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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습관을 기르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
글의 정의를 넓혀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누구나 제법 오랜 시간, 많은 글을 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숙제처럼 매일 써야 했던 일기나 교과서나 참고서 내용을 베껴 적었던 과정 모두가사실은 글쓰기라는 거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납득할만한 글을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글을 쓰지는 않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람을 품고 살아 갑니다. 글 쓰는 습관을 만들고 싶은 분들을 위한 책을 소개합니다. 뭔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꼭 장비와 도구를 먼저 갖추어 준비가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준비는 필요합니다만 모든 게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한히 유예하는 게 좋은 습관은 아니죠.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글 쓰는 기술 혹은 요령을 배우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의 흉내 내기를 시도하다 지쳐서 그만두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 쓰려고 욕심부리기 보다 매일 그냥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자기 글을 알아가라고 하죠.  자신에게 엄격한 글, 더 완벽한 글을 쓰려다 보면 글쓰기는 재미 없고 힘든 일이 되어 버립니다. 재미도 즐거움도 없이 억지로 쓴 글은 읽는 이에게도 비슷하게 읽히기 마련이고요. 노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노력만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오래, 멀리 가기 어렵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날마다! 그냥!! 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어떨까요? 날마다 그냥 쓰면 된다 자세히 보기 >> https://goo.gl/s2yDzC 어린 시절 잠이 들라치면 어머니는 “일기는 썼니?”하고 묻곤 하셨습니다. 부랴부랴 엎드려 몇 줄 적다 잠든 날도 많았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기는 하루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쓰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죠.  이 책은 일기는 밤이 아니라 아침에 쓰는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루에 활력을 더하고, 희망을 불어넣을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오늘 중요한 발표가 있다고 하면 불안과 기대가 복잡하게 얽힌 아침일 겁니다. 아침 일기가 도움이 되는 건 바로 그 순간입니다.  머리 속으로 생각하던 불안함이 글로 실체를 보이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게 됩니다. 몰라서 생긴 불안이 해소되는 순간이죠. 희망과 기대를 적음으로써 용기를 북돋을 수도 있습니다. 어제 속 상했던 일이 아침에 보니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웃게 되기도 하죠. 복잡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시작해보세요. 아침 일기. 하루 5분 아침 일기 자세히 보기 >> https://goo.gl/2dZn5R 많은 작가와 더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필사’죠. 수업 시간에 선생님, 교수님의 말을 받아 적거나 필사하듯, 인상 깊고 완성도 높은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면서 자신의 문장을 단련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이 책은 좋은 문장을 쓰고 싶지만 처음이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베껴쓰기를 소개합니다. 베껴쓰는 과정을 통해 문장과 단어, 조사 등 요소에 대한 이해와 활용을 배우는 거죠.  문장은 쇠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쇠를 달구고 두드리기를 계속해서 단단하게 단련하듯 단련할 수록 좋아진다는 거죠.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가 같은 쇠로 다양한 연장을 만들어내듯 글쓰기도 꾸준한 연습과 단련으로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베껴쓰기로 연습하는 글쓰기 책 자세히 보기 >> https://goo.gl/ctsdQs 글쓰기는 읽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읽다 보니 쓰고 싶고, 쓰려니 더 읽게 되는 효과가 생기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기억력에는 유통 기한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문장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이 내일까지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죠.  이 책은 읽기의 연장이자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쓰기, 그 안에서도 서평 쓰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서평이란 무엇이며, 왜 쓰는지를 짚어보고 쓰는 연습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죠.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과 의문에 논리적으로 묻고 답할 수도 있고, 자기만의 결론을 내고 결론을 뒷받침할 생각을 구체화할 수도 있습니다.  서평에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다른 결론에 닿을 수 있기에 생각의 변화나 내면의 성장을 확인하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요. 기록은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입니다. 서평 쓰는 법 자세히 보기 >> https://goo.gl/N9r3QV 글을 쓰다 보면 욕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얼마간의 재능이 있고, 글 쓰는 게 즐거울 때 욕심이 커지죠. 하지만 전업 작가로서의 삶은 만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생계가 되고, 일이 되면 대하는 마음이 변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책은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 밥벌이로써 글을 쓰는 작가들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예상하고 계신 것처럼 “책을 썼더니 처음부터 잘 팔렸다, 당신도 열심히 써서 나처럼 되길 바란다.”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움과 위기, 계속 써나가는 고충과 같은 냉엄한 현실이 있죠.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작가는 예술인 중에서도 몹시 가난한 축에 든다고 합니다. 좋아하고, 계속 하고 싶어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쓰고 싶다면 꼭 도전하시길 응원합니다. 그 모든 과정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 이어지고 전해질 테니까요. 밥벌이로써의 글쓰기 자세히 보기 >> https://goo.gl/1pMv24 글을 쓰는 데는 많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펜과 종이, 스마트 폰 메모장이나 글쓰기 앱, 공간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죠. 습관이 된다는 건 부담 없이, 꾸준히 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장편 소설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짧은 낙서, 일상의 기록을 남기는 일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정기배송 자세히 보기 >> https://goo.gl/BjCm9p
무료 웹툰, 웹소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부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
신생 웹툰/웹소설 사이트 오북, 오픈북의 줄임말로 보인다.(담당자님 메일이 오픈북이라고 되어 있음) 그런데 일단 이 플랫폼은 다른 플랫폼에 비해서 엄청나게 기발하다. '누구나 자유롭게 작가로 활동할 수 있고' '수익의 90%를 작가가 가져간다?' 작가로 활동하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특히 아마추어 작가분들이면 더 뼈저리겟지만 수익의 90%는 작가가 아니라 회사가 가져간다. 그런데 이건 대체...? 성인물은 안 되지만 그 이외의 거의 모든 장르가 가능하다. 특히 '장르'소설/만화판에서 '순수예술'을 고집하시는 분들은 장르 선택에 고민이 많지만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기타' 장르를 제공한다. 즉, 종합예술을 하고 싶다면 고민 없이 '기타' 장르에서 연재가 가능하단 뜻. 사정상 성인물의 연재는 불가능하다지만, 그 사정이란 게 뭔지 아래에서 나온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할만한 사정이다. 성인물도 없고, 정식 작가도 없다. 그럼 대체 어떤 식으로 돈을 벌겠다는 건지? 그 대답은 이 카드에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플랫폼은 기본적으로 유료/무료를 선택할 권리를 작가에게 부여한다. 또한 이 플랫폼은 독특하게도 '후원'이라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작가가 마음에 들 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금을 따로 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중계 수수료에 해당하는 10%는 플랫폼이 가져가는 것이다. 아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아프X카 tv의 별풍선 제도를 살펴보면 거기서는 수익의 3~40%를 플랫폼이 가져간다. 생각이 바뀌었다. 합리적이 아니라 플랫폼이 손해를 보는지도 모르겠다. "기본고료는 지급되지 않습니다." 한국만화가협회였던지 웹툰작가협회였던지 모르겠는데 거기서 "기본고료를 받는 쪽을 택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식 작가' 기준. 오북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연재하면서 고료를 받는 곳이다. 그리고 아마추어 작가들은 웬만하면 공짜로밖에 연재할 수가 없다. 가장 유명한 웹소설 플랫폼이라면 역시 네이버 웹소설일 텐데, 거기도 베스트리그에 등재되지 않는 한 판매가 불가능한데다가 기본고료도 없다. 그에 비하면 누구에게든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이 제도는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저작물로 파생되는 수익을 9대 1로 나누는데, 기본급까지 지급하면 개인 회사인 오북이 살아날 수 있겠나. 애초 큰 기업이 아니라면 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게 내가 이 사이트를 '자발적으로' 홍보하는 큰 이유이다. 기부를 위한 사이트? 거기다가 작가를 위한 고료는 고료대로 다 지급하고 나머지는 취약계층의 꿈을 위한 기부금으로 주겠다고? 상식적으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분명 어딘가 사기칠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계약서에는 딱히 그런 게 없었다. 비밀 유지 조항에 위배되기 때문에 정확한 조항은 이야기할 수 없지만, 작가에게 저작권이 모두 있음을 말하고 있고, 수익 구조는 정확하게 분배된다. 물론 기부는 계약서에 있을 이유가 없어서 정확히 어디에 사용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플랫폼의 수익에서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문의는 트위터에서 @0_B00K 오북 을 찾기를. 아니면 메일로 문의해도 담당자님이 친절하게 답변해 주신다. 참고로 이 사진들 다 트위터에 트윗한 내용들인데, 내가 홍보해도 되겠냐고 허락맡고 퍼옴. 당연히 무상이다. ㅇㅇ 위에서 다 설명한 내용. 타 사이트에서 동일한 저작물을 가지고 활용할 수 있다는데, "유료연재의 경우는 동시연재 또는 타 사이트로의 이동이 불가능한 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되어 있다. 좀 꺼림칙한 사람들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안정적으로 고료를 받고 연재할 기회가 된다면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테니.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계약서 조항을 말해주면 안 되지만, 어쨌든 내용 중에 "추후 협의 가능"이라는 내용의 조항이 있긴 있으니까. 더 자세한 조항은 담당자님께 직접 문의하시길 바란다. 어쨌든 나도 일개 유져일 뿐이니까. 그리고 '요일연재, 자유연재'라고 되어 있는데, 이건 거의 진짜 웹툰같은 레이아웃으로 보여준다. 아직 베타라 작품은 많지 않지만, 대충 스크린샷을 찍어 본다면 이런 식이다. 전부 정식 작가들이 아니라 아마추어 작가들이다. 물론 그 중에 기성 작가들이 섞여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또, 아직 베타인데다가 홍보도 제대로 안 되어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것밖에 없다. 하지만 작가를 꿈꾸는 당신! 지금 당장도 저기를 당신들로 채울 수 있음을 명심하라!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의심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게 해 주는 담당자님의 한 마디. 애초에, 수익은 1할밖에 안 받겠다는 플랫폼에 어떤 멍청이가 투자를 하겠나. 담당자님도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은 이런 바보들이 있어서 따뜻할 수 있다. 우린 그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레진 사건도 그렇고, 꽤 예전부터 작가들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티테일 원고료 5만원 사건이라던지, 폭스툰 강제 휴가 사건, 그리고 그냥 평균 월급이 150만원밖에 안 되는 소설가라는 직업(평균이 그렇다는 건 일반적으로는 그보다도 못 받는다는 이야기다). 원래 별로 인식이 좋지 않았다가 웹툰의 부상으로 이제야 빛을 좀 보는 만화가라는 직업. 하지만 그 어떤 직업이든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다. 그리고 그 직업들이 배고픈 이유는 일차로 우리가 돈을 안 내고 보기만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거기에 편승해서 이득을 보려는 회사의 이기심들이고, 그 기반에는 우리의 예술에 대한 안 좋은 인식들이 깔려 있다. 나 역시도 숱하게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사비를 털어서 플랫폼을 만드시는 분은 처음 본다. 기부를 할 지 안 할지는 어디까지나 담당자님의 양심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굳이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충 이런 식으로 한눈에 보기라는 걸 만들어 놨는데, 이렇게 해 놓으면 내가 여기까지 적은 장황한 말들이 무색해지잖아...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담당자님이 사비를 털어서 만든 플랫폼이니만큼, 본인 인증 시스템이 필요한 성인물은 비용상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초기 비용이 있다면야 사실 성인물을 연재에 넣고 싶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장 잘 지르는 게 그거잖아. 그냥 볼 수 있는 만화와 성인물은 확실히 수익에서 차이가 난다. 돈 쓰는 게 자유롭냐 아니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가로 몇 가지 팁을 알려주자면 1. 여긴 아직 혼자서 연재가 불가능하다. 계약서에 이름 적고 사인하고 연재 양식에 맞춰 파일들을 담당자님께 보내면 담당자님이 보시고 연재 창구를 열어주는 식이다. 그러니까 소설 갓 시작한 사람들이 XX:이야~! 덤벼라! AA:으윽...! 방심했군! 이런 식으로 대본인지 소설인지 모를 괴상하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들을 볼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뜻. 아, 비하해서 미안하지만 그런 식으로 쓰는 소설은 한계가 있다. 소설가 지망생 여러분, 독자들은 여러분들 생각보다 똑똑하니까 굳이 누가 말하는지 안 보여 줘도 알아서 유추할 수 있다. 작가를 지망하는 여러분 모두 파이팅. 그러고 너희는 수능을 치겠지 2.각 회차마다 섬네일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스크린샷으로 보여줬다시피 작품 각각은 섬네일이 필요하다. 메인에 업로드되는 섬네일은 가로790px 세로270px을 규격으로 한다. 특히 유료연재라면 아무래도 섬네일은 멋있는 게 좋겠지. 보면 다른 그림들은 다 멋진 가운데 하나만 이상한 노란머리 여자애가 썩은 표정 짓고있는 게 보일 거다. 그거 내 그림이다. 담당자님이 첫 화 보낸 직후에 말씀하셔서 일단 급하게 삼십 분 만에 그려서 보내서 저 모양이다. 나도 이번 주 안에 바꿀 생각... 여러분은 나처럼 되지 말고 멋있는 스타트를 끊기를 바란다. 3. 담당자님이 엄청 열일하신다. 아무래도 혼자 만든 사이트이다 보니 여러모로 불편한 게 많다. 이를테면 작가의 말이 없고, 마우스 우클릭이 허용되어 있다든지 하는 점이다. 참고로 이 점들은 이미 담당자님께 말씀을 드려 놓았다. 3월쯤에 제대로 된 오픈을 할 텐데(추후 변경될 수 있음), 그때쯤에는 고쳐질 것이다. 그런 걸 일단 오픈베타 때 담당자님께 말씀을 드릴 수 있는데. 내가 문의메일을 새벽 한 시 반에 보냈더니 두시에 답장이 왔다... 현재 고치고 있다고... 잠도 안 주무시나? 매일매일 그렇게 살기 힘들 텐데... 4.변경 사항은 추후 공지해준다고 한다. 그때 따로 카드를 작성하도록 할듯.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한번 들어와 보라. 물론 풀린 작품은 커녕 제대로 이야기가 진전된 것도 없어서 아직은 초라하다. 하지만 오픈베타다. '발전 가능성'을 보는 상태다. 그리고 여러분이 보는 공짜/유료 작품 한 편이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보고 넘어가 줬으면 한다. http://openbook.kr// 링크를 동봉한다. 그리고, 이 글은 얼마든지 무단복제 후 배포해도 된다. 아니, 제발 그러기를 부탁하고 싶다. 취지라도 좋은 사이트, 그리고 작가를 꿈꾸는 숱한 사람들의 꿈. 그건 여러분의 무심한 클릭과, 즐길거리를 찾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무과금이든 과금이든 상관 없다. 손해볼 것 없지 않은가. 긴 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표한다. 난 원래가 글쟁이긴 하지만, 광고를 해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 카드에는 내 만화 <다이어트일지>의 회차 몇 개가 홍보용으로 쓰여 있지만 거기에서 이렇게 세세한 정보를 준 적은 없었다. 어떻게 읽는 데 불편함이 없었으면 좋겠다. 읽는 데 불편하다면 그건 나한테 얼마든지 컴플레인을 걸어도 좋다. 그리고 사이트에 대해서 더 궁금한 거 있으면 나 말고 open-book@naver.com으로 메일 보내시길. 더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르고, 알아도 계약서상 함구해야된다. 지금도 이미 계약서 조항 네 개는 말한 듯? 여러분들한테만 좋은 일 시키고 나는 잘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어쨌든 한 번쯤 들러 보기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5...조선영화(2)
... <사진=일제 강점기, 최인규 감독 등은 일제를 옹호하는 친일 영화를 만들었다. 사진은 한국영화 100년 영화포스터 전시회장.> ... 사실 1920년대 조선은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영화들이 종종 등장하는 시기였다. 이규환(李圭煥)은 교토의 신흥키네마에서 영화를 배운 뒤 경성에서 ‘임자 없는 나룻배’(1932)를 만들었는데 가난한 나룻배 뱃사공 노인이 철교 건설 때문에 실직한 후 딸을 범하려는 일본인 기사를 살해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반일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동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개개의 영화인들은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을 작품에 포함시키는 작업보다는 일본영화를 모방하기에 급급했고, 일본이나 만주의 영화계 혹은 상하이의 영화계에 흩어져 조금이나마 영화기술을 체득해 나갔다. 이러한 까닭에 일본의 유행에 편승하여 신파영화가 유행하면 신파영화를 만들고 경향영화가 유행하면 경향영화를 만들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다만 일본에서 유행하는 시대극이 조선에서는 발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검열과 막대한 제작비 그리고 망국의 설움 등 다양한 견해가 따를 수 있겠는데 오히려 일본인들이 대만에서 이국적 정서의 영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제작비를 들여 조선의 고전들을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가 많았다. 1920년대는 단성사와 조선극장(朝鮮劇場)의 라이벌 관계가 볼만 했다. 조선극장은 1922년 경성 인사동에 당시 약 10여 만원 정도의 건축 비용을 들여 지은 3층 벽돌 건물로, 영화 상영과 연극 공연을 겸한 장소로 쓰이다가 동양극장(東洋劇場) 개관 후 부터는 본래의 목적인 영화 상영에 주력했는데 당시에는 극장이 제작사를 겸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줄곧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선의의 경쟁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생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토키(유성)영화는 일본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등장한다. 이명우(李明雨)의 ‘춘향전(春香傳)’으로 녹음시스템, 방음장치와 시설, 스튜디오, 촬영장비 등이 열악했지만 1935년 10월 단성사에서 첫 번째 토키영화가 개봉, 2배의 입장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춘향’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조선영화계는 발성영화기로 들어섰다. 물론 토키영화의 시도는 최고의 스타 나운규와 최초의 조선인 촬영기사 이필우가 의기투합한 ‘말 못할 사정’이었지만 실패하고 말았고 ‘춘향전’의 경우는 일본 영화인과 조선 영화인의 협업으로 성공했는데 그 이면에는 ‘경성촬영소’가 있었다. 경성촬영소는 와케지마 슈지로라는 재조선 일본인 제작자가 소유한 스튜디오였으며 녹음에 사용한 토키 시스템인 ‘조선폰’은 일본인 녹음기사 나카가와 다카시가 일본에서 들고 와 사용한 것이었다. 당시 경성촬영소에는 일본 쇼치쿠 출신의 야마자키 후지에가 감독으로 입사해 조선 이름 ‘김소봉’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경성촬영소는 1938년 11월 동양극장 지배인 최상덕과 고려영화사의 이창용이 공동 인수하게 되는데 ‘조선영화주식회사’(대표 최남주)와 ‘고려영화사’(대표 이창용)라는 양대 산맥의 라이벌 회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는 구도가 193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이창용은 지금으로 말하면 배급업에 능한 영화인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20년 4월 조선총독부 활동사진반을 창설해 전국의 학교, 공회당, 병원 등에서 계몽영화들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데 영화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922년 경기도 훈령으로 ‘흥행및흥행장취체규칙’을 제정해 극장에 대한 단속 규정을 정비한 바 있었고 1926년 7월 5일 총독부령으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제정해 영화 검열을 의무화했다. 이 때문에 경찰들이 공연장에 임검(臨檢)할 수 있었고 1934년 8월 7일 공포된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은 흥행업자에 대한 개념 규정(2조), 흥행 보고 의무 규정(4조) 등을 두었고, 조선영화의 수출과 외화의 수입 상영에 대한 제한 규정(9조) 등을 두어 영화업을 체계적으로 정비해 나갔다. 조선의 각 영화상설관은 1934년 말부터 단계적으로 외국영화 상영을 줄여야 했고, 1937년부터는 매달 반 이상 일본영화를 상영해야 하는 국산영화 강제 상영이 규정되었는데 할리우드 영화를 견제한다는 목적이 컸다. 조선인들이 일본영화 보다는 할리우드 영화를 더 선호한다는 이유였지만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일본에게 있어서 결국 조선영화 역시 ‘일본영화’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본과 만주까지 수출할 상업영화 제작을 하게 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1940년에 조선에서도 ‘영화법’이 제정되어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영화에 관여할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의 영화계는 일본과의 합작 혹은 일본에서의 조감독 경험이나 스텝 경험을 통해 유입된 조선인 영화인들을 통해 신파에서 벗어나 근대의 계몽정신을 스크린에 구현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조선의 영화계는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1942년에는 모든 영화사가 폐쇄되었으며 총독부에서 ‘조선영화사(朝映, 조에이)’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암흑기에도 감독의 길을 걷고 싶은 조선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었다. 일제에 부역을 하거나 아니면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아동극을 만드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조선 영화계의 제2세대 감독들인 방한준(方漢駿)과 최인규(崔寅奎)가 그 주인공으로 검열을 피해 어린이의 세계를 다룬 영화로 울분을 달랬다. <사진=한국영화 100년 영화포스터 전시회장.> 이중 방한준은 사실주의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데 도쿄의 쇼지쿠 키네마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며 백운행(白雲行) 또는 자운행(自雲行)으로 이름이 표기된 경우도 종종 있다. 1935년 ‘살수차(撒水車)’를 통해 데뷔했는데 정비석의 원작 소설의 ‘성황당(城隍堂)’(1939)과 세미 다큐멘터리적 기법의 ‘한강’(1939)으로 주목 받았지만 결국 국책영화를 제작하면서 조에이에서 종전(終戰)까지 총 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최인규(崔寅奎)는 ‘수업료(授業料, 1940)’에서 학비를 못내는 가난한 소학생과 교사간의 교류를 그렸고 ‘집 없는 천사’(1941)에서는 부랑아들을 돌봐 주는 고아 청년을 주인공으로 다뤘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친일’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일본의 영화인들이 차례대로 조선에 건너 와 조선의 주요 영화인들을 현지 스텝으로 고용하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풍토가 이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 조선에서 제작된 영화는 총 26편이었는데, 이 가운데 친일영화로 분류하기 모호한 8편을 뺀 나머지 영화 18편을 친일영화로 분류하고 있고 이중 5편이 최인규 감독의 영화인 까닭에 영화적 완성도를 떠나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허영(許泳, 일본식 이름은 히나쓰 에이타로, 日夏英太郞)의 경우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다. 조에이와 조선군사령부 산하 보도부가 공동제작한 문예봉 주연의 ‘너와 나’(1941)를 통해 데뷔했는데 워낙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일본 육군성 보도부 및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했고 대대적 홍보가 가능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인도네시아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광복 이후 그곳에 정착하여 영화작업을 계속했다. 쇼지쿠 출신으로 일본 여인과 결혼하고 조선에서는 친일영화를 만들었으나 정착 후에는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는 등 모순된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시대가 만든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도요타 시로(豊田四郞)의 ‘젊은 모습’(1943)에서는 아예 조선인 학도병 출진을 미화하였고 도호의 이마이 타다시(いまいただし)감독의 ‘망루의 결사대(望樓の決死隊, 1943)’ 는 팔로군계열 빨치산 공비 정벌에 목숨을 거는 일본인 순사 일가와 한국인 부하들의 모습을 마치 할리우드의 서부극처럼 그려 나간다. 그렇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국책영화에 부역했던 조선의 영화인들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더니 대한민국의 경우는 1998년까지 일본영화 상영금지가 되기도 했다.<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79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5...조선영화(1)
... <사진= 1935년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이명우 감독). 이 ‘춘향전’을 시작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이 리메이크, 멜로드라마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진은 한국영화 100년 영화 포스터 전시회장.> ... 식민지 조선은 대만과는 사뭇 달랐다. 어차피 민중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한제국의 황실과 몇몇 친일인사들의 야합으로 이뤄진 병탄이었던 까닭에 식민지배는 늘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민중 저항운동이었던 ‘동학농민전쟁’ 역시 명성황후 민비정권이 외세를 끌어들여 무자비한 진압을 했고 강제합병의 조건에서 빠지지 않는 게 ‘이왕직 보존’이었음을 감안 할 때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총독부의 고민이었고 가혹한 방법으로 진압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영화산업을 활발히 전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영화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와 문화를 조선에 이식시키려했지만 반대로 조선의 영화인들은 혹독한 검열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먼저 영화를 받아 들이고 기술적 진보를 가져온 까닭에 조선의 영화인들은 그 영향력에서 벗어 날 수 없었고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여전히 일본식 현장문화와 잔재가 남아 있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일제치하에서나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는 조선, 지금의 한국배우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후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영화계에서 재일한국인 배우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각 시대의 미남, 미녀를 기준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승부의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1910년대 경성(京城)에 극장가가 형성되고 1920년대 전국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지면서 영화는 조선민중들의 중요한 오락거리가 되었다, 1907년에 주승희가 발의하고 안창묵과 이장선이 합자하여 2층 목조 건물로 세워진 반도 최초의 극장인 ‘단성사’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이후 조선극장 ·우미관(優美館)과 더불어 북촌의 조선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본인 전용 영화관인 희락관(喜樂館) 등과 맞서 단성사는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해 왔고 영화역사의 100년을 함께 해 왔다. 1919년 10월 최초로 조선인에 의해 제작된 연쇄활동사진극(連鎖活動寫眞劇)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의리의 복수)’를 상영하였는데 1910년대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던 연쇄극 형식을 따른 것으로 신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4년 초 단성사 촬영부는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함으로써 최초로 조선인에 의한 극영화의 촬영·현상·편집에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신파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데 심지어 조선 시대의 구전 예술인 판소리, 유행가에도 스며들어 ‘한국형 멜로드라마’로 이어진다. 조선총독부 역시 대만과 마찬가지로 계몽영화를 기획하여 당시 대중 연극계의 리더격인 윤백남(尹白南)에게 저축 장려 영화인 ‘월하의 맹세’(月下─盟誓, 1932)를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제작하는데 조선 최초의 극영화(劇映畫)로 경성호텔에서 신문기자와 관계자 100여 명을 초대하여 시사회를 가졌으며 약 1년간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 선을 보이고는 1924년 2월부터 지방순회상영을 하였다. 이월화가 배우로 데뷔하였고, 각본·감독·연기를 모두 조선인이 맡았으나 촬영과 현상은 일본인이 맡았다. 1924년 일본인이 조선키네마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해의 비곡’(1924)을 내놓자 이에 대항하여 조선인들이 설립한 독립제작사가 줄을 이었다. 이 시기는 교토에서 독립 제작사가 줄줄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인데 일본이 조선에 영화사를 세운 것은 일본영화산업이 번창하는 만큼 조선도 번창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면에는 1923년 하야카와 마쓰지로(早川孤舟)감독의 ‘춘향전’의 성공이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춘향전’은 당시 인기변사였던 김조성과 개성 기생 한명옥이 이몽룡과 춘향 역으로 출연했다.식민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완전체 영화(이전에는 ‘연쇄극’이라 하여 연극 공연중에 짧은 필름을 상영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로 실제 조선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남원에서 올로케이션 촬영을 했으며 제작, 감독 및 각본, 촬영 등 주요 역할은 일본인 스태프들이 담당해 흥행했다. <사진= 한국 영화 100주년 영화 포스터 전시회장.> ... 이러한 흥행 성공이 결국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 설립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민족고유의 이야기인 ‘춘향전’을 일본인이 제작했다는 사실에 많은 조선의 영화인들에게는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춘향전’은 일본의 ‘주신구라’와 비슷하게 국민영화가 되어 1935년 최초의 토키영화로 이명우(李明雨) 감독의 ‘춘향전’을 시작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이 리메이크되어 멜로드라마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서 언급할 인물은 윤백남이다. 그는 경성으로 올라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5가)에 제작사‘윤백남 프로덕션’을 차리고 첫 작품으로 ‘심청전’을 제작했다. 조선인의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 제작사였으며, 조선영화에 대한 결집된 열망으로 만들어졌고 윤백남, 이경손, 주삼손, 나운규, 김태진, 주인규, 김우연 등 멤버들이 참여 했다. 이에 윤백남은 이경손(李慶孫) 감독, 니시카와 히데오(西用秀洋)를 촬영감독으로 하여 일본에서 사온 중고 카메라(당시 350원)로 촬영하여 1925년 봄 조선극장에서 개봉했다. 당시 심청 역을 맡은 이는 조선 키네마의 최덕선이었고, 심봉사 역에는 나운규였다. 신인으로서는 파격적인 기용이었지만 심봉사의 외모에 가장 잘 어울렸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그는 아예 장님을 방문하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대본을 외우면서 성격파 연기 배우로 발돋움했다. 관객들은 나운규의 연기를 두고 천재라는 찬사를 보냈지만 불행히도 일본 측 투자자의 약속이 어그러져 제작비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경손의 연출력도 도마에 올랐지만 심청 역의 최덕선의 연기도 수준미달이었으며 특히 허술해 보이는 용궁 세트나 인당수를 재현한 마포나루에서 인형을 떨어뜨린 점 등이 지적되며 흥행에 실패 하고 만다. 이후 이경손은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를 통해 다시 영화계에 복귀한 후 계림영화협회와 손잡고 일본의 오자키 고요(尾崎紅葉)가 쓴 ‘금색야차(곤지키야사, 金色夜叉)’를 번안한 ‘장한몽(長恨夢)’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이수일과 심순애’ 혹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로 회자되는 작품으로 매일신보 출신 기자 조일재는 원작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번안했다. 그 결과 이수일과 심순애가 탄생하게 된 것인데 두 사람의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은 관객들의 사랑과 찬사를 받으며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의 이면에는 뒷담화가 무성했다. 심순애역을 맡은 여배우 김정숙은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선천적으로 말더듬이었다고 한다. 배우로서는 부적합했지만 타고난 미모를 이용, 윤백남 프로덕션의 ‘심청전’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한몽’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무성영화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수일 역을 맡은 이는 일본인 주삼손이었는데 미남형 배우였기에 전격 캐스팅되어 촬영에 돌입했다. 그러나 자신을 캐스팅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나운규 감독이 돌연 주삼손을 빼돌리고 촬영 방해를 하는 바람에 대체된 배우가 등장하는데 바로 심훈(沈薰)이다. 훗날 소설 ‘상록수’로 유명해진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조선일보 기자였는데 신극 연구단체 극우회(劇友會)의 회원이었기에 전격 출연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인일역(二人一役)의 영화를 매우 어리둥절해 했다고 한다. 이후 이경손은 이내 상하이를 거쳐 방콕으로 망명의길을 택한다. 한편 1926년 나운규(羅雲奎)의 민족영화 ‘아리랑’은 조선영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영화사 연구에 의하면 나운규가 감독을 맡았다는 설과 일본인 쓰무라 슈이치(津守秀一) 감독을 맡았다는 두 가지 학설이 전해오기는 하지만 항일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나운규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되었고 특히 변사의 애드립으로 조선총독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주인공 미치광이 청년이 여동생을 괴롭히는 관리의 앞잡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변사가 항일운동을 하다가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라고 설명하자 관객들이 크게 흥분하였고 이에 입회하고 있던 경관이 상영중지를 선언했다. 상영이 끝날 때쯤 가수가 일어나서 창작민요인 주제가 ‘아리랑’을 선창하면 관객들은 함께 불렀다. 1928년 나운규는 ‘벙어리 삼룡’을 감독했다. 이 영화는 나도향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였는데 이 영화를 통해 주연 여배우였던 류신방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다. 나운규는 17편의 작품을 남기고 35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7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잊기 좋은 이름
'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김애란 작가님의 첫 산문집이다. 잊기 좋은 이름. 잊기 좋은 이름. 혼자 입 안에서 제목을 이리저리 굴려보다 그 어감에 매료되어 책을 집어 들었다. 잊기, 좋은, 이름. 단정히 정돈된 두 글자 단어 세 개. '잊기 좋은 이름'이라는 제목을 입 밖으로 꺼내보면 리듬이 살아서 움직인다. 무엇보다 김애란이라는 작가와 어울린다. 1부는 재미있고 , 2부는 신기하고, 3부는 슬프다. 잊기 좋은 이름은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다. 1부, 나를 부른 이름. 2부, 너와 부른 이름. 3부, 우릴 부른 이름들. 1부부터 이야기해보자면 김애란 작가 본인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작가의 삶을 몰래 엿본 것 같아 재미있었고 한편으로는 그 삶에 공감했다. 대산대학문학상의 수상 소감을 말할 때 한껏 멋을 부렸다고 담담히 인정하는 글도, 학창 시절 한 남자아이와 당시에는 그런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썸을 탔던 과정을 보여주는 글도, 어머니 아버지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딸이 쓴 글도 다 어찌 보면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내 부모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내 친구, 직장 동료, 친척들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 글들이 김애란 작가의 담담하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 문체와 어우러지고 평범한 이야기가 특별해진다. 2부에서는 자신의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연수, 편혜영, 윤성희, 박완서, 조연호. 총 다섯 명의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이게 또 오래된 야사를 듣는 것처럼 신기하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멀리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 않는가. 김애란 작가가 자신의 친한 동료이자 친구들에 대해 느낀 감정들과 소소한 일화들을 써 내려간 글을 보고 있자면 이 작가가 이런 사람이었어? 글이랑 완전 다르다, 특이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이 사람 만나 보면 진짜 재밌을 것 같다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가 이 사람들을 정말 마음으로 아끼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나까지 가슴속이 따뜻해진다. 3부는 너무 슬프다. 슬프다기보다 아프다고 해야 할까. 눈물이 터져 나오진 않지만 가슴 한구석이 조여와 아픈 기분. 몇 년간 꾹꾹 눌린 눈물이 단단히 굳어 눈물길이 중간에 턱 막혀버린 기분. 그런 기분이 든다. 1부, 2부를 미소 지으며 읽게 만들어놓고 이런 3부라니. 3부에서는 세월호 참사, 동일본 대지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누군가에게는 깊은 아픔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분노의 기폭제였고 누군가에게는 체념과 포기의 시작이었던, 이제는 오래되어 점점 잊혀 가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영원히 그 시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누군가는 이제 그만 너라도 나오라며 애타게 부르고, 누군가는 언제까지 그 일을 이야기할 거냐며 화를 내고, 누군가는 아예 입을 닫는다. 그 수많은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작가는 말한다.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고. 이름을 잊을 수도 있고, 다시 떠올릴 수도 있고, 그러다 자책할 수도 있고, 다시 잊을 수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름도, 잊기 좋을 수는 없다. 소설 속 한 문장 :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위작 논란의 대명사 빈센트 반 고흐의 진짜 그림을 찾았다?
옛날부터 유명한 작품과 화가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위작이지요. 위작의 역사는 미술사의 역사와 같다고 말할 만큼 미술계에서는 누구나 알지만 쉬쉬하는 영역입니다. 1987년에는 고흐의 5번째 해바라기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4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450억에 가까운 금액으로 낙찰되었지만 10년이 지난 후 한 영국인은 그 해바라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했으며 지금까지도 가십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위작 논란에 시달리던 한 그림이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고 하네요. 오늘 RedFriday에서는 누명을 벗은 반고흐 작품에 대해 소개합니다. 1. FAMSF의 뜨거운 감자 Fine Art Museum of San Francisco(샌프란시스코 미술관, FAMSF)에는 오랜 시간 논란에 휩싸인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반고흐의 '과일과 밤이 있는 정물화'입니다. 이 그림은 1960년 한 부부에 의해 기증받았으며 전문가들에 의해 위작이라는 의심을 지속해서 받아왔기에 반 고흐의 공식 작품 목록에도 수록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2. 반 고흐 미술관의 열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고흐 미술관의 소속 전문가들은 2018년 말 이 그림이 위작이 아닌 진품이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이들은 매년 200점의 반고흐 그림에 대한 진위 판정을 의뢰받고 있지만 1988년 이후 공식 작품 목록에 오른 경우는 14점 밖에 없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문을 참고하세요. # 원문 출처 : https://redfriday.co.kr/259 # 많이 본 컨텐츠 # 매일 업데이트되는 생활꿀팁과 알아두면 도움되는 이야기를 팔로우 하셔서 쉽게 구독하세요. # ‘좋아요’ 와 ‘공유하기’ 많이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