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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멜로와 서사의 증폭
中 문화혁명기, 경극 톱스타의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 최근 7080 세대의 복고 감성을 자극하는 tvN 주말드라마 <화양연화>에 국내에서 <아비정전> 개봉 당시를 재현하고 '장국영 특별전'에서 만나 애틋한 감정을 주고받는 남녀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장국영 서거 17주기의 해에 헌사를 전했다. 특히, 영화 <아비정전><금지옥엽>과 함께 "1분 1초라도 함께 하지 않으면 그건 평생이 아니야!"라는 '1분'에 관한 오마주는 영화 <패왕별희>에서 데이(장국영 분)가 살루(장풍의 분)에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 명대사로 손꼽힌다. <패왕별희>의 장국영은 2000년대 개봉해 히트 친 영화 <왕의 남자>에서 남사당패 광대 공갈 역의 이준기와 오버랩이 되면서 신인티를 벗고 절제된 내면 연기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명배우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던 계기가 되었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문화혁명기 시위 씬, 동성애(실은 유아 성폭행 시퀀스) 그리고 경극 학교에서의 혹독한 아동 학대 씬 등 중국의 문화 검열에 따라 삭제됐던 15분이 추가됐다. 국내에 DVD로 출시된 감독판(패왕별희 Special Edition)과 같이 상영시간이 세 시간에 가까운 171분에 이르며 중국 근대화 시기에 인기를 얻었던 '경극'이라는 예술을 소재로 서사성이 강조된 중국의 장편 시대극이다. 1993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첸 카이거 감독의 깊이 있는 연출력이 돋보였던 영화 <패왕별희>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를 이어 붉은색 등 원색의 화려한 색감을 통해 격동의 시대를 조명했다. 영화 속 경극의 제목이기도 한 '패왕별희'는 진나라 패망 후 한나라 유방과 중원을 패권 다툼을 벌이던 초패왕 항우가 해하강 결전에서 패하게 되고 애첩 우희가 먼저 자결하자, 이를 따라 항우도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인데, 극 중 데이의 운명을 암시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여장을 한 장국영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가수로도 활동하였던 만능 엔터테이너답게 노래와 몸동작을 소재로 하는 경극에서 그는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아름다운 미인에게 어울리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불릴 만했다. 삭제됐던 15분의 씬들을 통해 관객들의 유추와 해석들이 확장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영화 <패왕별희>를 <금지옥엽><해피 투게더>와 더불어 장국영의 3대 퀴어 멜로물이라고 보았다면, <패왕별희:디 오리지널>은 주인공 데이가 육손 가운데 한 손가락을 거세하고 중국의 혼란기에 경극배우 우희 역을 맡아 남자인데도 여자처럼 살아야 했던 가혹한 운명을 강조한 서사극에 설득력을 갖는다.  매춘부인 엄마로부터 버려진 슬픈 운명을 타고난 두지(어린 시절 데이)가 경극학교에서 만난 단짝 시투(어린 시절 살루)와 혹독한 체벌과 학대를 견뎌내면서 최고의 경극 배우가 되지만, 극단의 후원자인 재력가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면서 성 정체성과 예인으로서의 균형감을 잃고 만다.  더욱이 초패왕 역을 맡은 살루가 술과 매춘부인 쥬산(공리 분)과 사랑에 빠지면서, 데이는 살루에 대한 상실감과 고통을 아편과 자기 학대로 견디면서 내면의 불안감을 드러내고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까지 잇따라 둘 사이의 신념은 부서져 내린다.  특히, '디 오리지널'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아버지를 부정하는 아들 햄릿의 서사를 떠올린다. 길에 버려져 데려와 경극배우로 키운 샤오 쓰가 문화혁명 시기에 구설수에 올랐던 당대 톱스타 데이를 밀어내고 마치 2~3인의 배우가 번갈아 한 배역을 연기하는 오늘날의 뮤지컬처럼 경극 무대에서 우희 자리를 차지한 것. 대부인 데이를 배신하고 극단에서 뛰쳐나와 공산주의에 물든 채 좌익 운동 단체인 홍위병을 자처하며 데이를 살루와 함께 거리로 내몰아 비판하는 장면 역시도 아버지를 부정하는 아들, 즉 홍콩의 중국 반환 시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듯 보였다.  민중들에 둘러 쌓인 홍위병 앞에서 살루가 돈을 받는 매춘부라고 쥬산을 고발한 데 이어 데이가 아편 중독자였고 그의 친일 행각과 동성애를 폭로하는 모습에서 감독은 이데올로기의 광풍에 휩쓸려 사회적으로 거세를 당하는 당대 민초들을 조명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자신을 부정한 살루에 대한 상실감과 고통에 쥬산이 목을 매단 극단 앞에서 넋을 놓고 주저앉은 데이의 모습은 전통을 고수해 온 예술인의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시대의 아픔을 아로새기는 듯했다.  이때에 영화 속 장국영의 모습은 슬픔과 회한의 시기를 지나 허무와 고독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더욱 캐릭터 몰입을 위한 주문을 걸었는가 보다. 개봉 당시 동성애적인 코드와 경극 학교의 배우 수련 방식으로서 아동 학대 씬은 중국인들에게 거부감이 들었던지 15분을 드러낸 것이 마치 <아비정전>을 액션 영화로 생각하고 영화관을 찾았던 당대 관객의 반응처럼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퀴어멜로로 축소시켰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5년여 만에 다시 만난 <패왕별희:디 오리지널>의 장국영은 질투와 연민 그리고 애증 등 경극 톱스타의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을 온몸으로 연기하면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 보영이란 캐릭터와 연결 고리를 지으며 이성 간의 그것보다 더 애틋하고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경극 '패왕별희'의 스토리 속 항우(초패왕)의 애첩 우희가 패왕 앞에서 검무를 추다가 마지막 술잔을 건네고 자결을 택한 것처럼 사망 17주기가 지난 그의 생애와 참 많이도 닮아 있는 듯 보였다. /시크푸치 https://in.naver.com/chicpucci
191122 주성치 영화, 산사초 후기
[이미지 출처 : 주성치 dvd 화면캡쳐] 영화를 사랑하는 Otaru입니다. 오늘은 주성치의 영화, 산사초 후기를 적어 볼게요. 주성치 산사초 줄거리 [출처 네이버 영화] 청나라 시대의 유명한 변호사 미스터 창은 매우 뛰어난 실력을 지닌 법정인. 하지만 그는 돈을 좋아하고 장난기가 너무 심해서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조수로 있던 푼은 창이 자신의 짝사랑 슈이 아가씨를 가로채려는 듯 장난을 쳐오자 그에게 실망하여 중국을 떠나 홍콩으로 가버리게 된다. 영국에 의해 점령당한지 얼마 안된 홍콩의 현실은 푼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고, 그곳에서 푼은 음모에 휘말려 살인 누명까지 쓰는 처지에 놓이게 되지만 돈도 없는 그는 도움을 청할 곳이 한군데도 없이 어쩔 수 없이 음모에 말려들게 된다. 이 소식은 창에게 전해지게 되고, 창은 아내의 설득으로 결국 푼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영국의 법이 적용되고 있는 홍콩으로 가게 된다. 영국법정과 맞선 창은 자신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비상한 머리로 대응해보지만 철저한 음모로 계획된 이 사건은 창의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는다. 사건을 조사하던 창은 음모의 배후를 알아내게 되지만 결국 푼은 유죄선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푼이 죽기 직전에 창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그를 살려내고 그 사건의진짜 범인도 잡게 되는데. 예전 중국영화 줄거리는 결말까지 알려줍니다,, 그러려니 해 주시고,, 몇 가지 간단한 리뷰만 해볼까 합니다. 1. 주성치식 사극 영화 치고는 조금 아쉬운 영화인 건 맞는데,,, 나름 재미는 있습니다. 2. 갈민휘 가 연기한 푼 이란 캐릭터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죠. 주성치가 연기한 창 이란 변호사 캐릭터에 계속 당하다가, 홍콩으로 떠나고 나서 전당포에 맡긴 옥 목걸이 때문에 영화속 악당의 표적이 되어요. (이복동생인 푼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져갈까봐 걱정된 검사 캐릭터가 푼을 함정에 빠뜨리게 되죠. 3. 검사 캐릭터 이름을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 주성치 캐릭터에서 나쁜 역할로 많이 등장하던 그 배우..ㅎㅎ 당시의 숙명이었을까요. 4. 나름 법정 스릴러(?) 영화이면서 영국의 식민지 하에 있던 홍콩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긴 합니다. 재판을 담당하는 건 영국인 판사입니다. 중국에서 하던대로 해 보려다가 고전하는 주성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5. 푼이 살인 누명을 쓰면서 홍콩의 다국적 감옥에 갇히게 되죠. 백인과 인도인들이 득세한 그 교도소에서 고생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많이들 비호감으로 표현하시던, 엉덩이 안에 도미노를 숨기고, 닭다리를 숨기는 장면도 등장하고.. 주성치 영화 중에 조금은 격이 낮은, 지저분한 코미디 장면이 좀 있네요. (이 부분은 여기까지만 적어 보죠) 6. 초반에 창과 다투던 캐릭터가 푼을 도와준다는 설정입니다. 거지 패거리가 홍콩에 와서 일부러 폭력 사건을 내서 푼이 있는 교도소로 들어와 원래 있던 세력자들을 몰아내고 푼의 신세를 풀어 주죠. 7. 막문위는 창의 아내로 등장하고, 당시 상황을 녹이고 싶었는지 영국 유학을 가서 법학 공부 대신 패션 공부를 하고 온다는 설정. 그리고 구숙정이 연기한 귀여운 수연 아씨는 조연급 캐릭터이긴 하지만 배우 구숙정만의 귀염귀염한 연기가 잘 드러난 것 같아 좋았습니다. 주성치가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도 아니고, 주연으로 연기한 사극 영화기 때문에 여타 주성치 영화들 중에 그리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주성치의 기본 성향대로 흘러가는 영화라서 한번 보셔도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영화 산사초에는 오맹달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 후기 마칠게요. 감사합니다. 출처: https://otarumoo.tistory.com/209 [Otaru의 티스토리 - 여행, 골프, 영화]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4) 대만영화
1895년. 그러니까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발명을 한 해에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만(타이완)을 획득하게 된다. 정확히는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는 일본에 양도 되었고 타이완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51년간 근대화와 식민지화를 병행하여 진행했는데 이때 영화의 보급도 함께 병행하였다. 워낙 대만의 역사가 기구하고 고산족 등 원주민들이 다양했기 때문에 일본어 보급과 대만인들에 대한 선무공작 차원에서 인류의 신발명품인 ‘영화’는 가장 효과적인 문화적 장치였던 셈이다. 하여 대만이 일본영화사와 함께 진행되게 되는데 1901년 타이베이에서 일본인 다카마쓰 도요지로(高松豊次郞)가 최초로 영화를 상영하는 한편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대만 전체를 순회하게 된다. 1896년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로부터 9년 후인 1905년 베이징에서 경극 공연을 담은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定軍山)이 만들어졌음을 감안 할 때 대만에서 영화를 알게 된 것은 매우 이른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촬영된 것은 1921년 일본인 하기야(萩屋)가 방문하여 ‘곽란(癨亂, 토사광란)예방법’이라는 식품 위생 교육 계몽 영화를 만든 것이 대만 최초의 촬영기록으로 남아 있다. 다만 1907년 타이베이에 최초의 상설영화관이 들어섰지만 일본 영화가 상영되었고 대만의 대중오락과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영화제작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대만의 공식 역사 기록으로는 ‘1922년 대만 총독부 내무부에서 사회 사업을 위해 일본 영화를 구입하고 대만을 여행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1925년 5월 23일 일련의 영화청년들에 의해 ‘대만영화연구협회’(台灣映畫研究會)가 조직 되었다. 이들 멤버는 이송봉(李松峰), 정초인(鄭超人), 이연조(李延祖), 강정원(姜鼎元) 등이고 대만에 거주 하는 일본인들도 포함되었다. 이들 중 대만 최초의 사진작가로 평가 받는 이송봉이 제작자겸 스틸기사로 나서고 유희양(劉喜陽)이 감독을 정초인 등이 배우로 나서서 ‘누구의 허물’(誰之過, Who’s over)가 만들어져 대만 영화의 효시로 꼽히게 된다. 다만 대만의 공식 역사기록을 보면 그해 9월 대만영화연구협회가 개봉한 이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대만인 자체의 영화제작이 많이 위축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영화는 어쩔 수 없이(이들이 본 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부였을 가능성이 높기에) 일본의 신파와 활극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 없어서 서로 연인사이인 기생과 은행원이 건달 때문에 위험에 빠지지만 결국 은행원이 기생을 구출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다만 아시아 각국의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면 사라지게 되는 운명이었듯이 ‘누구의 허물’ 역시 필름은 사라지고 기록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만영화연구협회는 대만에 영화의 새싹을 틔우고 이국적 정서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오는 일본영화인들과 교류를 한 측면이 있다. 1921년 총독부에도 일본 문화를 홍보하는 필름의 사용을 위해 영화 연구소와 부서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1924년에는 일본영화 ‘부처의 제자들(佛陀の瞳, 大佛的瞳孔)’이 촬영됐는데 몇몇 일본배우를 제외 하고는 대만에서 현지 배우를 위한 오디션도 진행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대만영화연구협회의 설립에 관여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만을 소재로 한 일본영화는 있었다. 1919년 에다마사 요시오(枝正義郞)가 덴카쓰에서 제작한 ‘슬픈 노래’가 바로 그것으로, 도쿄에 사는 어린 소녀가 유괴 되어 서커스단에 팔려가 세월이 흐른 후에 대만의 원주민 고사족(高砂族) 추장의 딸로 성장한다는 내용의 멜로 드라마다. 에다마사 요시오가 실제로 로케이션을 했는지에 관한 논쟁은 있지만 당시 가장 근대적 수법과 영화적 기술을 배합한 영화라는 점과 순영화극운동의 일환이었다는 점, 그리고 대만이라는 주변 국가에도 눈길을 돌렸다는 사실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기록에 의하면 1924년의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한 이후 1938년 ‘망춘풍(望春風, 봄바람)’을 내놓기 이전까지는 대만영화는 주로 일본과의 합작에 의존하였고 이 역시 ‘국경 없는 협력’이라는 기본사상이 깔려 있었고 1920년대에는 일본을 통해 일본영화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가 수입 되고 본토의 샤먼(廈門)이나 타이난(臺南)을 통해 비록 검열을 엄격하게는 했지만 상하이 영화가 수입되기도 하여 대만에서도 영화제작에 관한 싹은 틔웠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27년에는 닛카쓰의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가 ‘아리산의 귀여운 아이’를 촬영하면서 실제로 대만 현지 올로케이션을 했다. 이 영화는 고산족 청년에 대해서 매우 긍지 높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에 힘입어 대만 영화인들도 대만영화사 ‘백달영편(百達影片)’의 장운학(張雲鶴)감독이 ‘혈흔(血痕)’에서 산악지대인 ‘반카이(潘界)’의 교역소를 무대로 남장한 소녀가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멋지게 갚는 이야기를 통해 대만인들에게 이국적 정서의 영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교류는 계몽사상과 이국적 정서의 융합이라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아주 적합한 영화들이었다. 이러한 융합은 1932년 대만의 안도 다로(安藤太郞)가 제작한 ‘의인오봉(義人吳鳳)’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사족이 목을 베는 관습을 폐지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물이 되기를 자청하는 양심적인 대만인의 이야기를 그려 미개에 대한 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내지만 주인공이 유교의 이상적 인격을 구현해 냄으로써 일본의 정서와는 선을 긋기도 한다. 하지만 시미즈 히로시(淸水宏)의 ‘사욘의 종(鐘)’에서는 대만은 이미 야만인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이향란(만에이의 아이돌)이 연기한 고사족 소녀는 철저히 ‘황국신민화’되어서 마을에서 출정 병사를 위해 헌신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자기를 희생하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대만은 홋카이도(北海道)에 이은 일본의 두 번째 식민지이지만 식민정책의 성공적 안착에도 불구하고 1941년 총독부가 대만영화협회를 다시 설립하여 관리·통제 하면서 활발한 제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대만 영화들이 흥행 참패한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출신들(대륙, 토착 한족, 일본, 고산족 등 대만 원주민, 혼혈)이 모인 까닭에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기 보다는 일본 영화인들에게 고용되거나 합작 등을 통해 명맥만 유지해 나갔다. 다만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국민당이 본토에서 패하여 대만에 중화민국 정부를 이전할 당시 즉시 일본영화의 상영을 금지하려고 했으나 즉각 대중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국민당 정권이 영화업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대만의 전후 경제가 빈곤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오기 힘든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언어적 통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대만의 경우 일본의 변사에서 유래하여 대만의 젊은 세대들이 일본영화를 상영할 경우 대만어 설명자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즐기고는 했는데 이 때문에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북경어로 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대만어를 사용하고 객가어(客家語, 중국 남부 광둥(廣東), 광시(廣西), 푸젠(福建), 장시(江西) 등의 지역에서 사용하는 방언)를 사용하는 일반 대만인들에게는 좀처럼 친숙해지지 못했다. 1946년 중미우호조약 체결 이후 미국영화가 대부분 유통되었기 때문에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야 대만어로 된 민간영화가 나와 인기를 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영화의 경우 1970년대 (중공수교에 의해) 국교단교가 일어나기 전까지 대중적 지지로 합작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오념진(吳念眞)감독의 자전적 영화 ‘아버지(多桑)의 한 장면에서는 소년 시절의 감독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탄광 마을의 영화관에서 쇼치쿠의 영화 ’당신의 이름은‘(君の名は, 1953)을 통역자의 해설과 더불어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다 케이지, 키시 케이코, 아와시마 치카게가 주연한 이 영화는 젊은 커플이 2차 세계대전의 공습 하에 도쿄의 수키야바시대교에서 만나게 되는데 둘은 반년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통속적 신파극이었다. 이처럼 일본영화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만에이 출신과 상하이 출신들이 유입되면서 대만영화는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일본의 문화와 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찾아 볼 수 없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6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