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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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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가 끝나버렸다. 주말이 남았지만 휴가에 포함하지 않기로 한다. 사실은 친구와 부산행을 계획하고 기차표와 숙소까지 예약해두었지만, 부득이하게도 그가 갑작스러운 회사업무로 인해 휴가를 낼 수 없게 되어, 모든 걸 취소하게 되었다. 세상에. 할 것이 없었다. 기차표를 취소하고 환불받은 돈으로 티셔츠를 두 장 구입했다. 그 티셔츠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미국에서 오고 있는 것이어서, 둘 다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내년이 되기 전에는 도착해있겠지. 준비할 시험이 있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보던 드라마를 최종회까지 마저 보았다. 그 드라마는 정치적 올바름으로만 무장돼있어서, 아이러니라고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드라마라기보다는 조금 공들여 만든 공익 캠페인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회부터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는 드라마에는 낯이 익은 남자배우의 얼굴이 나왔다. 세상에. 그는 한때 나와 대학에서 타 과의 극작 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써온 희곡을 서로서로 배역을 맡아 리딩을 하고는 했는데, 당연히 그가 내 희곡의 한 인물을 맡아 연기를 하기도 했다(당시 내 희곡의 제목은 「독설가 구라 씨의 一日」이었다). 나는 그의 연기가 전공자치고는 그리 훌륭한 편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고, 발음도 연기하는 사람치고는 어눌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내가 쓴 대사의 토씨들을 조금씩 바꿔가며 읽었는데, 연기라고는 모르는 나로서는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머리가 상당히 길었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짧은 머리로 등장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그렇게 젊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 드라마에서도 역시 젊어 보이지는 않았다. 바이크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던 그가 생각난다. 포털 기업이 등장하는 다른 드라마의 첫 회를 보았다. 이 드라마는 김은숙 작가의 오랜 보조 작가였던 이의 입봉작이다. 그녀는 한때 나와 같은 과의 한 학년 선배이자 같은 동아리 멤버였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시청하면서, 역시 그녀 특유의 취향이랄 것이 잔뜩 묻어나는군,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필명을 쓰고 있는데, 왜 굳이 필명을 쓰는지 궁금해졌고, 이제는 연락처조차 모르는 그녀에게 왜 필명을 쓰느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너, 너 말이야. 웃기게 들리겠지만, 약 10년 뒤에 너는 이러이러한 제목의 드라마의 작가가 돼 있다. 너는 또한 이러이러한 필명을 쓰고 있을 테고. 왜 넌 필명을 쓴 거니? 아직 닥쳐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입봉한 소감이 어때? 이렇게 묻는 내 앞에서 그녀는 아마도 담배를 피우며, 그게 대체 무슨 황당무계할 정도는 아니지만,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다. 휴가 동안 고작 한 일이라고는 이런 엉뚱한 상상뿐이다. 아니다. 나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재미있고 친절한 책을 왜 지금까지 읽지 않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던 <김수영 문학상> 투고를, 마음을 바꿔 예정대로 올해 하기로 했다. 내 시는 아마도 투고된 여러 원고 중 단연 튈 것이라 어느 정도는 장담한다. 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이런 것도 시인가, 혹은 어떻게 이런 걸 시집 원고로 묶어 낼 생각을 했을까, 과연 양심이란 것이 있는가, 라는 논의에서는 꽤 유효한 지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수영 문학상 역대 수상자 중에는 그야말로 으리으리한 시인들의 시집이 대거 포진해있지만, 김수영 시인이 분개할만한 그야말로 형편없는 시집들도 사실 적지 않게 껴 있다. 이러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내가 그곳에 투고한 것이 그렇게 문제적인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김수영 시인의 사진을 보면, 흡사 배우 안성기나 양조위와 조금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혹여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수상소감에 “김수영 시인을 생각하면, 첫 번째로 안성기나 양조위가 떠오릅니다. …… (중략)”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세상에. 많은 독자가 분개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