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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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책 백부 (孫策 伯符) A.D.175 ~ 200
삼국지 좋아하는 이들은 이유야 제각각이겠지만 가장 좋아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손책". 무수한 인물들 중 하필 단명하여 임팩트 부족한 손책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후술키로 하고 일단 썰을 풀어보기로! 삼국을 형성하는 세 나라들 중 손가의 왕국 오(吳)의 대표 군주는 당연 손권. 전성기를 이끈 군주이며 최장기간 집권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좋던 나쁘던 다수의 이슈들을 만들어낸 관계로 임팩트가 상당하다. 그러다보니 오의 초대군주로 잘못 아는 이들도 많다. 허나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국가의 삼대요소를 아시는지? 어릴 때 수업시간에 배운 기억이 나는데 "국민", "영토", "주권" 바로 이 셋. 허나 저 셋이 있어도 저 셋을 하나로 뭉치게 이끄는 리더나 보스가 없다면 저 셋이 있어도 국가의 개념을 부여하기 모호하다. 어떠한 형태의 국가건 간에 위에서 언급한 저 국가의 삼대요소 외에도 반드시 있고, 없어선 안될 것이 바로 그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 지도자의 급에 따라 국가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아무리 넓은 영토와 그 영토내 거주민들이 있어도 하나의 지도자 하에 결집되지 못하고 각 개인이나 또는 가족, 모여 사는 군락의 이익만 주요하게 되면 이는 국가로 형성되지 않는다. 손가세력이 공식국가의 기능을 발한 것은 손권이 오라는 국호를 정하고 수도를 정한 후 왕위에 오르면서부터이며 그전은 그저 세력이 큰 한 군벌집단 또는 지방호족들 대표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오"라는 손가 왕국의 첫 군주는 손권이 맞지만, 그 이전에 손가를 중심으로 뭉쳐 타세력의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고 국가의 삼요소를 모두 갖춘 실질국가의 기능을 발한 것은 손책이 시초. 덧붙여, 그럼 그 손권과 손책의 부친 손견이 최초 아니냐는 분도 계실 수 있지만, 손견은 생전에 원술의 부하였고 독립세력의 수장인 적은 없다. 어린시절, 아버지인 손견과는 그닥 추억이 없는 가련한 장남이였다. 부친은 원술 휘하의 가장 용맹한 맹장으로서 전투에 바빴고, 비전투시도 원술의 근거지에서 대부분을 보냈다. 손견은 가족을 원술세력의 중심지이자 당시 번화한 대도시 중 하나인 수춘에 머물게 했으나 집에는 자주 못 가는 전형적 직업군인 아빠였다. 어린 손책은 뭐 얼마나 잘났던건지는 별도 기록 없지만 훗날 의형제까지 맺는 주유가 손책의 명성을 듣고 교우관계 갖고자 손책을 방문했을 당시 손책은 고작 10살(....) 그러고보니 손책과 주유가 동갑, 10살 어린이의 명성 듣고 그 어린이를 친구추가하러 온 주유도 10살.... 당시 중국 금수저 어린이들의 리얼 SNS에 놀랄 따름. 이후 부친 손견이 원술V유표간 전투에서 전사하자 장례 치르며 본격 소년가장이 되고, 저 때는 직위를 세습하였는데 손견의 직위는 동생 손광에게 넘기고 자신은 가족을 돌보는데 전념한다. 19세에 원술에게 등용 요청하고 손책의 비범함 알던 원술은 그를 등용, 손책같은 아들 있으면 좋겠다 말하며 애정을 줬다. 그러나 말로는 저래놓고 희대의 인간쓰레기답게 원술은 손견이 이끌던 부하들과 병력은 양도 않고 자력으로 충원토록 했으며, 이후에도 성과에 의해 약속된 태수직을 두 번이나 말 바꿔 다른 이에게 하사했다. (구강 태수, 여강 태수) 이때부터 손책은 원술에게 마음이 뜨고 독립을 결심한다. 여러분들 혹시 '특별시민'이라는 영화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곽도원이 분한 심혁수라는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한다. "관계가 깨져도 결과를 만들어 내는게 프로야." 뭔가 상당히 쿨내나고 간지뻗는 저 말,... 손책 역시 원술과의 신뢰는 사실상 깨졌으나 그 후 오히려 독 품고 전보다 혼신 다해 주변 일대 평정에 나서고 이때부터 그 유명한 손책의 "양민학살"일대기가 시작된다. 물론 원술을 위해서가 아니였다. 거듭된 전투 통해 이를 구실로 독자적인 세력과 병력을 자연스레 확보하고 전투를 거치며 내공을 쌓기 위함이였다. 연의에서는 이 첫 출정 당시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담보로 병마를 빌린 것으로 나오지만, 손견이 소유한 옥새가 어찌 원술에게 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다만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수하이고 자신이 대외적으로 칭찬일색이던 손책임에도 유독 병력양도에 인색했다는 이해 안가던 행태에 비해 양민학살의 시작인 "유요정벌" 당시에는 별 무리없이 병력을 내준 것 보며 큰 거래가 있던게 아니였나 하는 상상이 더해진 듯. 여튼 이리 어렵게 원술에게 양도받은 병력과 부친을 따르던 장수들까지 온전히 이어받은 손책은 사실상 이때부터 독자적인 세력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를 개시하며 수춘인근 군소군벌들이던 유요, 왕랑, 허공, 엄백호 등 용맹함과 저돌성을 드러내준다는 호평과 저런 애들은 나랑 친구들이 가도 평정했을 입에 올리기도 뭣한 세력들이라며 양민학살에 불과하단 혹평이 공존하는 원정들을 차례로 성공! 이렇게 손책은 르브론 제임스가 KBL와서 매경기 50득점씩 해가며 전경기 트리플더블 하는 듯한 원정을 돌 무렵.. 원술은 전국옥새를 빌미로 참칭을 한다. 그러자 이미 원정출발부터 원술에게 마음이 떠 있었고 심지어 부친의 유품을 자기에게 돌려주긴 커녕 그걸 계기로 참칭하니 손책은 원술에게 부당함을 따지는 서찰을 보내고 공식적인 독립을 하게 되며 이때부터의 손책은 이전까지 단지 맹장인 손책과 다른... 한 세력을 이끄는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크게 부각된다. 원술에게서 독립한 손책 시즌2의 시작은 순조로웠고 마침 당시의 천자였던 헌제로부터 작위와 함께 대역죄인 원술토벌의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격의 조서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헌제는 이미 조조가 천자 옹립 이후 그냥 바지사장일뿐 실세는 조조였고 원술과 좋지 못하던 감정 갖던 터에 그가 참칭까지 하여 그대로 넘길 수 없음은 물론, 당시 손책이 강동을 휘젓고 다닌다는 소문에 이이제이 하려던 전략적 선택이 담긴 칙서를 내린 것. 허나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손책 역시 이때부터 실리 이상 명분의 중요성을 깨닫고 칙서 가져온 칙사에 온갖 싸바를 쳐 본래 받기로 한 직위 이상의 직위를 받는다. 이후 손책 세력은 급성장 하며 실상 손권이 지니고 있던 강동영토의 대부분은 이때 손책에 의해 형성된다. 당시 강동(강남)은 중원으로 일컫던 양쯔강 이북에 비해 더운 기후로 인한 잦은 풍토병, 수해, 억센 소수민족들 등으로 개발이 늦던 곳이였다. 인구도 많지 않던터라 중원처럼 십수만의 대병력 운용할 인력도, 그 병력 뒷받침할 자원도 부족하여 그때까지 조정에서도 거의 버린 땅에 준했으나 손책은 그 강동일대를 모두 자신의 기치 아래 규합하여 총력 모으는데 성공한다. 이 정도까지 예상치 못하게 손책이 성장하자 조조도 당황한다. 당시 하북을 비롯한 중원일대가 아직 평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강동까지 견제해야 한다면 큰 군사적 부담이 되기 때문이며, 실제로 손책 역시 조조가 원소와 결전을 벌이게끔 원소와 동맹을 맺고 이를 유도 후 두 세력이 대치하면 병력을 북진시켜 허창을 공격하여 천자를 자신이 옹립하는 것까지 마스터플랜을 세운 상태였다. 놀라운 것은..... 천자를 옹립하는 것의 전략, 명분적 가치를 제대로 판단한 군웅은 당시 이미 진작에 사망한 동탁을 제외하면 조조와 손책 둘뿐이였다는 것. 그 외의 군웅들은 애시당초 천자 근처도 못 갈 세력이거나, 여건이 여의치 않았고 강대한 세력 지녔던 원소조차 천자옹립은 로우리턴 하이리스크로만 생각했고 자신의 야망과 오버랩되어 차라리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쪽으로 변질, 이는 원술도 마찬가지. 하지만 조조는 어찌보면 힘의 차이를 떠나 공적으로는 동등한 군웅들 사이에 우위를 점하는데, 또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데 있어 유명무실 해졌을지언정 상징성은 아직 유효하던 황실의 정통성을 적극 활용했고 이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눈뜬 또 다른 인물이 바로 손책이였던 것. 이렇듯 질적, 양적으로 손책이 제대로 된 견제자 하나 없는 강동에서 급성장하자 조조도 그와 인척관계를 맺고자 시도하나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려는 손책이 과한 욕심 부리며 자신을 무려 "대장군"에 봉해 달라고 청하자, 괘씸함에 분노한 조조는 손책과 우호책 펼칠 것을 포기한다. 그러던 어느 날.... 후한 말 당시 인기 역사서이던 "춘추좌씨전"에 능통한 "고대"라는 학자의 이야기를 들은 손책은 그를 초빙해 강연을 청한다. 당시의 춘추좌씨전은 줄여 춘추전, 좌씨전 또는 좌전 등으로 불려진 "공자"가 지은 노나라 역사서에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인 "좌구명"이란 자가 부연설명인 주석을 달아놓은 지금의 삼국지같은 느낌의 서적이였는데 인기가 굉장했다. 그러나 강연 자리에서 고대가 본의 아니게 손책의 심기를 거슬리자 불같은 손책은 고대를 투옥시켰고, 이에 많은 백성들의 고대석방을 요하는 성화를 본 손책은 자신 이상의 민심 얻는 것에 분노해 고대를 죽인다.....;;; 연의에서는 이 이야기가 도사 "우길"을 죽인 것으로 각색 되었는데 애초에 우길 자체가 실존여부 명확치 않은 인물이며 손책과 조우했다는 건 더더욱 분명치 않다. 당시 손책은 영지 내에서 꽤 붐이던 신흥종교 중 하나인 "태평도"를 탄압 중이였는데 우길이 이 태평도에서 비롯된 인물이다보니 태평도측에서 손책을 폄하하고자 그의 죽음과 맞물려 퍼뜨린 루머라는 학설이 있다. 고대 에피소드를 보더라도 손책은 유독 다른 제후들에 비해 자신의 영토내에서 민심이 자신 외 다른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매우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제후들이 군사적 활동을 하려면 징병, 군량차출 등 1차적인 부분은 물론 원정도중 내란에 의해 후방이나 본진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려면 영지내 민심안정은 필수였다. 더구나 손책의 본거지는 긴 시간 본격적 통치자가 없었고 그런 이유로 강동일대는 지역별 일정 규모 이상의 경제력과 생산력을 지닌 지주나 상인같은 호족들이 저마다의 세력을 펼치던 곳이였기에 성미 급하고 갈길 바쁘던 손책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무력에 의한 민심규합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듯. 하북에서는 조조, 원소가 결전을 벌이고자 전시체제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손책은 위의 언급대로 조조의 배후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고 헌제를 옹립해 자신이 후한의 정통성이라는 명분까지 손에 넣고자 하는 엄청난 플랜을 세운다. 헌데 이 계획을 일전에 손책에게 박살난 후 결국 손책을 모시게 된 "허공"이 조조에 서찰 보내 알린다. 서찰내용은 헌제에게 고하는 내용이였으나 어차피 당시 천자에게 가는 모든 서찰들과 상소는 조조의 컨펌 받고 대개 짤리거나 첨삭되어 갔기에 실상 조조에게 보내는 것이나 진배없는 서찰이였다. 문제는 이게 조조에게 못가고 인터셉트되어 손책에게 간 것....;;; 손책은 허공을 불러 분노의 브레쓰 뿜다 결국 분을 못 이기고 자신의 손으로 허공을 목 졸라 죽이는데 당시 기록에 의하면 손책이 허공의 목을 잡고 들어올려 조여 죽였다고 하니... 영화에서나 나오는, 괴력의 소유자가 성인남성을 그대로 목 잡고 들어올려 목 졸라 죽이는 그런걸 했다는거다. 당시 성인남성 평균신장이 140cm후반에서 150cm초중반 가량, 허공은 그래도 호의호식해서 더 컸다해도 150cm중반이라 치면 적어도 50kg ~ 60kg 가량이라 생각하면 목 졸려진 몸부림 속에서도 결국 교살을 했다는 사실은 손책의 엄청난 괴력을 보여준다. 역사서들 속 손책의 사망날짜도 정확히 나와 있고 현대력으로 옮기면 200년 5월 5일에 사망. 관우, 장비같은 슈퍼히어로들조차 어찌보면 개인신상의 기본정보인 생몰연대가 미정인 경우도 많거늘 손책은 정확한 몰연대는 물론 날짜까지 남았음에도 체구 묘사는 없다. 이 말은 손책이 피지컬 자체는 평범했다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괴력에 대한 기록들이 남은 것으로 보면 힘 자체는 진짜인데, 과학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 근력과 체력을 지니려면 불가항력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근육량이 필요하며 자연스럽게 체격이 어느 정도 이상은 되어줘야한다. 큰 힘을 내기 위한 크코 강한 근육과 인대가 버티려면 그만큼 크고 강한 골격이 기반되어줘야 하기 때문. 그래서 관우, 장비처럼 여덟 자, 아홉 자 운운할 큰 체구는 아니였어도 최소한 성인남성 평균신장쯤은 즈려밟았을 것으로 보인다. 여튼간에 저튼간에... 저렇게 죽인 허공. 듣보잡 취급받는 잉여쩌리건만 그래도 헛살진 않았는지, 그가 살해 당함에 분노한 허공의 식객 3인방은 목숨 버릴 것을 각오 후 손책을 암살하기로 한다. 이들은 수시로 사냥을 하는 손책이 사냥터에서 혼자가 되는 틈을 노리기로 한다. 예부터 동서양 막론하고 "사냥"은 암살하기 최적의 기회가 되곤 했는데.... 이유는, 일단 사냥이 뭔가? 동물을 잡는 게 사냥이다. 동물은 어디에 있나? 드넓은 벌판이나 도심 한가운데가 아닌 산 속이나 숲이다. 저런 곳은 암살 대상이 경호인원들에게 잘 보이지 않기 십상에, 암살자들도 몸을 숨기거나 도주가 용이하다. 게다가 사냥감 쫓아 정신없이 말 달리다보면 경호인원들과 떨어지기 쉽다. 일단 암살의 대상이 될 정도의 고관대작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말을 타며 사냥이 취미일 정도면 승마실력도 보통 이상이다. 준마 + 평타이상 승마실력 + 집중 달리기 이 삼단콤보가 겹치면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경호인력들과 어느 정도 이상의 간극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그래서 손책도 어느 날 씐나서 사냥하다 왠 낯선 병사들 보고 누구냐며 물었는데 식객 삼인방이 자신들은 한당의 병사인데 사슴 잡고자 현위치 대기 중이라 뻥 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책은 한당 휘하 병사들의 얼굴을 모두 아는데 니들은 한 번도 본적 없다며 대뜸 그중 한 놈을 활로 쏴버린다. 한당의 병사가 손꼽게 적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같으면 그래? ㅅㄱ 하고 갔을 거 같은데 뭔 촉이 그리 좋은지 수상함 느낀 후 바로 킬링에 나선 비범함에 놀랄 따름.... 허나 죽기 각오 후 나선 삼인방은 한 명이 갔지만 둘 중 하나가 활로 헤드샷을 날린다. 이 화살은 손책의 아구창을 꿰뚫었고 그때 마침 뒤쫓아온 경호병력들에 의해 이 식객 둘은 골로 간다. 여기서 일단 "식객"이 무엇이냐? 허영만의 만화에 나오는 그 식객은 아니다. (한자는 같다.) 일종의 프리랜서다. 완전히 종속되어 주종관계를 맺는다기보다 서로 합의하에 일정기간 의탁하며 임시적 상하관계를 맺는 것이지만 구체적인 계약서를 작성하는건 아닌지라 합이 잘 맞으면 그대로 주종관계가 되기도, 식객인 상태로 쭈욱 가기도 하고 뭐 그랬다. 암살시도는 실패했으나.... 화살은 하필 그냥 화살도 아닌 독화살이였다. 그냥 화살을 얼굴에 맞아도 고통이 상당할텐데 독이 퍼지고 자상을 입은 부위의 피부가 괴사하여 손책의 몰골은 말이 아니였다. 치료를 받았다지만 워낙 민감한 부위였고 이미 크게 손상되어 별 다른 방도도 없었다. 외모에 나름 프라이드 있던 미남자 손책은 흉하게 상한 얼굴에 매우 크게 낙심했고 회복의지를 잃고 만다. 한편으로는 살짝 이해 안가는게..... 물론 얼굴이 심히 손상되는 것은 잘 생기거나 예쁜 이들은 물론, 진짜 좆같이 생긴 이들에게도 적잖은 스트레스임은 맞다. 하지만 나름 한 세력을 이끈 천하를 도모하려는 야심가에 전장을 앞장 서 누비던 맹장이, 얼굴 좀 상했다하여 그 모든 야망과 포부 잃고 낙심하여 회복의지 잃는다는게 나로서는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튼 그건 내 생각이고, 당사자는 안그랬는지... 고작 겨우 만 25세. 우리나이로 26세에 숨을 거둔다. . . . 26세... 지금 현시점 한국의 스물 여섯 남자들을 돌아보면 제대한지 얼마 안되어 복학 후 알바와 학업 병행하며 공무원시험이나 편입준비한다며 뻘짓하고 편의점 알바 뛰며 시급받고 밥 대신 삼각김밥 폐기분 먹고 교수님께 싸바치고 쌍콤쌍콤 여후배들이 콧소리로 '쏜배님~~ 밥 싸주쎄용♡' 소리 들으면 가오 잡으며 학식가서 생색내며 털리는 호구의 모습인데... 손책은 굵고 짧게 할 거 다해보고 그 나이에 죽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스타트 끊은 손가세력 단명클럽의 부회장이 된다. 여느 군주의 죽음이 안그러겠냐만.... 손책의 사망은 실로 강동세력에게 치명타였다. 첫번째. 후계의 부재. 다행히 유언은 남겼다. 당시 손책은 후사가 아직 없었다. 그래서 열 한살 연하인 바로 아래 동생 "손권"을 후계로 정하지만 스물 손권의 당시 나이 겨우 열 다섯..... 물론 주유와 장소에게 안팎의 일을 당부했고 심지어 장소에게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남겼던 유언처럼 손권의 자질이 부족하다 판단되면 직접 세력을 이끌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물론 장소가 정말 그럴 사람이라 판단하진 않았을 듯 싶고 유비의 유언은 제갈량에게 실상 나라를 넘기는 것에 가까운 내용이였고 손책의 유언은 실질적인 권세를 장소에게 넘기는 내용이였다. 여튼 주유와 장소가 잘한들 결국 최종 결정권자는 엉겁결에 보스가 된 열 다섯 소년인 점은 이리저리 벌여놓은 거 많아 갈길 바쁜 손가세력에 큰 핸디캡. 두번째. 호족규합 실패. 손책은 강동지역의 실세였던 여러 수 많은 호족들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규합하던 터였다. 그들을 모두 회유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걸리는 일이였기에 성미 급한 손책은 무력으로 찍어 누르던 중이였는데 이 와중에 손책이 급사하자 호족들은 반발이 거셌고 다시 이들을 달래고 얼러서 뭉치게끔 하는 것이 오 군주의 최대 과업으로 남는다. 이후 오는 국가적 결정시마다 위나 촉은 없는 호족들과의 조율과 타협과정이 필수였고 이 과정은 오가 대외확장은 커녕 현상유지도 벅찬 수성국가가 되는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사실 강동은 호족들에 의해 나름 평화롭게 잘 돌아가던 곳이였으나 난데없는 손책의 등장으로 쑥대밭이 되었던터라 호족들은 손가세력에 대해 적대적이였던 터였다.... 장점이 상당히 많은 다방면에 뛰어난 군주요, 장수였다. 무력은 물론, 판을 크고 넓게 볼 줄 아는 전략기재가 있었고 성격도 활달하며 농담도 제법 잘 했던데다 미남이였다고 한다. 카리스마와 리더쉽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어려서부터 부친 잃고 원술 휘하에서 전장을 돌며 수모 겪느라 인성이 제대로 갖춰질 틈이 없어 그런지 성격 자체가 매우 급하고 거칠었다. 그런 성격, 그리고 아마 알게 모르게 자신의 단명에 대한 촉인지는 모르나 꽤 젊었음에도 매사에 매우 서두르는 감이 강했고, 그리 급하게 본거지를 평정하며 대외정벌을 준비하다보니 무력이 앞서는 악순환이 따른 것. 맨주먹 자수성가의 전형답게 고집도 강했고 승부욕이 과했다. 무시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을 견디지 못 했고 자신이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지 않고 독단대로 하려 했다. 닉네임 "소패왕"... 이는 패왕이라 불리던 항우의 재림이라며 붙은 별명. 마침 강동에서 그 세력이 시작되었다는 점도 같았다. 항우같은 힘과 무용을 가졌다는 의미기에 좋은 뜻 같지만 실은 손책의 단점도 담은 별명이였다. 항우는 생전에 상당히 거칠고 난폭하며 독선적에 잔혹한 성격이였는데 손책의 행보를 보면 이러한 항우의 성격마저 닮아 사람들은 좋은쪽이건 나쁜쪽이건 손책을 소패왕이라 불렀다. 여담으로... 놀랍게도 바둑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둑기보집에 여범과 둔 바둑의 기보가 남아 있다. . . . . 초반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말하자면.... 손책이 나와 "닮았기 때문"이다. 물론 외모가 닮았다는 게 아니라.. 여러 기록과 자료를 접하다보니 장점도, 단점도 그 외 이런저런 특성들도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어딘가 모를 동질감이 많이 느껴졌었다. 깨달은 부분들도 많았는데, 손책의 일처리와 성격은 빠른 성과를 내기에 최적이나, 안정적 결과 얻기에는 부족했으며 우리네 삶이 긴 레이스인 점을 보면 급진적인 면모는 맞지 않다는 점이였다. 여러분들도 자신과 닮았다 생각드는 삼국지 속의 인물이 있으신지?.. 있다면 누구신지ㅎ
나본 관중 (羅本 貫中) A.D.1330? ~ 1400
여기서 다뤘거나 다룰 인물들 중 예전에 다룬, "유일한" 생존인물 정대리 외에 사망인물들 중 가장 최근(?) 인물이자, 유구한 중국역사 속 찰나에 불과하며 의미도 그닥인 삼국시대를 지금의 메이져 에이지가 되는데 큰 공 세운 삼대장 중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 "나관중" 을 한 번 다뤄 보고자 한다. (삼대장 중 둘은 정사의 진수와 그 정사에 주석자 배송지) 처음 제목보고 '응? 나본이 뭐야? 백종원의 프랜차이즈?' 하시는 분도 계실 수 있겠으나 삼국지 속 인물들이 이름 외에 자(字)가 있듯, 나관중의 본명은 "나본"이고 관중은 그의 "자"인데 이거 모르는 분 많으실 듯ㅎㅎ(이하 나관중) 사실, 이 칼럼연재를 시작하며 어찌보면 정사의 저자인 진수와 함께 가장 먼저 다뤘어야 도리였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치고 의외로 기록이 그닥 많지 않은편. 일단 이 사람의 사망연도는 딱 떨어지는 A.D. 1400이나 출생연도는 추정치가 있을뿐 정확하진 않고 고향도 지금 중국 산시성의 타이위안이란 곳쯤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긴 하지만 명확한 고향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게 왜 그러냐? 지금이야 삼국지가 동아시아 최고의 히스토릭 미디어떡밥이지만 나관중 생전에는 서점이 있냐, 도서관이 있냐, 스마트폰으로 검색이 가능했냐.... 인쇄라는 개념도 없어, 책 한 권이 두 권 되려면 누가 붓 가져오고 벼루에 먹 갈아 베껴적어야 하다보니 인기를 얻으며 널리 퍼지는데 막대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삼국지연의가 그 넓은, 그러나 유통망이나 인프라가 개떡인 수백 년전 중국일대에서 인기를 끌쯤, 이미 나관중은 천국에서 삼국지속 실제인물들을 만난지도 한참 이후... 게다가 지금 현재의 중국조차 인적사항등록이 누락된 인간이 있는 마당에, 당시 명나라 초기의 일반인의 기록이 세세히 있을리가 없다. 지금에나 그런 베스트셀러작가가 명망높지... 당시의 명은 당연히 관직에 나가 벼슬살이 하는게 갑이였고 그 이하 여타 직군들은 별 큰 인기나 선망직종이 아니였다. 어렸을적에 어떤 어린이였고 소년이였는지는 모르겠고, 여튼 머리 크고는 위 언급대로 벼슬아치가 최고였던 시절이다보니 나관중 또한, 명나라의 인싸가 되기 위해 과거에 응시를 했었나본데, 낙방했다.....;;;; 심지어 세 차례 이상 내리 낙방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과거는 지금 한국의 공무원 시험 따위와는 댈게 아닌 극악의 난이도여서 벼락치기 좀 했다고 붙는 그런건 아니였어서 수년간 공부했어도 수 차례 물 먹는 사람들이 많은건 사실이였지만, 왠지 뭔가 천재작가 이미지의 나관중조차 여러 번 불합격한건 의외다. 이건 나관중 개인에게는 불행이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에겐 다행인거지..ㅎ 벼슬 나갔으면 삼국지같은거 썼겠나. 게다가 당시 명의 천자였던 "홍무제"는 뭐가 불만인지 수틀리면 벼슬아치들을 죽여대던 때여서 홍무제손에 킬된 벼슬아치가 10,000 명이 넘었다하니 어쩌면 나관중 본인에게도 잘된 걸 수도~ 뒤에 이야기들 보면 느끼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양반이 뭐가 딸려서라기보다 그냥 공부머리가 없었지 싶다. 정사를 꿰고 그 무수한 민담들을 캐내서 집대성하고 스토리텔링을 해낸 그의 재능은 오로지 포커스가 삼국지에 올인 되었을 뿐이였다. 과거에 계속 떨어지기를 여러 번... 어느 시점부터는 그냥 벼슬에 대한 미련 버리고 부친이 하시던 소금장사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도왔는데, 공부도 못 하는 주제에, 장사도 못 했고 장사에 별 도움이 안되다보니 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는지, 나중에는 장사를 따라다니는 것도 그만뒀다.ㅋㅋㅋ 이렇게 원나라(그 시절은 아직 원)의 잉여놈이던 나관중은 동네 찻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당시의 찻집은 옛날 프랑스 파리의 카페와 비슷한... 문학도나 학자들, 혹은 예능인들이 드나들며 의견을 나누던 그런 분위기였다고 보면 된다.(술 안팔았다) 그렇게 드나들던 찻집에서 거의 매일 했던것이 "삼국희곡(三國戱曲)" 이란 공연인데, 이게 뭐냐면 몇 명의 화자가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연기와 나레이션 섞어서 간단한 연극 비슷하게 만담처럼 진행하는 요즘말로 스탠딩공연같은건데 나관중은 여기에 빠져서 이걸 보려고 싸지도 않은 찻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도 당시에 소금집 아들이면 나름 먹고사는 집이니 가능했던 듯..ㅎ 이 때 이 찻집의 삼국희곡은 한 잉여의 삶을 바꾸게 된다. 이후 단순 삼국희곡덕후에서 끝난게 아니라, 관련 사료들을 모으고 연관 주석과 민담 및 구전설화들까지 모으게 되는데.. 당시에 이짓은 그야말로 엄청난게, 이때 인터넷이 있나, 도서관이 있나 이런저런 자료들과 이야기들을 모으려면 그야말로 발로 뛰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당시 교통이 좋기를 해.. 심지어 "중국"에서... 여튼 덕중의 덕은 양덕이 아닌 중덕이란걸 보여준 나관중은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소설을 쓰고 소설 제목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 바로 우리가 삼국지연의라는 그 소설이다. 마치 원래는 연극영화과 전공이였고 관련하여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다 역사에 매료되어 한국사 강사가 된 설민석 선생님과 엇비슷하다. 자료를 취합하는 나관중의 정성과 열의는 실로 대단한건데, 지금같은 정보화시대에서 알기 쉽지 않은 자료나 정보가 많거늘, 그때는 위에서 말했듯 아무런 인프라도 시스템도 없고 심지어 삼국시대는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때 당시 기준으로도 1,000년전 역사였으니 이에 대한 자료조사는 맨땅에 헤딩이였다. 그러나 소금집 잉여아들은 이 모든걸 해냈다....! 헌데 당시 그런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자료수집 하다보니 아무래도 칼같이 정확하고 공정한 기록들만 채집하는건 한계가 있었으며 별 말같잖은 소리나 뜬금없는 자료들도 많아 나관중은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대상황 따라 인기인물도 바뀌고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인기따라 민담이나 에피소드들도 늘고 줄고가 생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관중은 삼국지를 기반한 판타지를 쓰려는게 아닌 정말 역사속 사실을 모티베이션한 모큐멘터리급의 작품을 추구했기에 최대한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끔, 설령 쏠림이 발생해도 티나지 않게끔 매끄럽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한중일 삼국에는 아직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속 이야기가 모두 팩트라고 잘못 아는 이들이 상당수 있고 무엇이 픽션이고 어디부터 리얼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워 하는 수작이 나온 것! 이 또한 삼국지연의가 명작반열에 오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게 아닌가 싶다. 쉽게 말해, 영화로 치면 나관중은 '운장포터와 도술사의 돌', 이런 판타지나 '삼국불패 -촉한웅사-' 같은 무협물이 아닌 '오호대장군 : 적벽워' 같은 허무맹랑한듯 리얼하게 그려낸 덕에 더 많은 이들이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나관중의 취향을 알 수 있다. 일단 나관중은 지금 표현으로 치면 "마초스러움"을 선호했던거 같다. 서량의 그 마초말고 터프하고 와일드한 전형적 남성미의 그 마초이즘을 말한다. 그 이유는 일단 삼국시대는 물론, 나관중이 생존한 원나라 말 ~ 명나라 초에도 전투시에 그 전투지휘를 일임한 상장이나 총지휘관이 가장 선두에서 지휘하거나 심지어 적장과 1vs1 맞다이를 붙는건 확률이 0에 수렴했음에도 나관중은 그런 네임드간의 일기토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애초에 저런 방식의 전투가 없다시피했기에 당시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언뜻 생각도 못했을 개념인데 저리 도입한걸 보면 소설적 재미추구는 물론, "장수는 싸워야 장수!" 라는 그당시 기준의 마초이즘적 증거가 아닐지.... 또 한가지로, 삼국지연의내에서 장수들의 최후를 그린 부분들이 실제 역사와 다른 경우들이 꽤 있는데 대체로 병사하거나 혹은 죽음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이들이 연의에서 장렬히 전장에서 간지뿜으며 전사하는 걸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이질로 앓다 병사한 감녕, 역시 병을 앓다 결국 병상에서 숨 거뒀던 서황, 역시 고열로 인해 헛소리까지 했다는 학소, 역시 죽음 과정에 대한 별 기록이 없던 황충 등... 아참 태사자도 있구나 여러 장수들이 누워서 천장을 보다 저승을 갔음에도 나관중은 이들을 명예롭게 전장에서 요단강을 건넌 것으로 그려내줬다.ㅎ 나관중의 또 다른 취향은 "물량공세" 적벽대전 당시 조조군의 83만명. 관도대전 당시 원소군과 이릉대전 당시 촉-무릉만 연합군 70만명. 촉의 남만정벌 당시 50만명 등.... 지금의 중국으로야 가능해도 당시 빈번한 전란과 자연재해 및 극악의 치안상태와 기아 등으로 전 중국의 인구가 지금의 20분의 1수준에.. 제대로 된 인구통계도 못 내며 심지어 대규모 인원이 필요한 농경사회였던 당시로는 엄두도 못낼 규모의 대병력이 마주치는 이런 물량공세는 역시 나관중이 전쟁을 더욱 흥미롭게 표현키 위한 장치였다. 삼국지연의와 함께 "중국의 4대 기서" 라 불려지는 명작들이 있는데 나머지 세 작품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유교마인드 뿜뿜인 우리나라 정서상... 야설의 원조격인 금병매는 거의 매장 당하다보니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가 삼대장이 되었고 서유기가 주로 애니매이션이나 게임같은 어린이~청소년 대상 매체들에서 매만지다보니 성인들에게는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이 양대산맥을 이룬다. 놀랍게도 이 중국4대 기서 중 삼국지연의의 나관중이 수호전도 집필했다...!!!! 수호전은 순전히 나관중이 창조했다기보다, 원나라 말기의 시내암(施耐庵)이라는 사람이 원작자에, 나관중이, 쉽게 말하자면 초본상태의 수호전을 사실상 마무리지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자면 시내암이 수호전이라는 그림을 대강 콘티만 그렸다면 나관중이 거기에 펜선을 그려 디테일을 추가하고 컬러링까지 했다고 하면 비슷한 표현?...ㅎ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단편이라도 소설이나 수필 등을 써본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다만... 아무리 적성이 맞고 본인이 원해 쓴다 할지라도 "글을 쓴다"는 작업은 보통의 인내와 센스로는 하기 어려운 작업이며, 더구나 실제역사를 기반해 철저한 자료조사 및 고증을 더한 작품은 요새도 쓰기가 버겁다. 게다가 요즘은 펜에 원고지로 원고작업 않고 대부분의 작가분들이 컴퓨터를 쓰지만.... 나관중은 명나라 사람이라, 벼루에 먹을 갈고.. 붓으로 먹물을 찍어 썼다. 학창시절 혹시 서예해 보신 분 계시는지?.. 먹을 가는거부터가 존니 진짜...하아..(난 그 먹냄새도 싫었어) 게다가 붓글씨는 정말 글씨쓰기가 거지같고 뭐 좀 쓸라치면 그새 붓의 먹물이 다해서 또 찍고.. 붓의 힘조절이 잘 안되면 글씨가 개판되며 오타가 나면 이건 수정이고 뭐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된다.. 게다가 서예반 애들은 거의 대개 부모나 담임이 산만한 애들의 정서함양에 좋다고 시켜놓다보니 애새끼들이 전부 산만하다 -_-;;;;; (게다가 손에 묻은 먹물은 잘 씻기지도 않고 옷에 묻으면 그 옷은 그냥 버려야 된다는...) 여튼 그런 붓글씨로 쓴 소설! 심지어 그냥 소설도 아닌 중국의 4대 기서! 게다가 그중 둘이 Write By 나관중의 위엄은 말로 표현불가다. 위에서 언급했듯, 공부머리가 없었을 뿐 그는 천재고 서양의 세익스피어에 뒤지지 않는 동양최고의 문학가였다. 그런데 수호전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상과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이들이 많이 나오고 그러다보니 명나라에서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벼르고, 그의 가문은 나관중으로 인해 온집안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그를 가문에서 파문!!! 쉽게 말해서 호적을 파버렸고, 나관중 역시 자신의 신상 및 자기네 집안안위 위해 노년에는 인적 드문곳에 짱박혀 이승윤이나 윤택이 찾아가는 그런 자연인처럼 살다 조용히 죽었다..., 그의 업적대비 참 초라한 최후지만, 당시는 뭐.. 아무거나 트집 하나 잘못 잡히면 그냥 모가지가 날아가는 시대에, 잘못 얽히면 온집안이 풍비박산 나는것도 다반사던 시절이였고 또 천재들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다보니 오히려 살아생전에는 인정은 커녕 가난과 무관심 속에 불운한 삶을 살다간 이들도 부지기수다. 아마 나관중은 앞서 언급했듯, 당시 시스템과 인프라에 따른 자기작품의 빠른 대중화의 한계와 당시 사회적인 직업인식 등으로 인해 생전에는 대문호에 대한 존경같은거 없이 살았을거다. 그냥 간신히 밥이나 먹고 맨날 방구석 처박혀 글이나 쓰고 그러는 Nerd였을 듯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와 수호전이란 두 거작을 만들어낸 그의 근성과 집념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매사가 다 그렇다. 뭘 하건 성공을 위해 우리는 당장은 미진해도 꾸준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쌓여 결국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거라고 나관중의 삶이 말해준다. . . .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장 7절 - (하지만 난 무신론자)
조운 자룡 (趙雲 子龍) A.D.? ~ 229
아오.. 시부랄 다 써놨더만, 뭔 에러가 났는가.. 업로드 누르니 싹 씻은듯이 날아가 처음부터 다시 쓰는 오늘의 주인공새끼는 바로 "조운" 삼국지라는 컨텐츠의 인기가 가장 좋은 동아시아 삼국인 한국, 중국(타이완 포함), 일본은 각기 최고인기 인물이 그 나라의 국민성향 및 역사적 특성에 따라 다른데, 중국 : 이미 신격화된 "관우" 한국 : 전통의 문(文) 숭배 영향인지 "제갈량" 반면, 삼국지를 가장 상업적 컨텐츠로 잘 활용해낸 일본은 조운의 인기가 제일 좋다. . . . 아마 오랜시간 무(武)가 우선시되며, 또 그런 문화특성상 주군의 명이라면 유불리 떠나 묵묵히 수행하는 "사무라이(侍) 정신"이 모토인 점 등이 작용한 듯. 조운이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다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 인기 없진 않다. 두세번째쯤에서는 반드시 언급이 되는 역시 인기스타! 심지어 인기는 오히려 삼국지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더 높은데, 이건 조운을 좋아하면 삼국지를 모른다거나... 그런 디스가 아니라, 아무래도 삼국지에 대한 관심이 깊을수록 더 많은 인물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러다보면 조운 외의 다른 인물들을 최애할 수도 있으니까~ 이건 워낙 유명한 조운의 인기에 대한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는 잘 모르거나 안읽어본 이들도 알만한 급의 유명스타기에 그렇다는! (이는 조운 외의 인기인물들도 비슷한.. ,) . . . 조운은 위처럼 유명할 수 있는 여러 이유 있지만 무엇보다 후한 말, 초창기 떠돌이시절의 유비를 따르기 시작, 후에 그 유비가 황제 되고 또 붕어한 이후까지의 긴~ 활약기간의 이유가 있는데, 정말 의외스럽게도 그런 긴 시간 활약하며 제국의 개국공신되고 또 그만큼 고위직에 오른것치고 의외로 기록이 많이 부실하다. 정사의 촉서 중 조운전과, 신뢰성은 좀 문제가 있지만 조운전의 부실함을 좀 채워주는 조운별전 등의 기록을 모두 합쳐도 군시절 내가 쓴 편지의 양보다 적다....;;; 조운이 이토록 부실한 기록을 가졌음에도 거대한 인기를 누리는 실질적인 큰 이유는, 내가 보기에는 바로바로.. 일본게임업체 "코에이(KOEI)" 의 "삼국지 시리즈" 덕이다. 삼국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책과 코믹스가 있었고... 중국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옛날부터 "경극"이라는 미디어(?)매체들 통해 후대인들이 삼국지(연의)를 즐겼다. 하지만 사서 통해 확고한 비쥬얼 이미징이 되어 있던 극소수의 몇몇 인물들 외에는 인물간 개성을 구분지을 표현은 부족했다. 그러던 와중, 1985년 일본의 코에이에서 창업자이자 삼국지 시리즈의 창조자이기도 한 삼국지덕후인 "에리카와 요이치"가 미칠듯한 덕력으로 자료들을 수집해 이를 토대로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각 인물들의 프로필을 제작하여 이를 게임에 응용하게 되는데... 이 게임이 대박이 나게 되며 나름 고증도 괜찮았고 멋지게 잘 표현된 인물들 일러스트들도 같이 대박났다. . . . 이후 각종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등 온갖 미디어물에서 다루는 삼국지의 인물묘사들은 이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모티베이션으로 나오게 되는데, 바로 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조운을 초절세미남으로 표현했고 시리즈 거듭될수록 나날이 더 미남이 되어가며 대부분 사람들에게 "조운 = 미남"의 공식이 공식화 되었다는... 이로서 사료와 연의 속의 과묵하고 충직한 무력깡패 이미지에 코에이가 미남 이미지를 데코레이션 해주며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 것...ㅋ . . . 참고로 위에 언급한 에리카와 요이치는 삼국지 시리즈 오프닝 초반에 이름 나오는 프로듀서인 "시부사와 코우"와 동일인물! 저작권 관리 등 사업적인 이유로 지은 이름인데 에리카와가 존경하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이의 성과 코에이의 코를 따와서 지은 이름. 실제 조운도 미남이였는지에 대해 조운전은 무언급, 조운별전에서만 "8척의 위풍당찬 체구와 사내다운 용모" 라고 짧게 언급이 꼴랑...ㅎ 당시 도량형 기준 8척은 지금 기준으로도 큰 키인데, 정말 딱 자로 재서 저만큼의 키라는 것보다는 주로 당시의 작디 작던 일반인들보다 훌쩍 키 큰 이들을 일컬으며 쓰던 감탄적 관용어구로 주로 쓰인 표현. 그래서 사료에도 실제로 키가 크다며 제법 명확한 데이터가 있던 제갈량이나 정욱 등등도 있지만 대체로 삼국지에서 8척, 여덟 자 어쩌고 하는 표현이 붙는 이들은 대개 "덩치 좋다!!" 는 의미로 쓰였고 조운도 마찬가지다. 보아하니 그냥 덩치 좀 있고, 생긴 것도 잘 생겼다기보다 남자답게 생긴 호남형 외모 수준인 것을 코에이가 무슨 존잘러로 만들어 놨다...ㅋㅋㅋ 오히려 조운의 외모묘사는 요코야마 미쓰테루가 더 사료에 입각했지 싶은ㅎ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서 제갈량과 함께, 주로 자로 불려지는 인물. 간혹 조운이란 이름은 모르고 조자룡으로만 아는 이들도 꽤 있다. . . . 많은 분들이 별 생각없이 넘겼을 수도 있지만.... 은근 논란이 되었던 건 조운의 "나이"다. 제목에서 보듯 그의 생년관련 공식기록은 없다. 긴 시간 활약하며 사망당시는 제법 고위직이였음에도 인물기록 중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생년기록이 없으며 정사 저자 진수조차 체크를 못한 듯 싶다. 삼국지연의내의 내용들만 보면 유비보다 8살이나 연상으로 나오지만, 이건 나관중이 이렇게 저렇게 조운을 띄우다보니 설정붕괴가 오며 생긴 착오로 보여지고... 대체로 중국과 일본의 관련 사학자들은 조운을 대략 170 ~ 171년생쯤으로 보고는 있다. 그런데 170년으로만 잡아도 만 60세도 채 못 채우고 사망.. 연의에서 그려지는 노익장의 이미지에는 살짝 아쉽다. 물론 당시 평균수명 짧은 탓이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서이기도 했다지만 노인사망연령 역시 짧은 탓도 있던 터라, 단명으로는 절대 볼 수 없겠지만 오래 살았다 할 수도 없는 나이임은 분명하다. 하긴, 당시 기준에 50대 중후반 나이의 장수가 전장에서 현역생활 했다면 노장인건 맞긴 하지... 살짝쿵 이견들은 있지만 확실한건 "공손찬" 아래에서 사실상의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공손찬 휘하에서 객장, 즉 일종의 용병 생활하던 유비를 만난것도 맞지만, 소년장수 조운이 이미 당시의 하북에서 네임드 맹장이던 문추와 대결한건 허구다. . . . 연의에서처럼 실제로도 조운은 공손찬 휘하에서 별 다른 활약기회없이 지내다 공손찬과 원소 양측이 제대로 전쟁 치르기 전에 형의 장례를 이유로 낙향하며 사실상 공손찬측에서 '퇴사' 했다. (형이 있었어?ㅋㅋ) 많은 이가 조운을 못 알아본 공손찬의 무지함을 까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관점일뿐... 당시 시점에서 공손찬이 무지했다 볼 수는 없는게, 그때의 공손찬은 북방의 여러 소수민족들과의 전투를 이겨내며 명성을 키운 실전강자였다. 거칠고 사나운 그들을, 몸소 전장지휘하며 조져놨던 공손찬세력에는 당연히 병력들을 이끌던 여러 검증된 장수들이 있었을테고 공손찬이 무슨 스카우터를 쓴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나타난 젊은 신입장수의 전투력을 알아보고 기회 주기보다는 기존의 전공 많고 검증된 이들 위주로 운용했을거다. 체격이나 그런거 딱보면 모르겠냐 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평균신장 작던 그 시절이라도 공손찬처럼 성공한 큰 세력하의 장수들까지 다 작진 않았을거다. . . . 축구로 치면 몇 시즌 동안 리그우승을 거듭한 강팀이 있다 치고 그 팀에는 당연히 우승을 이끈 여러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을텐데 이런 와중에 그들을 벤치에 앉히고 유망주에게 선뜻 기회 주긴 쉽지 않다. 게다가 스포츠는 큰 의미없는 게임이나 대승을 거둘 때 잠깐 투입해도 무리없겠지만 후한 말의 난세는 실전이라 괜히 검증안된 어설픈 지휘관을 투입했다 혹여 실책이라도 저지르면 그대로 수 많은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한다. 또 여러 번 말했듯 당시 전투는 "기세싸움"이라, 내리 이기고 또 전력이 유리해도 엄한 짓 한 번으로 역전패 할 수도 있는 말 그대로 "실전"이였다. 그리고 조운이 공손찬 휘하에 임관한 때는 공손찬이 북방을 어느 정도 다져놨고, 원소와는 제대로 붙기 전이라 더욱 전투에 나설 기회가 많지 않던터에, 원소와 붙기 전 낙향했다. 여러모로 공손찬이 모자라서 조운을 활용안했다 몰기는 공손찬도 억울하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운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역시 당양 장판파에서 아두(유선)를 품고 조조의 대군 사이를 들쑤시고 다니는 부분이다. . . . 이 부분을 보면 따르는 이도 없이 오로지 혼자... 심지어 애까지 품고 전장을 휘저으며 싸울 놈과 싸우고 죽일 놈은 죽이는 등 할 거 다하고 다니는 육아무예의 정점을 찍는다. (물론, 훗날 유선 하는걸 보면 이는 조운 최고의 실책....;;;) 이 부분은 역시나 나관중이 조미료를 과도하게 쳤다. 물론, 저 극한상황 속에서 목숨바쳐 자기주군의 유일한 적자를 구해낸 자체는 맞는데... 저렇게 이리저리 죄 후비고 다닌 것은 아니였다. 상식적으로... 적군이 널린 상황 속에, 자기는 혼자. 주군의 아이를 품고 있는걸 떠나 설령 혼자라 해도 대놓고 '내가 조운인데 뭐 어쩌라고' 하며 다니는건 무예와 용맹을 떠나서 만용의 정점을 찍는 어리석음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부득불 적병과 마주쳐도 걔네들을 싹쓸고 가기보다 아주 최소한의 마찰만으로 어떻게던 돌파하거나 경우에 따라 제법 많은 인원이 다가오면 숨어있다가 다 지나가면 뒤도 안보고 달아남을 반복하며 빠져나갔다. . . . 나쁜소식은 당시 장판벌을 헤집던 조조군의 주력은 평상시 조조의 호위를 목적으로 양성된 최정예부대인 "호표기(虎豹騎)"였다는거고... 좋은(?)소식은 이들의 포커스는 유비를 쫓는것이였다는 것. 게다가 당시 호표기가 뉴스나 인터넷으로 조운의 프로필을 검색해보거나 유튜브로 조운의 활약상을 본건 아닐테니 설령 조운을 마주한들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며, 당시 조운의 꼴도 말이 아니였을터라 효표기 입장에서 조운을 마주한들, 그냥 난전 중 낙오된 적군의 기병쯤으로 봤을테니 굳이 무리하게 전원이 덤벼서 악착같이 쫓거나 막으려고는 안했을 것이다. . . . 여튼 실상은 좀 김새고 싱거운건 맞지만, 조운의 활약이 과장되었단거지 없는걸 지어낸건 아니고 아무리 위와 같은 상황인들 조운이 생사고락의 아수라를 혼자만의 실력으로 돌파해 나온건 팩트다. 저 때의 활약이 인상깊었는지, 이후부터 조운은 주로 유비의 신변을 보호하는 호위부대장을 맡거나 유비 부재시 유비의 집안질서를 잡거나 보호하는 보안대장 비슷한 포지션을 주로 맡게 된다. 유비 입장에서는 성격도 단호박에 무력도 빼어나고 전략기재가 빼어난건 아닐지라도 원리원칙에 상명하복 확실하며 당장의 전술적 판단은 괜찮았던 편인 조운이, 성격적으로 워낙 개성들이 강하다보니 장단점이 확실한 의제보다 그런쪽으론 더 믿음 갔을 것이다. . . . 다만, 원체 난놈이라 전투에도 수 차례 투입되긴 했어도 기본적 포지션이 유비와 그 가솔들의 신변보호를 우선하는 직할대장이다보니 여타 야전지휘관들보다 가시적인 공적 세울 기회는 아무래도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느끼는 임팩트 대비 훗날 유비가 왕이 되고 황제가 되며 공신들의 공을 기려 직위를 하사때 조운은 우리가 알기로는 거의 동급 혹은 조운보다 아쉬운 이들이라 여겨지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보다 낮았고 위연, 이엄 등과 비슷하거나 살짝 앞서는 정도였다. 물론, 관직면에서는 그랬을지 몰라도 유비세력.. 나아가 촉한내에서 그는 직급을 떠나 아무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였다. 현대군에서 주임원사는 엄연히 계급상 갓 임관한 어린 소위보다 낮음에도 위관급은 물론 영관급 고위 장교들도 절대 함부로 못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 당장 서열 No.1 인 유비 제외 그 아래로 관우나 제갈량조차 조운에게 큰소리조차 내지 못했으며 지시를 내릴지라도 대놓고 명령조로 말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단순히 조운의 실력이나 공적 및 짬밥만으로 가능한게 절대 아니였고 조운의 "인성" 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당장 관우, 장비, 위연만 해도 촉한내에서 눈도 못 마주칠 거물들이였음에도 뒤에서는 그들을 싫어하거나 속으로 욕하는 이들이 적잖았고 결국 관우와 장비는 부하들의 하극상이 원인되어 남의 손에 목이 날아가고, 위연 역시 안티들에 둘러싸여 어그로만 끌고 살다 그 무수한 공을 세우고도 끝내 숙청이나 진배없는 최후를 맞은 걸 보면 조운은 전혀 그런 부분이 없었다. . . . 무엇보다 상명하복에 철저한 "진짜 군인" 이였다. 다른걸 떠나 제갈량 영입 직후... 나이도 어리고 당장 크게 보여준 것도 없는 키만 큰 허연 선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대해 관우와 장비는 몹시도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나 당시 넹~ 하고 따른건 조운뿐이였다. 이후에도 유비의 명이건, 제갈량의 명이건 조운은 자신의 위세 높아지고 공적이 쌓여가도 대부분 군말없이 이행했다. 그런 조운이 유비의 지시에 대해 그와는 다른 자기주관을 드러낸건 역사적으로 딱 두번이다. 하나는 익주 정복 직후 기존 촉의 고관대작들과 부호들의 집과 토지와 뽕나무밭을 모두 압류 후 공신들에 재분배 하자는 것을 민심안정우선을 이유로 반대한 것. 두번째는 유비가 초사이언이 될 정도로 개빡쳐서 온 나라를 들어 오나라를 불싸지르러 가겠다는걸 정세와 이치상 맞지 않다며 반대한 것. . . . 둘 모두 너무나 옳고 바른 반대였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로는 정말 감히 반대하기가 거시기한... 사나이의 반대였다. 재산재분배의 경우, 가만히 있었으면 공이 적잖은 자신도 상당한 수혜자가 되며 유비의 그 발표 직후 모든 문무대관들은 입이 귀에 걸려 샴페인을 따는 분위기였고.. 오정벌의 경우, 의제 둘의 죽음과 오가 연관되어 인자함과 덕의 아이콘 유비가 생전 처음 눈까리가 뒤집혀 폭주를 하고 있는 현장이였다. 하지만 조운은 반대했다. 상명하복에 충실했지만 대의명분과 시국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에서 비롯된.. 조운이 단순히 커맨드대로만 움직이는 전투머신이 아니라는 뜻. 참고로 재산재분배건 당시에는 조운보다 서열이 위였던 제갈량, 장비, 수틀리면 상대 안가리고 막말 쏘는 법정, 조운 못지 않은 공적과 역시 근소하나마 윗서열 황충 등등 조운의 저 이뭐병소리를 지적하려면 지적하고도 남을 사람들이 잔뜩 있었음에도 누구도 저 의견에 싫어요를 누른 이가 없음은 조운의 위세를 보여주는....! 평소에 원체 말수가 적었고 다른 이들과 별 다른 교분을 갖지 않았다. 조운의 사료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다른이들의 기록을 봐도 조운과 술 한잔 했다는, 조운과 사냥을 했다는, 조운과 식사를 했다는, 조운과 담화를 나눴다는, 조운과 차를 마셨다는, 조운과 바둑을 뒀다는, 조운이 집에 찾아왔거나, 조운의 집에 찾아갔다는 그 어느 기록도 없다. 그렇다고 조운이 그냥 아싸거나 독고다이였다기보다 과묵하지만 인성이 좋고 필요시에는 바른말을 했고, 맡은 소임에 충실한 직장인의 정석같은... 비록 노잼이긴 해도 누구도 그를 싫어하지 않는 그런 묵직한 존재감의 인물이였다. 게다가 전장에 나가면 그 과묵함을 유지하며 미칠듯한 용맹을 자랑했으니, 별 기록 없다는 정사에도 조운이 매우 용맹했다는 기록이 강조되어 있다. 위에서 지시 떨어지면 형세가 불리하건, 병력이 적건 일단 묵묵히 들이대러 갔기에 붙는 기록이다. 연의에 등장하는 유비의 코멘트 중 "자룡은 온몸이 담덩어리(子龍一身都是膽也)" 라는 멘트도 실존했던 멘트. 이릉대전 당시 유비에게 반대 걸었다 후방으로 빠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나가리의 개념이 아닌 조금이라도 본군의 형세가 불리할시 바로 지원 및 혹여 만에 하나라도 패퇴시 밀려올지 모를 오군을 사전에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강주를 맡긴 것이였고, 촉에서도 한중과 함께 매우매우매우 중요한 요지여서 조운 직전은 장비가 맡았던 곳! . . . 유비가 백제성에서 유언 당시 제갈량과 함께 문무대관들 중 유이하게 유언을 직접 받은 신하로 연의에 나오는데, 하긴 유비가 떠돌던 시절부터 따르던 이들 중 당시 생존해 있던 신하가 그 둘뿐이도 했고 관우, 장비, 간손미, 진도 다 죽고 미방은 배신때리고 당시 숨 쉬던 게 그 둘뿐....T-T . . . 헌데 사실 저것도 나관중이 감동을 더하고자... 독자의 눈물을 뽑고자 지어낸 신파! 사실 유비 사망 당시 신하들 중 유비의 유언을 직접 받든건 제갈량 포함 두 명이 맞는데, 또 한 명은 조운이 아닌 바로 "이엄".. ..;;;; 이후 조운은 촉한에서 군의 인사권을 관할하고 황실을 호위하는 정예부대를 지휘감독하는 등... 대외정벌 부문 제외한 내부적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직위에 오른다. 보통 저 역할을 하는게 대장군인데, 본래 대장군은 타국원정권도 갖지만 그 방면은 제갈량이 도맡았던 터라 조운은 대장군의 저 책무만 분담한다. 유비는 직위, 직책에 대해 상당히 프리하게 실리를 중시해서 운용해왔는데... 유비는 당시 후한에 없는 직위도 임시로 만들어 쓰거나 기존 직위의 롤을 임의적으로 변형 하는 등 포지션보다 롤에 더 포커스를 맞춰 내부운영을 했고 이는 제갈량도 일정부분 비슷하게 진행했다. 그래서 조운의 직위자체는 실상 공적과 재직기한 등 커리어 대비 그닥 높은편은 아니였으나 역할은 상당히 주요업무를 맡은 편이였다. 이후 조운은 제갈량과 함께 남만정벌도 다니고... 북벌도 다니며 눈감는 날까지 쉼없이 말타고 싸우러 다닌다. 참고로 위와의 전투 중 한덕과 그 다섯인지, 여섯 아들을 죄다 썰어놔서 한씨집안 씨를 말린건 조운의 노익장을 버프해주기 위한 나관중의 픽션이며 저런 한 부자들 자체가 없던 인물이다... 실제로 연의 속에서 조운의 창 아래 비명횡사한 이들 일부가 가상의 인물들이다. . . . 여튼 조운은 쉼없는 전투로 굴려지다 1차 북벌 다음해인 229년에 사망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짧은 생은 아니지만 길게 살지도 못한데는 역시 촉의 영토를 구석구석 누비며 거듭 참전하며 쌓인 과로탓인듯 하다. 그도 그럴게 촉은 고질적인 인재부족문제로 조운 정도의 경력과 나이의 장수면 황도에서 머물며 주요사안결정과 천자알현업무가 주가 되어야 했으나 당장 승상이 최전선에 지휘관으로 나가는 상황이니 조운 성격에 당연히 본인도 쉬지 않고 따라 나갔을 것이다.... . . . 조운 사후 순평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이 시호는 조운 생전, 촉에 귀순하며 평소 조운을 존경해 마지않던 강유가 지었는데, 강유는 조운을 공경하여 몇 차례 함께 술자리나 식사자리를 권했으나 모두 뺀찌먹었다... 전형적인 군인 of the 군인 스타일이다. 맡은바 임무에 의문제기없이 유불리 떠나 최선을 다하며 정치적 개입도 일절 없이 사리사욕조차 없다. 늘 과묵하며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고 매사에 엄정한 일처리 위해 개인적 친분도 나누지 않았으며 역시 무엇보다 주위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실력자였다. 본인의 경력, 실력, 공적에 맞지 않는 포상이나 직위에 대해 일절 불평불만을 가진적이 없다. 자신의 직위와 처우가 높아져도 이를 토대로 과한 야욕은 커녕 직권남용이나 후배들에 대한 하대조차 없었다. 게다가 이런 모습을 흐트러짐 한 번 없이 죽음의 순간까지 지켜냈다.., . . . 공직자, 군인으로서의 조운은 완벽 그자체다. 제갈량과는 또 다른 면에서 공직자로서의 완벽을 보여준다. 다만, 인간 조운의 삶은 완전 개노잼이였을거 같다. 모르겠다... 난 주위에 저런 선배나 형, 상사가 있으면 분명 당연 존경하고 롤모델 삼긴 했겠지만 고민이나 걱정 있을 때 조언을 구하진 않을거 같다.ㅋㅋ 하지만 요즘같은 세상에 그게 정부관료건, 군인이나 경찰이건, 국회의원이건, 공무원이건간에 공직자로서는 확실히 저런 사람이 필요하고 절실하다는 것이다. 한 번도 아쉬운 처사에 불평불만이 없고 사리사욕 채우지 않았고 다른 고위직들과의 친분은 커녕, 말수도 없었던 그였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조운을 아무도 쉽게 보거나 하지 못했다. 위나 오에는 있었겠지만 유비를 만나 따르고, 훗날 고관대작 되어 최후 맞기까지 최소한 내부에는 적이 없었다. 나는 조운같이 살고 싶진 않지만, 주위에, 사회에는 조운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정욱 중덕 (程昱 仲德) A.D.141 ~ 220
난 여기 접속해서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대략 평균 연령대가 어찌 되는지를 잘 모르겠다만... 삼국지를 좋아하되,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이면 왠지 삼국지를 처음 책(만화책)으로 접했을 확률이 높겠고, 나이가 좀 적은 분들이라면 아무래도 게임으로 먼저 접하다 흥미가 커지며 그 후에 책을 접하지 않았을까 싶다. 난 삼국지를 처음 책으로 접하다 꽤 시간 흘러 게임을 해보게 되었는데(KOEI 三國志2) 당시 상당히 충격적인 부분은 바로 "능력치" 였다... 사실.. 게임속 인물들의 능력치를 접하기까지 책이나 만화속에서는 일정 레벨 이상의 네임드 인물들의 우열을 가려내기가 상당히 어렵다. 주유와 순욱 중 누가 더 뛰어난지, 장료와 방덕 중 누가 더 대단한지, 이건 알길이 없고 저마다의 상상과 추정으로 가려진다. 그러니 토론도 가능했다. 헌데 이 능력치가 매겨지며 내신등급처럼 인물들의 우열이 가려지게 되었고 이 기준은 투명하지 않음에도 게임 접해본 이들은 이 능력치로 인물들을 판단하게 된다. . . . 오늘의 주인공 "정욱" 역시 그런 능력치 시스템의 나름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해보며 긴 서론을 써본다. 수 많은 삼국지 게임들 있으나 가장 흥한 일본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를 예시해보자면 책사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능력치인 "지력"부문에서 정욱은 평균 90~91 가량인데, 그럼 과연 그는 동게임내 지력 평균치가 93~94인 순유나 95~96의 서서나 종회, 가후 등보다 못한 책사였을까?.... . . . 물론, 명확한 정답이야 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저 질문의 대답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이며, 소설 속이나 게임 속 정욱이 아닌 역사 속의 정욱에 대해 한 번 이야기 해보기로~ 정욱(程昱)은 본명이 아니며, 본명은 "정립(程立)". 그러나 정욱이란 이름이 차명이나 가명은 아니고, 중간에 개명을 한건데 욱은 주군 조조가 지어준 이름! 어차피 당시는 이름으로 부르기보다 주로 자를 불렀으며 연의에는 이런 디테일한 스토리는 안나오니 정욱의 개명전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엥간한 삼국지 빠돌이여도 거의 없다. 정욱 자체가 본인의 활약 및 능력과 별개로 별 다른 팬덤도 없는 비인기 인물이라 더욱...(T-T) . . . 현재의 중국 허난성의 구석진 작은 동아현이란 곳이 정욱이 나고 자란 고향이며, 황건적의 난 당시 지략으로 고향을 지켜내 이미 허난성의 당시 지명이던 연주에서 유명인사였다. 집안도 비교적 괜찮던 부유층이였고 본인의 학식과 지략도 출중하며 당시로는 진짜 어딜 가도 눈에 띄는 "거한" 이였는데.... 역사기록을 보면 8자 3촌으로.. 당시의 도량형을 참고, 현재의 수치로 환산해보면 거의 2m에 가까운 거인이다. 당시에는 좀 키가 꽤 크다 싶으면 일종의 감탄사처럼 "8척 거한"이란 표현을 썼기에, 사료에 8자(척)라 해서 건강검진 때 디지털 신장측정기로 잰거마냥 정확한 8자는 아니였겠지만, 정욱의 기록에는 굳이 8자 뒤에 "3촌"이라는 추가 단위가 붙은 것으로 볼 때 거의 정확한 신장측정이 맞다고 보고 있다. 심지어 덩치도 상당히 좋았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하승진같은 정도의 덩치로 보였을 듯.. 보통 삼국지보면 힘쓰는 장수들이 덩치좋고 머리쓰는 책사들은 왜소하고 그럴거 같은데, 정욱은 본인이 임관해 있을 당시의 어지간한 위나라 무장들보다 체격이 컸을 듯 싶다. 연주의 유명인사다보니 일찍부터 여기저기서 오퍼를 받았고 첫번째는 후한 말 연주자사였던 "유대" 였는데, 당시의 유대는 한나라의 칙명을 받고 부임한 그냥 공무원 도지사같은 개념으로 와있었고 당시 원소나 공손찬같은 자기의 세력적 홈그라운드에서 터잡은 군벌은 아니였다. 당연히 별 큰 능력이나 야망은 없었고 정욱 역시 아쉬울게 없어 오퍼를 거절한다.(나같아도...;;;) 이후에 유대가 원소와 공손찬이라는 당시의 두 고래 사이에 끼어 난감한 상황 속에 정욱에게 자문 구하고 정욱이 해준 조언을 따르자 어려움 피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재차 유대는 정욱에 스카웃 제의하나 역시 거절... 이후 유대가 황건적 잔당들 토벌 중 사망(...)하고 비어있던 연주에 진입한 조조가 정욱에 오퍼넣자 바로 응하는데, 이 당시 정욱은 꽤 비판을 받았고 이유는 유대의 청을 두 번이나 거절하며 내세운 이유가 "재야에 그냥 남고싶다" 라는거였는데 조조의 청은 거절없이 바로 응했기에! (나같아도...;;;) 그런데 이미 이때 정욱은 나이가 꽤 있었다. 이 당시가 거의 190년대 중후반이고 정욱은 조조보다 무려 14세 연상이이였으니 거의 50대 초중반의 나이. 후한 말 ~ 삼국시대의 높은 영유아 사망률 탓이라곤 해도 역시 노인사망률도 높아, 평균 수명이 50 안팎이던 시기인점 감안하면 거의 인생 끝자락에 사회생활 시작... . . . 조조가 직접 스카웃한만큼 시작부터 제법 높은자리서 시작은 물론, 초장부터 대활약한다. 여러가지 크고 작은 활약들이 있고 공적을 세우지만 그런건 삼국지 읽어보면 대강 다 비슷하게 실려있고 이 칼럼은 그런 삼국지를 읽어도 잘 모르겠고 세세히 안나오는 개인적 성향 위주니까 안쓸란다ㅋㅋㅋ 게임만 하신 분들 입장에서는 좀 의아할 수 있지만 정욱은 그냥 안전한 후방의 주군곁에서 이런저런 꾀만 내는 전형적인 책사타입이 아니였고, 본인이 직접 전장에 나가 상황 판단하여 병력을 통솔하는데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조조의 네임드 책사들인 순욱, 순유나 곽가와 가후 등이 대개 후방책사들이였던 점으로 비춰, 이는 정욱만의 특징. 임관 초기의 조조는 아직 원소에게 쫄려가며 여포에게 시달려가며 유비를 신경쓰며 원술도 그냥 넘겨볼 수는 없던.... 비록 포텐은 충만할지언정 당장의 세력이 큰 시절은 아니였고 조조가 초기거점 삼은 연주 자체가 사방으로 교통 트인 평야지대라 처신 잘못하면 여러 세력의 다굴을 당하기 최적인 곳이여서... 초반의 정욱은 본인도 전장에 나가 직접 적진을 살펴가며 참전해 공을 쌓았다. 일단 본인의 피지컬도 상당하다보니 무예가 출중하진 않더라도 워낙 또 시기가 시기다보니 어느정도의 기본 호신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 조조 휘하의 대표적인 반유비파 책사였다. 그것도 아주 급진적이라 아직 세력이 크지 않을 때 일찍 유비를 죽여야(?!)한다는 주장을 해왔고, 당시는 뭐든 일단 명분이 중요했는데, 정욱은 그런 명분이 없더라도 일단 찬스오면 죽이고 보자는 식으로 유비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는데... 유비의 세력이 소수의 어설픈 떠돌이집단이던 시절부터 줄창 유비살해주장론자였던걸 보면 사람보는 안목도 굉장했다는 증거! 정욱이 조조 휘하에서 공은 정말 많이 세웠다. 그런데 이게 확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정욱은 타자로 치자면 홈런을 치는 슬러거가 아닌 주로 안타와 타율 위주의 교타자같은 타입에 기인한다. 정사내 정욱전이나 여러 위와 관련된 사료들에는 정욱이 결코 순욱, 순유, 곽가, 가후 등에 뒤지는 책사가 아닌데도 삼국지연의 상에서 이렇다할 기억남는 대활약이 없기 때문에 저평가가 되는것 같은데... 연의는 다 알듯 소설이며 팩트전달보다 재미가 먼저다. 그렇다보니 잘잘한 활약이 많은 정욱이 돋보이기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 . . 인성이 존니 별로였는지, 내부의 적이 상당히 많았다.... 애초에 연주의 호족집안 출신, 게다가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주군인 조조보다도 14살 연상이니 그가 임관한 당시 어지간한 조조의 휘하들은 문무막론 정욱보다 많이 어리다보니 거기서 오는 꼰대기질... 작전회의시에도 누군가 자기의 의견을 반박하면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으며, 상대를 비꼬듯 말하기도 잘 했다. 딱히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이도 없었고 자기와 격차가 좀 난다 싶은 이들은 아주 하대했다. 그러다보니 임관 초기부터 위가 건국된 이후까지도 주위의 이런저런 비판상소가 조조와 그 후의 조비에까지 계속 올라왔다. 물론, 일만 잘 하면 여타 프라이빗한 부분은 일절 노터치였던 조조는 흘려들었고 정욱에게도 이와 관련 일절 말이 없었다. 그런 못되먹은 성깔에서 기인한건지 모르겠지만, 조조의 책사들 중 책략에 있어서 가장 인정이 없었다고 한다. 지가 주위 평판 신경 안쓰고 막 산다고 남들도 다 그런줄 아나, 세상의 평판을 무시한 지극히 실리적인 제안을 많이 했다. 당장 위에 언급된 유비살해만 봐도 그냥 일단 죽이고 보자는 식이였는데... 조조 역시 전형적인 실리주의자라고는 해도 그때껏 자기와 자기세력에게 별 악영향도 없고 인망도 높던 유비를 다짜고짜 죽였다가는 뭔 소리를 들을지 몰라 속으로는 맞다고 여겨도 감히 실행에 옮기진 못 했다. 정욱이야 아무리 날고 긴들 그냥 지금으로 치면 "직원", 조조는 "사장" 이였던건데, 직원과 사장은 능력여하 떠나 서로의 시야나 관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 . . 그리고 그 당시에 세상의 "평판"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중요하디 중요한 요소였다. 저 당시 중국은 무정부상태나 진배없던 후한 말, 그리고 황건적의 난과 각지의 군웅할거 등 삼국시대 정립이 되기까지 말 그대로 "개판 of the 개판" 이였기에 사람들이 막 살았다. 그렇기에 그 와중에도 대의명분과 정의 등의 고결한 가치를 소신삼아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자기가 위험해 지더라도 저런 신념을 지키는 이들은 존경과 우러름을 받았다. 그리고 나름의 인재라 불릴만한 이들 역시, 자기한테 얼마줄지, 뭐해줄지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옳은 주군 아래, 바른 일을 한다는 명분을 따라 임관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연히 세력이 엇비슷하면 무조건 반드시 꼭 명분이 앞서고 평판이 좋은 이를 따랐다. 더구나 무장들보다 많이 배우고 공부한 문관들의 경우, 이런 현상이 심했으며, 아무리 무력이 중요하던 시절이나 현실은 게임과 달라 좋은 무장보다 더 필요하고 또 부족했던게 좋은 문관(행정가, 책사 등)이였다.. 예를 들어, 장수가 오호대장군 + 책사가 당신네 회사의 당신 맞고참인 쪽과 장수가 당신네 회사의 당신 맞고참 + 책사가 제갈량 & 방통이면 후자가 전투에서 승리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다. . . . 그러다보니 평판이 나쁘면 인재가 모이지 않고, 병력징집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호족들의 물질적 지원 및 백성들 대상 세수확보까지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른다. 게다가 전황이 불리해지면 이탈자나 배반자도 높은 확률로 다수가 생겨나 조금만 불리해도 세력와해가 가속된다. 심하면 군주의 신변안전도 보장이 어려워진다. 이렇게 평판이 몹시 중요하던 시기에 그런건 싹 치우고 목적지향성이 과도한 경우가 많았던 정욱의 책략이 반려되거나 다른 책사의 보완책과 더불어지는 경우가 꽤 있었던거 같다. 그러고보면 정욱도 주인을 잘 만난거다. 유비나 손권 휘하였다면 중용받지 못했을거고 원소나 원술을 모셨으면 본인의 목숨도 위험한 상황을 맞았을 수 있었겠으며 동탁을 따랐다면 인성개막장의 동탁에 인정없는 정욱의 책략이 더해지며 레드스컬 아래의 졸라박사같이 되었을 듯.... 늦은 나이에 조조 휘하에 들어가긴 했으나, 그만큼 또 오래 살아서 일흔 아홉에 사망하여 천수를 누렸다... 인성 더러운 이들이 한때는 잘 나가다가도 막판에 험한 꼴 겪거나 비참한 말로를 겪는 경우가 있지만 다행히 정욱은 본인이 권력을 잃거나 하진 않아 고위직에 몸 담다 편히 죽었다. . . . 우리 주위에도 돌아보면 정욱같은 타입의 모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정욱처럼 실력과 재능이 겸비되면 뒤에서나 속으로는 욕해도 앞에서는 모두 그와 친하게 지내려 하거나 잘 하려고 한다. 역시 정욱같은 이들도 자신이 부진해지는 순간 바로 나락이란 걸 알기에, 더 악착같이 일하고 목표를 향해 수단방법, 물불 가리지 않고 나아간다. 그러다보니 계속 평판이 좋을 수 없는 악순환이..... 어쩌면 그 능력과 실적에도 불구하고 연의에서 좋은 대우를 못 받고 또 그 탓으로 현세에도 비인기 인물이 된 것 역시 그의 인성탓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안녕하세요...ㅎ
다들 건강무탈히 잘들 지내셨나요...ㅎ 너무나 간만에 인사 올립니다. 직전글 게시일로부터 거의 딱 만 1년 후네요 많은 분들께 별 다른 고지않고 기약없이 기다리게 해드린 부분, 깊이 사과 드립니다.. 그리고 그 기약없는 1년간 별 재미도 없이 지루한 제 글에 댓글 남겨주시며 복귀를 요청 주셨던 여러 분들께도 진심 담아 고마움을 표합니다. . . . 연재 중단의 별 이유는 사실 없었어요. 하루하루 살이가 너무 바쁘고 힘들다보니 생각이상의 시간과 정성이 투여되는 글쓰기에서 자연스레 멀어지더군요. 무슨 돈이 되거나 한것도 아니고 시작부터 순전히 가벼운 취미로 시작했던지라.. 다만 연재가 지속되며 전혀 예측도 못 하게 많은 분들이 호응과 응원을 주신 덕에 좀 부담과 책임이 실리게 되어 나름 열심히 성의껏 하긴 했지만, 역시 여유가 없으니 멈추게 되고 또 한 번 멈추니 재시작이 더욱 어려웠어요. 그리고 빙글의 불안정한 인터페이스탓도 있었어요. 제 컨텐츠 특성상 상당히 텍스트가 많고 또 영상이나 이미지보다 텍스트 위주인데, 빙글은 일단 텍스트제한이 걸려있어서 일정 수 이상 글자를 쓰면 업로드가 안되고(지금은 안그런지 모르겠네요) 또 텍스팅을 하다보면 모바일 상에서 나타나는 편집화면의 폰트크기도 오락가락 하는 등.. 여타 커뮤니티나 SNS에서는 상상못할 오류들이 제 사기를 꺾더라구요. 그래서 아예 매체를 네이버 블로그로 옮겨볼까 싶은 생각도 했었는데, 결국 빙글로 되돌아온 이유는 하나! . . . 제가 업로드 할 때마다 오로지 칭찬과 격려와 응원 일색인 독자분들 때문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온통 좋은댓글뿐이라 의아했어요ㅋㅋ 보통 다른 커뮤니티 가보면 비방, 비판, 반말, 욕설, 본문과 전혀 무관한 댓글도 많은데 이곳은 인절 그런 분들이 안계시니까..ㅎㅎ 그래서 다시 한 번 해보려구요. 저 글은 안올리지만 알림이 뜨다보니 종종 댓글 주시는 분들 계시면 댓글은 바로 체크 후 답글도 드리긴 했거든요. 조용히 기다릴테니 언제고 준비되면 돌아와달라. 빙글을 지우지않고 있을테니 시간되면 글써달라. 빨리 새글 올려달라, 현기증 날 거 같다. 등등등등 제 복귀를 원하는 분들이 남겨주시는 댓글이 제 복귀는 물론, 힘든 제 일상에서까지 엔돌핀이 되어 주더라구요. 빙글이 글쓰기 불편한 서비스여도, 빙글이 비인기 SNS여서 조회수가 적어도, 제가 삶의 무게에 눌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도, 아무것도 아닌 제가 쓰는 길고 지루한 글을 좋다며 1년간 손놓고 있는데도 기다림의 댓글을 주시는 저런 분들을 외면하면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 다시 열심히 해볼테니 많은 응원과 격려 및 주변전파와 좋아요, 댓글, 스크랩 등등 원활한 피드백 간청 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