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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인, 조선의 라스푸틴 (3) - 1881

1881년 4월 1일, 조선 주재 하나부사 공사는 일본 외무경에게 서한을 보냅니다. 서한 말미에 그는 당시 조선 동향과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보고를 함께 올리죠. 이만손의 개항 불가 상소, 김홍집의 근신과 수신사 임명, 인천 개항 확대를 반대하며 상복을 입고 도끼 그린 종이를 등에 짊어진 채 궁궐 앞에 엎드린 남자 얘기 등등 모두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파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었죠. 그 기록 가운데에 이동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 또한 있습니다. 하나. 참모관 이동인은 근래 민영익의 집에 동거하여 매우 기세가 좋았지만, 이만손 상소 이후에 자주 걱정하여 특히 3월 초순부터 10일 전후에는 몇 차례 공사관에 와서 공사가 위태로우니 호위를 증가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같은 충고를 하는 자도 있었지만, 공사관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동인은 위의 사건과 관련하여 신변이 위태롭다고 생각했는지, 3월 중순경부터 민 참판 댁을 떠나 종적을 알 수 없는 중에, 주상이 갑자기 본인을 불렀는데 도망쳐 달아나 부재하자 분노를 일으키시고 "변변치 못한 소인이 지금 형세의 어려움을 보고 헛되이 그 몸을 숨기고 자전의 계책을 삼았다. 혹시 원래 일본인인데 우리말에 통해 거짓으로 조선인이라 칭한 것이 아닌가!"라고 꾸짖으시면서부터, 조정의 백관도 일찍이 그 가볍고 말이 많음을 꾸짖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소행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주상께서는 더욱 역린하시어 '그는 산천에 은거한 것이 아니라 필시 원산진에 몸을 숨기고 일본으로 도망가려 할 것이다. 신속히 추포하여 오라'는 상의가 있어 잡으러 갔다고 합니다. 이만손이 올린 영남만인소. 이만손은 <조선책략>을 읽고 분개해 고종에게 이 책 주장의 불합리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나부사의 서신에는, 이만손이 당시 70여 세 노인으로 수백 명의 유생들을 데리고 궁궐 앞에 엎드려 무려 일주일 동안 시위를 했다고 적혀 있죠. 상소의 내용은 민씨 세력을 삭감, 인천 개항 불허, 외교 불허, 김홍집 귀국 이래 국가 규범이 바뀐 것을 책망, 무위소 개혁 등 그때까지 추진되었던 개화 정책을 모두 백지로 돌리고 김홍집을 탄핵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 상소를 읽고 매우 분노했고, 민씨 측에서도 몰래 소수에게 돈을 먹여 진정시켰다고 하네요. 나중에 그는 다시 한 번 상소를 올리려다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났다고 합니다. 서신에서 하나부사는 이동인이 실종되었고, 그 행방을 조선 정부 측에서도 알지 못하는 듯 적었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5월 9일, 승려 오쿠무라 엔신은 포교일기에 '밤에 총영사에게서 동인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이동인이 암살당했다고 여긴 건 일본측 인사들뿐만이 아니어서, 5월 3일 주일영국공사관 어네스트 사토우는 자기 일기에 탁정식이 찾아와 이동인의 소식을 알려줬다고 합니다. 탁정식은 이동인이 척사파에 의해 희생당한 게 아니라면 어딘가 살아 숨어있을 것이라고 했죠. 또 고종은 대원군을 의심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조선불교통사>란 기록에는 어느날 민영익의 양부 민태호가 이동인을 불러냈고, 이후 이동인의 종적이 사라졌다고 했죠. 대체 이동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1881년 음력 1월 5일, 조선 정부는 이동인을 통해 일본 공사 하나부사에게 무기와 기선 구입 계획 등을 알리도록 합니다. 다만 자금이 부족해 일본에서 100만원을 빌릴 수 있을지 여부를 하나부사에게 타전하죠. 하나부사는 정부가 보증을 선다면 가능하다고 화답합니다. 이후 음력 1월 10일, 하나부사는 일곱 개 조항의 조약안을 조선 측에 제시하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동인, 조선의 라스푸틴(2) - 도쿄, 1880

오경석.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신적 배경을 제공해 준 사람으로, 중인인 역관이었습니다. 그는 1874년 동료 한 명만 대동하고 개인 자격으로 북경주재 영국공사관을 찾아 서기관 메이어스와 대화했습니다. 그 만남을 메이어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 그는 머지않아 유럽열강이 군대를 동원해서, 조선정부로 하여금 그 은둔 체제를 포기시켜 주기를 바란다는 기묘한 희망을 표명했습니다. (...) 자신은 일본이나 유럽의 침공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며, 그렇다면 대대로 조선의 적국인 일본보다는, 차라리 조선을 보다 인도적으로 다룰 것으로 생각되는 유럽에 의해 실현되는 편이 낫다(...) 이는 이동인이 영국 공사관 사토우를 찾아가 한 말과 유사합니다 ; 그는 조선이 몇 년 내로 외국과의 관계를 맺을 것이지만, 그 전에 반드시 현재 정부를 일소할 (sweep away) 필요가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처럼 생각하는 청년들의 수는 날마다 늘고 있다. 이동인이 수신사 김홍집을 만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김홍집을 만나기 위해 주변 상황을 전부 짜맞춰 놓았다는 얘기죠. 우선 도쿄로 온 이동인이 일본 외무성에 출두해 하나부사 공사 등 주요 인물과 면담한 일이 있습니다. 이미 1880년 2월 오쿠무라 엔신이 잠시 하나부사 공사와 마에다 부산주재 관리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이동인이 도항했단 사실을 듣고 뒷일을 부탁한 일이 있었죠. 또 수신사 김홍집은 단순히 근대 문물을 둘러보는 것뿐아니라, 양국 사이 세관 설치 문제, 새 무역장정 체결 문제를 놓고 교섭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정부 역시 협상을 위해 미리 알아둘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알아두고 싶었겠죠. 하지만 이동인의 역할은 단순한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동인이 김홍집과의 만남에 대해 오쿠무라 승려에게 알려준 바는 이랬습니다. 귀승의 배려로 일본 혼간지에 체제하면서 교법과 국정, 어학 등을 대략 배웠고, 그 뒤로 도쿄 혼간지에 가서 스즈키 소장의 주선으로 유명한 조야의 인사들을 만나서 한국의 현재 국운을 말하니 모두 한국을 도우려는 후의를 보였소. 마침 그 때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에 들어와서 아사쿠사 혼간지에 머물렀소. 스즈키 교정의 접대는 김 수신사와 이조연을 감동시켰소. 하나부사 공사는 김 씨에게 인천개항 건을 말했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임무가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부사 공사의 뜻에 응하지 않았소. (...) 그래서 나는 스즈키 씨에게, '내가 일본인이 되어 김 수신사를 만나 일본정부의 후정부터 재야 유지자의 참뜻을 전한다면 김 수신사도 안심해서 하나부사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하였소. (...) 하나부사는, '동인은 밀행한 자이다. 수신사를 만나면 저 나라의 폭정에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계책이다.'라고 했소. (...) 나는 '내가 일본에 와서 국은에 보답하고 불은을 갚기로 결심했으니, 나라를 위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다시 근심하지 않소. 김 수신사를 알현하고 싶소.' 라고 했소. 하나부사와 스즈키는 감탄했고, 결국 김 수신사를 만났소.

이동인, 조선의 라스푸틴 (1) - 1878, 부산

1870년대 말 조선은 안팎에서 여러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1875년 윤요호 사건으로 이듬해 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은 후, 고종과 외척 세력인 민씨 일파는 개화 추진 의지를 보였죠. 하지만 아직 1873년 실각한 대원군의 세력이 건재했고, 정부 내외에서 개화 반대파, 이른바 척사 세력들이 미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론 메이지유신을 통해 먼저 개화 정책에 성과를 본 일본이 1874년 대만출병, 1879년 류큐 병합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존 청국 중심 국제관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죠. 다만 일본은 최종적으로 양국이 충돌할 그 순간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춰 완전하게 승리를 거두고 싶어했습니다. 따라서 실제 청과 일본이 정면 충돌하는 건 약 20여년 후인 1890년대 일이죠. 대만출병시의 일본군인. 일본은 당시 청과 일본 양국에 애매하게 속해 있던 류큐국에서 표류해 조난당한 류큐인들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빌미로 대만에 파병을 결정합니다. 처음에 출병 계획은, 열강국들이 외교 압력을 행사해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죠. 하지만 지휘관 육군중장 사이고 츠쿠미치는 이미 준비를 마쳤단 이유로 파병 철회 명령을 받지 않고 출병을 강행했습니다. 후에 일본은 파병이 정당한 조치였음을 청에게 인정하고 청측으로부터 피해 보상을 끌어내는데 성공하는데요. 이는 사실상 일본이 류큐를 속방에 놓고 대변한 것과 다름없는 구도가 되어 1879년 일본이 류큐 병합이 성사하는데 영향을 줍니다. 류큐 병합을 계기로 청국은 일본을 경계하며 이후 조선에 적극적 개입을 하게 되죠. 국제 정세가 뒤숭숭한 와중인 1878년 6월, 부산 옛 왜관 자리에 히가시혼간지 부산 별원에 삼성암 승려로 자칭한 인물이 찾아옵니다. 그는 포교사로 파견된 일본 승려 오쿠무라 엔신과 하루 종일 교의에 대해 물은 후, 부처에 참배하고 돌아가죠. 이 인물은 9월 15일 통도사 백련암 서명, 실명은 기인이라고 하면서 제자가 되기를 청합니다. 12월 9일 다시 별원을 방문한 그는 수 시간 후 돌아갔지만, 10일과 11일 다시 이틀에 걸쳐 종교 교리 이야기를 나누고 엔신의 소개를 받아 군함 히에이를 견학하기까지 합니다. 엔신은 자신의 포교 일지에 이렇게 기록하죠. '12/10 동인(기인)에게 염주와 경전 한부를 본산에서 주었다(...)' 이동인이란 이름이 기록에 등장하는 건 이때부터입니다. 이동인이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해군 군함 히에이. 1878년 2월에 취역한 콘고급 코르벳함입니다. 일본은 이 전함을 3500톤급 미만 함선인 삼급함으로 분류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에도 참전시켰죠. 측량선 등으로 1908년까지 쓰다가 1912년 매각되어 나중에 해체됩니다.함선명은 그 이후 1914년 취역해 1, 2차 대전에 참전하는3만 6천톤급 순양전함 히에이가 물려받게 됩니다. 이동인이 방문한 히가시혼간지 부산 별원은 사실 일본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이었습니다. 히가시혼간지는 막부 후원을 받아 급성장한 곳으로, 개항 이후 일본이 막부파와 천황파로 나뉘어 사실상 내전에 돌입하자, 막부에 군사비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승군을 조직해 참전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이건 잘못된 결정이었는데요.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정권을 천황에게 전격 돌려주는 대정봉환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처음으로 보는 제헌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위는 1948년 7월 17일 반포된 제헌헌법 전문입니다. 굳이 한 줄 문장으로 길게 처리하는 것도 그렇고, 갖은 미사여구는 전부 때려박은 듯한 것도 그렇고 기본틀은 현행 9차 헌법 전문과 같네요. 참고삼아 현행 헌법 전문을 아래에 붙입니다. 어느 부분이 달라졌는지, 알아 보시겠나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전후 일본의 구세주들(5) - 청출어람

모리타 아키오. 그 역시 1950년대 초 사라손이나 데밍의 세미나에 참석한 인물들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였던 사명은, 1955년 포켓형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해내면서 세계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이 회사가 바로 지금의 소니죠. 80년대 말, 그는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을 펴냅니다. 이때가 바로 일본 버블 경제의 황혼기였죠. 호머 사라손과 에드워드 데밍의 차이를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손은 미군정에서 보낸 보스였고, 데밍은 일본인들 스스로 초청한 은사였죠. 일본인들은 사라손에 대해선 거의 잊었지만, 데밍에게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최고의 스승을 의미하는 구루란, 아마도 사라손이 아닌 데밍이겠지요. 데밍 역시 고국인 미국보다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해 준 일본에 더 마음이 끌린 모양입니다. 1950년 세미나 이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해 품질 관리의 이론을 전수했고, 직접 자기 이름이 붙은 데밍 상 시상을 하기도 했죠. 데밍상은 품질 경영을 적용, 실현한 우수 조직에게 수여하는 데밍상과, 품질관리를 보급,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개인에게 수여하는 데밍 본상이 있었습니다. 1951년 첫 데밍상 수상자 가운데는 미군정 시절 정치 스캔들을 일으켰던 쇼와덴코 사가 포함되어 있었죠. 1952년 데밍 본상 수상자는 미즈노 시게루 박사 중심 품질관리추진클럽이었는데, 이시카와 가오루, 미우라 신, 고토 마사오 등 8인이 구성원이었습니다. 미즈노 시게루 자신은 주로 외국 품질 관리 서적의 번역 및 보급, 교육 등 활동에 치중했고 그가 남긴 저서도 품질 관련 강의를 정리한 강의노트 한 권뿐이라서 그다지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토 마사오는 1959년 행정관리청 통계기준국장을 거쳐 오이타 국립 대학 학장, 오이타 현 참의원을 거쳐 1989년 내각 법무대신까지 지낸 인물이죠. 미우라 신은 전후 일본 산업계에 품질 관리를 보급하고, 나중엔 동남아 등지에까지 TQC 품질 관리 사상을 전파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들 중 오늘날까지 명성을 떨치는 사람은 이시카와 가오루일 것입니다. 1949년 일본 과학자 및 엔지니어 조합인 JUSE의 품질 관리 연구 클럽에 합류한 그는 데밍과 또다른 품질관리의 거장 쥬란의 연구를 번역하고 통합해 제 나름대로 확장했습니다. 1960년 품질 관리 교재를 펴낸 그는, 62년 품질분임조QC 개념을 도입하고 <현장과 QC>라는 잡지를 창간합니다. 품질분임조란 쉽게 말해 직장내 소그룹으로, 직원들 스스로가 15인 이하 소모임을 꾸려서 자신들 작업을 개선할 각종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같은 업종내 타 기업체 직원들과 교류하며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고 자기 회사에 적용하는 등 일종의 스터디 그룹처럼 운영하는 등 형태가 있습니다. 교회 내 구역조직이나 전도, 포교를 위한 소모임 등도 이러한 품질분임조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시카와는 품질분임조같은 자발적 소그룹이 스스로 학습하고 품질 개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창간 잡지를 되도록 읽기 쉽게 하고, 값을 싸게 해서 회사가 책을 사주는 게 아니라 직장인들 스스로가 사서 읽고 공부할 수 있게 했죠. 또 여러 명이 그룹으로 윤독회를 열어 공부할 수 있게 했습니다. 직원들은 학습과 토론을 통해 자신이 맡은 작업에 개선점을 도출하고, 이를 적용하거나 회사에 적극적으로 건의했죠. 직원들의 협동과 자발적 참여로 회사 전체가 꾸준히, 끊임없이 개선을 해나가는 문화를 조성한 겁니다.

전후 일본의 구세주들 (4) - 스승Guru

호머 사라손. 27세 나이에 미군정 산하 부서장을 맡은 엔지니어로, 일찌감치 일본 산업계의 품질 문제를 깨닫고 개선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본래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의대 대신 물리학과를 갔고 뒤이어 2차대전때 공수부대로 입대했습니다. 그 후 미국내 주요 레이더 연구소 중 한 곳에 들어갔죠. 그의 역할은 과학자들이 개발한 레이더의 프로토타입을 개량해 민간에서 양산 가능하게 재설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호머 사라손이 맡은 민간 통신 산업 부서는 100여 명이 채 안 되는 직원들이 소속되어 있었죠. 직원들 중 일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현지 산업 기반은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되고 맥아더에 의해 해체되어 있었습니다. 사라손은 그야말로 맨땅에서 남은 생산 설비와 뿔뿔히 흩어진 일본인 엔지니어들을 다시 긁어모아 임시 변통으로 공장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공장 없이는 일본 전역의 라디오망 인프라 재건과 수신기 보급은 어림없었을 테니까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라디오 제작에 필요한 진공관 생산에 돌입했을 때, 사라손은 불량률이 턱없이 높단 사실을 깨달았죠. 생산한 진공관 중 90%가 불량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인 기술자들은 이를 별 문제로 여기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늘상 이 정도 불량이 나오는 게 당연했으니까요. "일본인들은 품질에 대한 감각이 없다." 일본인과 처음 일해본 사라손의 솔직한 감상이 이러했습니다. 사라손은 공장 관리자에게 불량률을 낮출 방안을 요구했죠. 관리자들은 그 자리에서 그냥 침묵해 버렸습니다. 그러다 이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죠. 사라손의 통역가는 그들이 어떤 답을 내놓아야 저 미국인이 기뻐할지를 논의중이라고 설명했죠. 상명하복식 문화에 길들여진 일본인들에게서 생산적인 회의를 기대하기란 요원해 보였습니다. 결국 사라손은 직접 일본어를 익히고 일본인들 방식으로 그들을 통솔합니다. 그가 주도적으로 작업 방식을 개선하고 미흡한 점을 하나둘 고쳐나간 끝에 불량율은 90%에서 25%까지 감소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은 사라손이 말하는 품질이란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죠. 하루는 사라손이 작업장을 깔끔히 정돈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연했습니다. 이후 한 공장 관리자가 지시를 잘 이행하고 있단 걸 보여 주겠다며 새로 고용한 정리 정돈 담당자에게 그를 데려가죠. 조립 공정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먼지털이로 쌓인 먼지를 탈탈 털어내는 남자를 보여주며 관리자는 뿌듯한 얼굴로 사라손이 감명받았으리라 여겼다고 합니다. 사라손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지금은 그가 얼마든지 일본인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죠. 하지만 나중에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과연 그때도 일본인들이 그에게서 배운 것들을 잘 실천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