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ko
218K Members

Cards

Featured

감자튀김의 세계적인 다양성
https://www.atlasobscura.com/articles/french-fry-dips-around-the-world 감자튀김의 원조가 어느 나라인지는 프랑스와 벨기에 간에 이견이 있기는 한데(참조 1), 벨기에 문헌을 보면 1781년에 이미 “100년도 더 전부터 이렇게 먹었음”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1600년대에 벨기에가 감튀를 먹을 가능성은 좀... 원조를 거론하기가 무의마할 정도로 감자튀김은 전세계로 퍼졌다. 감자가 워낙 화성을 비롯하여(…) 아무데서나 잘 자라나고 “튀김”이라는 조리법 역시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요리 방식이니 궁합이 잘 맛다고 할 수 있겠다. 맛도 당연히 좋고 말이다. 다만 현대식으로 튀기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19세기 중반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감자튀김이 전세계로 확산됐다. (오죽 했으면 가짜 감자도 등장했을까? 참조 2) 게다가 전세계는 감자튀김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온갖 변형을 시킨 것이다. 즉, 어느 감튀를 먹느냐가 당신을 드러낸다. (나는 마요네즈 소스를 선호한다.) 그래서 감자튀김을 나라별로 나누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한 나라 안에서도 취향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주말 특집 기사는 감튀를 소스 별로 분류해 봤다. 1. 크림 마요네즈와 관련 소스를 가리킨다. 주로 벨기에와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많이 곁들이며 북유럽 국가들은 이 마요네즈에다가 각종 양념과 피클을 덧붙였다. 게다가 마요네즈가 다 같은 마요네즈가 아니다. 이를테면 커리 마요(벨기에, 네덜란드)가 있고 머스타드가 들어간 마요(독일)이 있다. 파인애플 푸레와 커리 파우더가 들어간 “브라질 소스”도 있다(벨기에 발명품이다, 응?). 물론 벨기에의 감자튀김 판매소는 온갖 소스가 다 있기에 벨기에는 이거다! 하기가 참 그렇다. 2. 케첩 아무래도 미국이 퍼뜨렸을 것이다. 물론 케첩도 세계 각국은 가만 두지 않았다. 커리 양념이 들어간 케첩(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응?)이 있고 바나나 케첩(필리핀)도 있다. 칠리를 넣은 케첩(동남아시아)도 있으며 영국의 brown sauce는… 그것도 케첩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케첩의 숟갈 당 설탕량은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 많다고 한다. 3. 식초(vinegar) 대영제국의 유산, 맥아식초(malt vinegar)를 가리킨다. 감튀만이 아니고 정어리 튀김에도 어울리는데, 당연히 구 영국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많이들 곁들어 먹는다. 특히 영어권 캐나다가 대표적인데 캐나다에는 영어권만 있지 않다. 4. 육즙(gravy) 불어권 캐나다도 있다. 퀘벡에서 좋아하는 소스가 바로 육즙 기반이다. 다름 아닌 푸틴(poutine)을 가리키는데, 미국 북동쪽(뉴저지)에도 비슷한 소스를 곁들인 “disco fries”가 있다고 한다. 다만 미국 버전은 푸틴의 치즈를 모짜렐라로 바꿨다고 하는데, 소스에 찍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입히는 것에 가깝다. 그 외 육즙과 칠리치즈, 이태리식 푸틴도 있으며, 감튀에 뿌리기보다는 옆에 다른 접시로 나온다. 추운 곳에서는 아무래도 이렇게 먹어야 하지 않을까. 다만 푸틴은 한 다음 바로 먹어야지, 이튿날 먹으면 안 된다고 한다. 5. 파우다 일본과 인도, 필리핀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미 튀길 때부터 양념을 입히기도 한다. 커리나 고추, 마살라 양념 등이 들어간다. 특히 일본은 김과 콩버터, 깨 등으로 만든 파우더를 감튀랑 봉지 안에 넣고 흔들어서 섞는 것(참조 3)도 있다고 한다. 글쓴이는 파우더를 높게 평가한다. 이미 건조됐기에 감자를 촉촉하게 만들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일본과 인도가 파우더 왕국인 점이 놀랍지 않다. 일본이야 후리카케(振り掛け)와 시치미토가라시(七味唐辛子)가 유명하고, 인도야 덧붙일 게 있을까. 6. 기타등등 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형태, 얼마든지 있다. 특유의 치즈(сирене)가 들어간 불가리아식 감튀나 Mujdei라는 마늘 소스가 들어간 루마니아식 감튀가 있고, 고기가 들어간(lomo saltado) 페루식 감튀도 있다. 핫도그 조각이 들어간 salchipapas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글쓴이가 평가하기로는 베트남이 제일 특이하다. 감자튀김에 버터와 백설탕이 제공되기 때문이다(참조 4). (감튀+설탕/버터가 일반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 참조 1. 감자튀김의 뿌리(2013년 1월 3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307277192726901 2. 소비예트의 구내식당(2019년 2월 10일): https://www.vingle.net/posts/2568674 3. 후루포테(ふるポテ)를 가리킨다. 4. Fries Around The World(2015년 8월 28일): https://youtu.be/lVIShHPpLeo
BTS 팬 '아미'들이 5·18민주화운동 공부하는 이유
“나 전라남도 광주 baby” “모두 다 눌러라 062-518” 방탄소년단 제이홉, 수록곡 ‘마 시티(Ma City)’에서 ‘5·18’ 언급 국외 아미들, 가사 의미 번역하면서 5·18민주화운동 공부해 방탄소년단과 ‘마 시티(Ma City)’ 가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If you listen to ‘Ma City’ by BTS, you will hear J-Hope rapping “Press 062-518, everyone”. 062 is the area code of Gwangju and 518 is referring to Gwangju Uprising happened on May 18.’ (방탄소년단의 노래 ‘마 시티’를 들어보면, (방탄소년단 멤버) 제이홉이 “모두 다 눌러라 062-518”이라고 랩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062’는 광주의 지역 번호이고, ‘518’은 5월18일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을 가리킵니다.) 자신을 방탄소년단 팬클럽인 ‘아미(ARMY)’라고 소개하고 있는 한 블로그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은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나 관련 기사, 글 등을 영어로 번역해 알려주는 트위터 사용자 ‘아미살롱’(@BTSARMY_Salon)이 지난해 5월 써서 올렸다. 이 사용자는 글에서 “1980년의 봄은 ‘서울의 봄’이라고 불린다.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피를 흘렸다. 이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5·18민주화운동을 소개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도 소개했다. 이 트위터의 팔로워는 12만7천명이 넘고, 해당 글을 게시한 블로그 글 링크를 올린 트위트의 리트위트(RT) 수는 4천이 넘었다. 글이 입소문을 타고 전 세계 방탄소년단 팬들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얘기다.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나 관련 기사·글 등을 영어로 번역해서 알려주는 트위터리안 ‘아미살롱’(@BTSARMY_Salon)이 지난해 5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5·18민주화운동 소개글 갈무리. 방탄소년단을 따라 5·18민주화운동을 공부하는 외국인 아미들이 늘고 있다. 계기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다. 2015년 공개된 방탄소년단의 앨범 ‘화양연화 pt.2’에 수록된 노래 ‘마 시티(Ma City)’는 광주 출신 멤버인 제이홉(본명 정호석·25) 등 멤버 3명이 직접 작사한 곡으로, 멤버 각자가 자란 도시를 주제로 담았다. 제이홉은 이 노래에서 “나 전라남도 광주 베이비(baby)” “날 볼라면 시간은 7시 모여 집합 모두 다 눌러라 062-518”이라고 랩을 한다. “7시 모여 집합”이라는 가사는 광주의 지도상 위치가 7시 방향이라는 이유로 극우 성향 사이트 일베가 광주를 비하할 때 쓰는 ‘7시’라는 표현을 저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또 다른 멤버 슈가(본명 민윤기·26)는 데뷔 전 ‘062-518’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마 시티’가 공개된 뒤 이와 같이 ‘7시’와 ‘062-518’라는 숫자 안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국외 팬들의 궁금증이 커졌다. 이 때문에 2016년 한 아미는 자신의 블로그에 영어로 이 노래 가사를 번역하면서 내용을 설명하고 “일베는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군과의 공모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근거를 보여주는 건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광주를 ‘7시’라고 부르며 5·18이 북한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글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이후 복역했지만 나중에 한국 대통령이 됐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설명도 나온다. 해당 글을 본 외국인 아미들은 “가사의 의미를 알려줘서 고맙다”, “광주의 역사가 이렇게 슬픈 줄 몰랐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러 가야겠다” 등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5·18 묘역을 직접 찾은 아미들도 있다. 지난달 28일 ‘2019 광주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성공기원-SBS 슈퍼콘서트’에서 방탄소년단의 공연을 보러 온 외국인 아미들이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고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분향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날 묘지를 찾았던 우크라이나인 아미 조토바 아나스타샤(21)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방탄소년단 노래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을 배우게 됐다. 콘서트를 보러 가기 전 시간이 생겨 친구들과 같이 묘역에 방문했다“며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지 않았다면 이런 중요한 사건을 알지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ㅊㅊ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454040 + 딤토 좋은 영향력이다... +직접 찾아간 해외팬들
전기자동차 실패담
https://www.faz.net/-gya-9mq82?GEPC=s3 예전에 전기 자동차도 독일이 원조라는 글을 썼던 적이 있다(참조 1). 그때는 20세기 초의 독일 전기자동차를 다뤘었는데, 알고보니 독일이 1950년대 중반 정도까지는 전기 자동차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대세는 가솔린과 디젤이기는 했는데, 전기 자동차의 문제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큰 마음 먹지 않으면 못 가는 전시회부터 소개한다. 이 전시회 때문에 동 특집 기사가 나왔다. 제목: elektro / mobil 전기 / 교통 장소: 독일 프랑크푸르트 통신박물관(Museum für Kommunikation Frankfurt) 기간: 2019년 3월 21일 - 10월 13일 웹사이트: https://www.mfk-frankfurt.de/ausstellung-elektro-mobil/ 20세기 직전에 만들어진 전기 자동차는 1899년에 이미 시간당 105km를 찍었었다. 당시 자동차 시장은 전기 모터와 증기기관, 가솔린의 3파전이었고, 미국에서는 대략 40%가 전기 자동차였다고 한다. 운용하기 더 쉽고 더 조용하면서 더 깔끔해서였다. 그래서 전기 자동차는 시내, 내연기관 자동차는 시외, 증기기관은 철도, 이렇게 나누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전기 자동차의 약점은 오늘날과 같았다. 가동 거리와 배터리 문제 말이다. 게다가 포드가 저렴한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량생산해버려서 게임은 끝났다. 다만 나치 정권은 생각이 좀 달랐다. 제국체신부(Reichspost)에서 우편 운송 차량을 전기 자동차로 한 것이다. 그래서 체신부의 우편 운송용 전기 자동차는 1930년대 말, 3천 대 수준까지 늘어난다. 나치가 전기 자동차를 추진했던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안보였다. 내연기관은 석유가 아니면 안 되지만, 전기 자동차의 경우, 독일 내에서 생산이 가능한 석탄으로도 전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 즉, 독일 내에서 전기 자동차를 추진한다는 의미는 오늘날, 중동의 석유와 러시아의 가스에 덜 의존하기 위해서라는 논리도 나올 수 있다. 비록 1955년 운송보조법(Verkehrsfinanzgesetz)을 통과시키면서 전기 자동차의 세제해택을 없애버린(참조 2) 독일이었지만, 오일 쇼크를 지나고 환경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존 업체와 전문가들의 저항이 강력했고, 당시 연구 예산은 그냥 낭비되고 말았다. 독일이 어째서 그 후로 전기 자동차의 기회를 날러버렸는지는 참조 1 기사에 나와 있다. ---------- 참조 1. 전기 자동차는 원래 독일이 원조(2017년 8월 20일): https://www.vingle.net/posts/2193105 2. https://www.gesetze-im-internet.de/verkfing/BJNR001669955.html
제3제국을 묘사한 예기치 못한 출판물
https://www.faz.net/-in2-9mo4g 엘리자베트 뵈데커(Elisabeth Boedeker)라는 사서이자 여성운동 역사가가 있다. 1893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한 인물로서 그녀의 저서 중에, "25 Jahre Frauenstudium in Deutschland. Verzeichnis der Doktorarbeiten von Frauen 1908 - 1933 / 독일 여성 학문 25년, 여성 박사논문 목록(1908-1933)"이 있다. 1935년에 나온 책이다. 하필이면 왜 1933년에서 끊었을까? 독일과 1933년을 아신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1933년 3월 총선을 통해 나치가 집권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지 않지만) 독일 대학교에서 여학생 입학이 일반적으로 허용된 것은 1908년부터였다. 그래서 입학 허용 이전인 1902년 남녀 대학생 비율 36,000명 vs. 70명이었던 것이 1931년부터는 115,000명 vs. 22,000명으로 대폭 늘어난다. 그러니까 1908년부터 25주년 기념이기 때문에 1933년에서 끊었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뵈데커의 책에는 총 5,949편의 논문이 실려 있으며, 의학(참조 1)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망라하고 있다. 이중에 눈여겨 볼 전공은 다름 아닌 미술사학이었다. 히틀러가 제일 먼저 추진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퇴폐예술(Entartete Kunst)" 추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퇴폐예술은 다름 아닌, 모더니즘을 가리켰고, 그때문에 바우하우스는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폐교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참조 2). 따라서 이 책에 있는 미술사학 논문의 저자들(여성 박사들)은 모두 1933년까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일하던 이들이었고, 대부분 1933년에 쫓겨난다. 1. Margaret (Grete) Ring(1887 베를린 - 1952 취리히): 그녀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막스 리베르만의 처제. 네덜란드 회화를 전공했으며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영국 갤러리도 1940년 독일 공군에게 폭격을 당했... 2. Lotte Eisner(1896 베를린 - 1983 파리): 그리스 화병 그림을 전공했으며, 독일 영화 비평으로 유명했지만... 3. Agnes Waldstein: 1929년 Folkwang-Museum zu Essen 최초의 카탈로그를 작성했다. 그런데 그 카탈로그 제목이 "Moderne Kunst/모던 아트"... 4. Annie Mainz, Elisabeth Henschel-Simon: 각각 함부르크, 베를린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쫓겨난 다음, 아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5. Lilli Fischel(1891 브룩샬 - 1978 카를스루에): "14세기 라인강 중류 지역의 조각"으로 박사 논문을 받았다. 그녀는 카를스루에 주립미술관 관장 역할을 맡으면서 모더니즘 화가들(대표적으로 반 고흐와 인상파) 전시를 추진했었고, 그때문에 쫓겨난다. (게다가 아버지가 유대인!) 6. Hanna Stirnemann(1899 바이스엔펠스 - 1996 베를린): 중세 독일 후기고딕 스타일로 박사를 받았으며, 나이 서른에 독일 최초의 정식 여자 관장이 됐다(예나 시립미술관/Jenaer Stadtmuseum). 그러나 6년뒤 관장 자리에서 축출되고, 해방 후에는 동독에서 다시 한 번 축출... 소위 "퇴폐 예술" 때문에 나치 정권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예술 관련자들은 매우 많다. 그래서 별도의 책(참조 3)이 있을 정도인데, 2010년에 나온 이 책보다는 당시 생상한 기록으로 남긴 뵈데커의 책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 바로 이 기사다. 유대인 혹은 유대계라서, 게다가 모더니즘 전문가라서 쫓겨난 그녀들의 일대기는 박사로 승승장구하다가 몰락하는 여성 지식인들에 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기사의 표현처럼, 제3제국을 묘사한 예기치 못한 출판물이기도 하다. -------------- 참조 1. 의학의 경우 1908년 입학이 허용되자마자 공식적으로 5천 명이 졸업했었다(여자 의사의 수요는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학위를 안 줬을 뿐이지). 그래서 논문이 워낙/이미 많은지라 제외. 2. 바우하우스 100년(2019년 1월 8일): https://www.vingle.net/posts/2553277 3. Biographischen Handbuch deutschsprachiger Kunsthistoriker im Exil / 유배당한 독일 미술사학자들 약사(略史): https://www.amazon.de/dp/3598113390/ref=cm_sw_r_tw_dp_U_x_rqp2CbWQP0MJP 4. 참고로 짤방 그림은 Thomas Theodor Heine (1867-1948)의 만평이다. "수험생, 환자에 대해 뭘 알아보시겠습니까?" "실크 속치마를 입고 있군요."
하이힐의 역사
http://www.slate.fr/story/175827/mode-talons-hauts-histoire-pouvoir-genres 하이힐이 원래 남자들이 신었던 것임은 대체로 알고 계실 텐데, 남자들의 악세사리(!)였던 하이힐이 어째서 이제는 여자의 전유물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이다. 타이밍과 운, 권력의 이동 등이 모두 결합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가 정답인데, 주말 특집을 통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이렇다 할 만한 하이힐을 처음 소개한 것은 페르시아가 맞긴 맞고(당시 형태의 하이힐은 오늘날의 카우보이 부츠와 유사하다), 15-6세기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초핀/쇼핀/Chopine/Pianella도 어떻게 보면 하이힐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을 텐데(참조 1), 역시 역사 안에서 이를 유행시킨 것은 프랑스 절대왕정이었다. 태양왕 루이 14세 얘기다. 그의 키는 1m63cm였는데 (17세기 기준에서는 작은 키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서도…) 높은 곳의 공기를 마셔야 더 권위가 있다고 느끼던 그였다. 그래서 국왕은 언제나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 게다가 아마 크리스티앙 루부탱(Christian Louboutin)의 빨간 밑창 하이힐(참조 2)과 같은 제품도 생각나실 텐데 이게 전설이 있다. 루이 14세의 남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립이다. 여러모로 형보다 나아보인(!) 그를 형인 국왕은 언제나 지근거리에 두고 싶어해서(아마 쿠데타를 막기 위해?) 필립은 늘상 파리에 있었다. 파리에서 뭐 할 것이 있을까, 이른바 파티왕(!)이 됐던 필립은 그당시 패션 리더였다. 그런데 하루는 파리의 마장동(…)이랄 수 있을 샤틀레 옆, 도축장 근처에서 파리 카니발이 열렸다. 때는 1662년, 한참을 놀다 보니 그의 하이힐 밑창은 새빨갛게 도색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빨간 밑창 하이힐의 기원.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인 19세기부터는 귀족 남자들도 “일”을 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미국 혁명도 잊으면 안 된다. 당시 미국은 Martin Van Buren 대통령의 사치스러운 생활 스타일(말그대로 금수저/Gold Spoon라 불렸다)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며, 남자들이 가발이나 보석류, 하이힐 등 비실용적인 패션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들”만이다. 바로 Great Male Renunciation이라는 개념이다. 이때부터 남자들 의상은 결국 양복 스타일로 통일된다(가격이 싸졌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BBC는 여자들의 하이힐 착용을 19세기 포르노 업자들로 거론하고 있는데(참조 3), 이 기사는 좀 다르다. 19세기, 장식적인 옷 착용의 역할이 남자에서 그의 부인과 딸들로 바뀐 것이다. 어차피 그런 옷을 입을 가정이라면, 그 집안의 여자들은 노동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입고 벗기 힘들고 움직이기도 쉽지 않은 그런 옷들은 바로 “귀함”을 의미했었다. 이때부터 하이힐은 이제 여자들의 전유물이 된다. 게다가 하이힐을 신으면 루이 14세처럼 위에서 아래로 남자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여자들도 일을 하기 때문에 여자용 구두 굽 높이도 낮아졌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이 하이힐에 대해 대단히 복잡한 시선을 갖고 있는 점도 이해가 간다. 루이 14세 때나 지금이나 하이힐의 주는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에 나오는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이브 생 로렁에서 하이힐을 하나 사갖고 가서, 이틀만에 굽이 부러져 AS를 요청한 고객에게 했다는 말이다. «Mais enfin, madame, ces chaussures ne sont pas faites pour marcher!.» / “하지만 손님, 이 구두는 걸어다니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 1. 원산지는 아마 오토만 제국인 것으로 추정된다. 플랫폼 슈의 한 종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21 chaussures à la semelle rouge de Louboutin: http://www.laboiteverte.fr/21-chaussures-a-la-semelle-rouge-de-louboutin/ 3. Why did men stop wearing high heels?(2013년 1월 25일): https://www.bbc.com/news/magazine-21151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