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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한일관계, ‘알까기’가 되어선 안된다
... 문 대통령 태풍 피해 일본에 위로 전문 문재인 대통령은 바둑 아마 4단의 실력을 갖춘 애기가(愛棋家)로 알려져 있다. 문 대통령에게 국정 운영이나 외교 관계는 ‘바둑판 놀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 문 대통령이 실타래처럼 얽힌 한일 갈등과 관련해 묘수(妙手)에 가까운 작은 해답을 내놓았다. 태풍(하기비스) 피해를 당한 일본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아베 총리에게 위로 전문을 보낸 것. 문 대통령은 양국의 껄끄러운 감정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 차원에서 일본 태풍 희생자들에게 전문을 보냈다. 바둑으로 보면, 정석(定石)에 해당한다. 14일 청와대 고민정 대변인은 서면브리핑을 통해 “일본 정부와 국민이 합심해 피해를 조기에 수습하고, 피해를 본 많은 일본 국민이 하루속히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는 문 대통령의 전문 내용을 공개했다. 위로 전문은 이날 오후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 측에 전달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언론들은 문 대통령의 위로 전문을 발빠르게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애도 메시지를 전했다”며 그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산케이는 위로 전문에 대한 해석을 담지는 않았다. 사실 관계만 드라이하게 전한 것이다. 이낙연 총리 일왕 즉위식 참석도 좋은 기회 하루 전인 14일 요미우리신문은 이낙연 총리의 일왕 즉위식 참석 계획(22~24일)을 전했다. 이 신문은 한국 관계자를 인용 “이낙연 총리가 일본 방문 중에 아베 총리와 회담을 갖고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으로 검토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요미우리는 “이 총리는 한국신문의 도쿄특파원 경력을 가진 지일파로, 악화된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해 대화할 의향을 갖고 있어 보인다”고 했다. 팩트 이외에 의미 해석까지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의 태풍 피해 위로 전문과 이낙연 총리의 일왕 즉위식 참석. 바둑으로 치자면, 이 2가지 사안은 긍적적인 행마(行馬)인 셈이다. 상호 경제보복, 지소미아(GSOMIA) 폐기라는 악수(惡手)와 무리수(無理手)가 뒤엉켜 복잡해진 바둑판의 행마 싸움에 실낱 같은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바둑 위기십결에 나오는 동수상응(動須相應) 위기 해결에 종종 등장하는 바둑 10계명 ‘위기십결’(圍棋十訣)에는 동수상응(動須相應)이라는 말이 있다. ‘바둑돌들이 서로 살고, 호응하도록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 한일 관계에서 바둑돌을 쥔 사람은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다. 두 사람이 내놓는 행마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해답을 찾아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위로 전문과 일왕 즉위식 참석이라는 2가지 행마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낙연 총리가 아베 총리와 만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낸다면, 정상 회담 가능성도 점쳐 볼 수 있다. 물론 속단하긴 이르다. 두 행마가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한 최종 포석(布石)으로 작용해야 하고,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의 패착(敗着)은 없어야 한다. 양국 정상이 바둑돌을 놓는 심정으로 정상회담을 갖길 바란다. 승부수는 그때 던져도 늦지 않다. 한일 관계는 서로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알까기’가 되어선 안된다. 그럼? 서로를 건강하게 견제하고 경쟁하는 ‘정석 바둑’이어야 한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3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일본의 선구자들⑨/ 철도의 아버지
... 1872년 10월 14일 일본 첫 철도 개통 10월 14일은 일본 철도의 날이다. 도쿄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横浜)를 잇는 일본 최초의 철도 개통(1872년 10월 14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다. 1825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철도가 개통된 이래 일본에 철도가 들어서기까지는 반세기가 걸렸다. ‘맛봬기’였지만 그 이전에 일본인들은 철도를 이미 구경했다. 1865년 글로버 저택(Glover's house)으로 유명한 영국 무역상 토마스 글로버(Thomas Blake Glover)가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 해안가에 약 600미터의 선로를 깔고 영국제 증기 기관차와 객차 2량을 선보였다. 영업을 위한 운전은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최초로 철도가 달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인근에는 철도 발상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 철도의 탄생은 한 남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JR도쿄역 광장에는 일본 최초의 철도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인공은 ‘일본 철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1843~1910)다. 원래 동상은 2007년 건립됐다가 도쿄 역사(驛舍) 복원 공사로 철거됐다. 그러다 10년 만인 2017년 그의 고향(야마구치현 하기시) 사람들의 끈질긴 청원으로 재건립 됐다. 그에 앞서 2016년 10월 14일 야마구치현 하기(萩)시 역 광장에도 이노우에 마사루의 동상이 들어섰다. 도쿄역과 하기시역 동상의 차이점은 도쿄는 노년 시절, 하기시는 젊은 시절을 형상화 했다는 것. 일본의 선구자들 시리즈 9회는 이노우에 마사루 편이다. 막부 말기 영국 밀항 ‘조슈 파이브’ 중 한 명 막부 말기인 1863년, 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번의 다섯 사내가 유럽의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영국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일본 역사는 그들을 ‘조슈 파이브’라고 부른다. 다섯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훗날 일본근대의 정치와 산업을 바꾸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면면은 이렇다. ①우리가 잘 아는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②초대 외무대신이 되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③조폐 국장에 기용되면서 ‘조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④ 공부경(工部卿)자리에 오르면서 ‘일본 공학의 아버지’로 지칭되는 야마오 요우조(山尾庸三). ⑤ 마지막으로 ‘일본 철도의 아버지’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다. 이중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다음 해 죠수번의 정치 상황이 급변하면서 곧바로 귀국했다. 엔도 긴스케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아 중도 귀국했다. 반면, 이노우에 마사루와 야마오 요우조는 끝까지 남아 유학 생활을 마무리 했다. 영국 유학 후 철도국장으로 철도 개통 총지휘 이노우에 마사루에 좀 더 집중해 보자. 그는 런던 대학의 윌리엄슨 교수 집에 하숙하면서 공부했다. 광산과 철도 기술을 집중적으로 배운 후, 밀항 5년 만인 1868년 귀국했다. 이노우에 마사루는 이듬해 메이지 신정부에 등용, 철도 사업과 관련된 영일 회견에서 통역을 맡으면서 철도인의 첫발을 내디뎠다. 철도 간부로 지명, 1872년엔 일본 최초의 신바시~요코하마 철도 개통을 총지휘했다. 당시 일본 철도는 외국 초빙 기술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877년 철도국장에 기용된 이노우에 마사루는 오사카에 일본인기술자양성소를 세웠다. 이후 일본의 독자적인 힘으로 교토(京都)~오쓰(大津) 구간이 개통됐다. 1889년 신바시~고베 구간이 개통됐고, 그 이듬해인 1890년 이노우에 마사루는 철도청 장관으로 승진했다. 그 무렵 자본가들이 앞다퉈 사철(사설철도) 건설에 눈독을 들였다. 그걸 본 이노우에 마사루는 “자본가들은 이익에만 목적이 있다. 철도는 국가가 경영해야 한다”며 자본가들과 격하게 대립했다. 이런 일이 화근이 되어 그는 1893년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퇴직 후 유럽 철도 시찰하며 옛 은인 다시 찾아 퇴직 7년 후인 1910년. 이노우에 마사루는 철도원 총재로부터 유럽 철도시찰 의뢰를 받았다. 남만주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유럽에 도착한 그가 가장 먼저 한 건 옛 은인을 찾는 일. 영국 유학 시절 몸을 의탁했던 윌리엄슨 교수의 집을 방문했다. 세상을 떠난 윌리엄슨 대신 그 아내와 40년 만에 재회했다. 그 기쁨도 잠시였다. 시찰을 하고 귀국하던 도중, 이노우에 마사루는 병으로 쓰러졌다. 살아서는 일본 땅을 밟지 못했다. 1910년 8월 2일의 일이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30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타피오카 법칙’...경기 불황 때마다 버블티 붐
... 일본, 타피오카 가게 반년 만에 두 배 증가 도쿄상공리서치가 10월 8일 “일본에서 타피오카 가게가 늘고 있다”고 발표했다. 도쿄상공리서치에 따르면, 현재 타피오카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은 60개사. 3월 말 32개에서 반년 만에 두 배로 급증했다. 도쿄상공리서치는 “타피오카 붐은 경기와 미묘하게 관련이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3차례 붐이 있었다는 것. 1차 붐은 버블 붕괴 시기인 1992년경, 2차 붐은 리먼 쇼크 사태가 발생했던 2008년경. 도쿄상공리서치는 “모두 불황을 전후 해 붐이 일고 있다”고 해석했다. “불황을 전후해서 붐이 일고 있다” 도쿄상공리서치는 “이번 3차 붐은 미중 무역 마찰, 영국의 EU 탈퇴, 국내의 소비세 증세와 겹친다”며 “과연 경기를 점치는 붐이 될지, 앞으로의 움직임이 주목된다”고 했다. 도대체 타피오카가 뭐길래 이렇게 일본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걸까. 타피오카(tapioca)는 남미 열대작물인 카사바(cassava)의 뿌리에 들어있는 전분이다. 쫄깃한 식감이 특징. 카사바는 혈당을 일정하게 유지(stabilizing blood sugar)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글루텐 성분이 없어 ‘글루텐 프리’ 식품(Cassava flour is touted as a gluten-free)으로 주목받고 있다. 대만 춘수당 가게, 2013년 일본에 첫 상륙 음료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버블티엔 타피오카 펄(탱탱한 구슬 모양의 젤리)이 들어간다. 타피오카 펄은 흑당의 인기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일본에 타피오카 가게가 첫 선을 보인 건 2013년 7월. 대만에서 타피오카 밀크티를 만들어 팔던 춘수당(春水堂)이 일본에 상륙하면서다. 도쿄 다이칸야마(代官山)에 1호점이 들어섰다. 1983년 설립된 춘수당은 타피오카 밀크티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출발 10년 만에 대만의 국민음료로 자리 잡더니 한국, 일본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춘수당 가게와 일본 오리지널 전문점 등을 합쳐 현재 도쿄에만 300여 점이 성업하고 있다. 도쿄상공리서치의 발표대로 불황 때마다 붐을 탄다는 타피오카 음료. ‘타피오카 법칙’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법도 하다. <에디터 김재현>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샤넬 뿌리치고 한국으로...조아라의 '빅 스케치'
... <사진= 조아라 디자이너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아크(ARCH) 공방을 외부인으로는 처음으로 글로벌 매체 재팬올에 공개했다. 조 디자이너 뒤로 아크(ARCH)의 특이한 CI가 보인다. ARCH라는 글자를 상하로 데칼코마니처럼 붙여서 각도를 90도 틀었다. 마치 상형문자를 보는 듯하다. 조아라 디자이너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뛰 부 트하바이에 아벡 무와?”(프랑스어: 나랑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2014년, 샤넬(Chanel)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트 디렉터 크리스텔 코셰(Christelle Kocher)는 서른 초반의 동양 디자이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패션업계에서 콧대 높기로 유명한 샤넬이 아무에게나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니다. 샤넬의 선택을 받은 이 동양 디자이너는 패션 명문 '파리의상조합학교' 출신의 조아라. 샤넬은 파리 패션계의 걸출한 스타 안 발레리 아쉬(Anne Valérie Hash)와 8년간 같이 일한 조아라의 실력과 평판을 익히 듣고 있었던 터다.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Central S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 출신으로, 샤넬 공방 르마리에(Mason Lemarie)를 맡고 있는 크리스텔 코셰의 눈은 정확했다. 조아라와의 협업 결과는 ‘LVMH(루이비통모엣헤네시) 프라이즈 올해의 디자이너' 수상으로 이어졌다. 수상 당사자는 코셰지만, 패션 작업은 개인의 산물이 아니기에 팀 파워는 그래서 더 소중하고 중요하다. 이후 프랑스 패션업계는 “조아라와 코셰의 '시너지 효과'가 파리에서 주목할 만한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파리에서 15년 간 활동한 조아라(37, 프랑스 영주권자) 디자이너는 지난해 완전 귀국, 아크(ARCH)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 조아라. 하지만 파리에서는 이미 실력파로 인정받았던 그다. 그런 그는 지금 서울에서 ‘빅 스케치’를 구상 중이다. '작은 옷감'이 아닌 ‘한국패션의 미래’라는 큰 그림이다. 우리가 조아라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아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그를 글로벌 매체 재팬올이 만나 3색(블루, 블랙, 레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샤넬 아트 디렉터 크리스텔 코셰(Christelle Kocher)는 현재 중국, 일본 등에서 큰 각광을 받고 있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딴 ‘코셰’라는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다. 조 디자이너는 코셰에 대해 “미래성이 탁월하고 함께 일 하면서 내 역량도 펼칠 수 있는 동료”라고 소개했다. 패션 잡지 엘르 중국판에 소개된 코셰의 특집 기사.> # 공방에서 만난 스톡맨(stockman)과 주키(JUKI) 재봉틀 서울 양재역에 있는 아크(ARCH)의 공방. 조아라 디자이너가 명함을 건넸다. 잠시 당황스러웠다. 앞뒤 모두 블랙. 특이한 명함이었다. "블랙이 제 컬러이자 컨셉트입니다." 옷도 블랙을 즐겨입는다고 했다. 공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아담했다. “조만간 개인 컬렉션을 계획하고 있다”는 조아라 디자이너는 손가락 10뼘 되는 크기의 긴 테이블에서 작업 중이었다. 조각조각난 크고 작은 천들, 다양한 작업도구들, 유명 디자이너들의 책들이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명품 마네킹이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에서 갖고 온 스톡맨(stockman)이라는 인체모형 보디에요. 디자이너들에겐 최고의 작업 도구죠.” 스톡맨엔 세련된 블랙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네오플랜이라는 소재로 만든 작품인데, 스톡맨으로 입체재단 작업을 하면 이 드레스처럼 핏(fit)이 잘 살아납니다.” 스톡맨 외에 다른 2개의 마네킹도 옷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기억(ㄱ)자로 배치된 두 개의 행거에는 그동안 작업한 여성복과 아동복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곧 세상에 빛을 보게 될 조아라 디자이너의 ‘프렌치적 아이템들’이다. 눈을 잠시 돌렸다. 조 디자이너의 손때가 묻은 공업용 주키(JUKI) 미싱기가 눈에 들어왔다. 15년 패션유학의 경험을 말해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사진= 지난 5월 말 ‘전 세계 패션계의 셀럽’ 패리스 힐튼이 자신의 화장품 런칭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패리스 힐튼 스킨케어 어번 나이트 파티’(Paris Hilton Skincare Urban Night Party) 행사장에 패리스 힐튼과 조아라 디자이너가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힐튼은 조 디자이너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었고, 조 디자이너는 힐튼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 #칼 라거펠트-이브생 로랑을 배출한 파리의상조합학교 파리 유학 시절이 궁금했다. 예비 패션 디자이너들은 대개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강원도 강릉 출신인 조 디자이너는 고등학교(계원예고)만 졸업한 채 파리로 떠났다고 한다. 2002년의 일이다. 당돌한 사실 한 가지. 중학교 시절, 아버지에게 “일본 기술 전수학교로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기가 찼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일본이든, 프랑스든 언어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는 조 디자이너는 자신의 꿈을 키워 줄 학교로 ‘파리의상조합학교’(Ecole de la 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 Parisienne)를 선택했다. 1927년 세워진 이 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전통있는 패션 스쿨의 하나로 꼽힌다. 4년 과정으로 철저하게 오뜨 쿠띄르(Haute couture: 고급 맞춤복) 기법을 전수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난 2월 세상을 떠난 ‘패션계의 카이저’(황제) 칼 라거펠트, ‘패션의 전설’ 이브 생 로랑, 일본 유명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이 학교 출신들이다. 이 가운데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브랜드는 한국팬층이 두껍다. 히로시마 출신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1938~)가 런칭한 이 브랜드는 ‘삼성그룹의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이 좋아하는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작은 삼각형을 서로 연결해 만든 바오바오(BAOBAO)백과 주름옷으로 불리는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 라인을 탄생시킨 주인공이 조아라 디자이너의 학교 대선배인 이세이 미야케다. 조 디자이너는 “파리의상조합학교가 가지고 있는 전통성과 기술력 그리고 세 선배 등 이 학교를 나온 사람들의 행보가 나한테 큰 영향을 줬다”고 했다. “커리큘럼 중에서 우리 학교가 가장 신경 써서 가르치는 기법은 ‘입체재단’입니다. 평평한 종이나 천에 자를 대고 옷본을 그리는 평면 재단과 달리, 입체재단은 보디(인체모형)에 직접 얇은 천을 대고 모양을 잘라내서 옷본을 만드는 기법이죠.” <사진= 조아라 디자이너는 한국 패션계에선 아직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프랑스 패션계의 자존심’ 샤넬 하우스와 인연을 맺는 등 현지에서는 실력파로 인정 받았던 그다.> 학교를 졸업한 조 디자이너의 주된 무대는 '파리 패션 위크'. 겐조(Kenzo), 프랑크 소르비에(Frank Sorbier), 안 발레리 아쉬(Anne Valérie Hash), 크리스텔 코셰(Christelle Kocher) 등의 테크니션 브랜드들을 거치면서 프레타 포르테(기성복)와 오뜨 쿠띄르(고급 맞춤복)를 섭렵했다. 이중 안 발레리 아쉬의 키즈 라인(브랜드명: 안 발레리 아쉬 마드모아젤)의 프레타 포르테 총괄 디렉터를 맡는 등 안 발레리 아쉬와는 8년간 같이 작업했다. 그런 안 발레리 아쉬는 파리의상조합학교 후배인 조아라에게 “너를 통해 아동복의 미래를 보았다”고까지 높게 평가했다. 조 디자이너는 2004년 '디암 프라이즈 콩쿨' 파이널 리스트와 2005년 '국제 신인 디자이너 콩쿨' 파이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당시엔 브랜드에 소속되어 있어서 개인적으로 크게 상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이제는 개인 브랜드를 런칭했으니 코셰처럼 'LVMH 프라이즈' 같은 상을 노려볼 만하지 않겠느냐 (웃음)”고 했다. <사진= 조 디자이너는 여성복, 아동복 패턴을 두루 섭렵했다. 그동안 작업해 온 여성복과 아동복이 행거에 걸려 있다.> <사진= 조 디자이너가 인체모형 마네킹인 스톡맨(stockman)에 작업을 하고 있다.> # 15년 파리 활동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 조 디자이너는 한국으로 오기 전 샤넬 디렉터인 크리스텔 코셰(Christelle Kocher)와 작업했다. 코셰는 2014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코셰’(Koché)를 론칭하면서 전 세계 패션 스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샤넬보다 코셰 브랜드의 약진이 무섭다고 한다. “코셰와 같이 했던 작업은 그동안 샤넬이 해온 모든 전통적인 방식을 활용하돼, 그것을 어떻게 재조합하느냐는 것이었어요. 코셰는 옷에 어떤 포인트를 넣었을 때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는지를 잘 아는 디자이너였어요.” 당시 파리엔 “코셰에게는 조아라가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코셰에게 조아라 디자이너의 존재감은 컸다. 그런 코셰는 조 디자이너가 오랫동안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조아라 디자이너에게는 또 다른 꿈이 있었다. 그는 지난해 안정된 자리를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가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한국패션의 미래 같은 걸 구상해 보고 싶었어요. 많이 아쉬웠던지 코셰가 저한테 샤넬 디렉터 자리를 제안했어요. 샤넬 스튜디오에서도 콜을 받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어요. 코셰는 올해 스포츠브랜드 나이키와 협업하면서 중국, 일본 등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코셰의 나이키 작품을 봤더니 제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 있었어요. 나쁘지 않았어요. 최근에 연락이 왔는데, 다시 협업을 해보자고 하더군요." “나이키와 협업에서 코셰가 중점을 둔 건 뭐냐”는 질문에 조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코셰는 이게 나이키 브랜드인지 디자이너 브랜드 인지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만들었죠. 나이키라는 상업적 이미지에 자신의 프렌치라는 고급스러운 장점을 잘 녹아들게 한 거죠.” <사진= 작업대에서 스케치 작업을 하는 조 디자이너.> # 자신의 영어 이름 따서 아크(ARCH) 브랜드 런칭 대화는 브랜드로 이어졌다. 조 디자이너는 귀국 후 자신의 영어 이름(ARA CHO) 이니셜을 따서 아크(ARCH)라는 브랜드를 런칭했다. 아크에는 건축을 뜻하는 영어 아키텍쳐(ARCHitecture)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패션디자이너에게는 옷감 소재 선택이 중요한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거기에 뭘 담느냐 하는거죠. 저는 ‘기품 있으면서도 편안한, 그리고 여성성’을 추구합니다. 건축이 건물을 쌓아 올리듯, 아크는 ᐃ기품 ᐃ편안함 ᐃ여성성을 패션예술에 입히는 것이죠.” 조 디자이너는 ‘프랑스 정통 오뜨 쿠띄르’를 지향한다. 15년 파리 유학의 결정체. 그렇다고 마냥 프랑스 스타일만 고집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작품에서 프렌치적 소스를 내세우겠지만, 거기에 코리아 브랜드라는 걸 어떻게 살려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브랜드를 제 능력선에서 뽐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큰 숙제 중의 하나죠.” <사진= 15년 파리 생활을 접고 서울에서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조 디자이너가 거울 앞에 섰다.> <사진= 조 디자아너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공방의 모습.> # 와인과 고양이 '러버'(lover) 재미난 이야기도 들려줬다. 조아라 디자이너는 프랑스에서 작업하면서 2가지로부터 '작은 힘'을 받곤 했다고 한다. "와인과 고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프랑스가 와인의 나라인 만큼, 물보다 더 많이 마신게 와인입니다. 혀가 절여지는 느낌까지 받았죠. 자주 들른 가게에서 와인을 사와서 '입에 머금고' 작업하곤 했어요." 실제로 그의 공방에는 와인 행거에 와인이 여러 병 꽂혀 있다. 와인 이름들이 흔하지 않았다. 그럼, 고양이는 왜일까. 조 디자이너는 12살짜리 ‘레아’라는 이름의 프랑스산 고양이와 함께 산다. 덩치가 엄청나다. “제 유학생활을 온전히 함께 했죠. 귀국 하려는데 12년 키운 이 녀석을 도저히 두고 오지 못하겠더군요. 다행히 한국에서도 적응 잘하고 있고 제게도 여전히 힘이 되고 있죠.” 긴 대화지만, 한 마디만 더 물었다. 조 디자이너의 꿈은 옷을 만드는데 만 머물러 있지 않다. “오드리 헵번이 그랬던 것처럼, 패션을 통한 기부 활동이 제가 꿈꾸고 있는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이디어가 달릴 때는 ‘검색’보다는 ‘사색’을 통해 답을 찾는다는 조아라 디자이너. 그와 몇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내린 결론. “그의 브랜드 아크(ARCH)가 불꽃을 튀기며 솟아 오를 날이 머지 않았구나.”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0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도토루 커피는 브라질 지명이다.
...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전문가 제임스 R. 그레고리(James R. Gregory)는 그의 저서 ‘브랜드 혁명’(최원주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기업 브랜드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면 다음과 같은 효과 있다고 했다. <강력한 기업 브랜드는 괄목한 만한 수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프리미엄 가격을 책정할 수 있게 하며, 위기를 견뎌내고 보다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마케팅 활동에 좀 더 힘을 더해주며, 그 결과에 있어서도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강력한 기업 브랜드는 시장 점유율의 침식을 느리게 할 수도 또는 멈출 수도 있다. 그것은 재능 있는 인재를 끌어 모으는 것을 쉽게 하며, 재정 그리고 투자 시장에서 기업을 보다 많이 어필하게 만든다.(같은 책 3페이지 인용)> 기업 브랜드가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 첫 단계인 브랜드 네이밍(brand naming) 작업부터 잘 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네이밍은 해당 상품의 정보와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읽고 부르기 쉬워야 하며, 또한 긍정적 이미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 2편은 1편 카레에 이어 커피다. 일본 커피 체인점들(도토루, 고메다, 사자 커피)과 커피 가공 회사들(키커피, UCC, 이시미츠쇼지) 등 6곳의 브랜드 네이밍 역사를 살펴봤다. 인구 1억2700만 명의 일본은 커피 소비 대국이다. 전일본커피협회에 따르면 한해(2017년) 커피 소비량은 46만 4686톤으로, 국민 1인당 일주일에 11.09잔을 마신다. 커피 수입량은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5위다. 세계 커피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만큼, 스타벅스 진출도 빨랐다. 도쿄 긴자에 스타벅스 1호점이 들어선 건 1996년.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곤 첫 해외 매장이다. 서울 1호점(이대점)은 그 3년 뒤인 1999년 오픈했다. 일본에서 커피 매장이 가장 많은 체인점은 ᐅ스타벅스, ᐅ도토루(DOUTOR) 커피, ᐅ고메다(コメダ) 커피 순이다. 스타벅스 매장은 1300개에 이르고, 도토루는 1100여 개, 고메다는 760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스타벅스는 뱃사람 이름에서 따왔다.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Moby Dick)에 등장하는 피쿼드(Pequod)호의 일등 항해사 이름이 스타벅스다. 당초 시애틀 인근의 광산에서 일했던 갱의 이름인 스타보(Starbo)도 후보에 올랐다.(하워드 슐츠 저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 신화’). 결국은 ‘커피의 해상 무역’ 의미를 담은 스타벅스가 스타보를 제치고 최종 결정됐다고 한다. 1) 도토루 커피: 창업주가 일했던 브라질에서 착안 해외 브랜드인 스타벅스를 빼면, 일본 최대의 커피 체인점은 도토루(DOUTOR)다. 1962년 도쿄에서 커피 로스팅 회사로 출발한 도토루는 무슨 뜻일까? 먼저 창업주 토리바 히로미치(鳥羽博道‧80) 명예회장 이야기부터 해보자. 도쿄의 한 찻집에서 일하던 그는 스무살 때인 1959년, 브라질로 건너가 커피 농장에서 현장감독으로 일했다고 한다. 3년 후 귀국해 1962년, 도쿄에 로스팅 회사를 설립했다. 토리바씨는 1972년 커피 전문점 ‘카페 콜로라도’를, 1980년엔 ‘도토루 커피 숍’을 차례로 오픈했다. 도토루의 브랜드 네이밍엔 토리바씨의 브라질 체험이 담겨 있다. 그의 자서전 ‘도토루 커피, 이기느냐, 죽느냐’의 창업기(ドトールコーヒー「勝つか死ぬか」の創業記)에 따르면, 도토루는 포르투갈어로 ‘의사’, ‘박사’라는 뜻으로, 영어의 닥터(doctor)에 해당한다. 토리바씨가 브라질 커피 농장에서 일할 당시, 하숙했던 곳이 상파울로의 ‘도토루 핀토 페라즈 거리 85번지’(Doutor Pinto Ferraz 85)라고 한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와 회사를 설립할 즈음, 그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도토루’로 이름을 붙였다. 브라질에서는 사회에 공헌한 인물을 거리 이름에 붙이는데, 핀토 페라즈(Pinto Ferraz)라는 사람을 기리는 거리에 토리바씨가 살았던 것이다. <2편에 계속>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10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㉓/ 전후 황금기1
... <사진= 젊은 시절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감독.> ... 전쟁이 끝났다. 패전의 책임은 물론 일본을 비롯한 추축 동맹국들에게 돌아갔고 그 형벌로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두 번이나 맞는 참사를 낳았다. 일본은 무모한 전쟁을 벌였고 300만명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으며 전 국토는 피폭으로 신음했다. 그러나 전쟁 전 필름이 없다는 이유로 흩어져 작업을 이어갔거나 혹은 종군, 은둔을 해야 했던 영화인들에게는 패전의 시점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보이며 뒤이어 올 예술적,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혼돈을 준비해야 했다. 비록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 도래했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전후 가장 중요한 영화인이었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가 데뷔를 한 바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를 내놓는데 1883년 경 유도명인(柔道名人)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인생을 알아간다는 스토리로, 도미다 쓰네오(富田常雄)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검열이 매우 혹독해서 1800피트(약 600미터)나 되는 분량의 장면들이 삭제되고 만다. 게다가 강요에 의해 ‘속 스기타 산사로’(1945)를 촬영하게 되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만다. 그나마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유일무이한 민족적 영화인 ‘가장 아름다운 자(一番美し)’를 통해 앞으로 그가 보여줄 휴머니즘의 흔적을, 첫 시대극이었으나 미군정 하에서 ‘봉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1952년에서야 개봉된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虎の尾を踏む男達, 1945)를 통해 존재감을 알리게 된다. 이에 반하여 기노시타 게이스케는 애국적이고 풍자적인 코미디 ‘꽃피는 항구’(港, Port of Flowers, 1943)와 모성적 감상주의로 검열을 받은 ‘육군’(陸軍, The Army, 1944)을 통해 건강한 가족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 이는 쇼치쿠(松竹)만의 특성인 가족 드라마와 멜러 드라마라는 양축에 잘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도쿄 보다는 지방을 무대로 하면서 코미디에 센티멘털리즘을 섞은 그만의 스토리텔링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위의 두 사람이 일본 본토에서 데뷔를 하는 동안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는 히로시마에서 직접 원자폭탄을 맞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의욕을 한동안 상실하고 제자인 신도 가네토(新藤兼人)의 새로운 시작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는데 그는훗날 일본 독립영화계의 아버지로 이름을 날렸다. 신도 가네토는 두고두고 이때를 회고하던 끝에 1975년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미조구치 겐지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ある映畵監督の生涯, 溝口健二の記錄’)를 연출하기도 했다. 마키노 마사히로(雅弘)는 18세에 영화감독으로 데뷔 26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로 연출하여 일본 영화사의 전설이 된 인물이지만 이 때 만큼은 미군들을 환영하기 위해 촬영소 창고에 넣어 둔 악기를 꺼내 급히 재즈 밴드를 조직한다. 훗날 일본 활극의 거장으로 존경 받게 될 인물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마키노 쇼조가 ‘일본영화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물려 받은 재능도 뛰어나서 그의 영화는 ‘오락영화의 정수’로 불리기도 한다. 미조구치 겐지가 약 100편, 오즈 야스지로가 50여편, 구로사와 아키라가 약 40편의 작품을 연출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편수를 자랑하게 되는데 일본에서 볼 때 ‘점령군’에 해당하는 미군을 그것도 패전 후 환영하기 위해 재즈밴드를 만들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가 왜 전설이 될 수 있었는지 짐작할 대목이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는 싱가포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매일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있었고 우치다 도무(内田常次郎)는 만주에서 만에이(滿映)의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가의 자살을 보았고 이후 8년간 중국영화인에게 기술지도를 했다. 우치다 도무는 사무라이 액션 영화의 거장으로서 장렬한 클라이맥스가 일품인 감독인데 전쟁 이후 황금기에 시작된 장르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사사키 야스시(佐佐木康)의 ‘산들바람’(そよかぜ, そよ風, Nostalgic Blues, 1945)이 1945년 10월 전후 최초의 영화로 쇼지쿠에서 개봉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국의 포털정보에는 이 정보가 등장하지 않고 1946년에 ‘스무살의 청춘’(はたちの青春, 1946)을 연출했다는 기록만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그는 여러 작품을 이후에도 연출했을뿐더러 ‘산들바람’의 경우 유튜브에도 전편 영화를 감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폐한 도쿄를 떠난 나미키 미치코(並木路子)가 고향의 과수원을 가로 지르면서 노래한 ‘사과의 노래’(リンゴの唄)가 크게 히트했다. 이 영화는 현재도 유튜브에 무료로 전편이 공개되어 있는데 ‘そよかぜ’를 검색하면 열람이 가능하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전후 GHQ의 검열을 통과 한 첫 번째 영화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GHQ란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인데 1945년 이후 미점령군 사령부를 뜻했다.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미디어와 영화산업의 민주화를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하는 기구가 GHQ 산하의 시민검열분과(CCD)였고 다른 하나가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산하의 민간정보교육부(CIE)였다. 이중 CIE가 영화검열에 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일본측 제작자는 기획 및 시나리오 등을 모두 미리 영어로 번역하여 허가를 받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완성된 영화 역시 CCD에서 두 번째 검열을 받았다. CIE의 중심은 미국 민간인들이었으나 CCD는 군무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들의 목적은 군국주의적이거나 봉건주의적인 잔재들 그리고 미국에게 불이익을 주는 영화들을 엄격하게 걸러냈다. 물론 사회주의 계열의 평론가들은 이러한 검열을 사실상 군사 검열이며 반공산주의를 걸러냈다고 폄하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일본영화 관련 서적들이 프랑스에 집중되어 있고 이 작가들이 대부분 좌파지식인인 경우가 많아서 일어난 오해로 실제로 일본문화 전반에 드러난 국가주의나 맹목적 애국주의, 봉건적 충성심, 당연한 복수, 할복으로 대표하는 자살에 관한 긍정적 묘사, 잔인무도한 폭력 등 항목이 모두 포함된 검열이었다. 당시 CIE 과장이었던 데이비드 콘티(David Conte)가 전쟁중 일본영화들을 분석한 이후 작성한 ‘제작 금지 규정 리스트’를 근거로 한 것으로, 1945년 11월 13항에 걸쳐 검열기준을 만들었다. 오늘날 이따금 일본이 다시 군국주의 시절로 회귀하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는 시선들이 많은데 이런 검열기준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미군의 점령 초기 사회개혁을 통해 농지개혁이나 재벌해체가 이뤄지고 후기에 반공산주의가 부각되는 시기 가장 혜택을 누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일본공산당(PCJ)’이었다. 이들은 이념적으로 전쟁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영화들이 장려되는것을 역으로 이용했다. 이마이 타다시(今井正), 가메이 후미오(亀井文夫), 야마모토 사츠오(山本薩夫) 등이 공동 연출한 전쟁과 평화(戰爭と平和, War And Peace, 1947)가 그 대표작이다. 이마이 타다시는 전쟁 후 좌익의 독립영화 제작 운동을 촉발시킨 좌파 이데올로기의 전도사였고 가메이 후미오는 일본에서 기록영화(다큐멘터리)를 가장 먼저 만든 감독이었으며 야마모토 사츠오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기로 유명한 감독으로 한국에는 ‘하얀거탑(白い巨塔, 1966)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이들은 1948년에 극에 달한 도호 쟁의(東宝争議)의 리더 중 하나로 회사에 맞섰으며 이중 야마모토 사츠오는 1948년 도호(東宝)를 떠나 공산주의 비평가인 이와사와 아키라 등과 함께 신세이에이가샤(新星映畵社)를 설립한 후 폭력의 거리(暴力の街, 1950)등을 만들었다. 동시에 미군정의 검열에 저항하는 이른바 ‘레드퍼지(レッドパージ: 연합군 점령 하의 일본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부 총사령관의 지령에 의해 일본공산당 소속 당원이나 동조자를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에서 해고한 움직임)’ 영화인들의 조직적 저항을 이끌어 내려 했다. 이 전통은 1955년 야마모토 프로(山本プロで)의 설립으로도 이어져 전국농촌영화협회의 작품인 ‘짐수레의 노래’(荷車の歌, 1959), 일본 교원 노동조합(日教組)의 재정적 후원으로 제작한 ‘인간의 벽’(人間の壁, 1959) 등으로 투쟁적인 영화들을 만들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일본 공산당은 자신들의 나라가 전범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미군정과의 투쟁을 자신들의 세력 확장 수단으로 삼게 되는데 단순한 미군정에 대한 거부감, 패망에 대한 허탈감에 겹쳐 ‘반미(反美)’정서가 일어나자 이를 드러내 놓고 이용하는 기민함을 보인다. 이러한 역설은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 사회의 병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 영화인들 대부분이 독립프로덕션의 한계를 절감하는 한편,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는데 노동조합의 지지와 압력은 결국 또 다른 자신들만의 ‘검열’을 통해 스토리의 앞뒤가 맞지 않는 파업, 농촌운동 등 장면을 꾸며 넣도록 하여 반감을 샀다. 이 때문에 영화인들이 다시 메이저 영화사로 복귀하게 되는데 1951년 도에이(東映) 등의 설립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았다.<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일본의 선구자들⑤/ 도쿄 디벨로퍼
... 일본 국토교통성은 매년 3월 하순 일본 전역의 땅값(공시지가)을 발표한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3대 권역 등 2만1500 곳이 그 대상이다. 일본에서 가장 비싼 땅은 도쿄의 긴자(銀座)에 있는 야마노악기(山野楽器) 긴자본점이다. 이곳의 지가(地價)는 매년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도쿄 가장 비싼 땅값...엽서 크기 한 장에 950만원 국토교통성이 발표한 올해 자료에 따르면, 야마노악기의 땅값은 사상 최고가인 1㎡당 5720만엔(6억3500만원, 지난해는 5550만엔)을 기록했다. 이를 평으로 환산하면 1평당 1억 9000만엔(21억 1000만원)이다. 이를 손바닥 크기로 쪼개보면 어떨까. 일본시사매체 주간겐다이는 “엽서 1장 크기의 땅값이 85만엔(944만원)이라니 놀랍다”(ハガキ1枚の大きさで約85万円というから驚きだ)고 했다. 매년 치솟는 땅값만큼, 도쿄의 스카이라인도 해마다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를 만들어 가는 그 뒤에는 일본 부동산 개발업체 모리빌딩그룹이 있다. 일본의 선구자 시리즈 5편은 부동산 디벨로퍼(개발자) 모리 미노루(森稔: 1934~2012)이다. 도쿄 스카이라인 바꾼 디벨로퍼 모리 미노루 회장 ‘모리빌딩’이라는 회사를 세운 건 아버지 모리 다이키치로(森泰吉郎:1904~1993)지만, 실질적인 창업주는 그의 차남 모리 미노루였다. 모리 미노루는 2012년 3월, 심부전증으로 사망(당시 77세)했다. 닛케이비즈니스는 당시 “도쿄를 만든 남자, 모리빌딩의 모리 미노루 회장이 사망했다”(東京 を作った男 森ビル・森稔会長死去)는 제목을 달았다. 1959년 도쿄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 회사에 이사로 입사한 모리 미노루는 상무(1964년), 전무(1969년), 사장(아버지가 사망하던 해인 1993년)직에 올랐다. 그는 도쿄의 과밀화 해결책으로 고층빌딩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빈 토지를 사들여 공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도쿄 롯폰기힐즈 (Roppongi Hills) 단지 개발로 이어졌다. 도쿄의 스카이라인을 바꾼 것이다. 이후 일본을 넘어 101층의 중국 상하이국제금융센터(Shanghai World Financial Center)를 건립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모리가(家)의 재산 불리기가 시작된 그의 아버지 모리 다이키치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도쿄 미나토 구에서 태어난 다이키치로의 집은 쌀 도매상을 했다. 대학(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하고 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태평양전쟁 후부터 본격적인 투자업에 나섰다. 예를 들면, 미나토 구의 토지를 사들여 빌딩 사업에 진출한 것. 소유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에 대출을 받았고, 그 돈으로 새로운 부동산을 사는 방식으로 사업을 늘려갔다. 쌀도매상에서 일본 최고의 부동산 개발 업체로 그러다 1949년에는 요코하마 시립대 상학부의 교수를 맡게 되었다. 2가지 일(사업, 교수)을 병행하던 다이키치로는 1955년 모리빌딩의 전신인 모리부동산을, 다음해에는 모리 트러스트‧홀딩스의 전신인 ‘태성’(泰成)을 설립했다. 그가 대학을 떠나게 된 건 1950년대 말이다. 1957년 학장선거에 출마했다가 ‘학자와 기업인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2년 후인 1959년 학교를 사직했다. 부동산 사업의 지나친 확장은 우려도 낳았다. 1970년 경에는 자본금 7500만 엔에 차입금이 58억 엔까지 치솟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물경기가 도와줬다. 버블 경기 등 고도 경제성장기와 맞물리면서 도시에 오피스 기능이 집중됐던 것. 사업은 확대일로를 걸었다. 포브스에 따르면, 다이키치로는 1991년(순자산 150억 달러)과 1992년(순자산 130억 달러) 전 세계 부호 1위에 올랐다. 모리빌딩그룹을 일군 모리 다이키치로는 1993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약정한대로, 재산의 일부인 30억 엔을 게이오대학에 기부했다. 그런 다이키치로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게이오대 교수이던 장남은 그보다 3년 먼저인 1990년 사망했다. 대학 기부도 그런 장남을 위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이키치로 사망 당시, 차남인 모리 미노루(森稔)와 3남 모리 아키라(森章)는 모리빌딩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다. 차남과 3남은 그렇게 아버지의 부동산 제국을 물려받았다. 모리빌딩그룹은 모리 다이키치로 사망으로, 모리빌딩과 모리빌딩개발로 분리됐다. 차남 모리 미노루가 전무에서 ‘모리빌딩’의 사장으로 취임했고, 상무였던 3남 모리 아키라는 ‘모리빌딩개발’의 사장직을 맡았다. 5년 동안 분할통합을 거쳐 모리빌딩개발은 다른 회사가 되었다. 이 회사는 이후 ‘모리 트러스트’로 이름을 변경했다. 참고로 모리 미노루 전 회장은 아내와 함께 롯본기의 명물 모리미술관을 운영했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99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일본차 수장들이 사찰서 회동한 이유
... 도요타 자동차가 스바루(SUBARU)에 추가 출자 방침을 굳혔다”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27일 보도했다. 도요타와 스바루는 이미 자본 제휴를 맺고 있는 상태다. 니혼게이자이는 “출자 비율을 현재의 약 17%에서 20%이상으로 끌어 올려 경영에 영향력을 더 미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스바루도 새롭게 도요타의 주식을 취득, 상호 출자한다는 계획이다. 도요타 아키오-스즈키 오사무 등 4개사 수장 나가노현에 있는 사찰 성광사(쇼코지)에 모여 “앞으로 자동차업계 도요타 중심으로 재편” 앞서 도요타는 지난 8월 28일 스즈키 자동차와도 자본 제휴를 발표했다. 도요타가 1조1000억 원을 출자해 스즈키의 주식을 5% 보유하고, 스즈키는 도요타 주식 0.2%를 갖기로 했다. 이로써 이로써 다이하츠와 히노를 자회사로 거느린 도요타는 스즈키, 스바루와 모두 관계를 맺게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18일 도요타의 도요타 아키오(63) 사장, 스즈키의 스즈키 요사무(90) 회장을 비롯 마쓰다, 스바루의 수장들이 나가노현에 있는 성광사(聖光寺, 쇼코지)라는 사찰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고야는 잘 알려진대로 도요타 자동차의 거점 도시다. 업계의 수장들이 이 사찰을 방문한 건 왜일까. 성광사는 1970년 도요타와 도요타 판매 회사가 교통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설립한 절이다. 특히 도요타 자판 사장이던 가미야 쇼타로(神谷正太郎)의 제안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런 성광사는 도요타그룹 관계자들이 정신을 공유하는 중요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도요타 임원진들은 매년 여름(7월) 이곳을 방문한다. 방문 행사를 ‘하계대제’(夏季大祭)라고 부른다. 이날 마이크를 잡은 아키오 사장은 “마쓰다, 스바루, 스즈키 사장들도 왔다”며 “우리가 모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쟁관계이면서 협력을 제안한 것이다. 27일 니혼게이자이는 “앞으로 도요타 중심으로 업계 재편이 진행될 것”이라고 전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9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한일경제인회의... 공동성명 내용은 왜 다를까
... <사진= 제51회 한일경제인회의 행사 모습. (YTN 영상 캡쳐).> ... 한일 최고경영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양국의 경제협력 증진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제51회 한일경제인회의’ 행사가 9월 24~25일 서울에서 열렸다. 한일 간 대표적인 민관합동회의인 ‘한일경제인회의’는 1969년 1월 27일 첫 회의(서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열렸다. 현 재 한일 양국이 정치, 외교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개최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클 수밖에 없다. 행사를 주관한 단체는 한일경제협회(KJE)와 일한경제협회(JKE)다. 둘다 사단법인이다. 각 협회는 회장 아래에 각각 8명의 부회장을 두고 있다. 한일경제협회의 회장은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일한경제협회의 회장은 사사키 미키오(佐々木幹夫) 미츠비시상사 특별고문이 각각 맡고 있다. 한일경제협회와 일한경제협회는 행사 후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 단체 간의 공동 성명문은 대체로 일치하지만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먼저, 한일경제협회는 공동성명문에 한일간의 갈등 상황을 언급하지 않았다. 성명문 내용이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일한경제협회의 공동성명문은 훨씬 구체적이다. 현실을 먼저 짚어주고 더 깊은 협력적 관계 모색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 공동 성명문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 한일 양국의 정치, 외교 관계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극히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며, 경제면에서도 문화, 스포츠 교류 등의 분야에서도 유감스럽게 한일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양국 민관의 선배들이 쌓아 올린 호혜적이고 좋은 경제 관계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깊이 우려한다.” 차이점은 또 있다. 한일 공동성명문이 참가 인원수를 ‘300여 명’이라고 뭉퉁그린 반면, 일본 공동성명문은 ‘일본 106명, 한국 203명 참가’라고 정확히 밝히고 있다. 양 단체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자료 내용을 서로 비교해 봤다. ... <사진= 제51회 한일경제인회의 행사 모습. (KBS 영상 캡쳐).> <한일경제협회 공동성명문 전문> 제목: 한일의 보다 밝은 미래와 발전을 위하여, 서로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한일 양국 경제인(한국대표 김 윤 한일경제협회 회장, 일본대표 사사키 미키오 일한경제협회 회장)들은 격동하는 국제정세 속에서도 한일의 보다 밝은 미래와 발전을 위하여, 서로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양국 경제인은 △제3국 한일협업의 지속 추진, △한일 양국의 고용문제·인재개발 등 양국 공통과제해결 협력, △한일 경제·인재·문화 교류의 지속·확대, △차세대 네트워크·지방교류 활성화 등 한일의 우호적 인프라의 재구축,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성공개최 협력 등을 위해 상호 협력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특히, 양국 경제인은 공통의 사회적 과제에 입각하여, 양국 경제계가 협력하여 문제들을 해결하고, 국경없는 협업 확대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꾀하기 위해, 기탄없는 의견을 나누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아울러, 양국 경제인은 한일의 호혜적인 경제 관계의 유지·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외교 관계의 복원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또한 양국 경제의 상호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외교 관계가 양국 기업 협력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양국 정부의 대화 촉진에 의해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기 위한 적절한 조치가 강구되기를 강력히 요망했다. 제51회 한일경제인회의에 참석한 300여명의 양국 경제인들은 2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이틀간의 회의일정을 마쳤다.> ... <사진= 제51회 한일경제인회의 행사 모습. (YTN 영상 캡쳐).> ... <일한경제협회 공동성명문 전문> 제목: 「激動の世界経済における日韓協力」 第51回日韓経済人会議は、2019年9月24日と25日の両日にわたって大韓民国ソウル特別市において開催され、日本側からは佐々木幹夫団長以下106名、韓国側からは金鈗団長以下203名が参加した。 昨年5月、東京で成功裏に開催された記念すべき第50回日韓経済人会議以降、国際情勢は大きく揺れ動いている。欧州では英国のEU離脱(BREXIT)問題が長引き、アジア太平洋地域では米中の通商摩擦がサプライチェーンの連関に負の影響を与え始めている。 また、中東においては、最近、地政学的リスクが一層高まり、日韓のエネルギー資源輸入にも大きなリスクを投げかけている。 また昨今、日韓両国の政治・外交関係は出口の見えない極めて厳しい状況が続いており、経済面においても、文化・スポーツ交流等の分野においても、残念ながら日韓関係は緊張の連続である。我々は、これまで両国官民の先達が築き上げてきた互恵的、良好な経済関係が危機に瀕していることを深く憂慮する。(위 한글 번역 부분) 我々日韓両国の経済人は、このような厳しい時期にこそ、これまで発展させてきた経済交流の紐帯が切り離されてはならないとの信念を確認した。両国を繋ぐ架け橋として、両国経済界は 未来志向の原点に立ち返り、潜在的な成長力と補完関係を極大化する方策を講じなければならない。 我々はこうした認識を共有し、昨24日と本日25日の両日、「激動の世界経済における 日韓協力」をテーマに、真摯に未来志向の両国経済関係について討議した。共通する社会的課題を踏まえつつ、両国経済界の協力により諸問題を解決し、ボーダーレスな協業 拡大により新たな飛躍を目指すべく、忌憚なく意見を交わした。 一方、アジアの安定、そして発展に向けては、中軸となるべき日韓両国の政治・外交とビジネス環境が良好に維持されることが重要であり、その為には我々経済界が民間の立場で経済・人材・文化交流を通じて、両国経済界の信頼関係と両国民のスムーズな往来が醸成されるよう活動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の決意に至った。 他方で、日韓の互恵的な経済関係の維持・発展のためには、政治・外交関係の修復が必要であるとの認識を共にした。 両国経済の相互発展を図るため、政治・外交関係が両国企業の協力の障害とならないよう、我々は両国政府の対話の促進により新たな日韓関係の地平が拓かれるための適切な措置が講じられることを強く要望する。 第51回日韓経済人会議で両国の経済人は、日韓のより明るい未来と発展のために、下記のような課題に関して連携して推進していくこととした。 1.第3国における日韓協業の継続的推進 2.両国の雇用問題、人材開発等に関する共通課題の解決に向けた協力 3.経済・人材・文化交流の持続・拡大 4.次世代ネットワーク・地域交流の活性化等、日韓の友好的インフラの再構築 5.東京オリンピック・パラリンピックの成功に向けた協力 なお、次回の第52回日韓経済人会議は2020年に日本において開催することとした。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91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일본의 선구자들②/ 지퍼의 제왕
... 일본인들은 제품이나 시설 등 가장 먼저 만든 사람에게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의 아버지’, ‘~의 왕’, ‘~의 신’이다. 오늘날의 일본을 이룬 각 분야의 선구자를 찾아가는 코너를 마련했다. 첫 회 ‘지하철의 아버지’(地下鉄の父) 하야카와 노리츠구(早川徳次)에 이어 2회는 ‘지퍼의 제왕’ 요시다 타다오(吉田忠雄)다. <편집자주> 전 세계 절반 이상 일본 브랜드 YKK 지퍼 사용 요시다 타다오(吉田忠雄)라는 창업자가 만든 회사 YKK는 Yoshida Kogyo Kabushikikaisha 이니셜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옷에 지퍼가 달려 있다면, 상표를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십중팔구 YKK라고 적혀 있을 터. 지퍼(zipper)=YKK. YKK는 지금 지퍼의 대명사나 다름없다. 옷, 신발, 가방 등에 붙어있는 지퍼 위의 브랜드 YKK는 일본 회사의 이니셜이다. 바로 요시다 쿄고 가부시키카이샤(吉田工業株式会社: Yoshida Kogyo Kabushikikaisha)라는 기업이다. 이 회사를 창업한 이는 요시다 타다오(吉田忠雄1908~1993). 초기 회사명은 창업자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본격적으로 일본 '지퍼의 제왕' 요시다 타다오를 알아보기 전에, 지퍼 역사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퍼라는 단어 처음 사용한 이는 버트램 워크 처음 지퍼(zipper)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은 굿리치 컴퍼니(Goodrich Company) 사장이던 버트램 워크(B.G Work)로 알려져 있다. 1923년의 일이라고 한다. (브리태니커: In 1923 B.G. Work of the B.F. Goodrich Company gave the name zipper to the slide fastener that had just been adopted for closing overshoes.) 지퍼 발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 발명자 휘트컴 저드슨(Whitcomb L. Judson:1846~1909)과 만난다. 그가 미끄러져 움직이는 지퍼(Clasp Locke)를 고안해 특허를 받은 것이 1893년이다. 뚱뚱해서 신발 단추 어려워했던 지퍼 발명가 몸이 뚱뚱했던 저드슨은 매일 허리를 굽혀 신발 단추를 풀고 채우는 것을 힘들어 했다고 한다. (A fat man, Judson was fed up with the ordeal of bending over to button and unbutton his boots every day) 그런 저드슨은 같은 해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출품해 루이스 워커라는 사람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냈다. 둘은 1894년 유니버셜 패스너 컴퍼니(Universal Fastener Company)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1906년 기드온 선드백(Gideon Sundback)이라는 스웨덴 사람이 저드슨의 회사에 일하게 되었고, 1913년 그는 플라코(Plako)라는 제품의 특허를 출원했다. 이것이 현대식 지퍼의 초기 모델이라고 한다. ‘지퍼에서 자동차’(샤론 로즈& 닐 슐라거, 민음인)라는 책은 지퍼 역사의 발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퍼 발전에 크게 기여한 나라는 독일 <지퍼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에 다시 변혁기를 맞았다. 독일의 지퍼 공장이 파괴되고 금속도 구하기 어려워지자 서독 회사인 옵티버크(Opti-Werk GmbH)가 새로운 플라스틱 연구를 했고 많은 특허를 출원했다. 독일의 루르먼(J.R. Ruhrman)이 플라스틱 사다리형 체인을 개발해서 특허를 획득했고, 1940년에 앨던 핸슨(Alden W. Hanson)이 플라스틱 코일을 지퍼의 천에 재봉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후 거바크(A. Gerbach)와 윌리엄 프림벤시(William Prym-Wencie)사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톱니 모양의 플라스틱 와이어를 개발했다. 이제 지퍼가 옷에 재봉되기 시작했다.> <사진= YKK 창업자 요시다 타다오(吉田忠雄)와 그의 고향 도야마현에 세워진 YKK센터파크.> YKK 창업자 요시다 타다오의 삶 자, 그럼 YKK 창업자 요시다 타다오(吉田忠雄)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1908년 도야마현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도자기 수입상 가게에 취직했다. 이 가게는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대공황의 영향으로 도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게 요시다 타다오에겐 전환점이 됐다. 당시 그 가게가 지퍼 수입도 하고 있었는데, 요시다 타타오는 창고에 있던 대량의 지퍼를 매입, 판매해 그 돈으로 도쿄에 회사(サンエス商会)를 세웠다. 스물다섯 때였다. 요시다공업, 1946년 YKK로 상표 정해 회사의 성장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전쟁의 시기가 돌아왔다. 전시 통제령에 따라 지퍼의 재료가 되는 구리와 알루미늄은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태평양 전쟁에서 공장이 모두 불타버리자 요시다 타다오는 고향으로 돌아가 지퍼 생산을 재개했다. 회사 이름도 요시다공업(吉田工業) 주식회사로 바꿨다. 1946년엔 상표를 YKK로 정했다. 이는 요시다공업 주식회사를 영어(Yoshida Kogyo Kabushikikaisha)로 풀어쓴 이니셜이다. 당시 손으로 직접 만들던 지퍼는 품질이 좋지 않았다. 요시다 타타오는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동제조기를 미국에서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무모했다. 회사의 자본금이 500만엔 이었는데, 자동 제조기의 가격은 무려 1200만 엔에 달했던 것.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계를 구입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결정은 옳았다. 회사는 성장을 거듭, 창업주 사망 이후 현재 전 세계 72개국에 108개사를 거느린 글로벌 기업으로 커졌고 10만 곳이 넘는 고객사를 보유하고 있다. 1993년 타계한 요시다 타다오 회장은 생전에 “하나가 불량품이면 YKK 지퍼는 전부 그렇다고 생각하라”며 제품의 질을 강조했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90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