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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 저격 미수 사건과 방탄차
1990년 11월 12일, 도쿄의 궁성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즉위 퍼레이드식이 펼쳐졌다. 검정색 오픈카를 탄 일왕 부부는 길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퍼레이드에 사용됐던 오픈카는 그해 영국에서 4000만 엔에 구입한 롤스로이스 코니쉬 차종이었다. 3년 뒤인 1993년 6월 9일,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의 결혼 축하 퍼레이드에도 이 오픈카가 사용됐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내년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다. 가을에 역시 즉위 퍼레이드가 예정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롤스로이스 오픈카가 동원되지 않는다고 한다. 구입한지 28년 동안 단 2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이 차는 연식이 오래돼 현재 주행이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부는 국산차를 사용할 것이라는 방침을 굳혔다. 현재 외국 국빈 접대 등에 사용되는 왕실의 공식 의전차는 도요타 센추리 로얄이다. 즉위 퍼레이드에 사용되는 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갖는다. 일본 전국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일본 왕실이 퍼레이드용 오픈카로 도요타에 특별 주문을 할지, 아니면 다른 회사의 차종이 선택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의 수주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 1대: ‘영일 동맹’ 맺은 영국의 다임러 차종 선택 과거 일본 왕실에서 사용했던 차종들은 국제정세에 따라 변해왔다. 왕실의 전용 의전차를 ‘어료차’(御料車: 일본어로는 고료샤)라고 한다. 왕실 전용차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다이쇼(大正) 일왕 때부터다. 당시 국가 원수의 차를 구입하기 위해 유럽에 조사단이 파견됐다. 다임러, 벤츠, 피아트 등 회사를 방문했는데,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영국의 다임러(독일 다임러와는 별개)였다. 다임러가 선정된 것은 당시 일본과 영국의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은 1902년 영국과 ‘영일동맹’(동아시아 이권을 나눠 갖기 위해 체결한 조약)을 맺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1912년 다이쇼 일왕 즉위식엔 다임러 란도레(Landaulet)라는 차가 사용됐다. 당시 영국 왕실도 다임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같은 모델을 도입했다고 한다. 이 차가 일본 왕실의 ‘1대 의전차’다. █ 2대: 왕세자 암살 미수에서 롤스로이스 유리창 뚫려 ‘2대 의전차’가 도입된 건 1921년(다이쇼 10년)이다. 고급차의 대명사인 영국 롤스 로이스의 실버 고스트 차종 2대를 들여왔다. 그런데 이 롤스 로이스를 수입한 2년 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도라노몬’(虎ノ門) 사건이다. ... (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 ) <이재우 기자(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비즈니스북 한 줄/ 돈이 열리는 나무
30년 간 수많은 실패기업을 성공으로 이끈 바 있는 일본의 저명한 경영평론가이자 컨설턴트. 책은 1940년생 저자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하를 키워 자신도 성장한다’ 등 20여 권이 넘는 경영서적을 펴낸 사이토 구니유키(斎藤之幸)라는 사람입니다. 이번 ‘비즈니스북 한 줄’은 그의 책 ‘바보사장의 머릿속’을 골랐습니다. 책엔 ‘지금껏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거꾸로 읽는 사장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①저자: 사이토 구니우키(斎藤之幸) ②출판사: 더숲 ③옮긴이 및 출판년도: 천재정, 2009년 10년 전 한국에 번역, 출간된 책이지만, 효용 가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경영인의 자세와 관련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의 가치조차 모르면 삼류 경영인, 눈에 보이는 것의 가치를 알면 이류 경영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알아야 비로소 일류 경영인.’ 저자 사이토 구니우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아는 일류 경영인’의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중시합니다. 책 제목(‘바보사장의 머릿속’)을 빗대어 말한다면, 바보사장은 ‘돈이 열리는 나무’인 인재를 말라 죽게 한다는 겁니다. 저자는 “‘돈 버는 비결’에만 관심을 둔 사장은 ‘돈이 열리는 나무’의 근간인 사람을 시들게 하면서 돈이 안 열린다고 투덜거린다”며 “그런 사장은 ‘인재 활용의 비결’을 중시하는 경영인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수많은 성공 사례와 더 많은 실패 사례를 보며 깨달았다”는 사이토 구니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돈을 벌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은 사람을 알고, 사람을 기르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사람의 의욕을 이끌어내서 있는 힘껏 행동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삼류 경영인으로 끝날지, 일류 경영인으로 끝날지는 속된 말로 ‘한 끗’ 차이가 아닐까요. 저자의 마지막 멘트를 기억해 두면 어떨까요. “사람보다 돈을 좋아하는 사장의 뜰에는 ‘돈이 열리는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김재현 기자>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1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자동차에 ‘1도’ 관심 없는 일본 젊은이들
도요타가 매달 일정액을 지불하면 자동차를 자유롭게 골라 탈 수 있는 정액제를 실시한다고 1일 발표했다. 서비스의 이름은 ‘긴토(KINTO)’. 예를 들면, ‘오늘은 렉서스, 내일은 SUV를 탈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 자동차 메이커들이 이런 서비스를 일부 시행하고는 있지만, 일본 기업이 도입하기는 도요타가 처음이다. 도요타는 정액제와 더불어 ‘카쉐어링’(차량 공유)도 함께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30분에 OO엔으로 예약’한다는 식이다. 도요타는 전국 판매점에 전시된 약 4만대의 시승용 차를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소유’에서 ‘공유’로 전략 변화를 꾀한 도요타의 발표는 축소되는 자동차 판매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1990년 777만대였던 일본 자동차시장의 신차 판매 수는 2017년 523만대까지 떨어졌다. 특히 젊은 층의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일본자동차공업회 조사에 의하면 ‘자동차 구입 의사가 있다’고 밝힌 독신 젊은이들은 12%에 불과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1월 2일 “젊은 층의 차에 대한 관심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며‘구루마 바나레’(クルマ離れ)를 지적했다. 이는 젊은이들의 ‘자동차 이탈 현상’을 말한다. 이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2000년대 전후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를 통해 일본 젊은이들의 생각을 들여다 봤다. 일본 50~60대들에게 자동차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애지중지한다는 뜻에서 애마(愛馬)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2008년의 리먼 쇼크(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파산)의 영향으로 소비자 마인드에 급격한 위축이 생겼다는 분석이 많다. 거기다 휘발유 가격 급등과 소비세 증가가 더해졌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젊은 층에게 자동차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자동차공업회가 2017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차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10~20대 젊은이 중 50% 이상이 “차를 사고 싶지 않다”고 답변했다. 자동차 구입을 꺼리는 주된 이유는 돈이다. ‘돈을 쓰는게 아깝다’(お金を使うのがもったいない), ‘취미도 없고, 없어도 곤란하지 않은 자동차에 돈을 쓰는 것이 아깝다’(趣味でもないし、なくても困らないクルマにお金を使うのがもったいない)는 의견이 많다. ‘면허취득에 30만 엔 등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고, 쓸데없는 세금이 너무 많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제 그들에게 자동차는 ‘사치품’으로 여겨진다. ‘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살 수 없는 사람도 많다’(買いたくないじゃなくて買えないって人も多い)는 것이다. 젊은 층의 취미가 다변화 한 것도 한 원인이다. 옛날과 달리 취미의 폭이 다양해졌는데, 그 중심에 스마트폰이 있다. ‘자동차에서 스마트 폰으로(クルマからスマホへ)으로, 도구가 세대교체(ツールにおける、世代交代)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새로운 ‘욕망 충족 도구’(欲求充足ツール)로 자리를 잡으면서 자동차가 그 자리를 회복하기는 어렵게 됐다. ‘대출을 끼고 자동차를 사고, 아웃 도어를 즐기자’(ローンを組んで自動車を買い、アウトドアを楽しもう)라는 젊은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집에서 적당히 만족감을 얻을 수 있고(家の中でそこそこの満足感が得られるし) 안전하고, 안심하고, 또 금전적 위험이 낮은 도구(安全で安心で金銭的リスクも低いツール)인 스마트폰이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도 변했다. 자동차의 편리성은 인정하지만, 굳이 차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 렌터카 나 카쉐어링으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스’(MaaS)다. 마스는 Mobility as a Service의 약자로,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돈을 주고 이용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그러니 ‘데이트 드라이브도 렌터카로 충분하다’고 한다. 요컨대, 자동차가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 요즘 일본 젊은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김재현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쇼핑난민’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이 사람
일본에서 ‘쇼핑난민’(買い物難民 또는 買物難民)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쇼핑난민은 거동이 어려워 생필품을 사거나 장보기가 어려운 고령인구를 말한다. 쇼핑난민 외에 쇼핑약자(買い物弱者 또는 買物弱者), 쇼핑빈곤자(買い物困難者 또는 買物困難者)라는 말도 쓰인다. 쇼핑난민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언제 생겼을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8년 9월 책이 한 권 출간됐다. ‘쇼핑난민-또 하나의 노인 문제’(買物難民-もうひとつの高齢者問題)라는 제목의 책이다. 저자는 오비히로(帯広) 축산대학의 스기타 사토시(杉田聡) 교수.(오비히로 축산대학은 홋카이도 오비히로 시에 있다) 스기타 사토시 교수는 책에서 ‘두부 한 모 조차 사기에도 힘겨운’ 자신의 어머니 체험을 묘사했다. 쇼핑난민이라는 말의 출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우베프런티어대학(宇部フロンティア大学)의 사토 준이치(佐藤祐一) 교수의 논문을 참고했다. (우베프런티어대학은 야마구치현 우베(宇部)시에 있다) 2010년 발표된 이 논문의 제목은 ‘지역사회와 구매행동’(地域社会と買い物行動). 사토 준이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쇼핑난민은 오비히로(帯広) 축산대학 교수 스기타 사토시(杉田聡)씨가 명명한 말로, 식료품과 생활필수품 쇼핑에 곤란을 겪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원문: 買物難民とは 帯広畜産大学教授の杉田聡氏により 名づけられた言葉で, ‘食料品や生活必需品の 買い物に困る人々’の ことを 指す。) 사토 준이치 교수는 논문에서 “요미우리신문이 2009년 6월 5~12일에 걸쳐 쇼핑난민에 대한 특집기사를 싣고 각 지역의 다양한 상황을 보도했다”고 썼다. 그는 “쇼핑난민이라는 단어가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TV 등에서는 쇼핑약자(買物弱者)라는 말로 바꾸고 있다“고 했다. 일본에는 쇼핑난민이 얼마나 될까.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 4명 중 1명이 이미 쇼핑난민’이라고 한다. 농림수산성의 농림수산정책연구소는 지난 6월 ‘식료품 접근이 곤란한 인구 추계’(食料品アクセス困難人口の推計)를 발표했다. 연구소는 “가장 가까운 소매점까지 직선거리로 500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자동차를 사용할 수 없는 65세 이상의 사람은 2015년 기준으로 전국에 824만6000여 명”이며 “이는 2005년에 비해 약 21.6% 증가한 수치”라고 했다. 신체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 상점이 줄면서 쇼핑할 곳이 없는 경우도 많다. 소매업의 한 관계자는 시사매체 주간아사히(11월 9일 발매 예정)에 “노인이 걸어서 쇼핑 갈 가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전국 어디서나 쇼핑난민이 생겨 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高齢者が歩いて買い物に行ける店が、どんどん消えています。全国どこでも買い物難民が生まれる危機に直面しているのです。)고 말했다. 쇼핑난민은 비단 농촌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 지역도 심각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전국 쇼핑난민(824만 6000 명) 중 지방권은 447만 명,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도시권에선 377만6000 명에 달한다. 이는 2005년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난다. 지방권은 416만 3000 명(2005년)에서 10년 새 30만7000 명이 늘어났다. 비율로 보면 7.4 % 증가에 불과하다. 하지만 3대 도시권은 262만1000 명(2005년)에서 10년 만에 115만 5000명이나 불어났다. 44.1% 대폭 증가세를 보인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가 불러오는 쇼핑난민은 한국에도 이미 들이닥친 심각한 사회문제임에 틀림없다. <김재현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야쿠시마 방문기③/ 이끼로 도배된 초록숲
<2편에서 계속> 야쿠시마 여행의 묘미는 ‘숲 트레킹’이다. 그 숲을 제대로 보려면 야쿠스기랜드, 시라타니운스이계곡, 조몬스기 코스 등 세 가지를 다 보는 게 좋다. 야쿠스기랜드에서는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를,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의 배경지인 시라타니운스이계곡에서는 신비함을, 야쿠시마의 상징 조몬스기가 있는 코스에서는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야쿠시마를 두 번 방문하고서야 알았다. 세 코스가 제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역시 비를 피해갈 순 없었다. 시라타니운스이계곡과 조몬스기 코스에선 비옷을 입은 채 우산을 들고 산을 올랐다. 물 먹은 나뭇뿌리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끝장. 단단히 발 아래를 주시하며 걸었다. 시라타니운스이계곡은 녹색 숲을 즐기기엔 그만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이끼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야쿠시마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조몬스기. 예전에는 7200살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과학적 방법으로 실제 측정 해보니 이 할아버지 삼나무의 나이는 2700살 정도란다. 조몬스기를 찾았던 그날도 전망대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신령스러운 삼나무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몬스기 코스는 과거 벌채한 삼나무를 실어 나르던 철길을 2시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왕복 4시간을 꼬박 걸어야 하는 셈. 야쿠스기랜드를 찾은 날은 비 대신 안개를 만났다. 몸은 희뿌연 안개에 젖고, 마음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젖었다. 그것도 충분히 흠뻑. 세 코스를 돌다보면 야쿠시마 원숭이, 사슴과 자주 마주친다. 이 섬에는 ‘사람 2만, 원숭이 2만, 사슴 2만’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모두가 어울려 사는 섬이다. 지인이 민박집에 부탁해 여사장님의 소형차를 빌렸다. 그 차를 타고 이틀 동안 섬을 일주했다. 야쿠시마에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라는 농부시인의 집도 방문했다. 그는 오래전 고인이 됐다. 지금은 그의 아내가 집을 지키고 있지만, 찾아간 날은 70세가 넘은 산세이의 남동생분이 안내를 해줬다. 야쿠시마, 철학, 자연 등에 대해 많은 책을 쓴 산세이의 서재에 들어서자 책 냄새가 코 끝으로 스며들었다. 오래된 흔적들의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주인 없는 서재를 둘러보며 한 개인의 위대함을 다시 느꼈다. 책상 위에 방명록이 있었다. 산세이의 남동생분이 기록을 남겨도 좋다고 했다. 짧게 몇 줄 적었다. 다음 방명록을 쓰는 한국인이 있다면 누군가 내 이름을 볼 것이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인연이 아닐까. 산세이 남동생분의 배웅을 받으며 골짜기를 내려왔다. 한 가지 물음을 안고. ‘우리는 어떤 삶을, 우리는 어떤 인연을 맺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4편에 계속>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도쿄와 서울…두 도시 최저시급의 다른 점
최저임금 인상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 도쿄 도요(東洋)대에 다니는 유학생 이모(26)씨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이씨는 이자카야에서 단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급을 받고 있다. 다음은 그의 글이다. <한국의 경우, 내년 최저임금 시급이 8350원으로 결정되면서 시끌시끌한 것 같다. 올해 시급 7530원 대비 10.9% 인상된 금액이라고 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올려 한국 편의점의 점주들과 자영업자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일본에서 인터넷을 통해 이런 보도를 자주 접한다. 일본에서는 아베 내각이 2016년부터 ‘1억 총활약 사회’ 기치를 내걸고 최저임금 인상을 이어가고 있는 추세다. 나는 이자카야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현재 도쿄의 최저시급은 932엔이다. 한국 돈으로는 9300원 정도다. 10월 1일부터는 여기서 26엔이 인상된다. 일본 정부가 내년 시간당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3.1% 인상했기 때문이다. 이를 결정하는 기관은 후생노동성 최저임금심의위원회다.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지자체마다 최저시급 액수가 다르다. 47개 도도부현을 시급이 가장 많은 A등급부터 가장 적은 D등급으로 나눈다. 예를 들면 도쿄도가 A, 오키나와 같은 곳이 D지역이다. 일본에서 최저임금과 관련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메야스’(目安:めやす)다. 한국 말로 하면, ‘참고 기준치’다. 후생노동성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메야스는 A단계 26엔, B단계 25엔, C단계 24엔, D단계 22엔’(目安はAランク26円、Bランク25円、Cランク24円、Dランク22円~)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본에는 중앙최저임금심의회와 지역최저임금심의회가 별도로 있다. 4개 그룹별 메야스를 제시하는 것은 중앙심의회의 몫이다. 47개 도도부현에 있는 지역심의회는 중앙심의회의 메야스를 기준으로 해당지역에 맞게 최저임금을 의결한다. 의결된 사항을 다시 정부에 답신을 보내면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고시한다. 아무튼, 내년 일본 전지역의 평균 최저시급이 874엔(한화 8918원)으로 결정됐다. 한국이 8350원으로 확정됐으니, 일본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도쿄의 최저시급은 932엔이라고 위에서 말했다. 하지만 이 돈을 주고는 주인들이 알바생을 구할 수 없다.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균액에서 조금 더 얹어줘야 한다. 이게 한국과 다른 점이다. "도쿄 최저시급(932엔) 보다 좀 많은 1100엔 받아 이동거리 만큼 교통비도 지급하는 경우 많아" 내 경우, 현재 이자카야에서 1100엔을 받고 있다. 하는 일은 단순 서빙이다. 한 푼이 아쉬운 유학생 입장에서 보면 1100엔은 적은 돈이 아니다. 돈 욕심이 나서 알바 시간을 늘릴 법도 하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유학생의 경우 주28시간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일본이 한국과 다른 것은 또 있다. 교통비 지급이다. 대부분의 알바생에게 주는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교통비로 하루 340엔 정도를 받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 알바 장소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 드는 차비가 딱 그 정도다. 교통비 지급은 제한선을 두고 있다. 주위에서 들어보면, 일본 경제가 장기 불황기를 의미하는 ‘잃어버린 20년’이후 호황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최근 일본 기업들이 내놓은 실적 발표가 그것을 증명한다. 기업들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안달이라고 한다. 졸업을 하지도 않은 학생들을 미리 ‘찜’해 두는 입도선매(青田買い:푸른 밭을 미리 사들이는 것)를 넘어 ‘즉시전력감’을 나타내는 ‘초입도선매’(超青田買い)라는 단어도 경제신문에서 보인다. 또래들이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국의 취업 상황이 계속 어렵다면, 나는 졸업 후 일본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전에 한국 사정이 좀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객원기자/일본 도요(東洋)대 유학생 이모씨>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이나모리 가즈오②/ 그가 경영세습을 안 한 이유
<1편에서 계속> 가고시마 대학에 수백억 원을 기부한(①편)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86) 명예회장은 세습 경영을 하지 않은 일본의 대표적인 경영자다. 그는 2005년 교세라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은퇴했다.(2010년 JAL 회생을 위해 경영 일선에 복귀하긴 했다) 그가 2세 세습을 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나모리 회장은 2013년 10월 18일, 주간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녀를 딸만 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세라는 전 종업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회사이지, 이나모리가(家)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세습을 하더라도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문: 一つ目の理由は、子どもが娘だけだったからです。二つ目の理由は、京セラは全従業員の幸福を追求するための会社で、稲盛家のものではないからです。三つ目の理由は、世襲してもうまくいくわけがないと思ったからです。) 이나모리 회장은 딸만 셋 뒀다. 물론 딸과 사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종업원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그의 말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교세라의 사시와 ‘교세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자신의 책(‘회사는 어떻게 강해지는가’)에서도 세습에 대해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음과 같다. <내 경우에는 애초에 대물림 경영을 생각한 적도 없었고, 지금은 회사 자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경영 세습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라면, 가업으로서 세습이 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회사는 어떻게 강해지는가’ 165쪽 인용, 김정환 옮김, 서돌출판사 2012) 경영 세습을 하지 않은 이유로 사회적 책임을 꼽은 것이다. 이나모리 회장은 평소에도 그런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JAL(일본항공) 회생 건이다. 2010년 JAL은 2조 3000억 엔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회생은 불가능해 보였고, 회생을 믿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마에하라 세이지 국토교통상 등이 삼고초려를 한 끝에 은퇴한 그를 모셔왔다. 이나모리 회장은 제안을 수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항공이 그대로 도산한다면 일본 경제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일본 산업의 상징이기도 하고, 직원 수 만 명의 일자리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나는 늙어서 일주일에 3일만 시간을 낼 수 있으니 월급은 받지 않겠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사회적 책임을 ‘나 몰라라’ 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한 푼의 월급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1997년 65세가 되던 해, 교토에 있는 사찰 엔후쿠지(円福寺)로 출가하기도 했다. 승적(僧籍)의 법명은 다이와(大和)다. 그가 쓴 많은 경영서에 불교적 가치관이 빠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편에 계속>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아사히 맥주를 위기에서 구한 남자①
간단한 질문 하나로 시작해 보자. 교세라(京セラ)의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 일본전산(日本電産)의 나가모리 시게노부(永守重信) 회장, 아사히맥주의 무라이 쓰토무(村井勉) 전 회장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나모리 가즈오와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무라이 쓰토무 전 회장의 이름은 다소 생소할 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세 사람 모두 기업 재생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베마 경영’으로 유명한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일본기업재생기구(ETIC)의 요청으로 2010년 파산을 신청한 JAL(일본항공)을 3년 만에 우량기업으로 부활시켰다. 그에게는 ‘경영의 신’, ‘기업 회생의 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죽어가는 회사도 살려 낸다’는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은 M&A계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에겐 ‘기업 재생의 신’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그럼, 아사히 맥주의 무라이 쓰토무 전 회장은 어떨까? 그는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8년 10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아사히신문은 그의 부음을 전하면서 <기업 ‘재건옥’이라는 별명을 지닌, 무라이 쓰토무씨가 사망했다>(企業再建屋の異名, 村井勉さん死去)고 전했다. 아사히신문의 보도처럼, 무라이 쓰토무에겐 ‘사이켄야’(再建屋)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사이켄야는 ‘재건 전문가’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그에게 이런 별명이 생긴 건, 스미토모(住友)은행 (현재의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중역으로 일하던 현역 시절, 경영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잇달아 재생시키는 수완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주거래은행의 무라이 쓰토무가 구원투수로 투입된 대표적인 회사는 스포츠카 메이커인 동양공업(현 마쓰다)과 맥주기업 아사히다. 자동차 마니아라면, 일본 최고의 스포츠카로 평가받는 ‘마쓰다 RX-7’를 잘 알 것이다. 이 스포츠카를 만든 회사의 전신이 동양공업이다. 무라이 쓰토무는 1976년 스미토모 상무 시절, 경영 부진에 빠진 동양공업의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파견돼 재건에 올인했다. 그는 이후 스미토모에 복귀해 부행장직을 맡았다. 그가 장기간 실적 부진을 겪던 아사히 맥주 사장에 취임한 건 1982년이었다. 당시 아사히맥주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경영잡지 ‘기업가구락부’(kigyoka.com)라는 매체를 좀 참고해 보자. 이 잡지는 1999년 12월호에서 ‘아사히 맥주 기적의 진실’(アサヒビール奇跡の真実)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기고자는 아사히 맥주 명예고문을 지낸 나카죠 다카노리(中條高徳:1927~2014)다. 그는 당시 잡지에 이렇게 썼다. <1982년, 아사히 맥주는 난공불락인 기린맥주 타도를 향해 점유율 탈환에 나섰다. 당시 챔피언 기린의 점유율은 60% 이상이었다. 한편 아사히는 10%미만까지 떨어져, 후발주자인 산토리에도 밀리는 침몰 직전의 상황이었다.> (원문:1982年、アサヒビールは難攻不落といわれたキリンビール打倒に向けて、シェア奪還を目指した。当時、王者キリンのシェアは60%強。一方アサヒは10%弱まで落ち込み、新参のサントリーにも抜かれそうな、沈没寸前の状況にあった。) <2편에 계속>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