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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Y와 이름 같은 '죄'...간판 내린 뉴욕 카바레
소니(SONY)가 브랜드 이미지 전략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는 한 사례가 있다. 소니는 1997년 4월, 브랜드 매니지먼트실을 운영했는데, 이 부서는 지적재산권과 법무를 담당했다. 즉 소니 브랜드를 일괄 관리하는 곳이다. 일단 이야기를 1989년으로 되돌려 보자. 그해 9월 25일, 소니는 34억 달러를 지불하고 16억 달러의 부채를 안는 조건으로 미국 콜롬비아 영화사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인수 대상에는 콜롬비아 영화사와 콜롬비아 텔레비전, 트라이스타 필름이 포함됐다. 트라이스타가 소유한 180개 극장과 820개 스크린을 가진 로스(LOEWS) 시어터 체인도 따라 붙었다. 소니는 21달러 선에 거래되던 콜롬비아 주식을 주당 27달러를 지불하고 인수를 성사시켰다. 만만찮게 웃돈을 얹어준 셈이다. 소니의 콜롬비아 인수는 미국으로선 충격이었다. 당시 뉴스위크지는 커버 스토리에 ‘일본, 할리우드를 침공하다’(Japan Invades Hollywood)라는 제목을 달 정도였다. 다시 소니의 브랜드 매니지먼트실. 이 부서는 소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1989년 인수했던 극장들을 개혁 대상으로 삼았다. 언론인 출신 마쓰오카 다케오(松岡健夫)가 쓴 ‘소니의 선택 소니의 성공’이라는 책은 당시 브랜드 매니지먼트실의 활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소니는 미국 계열 영화관인 소니극장 50곳의 경우,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제외한 48곳에 대해 브랜드 이미지에 맞지 않고 마치 변두리 영화관 같다는 이유로 ‘SONY’라는 간판을 내려놓게 했다. 이에 따라 극장들은 매수 이전의 로스(LOEWS)로 간판을 되돌려야 했다.> 브랜드 매니지먼트실의 눈에 거슬렸던 것은 또 있었다. 뉴욕에 SONY라는 간판을 내건 카바레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 ‘스트리트 오브 뉴욕’(Street Of New York)의 약칭이었는데, 이것 역시 소니의 기업 이미지를 망친다는 이유로 간판을 내리게 됐다.>(마쓰오카 다케오 저 ‘소니의 선택 소니의 성공’) 한국으로 치자면, ‘삼성’ 이름을 단 노래방이 영업하고 있었던 셈이다. ‘소니 카바레’가 어떤 방식으로 간판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가게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일본 소니그룹과 이름이 같다는 게 죄라면 죄였다. 브랜드 매니지먼트실이 미국 거리의 간판 교체 작업에 정성을 쏟은 것과는 반대로, 소니의 콜롬비아 영화사 인수는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 이득은커녕 매년 수백억 엔의 적자가 발생, 마침내 1조5000억 엔이라는 막대한 부채가 쌓였다. 이는 소니의 성장에 크나큰 부담이 되었다. 소니 브랜드를 이야기 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2가지가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빅히트 상품 워크맨(Walkman: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과 바이오(VAIO)라는 노트북 브랜드다. 파도처럼 물결치는 바이오의 로고를 기억하는가. 이젠 추억이 됐지만. 바이오는 Video Audio Integrated Operation의 약자다. V와A의 물결 모양은 아날로그를 의미하고, I와 O는 디지털의 1과 0을 나타냈다고 한다. 즉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이었다. 추억이라면, 뭐니뭐니해도 워크맨이 아닐까. 주머니속에 쏙 넣고 다니던 워크맨은 전 세계적으로 2억 개 이상 팔려 나갔다. 학창 시절의 추억 한 페이지에 그 워크맨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소니가 워크맨을 처음 출시한 건 1979년이다. 하지만 이보다 2년 먼저 비슷한 제품인 ‘스테레오 벨트’로 특허를 낸 사람이 있었다. 독일계 발명가 안드레아스 파벨(Andreas Pavel)이었다. 그는 “워크맨이 ‘스테레오 벨트’와 유사한 점이 많으며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소송을 걸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오랜 특허권 분쟁 후인 2004년, 소니는 수백만 유로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소니에겐 뼈아픈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이재우 기자‧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기사출처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07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http://www.japanoll.com/
설득 면접…최고 연봉 기업이 인재를 뽑는 법
... ... 키엔스, 직원 평균 연봉 2억 이상 정밀계측 기기 제조사 키엔스(KEYENCE). 일본에서 연봉이 가장 높기로 소문난 이 회사의 평균 연봉은 대략 2088만 엔(약 2억 1000만원) 수준. 한국의 잘 나가는 금융권 연봉의 2배다. 직원 수는 4000명에 불과한 중견기업이지만 시가총액(8조엔)은 대기업 소니와 맞먹는다. 더 놀라운 건 영업 이익률. 키엔스는 무려 50%가 넘는 높은 수익성을 자랑하는 최강 집단이다. 지난해 매출은 5268억 엔, 영업 이익은 2928억 엔을 기록했다. 이를 계산하면 영업 이익률이 무려 55.6%라는 답이 나온다. 영업이익률 50% 넘는 최강 집단 이런 최고 연봉 직장인 키엔스에 입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키엔스의 영업직 입사 면접은 좀 특별하다. 시사매체 도요게이자이(10월 28일자)에 따르면, 2단계 면접을 거치는데 ‘설득 면접’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카드파’를 ‘현금파’로 설득해 보라 면접관들이 입사 지망생들에게 막연한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라 영업직에 필요한 ‘설득’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점. 예를 들면 △TV가 싫어서 보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설득하면 TV를 보겠는가? △신용카드만 쓰는 ‘카드파’를 현금을 주로 쓰는 ‘현금파’가 되도록 설득해 보라. △독서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독서를 권장하는 방법을 말해보라 등이다. 이런 설득의 스토리는 영업현장에서 ‘비고객’을 충성도 높은 고객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B. Cialdini)의 베스트셀러 ‘설득의 심리학’이 기업 현장에서 적용되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가장 큰 부가가치 높이기 위해 입사” 키엔스의 2차 면접은 ‘논리사고 면접’이다. 예를 들면 △고객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을 3가지 꼽아보라. △우수한 영업 사원의 조건을 세 가지 말해보라 등 구체적인 주제가 주어진다. 물론 입사하면 만만친 않은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다고 한다. 키엔스의 영업 메소드는 ‘팔리는 영업’(売れる営業)에 있다. 영업 이익률이 그걸 말해준다. 키엔스에 몸 담았던 한 직원은 “개인으로서 가장 큰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키엔스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73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캐논의 이름은 ‘관음보살’에서 출발했다
<사진= 캐논은 관음(観音)의 일본식 발음인 '칸논'에서 따왔다. 인물 사진은 캐논의 초대 사장 미타라이 다케시.> 일본 카메라 시장의 빅4는 캐논, 니콘, 올림푸스, 소니 광학 부품 부문이다. 이중 캐논과 니콘은 일본제 카메라의 대명사로 유명세를 누려왔다. 하지만 지금 전 세계 카메라 시장은 그야말로 ‘바닥’이다. 대신 빅4는 의료 내시경, 반도체 제조장비 등 광학기술을 내세워 전 세계 의료장비 시장을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중 뒤늦게 치고 올라온 회사가 캐논(Canon)이다. 캐논은 CT(컴퓨터 단층촬영)와 MRI(자기공명영상) 일본 시장점유율 1위였던 도시바의 의료기기 사업부(도시바메디컬)를 인수(6조5000억원) 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해 1월 최종적으로 인수 절차를 마무리했다. 카메라 메이커들이 의료 광학 분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재팬올의 ‘일본 브랜드 네이밍 시리즈’ 전자전기 기업 이야기가 캐논으로 넘어간다. 캐논의 브랜드는 특이하게도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은 캐논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사연과 창업자 스토리다. <편집자주> “독일엔 ‘라이카’가 있어. 정밀공업 없이는 (우리의) 발전도 없어.” 1933년 어느 날, 도쿄의 한 맥주 가게에서 요시다 고로(吉田五郎), 우치다 사부로(内田三郎), 미타라이 다케시(御手洗 毅)라는 세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일본 기업정보사이트 net,ir 자료) 당시 35mm 카메라의 최고봉은 독일의 라이카와 콘탁스였다. 라이카의 경우, 가격이 500엔에 달했다. 일본 대졸 직장인의 평균 월급이 70엔이던 시절이었다. 저렴한 일본제 35mm 렌즈 파인더 카메라가 요구되던 때였다. 이에 세 사람이 의기투합했다. 요시다 고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영화 촬영 카메라와 영사기 수리 및 개조 일을 하고 있었다. 우치다 사부로는 증권회사 직원으로, 요시다 고로의 처남이었다. 좀 특이하게 미타라이 다케시는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매형 처남지간인 요시다와 우치다는 1933년 도쿄 롯본기에 캐논(Canon)의 전신인 정기광학연구소(精機光學硏究所)를 설립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미타라이는 우치다 부인의 출산을 계기로 그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공동경영자로 참여하게 됐다. 이듬 해인 1934년 ‘아사히 카메라’ 6월호에 정기광학연구소의 카메라 광고가 처음으로 실렸다. 카메라 이름은 칸논(KWANON). 칸논은 관음(観音)의 일본식 발음이다. 왜 이런 불교식 명명을 한 걸까. 이와 관련 마이니치신문의 ‘근원을 따지면’(もとをたどれば)이라는 코너에는 이런 설명이 나온다. “관음보살의 신앙에 심취했던 요시다가 ‘관음보살의 덕으로 세계 최고의 카메라를 만들고 싶다’(観音菩薩」の信仰に熱心だった吉田氏が「観音様にあやかり、世界最高のカメラを作りたい)는 마음에서 칸논으로 명명했다.” 칸논은 이후 어감이 좋은 캐논(canon)으로 바뀌었다. 정기광학연구소는 1937년 정기광학공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변경했는데, 캐논은 이때를 회사 창립연도로 정하고 있다. 공동경영자인 요시다 고로, 우치다 사부로, 미타라이 다케시 중 최종적으로 경영을 맡게 된 사람은 미타라이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도 바로 그다. 당시 마타라이는 의사 일과 경영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에 맞게 그는 X선 카메라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 시절 결핵은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여겨졌다. 결핵에 가장 신경 썼던 곳이 군 당국이었다. 당시 X선 카메라는 대부분 독일제였다. 미타라이는 직업의 장점을 살려 해군의무국(海軍医務局)으로부터 X선 카메라 수주를 받았고 정기광학연구소는 1940년 일본 최초로 간접방식 X레이 카메라(Japan's first indirect X-ray camera)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육군으로부터도 수주를 받아 연간 100대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미타라이는 이를 발판으로 1942년 지금의 캐논 초대사장에 취임했다. 2차 세계대전 중 자신이 운영하던 산부인과 병원이 공습으로 소실되면서 그는 경영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의료용 기기 개발을 추진했고, 그것은 지금의 의료 광학기기 개발의 초석이 됐다. 정기광학연구소는 1947년 ‘캐논 카메라 주식회사’로 이름을 변경했다. 회사가 창업 30년이 되던 해인 1967년, 미타라이는 경영 다각화를 선포했다. ‘오른 손에는 카메라, 왼손에는 사무기기’(Cameras in the Right Hand, Business Machines in the Left Hand)라는 케치플레이즈를 내건 것이다.(캐논 홈페이지 자료) 그 2년 뒤인 1969년에는 카메라를 떼고 ‘캐논주식회사’로 사명을 다시 변경했다. 미타라이는 1974년 마에다 다케오(前田武男)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10년 뒤인 1984년 향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동경영자가 ‘관음교’에 귀의 하면서 이름을 붙였던 칸논(KWANON, 1934년)과 2019년 현재의 캐논(Canon). 그 사이에 8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재우 기자,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인> 기사출처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59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