화관들은 기존에 설치된 무성 영화 장비를 새 유성 영화 설비로 바꾸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영사기사로 일하던 프레데릭이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섰죠. 가죽 벨트 부품 등 여러 잡동사니를 이용해 그는 정말로 음향과 영상을 동시 상영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냅니다. 이후 기술 변화에 따라 그때 그때 적절하게 대응해 준 건 덤이었죠. 막 유성 영화 산업에 뛰어든 누메로에겐 프레데릭 존스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습니다. 흑인이라서, 당대 만연한 인종 차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누메로의 회사에서 프레데릭은 수석 엔지니어 자리를 꿰차죠. 하지만 누메로도 프레데릭도 새 파트너가 평생을 함께할 사이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을 겁니다.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National medal of Technology & Inovation을 헌정합니다. 특히 프레데릭 존스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으로 기록되었죠. 1930년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 오늘날 우리가 사철 신선한 음식을 마트나 슈퍼마켓, 심지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들 덕분입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번외)
1. 세계 최초의 냉동선, 리퍼Reefer선이라고 불린 선박들에서 화물을 냉동하는 데엔 다양한 기술이 동원되었습니다. 암모니아 가스 방식, 암모니아-탄산가스 냉매 공기 순환 방식, 증기 기관을 이용해 압축된 공기를 화물칸에 불어넣어 급속한 공기 팽창으로 열을 식히는 방식 등 적용된 기술은 각양각색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늘날 선박이나 비행기에 쓰이는 냉동 컨테이너도 Reefer container라고 불립니다. 2. 미 동부에 바나나를 소개한 유나이티드 후르츠 컴패니는 중남미 국가들을 상대로 정부와 결탁하고 농부들을 착취해 악명이 높았습니다. 콜롬비아에서는 고용된 현지인 농부들이 주 6일, 하루 8시간 근무와 배급표 아닌 현찰 급여 지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지만 정부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죠. 또 과테말라는 유나이티드 후르츠 컴패니 및 미국 CIA 등과 연관된 쿠데타가 발발, 친미 독재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오 헨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국가 자체가 다국적 기업에 장악당한 상태를 비꼬아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칭했습니다. 물론 국가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기업에 잡아 먹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만... 3. 냉동/냉장 기술이 유통 과정에 결합하면서 언제나 사시사철 신선한 먹거리가 있는 슈퍼마켓과 대형마트가 곳곳에 생겨났습니다. 어떤 이는 냉동식품과 슈퍼마켓이 등장하면서 각 가정이 장을 봐야 하는 빈도가 줄었고, 덕분에 가정일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맞벌이를 통해 노동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도 하네요. 각 가정에 냉장고가 필수품이 된 건 물론이고요! 4. 써모킹은 90년대 들어 발생한 환경 문제 해결에도 동참하려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인 듯 합니다.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가 오존층을 파괴하는 기존 냉매 사용을 단계적으로 금지하자고 규정한 후, 늦었지만 1994년에 써모킹은 오존층에 해를 덜 끼치는 새 냉매를 비로소 전 제품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80년대부터 연구한 기술이 그때서야 겨우 결실을 맺게 되었다네요. 5. 국내에서는 삼원써모가드라는 회사가 써모킹의 국내 총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트럭 냉동기 시장에서 국내 점유율은 2016년 기준 15% 정도였다네요. 제품의 장점으로는 정확한 온도 조절, 저연료, 저소음과 내구성 등 차별화된 기술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약점은 가격으로, 국산 타 제품군이 1000만원대 가격을 형성하는 반면, 써모킹 사 제품은 2000만원으로 비쌉니다. 과거 빙그레나 롯데같은 대형 빙과업체들이 직접 트럭을 구매해 운영했을 때는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점이 어필했지만, 지금은 개인 업자들이 냉동차를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무래도 초기 구입비가 싼 제품을 더 찾는다네요. 6. 국산 냉동기 업체는 여러 곳이 있지만, 써멀마스터라는 회사의 창업 스토리가 흥미롭습니다. 지금 대한항공의 전신인 한진에서 20대 때 알바를 하던 창업주가 미군 식품납품용으로 쓰던 일제 스즈키 사 냉동차를 보고 이 사업에 대해 눈을 떴다네요. 당시 냉동기 관련 지식이나 기술을 접하기도 어렵고 교육기관도 전무해서 닥치는 대로 알 법한 사람을 찾아 다녔다는 사장님은, 재미있게도 군 입대를 통해 기회를 잡게 됩니다. 써모킹의 프레데릭 존스가 1차대전 당시 입대해 기술을 익혔듯, 또 누메로가 2차 대전 당시 자원 입대하려다 기회를 포착하고 회사를 성장시켰듯 여기서도 군대가 기회가 된 거죠. 입대 후 사장님은 배치된 미사일 부대에서 무기 냉각 장비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관련 기술을 익혔습니다. 제대 후에도 삼성종합건설 중동 건설 현장에서 4년간 냉동 관련 업무를 맡고, 87년 귀국해 창업한 후에도 첨단 기술 동향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97년에야 겨우 자체 제품을 개발해 현대차에 납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007년 써멀마스터 사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태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에 납품할 UN 선정 냉동기 납품업체가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해외 시장에 진출하며 크게 성장했죠. 한때 써멀마스터 회사 정문에는 '써모킹이 가장 부러워하는 써멀마스터가 되자'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걸려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껏 써모킹의 역사를 훑어본 탓인지 저 슬로건이 유독 주목을 끄네요. 7. 예전에 전지현이 출연한 광고로도 화제를 끌었던 유통 스타트업 마켓컬리는 국내 최초로 새벽배송을 시작한 업체로 유명합니다. 이 회사가 내세우는 게 자사에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을 유통 전 과정에 걸쳐 가장 적정한 온도로 관리해 가장 신선한 상태로 고객에게 전달한다는 풀 콜드체인인데요. 유통 산업은 투자 비용이 워낙 커서 스타트업을 시작하기 힘들다는 시각에도 사장님의 뚝심으로 현재도 계속 성업 중에 있습니다. 지난 물류센터 코로나 확진자 발생 때는 세심한 고객 관리로 좋은 평판을 얻기도 했죠. 스타트업의 본래 의미처럼, 우리가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서비스를 이렇게 계속해 제공받을 수 있는 것도 앞서 소개했던 수많은 선구자들이 헌신하고 궁리해 혁신한 덕분입니다. 오늘날에도 그 혁신은 계속해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요. 앞으로도 계속해 나올,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 신기술과 새 산업에 기대하며 또 응원을 보냅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 (1)
오늘날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캐리어의 업적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특히나 요즈음처럼 장마에 무더위가 이어질 한여름철에는 에어컨 없이 지내기가 여간 곤욕스럽지가 않죠. 바깥 열기에 잔뜩 데워진 몸을 끌고 집 안에 들어와서, 벽걸이 에어컨에서 새어나오는 냉기 아래 땀을 말리고 있자면 그제서야 겨우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에어컨에 대한 게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보다 중요할, 우리 일상 생활 모습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또 한 명의 기술자 얘기입니다. 혹은 기술자와 기업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혹시 아르헨티나나 브라질같은 중남미 국가들이 세계 대전이 있기도 전부터 각국에 소고기를 수출해 왔단 걸 아셨나요? 미 동부 사람들이 1800년대 후반부터 자메이카산 바나나를 별미로 먹어온 것은 어떤가요? 1870년, 남미 오리노코 강에 금 채굴업자들을 수송해주고 뉴잉글랜드로 돌아가는 와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복귀 도중 선원들은 배가 침수하고 있단 걸 깨닫죠. 그들은 할 수 없이 가까운 자메이카에 정박해 배 수리를 합니다. 이때 로렌조 베이커라는 남자가 바나나를 보고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죠. '혹시 이걸 사서 배에 싣고 돌아가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아시다시피 바나나는 빨리 익고 잘 물러집니다. 배 선창에 잔뜩 싣고 항구까지 운반하는 동안 과연 상태가 멀쩡할지 장담할 수 없었죠. 도박이나 다름없었지만, 베이커는 바나나를 잔뜩 사서 배에 싣고 뉴잉글랜드로 돌아갑니다. 다행이 바나나는 문제 없었죠. 너무 익어서 도저히 내륙에는 옮길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인근 뉴욕, 보스턴 등지엔 팔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나나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자메이카에서 미 동부로 바나나를 옮기는 건 성공했지만, 남미에서부터 소고기를 옮기는 일은 또 다른 도전일 겁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1868년 상금까지 걸고 소고기를 해외로 옮길 방법을 공모했죠. 이전에도 우루과이, 쿠바, 브라질 등에서는 소고기를 해외에 수출했습니다. 단, 소금에 절인 후 건조한 후였죠. 얼음 상자에 보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얼음이 긴 항해 동안 무사히 버티려면 아주 많은 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처럼 신선한 고기를 수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당대 급속도로 발전해가는 과학기술에 희망을 걸어본 거죠. 사실 액체가 증발하며 열을 빼앗아 기온을 내리는 매커니즘은 이미 규명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상용화된 기술이 아직 없었죠. 1876년, 프랑스 기술자 찰스 텔리에가 아르헨티나 정부가 공모한 프로젝트에 도전합니다. Le Frigorifique라는 배에 고기를 싣고 무려 105일간 항해를 개시하죠.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실린 고기들은 모두 무사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냉장선, reeefers의 등장입니다. Le Frigorifique호. 프랑스 루앙에서 출발한 배는 악천후와 충돌로 인한 손상 등 악조건 속에서도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르헨티나에서 유럽으로 육류를 운송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1902년엔 무려 460척의 냉장선들이 세계를 누비며 과일과 육류 등을 운반합니다. 찰스 텔리에의 성공은 곧 과학 기술과 자본의 승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건 냉장 역사상 서막에 불과합니다. 현대 냉장 기술을 창안해 세상을 진정으로 바꾸어놓은 건 어느 사업가와 한 천재 기술자가 손을 맞잡은 결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