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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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 인 보더랜드 시즌1 간단후기
찌질한 영웅 = 마지막 생존자 주인공은 죽지않는다. 역시 이 공식이 성립하는 일본 드라마 주인공 답게 (물론 일본영화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어려운 문제들도 거침없이 해결해나간다. 매 게임마다 고비가 있지만, 그동안 해왔던 게임 덕후력을 발휘해 탈출에 성공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고비라고 생각했던 에피소드는 3화. 친구들과 함께 게임에 참여하게 된 '늑대와 양들의 게임'이었다. 난이도는 하트7. 3명의 양들은 한 마리의 늑대를 피해 숨어다녀야 하고, 게임 맨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늑대 뿐이라는 룰을 가진 게임이다. 사실상 늑대가 양들의 사냥감이 되는 모순적인 게임이다. ​ ​ ​ 아리스의 친구들이었던 조타, 가루베, 시부키와 함께 참여한 게임이다. 주인공을 제외하면 친구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 뻔한 결말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 그리고 왜 꼭 이 주변 인물들을 죽여야만 하는지 의도가 궁금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시즌 중에서는 초반은 제일 재밌게 느껴졌지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결말에 후반만큼은 제일 지루하게 느껴진 부분. ​ 3화는 여태까지 친구들에게 의존해왔던 아리스에서 잃을 것이 없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게임을 시작하게 될 주인공의 변화를 위해 꼭 필요한 에피소드였다. ​ 앞으로 아리스의 게임은 얼마나 잔인해지고, 많은 사람들을 배반하게 될지 궁금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죽은 친구를 살리기 위한 양아치들의 노력
자전거 타고 귀가중인 범생이 불량배들에게 잡힘 "너, 공부좀 하냐?" ".........못 하는데요?" "어디서 겸손 떨고 지랄이야!!" 협박에 못 이겨 공부 잘 한다고 실토함 "동심원이 뭔지 아냐?" 동심원 가르쳐달라고 납치함 왜 이렇게 된 거냐면 불량배 그룹의 리더 타카시 군 (사고치고 유급을 반복해서 많이 삭았음) 사고로 사망 불량배 무리들이 길가다가 흑마술서를 주웠는데 죽은 사람 소생시키는 방법이 적혀있음 '두 개의 동심원 중 안쪽 원에 내접하는 오망성을 정점이 북쪽으로 향하도록 그린 후,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기 위해 공간을 만든다' 동심원? 내접?? 오망성???? 정점....?? 타카시 군을 살리기 위해 마법진을 그려야 하는데 아무도 모름 "누구 아는 사람 없냐!! 이 수학스러운 단어들을!" "저 녀석, 우등생 아냐? 잡아와!!" 이런 이유로 잡혀와서 마법진 그려줌 "확실히 내접하는구나!!" 내접의 개념을 깨달음 "그거 말고도, 뭔가 어려운 게 써 있어요!!" 살아있는 동물의 피로 그려야 하는데, 닭 돼지 합이 여섯 마리로 다리 합쳐서 16개여야 함 학거북이 셈법 "그 피를 1리터의 물에 희석해서 60퍼센트의 수용액으로....." 수용액 농도계산 반경 75센치미터 원 주위에 45센티미터 정도로 촛불을 접해서 세움 나무수 셈법 책을 살펴보니까 사칙연산에서 고등수학까지 알아야 죽은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음 "이거... 꽤 어려운데요? 저도 무리일 거 같아요" "너, 우등생이라며!!" "문과라서요...." 타카시 군을 살리기 위해 다같이 공부하자고 꼬심 "우리한테 수학이 가능할 리가...." 매일 방과후 모여서 공부하기 시작함 "학거북이 셈법이라는 게 결국 연립방정식인 거네?" "알콜이 9퍼센트라는 건 500밀리니까.." 술 마시다가 알콜 농도 계산함 "다섯 개 마시면 225밀리.." "역시 술은 적당히 마셔야겠어" 음주를 절제하기 시작함 삼각함수를 배운 후 지름길을 발견 "그러면 히가시 고교를 지나가지 않아도 되잖아"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잖아"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히가시 고교 불량배들 하지만 더이상 이 앞으로 지나가지 않음 "나랑 사겨줘! 둘만의 공통인수를 발견해 나가자!" "응!!!" 공부하다 눈맞아서 사귐 "적분이라는 게 함수의 면적을 구하는 거구나!" 가을로 접어들어도 다들 열공중 대학 진학하라고 권유당함 그래도 타카시 군은 살려야 해서 마법진 완성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시간 계산 간단하게 암산으로 6초를 계산해냄 스톱워치 준비해서 정확하게 6초 재면서 기도함 타카시 군 부활!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흑마술 성공함 "담배 하나 줘봐" "미안해, 타카시 군, 우리 담배 끊었어" 도박하러 가자고 돈 꺼냄 "도박은 기대치를 따지면 기본적으로 마이너스에 수렴된다고나 할까.." "기대치라는 건 확률 변수의 기대값으로 확률을 합한 평균인데.." "건감률 백 퍼센트에 가까운 도박을 택하는 게 손해가 적을 것 같아" "오늘은 그냥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한테 무사하다고 알리는 게 좋을 거 같아"  "우리도 지금 막바지니까, 시험 끝나면 신나게 놀아요!" 부활했는데 애들이 이상해짐 기묘한 이야기 2018년 가을편 매스매틱의 황혼「マスマティックな夕暮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흑마법이 사람 여러명 살리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름다운 해피엔딩 쌉인정 ㅇㅇ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㉓/ 전후 황금기1
... <사진= 젊은 시절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감독.> ... 전쟁이 끝났다. 패전의 책임은 물론 일본을 비롯한 추축 동맹국들에게 돌아갔고 그 형벌로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두 번이나 맞는 참사를 낳았다. 일본은 무모한 전쟁을 벌였고 300만명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으며 전 국토는 피폭으로 신음했다. 그러나 전쟁 전 필름이 없다는 이유로 흩어져 작업을 이어갔거나 혹은 종군, 은둔을 해야 했던 영화인들에게는 패전의 시점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보이며 뒤이어 올 예술적,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혼돈을 준비해야 했다. 비록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 도래했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전후 가장 중요한 영화인이었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가 데뷔를 한 바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를 내놓는데 1883년 경 유도명인(柔道名人)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인생을 알아간다는 스토리로, 도미다 쓰네오(富田常雄)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검열이 매우 혹독해서 1800피트(약 600미터)나 되는 분량의 장면들이 삭제되고 만다. 게다가 강요에 의해 ‘속 스기타 산사로’(1945)를 촬영하게 되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만다. 그나마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유일무이한 민족적 영화인 ‘가장 아름다운 자(一番美し)’를 통해 앞으로 그가 보여줄 휴머니즘의 흔적을, 첫 시대극이었으나 미군정 하에서 ‘봉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1952년에서야 개봉된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虎の尾を踏む男達, 1945)를 통해 존재감을 알리게 된다. 이에 반하여 기노시타 게이스케는 애국적이고 풍자적인 코미디 ‘꽃피는 항구’(港, Port of Flowers, 1943)와 모성적 감상주의로 검열을 받은 ‘육군’(陸軍, The Army, 1944)을 통해 건강한 가족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 이는 쇼치쿠(松竹)만의 특성인 가족 드라마와 멜러 드라마라는 양축에 잘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도쿄 보다는 지방을 무대로 하면서 코미디에 센티멘털리즘을 섞은 그만의 스토리텔링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위의 두 사람이 일본 본토에서 데뷔를 하는 동안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는 히로시마에서 직접 원자폭탄을 맞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의욕을 한동안 상실하고 제자인 신도 가네토(新藤兼人)의 새로운 시작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는데 그는훗날 일본 독립영화계의 아버지로 이름을 날렸다. 신도 가네토는 두고두고 이때를 회고하던 끝에 1975년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미조구치 겐지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ある映畵監督の生涯, 溝口健二の記錄’)를 연출하기도 했다. 마키노 마사히로(雅弘)는 18세에 영화감독으로 데뷔 26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로 연출하여 일본 영화사의 전설이 된 인물이지만 이 때 만큼은 미군들을 환영하기 위해 촬영소 창고에 넣어 둔 악기를 꺼내 급히 재즈 밴드를 조직한다. 훗날 일본 활극의 거장으로 존경 받게 될 인물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마키노 쇼조가 ‘일본영화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물려 받은 재능도 뛰어나서 그의 영화는 ‘오락영화의 정수’로 불리기도 한다. 미조구치 겐지가 약 100편, 오즈 야스지로가 50여편, 구로사와 아키라가 약 40편의 작품을 연출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편수를 자랑하게 되는데 일본에서 볼 때 ‘점령군’에 해당하는 미군을 그것도 패전 후 환영하기 위해 재즈밴드를 만들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가 왜 전설이 될 수 있었는지 짐작할 대목이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는 싱가포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매일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있었고 우치다 도무(内田常次郎)는 만주에서 만에이(滿映)의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가의 자살을 보았고 이후 8년간 중국영화인에게 기술지도를 했다. 우치다 도무는 사무라이 액션 영화의 거장으로서 장렬한 클라이맥스가 일품인 감독인데 전쟁 이후 황금기에 시작된 장르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사사키 야스시(佐佐木康)의 ‘산들바람’(そよかぜ, そよ風, Nostalgic Blues, 1945)이 1945년 10월 전후 최초의 영화로 쇼지쿠에서 개봉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국의 포털정보에는 이 정보가 등장하지 않고 1946년에 ‘스무살의 청춘’(はたちの青春, 1946)을 연출했다는 기록만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그는 여러 작품을 이후에도 연출했을뿐더러 ‘산들바람’의 경우 유튜브에도 전편 영화를 감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폐한 도쿄를 떠난 나미키 미치코(並木路子)가 고향의 과수원을 가로 지르면서 노래한 ‘사과의 노래’(リンゴの唄)가 크게 히트했다. 이 영화는 현재도 유튜브에 무료로 전편이 공개되어 있는데 ‘そよかぜ’를 검색하면 열람이 가능하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전후 GHQ의 검열을 통과 한 첫 번째 영화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GHQ란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인데 1945년 이후 미점령군 사령부를 뜻했다.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미디어와 영화산업의 민주화를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하는 기구가 GHQ 산하의 시민검열분과(CCD)였고 다른 하나가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산하의 민간정보교육부(CIE)였다. 이중 CIE가 영화검열에 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일본측 제작자는 기획 및 시나리오 등을 모두 미리 영어로 번역하여 허가를 받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완성된 영화 역시 CCD에서 두 번째 검열을 받았다. CIE의 중심은 미국 민간인들이었으나 CCD는 군무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들의 목적은 군국주의적이거나 봉건주의적인 잔재들 그리고 미국에게 불이익을 주는 영화들을 엄격하게 걸러냈다. 물론 사회주의 계열의 평론가들은 이러한 검열을 사실상 군사 검열이며 반공산주의를 걸러냈다고 폄하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일본영화 관련 서적들이 프랑스에 집중되어 있고 이 작가들이 대부분 좌파지식인인 경우가 많아서 일어난 오해로 실제로 일본문화 전반에 드러난 국가주의나 맹목적 애국주의, 봉건적 충성심, 당연한 복수, 할복으로 대표하는 자살에 관한 긍정적 묘사, 잔인무도한 폭력 등 항목이 모두 포함된 검열이었다. 당시 CIE 과장이었던 데이비드 콘티(David Conte)가 전쟁중 일본영화들을 분석한 이후 작성한 ‘제작 금지 규정 리스트’를 근거로 한 것으로, 1945년 11월 13항에 걸쳐 검열기준을 만들었다. 오늘날 이따금 일본이 다시 군국주의 시절로 회귀하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는 시선들이 많은데 이런 검열기준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미군의 점령 초기 사회개혁을 통해 농지개혁이나 재벌해체가 이뤄지고 후기에 반공산주의가 부각되는 시기 가장 혜택을 누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일본공산당(PCJ)’이었다. 이들은 이념적으로 전쟁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영화들이 장려되는것을 역으로 이용했다. 이마이 타다시(今井正), 가메이 후미오(亀井文夫), 야마모토 사츠오(山本薩夫) 등이 공동 연출한 전쟁과 평화(戰爭と平和, War And Peace, 1947)가 그 대표작이다. 이마이 타다시는 전쟁 후 좌익의 독립영화 제작 운동을 촉발시킨 좌파 이데올로기의 전도사였고 가메이 후미오는 일본에서 기록영화(다큐멘터리)를 가장 먼저 만든 감독이었으며 야마모토 사츠오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기로 유명한 감독으로 한국에는 ‘하얀거탑(白い巨塔, 1966)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이들은 1948년에 극에 달한 도호 쟁의(東宝争議)의 리더 중 하나로 회사에 맞섰으며 이중 야마모토 사츠오는 1948년 도호(東宝)를 떠나 공산주의 비평가인 이와사와 아키라 등과 함께 신세이에이가샤(新星映畵社)를 설립한 후 폭력의 거리(暴力の街, 1950)등을 만들었다. 동시에 미군정의 검열에 저항하는 이른바 ‘레드퍼지(レッドパージ: 연합군 점령 하의 일본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부 총사령관의 지령에 의해 일본공산당 소속 당원이나 동조자를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에서 해고한 움직임)’ 영화인들의 조직적 저항을 이끌어 내려 했다. 이 전통은 1955년 야마모토 프로(山本プロで)의 설립으로도 이어져 전국농촌영화협회의 작품인 ‘짐수레의 노래’(荷車の歌, 1959), 일본 교원 노동조합(日教組)의 재정적 후원으로 제작한 ‘인간의 벽’(人間の壁, 1959) 등으로 투쟁적인 영화들을 만들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일본 공산당은 자신들의 나라가 전범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미군정과의 투쟁을 자신들의 세력 확장 수단으로 삼게 되는데 단순한 미군정에 대한 거부감, 패망에 대한 허탈감에 겹쳐 ‘반미(反美)’정서가 일어나자 이를 드러내 놓고 이용하는 기민함을 보인다. 이러한 역설은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 사회의 병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 영화인들 대부분이 독립프로덕션의 한계를 절감하는 한편,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는데 노동조합의 지지와 압력은 결국 또 다른 자신들만의 ‘검열’을 통해 스토리의 앞뒤가 맞지 않는 파업, 농촌운동 등 장면을 꾸며 넣도록 하여 반감을 샀다. 이 때문에 영화인들이 다시 메이저 영화사로 복귀하게 되는데 1951년 도에이(東映) 등의 설립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았다.<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