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뒤덮인 녹색조의 이미지 앞에, 무시무시해 보이는 곤봉에 기대어 서 있는 카라리나 프리치의 <거인>은 우리를 애절한 시선으로 대하고 있다. 불투명한 뿌연 회색빛 샅바를 입은 원시인은 어쩌다 자신의 시간과 장소에서 떨어져 나와 결국 갤러리의 광활한 하얀색 공간에서 헤매는 난민처럼 보인다. 그는 환상적이면서도 친근하다. 너무도 인간적인 인체의 세부사항들(머리가 벗겨진 정수리, 약간 나온 배, 처지기 시작한 가슴)은 누가 봐도 신화적인 기원과 연관된다. 풀이 죽은 얼굴은 익명의 행인의 특별할 것 없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고, 그의 뒤 배경은 숲이 무성하고 넓게 펼쳐져 있지만 딱히 무어라 규정하기 어렵다.
〈거인 Riese(Giant)〉, 2008 | 폴리에스테르, 페인트, 195×95×70cm
<거인>(신장이 193cm 가량의 뒤셀도르프 택시 운전기사를 모델로 함)은 프리치의 몇몇 조각작품들 중 하나로, 구상적인 이미지의 배경과 함께 전시되었다(배경의 작품 제목은 <우편엽서 4(프랑켄)>)이다). 예술가들의 작품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 작품의 힘은 부분적으로는 스케일과 색채의 부조화에서, 또한 부분적으로는 따분함, 불안함, 매혹의 뒤섞임에서 온다. 조각상의 무광 코팅은 대량생산되는 사물들, 틀로 찍어낸 마네킹, 혹은 특대 사이즈 장난감 같은 인상을 준다. 반면에 경직된 자세는 삭막한 느낌을 보탠다. 하지만 디테일의 정도는 단순히 무엇을 대신한 것 정도로 무시할 수는 없게 한다. 프리치는 자신의 이력에서의 광범위한 소재들을 이와 동일하게 다루었다. 1981년부터 1989년 사이에 만든 형광 토템인 다수의 <성모상Madonna Figure>에서부터, 거대한 검은 설치류를 만든 무서운 <왕쥐>, 그리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갤러리 주인의 초상을 새빨간 조각상으로 만든 <딜러> 등이 그것이다.
〈왕쥐Rattenkonig( Rat King)〉, 1993. | 폴리에스테르 레진, 페인트, 280×1300cm
기계로 제작된 것 같은 외관이긴 하지만, 프리치의 조각상 대부분은 손 주형, 석고 주조, 재작업, 폴리에스테르 재주조, 마지막에는 그리기 등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초기에는 자신이 직접 만들었지만, 이제 그녀는 최종 제작을 위해 모델들을 공장으로 보낸다. 이렇게 전통적인 수공 기법과 몰개성적 제조를 결합하는 그녀의 작업은 제프 쿤스와 무라카미 다케시 같은 포스트 팝 오브제 제작자들의 활동과 연결된다. 널리 알려져 있거나 도상적인 형태들에 초점을 맞추는 프리치의 방식은 예술의 내용과 디스플레이 유형에 관한 관객의 예측을 빗나가도록 허용하는 신속성을 작품에 부여한다. <거인> 같은 작품은 3차원 도상학의 일부를, 즉시 인지가능한 것의 아카이브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 변형되어 묘한 원시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
〈딜러 Handler(Dealer)〉, 2001. | 폴리에스테르, 페인트, 192×59×41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