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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 정영문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어떤 작위의 세계>. 처음 읽어보는 정영문 작가의 소설인데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었으나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으며 어딘가에서 책 제목을 들어본 듯한 느낌에 기억을 되짚어보니 민음사 유튜브에서 편집자가 추천하는 책으로 꼽았던 기억이 났고, 혹시 내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그 기억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나를 조종해 제주도의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어찌 됐든 읽는 동안 즐거웠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소설이니 이 책을 읽은 것이 무의식이 날 조종한 결과이든 아니든 별 상관은 없다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책에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이 가득한데 어떤 것은 두세 줄에서 끝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한 문단 전체가 한 문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거의 한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한 문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기에 분명히 한 문장을 읽고 있음에도 문장의 끝 부분쯤에 가서는 문장의 앞부분이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문장의 앞부분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만큼, 이 소설이 읽기 쉬운 소설이라고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읽기 엄청나게 어렵다고 할 수도 없기에 읽기 어렵긴 하지만 엄청나게 어렵지는 않은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의 서사(사실 서사나 플롯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 들곤 했다)보다는 작가가 왜 이런 두서없고 난잡하고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 생각들을 이토록 길고 지난한 문장들로 표현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는데, 그것은 곧 인간이 그러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생각은 꽤나 그럴듯한 생각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인간이 애초에 어떤 합리적인 존재 이유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므로 인간의 생각이 두서없고 합리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느껴졌고, 그렇기에 인간이 하는 생각을 그대로 글로 옮긴 이 소설이 이토록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그 어떤 질서도 엿보이지 않는 문장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그러한 사고 과정을 그대로 투영한 이 소설은 곧 인간의 존재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어떤 근거도 없다는 사실을 인간의 사고 과정의 언어화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렇듯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근거 없이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사는 것과 죽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주어지는 무료한 시간들을 두려워하고 도대체 어떻게 그 시간들을 보내야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해 괴로워하는데, 그 두려움과 괴로움을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사실, 자신의 삶 전체가 커다란 무의미이자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가져오는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행위로 주인공은 글쓰기, 소설 쓰기를 택하는 것으로 내게는 생각되었는데, 재밌는 것은 왜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이 계속해서 글을 쓰는지 주인공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이며, 나는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이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로캉탱과 겹쳐 보였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로캉탱은 소설을 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한 시도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떤 작위의 세계>의 주인공은 그러한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고, 나는 이 주인공을 약간 아둔한 로캉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 더 재미있었던 것은 이 소설에 정어리라는 단어가 꽤나 자주 등장한다는 것인데 이 소설을 읽는 중 정어리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계기인 민음사 유튜브에서 이 책을 추천한 편집자의 별명이 정어리라는 사실, 그리고 그 편집자가 정영문 작가의 소설 쓰기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이 생각나며 어쩌면 정영문 작가는 예전에 자신의 소설 수업을 들었으며 지금은 편집자가 된 그 사람의 별명이 정어리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성이 정인 그 사람의 별명이 정어리라는 것이 어린 시절 유치하게 이름으로 별명을 짓던 때를 떠올리게 해 그 별명이 머릿속에 깊게 남았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정영문이니 어린 시절 자신 몰래 자신을 정어리라고 놀리던 아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영문 작가에게 그 편집자와의 동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바람에 정어리라는 단어가 이토록 자주 소설에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책을 읽다 가끔씩 하게 되었고 그 바람에 책을 읽는 데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쓸데없는 생각은 그렇게 재미있지 않은 것 같고 그렇다고 재미가 아예 없지는 않으니 조금 재미없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이 리뷰는 <어떤 작위의 세계>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소설 속 한 문장 결국 나는 아무런 느낌도 일으키지 않는, 다시 말해 막막함과 불편함을 절감할 정도로만 느낌을 불러일으킬 뿐, 다른 느낌은 주지 않는 요세미티의 풍경을 보며, 그것이 얼마나 마음을 끌지 않는지를 절감했고, 돌멩이 몇 개를 비탈을 굴러가게 하면 막막하고 불편한 기분이 사라질 것 같았지만 적당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막막함과 불편함을 느끼며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 안톤 체호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현대 단편소설의 아버지, 안톤 체호프의 단편선이다. 사실 현대의 작가들이 쓰는 단편 소설은 거의 전부 안톤 체호프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 수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의 단편 내지는 엽편을 써낸 체호프. 그 이후에 나온 모든 단편들은 거칠게 나누자면 두 종류로 평가될 수 있다. 체호프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거나 체호프와 이런 점이 다르다고 평가를 받거나. 그만큼 체호프는 현대의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작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체호프의 소설을 읽는 동안 웃기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상황을 비트는 유머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 꽤 많은데, 예를 들면 단편선의 첫 작품 <관리의 죽음> 같은 경우 결말을 보고 예전에 유행하던 허무 개그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희극성은 체호프의 작품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독자를 웃기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사의 진실이 녹아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죽음, 이성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다가 고백을 받는 순간 식어버리는 사랑, 과할 정도로 묘사되는 아름다움과 그것을 찬양하는 인간. 이런 장면들은 어이없는 실소와 희극성을 자아내지만 또 그것이 인간이 사는 현실이다.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오며, 누군가에 대한 호감은 사소한 무언가를 계기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겉모습이란 고작 살가죽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인간은 홀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체호프는 가난한 집안에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대학에 다니면서 싸구려 잡지와 신문에 콩트, 유머 단편 등을 기고했다. 거기서 받는 적은 원고료라도 집안에 보태야 할 만큼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생활고에 시달리며 닥치는 대로 써 온 작품들에 담겨있던 유머가 뒤에 체호프가 본격적인 작가로 발돋움한 뒤에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썼던 글들로 인해 훈련된 희극성이 체호프의 작품 속에서 웃음과 함께 인간세상에 대한 통찰을 그려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러니한 느낌도 든다. 굉장히 짧고 간결한 문체로 인간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며 심지어 읽기에도 재미있는 작품을 여럿 써낸 작가가 바로 안톤 체호프다. 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꼭 읽어봐야 할 작가다. 안톤 체호프 단편선은 출판사마다 여러 종류의 책이 나와 있는데 각 출판사별로 담겨 있는 작품들의 목록이 조금씩 다르니 잘 비교해보고 사는 것이 좋다.(이번 리뷰는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 단편선>을 읽고 썼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픈 단편은 <관리의 죽음>, <티푸스> 그리고 <베로치카>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리고...... 죽었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 이현우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 / 이현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저번에 읽었던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에 이어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을 읽었다. 이번에는 총 12명의 남성작가를 다뤘다. <광장>으로 유명한 최인훈 작가부터 시작해서 이병주, 김승옥, 황석영, 이청준, 조세희, 이문구, 김원일, 이문열, 이인성, 이승우, 마지막으로 김훈까지. 한국문학사에 이름이 남은 작가들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들의 대표작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여성작가편에 이어 남성작가편에서도 근대 소설에 부합하는가를 기준으로 작가들과 그들의 대표작을 분석한다.(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을 때 기준을 가지고 읽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냥 책을 읽는 것에 비해 비판적인 시각과 명확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남성작가편에서 다룬 작품들에는 근대 사회의 모습을 포착한 소설들이 꽤 존재한다. 농촌과 고향이 사라지고 도시와 공장이 생기며 자연스레 탄생하게 된 방랑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나 하층계급에서 상층계급까지 모든 층의 시각을 아우르며 근현대로 넘어오는 한국사회의 단면들을 보여준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로 옮겨간 사회의 중심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 이문구의 <관촌수필>, 근현대 한국의 가장 큰 상처이자 사건인 남북 분단을 보여주는 대표작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까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한 소설들이 한국 문학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지속적으로 근대 장편소설의 부족함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다. 저자는 단편소설은 단편소설만의 가치가 있고 장편소설은 장편소설만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둘의 역할이 다르다는 소리다. 한국의 근현대화 과정에는 커다란 사건들이 여럿 존재한다. 4.19 혁명, 유신 헌법 반대 운동, 5.18 민주화 운동, 각종 파업과 노동쟁의, 6.10 민주항쟁, 현대에 이르러서는 촛불 시위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까지. 한국은 현대의 한국이 되기 위해서 여러 번 커다란 진통과 고난을 겪어왔다. 그 시대를 함께 지나온 한국 문학에는 장편소설이 반드시 필요하다. 앞에서 말한 굵직한 사건들을 자세히 다루려면 어쩔 수 없이 거대한 스케일과 긴 분량이 필요하고 이것은 단편소설이 감당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남성작가편에 나오는 작가들의 행보를 아쉬워한다. 황석영이 <삼포 가는 길>에서 보여준 주제의식을 밀고 나아가 노동자와 사업가, 그리고 노동 현장의 거대한 부조리 등에 대한 리얼리즘 장편소설을 쓰지 않고 대하 역사 소설 <장길산>으로 길을 틀어버린 것,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여러 계급 각자의 시선만을 보여준 연작소설로서 쓰여 근현대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한 상세한 묘사, 사회 체재 자체의 문제로 인한 붕괴 등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장편소설로 나아가지 못한 것 등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갖가지 파업과 노동쟁의가 있었는데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없다면 한국문학의 결핍이고 빈곤이다.' 실제로 막상 떠올려보려고 하면 근현대 한국의 굵직한 사건들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은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아쉬운 일이긴 하나 전적으로 작가들의 탓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의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 파업, 노동쟁의 등 민감한 사안들을 본격적으로 소설에서 다룬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영화화 과정에서는 시나리오가 사전검열에 의해 난도질되고, 소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공장이라는 공간이 염전으로 생뚱맞게 바뀌어버린다. 노동운동, 계급 문제의 핵심인 도시와 공장이 시골과 염전으로 바뀌어버리니 제대로 된 영화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근대 장편소설의 부족함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그래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사회, 노동, 계급 문제들을 우회적으로나마 그려낸 작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어딘가 오래된 캐비닛 속에 검열과 협박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대단한 한국 근대 장편소설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성작가편에 나온 작품들 중 <무진기행>, <삼포 가는 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생의 이면>, <칼의 노래>는 이전에 이미 읽었었다. 책 속에서 다뤄진 나머지 작품들은 이제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 볼 생각이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과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중 고민하고 있는데 아마 <낯선 시간 속으로>를 먼저 읽지 않을까 싶다. 한국문학에 대해 꼼꼼히 기록한 좋은 안내서를 읽고 나니 조금은 실험적인 소설인 <낯선 시간 속으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 책 속 한 문장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표현이 많이 인용돼서 '김훈'이라는 이름 뒤에 항상 붙어 다닌다. 진작부터 있어왔던 벼락인데 갑자기 발견됐다는 점도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콧수염> / 엠마뉘엘 카레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렇게 여운이 긴 소설은 오랜만이다.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주인공을 이해하고 심지어는 공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 몇 페이지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턱에 힘을 주면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느 날 면도를 하던 주인공은 계속해서 길러 온 콧수염을 밀어버리면 아내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밌는 장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콧수염을 깨끗이 면도한 주인공. 그는 외출했다 돌아온 아내의 반응을 기대하며 콧수염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 순간부터 재밌는 장난은 끔찍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변하게 된다. 그의 아내, 친구들, 직장 동료까지 모든 지인이 주인공의 사라진 콧수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데다, 원래 주인공에게 콧수염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콧수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주인공은 점점 헷갈린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콧수염의 유무에서 시작한 혼란은 점점 그 범위를 확장해나간다. 주인공이 살아있다고 믿던 아버지가 2년 전 돌아가셨다는 아내의 충격적인 말. 아내와 갔던 해외여행은 자신을 제외한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으며 생생하게 기억나는 아내와 부모님과의 식사를 아내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미친 걸까? 아니면 세상이 잘못된 걸까? 인간은 기억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곧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남편이고 2년 전 결혼식을 올렸고 OO회사의 회사원이고 등등. 자신의 기억을 부정당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알고 있는 자신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콧수염이 있던 자신이지 몇십 년간 콧수염이 없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콧수염의 유무라는 사소한 기억이 부정당하는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기억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어떻게든 콧수염의 존재를 증명해내야만 한다. 그렇기에 소설 내내 기억을 부정당한 인간의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이어진다. 어떻게든 콧수염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내려는 주인공의 행동이나 콧수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거의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표출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를 대입해보게 된다. 나는 어떨까. 내게 너무나 명확한 기억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의해 부정당한다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믿고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나임을 부정당하는 그 과정을 버티고, 흔들리지 않고, 내가 나임을 끊임없이 믿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매우 탁월하게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신뢰를 쥐락펴락한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므로 당연히 주인공의 기억과 이야기를 믿고 따라가던 독자는 어느 순간부터 헷갈리게 된다. 단순한 콧수염의 유무에서 시작된 기억의 부정이 점점 확장되면서 독자는 아내의 말과 주인공의 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소설의 끝까지 작가는 독자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 주인공이 잘못된 것인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다른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성을 획득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 속에 인간 하나가 던져진다면 그 인간은 어떻게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할 것이며 그 존재성은 누가 긍정해줄 것인가? 콧수염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세상은 세상대로 자신이 옳다고 믿을 것이며 어느 쪽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지구에서 볼 때는 달이 움직이고 달에서 볼 때는 지구가 움직이는 것처럼. 존재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소설의 설정과 서사에 녹여낸 작가의 능력이 감탄스럽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당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언제든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할 수 있는 상황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것과 자신이 믿고 있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세상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으로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소설 내내 쌓아 온 주인공의 서사는 결말에서 전율이 흐르도록 강렬하게 산화한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갈 정도로 강렬하고 여운이 남는 결말이었다. 콧수염을 기를 생각은 당분간 하지 못할 것 같다. 소설 속 한 문장 긴장해 있던 정신은 이제 모든 게 끝나고 제자리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자, 비로소 평정을 되찾았다.
<사양> 다자이 오사무
<사양> / 다자이 오사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문장이 아름다운 소설이다.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나약하고 섬세하면서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득하다. 이전에 읽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는 다르게 <사양>의 화자는 가즈코라는 여성이다. 혼란의 시대 속에서 뱃속 아이와 함께 꿋꿋이 살아남기로 하는 그녀의 의지도 감탄스러웠지만 나는 나오지에게 계속 마음이 갔다. 귀족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닌 나오지는 귀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살하고 만다. 둘 중 어떤 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읽으면서 수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전쟁이 끝나고 혼란스러운 일본, 화자 가즈코와 그의 동생 나오지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점점 몰락해가는 귀족이다. 아버지가 죽고 가세는 점점 기운다. 결국 그들은 도쿄의 저택을 떠나 한 산골의 산장으로 이사 오게 된다. 귀족이었던 그들은 일하는 법도 돈 버는 법도 알지 못한다. 하루하루 인생을 이어나가며 쌓여있던 재산을 축 낼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민주주의 사상, 혁명의 사상이 물결처럼 밀려들어오는 시대에 귀족이라는 신분은 점점 사라져 간다. 이 소설은 귀족으로 태어나 살아온 세 명의 인물이 더 이상 귀족은 설 자리가 없는 전후의 일본에서 각각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준다. 가즈코와 나오지의 어머니는 귀족으로 살다 죽기를 택한다. 마지막 귀부인의 모습으로 기품과 품위를 지키던 그녀는 돈벌이라는 현실의 문제에 부딪혀 산골의 작은 산장에서 폐렴에 걸려 숨을 거둔다. 나오지는 자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자살한다. 서민들의 노동으로 편하게 생활하던 귀족 신분이 부끄러웠던 나오지는 애써 서민들의 무리에 섞여 자신이 귀족임을 부정하려 하지만 귀족으로 자라나 살아온 그에게 완전한 서민의 생활은 본능적 거부를 불러일으킨다. 서민들도 나오지를 온전한 동류로 취급해주지 않고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선을 그어버린다. 그렇다고 고급 살롱에서 실생활과 전혀 관련 없는 예술 얘기들로 매일을 보내는 귀족의 생활로 되돌아가지도 못한다. 서민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던 나오지는 어설프게 그들과 융화되었고 고급 살롱의 역겨운 고상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두 계급의 중간에 어설프게 자리해 그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한 그는 방탕한 생활로 괴로움을 잊으려 노력하다 자살하고 만다. 가즈코는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그러나 유부남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한다. 혼란스러운 시대, 아버지를 밝히 못해 사생아와 그 어머니로 불리게 될 상황에도 그녀는 뱃속 아이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사랑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생아의 어머니로 불리게 될 가즈코. 그녀의 앞길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 험난한 역경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사생아와 그 어머니를 가로막는 낡은 도덕 따위는 가즈코에게 뛰어넘어야 할 벽일 뿐이다. 사랑하는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가즈코는 모든 역경을 뛰어넘어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녀는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오지에게 가장 마음이 갔다.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그의 마음속 슬픔, 외로움, 고통은 나오지가 가즈코에게 남긴 마지막 유서에서 사정없이 독자를 난도질한다. 나오지가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소설 속 한 문장 누나. 나는 귀족입니다.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 에드거 앨런 포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처음 읽어 본 에드거 앨런 포의 책이다. 총 열네 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단적으로 감상을 먼저 말하자면...... 아주 별로였다.(적어도 나에게는) 장점을 꼽자면 건조한 문장과 문체,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묘사들에서 풍겨지는 분위기를 들 수 있겠다. 추리 소설, 고딕 소설, 호러 소설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인만큼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매력적이었다. 음울한 모습의 거대한 고성이라는 배경과 그 느낌을 그대로 이어받아 펼쳐지는 이야기는 꽤나 음침하고 어찌 보면 찝찝하기까지 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어김없이 일어나는 누군가의 죽음, 이해하기 힘든 인물들의 행동과 비현실적인 사건들은 궁금증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그 외에 이렇다 할 매력을 찾지 못했다. 소설에서 풍겨지는 분위기(심지어 이러한 분위기도 이후 많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되어 굳이 지금 시대에 포의 소설을 찾아 읽을 이유가 될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러한 분위기의 소설을 창시한 작가나 다름없으며 그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외에 서사, 캐릭터 등 소설의 여러 가지 요소에서 나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없었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구덩이와 추, 도둑맞은 편지, 윌리엄 윌슨 등의 작품은 서사가 매력적이었고 흡입력도 좋았다. 그러나 그 외의 작품은...... 흠. 특히 포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리지아나 검은 고양이, 아몬티야도 술통과 같은 작품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위의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내게 거슬렸던 것은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행동에 대해 전혀, 무엇 하나도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리지아에서 주인공은 첫 번째 부인, 리지아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죽은 첫 번째 부인의 환영이 두 번째 부인의 시신에서 부활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건 당연하게도 주인공의 환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첫 번째 부인의 아름다움, 지성, 기품을 예찬하는 말을 끝없이 늘어놓는데 뭐 어떡하라는 건지. 결국 그냥 얼빠였다 이건가?(이렇게 리지아를 사랑했다는 놈이 리지아의 성도 모른다.) 아무리 주절주절 말로 예찬을 늘어놓는다 한들 주인공이 첫 번째 부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일화라던가 사건이라던가 눈 앞에 보여주는 무언가가 없으니 주인공의 리지아에 대한 사랑이 와 닿지 않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두 번째 부인의 시신에서 부활하는 리지아의 환영을 목격하는 주인공의 정신상태 이상이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냥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나 라는 생각뿐. 검은 고양이나 아몬티야도 술통도 마찬가지다. 두 단편에서 주인공은 이유가 없다시피 한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다.(이유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소설 내에서 독자에게 설명되지 않는다.) 심지어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끼던 검은 고양이의 한쪽 눈을 생으로 파내기까지 한다. 검은 고양이에서는 알코올 중독과 타락에 빠져들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법이 있기에 그것을 어기고 싶어 하는 본능과 비슷한 느낌이다.)이 주인공을 미친놈으로 만들었다고 설명되며 미친 주인공은 아내를 끔찍하게 살해한 후 벽 안에 넣고 회반죽을 발라 살인을 은폐한다. 아몬티야도 술통에서는 독자에게 설명되지 않는 어떤 이유(친구가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겼다는 이유이나 자세한 내막은 설명되지 않는다.)로 주인공은 아몬티야도 포도주를 빌미로 꾀어낸 친구를 산 채로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지하묘지 벽안에 가둬버린다. 그래, 그냥 주인공들이 미친놈이라고 치자. 인간의 광기와 타락하고 싶어 하는 본성을 보여주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살인까지 이르는 과정이 전혀 흡입력이 없으며 재미도 없다. 주인공은 그냥 미친놈들이며 살인에 있어서 어려움은 하나도 없다. 뭔 놈의 사람 죽이는 게 이렇게 쉬운지. 편의점에서 컵라면 사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데 그렇다고 그 이후의 과정이 스릴 넘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멍청한 경찰들과 멍청한 친구는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에서 주인공을 의심할 생각 하나 제대로 못하는 인물들이고 심지어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은 객기를 부리다 아내의 시체와 함께 자기도 모르게 묻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인해 살인을 들킨다. 멍청한 경찰에 멍청한 주인공이다. 포의 소설은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치열하게 탐구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영...... 사건과 서사를 떠나서 생각해봐도 인물들의 심리가 내면까지 치열하게 탐구되고 파헤쳐져 묘사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주인공이 멍청하다는 것과 정신이 이상하다는 것 외에 딱히 인간 내면의 심리와 본성에 대해 감탄하거나 고뇌해볼 만한 부분은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유명한 작가고 많은 이들이 애정 하는 작가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주관적 견해의 기호품인 만큼 나에게는 매력을 느끼기 힘든 작가였다. 위에서도 썼듯이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견해를 적은 글이므로 나와 정반대로 포의 소설에 흠뻑 빠지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이 글은 재미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소설 속 한 문장 수학적 공리는 결코 일반적 진리의 공리가 아닌 것이네.
<거의 모든 거짓말>
<거의 모든 거짓말> / 전석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우리는 진실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거짓말 저 너머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백색으로 남아 있는 진실의 영토가 있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짓말 자격증이 있는 세상. 주인공인 그녀는 2급 거짓말 자격증 소지자다. 1급 자격증을 따는 날은 요원해 보이기만 하는 상황에서 큼지막한 의뢰 두 건이 들어온다. 손님인 척하며 레스토랑의 상태나 직원들의 접객 태도를 테스트해 달라거나 신부 측 친척으로 위장해 결혼식 자리를 채워달라는 평범한 의뢰와 전혀 다른 의뢰다. 한 남자, 한 소년이 그녀를 사랑하는지 확인해달라는 것. 그녀는 최선을 다해 남자와 소년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객관적인 사실들(잠자리를 같이 보내려 하는지, 그녀를 볼 때 신체 반응이 어떤지, 얼마나 자주 연락하는지 등등)을 기록하며 보고서를 작성해나간다. 이번 의뢰만 제대로 끝낸다면 1급 자격증을 딸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이 소설에서는 거짓말과 진실이 구분되지 않는다. 거짓말이 진실이 되기도 하고 진실이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기도 하고, 또 모든 것이 진실이기도 하다. 사실 이 소설을 떠나서 인간은 거짓말과 진실을 구분할 수 없다. 당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꺼낸 말을 당신이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진실이며, 믿지 않는 다면 그것은 당신의 거짓말이다. 당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믿어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더라도 거짓말일 수 있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비꼬듯이 말하더라도 진실일 수 있다. 우리는 영원히 타인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타인의 머릿속에 들어가 생각을 뒤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결국 중요한 건 당신이 믿느냐 믿지 않느냐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생각했다. 사실은 존재하지만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남자가 여자에게 꽃다발을 선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앞의 사실을 통해 추론해본다면 진실에 가깝겠지만 아니더라도 어쩌겠는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해서 사실을 통해 진실을 알아내려 한다. 그래서 인간은 연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진실을 수십, 수백 번의 사실 확인을 통해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꽃다발을 사다 줬다는 사실과 상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진실 사이의 관계는 까마귀가 날아서 배가 떨어졌다는 인과관계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가정일 뿐인데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그녀는 곁방에 가득 들어있다는 고급 물건들과 번쩍거리는 커다란 미제 오디오를 보고 어린 시절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정의 경제 상황에도 큰 문제없이 자랄 수 있었다. 곁방과 미제 오디오에 곁들여진 부모님의 거짓말이 어린 그녀가 빚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성장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곁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심지어는 커다란 미제 오디오조차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된다. 그러나 그 텅 빈 것들이, 텅 빈 거짓말이 그녀의 어린 시절을 지켜준 것은 사실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와 진실 없이 텅 비어 보이는 거짓말을 열었을 때 가득 들어차 있는 애정이다. 소설 속 한 문장 "저거 텅 비었어. 겉만 번지르르하지."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외 5권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외 5권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간 책은 꾸준히 읽었으나 리뷰를 올리지 못했다. 개인적인 일이 바빴던 탓이다. 리뷰를 쓰는 것은 책을 읽는 일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라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었다. 그러나 읽은 책이 쌓여가고 리뷰는 쓰지 않고 있는 상황에 왠지 모를 부채감이 찾아들어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차에 시간이 조금 났고 간략하게라도 그간 읽은 책들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되었다. 아래의 책들은 읽은 시간 순에 따라 나열했다. 읽을 책을 찾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기쁘겠다는 마음으로 쓴다. 1.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이다. 대성당을 모두 읽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왜 레이먼드 카버가 아메리칸 체호프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의 단편은 평양냉면이다. 처음 먹을 때는 밍밍한 맛에 '도대체 이게 뭐가 맛있다는 거지? 밍밍하고 아무 맛도 안 나는데?' 하는 생각뿐이지만 시간이 지나 곱씹어보면 또 먹고 싶어지는 그런 소설이다. 대성당에 실린 단편들에는 크게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길들여진 현대의 독자에게는 이것보다 더 싱거울 수가 있나 하는 전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이 나누는 대화들 뿐. 그러나 대화, 묘사, 서술,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맛이 난다. 대성당에 실린 단편들은 하나 같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 관해 말한다.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는 행위, 대화와 공감의 진정한 의미,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그 지나치게 어려운 행위가 마침내 일어났을 때 느껴지는 전율과 나타나는 희망. 추천하고픈 단편은 <보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리고 표제작인 <대성당>이다.(참고로 나는 평양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책 속 한 문장 [그녀는 남편의 맨발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맨발 옆에 고인 물을 쳐다봤다. 이런 이상한 광경을 보는 일은 남은 평생 한 번도 없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2. <지하생활자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은 자신만의 지하에 사는 인간이다. 그는 1부에서 자신이 왜 지하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장황하게 온갖 논리와 의견을 내세우며 설명한다. 그의 논리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과격한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그는 지하인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자인 것처럼 느껴지며, 심지어는 이런 세상에서 지하인이 되지 않은 다른 인간들은 전부 멍청이거나 미련한 자거나 바보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2부에서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한 사건을 서술한다. 거기서 우리는 앞에서 들었던 주인공, 지하인이란 어떻게 생각하는 자이며 어떻게 행동하는 자인지를 엿볼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 속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 사이에서 생기는 극도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자기혐오와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똘똘 뭉친 자가 바로 지하인이다. 얼핏 사르트르의 <구토>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같은 느낌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지하인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과 이상 속 자신이 완전히 합치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런 인생을 살지 못한다. 단지 그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지하에 발을 걸치고 있다. 그리고 언제 그곳으로 빠져버릴지 모른다. 책 속 한 문장 [그러나 2X2는 4란 것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3.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저 <죄와 벌>은 한 살인자의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이다.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의 내면을 쭉 따라가며 그 생각의 변화를 지독하리만큼 집요하게 서술한다. 주인공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백과 은폐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한다. 책의 뒤표지에 적힌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는 문장처럼 이 소설은 주인공의 살인 계획부터 마지막 결말까지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서를 작성하듯 서술해 나간다. 이 한 편의 보고서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는 평생 체험해 볼 수 없는 살인자의 깊은 내면까지 침잠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을 체험해보는 일이 이 한 권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죄와 벌>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무언가와 타협해 버린 듯한 결말이 아쉬울 따름이다. 죄와 벌, 선과 악을 결정하는 기준에 대한 더욱 치열하고 적나라한 고민이 결말까지 이어졌다면 좋지 않았을까. 책 속 한 문장 ["하나의 목숨으로 수천의 생명이 부패와 붕괴에서 구원되는 거야."] 4.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오은 저 리뷰에서 처음으로 다루는 시집이다. 시집을 많이 읽지는 않으나 내가 지금껏 읽었던 시집 중에는 가장 좋았다. 언어유희, 말놀이, 말장난 등으로 불리는 그의 시는 같은 언어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에 대해 논의한다. 언어와 실존하는 사물의 관계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공은 축구공 같은 공이기도 하고 비었다는 뜻의 공이 되기도 하고 공적인 일을 말할 때의 공이기도 하다. 같은 언어로 여러 다른 사물 또는 의미를 지칭한다는 것은 언어가 사물과 동치 관계가 아님을 뜻한다. 그렇다면 언어는 현실과 동떨어진 그저 의미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러나 언어는 실제로 사람들을 움직인다. 실재하지 않는 의미 없는 소리가 실재하는 인간들을 움직이고 사물을 지칭하고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 시집은 언어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탐구의 결과다. 현실과 같을 수 없고, 완벽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탐구를 업으로 삼는 시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늘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늘 사용되기에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 언어. 오은 시인은 남발되는 언어를 재조합하고 재발견함으로써 언어의 생소함을 일깨운다. 당연하게 사용되는 것들을 탐구해 당연하지 않게 만드는 그의 시.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시원한 초가을, 당신을 시 원하게 만드는 시집일 것이다.(광주에 오셨을 때 직접 뵙고 시집에 사인받은 건 자랑. 다 끝나고 사진 찍는 거 모르고 그냥 가서 아쉬운 건 안 자랑.) 책 속 한 문장 [날이. 또다시 샌 것 같았다. 김도. 빠지는 것 같았다. 기운이.] 5. <돼지꿈> 황석영 저 황석영 작가의 단편집이다. 그 유명한 <삼포 가는 길>뿐 아니라 <돼지꿈>, <객지>등 황석영 작가의 굵직한 대표 단편들이 실려있다. 리얼리즘 문학의 대가인 황석영 작가의 단편들인만큼 시대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날이 세워진 칼로 싹둑 잘라내어 그대로 펼쳐 놓은 듯하다. 어찌나 날카로운 칼인지 문학적 가치는 둘째치고 역사적 가치를 위해서라도 보존해야 할 단편집이 아닌가 생각했다. 과거의 대한민국에서 쓰이던 어휘, 말투, 문장들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생소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한민국의 과거를 눈 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이 단편집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과거의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살던 사람들이 겪었던 일들을 그린다. 지금 너무나 당연한 것들은 원래 당연하지 않았다. 당연한 당연함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했던 이들의 모습을 보면 울컥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는지, 또 현재의 우리는 이후의 세대들이 지금보다 한 발 나아간 당연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책 속 한 문장 ["세상에 자기 집이 있는 게 제일 좋은 거야."] 6. <여름의 책> 토베 얀손 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민의 작가 토베 얀손의 소설이다. 섬에 사는 손녀와 할머니가 겪는 에피소드 형식의 짧은 이야기 스물두 편이 엮여 있다. 민음사 유튜브에서 마케터 분이 추천하시는 걸 보고 사서 읽었는데 각박한 현실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에 좋은 소설이다.(짧아서 부담도 없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할머니와 손녀의 특이한 관계가 눈길을 끈다. 둘의 대화만 보면 이게 할머니와 손녀인지 그냥 친구 둘이 이야기하는 건지 모를 정도다. 심지어 할머니가 손녀에게 삐지거나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 둘이 여름의 섬에서 겪는 일들을 차분히 따라가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특히 할머니를 할머니라는 역할이 아닌 한 사람으로 보고 그 생각과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대부분의 책에서 노인은 현명한 조언자 정도의 역할로 소비되기 마련이니까. 짧은 에피소드들이 엮인 책이니만큼 자기 전에 에피소드 한 편씩 읽고 자면 딱 좋은, 잠자리가 따뜻해질 만한 책이다. 유럽의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책 속 한 문장 ["일흔다섯도 안 되었잖아." 할머니가 말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할 수 없어?"] p.s. 요즘 트위치에서 '으아아우악'이라는 닉네임으로 개인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게임 방송이나(주로 에이펙스 레전드) just chatting 방송을 주로 하는데 재밌더군요. 책 이야기도 가끔 하곤 합니다. 심심하시거나 방송이 궁금하신 분들은 https://www.twitch.tv/sam931107 로 놀러 와 주세요! (월, 화, 목 오후 10시에 정규 방송 시작합니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원종우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 원종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 책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제목만 보고 집어 든 책이다. 공대생으로써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었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라니.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과 물리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고 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섞어놓은 제목만으로도 내 지갑을 열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 기대만큼이나 즐겁고 재미있게, 마치 놀이를 하듯이 순식간에 읽어버린 책이다. 이 책은 짧은 SF 소설 여덟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소설의 앞과 뒤에 각각 소설 속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과 아이디어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앞설과 뒷설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이다.(+저자의 농담과 유머도 함께 들어있다.) SF 소설 속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에 대해 어려움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SF라는 장르에 입문하기에 아주 좋은 구성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SF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과학을 모르면 SF 소설을 읽을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해 말이다. 그러나 SF 소설을 실제로 몇 편 읽어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스파이가 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 스파이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만 소설을 즐길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는 여러 가지 과학적 소재들을 서사와 엮어 풀어놓았다. 제목에 나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노화,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 SF라면 빠질 수 없는 광속 우주선과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현대 과학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과제들이 이루어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미래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캐치해서 보여준다. 이번에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지만 SF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에도 흔히 생각하는 Science와는 거리가 먼 어떤 지점들을 건드린다. 무한한 삶이라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 혹은 과학의 발전, 문명의 발전을 위해 인류가 아닌 종의 생명을 희생시켜도 되는가 등등.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한다는 어찌 보면 순수하기까지 한 과학의 의미 자체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과 윤리와 가치 판단의 기준들을 꺼내 뒤흔든다. 현재는 맞닥뜨릴 일이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내려야 할 결단을 미리 경험하고 체험하도록 만든다. 과학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가끔 잊어버린다. 과학이 사실 너무나 많은 것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과학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윤리, 산업 전반에 걸쳐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이번 코로나 사태만 봐도 생명 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키트 하나가 정치, 외교, 경제 곳곳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SF 소설은 바로 그 부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과학은 인간이 있는 이상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순수한 학문으로써 남을 수 없다는 부분을 말이다. SF 소설에서 과학이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드러내는 소재로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이유다. 이 소설집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앞설이다. 짧은 단편에서 마지막에 나타나는 반전은 커다란 재미이자 묘미인데 앞설에서 저자가 설명한 내용이 오히려 소설의 마지막 반전을 예상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차라리 앞설의 내용을 뒷설에 더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하나의 아쉬운 점을 제외하면 SF 초심자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좋은 SF 소설이다. 소설 속 과학에 대한 설명도 읽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어디 가서 튜링 테스트 얘기 나왔을 때 아는 척 하기 충분한 설명이 들어있다.) 가볍고 즐겁게, 또 과학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SF에 입문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소설 속 한 문장 이상입니다. 나의 전례 없는 대규모 파괴 행위가 과연 저들이 자신들의 행성에 저지른 일과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인지 아닌지는 현명한 집정관 여러분이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 제임스 조이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율리시스> 일 것이다. 그 문학성과 더불어 난해함으로도 유명한 그 책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작가 자신이 창조해낸 새로운 단어와 신화의 서사, 상징, 비유를 버무려 만든 영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조이스는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이기도 하다. 당시의 모더니즘 문학을 주도했으며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게 된 건 조이스의 작품 중에 그나마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조이스의 소설을 한 번쯤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는지라 단편집인 <더블린 사람들>을 제하고 너무 허들이 높아 보이는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를 제하자 남은 게 바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작품을 읽은 감상은...... 못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읽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이 정도인데 <율리시스>나 <피네간의 경야>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읽는 걸까.) 사실 읽기 어려운 것 치고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의 성장기이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한 주인공이 가정에서 떠나는 시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 명문 쿨롱고우스 학교에 다니던 스티븐은 가세가 기울며 학교를 그만두고 더블린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신부가 또 다른 명문 벨비디어 학교에서 스티븐이 수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곳에서 종교와 하느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 좋은 수학 태도와 성적을 보여준 스티븐에게 벨비디어의 교장이 성직자의 길을 제안하지만 스티븐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느 순간 자신의 길이 창조적인 예술가가 되는 것임을 깨달은 스티븐은 자기 나름의 이론적 무장과 준비를 마치고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을 살기 위해 가정과 더블린과 조국 아일랜드를 떠난다. 그리 어렵지 않고 간단한 스토리임에도 널뛰기를 하듯 현실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주인공의 의식을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서술 기법 때문에 읽는 것이 쉽지 않다. 그에 더해 생소한 아일랜드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 상황 및 종교적 상황을 모르면 해석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기반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그나마 수월하게 읽어 나갈 수 있다.(1장을 읽고 나서 책 뒤에 있는 아일랜드 역사 개요와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아일랜드에서 종교가 가지는 의미를 다 찾아서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에 2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한 어려움을 상쇄시킬만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문장과 묘사,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서술을 들 수 있겠다. 굉장히 탐미적인 문체가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상세하고 직관적인 묘사(특히 지옥에 대해 신부의 입을 빌려 묘사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 부분만은 정말 빠져들듯이 읽었다.)가 매우 뛰어나며 시점과 화자와 시간대와 인물의 내외부 의식이 쉴 새 없이 바뀌면서도 끊기는 부분 없이 자연스럽게 서술되는 글의 흐름은 감탄을 자아낸다.(읽는 독자조차도 언제 시간이나 시점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과거 얘기인 줄 알고 읽고 있는데 이상해서 앞으로 돌아가 보면 이미 한 페이지 전부터 현재 얘기로 다시 돌아와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이토록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게 서술하는 것 자체가 매우,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초반부와 후반부는 나름 재미를 느끼며 읽었다. 어린 스티븐이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와 종교적인 관점들은 흥미로웠고, 청소년이 되어 처음으로 창녀촌에 가서 여성과 관계를 맺은 스티븐이 하느님의 규율을 어겼다는 죄책감을 느껴 지옥에 갈 것을 두려워하며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꽤나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후반부에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스티븐이 여러 철학자와 종교인들의 사상을 공부해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고 꿈과 자유를 위해 집과 조국을 떠나는 장면은 스티븐의 정신적 성장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스티븐이 말하는 자신의 생각과 그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아퀴나스의 사상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던 영역을 건드려 지식과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의 중반부는 지옥이었다. 전혀 스티븐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고 그의 선택도 하나 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영원히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죄를 뉘우치며 살 것처럼 말하던 스티븐이 성직자 생활의 냉기와 성실함, 질서 정연함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성직자는 내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친구들이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로 놀리는 소리를 들으며 디덜러스라는 자신의 이름이 다이달로스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장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 갑자기 자신의 숙명은 예술가임을 느끼며 전율하는 장면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의 하느님의 종이나 다름없이 신실하게 살아가던 스티븐이 영원히 성직자로 살 생각을 하자 까마득해져 성직자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조금 급작스럽긴 하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까지는 납득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다이달로스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갑자기 자신의 숙명이 예술가라는 걸 깨닫고 거의 환희를 느끼며 전율하는 장면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너무나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고 그전까지 꿈에 대한 갈등이나 창작에 대한 열정을 확연히 드러내지도 않던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장의 이름인 걸 알게 되자 그 이름을 따라서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는 건 생각의 회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지 해석이 되지 않았다. 뒤의 해설에서는 이피퍼니(Epiphany)를 설명하며 인간의 모든 위대한 결정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관점으로 이 부분을 해석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 해설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저 디덜러스라는 이름을 이용한 서사 완성을 위해 억지로 끼워 넣어진 장면 같았다.(애초에 숙명 따위가 있을 리가.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굳이 이름의 의미를 들먹이며 자신에게는 예술가의 길이라는 숙명이 주어져 있다는 얘기까지 굳이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초반부와 후반부는 좋았으나 중반부가 아쉬운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주인공의 생각의 흐름이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아쉬움은 내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다. 아직 조이스의 어렵고 난해한 작품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을 읽어낼 만큼 나의 지식수준이 높지 않기 때문에 이런 아쉬움이 찾아온 것이리라. 언젠가 조금 더 나이가 먹고, 조금 더 많은 것들이 머리에 든 상태에서 한 번 더 읽어보면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내가 더이상 믿지 않는 것은 그것이 설령 나의 가정이나 나의 조국이나 아니면 나의 교회라 할지라도 섬기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