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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㉒/ 전시체제6...상하이 외
... <사진=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조선영화 황제 김염의 작품. 사진=CCTV 영상.> ... '일본영화 경제학’을 집필하고 있는 이곳은 미국이다. 한국에서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과 달리 이곳 미국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는 한다. 지난 8월 8일, 미국의 공기관들과 대학들 그리고 교회 등에는 일제히 조기게양이 이뤄졌다. 특히나 필자는 사우스캐럴라이나에서 장기 체류 중이었으므로 그 경이적인 장면에 감탄을 연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그날은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여한 날로 비록 전쟁의 종식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사죄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이 태평양전쟁 당시 인류에게 행한 행위들에 대해서 무조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정 속에서 있었던 오류에 대해서는 미국은 적어도 이민자의 나라이자 금세기 최고의 나라답게 역사의 공과 과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동양인이었던 나는 인종차별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오해 받고 있는 미국의 남부에서 수시로 인사를 받았고 일본의 점심 인사인 ‘곤니찌와’(こんにちは, 今日は)를 수시로 듣고 다녔다. 전시체제라는 주제를 마무리 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이 단순히 황민화 정책의 홍보가 아닌 순기능과 역기능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기로 하였기 때문에 서론이 길었다. 우선적으로 이 연재는 일본영화의 경제학적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영화의 영향이 아시아 전체에 미친 파급효과를 살펴보고 향후 전후의 영화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전시체제시 일본영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중 가장 주목할 지역은 중국 상하이와 필리핀 그리고 인도네시아다. 이중에서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자 영화제작사들 가운데에는 문을 닫거나 싱가포르·홍콩 등지로 옮겨가는 회사가 속출하였으며, 나머지는 충칭(重慶)으로 천도하는 국민당 정부와 중국영화는 그 궤적을 함께 했다. 당시 중국영화는 상하이가 중심이었고 여러 나라의 조차지가 공동으로 들어서 공동조계(租界)라는 공동통치구역이 들어섰다. 이곳에 조차지를 얻은 나라 중에는 일본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일본인 주도의 영화 대신 중국인이 만드는 순수 ‘중국영화’를 제작하면서도 내용에는 참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비록 1937년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했다지만 영화 촬영소는 프랑스 조차 지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도 사실 상하이는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일제치하를 피해 도피해 온 식민지 조선의 영화인들에게는 ‘성지’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중 김염(金焰)은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이었다. 상하이 시에서 활동한 영화배우이며 본명은 덕린(德麟), 레이먼드 킹으로 알려진 김염은 중국 영화의 황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다. 김염은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영화’로 풀어나갔던 대배우로, 중국 사실주의의 효시라고 부르는 ‘대로(大路)’등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애국혼(愛國魂)’은 1928년 상하이에서 만들어졌는데 일제의 검열을 피해 만들었던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이면서 무성극영화이기도 했다. 정기탁(鄭基鐸), 전창근(全昌根), 이경손(李慶孫), 정일송(鄭一松), 한창섭(韓昌燮) 등 조선인 영화인들이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라는 국제도시를 통해 만든 영화였다. 이처럼 상하이의 영화는 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항일영화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던 전통이었기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은 육군의 도와상사(東和商事)의 가와키타 나가미사(川喜多長政)에게 중국 영화의 관리를 요청했다. 그는 영민한 인물로 이미 만에이(만주영화협회)의 실패 원인과 현지에서의 불평을 리서치한 끝에 일본인 주도의 영화제작을 포기하고 중국인에 의한 중국영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인 감독들은 훗날 중화민국 국민당군이 귀환하자 ‘한간’(漢奸 : 조국을 배신한 중국인)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고 대부분 홍콩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는데 이 때문에 전후 홍콩영화는 상하이의 하청업자라는 오명을 씻고 영화산업을 융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와키타 나가미사는 더 나아가 중국인 회유를 위해 전력했는데 첫 작품으로 비록 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吉)를 통해 ‘동양 평화의 길’(1937)을 제작했는가 하면, 아예 1939년에는 상하이에 있던 12개의 영화사들을 합병하여 ‘중화전영’(中華電影)을 설립하고 ‘목란종군’(木蘭從軍)이라는 국방영화를 제작했고 항일영화인이었던 장센쿤(張善琨)까지 영입하기 까지 한다. 그러나 군부의 비호를 받은 일본인들이 영화계를 지배한 것은 사실이며 만에이와 합작으로 리샹란 주연의 ‘만세류방’(萬世流芳)을 제작하여 아편전쟁을 배경으로 한 중국인들의 영웅적 투쟁을 못하면서 일본 본토에서도 마키노 마사히로(まきのまさひろ)가 ‘아편전쟁’을 만든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 뿔뿔이 흩어졌던 영화인들이 상하이로 복귀하기 까지 이른바 ‘충칭시대의 영화’는 극심한 영화자재의 부족 등으로 흥행이 부진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현지인의 영화 촬영을 금지하고 일본어로 된 선전계몽영화를 주로 제작하였는데 이중 대표적 작품은 두 가지로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郞, 본명 許泳)가 자카르타에서 촬영한 ‘콜링 오스트레일리아’(Calling Austrailia, 1944)와 ‘도나리구미’(隣組 : 반상회)를 결성하여 일본어와 일본정신을 배운다는 계몽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히나쓰 에이타로는 입체적 인물이다. 조선인이었지만 히나쓰 에이타로라는 일본인으로 살다가 전후에는 닥터 후융(DR.HUYUNG)이라는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이 된 인물이다. 그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스위스의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연합국에 전달되었는데 포로인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으로 꾸미는 바람에 전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연 포로들을 다시 불러 모아 허위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다시 제작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키스신을 촬영한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심지어 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의 독립 투쟁을 그린 영화 ‘프리에다’(Frieda) 등을 제작하며 국민 감독으로 불리고 있는데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가 ‘시네아스트 허영의 쇼와’(1987)에서 허영의 전기적 삶을 복원한 바 있다. 필리핀은 원래 미국의 식민지였다. 할리우드의 영향이 강한 뮤지컬과 멜로 드라마가 1930년대부터 이미 발달했는데 스페인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를 골고루 경험했고 필리핀 최초의 영화 상영이 1897년 1월 마닐라로 알려져, 아시아 최초로 영화 상영이 있었던 인도 뭄바이 이후 두 번째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앞선 행보였다. 1917년 최초의 영화사가 문을 열고 이후 첫 장편영화 네포무세노(Nepomuceno)의 ‘시골 소녀’(Country Maiden)가 1919년 개봉하면서 시작된 영화산업은 할리우드의 영화를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적 생소한 일본영화를 다시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역시 일본군의 통제 하에 현지인과 합작으로 포로들을 출연시켰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베 유타카(阿部豊)다. 그는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배웠다는 인연으로 제럴드 드 레온(Gerald de Leon)이 공동으로 제작한 ‘저 깃발을 무찔러라’(The dawn of Freedom, 1943)를 만든다. 필리핀에서 미국을 몰아낸 일본군을 찬미하는 내용이지만 레온 쪽이 훨씬 더 고전적인 할리우드 방식을 따랐고 아베 유타카는 딱딱한 연출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훗날 스페인에 맞선 무장봉기와 미국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디 로메로(Eddie ROMERO) 감독의 ‘그때 우리는’(As we were)을 통해 꿈을 좇아 도시로 나간 시골 청년이 혁명의 격랑 속에서 당시 필리핀이 겪던 고난의 과정을 그려내고, 마리 오하라(Mario O Hara) 감독의 일본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그린 영화 ‘신이 부재한 3년’(Tatlong Taong Walang Diyos Three Godless Years, 1976)을 통해 모두를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 전쟁이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던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신이 부재한 3년’은 필리핀인이면서 일본인인 주인공을 내세운 전쟁영화로 2차 세계대전 시기, 필리핀계 일본군 마수기가 시골마을 교사 로사리오를 강간하고, 임신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노에 찬 로사리오는 마수기의 모든 제안을 거절하지만 결국 그와의 결혼에 동의하게 되면서 필리핀인, 일본인, 그리고 미군들로부터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아이러니한 비극을 뛰어난 심리묘사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와 같이 일본의 영화인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때로는 종군으로 때로는 단순히 창작을 위해서 혹은 식민지배를 정당화 하거나 새로운 영화 환경을 통해서라도 명맥을 이어나가는 한편 전후 일본 영화계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할 자양분을 얻는다. 또 전후에도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기회주의자들도 상당수 존재했으며 대동아공영권 아래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형태로 할리우드 영화와 만나고 그 영향을 받아가며 영화를 제작했다. 본토가 단절 속에서 독자적인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면 식민지에 흩어져 있던 영화인들은 할리우드 혹은 지배지 안의 영화인들과 교류 혹은 발굴을 통해 영화를 제작했다. 이중 상당수는 필리핀에서 ‘저 깃발을 무찔러라’에서 카메라를 담당했던 미야지마 요시오(宮島義勇)처럼 필름을 불태우고 증거를 없앤 후 전후 일본영화계에서 좌익세력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87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애니메이션이 실화로?' 세계 최초 '주토피아' 테마파크는 어디에?
2016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를 기억하시나요? 주토피아 최초의 토끼 경찰관 주디 홉스와 뻔뻔한 사기꾼 여우 닉 와일드의 좌충우돌 추격전을 내용으로 한국에서 470만 명의 흥행 성적을 거두기도 했지요. 이 주토피아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가 세계 최초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RedFriday에서는 새로 생길 주토피아 랜드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1. 주토피아 in 상하이 디즈니랜드 얼마 전 상하이 디즈니랜드에서는 확장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계 최초의 '주토피아 랜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2019년 이내에 착공을 시작한다고 밝혔으나 오픈 시기 등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2. 왜 상하이에? 디즈니의 본고장인 미국에 첫 번째 주토피아 랜드를 건설하지 않고 상하이 디즈니랜드에 그 기회를 줬을까요? 주토피아는 중국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을 만큼 흥행에 성공했으며, 주토피아의 주인공인 여우 '닉'을 닮은 붉은 여우와 사막여우 구매 열풍이 일기도 했습니다. 사막여우는 한 마리 당 2만 5천 위안(약 415만 원)에서 4만 5천 위안(약 75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이지만 품절 사태(?)를 겪기도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문을 참고하세요. # 원문 출처 : https://redfriday.co.kr/240 # 많이 본 컨텐츠 # 매일 업데이트되는 생활꿀팁과 알아두면 도움되는 이야기를 팔로우 하셔서 쉽게 구독하세요. # ‘좋아요’ 와 ‘공유하기’ 많이 부탁드려요.
굴욕과 번영의 그 한 가운데.. ShangHai
분명히 언급 드리지만, 저는 중국 여행을 장려하진 않습니다. 저도 사드 보복이라면서 행해지는 저들의 행태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상하이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기에 나중에 언젠가 국가 간의 갈등이 옅어질 때쯤... 이런 곳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과거로의 여행인 명불허전 와이탄의 화려한 야경.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는 상하이의 야경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홍콩의 야경보다는 상해가 더 아름답다. 푸동지구를 밝히고 있는 화려한 첨탑은 발전하는 중국을 상징한다. 와이탄이 과거로의 여행이라면 푸동은 그야말로 현재 그리고 미래에 가깝다. 고층건물이 즐비한 푸동과 유럽풍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와이탄. 이것을 오롯이 즐기려면 유람선을 타는 것을 추천한다. 그것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처럼 양쪽으로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상해 근교 여행 주쟈오쟈오(주가각) 상해의 수향마을 주가각의 야경.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본 적이 있다면 대만의 지우펀과 더불어 주가각을 떠올리지 않을까? 상해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상해의 대표 수향 마을 중 하나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방생교 다리에서 보는 일몰과 야경은 정말 이쁘다. 여기도 상해와 마찬가지로 역시 낮보다 밤이 이쁘다.  역시 상해의 야경은 이름값을 한다. 그래. 바로 이거지... 이게 내가 생각한 아니... 생각했던 중국의 모습이지..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한 크레페 맛집 라크레페. 신천지에 위치한 상하이 임시정부. 최근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광객 감소로  중국정부에서 폐쇄하려 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자국의 역사가 아니기에 관광지로서의 역할이 없다면 머지 않아 우리 독립의 역사적인 유산이 없어 질 수도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거창한 애국심이나 후원도 좋지만, 상하이 방문 시 꼭 들리신다면 임시정부 유지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저 화려한 모습의 야경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많은 아픔이 있는 역사의 장면입니다. 화려한 왼쪽의 유럽식 건물과 조계지의 모습은 그 당시 중화사상에 중국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중국이 무너진 현장과 동시에 아시아가 서구 열강에게 굴복하게 되는 사건의 한 장면입니다. 그와 반대로 오른쪽에 위치한 푸동지구는 세계 최강대국으로 도약하는 중국의 모습을 상징하듯이 그 높이가 마치 중국의 자존심을 상징하듯이 마천루 같은 고층 빌딩이 즐비합니다. 이런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야경을 보기 위해 몰려듭니다. 예전에 황포강 유람선을 처음 타보고 정말 좋아서 이번에 타고 싶었지만, 너무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유람선을 타지 못 했네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올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또 만들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