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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5) - 1935년, 진주
'처음 형평운동을 일으켰을 당시 약 12년간 기간을 예상하여, 이를 선전, 사업, 실험의 3기로 나누어 착착 수행해 왔습니다. 이제 거의 3기의 과정을 모두 실천했기 때문에 형평운동은 완성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대중과 같은 수준에서 그들과 같은 보조로 운동을 전개한다는 의미에서 명칭도 새로 고친 것입니다.' 1935년 4월 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형평사 창립 발기인 중 하나인 백정 장지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점 즈음부터 형평사는 이름을 대동사로 바꾸죠. 한편, 마찬가지로 형평사 창립에 관여했던 강상호는 대동사와 상호 교류를 단절하고 은둔하다시피 합니다. 어째서 그는 모멸을 참으면서 몸소 참가한 사회 운동 단체에서 손을 뗀 걸까요? 정말 장지필 말대로 백정들의 형평 운동은 완성되었을까요? 1923년 형평사가 회원 80여 명으로 처음 시작했을 때 이후 대동사가 되기까지 그 사이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923년 24개 동리 농청 대표자 70여 명이 모여 반형평운동을 결의했던 의곡사. 진주 시내와 비교적 가깝다는 이유로 이 장소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농청은 시골 마을 두레의 집회소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하층 농민이나 머슴 등이 주로 구성원이었다고 하네요. 결국 반형평운동은 같은해 6월 형평운동이 여러 사회운동단체의 지지를 받고, 진주노동공제회가 양측 중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겨우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형평사가 3남으로 빠르게 세를 불리던 1924년 2월, 부산에서 형평사 전조선임시총회가 열립니다. 전국 지사, 분사 대표 330여 명이 참여한 이 모임에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나오죠. 바로 경남 진주에 있는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본사 이전 문제는 이때 회의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유보됩니다. 하지만 그 해 4월, 서울 본사 이전을 주장해온 장지필, 오성환 등이 대전에서 갑작스럽게 형평사 혁신 동맹 결성을 발표하죠. 이들은 본부를 서울로 하고, 그때까지 백정들의 처우 개선 문제만에 중점을 둔 형평 운동에 사회주의 노선을 도입하기로 합니다. 한편 같은 날 진주 본사에서 열린 전국형평사대회에선 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결의가 채택됐죠. 형평사 단체가 하루아침에 양분되어버린 겁니다. 양측 단체는 대립을 지속하다 같은 해 8월 형평사 통일 대회에서 각자 조직을 해체하고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기로 결의합니다. 본부는 진주에서 서울로 옮기기로 합의했죠. 하지만 이후 진척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양측은 결의 이후에도 계속 대치했고, 급기야 진주 본사가 지난 대회 합의를 불승인하는 결의를 내립니다. 이로 인해 양 파벌은 재교섭에 들어갔죠. 다행이 1925년 4월 서울 전조선형평대회에서 양 파벌은 통합에 합의합니다. 형평사 외 타 사회운동 연계 문제는 당분간 형평사가 내부 결속을 중점으로 다루기로 해 일단 보류했죠. 그러나 지방 형평청년회 등 하부 조직들은 개인 혹은 형평청년회 단위로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합니다. 이로서 형평사 역시 당대 사회 운동,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을 갖게 됐죠. 겨우 한 고비 넘겼나, 싶더니 금새 다음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1927년 4월, 일제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와 연계된 한반도 내부 조직을 확인하고 조직원과 간부들을 이잡듯이 찾아내 체포하죠. 이른바 고려혁명단 사건입니다. 고려혁명단 사건은 형평사에도 영향을 미쳤죠. 만주와 간도 지역 독립 운동 조직과 연계된 천도교 및 형평사 간부들이 고려혁명단 간부를 겸직하는 경우가 있었던 겁니다. 서광훈, 장지필, 오성환 등 형평사 간부들이 이 일로 줄줄히 체포되고, 형평사 조직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8년 4월 정기 총회에선 일제의 탄압을 계기로 각지 청년회를 해체하고 형평사 사내에 청년부 조직을 두기로 결의했죠. 조직 형태는 기존 느슨한 연맹체가 아닌 중앙집권제로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보류해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타 사회 운동과 제휴하는 문제로 제휴를 주장하는 신파와 전통적 형평 운동을 계속하자는 구파가 대립한 겁니다. 양측 갈등은 1929년 표면화되기에 이르죠. 1929년 말부터 세계대공황 여파가 전세계를 덮칩니다. 한반도 전역에서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집단에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대중 투쟁이 벌어진 것도 이 당시 경제적, 사회적 불안의 영향이 없다고는 못하겠죠. 형평사 내에서도 기존 조직을 해소하고 혁명 준비 조직을 재결성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당연히 반대파와 치열한 논쟁이 붙었고, 조직 내 갈등을 점점 증가만 했죠. 그러다 1933년 일명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이 터지면서 형평사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습니다. 일제 경무청에서 발표한 바는 이렇습니다. 1931년 2월 광주 지역에서 수육판매조합 설립과 관련해 분쟁이 발생합니다. 수육판매조합이란 도축을 한 고기를 받아와 파는 정육점을 의미하죠. 경찰이 이 분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형평사 내부에 비밀 결사가 있단 사실이 발견된 겁니다. 경찰은 신중한 내사 끝에 1932년 12월 25일 광주 형평사원 정석홍을 검거합니다. 이후 약 7개월간 형평사원 약 100여 명이 소위 형평청년전위동맹에 가담한 혐의로 검거되죠. 1932년 161개 지부 8293명 사원을 자랑하던 조직은 1935년에 98개 지부 6540명 사원 규모로 급감합니다. 또 지도부가 와해되다시피해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지도부가 형평사 조직을 장악하게 되죠. 1935년 4월, 형평사가 대동사로 개칭한 것엔 이러한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애국기 충남호 헌납 포스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각 사회단체는 국방성금을 모금하는 등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대동사는 성금을 거두어 '대동호'라는 비행기를 일제에 헌납했죠. 대동호는 위 충남호와 함께 1938년 7월 9일 대전에서 헌납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기상이 나빠 기체 두 대는 오지 못하고, 대신 울산에서 군용기를 띄워 대전 상공에서 비행 묘기를 선보였다네요. 이때 대동사는 이미 경제적 친목 이익단체로 변질해 있었습니다. 1940년이 되자 형평사의 핵심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도부조합, 즉 도축자 조합이 일제 관제 조합인 조선축산조합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대동사는 정치, 경제, 사상운동을 원천 금지당하죠. 조선 백정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형평사의 꿈은 이렇게 완결되지 못하고 끝나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광복을 맞은 후, 강상호는 칩거 생활을 끝내고 진주 3.1 동지회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또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곤, 마당 앞에서 보란듯이 그들의 빚 문서를 태워 탕감해 주죠. 그러한 행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 강상호는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보도 연맹이 조직되었을 때는 반강제로 가입하기도 했죠. 하지만 보도 연맹 학살 사건이 있기 전, 누군가 낌새가 이상하단 사실을 귀띔해 주어 학살 이전에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엔 전쟁 당시 그가 진주인민위원장을 맡았단 소문이 돌죠. 정부 당국은 그를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강상호가 사망한 건 1957년 12월 29일. 그는 죽을 때까지 당국의 감시 조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여생을 마쳤죠. 그가 죽가, 전국 백정 출신 인사들이 진주로 모여들어 9일장을 지냈습니다. 살아 생전 민족 운동과 백정 신분 해방 운동에 앞장서 나선 그에게 고마움과 애석함을 표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좌익 인사 활동 혐의 때문에 강상호는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그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재평가가 이루어져 대통령표창이 수여됩니다. 그의 묘 역시 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옮기려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형평운동의 발상지인 진주에서 모시는 게 의미가 더 크다고 반대했다는군요. 진주에 있는 강상호 선생 묘역. 1992년 6월 창립한 형평운동기념사업회라는 단체에서 지역 사회와 협력해 묘역을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사진은 해당 단체에서 찍은 제막식 당시 사진입니다. 1960년 한 청년이 육사에서 쫓겨났습니다. 4학년 때 그가 백정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학교 측에서 퇴학 처분을 한 거죠. 지역 의원까지 지낸 아버지조차도 자식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 모양입니다. 형평사가 꿈꾼 평등 세상은 여전히 멀게 보였죠. 학자들은 산업화로 인해 농촌공동체가 해산하고, 현재의 주민등록제가 시행되는 등 영향으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신분 차별이 사라졌다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리 녹록한가요? 일제 강점기란 비극적인 시대에, 형평사와 반형평사의 충돌 사건은 을들의 전쟁 가운데도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비슷한 전쟁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겠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마냥 안타까움만 가질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제 자신 또한 그러한 을들과 마찬가지 신세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죽거나 다쳤거나, 혹은 아픈 모든 이들을 위하여 애도를. 바라건데 매일 눈을 뜨는 내일이 잠자리에 눕는 오늘보다 더 나은 세상이기를 기원합니다.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4) - 1923년, 진주
1923년 5월, 탁윤환이라는 사람이 백정들이 자주 모이는 형평사 근처 주막을 찾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시키는데 때마침 술이 다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냥 조용히 물러났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을, 이 사람 돌연 목청을 높여 따지고 들었죠. '백정 놈들에겐 밥을 팔더니 나에게는 술이 왜 없다 하는가?' 대놓고 백정들을 깔보는 언사에, 주막에 있던 형평사 직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니나다를까, 탁윤환은 그 자리에서 형평사 직원들에게 흠씬 두드려 맞고 쫓겨나죠.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자신이 한낱 백정에게 폭행당했단 사실에 눈이 돌아간 탁윤환이 패거리를 끌고 형평사를 습격했거든요. 동서고금 깽판의 전통인 '사장 나와'를 시전한 패거리는, 소동에 나온 형평사 사장 강상호를 붙잡아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며 모욕했습니다. 사실 형평사 사원들에게 이같은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1923년 4월 25일 백정들의 차별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출범한 조직이 형평사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백정들과 형평사를 아니꼽게 여겼죠. 이번 시리즈 맨 처음 글에서 소고기 불매 운동 얘기를 잠깐 썼는데, 그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1924년 5월 8일 장날엔 형평사원이 장에 소고기를 팔러 갔다가 행상 하나에게 무례하게 쳐다본다고 욕을 먹었죠. 그가 지지 않고, '백정 놈은 사람이 아니오?' 라고 맞받아치자 갑자기 일대 행상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이 상황에 끼어들었습니다. '아직까지 백정은 백정 놈이오, 양반은 아니니 무슨 소리냐!' 형평사원은 수십 명 행상들에게 일방적으로 난타를 당했죠. 우연히 그걸 본 다른 형평사원들도 역시 떼거지로 몰려와 행상과 패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형평사원들이 상인이나 농민들과 충돌한 사례가 매년 평균 50건 넘게 있었다고 하네요. 어처구니없는 건 당시 일제 경찰의 태도입니다. 당시 진주경찰서장은 형평사와 반형평사 사이 충돌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고 합니다. '일본에도 에타라고 하는 것은 평민과 같은 대우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도 무엇 하나 성공한 일이 없다. 이번 형평사도 그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에(...) 백정에게 잘못이 있으니 내가 곧 해산시킬 생각이다.' 문명 개화론자들이 선망하던 일본 관리의 맨얼굴이 이러했습니다. 이렇듯 형평사 운동에 참가한 백정들은 일본인에게, 심지어 같은 조선인에게도 차별당했습니다. 주목할 대목은 진주경찰서장이 잠시 언급한 '에타'란 말입니다. 평민과 같은 대우를 하지 않았다 했으니, 그들 또한 백정 못지않은 불가촉천민이었겠죠.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1920년대 초, 일본에서 13살 어린아이가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 소학교에서 교사에게 에타 출신이라고 모욕을 당한 것이 너무 분해서 투신한 것이었죠. 다른 지역에선 소학교 교직원이 신분을 속인 게 들통나 면직됐습니다. 또 다른 곳에선 에타 출신이 신분을 속이고 혼인을 했다면, 그 사실을 이혼 사유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죠. 인사극비, 혹은 일본의 부락. 일본 부라쿠민은 더러운 일을 하는 자(에타)나 인간이 아닌 자(히닌)으로 불렸습니다. 1975년에 폭로된 부락지명총람 사건은, 각 기업의 인사담당자나 결혼 상대를 알아보려는 자녀 부모가 상대방 출신지를 보고 그가 부라쿠민인지 아닌지 구분해 은밀하게 차별하는 일이 관행처럼 이루어졌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사건 이후 차별이 사라졌다면 좋았겠지만, 2000년 들어서 후쿠오카시에서 한 설문을 보면 응답자의 40%가 부라쿠민과의 결혼은 반대한다고 답했다네요. 당시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은 에타들은 1922년 신분 해방 단체인 수평사를 조직합니다. 오늘날도 활동 중인 부락해방동맹의 전신이 된 단체죠. 이들은 상상치 못했겠지만, 수평사가 조직됐단 소식은 식민지 조선에 전해져 반향을 일으킵니다. 바로 그들과 마찬가지로 차별받는 백정들에게 말이죠. 경남 진주에는 당시 3, 400명 가량 백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사회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일부 부유한 백정들과 그런 백정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양민들이 손을 잡았죠. 이들 개개인의 역할과 비중에 대해서는 문서마다 얘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될 수 있는 한 충돌이 없게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총독부 경무국에서 지목한 주동자는 이학찬입니다. 백정 출신 자산가이고, 3.1운동 이후 불어닥친 교육 열기를 보고 자녀 교육에 투자해야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중 하나죠. 그는 자식을 어느 공립 혹은 사립학교든지 넣어 보려고 수 차례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매번 거절하거나, 혹 허가를 받아 등교해도 금방 출신이 알려져서 반억지로 쫓겨나곤 했죠. 이학찬은 우연히 일본에서 수평사 운동이 활발하단 소문을 듣게 됩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차별 받는 타국의 사람들에게 동변상련이라도 느낀 걸까요? 그는 친구들을 찾아가 백정들의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이때 이학찬이 만난 사람들이 형평사를 설립한 주요 인물들이 됩니다. 우선 신현수와 천석구, 강상호는 백정이 아닌 양인이었습니다. 신현수는 조선일보 진주 지국장이었다고 하고, 천석구는 진주 자작농회 간부였다고 하죠. 또 장지필이라는 백정도 이들에게 가담했는데, 그는 한때 일본 유학을 해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지만 가정 형편으로 인해 3년만에 중퇴하고 식민지 고국으로 돌아온 자였죠. 형평사 초대 사장을 지내기도 한 백촌 강상호. 그는 진주에서 면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부유한 생활을 했지만, 일찌감치 국채보상운동, 3.1 만세 운동 등 민족운동에 가담해 수감되기도 한 인물이었죠. 6개월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그가 주목한 건, 다름아닌 백정들의 신분 해방 문제였습니다. 워낙 인물이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선지, 강상호가 일본 수평사 얘기를 듣고 이학찬 등에게 형평사 설립을 권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관계는 불확실합니다. 어쨌거나 위 인물들이 형평사의 첫 중앙위원이 된 건 사실이죠. 이들 중 이학찬, 장지필 두 사람만 백정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들 뜻에 동참한 양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진주 청년회관에서 창립 축하회를 열고 사회 각지에서 보낸 축전 속에서 앞으로의 활동에 결의를 다졌죠. 이 자리에는 진주노동공제회 간부가 축사를 했고, 일본의 재한유학생 단체인 북성회가 축전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일본 수평사까지 설립에 축하 인사를 전해 왔죠. 출발은 그렇게 순조롭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반형평사 운동이 각지에서 일면서 형평사 회원들과 충돌하게 되죠. 1923년 6월, 군산의 한 보통학교 설립에 형평사 분사 회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군산청년회 측에서 이 기부를 거절했죠. 이들은 형평사 회원들이 내놓은 돈이 '더러운 돈'이라며 받지 않았습니다. 제도적 차별도 따랐죠. 백정 자녀들은 보통학교 입학원서에 반드시 신분을 기입해야 했습니다. 또 경찰은 백정들의 주소, 성명, 연령 등을 조사해 장부를 만들어 감시를 강화하는 조치를 했죠. 순사가 백정 아내가 잠시 혼자 보고 있는 가게에 찾아와 왜 남편 명의로 허가를 받고 아내가 파느냐, 형평사를 꾸미는 백정 년놈들이 언제든지 경관 명령은 어긴다, 등 폭언을 하며 폭행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윽고 1925년 예천에서 대형 사건이 터졌습니다. 예천 형평분사 2주년 축하 기념 행사장에서 축사를 위해 연단에 올라간 예천청년회장이 폭탄 발언을 해버린 거죠. '지금 새삼스럽게 형평사를 내세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니 그보다 백정들의 실질적 향상에 힘쓰는 것이 타당하다.'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하등의 죄악이 될 것이 없다. 어느 시대 국가를 막론하고 국법이 있는데, 그 국법을 어기다가 백정이 된 것이다. (...) 또 조선 왕조 500년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았지만은, 지금은 좋은 시대를 만나 형평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칙령으로 차별을 철폐하였으니 형평사는 조직할 필요가 없다. 아무쪼록 돈을 많이 모아 공부만 잘하면 군수도 될 수 있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발언에 행사장 안 분위기는 싸늘해졌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며 항의하거나 반박하는 목소리도 있었죠. 그때 행사장 구경을 하러 모인 일반 시민들 가운데 누군가 선동을 시작했습니다. '백정들이 요새 너무 건방지다!' 이걸 시작으로 다수 패거리가 우르르 몰려들어 형평사 회원들을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형평사 분사 또한 습격해 회원들을 무차별 폭행했죠. 폭동은 수천 명 규모까지 커졌고, 며칠에 걸쳐 형평사 분사 및 형평회원들 집이 공격당했죠. 형평사 가입을 결의한 신흥청년회는 이른바 '신백정'을 잡아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 등살에 시달렸습니다. 신백정이란, 형평사 운동에 가담한 양민들을 백정과 다름없이 대하겠다는 사람들이 부르는 멸칭이었죠. 예천 사건은 여전히 뿌리 깊은 차별 의식 현황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여론이 형평사를 주목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 사회 단체가 형평사의 활동에 주목했고 지원하기 시작했죠. 1926년 11월, 전북 형평사 대회에서 경찰들이 차별적 행태를 보인 데 항의하려고 형평사 간부들이 전북도청을 찾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북 경찰부장은 작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이들에게 보입니다. '지금껏 차별 대우가 있었다면 유감천만이다. 차별 철폐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다.' 그들의 오랜 투쟁에 비로소 결실이 맺히는 걸까요? 반형평사운동도 형평사 운동에 대한 여론의 변화도 모두 형평사운동의 빠른 성장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형평사는 창립 1년만에 12개 지사, 64개 분사를 가진 조직으로 성장하죠. 창립 직후부터 형평사는 백정 여성들도 운동에 참가해야 한다며 여성 100여 명을 참여시켰습니다. 1926년 전국대회와 28년 정기총회에선 여성문제가 정식 의제로 올랐고, 1928년에는 여성 대의원이 탄생하기도 했죠. 끊임없는 차별 편견에도 형평사는 꾸준히 신분 차별 철폐란 자신들의 목표를 밀어붙였습니다. 일반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자녀들을 위해 학교와 야학, 기숙사를 운영하기까지 했죠. 잡지와 신문 등을 편찬해 내부 교육과 사회 계몽도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잘 풀리지만은 않았죠. 여타 당대 민족운동들이 모두 그랬듯, 형평사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분열 위기를 겪게 됩니다. 대내외 위기를 극복하고 단속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그들은 어떤 결과에 이르렀을까요? 이후 결말은 어쩌면 조금 씁쓸할지도 모릅니다. 조선형평사 포스터. 1920년대는 민족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어 각자 나아갈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습니다. 신분 해방 운동 역시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은 거겠죠.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3) - 1925년, 숭인동
때는 일제강점기, 경성부 관리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죠. 그들이 고민하는 원인은 지은지 고작 8년 된 부립 도축장때문이었습니다. 1914년 건설한 경성부립도축장은 한일합방 후 본래 아현동, 신설동에 있던 관립도축장, 그리고 현저동, 이태원의 사설도축장 등 여섯 곳을 통폐합해 근대적 위생 규격에 맞게 지은 관영 도축 시설이었죠. 문제는 이 시설이 처음 요망 조건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설비가 부족하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하다는 평가까지 들었을까요. 이전 구한말 제정된 포사규칙은 민간업자를 규제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근대적 공공위생 차원에서 도축 장소와 방식을 규정하는 법률은 1900년을 넘어서부터 차례차례 제정되었는데요. 러일전쟁 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러한 법률 제정은 더 탄력이 붙었습니다. 기존 분리되지 않았던 도축장과 고기를 판매만 하는 정육점을 나누어 규정한 <도수장 및 수육판매규칙(1905.9)>, 도축장을 관영화, 허가제 운영한 <도수규칙(1909.8)> 등이 이 때 만들어지죠. 이에 따라 기존 도축업에 종사하던 백정들의 지위 역시 흔들렸습니다. 부유한 일부 백정은 허가를 얻어 점포를 냈지만, 대다수는 관영 도축장에 소속된 고용노동자 신세로 전락했죠. 1908년 8월, 서대문 밖 합동에 서부도축장이 문을 엽니다. 하지만 불과 3개월만에 부지 협소 등을 이유로 새 시설 부지를 탐색하게 되죠. 그 결과 아현동, 신설동에 대한도수장이란 관영 도축장이 들어섭니다. 아현동 시설이 돼지를 통째로 삶아 털을 제거하는 탕박 시설을 갖춘 방면, 신설동 시설은 철저히 소 도축에만 집중했죠.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들 시설을 총독부 내무부 위생과로 배속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한성부가 생기면서 넘겨받게 되죠. 그 뒤는 맨 처음 문단에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일제는 관리 효율을 명분삼아 기존 관영 및 민간 시설을 통폐합해 부립도축장을 조성합니다. 위치는 서대문형무소 남쪽 현저동 도축장이었죠. 1917년 현저동 경성부립도축장 모습. 대부분 나무 구조물이어선지, 시설은 빠르게 낡아버렸습니다. 거기다 수도 및 배수 시설이 형편없어서 핏물과 오물이 고여 여름마다 곤욕을 치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설은 기대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는데, 도축 작업을 하는 백정들이 손에 익은 과거 방식 그대로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죠. 시카고의 도살장이 포드에게 컨베이어 벨트 제조 공정의 영감을 줄 정도로 효율화, 고도화된 산업 시설이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현저동 시설에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경성부는 지은지 8년 된 부립도축장을 버리고 새 시설을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선정된 부지는 숭인동 동묘 근처였죠. 아직 서울이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을 때입니다. 동묘 인근은 서울 외곽이라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청계천 하류와 가까워 배수 조건도 서대문 시설보다 나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엔 이미 1923년 조성된 가축시장이 있었죠. 주요 산지인 강원도 등지에서 소가 들어오면, 동묘 시장을 거쳐 경성부 일대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숭인동은 도축장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입지처럼 보였죠.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 시민들이 먹는 고기는 이곳 숭인동에서 도축해 공급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 역시 경성부 인구 증가에 맞춰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시가지를 확대하려 했죠. 자연히 도축장은 숭인동 아닌 다른 곳으로 또다시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일제 시대 내에는 실현되지 못합니다. 숭인동 가축시장과 도축장이 마장동으로 옮긴 건 광복 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가능했죠. 시카고 도축장 작업 과정. 시카고에선 이미 1867년부터 기계화된 공정을 도입해 도축에서 최종 제품까지 고도로 분업화된 하나의 라인에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각 단계에는 비숙련공이 투입되어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었다네요. 일부 몰양심한 육가공업체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요. 이렇듯 도축 관련 법령이 발달하고 시설이 개선될수록 백정들의 처지는 나아지긴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신분 차별은 일제 시대에도 없어질 조짐이 없었죠. 1922년 대구 백정들이 야유회를 가면서 기생들을 불러 끼고 놀았는데, 양민들이 그걸 보고 혀를 차며 기생들을 비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구 기생 조합이 해당 연회에 참가한 기생들을 제명해 버렸죠. 그 뒤로는 백정들이 아무리 불러도 기생들이 백정들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경제적으로라도 나아지면 기를 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백정들은 도축 작업을 한 후 쇠기름같은 부산물을 자기 몫으로 주장할 수 있었죠. 그같은 부산물은 일종의 가외 수입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임금 노동자가 된 후로는 그마저도 어려워졌죠. 백정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행하던 가죽 공예도 근대화된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들과 경쟁하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도 사회의 시선은 따가웠습니다. 어떤 백정들은 자기 자식만이라도 공립,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부탁도 넣고 기부도 했지만 입학을 거절당하거나 아이가 차별을 못이겨 중퇴하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또 어떤 백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도중에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한 뒤 총독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다 포기했습니다. 백정은 총독부에서 받아주지 않는단 걸 뒤늦게 알아서였죠. 3.1운동이 일어나고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백정들은 식민지 속의 영원한 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정책 아래서 우리 민족이 독립하길 꿈꿨지만, 백정들이 오랫동안 겪어 온 차별과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결국 백정 사회 스스로 이 모순을 해결할 새 움직임이 대두하죠. 무대는 이제 1923년 경남 진주로 넘어갑니다.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2) - 1896. 1 한양
1896년 1월 18일, 그 해 첫 법령으로 이른바 <포사규칙>이 반포됩니다. 갑오개혁 이후 정부 당국이 반포한 두 번째 근대적 법률이었죠. 첫 번째 반포한 법률은 1985년 3월 반포한 재판소구성법이었습니다. 단순 법률 반포 순서만 놓고 보자면,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법안같지 않나요? <포사규칙>이 규정한 내용은 딱 잘라 말해 이렇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도축 및 정육점업은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 규정에 맞게 운영하고 세금을 내라.' 김이 새는 얘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법률의 의의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지방관 및 지방 세력가의 자의적 수탈 대상이었던 백정을 이제부턴 국가가 직접 지배한다, 라고요. 세계 여러 문명에서 어떻게 고기를 얻느냐,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이슬람의 할랄이나 유대인의 코셔 전통에서 '무엇이 율법에 따라 올바른 방식으로 얻은 고기인가'를 세밀하게 규정한 것만 봐도 그렇죠. 복잡한 도축 과정과 절차를 거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고, 나머지 부산물과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먼 옛날 인류가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시되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엔 산업화, 고도화된 도축 및 정육 과정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먹는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대부분 알 필요가 없게 됐지만 말입니다. 코셔 및 할랄 규정의 일부. 몽골인이나 시베리아 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도축 방식이, 아마존 정글의 민족들도 그들만의 규율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육축이라고 해서 민간에서 이를 키우고 잡는 것을 허용했죠. 최근까지도 시골에선 공공연히 민가에서 직접 소, 돼지를 도축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다만 조선 사람들도 소, 말은 민가에서 함부로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양에선 푸줏간이나 약 20개 정도의 도축소, 이른바 '현방'이 있어서 백정들이 그곳에서만 전문적으로 도축, 판매를 맡아 했다고 하죠. 선비들은 '군자는 푸줏간과 부엌에 드나들지 않는 법'이라고 해서 아예 이들과의 접촉 교류를 삼갔습니다. 1896년 포사규칙이 제정된 이후 민간 도축은 규제가 더 강해졌습니다. <포사규칙>에서 포사란 조선시대 정육점을 말합니다. 즉, 법률의 이름 자체가 정육점에 대한 규칙, 이란 뜻이죠. 포사는 본래 잡은 고기를 판매하는 가게만 의미했지만, 당시엔 현실적으로 도축과 육류 판매가 엄밀하게 분화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법령 내에서도 육류 판매뿐 아니라 도축업에 대해서도 규제했죠. 법령에 따라 정육점, 도살장업은 지방관청을 통해 신고하고 면허료를 지불해 영업허가증을 받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도살 자체는 백정들에게만 나오는 도축자격증인 빙표를 가진 사람만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영업허가를 취득한 업주가 도축자격을 가진 백정을 고용해 영업을 해야 했죠. 소를 도축해야 할 때, 업주는 1마리에 80전 세금을 백정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면 백정은 그 세금을 군청에 납부하고 영수증을 받아 오죠. 이 영수증 없이 도축을 할 경우 백정은 도축자격을 잃고 거처에서 추방됩니다. 또 해당 백정을 고용한 업주는 영업허가가 취소될 수 있었죠. 세금은 영업장 규모에 따라 물렸습니다. 도축장을 매일 1마리 이상 도축하는 1등지부터 5일에 한 마리 정도를 도축하는 5등지까지 구분한 후, 매월 말 영업장이 무는 세금에 등급별로 차등을 뒀죠. 영업장 규모는 도축하는 소 두수만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돼지나 개는 부수적인 수취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 영업세를 포사세라고 하는데, 정부는 포사세 징수를 위해 군 단위까지 포사위원과 포사파원을 임명했죠. 1897년 독립신문은 당시 전국적으로 연간 2만 7천 여 마리 소가 도살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공식적인 수치로, 민간에서 자행되는 밀도축 수를 뺀 수치였죠. 조선 후기 소 도축이 이렇게까지 활성화된 이유는 두 가지로 꼽습니다. 하나는 조선후기 민간의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주류 및 육류 소비가 증가한 것, 또 다른 하나는 무역이 성황을 이루면서 주요 수출 품목인 소가죽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죠. 이로 인해 일부 지배층이 백정을 사사로이 고용해 소가죽을 수집하고 고기를 팔아 부정축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말 개항지를 통해 외국으로 향하는 주요 수출품 가운데서 소가죽과 소뿔 등은 항상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상인들이 자국 가죽 산업 발달을 위해 필수적인 조선 소가죽을 확보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녔습니다. 일본에서 수입한 소가죽 가운데 약 7, 80%가 조선산일 때도 있을 정도였죠. 1824년 일본에 수출한 우피만 1만 5천 장 이상이었고, 이후로도 매년 거의 이 수치를 유지했습니다. 청과 기타 외국에 수출하는 우피 량까지 고려하면 당시 조선 내에서 연간 약 5만 마리 이상 소를 도축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답니다. 자연히 징수한 포사세 또한 늘어야 했죠.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소 5만 마리면 포사세만 약 4만 원이 걷혀야 하지만, 1898년 실제 포사세 징수액은 고작 1305원 20전에 불과했죠. 단순 계산으로도 추산한 세수의 약 3~4%만이 실제로 걷힌 셈입니다. 이유는 있었죠. 일부 지배층이 공공연히 자행한 밀도축, 지방관과 포사파원 등의 횡령 문제는 물론이고, 일부 포사파원은 업자 및 백정들과 결탁해 멋대로 포사세를 인하하거나 아예 징수세액 자체를 탕감했습니다. 각급 관청간 마찰도 문제였습니다. 포사세 징수를 별도로 임명한 포사파원에게 맡기자, 지방관이 이들과 갈등을 빚었죠. 중앙은 중앙대로 포사세의 운영을 놓고 농상공부와 내장원이 대립했습니다. 포사파원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지급할 운영비를 제대로 주지 못해 포사파원들이 자의적인 수탈 횡령을 벌일 핑계가 생겼죠. 또 지방 세력가와 지방관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각종 명목으로 소고기를 정기적으로 상납받았습니다. <포사규칙>과 포사세를 둘러싼 난맥상은 당대 조선 사회 체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게다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정작 주체인 백정들은 소외당했습니다. <포사규칙>과 현존하는 시행세칙 그 어디에도 백정들의 처우나 급료 따위에 대해서는 규정한 바가 없습니다. <포사규칙>을 제정한 지배층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금 부과와 징수에 있을 뿐, 그 밖의 문제엔 아예 눈을 감았습니다. 백정들의 처우는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개혁 이전과 다를 바 없었던 거죠. 1900년이 넘어가면 도축업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규정들이 세워집니다. 안타깝게도 이 절차를 진행한 건 대한 제국 뜻이 아니었죠.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받은 일제는 바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과 침탈을 자행합니다.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의 진군로. 러시아는 일본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말그대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대한해협까지 진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국인 영국 등의 견제를 받아가며 보급과 피로 등 온갖 문제에 시달린 건 물론입니다. 전쟁 결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경쟁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조선은 일본에 더욱더 예속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