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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2 : 에이지 오브 울트론> 속 이야기 읽기

<어벤져스>는 마블이 굉장히공들인 장기 프로젝트이다 <엑스맨>, <판타스틱4>, <스파이더맨> 등 각기 다른 회사에 판권을 팔아 영화를 제작해오던 마블이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직접적인 영화 제작을 시작한다. 2008년에 <아이언맨1>과 <인크레더블 헐크>의 엔딩에 <어벤져스>프로젝트를 암시하며 기대감을 높였고, 2012년 <어벤져스1>이 개봉하며 사람들의 기대에 응답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15년 <어벤져스 2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개봉했다. <어벤져스 2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앞선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화려한 스케일이나 퍼포먼스는 여전하지만 미숙하게나마 메세지를 담고있다. 달리 말하면, 전편과 같은 어벤져스를 기대하고 보러갔다간 만족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이번 <어벤져스 2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 이유는 영화 속 '히어로들의 트라우마'의 설정의 공이 크지 않을까. 전 편이 개성 강한 히어로들의 불협화음과 팀워크에 집중했다면, 이 번 편은 히어로들 인의 어두운 면에 집중한다. 즉 히어로들의 트라우마를 조명한다. 위기의 극복도 전편이 히어로들의 협력으로 이끌어 냈다면, 이 번 편은 개인의 트라우마와 싸움에서의 극복으로 이루어낸다. 그동안 미국식 할리우드 영웅 영화의 전개는 너무 전형적이었다. 엄청 쎈 '나쁜 놈'이 등장하고 마지막에 힘겹게 '우리 편'이 승리하는, 그런 뻔한 전개 말이다. 그간의 미국식 영웅 영화와 달리 <어벤져스 2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정의'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미국식 할리우드 마인드에서 벗어나 '미국식 정의'를 되돌아본다. 문제는, 너무 약했다. 성찰할만하면 이내 미국식 할리우드 마인드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단순한 미국식 할리우드 영웅 영화에서는 한 발자국 발전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얕은 게 문제다. 화려함이나 신선함으로 봤을 때 전편만 못할 가능성이 크다. '각종 슈퍼 히어로들의 집합체'라는 신선함은 이미 전 편에서 누렸으니까. 게다가 다소 어설픈 메세지를 넣으려고 하니 전개가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전형적인 미국식 할리우드 영화에서 진일보했다는 점에서 조금은 후한 점수를 주고싶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발전이 나쁘지 않았다.

<공모자들> 속 이야기 읽기

SNS가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더 다양한 소식을 여과없이 듣게 되었다. 특히 범죄와 관련된 소식은 SNS를 통해 빠르게 전달되고 그 중 인신매매나 장기매매와 같은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더 없이 잔혹하고 자극적인 이런 소재를 다룬 영화가 있다. 바로 <공모자들>이다. 간혹 영화에서 부가적인 요소로 사용되던 장기매매란 요소를 <공모자들>은 메인 아이템으로 삼았다. 그러나 사이드 메뉴로써 제 몫을 해내던 요리 재료는 메인 디쉬의 재료로써 실패했다. 적어도 <공모자들>이란 영화에서는. 일단 설정이 턱 없이 부실하다. 임창정이 왜 그 여자를 좋아하게되었는지, 그 '양아치' 동생이랑 일을 왜 거절하려 했으며 왜 다시 찾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약하다. 같이 일하던 형이 죽어서? 새로운 삶을 원해서? 임창정은 한 없이 진지한데 관객은 그럴 수 없다. 그가 느끼는 것의 반도 공감하기 힘들다. 설정이 부실하니 전개가 흔들린 탓이다. 전개가 뿌리깊지 못하니 <공모자들>의 히든 카드인 '반전'이란 요소마저 그 힘이 반감된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문제다. 비록 찌질하고 3류건달 연기지만, 임창정은 <행복한 장의사>나 <시실리2KM>, 혹은 여러 뮤직비디오에서 그만의 독특한 연기를 구축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는 그간의 캐릭터와 다르게 무겁고 카리스마 있는 배역을 맡았는데, 너무 어색했다. 사투리 때문인지, 임창정이 그동안 해온 연기 때문인지, 좀처럼 몰입하기 어렵다. 게다가 최다니엘은 완전히 겉돈다. 배역을 내면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 배역의 옷을 입은 것도 아니다. 정말 배역 이름을 써논 명찰을 달고 있는 수준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분명 장기매매라는 요소는 꽤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자극을 찾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더 빛을 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모자들>은 자극적인 '재료'를 과하게 믿었다. 김홍섭 감독은 자극적인 맛일수록 조리의 과정에 더 신경써야했음을 간과한 것 같다. 결국 '맛' 없이 자극적이기만 이 영화는 찝찝함만 남기고 끝났다.

<악의 연대기> 속 이야기 읽기

스토리에서 '반전'이란 요소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예상치 못한 사건 전개에서 오는 신선한 충격의 맛을 한 번 제대로 보고나면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그리고 이 반전의 묘미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장르는 역시, 스릴러다. 숨은 범인, 혹은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 등등. 스릴러와 반저느이 궁합만큼 짜릿한 것도 찾기 힘들다. 그러나 반전은 그 자체로 빛을 내기 어렵다. 반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치말한 설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깔려있는 설계가 얼마나 완벽하느냐에 따라 '반전'이 빛을 발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마지막 숨겨진 퍼즐 한 조각을 맞추었을 때 '헐! 이럴수가!'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것이 우리가 반전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반전의 아주 좋은 예시로는 <식스센스>가 있다. 사실, 최고이자 정석이다. 귀신을 보는 아이와 함께하는 상담사의 스토리는 보는 내내 반전의 'ㅂ'자도 찾을 수 없다. 그 이야기 자체로 재미와 몰입감을 지녔다. 마지막의 장면은 이 이야기의 정점이다 철저히 설계된 모든 장면과 결말이 맞아 떨어졌을 때 오는 놀라움은 우리에게 엄청난 쾌락을 선사한다. 반면 <악의 연대기>의 경우, 감히 형편없다고 하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철저한 설계가 기본이다. 즉, 그 전 이야기 자체도 흡입력을 가져야한다. 그래야 설계가 머리에 남고, 결말과 맞아 떨어졌을 때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기본적인 스토리가 너무 빈약하다. 스릴러로써 전혀 긴장감도 없고 전개도 부실하며 설명은 턱없이 약하다. 영화 속 경찰들처럼 표현하자면 범행 동기도 허접하다. 이 영화는 더 확실한 길을 잡았어야 했다. 최창식(손현주 분)의 말처럼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 본인도 모르게 나오는 우발적 본능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이처럼 좋은 정체성을 잡아놓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조금 더 최창식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세우고 그에 대한 본능에 집중하고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정말 극한 상황이었다면 사체를 그렇게 두고 갔을까?CCTV 녹화 CD 하나 훔치는 걸로 끝날까? 극한인 '척' 하는 연기에 몰입할 정도로 21세게 관객의 눈은 낮지 않다. 솔직히 '반전'만 생각해놓고 이야기를 급하게 억지로 짜맞추어 넣은 것은 아닌지, 아니면 어설픈 스릴러에 반전을 급조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든다. 어설픈 반전은 없는게 낫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제목이 되버렸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남자들에게 첫사랑의 의미는 꽤 크다. 아무리 세상 남자들이 다 음흉한 늑대라지만, 그런 남자들에게도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이 있기 마련이다. 웹툰 <괴물같은 아이돌>에서는 남자들의 첫사랑에 대해 나름 명쾌하게 정리를 했다. '남자는 첫사랑을 추억하는게 아니라 첫사랑을 하던 자신을 추억한다.' 라는 말은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했으리라 생각한다. 커징턴은 션자이를 좋아했다. 커징턴은 자유분방한 '문제아'였고 션자이는 차분한 '모범생'이었다. 둘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관리 감독을 위해 커징턴이 션자이 앞에 안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조금씩 변화한다. 왜 좋아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원래 그런 미묘한 감정이니까. 이 미묘한감정을 갖고, 션자이는 커징턴에게 숙제를 내준다. 커징턴은 같은 미묘한 감정을 갖고 숙제를 받아 공부를 시작한다. 션자이 역시 커징턴의 '유치함'에 빠지게되고, 둘은 조금씩 물들어간다. 서로 다른 그 둘은 닮아갔다. 연애는 그런 것이다. 서로 다른 둘이 하나씩 맞추어 사는 과정. 그래서 연애란 것은 불완전하고 불안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커징턴은 두려웠다. 자신의 '고백'이 지금의 균형을 깰까봐. 커징턴은 좋아하는 션자이 앞에서 겁쟁이가 됐다. 관계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결국 션자이와 커징턴의 사이는 그들의 마음과는 달리, 틀어지고 말았다. 이유는 역시, 그 둘은 너무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둘을 이어주었던차이가 그 둘을 헤어지게 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참 미묘한 감정이다. 이렇게 아련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현실적으로 잘 풀어냈다. 그 미묘한 감정을 현실적으로 잘 표현했기 때문에 둘의 아련함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현실보다 훨씬 유치한 커징턴의 행동은 영화의 흐름을 방해하는 흠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커징턴의 '유치함'이 가지는 의미는 짐작가지만, 과도한 저질코드는 무리수 였다. 다소 저질적으로 유치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수작이다. 커징턴처럼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와 그 소녀를 좋아하던 나를 돌아볼 수 있다. 영화 속 대사처럼 그 시절 우리를 추억해보자. '나도 너를 좋아하던 그 시절의 내가 좋아'라는 커징턴의 대사처럼 그때의 우리를.

<악마는 프라자를 입는다> 속 이야기 읽기

취업대란이다. '인재'는 넘쳐나는데 일자리가 없다. 점점 더 지원자들의 스펙은 화려해져가고, 이제는 그 스펙도 모자라서 '열정페이'도 감당해내는 시대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할 겨를이 없다. 그러기엔 당장 눈앞의 것들이 두렵다. 꿈을 좇아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어느센가 돈키호테의 별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안드레아 색스는 저널리스트가 꿈이다. 후일의 저널리스트의 꿈을 위해 '런 어웨이'란 패션 잡지사에 취직을 한다. 패션에 'ㅍ'자도 알지못하는 '촌년'이. 그래서 그녀는 힘들다.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몰라준다. 그런 그녀에게 나이젤은 그녀에게 징징거리는 것 뿐이라며 충고를 해준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앤디와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뭐든 열심히다. 학점에 대외활동에 공모전과 자격증에 알바까지. 그러나 풀리는 일은 없다. 취업의 벽은 여전히 높고, 현실은 가혹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돌이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열심히 했나? 진짜 열심히 했나? 물론 앤디 역시 노력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간절함의 차이다. 앤디가 현재하고 있는 일을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여자가 두룩하다. 하지만 앤디는 그렇지 않다. 저널리스트가 돼기 위해 1년만버티면되는, 한국의 군대와 같은 곳이다. 물론 앤디는 노력했다. 하지만 더더더 많은 노력을 하는 나이젤과 에밀리를 비롯한 화사사람들의 눈에 그 노력이 보일리 없다. 그 정도는 징징거리는 투정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앤디의 성공기만 보여주고서 끝맺음을 맺었다면, 이 영화는 취업 새내기의 낭만적인 성공기를 다룬 정도의 판타지 영화로 남았을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세지를 던져준다. 열심히 하되 자신을 잃지 말 것. '진짜' 노력을 하고 난 후, 앤디는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그 위치에서 앤다가 본 미란다와 나이젤, 에밀리는 모두 연민의 대상이다. 열심히,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그 속에서 자신을 잃지 말라고 조언한다. 결국, 앤디는 자신을 찾아나선다. 화려한 옷을 벗고, 촌스럽지만 원래 자신으로, 잡지사를 관두고 저널리스트를 향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돌아보자. 징징거리기만 하고 있는지, 자기자신조차 잃을 정도로 그곳에 매몰되어 있는지. 아니면 별을 좇는 돈키호테로 남아있는지.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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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주가 말하는 진짜 아름다움 + <슈렉>,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미녀는 괴로워>

정보통신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우리는 훨씬 더 많은 '미'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이미지에서 멈추는게 아니라, '미'에 관한 수 많은 정보들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문제는 '미'에 대한 욕심이 과해졌다는 것이다. 더 예쁘고, 더 아름다운 것을 갈망하고 매달린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위해 매우 위험한 수술도 기꺼이 받아드린다. 경제력에서 뒤쳐진 '미의 추종자들은 현실 세계가 아닌 사이버 세계에서 자신을 '수술'한다. 이런 '미'를 탐욕하는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세녀가 있다. 바로 개그우먼 이국주 씨다 .대세녀 이국주 씨는 '원더우먼 페스티발'에서 인상깊은 말을 남겼다. 그 말 속에서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당당하게 옷 잘입는 뚱땡이가 되자던 그녀의 말에서 몇몇 영화 속 주인공들이 떠오른다. <슈렉>의 피오나 공주, <미녀는 괴로워>의 강한나 (김아중), 그리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안드레아 색스 (앤 헤서웨이). 가짜가 아닌 진짜 아름다움을 찾은 주인공들이다. 피오나 공주, 강한나 그리고 앤디는 모두 눈부시게 아름답다. 또한 그와 반대되는 모습 역시 지니고 있다. 피오나는 초록괴물로 변하고, 강한나의 정체는 못난이 돼지이며, 앤디는 일명 할머니 스커트나 입는 촌년이다. 괴물은 자신을 구해줄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강한나는 전신성형을 통해 남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미녀로 거듭났다. 앤디는 패션 세계의 정중앙에서 점점 더 화려해져갔다. 이 세 미녀는 '아름다움'을 손에 넣고 어땠을까. '예뻐지면 행복할꺼야.'라는 우리의 믿음처럼, 그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물론 행복해했다. 전에 받던 무시와 경멸은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람들은 자기자신에게 환호를 보내고 열광했다. 못났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없던 일들도 예뻐졌기 때문에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다. 왕자는 피오나 공주를 좋아한 것이지, 초록괴물을 좋아한게 아니었다. 피오나 공주를 품고 싶었지만 초록괴물은 파괴하려했다. 왕자는 피오나의 공주 이미지를 좋아한 것이지 피오나 자체를 사랑하지 않았다. 또한 앤디는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점점 더 섹시해졌다. 세련되고 패셔너블해진 그녀는 더 이상 촌년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뉴요커가 되었다. 그러나 앤디는 행복하지 않았다. 화려함은, 그녀의 생활을 하나씩 앗아가고 있었다. 일을 제외한 그녀의 개인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비단 그녀 뿐만 아니다. 전설의 거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에게서 앤디가 느낀 것은 연민이었다. 미란다 역시 앤디와 다를 것이 없었다. 피오나와 강한나, 앤디는 결국 '미'를 내려놓는다. 외형적인,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미'가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본연의 모습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피오나는 결국 본연의 모습인 초록괴물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슈렉과 함께 떠난다. 강한나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고백한고 인정하고 받아드린다. 그렇게 강한나는 가수로써 성공적인 첫걸음을 뗀다. 앤디는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비록 조금은 촌스럽더라도, 수수하고 편안하고 '저널리스트'적인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미란다의 '웃음'을 받아낸다. 단순히 외모에 신경끄고 내면을 가꾸자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못난 자신'에 대한 위안거리나 변명, 또 그로 인한 헛된 희망을 주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가혹하고 더 힘든 이야기일 수 있다. 의학의 힘이든, 컴퓨터적 기술이든, 뭐든 이용하여 부정하고 싶었던 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첫걸음이자 시작이니까. 스스로를 사랑하고 당당해지고 내면을 가꾸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시작조차 못하고 갖는 자기애는 최면이자 근거 없는 자신감이며 일그러진 나르시즘으로 변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