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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따로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소설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소설이 바로 <멋진 신세계>이니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984>보다 <멋진 신세계> 속 디스토피아가 지금과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1984>를 아직 못 읽었다는 건 비밀이다.) 참고로 이번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안 읽으신 독자 분들은 조심하시길. <멋진 신세계> 속 사회는 말 그대로 멋진 신세계다. 질병도 가난도 불행도 고통도 없는 세계. 행복만이 가득한 세계. 그러나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어야만 한다. 세뇌 교육으로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행복을 느끼며 수행하는 사회에서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자유가 주어진다면 인간들은 각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테고 그러면 직업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억압하려면 인간의 사고를 억압해야 하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금지된다. 철학, 종교, 예술 등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쾌락을 추구하는 촉감 영화(지금으로 치면 4D 영화쯤 되려나)와 첨단 스포츠, 향기 오르간이 대신한다. 그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 자유를 넘본다면 소마를 주면 된다.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마약 소마를. 그렇게 멋진 신세계는 모든 이가 각자 주어진 일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촉감 영화와 스포츠, 향기 오르간으로 즐거움을 소비하며 완벽한 마약 소마로 쾌락을 맛보면서 끝없이 이어진다. 다음 세대로, 또 그다음 세대로. 영원히 같은 것들을 반복하며. 자유가 없지만 모두가 행복한 이 세계를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라고 표현했다. 당연히 반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유 없이 모두가 행복한 세계, 인공적으로 인간을 탄생시키고 세뇌하여 완벽한 사회구조를 지탱하는 세계, 철학과 예술과 종교 대신 급속한 쾌락의 도구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세계에 우리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불행하고 고통받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에도 그 세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한 건 도대체 그 거부감의 합리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였다. 나는 분명 소설을 읽으며 그 속의 세계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지만 도무지 그 거부감의 합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왜 인간은 자유가 없으면 안 되는가, 자유가 없어도 모두가 행복하다면 충분한 것 아닌가, 철학과 종교와 예술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작용 없는 완벽한 행복을 소마가 가져다준다면 그것이 인간이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며 얻는 행복과 다른 점은 무엇이며 소마의 복용으로 느끼는 행복에 대해 내가 느끼는 거부감을 설명 가능한 어떤 근거가 있는가. 사실 이것들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어야 할 이유도, 철학과 종교와 예술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도, 소마로 인한 행복이 잘못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이 종교의 세계에서 과학의 세계로 넘어가는 인류가 겪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이전의 신이 존재하던 종교의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을 통해 보장되었다. 신이 인간을 이 땅에 내려보냈고 인간은 신의 뜻을 받들어 죽은 뒤 신에게 가기 위해 이승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종교의 세계가 말하는 인간의 존재 이유였다. 그러나 과학의 세계로 넘어오며 신은 사라졌고 과학은 아직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어디에 도착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인류는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데 아무 이유도 없다면 인간다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소설 속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인간은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거부감을 점점 파고들어 가다 보면 그것을 설명할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냥 느끼는 것이다. 이유는 없지만 잘못되었다고. 이 소설은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철학적 질문을 함께 던진다. 그 질문에 인간이 답을 찾는 날은 매우 멀거나 혹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과학은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은 두 가지뿐이다. 이미 죽은 신에게 기도하거나 과학이 답을 줄 것이라 맹목적으로 믿으며 멋진 신세계를 만들거나. 마지막 결말에서 자살한 존은 원시인의 세계(종교의 세계)에서 현대인의 세계(과학의 세계)로 넘어온 인물이다. 그는 두 세계를 모두 겪고 난 뒤 목숨을 끊는다. 목을 맨 존의 발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나침반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인류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보여주는 탁월한 결말이다. 흔들리는 나침반으로는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인류는 흔들리는 나침반을 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멋진 신세계> 일지 <1984> 일지 성경으로의 회귀일지 혹은 전혀 다른 어떤 곳일지. 소설 속 한 문장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긋한 두 개의 나침반 바늘처럼 두 발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북쪽, 북동쪽, 동쪽, 남동쪽, 남쪽, 남남서쪽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잠깐 멈추었고, 몇 초가 지난 다음에 서두르지 않고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남남서쪽, 남쪽, 남동쪽, 동쪽......
<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 정영문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어떤 작위의 세계>. 처음 읽어보는 정영문 작가의 소설인데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었으나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으며 어딘가에서 책 제목을 들어본 듯한 느낌에 기억을 되짚어보니 민음사 유튜브에서 편집자가 추천하는 책으로 꼽았던 기억이 났고, 혹시 내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그 기억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나를 조종해 제주도의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어찌 됐든 읽는 동안 즐거웠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소설이니 이 책을 읽은 것이 무의식이 날 조종한 결과이든 아니든 별 상관은 없다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책에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이 가득한데 어떤 것은 두세 줄에서 끝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한 문단 전체가 한 문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거의 한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한 문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기에 분명히 한 문장을 읽고 있음에도 문장의 끝 부분쯤에 가서는 문장의 앞부분이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문장의 앞부분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만큼, 이 소설이 읽기 쉬운 소설이라고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읽기 엄청나게 어렵다고 할 수도 없기에 읽기 어렵긴 하지만 엄청나게 어렵지는 않은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의 서사(사실 서사나 플롯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 들곤 했다)보다는 작가가 왜 이런 두서없고 난잡하고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 생각들을 이토록 길고 지난한 문장들로 표현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는데, 그것은 곧 인간이 그러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생각은 꽤나 그럴듯한 생각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인간이 애초에 어떤 합리적인 존재 이유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므로 인간의 생각이 두서없고 합리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느껴졌고, 그렇기에 인간이 하는 생각을 그대로 글로 옮긴 이 소설이 이토록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그 어떤 질서도 엿보이지 않는 문장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그러한 사고 과정을 그대로 투영한 이 소설은 곧 인간의 존재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어떤 근거도 없다는 사실을 인간의 사고 과정의 언어화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렇듯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근거 없이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사는 것과 죽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주어지는 무료한 시간들을 두려워하고 도대체 어떻게 그 시간들을 보내야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해 괴로워하는데, 그 두려움과 괴로움을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사실, 자신의 삶 전체가 커다란 무의미이자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가져오는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행위로 주인공은 글쓰기, 소설 쓰기를 택하는 것으로 내게는 생각되었는데, 재밌는 것은 왜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이 계속해서 글을 쓰는지 주인공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이며, 나는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이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로캉탱과 겹쳐 보였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로캉탱은 소설을 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한 시도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떤 작위의 세계>의 주인공은 그러한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고, 나는 이 주인공을 약간 아둔한 로캉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 더 재미있었던 것은 이 소설에 정어리라는 단어가 꽤나 자주 등장한다는 것인데 이 소설을 읽는 중 정어리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계기인 민음사 유튜브에서 이 책을 추천한 편집자의 별명이 정어리라는 사실, 그리고 그 편집자가 정영문 작가의 소설 쓰기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이 생각나며 어쩌면 정영문 작가는 예전에 자신의 소설 수업을 들었으며 지금은 편집자가 된 그 사람의 별명이 정어리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성이 정인 그 사람의 별명이 정어리라는 것이 어린 시절 유치하게 이름으로 별명을 짓던 때를 떠올리게 해 그 별명이 머릿속에 깊게 남았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정영문이니 어린 시절 자신 몰래 자신을 정어리라고 놀리던 아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영문 작가에게 그 편집자와의 동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바람에 정어리라는 단어가 이토록 자주 소설에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책을 읽다 가끔씩 하게 되었고 그 바람에 책을 읽는 데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쓸데없는 생각은 그렇게 재미있지 않은 것 같고 그렇다고 재미가 아예 없지는 않으니 조금 재미없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이 리뷰는 <어떤 작위의 세계>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소설 속 한 문장 결국 나는 아무런 느낌도 일으키지 않는, 다시 말해 막막함과 불편함을 절감할 정도로만 느낌을 불러일으킬 뿐, 다른 느낌은 주지 않는 요세미티의 풍경을 보며, 그것이 얼마나 마음을 끌지 않는지를 절감했고, 돌멩이 몇 개를 비탈을 굴러가게 하면 막막하고 불편한 기분이 사라질 것 같았지만 적당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막막함과 불편함을 느끼며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기시대> 문보영
<일기시대> / 문보영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일기시대>를 읽으면서 확실히 깨달았는데 나는 글 같지 않은 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일기시대> 속에는 문보영 시인의 일기로 이뤄진 글들이 들어있는데 일반적인 일기라고 보기에는 조금 특이하다. 성인의 일기라고 하면 보통 다른 요소가 딱히 없는 줄글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일기시대> 속 일기에는 뜬금없이 그림이 등장하기도 하고 사진이 나타나기도 하며 시나 짧은 소설 비슷한 것부터 굳이 각주가 없어도 될 것 같은 내용에 굳이 상세하게 달리는 각주까지 온갖 요소들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일기시대> 속 글들은 소설이기도, 시이기도, 에세이이기도, 논픽션이기도, 기행문이기도, 시나리오나 희곡이기도 하다.(심지어 한 글 안에서도 장르가 계속 바뀐다.) 나는 한 꼭지를 읽고 다음 글로 넘어갈 때마다 이번에는 도대체 뭐가 나올까 하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며 책을 읽었다. 문보영 시인은 이렇게 썼다. '그렇게 아무거나 쓰다 보면 어느 날 그 글은 소설이 되기도, 시가 되기도 한다. 일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p.34) 자신의 말처럼 문보영 시인은 정직한 일기를, 즉 아무거나 썼고 나는 <일기시대>를 다 읽고 나서야 내가 글 같지 않은 글,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글, 아무거나 쓴 글에 끌린다는 걸 깨달았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처럼 넘쳐나는 각주와 참고문헌들로 인해 소설보다는 논문에 가까운 소설이라던가, 정영문의 장편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로 이루어져 도무지 서사를 따라갈 수 없음에도(사실 서사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마치 산문시처럼 이어지는 문장의 흐름과 리듬이 좋아 계속 읽게 되는 그런 글들 말이다. 어쩌면 이것들도 일기의 일종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좋아하는 글들은 일기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그 지점에서 개인적으로 반성하게 된 부분이 있는데 지금까지 100권이 넘는 책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매번 비슷한 형식으로 글을 썼다. 조금 더 아무거나 써야겠다. 책에 대한 일기라고 생각하면 아무거나 쓸 수 있지 않을까?) <일기시대> 속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글은 <내 방에 물건 두고 가지 마>이다. 그중에서도 뒷부분에 나오는 눈물 모양 텐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한 예술가가 나무에 매달린 눈물 모양 텐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눈물 모양 텐트는 단순한 장식품이나 예술품이 아니어서 실제로 사람들이 묵을 수 있다. 그 안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여가를 즐길 수 있으며 들어간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텐트의 모양은 수시로 바뀐다.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이 어떤 거대한 슬픔을 겪은 이들의 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들을 거대한 슬픔은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눈물 모양 텐트 속에서 생활한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간이 흐른 뒤, 텐트 바깥의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이 멀쩡해진 것 같고 모두 훌훌 털어버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직 그들은 눈물 모양 텐트 속에 갇혀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이와 함께 있을 때면 텐트의 모양을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슬픔을 받아주던 착한 사람들이 지쳐가기 시작했고, 우리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아직 눈물 모양 텐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들은 텐트 바깥의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슬픔을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 텐트의 모양을 바꾼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이 아직 눈물 모양 텐트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치고 만다. 그들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밤이 되어 혼자 남으면 너무나 지쳐 모든 움직임을 멈출 것이고 텐트는 다시 눈물 모양으로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 커다란 슬픔을 겪은 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면 그가 텐트의 모양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책 리뷰(라고 쓰고 책일기라고 읽는다.)에 조금 더 아무거나 쓰기로 했으니 아무거나 이어서 써 보자면 <일기시대>속에서 몇몇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맞춤법이 틀린 것 같다거나 문장이 어색한 부분들이었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첫째, 내 맞춤법 실력이 미천하여 옳은 맞춤법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둘째, 작가나 편집자가 특별한 의도로 남긴 것이다. 셋째, 제대로 수정되지 못한 맞춤법이나 오탈자이다. 어떤 경우든 간에 이점이 있는데 첫 번째 경우라면 옳은 맞춤법을 알게 되었으므로 내 맞춤법 실력이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고 두 번째 경우라면 작가와 편집자의 특별한 의도를 읽어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세 번째 경우에 꽤나 큰 기대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산 책이 1판 1쇄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어색하게 느낀 부분들이 제대로 수정되지 않은 맞춤법이나 오탈자라면 당연히 2쇄부터는 수정되어 나올 것이고 이 잘못된 맞춤법과 오탈자는 오로지 내가 산 1판 1쇄에만 남아있게 될 것이다. 만약 문보영 시인이 시간이 지나며 좋은 작품을 쏟아내어 노벨 문학상을 타게 된다면? 그때는 <일기시대> 1판 1쇄의 가치가 미친 듯이 뛰어올라 한 권에 수백, 수천만 원을 호가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1판 1쇄에만 남아 있는 잘못된 맞춤법과 오탈자가 진품을 판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아, 이건 진품이 아니군요. 보십시오, 여기 '그래서'라는 단어에 오탈자가 없지 않습니까? 진품은 서 자가 빠져 있습니다. 아쉽지만 가품이네요.) 그 날을 기다리며 <일기시대>는 지퍼백에 넣어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겠다.(존버는 승리한다!) 이번에 책을 사면서 굿즈인 노트도 함께 받았는데 그 노트에는 <일기시대> 속 문장들이 하나씩 적혀있고 그 밑을 독자가 직접 채울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참에 그 노트를 가지고 일기를 좀 써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하루 만에 방학 동안의 밀린 일기를 전부 썼던 때 외에는 제대로 일기를 써 본 적이 없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방학 숙제를 빌미로 전국의 초등학생들에게 일기 쓰기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현재 일기를 쓰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일기시대>도 읽었고 초등학교 때처럼 억지로 써야 되는 것도 아니니 굿즈 노트 속에 일기를 쓴다면 굉장히 아무거나 쓸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 내가 쓰는 책 리뷰도 조금 더 아무거나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면 일기도 쓸만하지 않을까?(일기를 쓰기로 결심하면서 하나 다짐한 게 있다. '참 재미있었다'로 끝내지 않기.) <일기시대> 속에서 인상 깊었던 글 세 꼭지를 소개하며 마치겠다. 가장 웃겼던 글은 <선 넘기는 기본 메뉴, 박기는 사이드 메뉴>. 가장 슬펐던 글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1, 2화. 가장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든 글은 <내 방에 물건 두고 가지 마>. 책 속 한 문장 그렇게 '눈치'라는 것은 저절로 생겨난다. 어른이 된 황구는 생각하곤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눈치가 없는 사람들은 눈치가 없어도 공동체에서 내쳐질 위험이 없었기 때문에 눈치를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 안톤 체호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현대 단편소설의 아버지, 안톤 체호프의 단편선이다. 사실 현대의 작가들이 쓰는 단편 소설은 거의 전부 안톤 체호프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 수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의 단편 내지는 엽편을 써낸 체호프. 그 이후에 나온 모든 단편들은 거칠게 나누자면 두 종류로 평가될 수 있다. 체호프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거나 체호프와 이런 점이 다르다고 평가를 받거나. 그만큼 체호프는 현대의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작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체호프의 소설을 읽는 동안 웃기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상황을 비트는 유머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 꽤 많은데, 예를 들면 단편선의 첫 작품 <관리의 죽음> 같은 경우 결말을 보고 예전에 유행하던 허무 개그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희극성은 체호프의 작품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독자를 웃기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사의 진실이 녹아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죽음, 이성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다가 고백을 받는 순간 식어버리는 사랑, 과할 정도로 묘사되는 아름다움과 그것을 찬양하는 인간. 이런 장면들은 어이없는 실소와 희극성을 자아내지만 또 그것이 인간이 사는 현실이다.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오며, 누군가에 대한 호감은 사소한 무언가를 계기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겉모습이란 고작 살가죽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인간은 홀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체호프는 가난한 집안에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대학에 다니면서 싸구려 잡지와 신문에 콩트, 유머 단편 등을 기고했다. 거기서 받는 적은 원고료라도 집안에 보태야 할 만큼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생활고에 시달리며 닥치는 대로 써 온 작품들에 담겨있던 유머가 뒤에 체호프가 본격적인 작가로 발돋움한 뒤에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썼던 글들로 인해 훈련된 희극성이 체호프의 작품 속에서 웃음과 함께 인간세상에 대한 통찰을 그려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러니한 느낌도 든다. 굉장히 짧고 간결한 문체로 인간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며 심지어 읽기에도 재미있는 작품을 여럿 써낸 작가가 바로 안톤 체호프다. 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꼭 읽어봐야 할 작가다. 안톤 체호프 단편선은 출판사마다 여러 종류의 책이 나와 있는데 각 출판사별로 담겨 있는 작품들의 목록이 조금씩 다르니 잘 비교해보고 사는 것이 좋다.(이번 리뷰는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 단편선>을 읽고 썼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픈 단편은 <관리의 죽음>, <티푸스> 그리고 <베로치카>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리고...... 죽었다.
<화전가> 배삼식
<화전가> / 배삼식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민음사 유튜브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민음사 온라인 패밀리 데이에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배삼식 작가가 쓴 희곡인 <화전가>는 제목처럼 경북 안동에 있는 한 집안의 여성들이 4월의 봄에 꽃놀이를 가는 내용이다. 희곡은 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선 배우들의 말로 완성되는 문학이다. 언뜻 같다고 착각하곤 하는 글과 말이지만 <화전가>를 읽어보면 글과 말의 다름을, 그리고 말로 언어를 내뱉을 때만 표현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경북 안동에 있는 한 집안에는 여성들 밖에 남아있지 않다. 1950년 4월, 한창 이념과 진영이 국토를 휩쓸며 거대한 내전을 앞두고 있던 그때, 남성들은 이념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갇혀 있거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숨거나 그도 아니면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여성들만이 집안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집의 안주인, 김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김씨의 막내딸 봉아가 내려오고 대구로 시집간 둘째 딸 박실이도 집을 찾아와 오랜만에 집안이 북적대기 시작한다. 마침 밤을 새우며 귀신을 쫓는다는 경신야(庚申夜). 밤이 지나는 동안 여인들은 봉아가 가져온 초콜릿과 커피를 나눠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와중 흥이 오른 여인들은 다음날 화전놀이를 가기로 하며 밤을 지새운다. 다음날 화전놀이를 다녀온 여인들이 헤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막이 내린다. 암울한 상황이다. 집안의 남자들은 전부 감옥에 있거나 행방을 알 수 없고 전 국토가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불안정하다. 그 와중에 여인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하룻밤은 꿈만 같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기뻐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 이념과 진영, 전쟁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어느 한 구석에서 펼쳐지는 여인들만의 즐거운 경신야와 화전놀이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곤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헤어지는 여인들의 모습이 슬프다. 김씨는 두 달 뒤에 6.25 전쟁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봉아와 박실이, 홍다리댁을 보내고 며느리인 장림댁에게는 친가에 다녀오라며 귀한 치마와 가락지를 싼 보자기를 쥐어준다. 그렇게 헤어진 그들은 아마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달 뒤 벌어진 전쟁이 모두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이념이 무엇이고 진영이 무엇이기에 그녀들을 갈라놓았는지, 이념과 진영과 전쟁에 그녀들의 만남과 이야기와 화전놀이를 막을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희곡은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위해 쓰인 문학이다. <화전가> 속 글들은 글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배우들의 입에서 말로 변환되어야만 완전해진다. <화전가>의 배경이 1950년 4월 경북 안동인만큼 그 당시 경북에서 쓰이던 사투리가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도저히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문장들도 수두룩하다. 아무리 글자를 들여다봐도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읽다 포기하려고 할 때쯤 이 책이 희곡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고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해가 되지 않던 문장의 뜻이 마법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글로는 이해되지 않던 문장이 입을 열어 말로 꺼내는 순간 이해가 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뒤로 잘 되지도 않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흉내 내가며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혹시 <화전가> 속 사투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독자가 있다면 소리 내어 문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화전가 뒤표지에 적힌 박민정 소설가의 추천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화전가>에는 대문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슬픔과 투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려는 사람들의 놀이가 회화처럼 담겨 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1950년 4월의 어느 날 경북 안동 한 집안의 여성들이 화전놀이를 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른다. <화전가>는 전쟁에 가려져 있던 일반인들의 삶을 끄집어내 우리 앞에 보여준다. 이것이 문학의 의의다. 알려지지 않은, 가려진 자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들춰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 화전가와 같은 희곡이, 또는 문학이 더 많아져야만 한다, 반드시. 책 속 한 문장 김씨   그래, 무신 생각을 그래 장하게 했노? 봉아   인생, 인생에 대해서. 김씨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생각해 보이 어떻드나? 봉아   머 빌거 없는데. 김씨   없는데? 봉아   빌것도 없는 인새이 와 이래 힘드노?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 이현우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 / 이현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저번에 읽었던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에 이어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을 읽었다. 이번에는 총 12명의 남성작가를 다뤘다. <광장>으로 유명한 최인훈 작가부터 시작해서 이병주, 김승옥, 황석영, 이청준, 조세희, 이문구, 김원일, 이문열, 이인성, 이승우, 마지막으로 김훈까지. 한국문학사에 이름이 남은 작가들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들의 대표작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여성작가편에 이어 남성작가편에서도 근대 소설에 부합하는가를 기준으로 작가들과 그들의 대표작을 분석한다.(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을 때 기준을 가지고 읽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냥 책을 읽는 것에 비해 비판적인 시각과 명확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남성작가편에서 다룬 작품들에는 근대 사회의 모습을 포착한 소설들이 꽤 존재한다. 농촌과 고향이 사라지고 도시와 공장이 생기며 자연스레 탄생하게 된 방랑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나 하층계급에서 상층계급까지 모든 층의 시각을 아우르며 근현대로 넘어오는 한국사회의 단면들을 보여준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로 옮겨간 사회의 중심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 이문구의 <관촌수필>, 근현대 한국의 가장 큰 상처이자 사건인 남북 분단을 보여주는 대표작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까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한 소설들이 한국 문학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지속적으로 근대 장편소설의 부족함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다. 저자는 단편소설은 단편소설만의 가치가 있고 장편소설은 장편소설만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둘의 역할이 다르다는 소리다. 한국의 근현대화 과정에는 커다란 사건들이 여럿 존재한다. 4.19 혁명, 유신 헌법 반대 운동, 5.18 민주화 운동, 각종 파업과 노동쟁의, 6.10 민주항쟁, 현대에 이르러서는 촛불 시위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까지. 한국은 현대의 한국이 되기 위해서 여러 번 커다란 진통과 고난을 겪어왔다. 그 시대를 함께 지나온 한국 문학에는 장편소설이 반드시 필요하다. 앞에서 말한 굵직한 사건들을 자세히 다루려면 어쩔 수 없이 거대한 스케일과 긴 분량이 필요하고 이것은 단편소설이 감당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남성작가편에 나오는 작가들의 행보를 아쉬워한다. 황석영이 <삼포 가는 길>에서 보여준 주제의식을 밀고 나아가 노동자와 사업가, 그리고 노동 현장의 거대한 부조리 등에 대한 리얼리즘 장편소설을 쓰지 않고 대하 역사 소설 <장길산>으로 길을 틀어버린 것,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여러 계급 각자의 시선만을 보여준 연작소설로서 쓰여 근현대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한 상세한 묘사, 사회 체재 자체의 문제로 인한 붕괴 등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장편소설로 나아가지 못한 것 등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갖가지 파업과 노동쟁의가 있었는데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없다면 한국문학의 결핍이고 빈곤이다.' 실제로 막상 떠올려보려고 하면 근현대 한국의 굵직한 사건들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은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아쉬운 일이긴 하나 전적으로 작가들의 탓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의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 파업, 노동쟁의 등 민감한 사안들을 본격적으로 소설에서 다룬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영화화 과정에서는 시나리오가 사전검열에 의해 난도질되고, 소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공장이라는 공간이 염전으로 생뚱맞게 바뀌어버린다. 노동운동, 계급 문제의 핵심인 도시와 공장이 시골과 염전으로 바뀌어버리니 제대로 된 영화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근대 장편소설의 부족함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그래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사회, 노동, 계급 문제들을 우회적으로나마 그려낸 작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어딘가 오래된 캐비닛 속에 검열과 협박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대단한 한국 근대 장편소설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성작가편에 나온 작품들 중 <무진기행>, <삼포 가는 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생의 이면>, <칼의 노래>는 이전에 이미 읽었었다. 책 속에서 다뤄진 나머지 작품들은 이제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 볼 생각이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과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중 고민하고 있는데 아마 <낯선 시간 속으로>를 먼저 읽지 않을까 싶다. 한국문학에 대해 꼼꼼히 기록한 좋은 안내서를 읽고 나니 조금은 실험적인 소설인 <낯선 시간 속으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 책 속 한 문장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표현이 많이 인용돼서 '김훈'이라는 이름 뒤에 항상 붙어 다닌다. 진작부터 있어왔던 벼락인데 갑자기 발견됐다는 점도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 이현우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 / 이현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가들의 경험을 듣거나 읽는 것을 좋아한다. 작가란 직업이 가지는 신비성과 그들이 쓰는 글의 원천인 경험들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보통 독자가 작가의 경험을 접하는 방법은 그들이 쓴 에세이를 통해서다. 작가가 직접 자신이 겪은 것들을 글로 펴 내면 독자가 읽게 되는 것이다. 나도 보통 그런 식으로 여러 작가들의 경험을 접했다. 그러나 그 글들에는 작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은 새롭고 매력적인 관점을 볼 수 있는 책이다. 누구나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국내 작가들의 생애와 그들이 살던 시대상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여 그 경험들이 어떻게 그들의 작품에 반영되었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전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비평서로 볼 수 있겠지만 전문적인 비평서처럼 일반 독자들이 읽기 어렵거나 난해하지는 않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로 풀어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보통의 독자가 책을 통해서 한국 현대문학의 전개과정에 대한 조감도를 그려볼 수 있고, 개별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된다면 저자로선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만큼 어디까지나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으나 어떻게 입문해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한국문학의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알고 싶은 일반 독자들에게 입문서로 추천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읽는 동안 여러 번 들었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은 1960년대부터 각 시대를 대표하는 열 명의 여성 작가를 다루고 있다.(물론 남성작가 편도 따로 있다.) 1960년대에는 강신재, 박경리, 전혜린을, 1970년대에는 박완서를, 1980년대에는 오정희, 강석경을, 1990년대에는 공지영, 은희경을, 2000년대에는 신경숙을, 그리고 마지막 2010년대에는 황정은을 대표 작가로 다뤘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세계문학의 흐름과 한국문학의 흐름을 비교하며 분석하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전반적으로 세계의 문학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진행해왔다. 계급적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노동에서 돈으로, 숙명에서 자유의지로, 농업에서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역사의 방향과 궤를 같이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생기게 된다. 과학의 합리와 이성을 불신하는 종교인들, 계급이 사라진 사회에서도 여전히 계급주의에 묶여 사는 귀족들과 그에 반발하는 평민들, 숙명적으로 이어져 온 가문의 행로에 반발하며 고뇌하는 젊은이까지 온갖 종류의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근대 소설이 담아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갈등과 그 갈등을 겪는 이들의 다층적인 내면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작가와 작품을 분석하는데 좋았던 건 뻔한 칭찬 일색의 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때로는 신랄하기까지 한 비판을 가하며 아쉬웠던 점, 부족한 점을 분석한 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야 할 길까지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박경리의 소설에 대한 저자의 평은 전근대적 세계관적 생명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보면 근대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있다. 자본주의, 돈, 공업과 기계 등을 거부하고 땅과 노동, 생명에 머물러 있다. 근대 소설의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치정, 숙명, 샤머니즘 및 토속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을 써야 한다. 설령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 할지라도 상류 계급의 여성이 하층민을 사랑하게 되면서 전근대적 계급주의와 근대적 평등주의 사이에서 나타나게 되는 갈등을 다뤄야 하는 것이다. 전근대적 소설에도 있던 설정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계급주의가 사라져 가고 있는 근대 소설에서는 체념과 사랑 두 가지 선택지가 모두 가능하며 심지어 사랑도 주위의 비난만 견딘다면 당당하게 쟁취할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렇기에 두 선택지 사이에서의 갈등의 끈이 팽팽하다.(전근대 소설에서는 사랑을 쟁취하려면 계급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하는 수밖에 없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좋은 소설일지는 모르지만 근대 소설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못한다. 근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치정 싸움, 비상을 먹고 죽은 엄마의 자식이라는 액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숙명론적 세계관, 자본과 돈을 통한 성공을 배제하는 서사 등은 저자가 말하는 근대 소설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장가를 든 아버지에 대한 박경리의 분노, 제국주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그녀의 경험 등이 근대적 세계관과 연결되며 그에 대한 거부가 자연스럽게 박경리의 소설에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상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이다. 이렇듯 근대 소설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며 한국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흐름을 분석하는 글은 독자들에게 한국 소설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박경리에 대한 부분만 이야기했지만 박경리 외의 다른 작가들에 대한 글도 흥미롭다. 작가들이 살던 시대와 생애를 객관적으로 톺아보며 작가들의 소설과 논리적인 연결점을 찾아내 합리적 추론을 해내는 과정이 얼핏 보면 추리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을 읽고 있는 중이다. 아직 앞부분밖에 못 읽었지만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한국 문학, 특히 19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한국 문학의 흐름을 전문적이지만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는 좋은 한국문학 입문서다.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책 속 한 문장 자기의 꿈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는 거세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에 안착하는 것이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콧수염> / 엠마뉘엘 카레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렇게 여운이 긴 소설은 오랜만이다.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주인공을 이해하고 심지어는 공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 몇 페이지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턱에 힘을 주면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느 날 면도를 하던 주인공은 계속해서 길러 온 콧수염을 밀어버리면 아내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밌는 장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콧수염을 깨끗이 면도한 주인공. 그는 외출했다 돌아온 아내의 반응을 기대하며 콧수염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 순간부터 재밌는 장난은 끔찍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변하게 된다. 그의 아내, 친구들, 직장 동료까지 모든 지인이 주인공의 사라진 콧수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데다, 원래 주인공에게 콧수염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콧수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주인공은 점점 헷갈린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콧수염의 유무에서 시작한 혼란은 점점 그 범위를 확장해나간다. 주인공이 살아있다고 믿던 아버지가 2년 전 돌아가셨다는 아내의 충격적인 말. 아내와 갔던 해외여행은 자신을 제외한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으며 생생하게 기억나는 아내와 부모님과의 식사를 아내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미친 걸까? 아니면 세상이 잘못된 걸까? 인간은 기억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곧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남편이고 2년 전 결혼식을 올렸고 OO회사의 회사원이고 등등. 자신의 기억을 부정당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알고 있는 자신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콧수염이 있던 자신이지 몇십 년간 콧수염이 없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콧수염의 유무라는 사소한 기억이 부정당하는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기억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어떻게든 콧수염의 존재를 증명해내야만 한다. 그렇기에 소설 내내 기억을 부정당한 인간의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이어진다. 어떻게든 콧수염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내려는 주인공의 행동이나 콧수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거의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표출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를 대입해보게 된다. 나는 어떨까. 내게 너무나 명확한 기억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의해 부정당한다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믿고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나임을 부정당하는 그 과정을 버티고, 흔들리지 않고, 내가 나임을 끊임없이 믿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매우 탁월하게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신뢰를 쥐락펴락한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므로 당연히 주인공의 기억과 이야기를 믿고 따라가던 독자는 어느 순간부터 헷갈리게 된다. 단순한 콧수염의 유무에서 시작된 기억의 부정이 점점 확장되면서 독자는 아내의 말과 주인공의 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소설의 끝까지 작가는 독자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 주인공이 잘못된 것인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다른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성을 획득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 속에 인간 하나가 던져진다면 그 인간은 어떻게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할 것이며 그 존재성은 누가 긍정해줄 것인가? 콧수염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세상은 세상대로 자신이 옳다고 믿을 것이며 어느 쪽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지구에서 볼 때는 달이 움직이고 달에서 볼 때는 지구가 움직이는 것처럼. 존재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소설의 설정과 서사에 녹여낸 작가의 능력이 감탄스럽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당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언제든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할 수 있는 상황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것과 자신이 믿고 있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세상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으로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소설 내내 쌓아 온 주인공의 서사는 결말에서 전율이 흐르도록 강렬하게 산화한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갈 정도로 강렬하고 여운이 남는 결말이었다. 콧수염을 기를 생각은 당분간 하지 못할 것 같다. 소설 속 한 문장 긴장해 있던 정신은 이제 모든 게 끝나고 제자리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자, 비로소 평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