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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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진이, 지니> / 정유정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유정은 정유정이었다. <7년의 밤>, 그리고 <종의 기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눈으로 장면을 직접 보는 듯한 묘사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사건 전개, 내가 글을 읽는 건지 글이 눈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흡입력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를 특유의 핍진성으로 자유자재로 그려내는 정유정 작가의 필력은 전작들보다도 더욱 책 속의 사건과 세계관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번 리뷰에서 책의 스토리는 최대한 덮어두도록 하겠다. 언젠가 <진이, 지니>를 읽게 될 독자들이 살아 숨 쉬는 스토리를 직접, 온몸으로 경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싶은 마음을 안타깝지만 한쪽으로 치워두고 대략적인 인물과 배경 설명을 쓰자면 일단 주인공은 셋이다. 서른이 넘도록 백수 신세를 면치 못해 집에서 쫓겨난 민주, 영장류 센터 사육사로 일하는 진이, 그리고 머나먼 콩고의 밀림에서 잡혀 대한민국으로 밀수된 보노보(영장류의 일종이다.) 지니. 민주는 집에서 쫓겨난 뒤 온갖 잡일들을 전전하지만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고시원에 함께 살던 아저씨가 '갈 곳이 없을 때 갈 곳'이라고 칭한 망아산 자락의 영장류 센터로 향한다. 멍하니 침팬지를 구경하던 민주 앞에 진이가 나타나 침팬지들을 야외 쉼터에서 안으로 한 마리씩 들여놓는다. 이내 영장류 센터 관람시간도 끝나고 민주는 '갈 곳이 없을 때 갈 곳'에서마저 쫓겨나 '갈 곳이 없을 때 갈 곳 다음에 갈 곳'인 산속 정자에서 하룻밤 노숙을 하게 된다. 한편 민주가 노숙을 하던 그날 밤, 진이는 영장류 센터에서 자신이 애정하고 사랑하는 침팬지 '팬'의 출산 장면을 보다가 뜬금없이 장 교수와 함께 인동호 화재 현장으로 향하게 된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으로부터 인동호 화재 현장 속 별장에 밀수된 보노보가 있었으며 그 보노보가 탈출해 높은 미루나무 위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영장류 사육사인 진과 영장류 연구자인 장 교수가 인동호로 가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진이는 보노보 지니를 데리고 영장류 센터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영장류 센터 밴 앞자리에서 빗속에 있던 지니의 차가운 몸을 껴안고 있던 진이. 지니 때문에 안전벨트를 하지 못했던 진이는 비 오는 밤길, 갑자기 밴 앞에 뛰어든 고라니와 자신도 모르게 고라니를 피하려 핸들을 틀어버린 장 교수로 인해 큰 교통사고를 겪는다. 바로 여기에서 <진이, 지니>의 모든 사건과 판타지가 시작된다. 정유정 작가는 <진이, 지니>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하는, 늘 인생의 바로 다음 모퉁이만을 바라보고 전력질주를 하는 진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언젠가 죽음을 실천에 옮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민주. 밀렵꾼들에게 잡혀 한국까지 죽음의 항해를 거쳐 도착하고, 그 뒤로도 계속 인간에게 목숨과 생존을 위협받으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는 보노보 지니. 이 세 존재의 삶과 죽음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은 서로가 얽히고설키며 도대체 삶이란 뭐지? 죽음이란 무엇이지?라는 질문을 소설 속 인물들이, 그리고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또 누군가를 향해 던지도록 만든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져왔다. 우리가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야만 하는가. 바로 그 질문에서 많은 사상과 철학과 학문들이 태어났고 발전해왔다. <진이, 지니>는 그에 대해 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송두리째 뒤바꾸기에는 충분하다. 죽음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당신은 영원히 알 수 없고, 또 죽음이 목전에 닥쳤을 때 모든 생명체가 체감하는 것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으니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망 그 자체라고.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지니 앞에 엎드려 애원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너의 생을 내게 양보해달라고 떼를 써서라도 살고 싶었다. 그것은 내 안, 가장 깊은 바닥에서 울리는 본성의 목소리였다.' (p.346)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의 근원에는 삶에 대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너무나 뜨겁고 강렬하고 간절한 삶에 대한 의지가. <진이, 지니>는 그 의지를 사흘간의 치열한 이야기를 통해 또렷하게 들려준다. 나도 모르게 내 속의 삶에 대한 의지가 자극받을 만큼 실감 나게.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의 결말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진이가 발견한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 인간다운 삶과 인간다운 죽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진이의 행동, 모든 생명체의 근원에 자리 잡은 삶에 대한 열망을 버리면서 얻게 된 인간다움. 진이의 마지막 결심에서 인간은 홀로 서는 존재가 아님을 우리는 처절하게 깨닫는다. 삶에 대한 열망을 뛰어넘어 다른 존재에 대해 공감하고 희생하는 존재가 가장 인간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말이었다.(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여기까지만.)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뭐라고 써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느낀 것, 생각한 것, 체험한 것이 너무나 많은데 내 필력으로는 그것을 도저히 글로 완전하게 옮길 수 없었다. 300쪽이 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버릴 정도로 재미있고 흡입력 있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통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반드시 읽어보기를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아오이가든
'아오이가든' / 편혜영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 도대체 어떤 리뷰를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책이었고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했다. 기이하다고 해야 할까. 편혜영 작가의 다른 작품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오이가든'은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9편의 소설이 가진 공통점은 그로테스크하고 고어한 묘사다. 끔찍하고 잔인한 것들을 가감 없이 그려내는 묘사. 퀴퀴하고 구역질 나는 냄새가 코 밑을 스치는 듯하고 등 뒤에서 찐득거리는 검은 피가 천천히 뚝뚝 떨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생생한 문장들이 펼쳐진다. 노약자라면 읽기를 권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글로, 문장으로, 단어로, 마치 눈앞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고 오래되어 부패한 검은 피의 비릿한 오염된 냄새가 코 밑을 스치게 만든다. 구더기들이 내 귓구멍과 팔다리를 스멀스멀 기어 다니게 만들고 물에 젖어 퉁퉁 부은, 형체를 구분하기 힘든 시체의 초점 없는 눈이 나를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작품, 이런 글은 처음이었다. 그 기괴함에서 오는 묘한 매력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도록 나를 끌고 다녔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는 큰 서사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미지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서사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일만큼 묘사와 이미지가 이 책의 중심을 관통한다. 긴 시처럼 느껴질 정도로. 게다가 그 서사조차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며 독자를 유린한다. 망자가 살아나기도 하고, 현실로 믿었던 것들이 모두 환상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끔찍한 현실이었다는 게 밝혀지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끝없는 유린과 기만, 그 마술적인 환상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시체와 피와 구더기와 부패 속에 잠식되어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어느 순간 그 어둠 속에 있던 존재들이 내 옆으로 다가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로테스크한 환상과 고어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 소설의 의미는. 그건 바로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고찰이다. 인간의 생명은 얼마나 소중한가, 인간의 생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대해 이 '아오이가든'은 흔히 말하는 것들과 정반대의 답을 내놓는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없는 것이며 한낱 구더기와 다름없는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라고.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인간의 삶과 죽음은 같은 인간인 우리가 보기에는 한없이 끔찍하다. 썩은 물고기 눈알을 빨아먹고, 쥐의 똥을 입에 집어넣고, 검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한참 부패된 시체는 구더기가 들끓고, 토막 난 팔과 다리는 물에 퉁퉁 불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끔찍함은 인간인 우리에게만 와 닿는다. 인간의 시체는 육식동물에게는 맛있는 한 끼 식사일 뿐이고 부패한 살점은 구더기의 만찬이다. 물에 퉁퉁 불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팔과 다리는 물고기를 살찌운다. 어린아이들이 날개가 떨어진 잠자리의 파닥 거림을 보고 즐거워하듯이 이 소설은 인간을 그저 살아있는 생명체, 하나의 곤충과 다를 바 없이 묘사하고 그렇기에 이토록 상세하게 죽음과 썩어감과 시체의 냄새와 비린내를 풍기는 검붉은 피를 서술한다. 담담하게, 마치 인간을 내려다보며 즐거워하는 외계인처럼.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와도 다를 바 없다. 그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존재일 뿐이다. 아프리카의 초원에 죽어 있는 하이에나의 시체에도, 어느 방에서 고독사 한 노인의 시체에도 같은 파리가, 같은 구더기가 들끓는다. '아오이가든'은 인간은 특별하고 존엄하다는 생각을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구역질 날 정도로 생생한 묘사를 통해 철저하게 짓밟는다. 인간의 죽음은 시궁창에서 굶주린 쥐가 죽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 소설집을 통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생명의 무게는 모두 똑같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인간의 특별함을 믿는다. '아오이가든'은 그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아. 인간도, 시궁쥐도, 바퀴벌레도, 구더기도, 죽으면 퀴퀴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무기물일 뿐이야. 소설 속 한 문장 벽에 박혀 불타고 있는 C는 눈동자가 빠진 하얀 눈으로 내가 흘린 내장들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드 하트
'데드 하트' / 더글라스 케네디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빅픽쳐는 물론이고 템테이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파리5구의 여인, 비트레이얼까지 늘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에 읽은 데드 하트도 흥미진진했다.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의 특징은 술술 읽히는 가독성과 빠른 스토리 진행, 그로 인해 지루할 틈 없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인데(필자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특징이다.) 데드 하트도 고스란히 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개성의 주인공들과 스토리 전개가 단점일 수도 있지만 그걸 뛰어넘어서 늘 재미있는 소설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뿐이다. 데드 하트의 주인공인 닉은 지방 신문사를 전전하며 먹고사는 기자다. 특이한 점은 10년이 넘는 기자 경력에도 대형 신문사에는 절대 지원하지 않고 소규모 지역 신문사들, 그것도 한 신문사당 2~3년 간격으로 옮겨가며 취직을 한다는 것이다. 보스턴의 신문사로 직장을 옮기려던 닉은 우연히 호주의 지도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 야생의 땅, 호주로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호주의 최북단 다윈에서부터 밴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닉은 앤지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살던 마을로 납치당한다. 앤지가 약을 투여해 의식이 없는 상태로 강제 결혼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의한 감금생활을 하게 되는 닉. 앤지가 사는 울라누프라는 마을은 호주 지도에도 없는, 네 가족이 마을 구성원의 전부인 마을이고 그곳에서 앤지의 아빠인 대디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황무지 한가운데, 마을을 가장한 감옥에 갇힌 닉은 그 구성원 안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크리스탈과 함께 마을을 탈출하기로 한다. 처음 황무지를 횡단하는 닉의 모습은 힘들고 피곤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화롭다. 그런 스토리는 앤지를 만나 납치당해 울라누프라는 마을에 당도하게 되면서 스릴러로 바뀐다. 그때부터 급격하게 진행되는 닉의 탈출을 위한 처절한 노력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항상 느끼지만 이 작가는 빠른 서사 진행으로 긴장감과 속도감 있는 글을 참 잘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책이 그리 얇지도 않은데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고, 되는대로, 자신이 편한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던 닉은 울라누프에서 탈출을 시도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낭비해왔던 삶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하루하루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이 감시당하며 사는 울라누프에서의 시간이 닉에게 탈출과 삶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우도록 만든 것이다. 인간이란 참 미련하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간절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든 자유와 의지를 박탈당한 그때에야 온몸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한편으로는 카뮈의 이방인이 생각나기도 했다. 뫼르소가 죽기 직전에서야 삶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한껏 터트린 가까스로 울라누프를 탈출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는 닉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드 하트를 한 줄로 말하자면 '이야기 속에 빠져 정신없이 읽고 나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마침내 나는 나의 고독, 나의 뿌리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숨결이 바람 될 때
'숨결이 바람 될 때' / 폴 칼라니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 사람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이 자연의 바람으로 돌아갈 때는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이다. 이 책은 폴 칼라니티라는 한 신경외과 의사가 서른여섯의 나이에 폐암 선고를 받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여정을 스스로의 손으로 기록한 에세이이다. 이 에세이의 저자인 폴 칼라니티는 인간의 삶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싶어 한다. 그런 그는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을 공부하고 이 모든 학문의 교차점에 있는 의학을 자신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촉망받는 신경외과 의사로서 기나긴 레지던트 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꿈을 펼칠 미래만 앞두고 있는 그에게 폐암이 찾아온다. 끝없이 생명과 삶에 대해 탐구하던 그는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하고 2015년 3월 세상을 떠난다. 이 에세이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저자의 어릴 적부터 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2부에서는 폐암 선고를 받은 이후 저자의 삶의 행보를 그리고 있다. 1, 2부 모두에서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1부에서는 인간이 가지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폴 칼라니티는 이야기한다. '의대생의 통과 의례인 시체 해부는 지극히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는 작업이기도 해서, 혐오감, 흥분, 욕지기, 좌절감, 경외감 등 무수한 감정을 자아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단조로운 수업 과정의 하나가 된다.' 자신의 몸을 의학의 발전을 위해 바친, 어찌 보면 신성한 일을 했다고도 볼 수 있는 신체 기증자들을 해부하는 해부 수업은 결국 평범한 대학 강의처럼 되어 버리고 만다. 많은 독자들은 읽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해부 수업은 항상 기증자에게 감사함과 존중을 바치며 경건하고 신성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 두 가지(기증자에 대한 감사함과 존중, 경건하고 신성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수업)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것일까? 매주 쇠톱으로 골반 뼈를 자르고, 척추에 끌을 대고 망치질을 하고, 두개골을 드릴로 뚫는 것은 결국 의사가 되기 위해 인간의 몸의 구조를 파악하고 신체의 구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사실 그렇게 죽은 인간의 몸을 해체하면서 신성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증자의 유지를 가장 잘 받드는 것은 해부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한 번이라도 더 뼈를 자르고 장기를 들춰보면서 인간의 신체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다른 대학 강의와 다름없이 진행되는 해부 수업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해부 수업도 수업인 것이다. 학생은 배우고 선생은 가르치는. 그렇듯 다른 대학 강의와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된다고 해도 그것이 기증자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실제로 이 에세이를 읽어보면 기증자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부분(비장 동맥을 쉽게 찾기 위해 기증자의 횡격막을 길고 빠르게 갈랐다던가)에 대해서는 교수의 질책이 떨어진다. 폴 칼라니티도 마음속으로 시체들에게 사과한다. 시체 해부가 해피아워에 술 마시러 가는 일을 방해한다고 느낀 사실과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필자가 한 가지 더 생각한 것은 의사, 특히 죽음에 이르는 일이 많은 병들이나 외상을 다루는 의사들이 과연 자신의 삶과 환자의 죽음을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사들이 일을 끝내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쉴 수 있는 순간은 자신이 수술한 환자가, 혹은 자신이 맡은 환자가 잘 치료되어 퇴원하거나 혹은 죽게 되었을 때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여가를 즐기겠지만 후자의 경우 과연 의사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물론 의사 스스로를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겠지만 만약 필자가 의사라면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에서는 사람이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폴 칼라니티는 자신의 꿈을 바로 앞에 두고 폐암에 걸려 죽을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삶의 의미를 완성할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삶은 의미가 없어진 것일까? 폴 칼라니티는 자신의 남은 삶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다시 신경외과 의사의 생활로 아픈 몸을 이끌고 복귀해보기도 하고 미뤄뒀던 임신을 아내와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한다. 그는 남은 삶의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이루고 죽음을 맞이한다. 실제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글 속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고, 가족들에게 그 의미를 전하고 또 많은 이들에게 글로 남긴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과연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사실 객관적인 삶의 의미 같은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냥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에 객관적인 의미나 소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각 개인이 그 의미를 스스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살아가는 시간 동안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삶. 또 자신이 원하던 것을 성취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끼는 삶. 어떤 경우든 스스로 나는 정말 잘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만들어가며 거기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가치가 있는지, 또 인간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다면 '숨결이 바람 될 때'를 권하고 싶다. 책 속 한 문장 한 번은 교수가 췌장암으로 망가진 기증자의 조직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물었다. "이분의 나이는?" "일흔넷입니다." 우리가 대답했다. "나랑 동갑이군." 교수는 이렇게 말한 뒤 외과용 탐침을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죽음이란 (짧은 글)
조용한 방, 거울앞에서서 거울속에 나를 어루만졌다. "왜 울어.." 눈물을 흘리는 나의 눈에 속을 가져갔지만 눈물을 닦아줄수 없다.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눈길이 잠시 바닥에 머물렀다. "아파.." 다시 시선이 거울로 향했다. 눈물이 가득 차있는 눈, 얼굴한쪽에 있는 피멍. 모든게 지겹다. "그냥.. 죽이지" 왜 이지경까지 몰고와서 괴롭히는걸까. 그냥 죽이지. 내가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걸까. 아니면 그저 내가 고통속에서 버둥거리는 것을 즐기는 걸까. 흉터가 가득한 손목을 쓰다듬았다가 꽉 잡았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꼭 닫혀있는 창문에 저절로 손이갔다. "..." 침이 꿀꺽 넘어갔다. 내가 할수 있을까. 겁쟁이인 내가. 이런 상황 하나 돌려놓지 못하는 내가.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아..." 작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지금 떨어진다면 해방감을 느낄수 있을까.. 잠깐이라도 날수 있지 않을까..? 창문틀을 딛고 발을 하나 올렸다. 지금 죽어서 손해볼건 없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머지 발하나도 창틀에 올렸다. 창문을 두손으로 꼭 잡았다. 깜깜한 밤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밖에는 기회가 없어.." 눈을 꼭 감고 발을 한발짝 내밀었다. 덜컹- 결국 다시 잡고 말했다. 창문을 잡고있던 내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창틀에서 내려와 침대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 잡고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서워’ 이불속에서 나와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직 열려있는 창문은 날 욕하는거 같았다. ‘그것도 못해? 그럴거면 시도조차 하지마’ ...하, 한숨이 새어나왔다. 항상 이랬다. 수면재를 사와도 먹던 도중에 뱉거나 손이떨려와 먹지못했다. 항상 도망쳐왔다. 어디론가 숨기 바빴고 죽음앞에서 도망쳤다. 이런 내가 한심했다. 이런것 하나 못하고. "...아니" 그냥 죽음이란게 도망친다는게 아닐까. 도망치고 싶지 않다면 죽음이 아니라 싸움을 선택해야하는게 아닐까. 내일이 된다면 나는 맞서 싸울수 있을까, 너희가 잘못된거라고 말할수 있을까. 난 눈을 감았다. 내일은 좀더 좋은 하루가 될수있기를. 내일은 좀더 당당해질수 있기를.
소름돋는 꿈
말을 잘 못해서 친구한테 말하듯이 반말로 쓸게요! 이건 내가 매년 꾸는 꿈이야 어릴때부터 덩치만 크지 체력은 약하고 몸도 좀 약했는데 매년 잠을 잘 못자거나 몸상태가 안좋을때마다 꾸는 꿈이 있어 ㅜ 내가 초등학교때부터 꾼 꿈인데, 이 꿈이 학교에서 일어나 그래서 초등학교땐 내 초등학교가 배경이엿고 중학교땐 중학교가 배경이였어 ( 지금 고1인데 아직 이번년도에는 그꿈 한번도 안꿈) 내가 아침에 학교를 등교해 그날마다 교장쌤이 나와서 애들 한명한명 인사해 그래서 매년 똑같이 속으로 욕함 ㅋㅋㅋ 아침부터 사랑합니다 강요해서 ^^ 그리고 내가 교실로올라가 근데 1교시가 무슨 교장쌤할말 있다고해서 전교생이 강당으로 모여 근데 갑자기 검은색 물체? 뭔가 흐물흐물하는게 나옴 귀신같은 형태가아니라서 애들 다 그냥 가만히 있어. 근데 그 검은물체가 애들을 지나칠때마다 애들을 먹는거처럼 애들이 하나하나 분리되 하ㅜ( 피가 어마어마하게 팡 하고 터지는 거처럼 많이 분출됨) 누구한명 그렇게되면 전교생이 소리지르고 도망가. 나는 도망가다가 친구랑 계단쪽에 숨음 항상 거기에 숨어 꿈속에서 내가 아 이꿈 또 꾸네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행동은 똑같이 하더라 바보같이 다른 곳 보는새에 그 검은물체가 계단을 타고 올라와서 바로 내눈앞에 있어 그럼 그 검은물체가 내 친구를 먹어서? 내친구가 하나하나 분리되면서 죽어 내가 그걸 매번 울면서 쳐다봐 죽을 걸 아니까 근데 검은물체가 나보고 "10초줄게 도망가" 라고 말해 그래서 울면서 도망쳐 복도에는 다 피투성이야 언제부턴지 비명소리도 이제 안들려 이때 심장떨리는게 지금도 생각하면 떨림;; 내가 4층에있는 탈의실 옷장에 숨어 그럼 멀리서부터 비명소리가 하나하나씩 들리더니 옷장 문이 끼익 하고 열려 그리고 그 검은물체가 "찾았다" 하고 내 시야에서 피가 터지는게 보이면서 잠이 깨 근데 절대로 이 전에 잠이안깨 내가 죽는 과정까지 다 일어나야지만 잠이깨 그래서 그날따라 알람도 안울려 내가 이꿈을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꿨으니까 하 지금은 괜찮은데 초5땐 정말 컬쳐쇼크였어 친구가 내앞에서 터져서 죽고 나도 그렇게 해서 죽으니까 그땐 한동안 2년? 동안은 그 꿈꾸면 깨서 엄청 오열했던 거 같애 이 꿈이 뭘 뜻하는 건지 진짜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