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dokd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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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선 메리셀레스트호의 귀환

이야기는 아래에 이어서 이어갑니다.
총 19장의 사진으로 구성 ㄷㄷㄷ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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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dokddi 네.. 올리신 글 다 읽었습니다 ^●^
@CreamyLatte 네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올려보겠습니다 으쌰 ^^
오~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글 올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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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기모노를 입은 이유는?
김마리아 개화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삼촌, 고모들 사이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06년 서울로 이주해 정신여학교에 입학하게 된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였고, 또 삼촌인 김필순 선생의 집에 드나들던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민족의식을 더욱 키워가게 되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마리아 선생은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고, 1913년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다가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유학생들은 이를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김마리아 선생은 황애덕 선생 등 여자 유학생들이 거둔 성금을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여하였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국내에도 전파하여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국내로 몰래 들여왔고 여성계, 교육계, 기독교계, 천도교계 등 다방면의 지도자들을 만나 국내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난 당일에도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3.1운동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약 6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고 출감한 선생은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을 확대하였고 국권회복을 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은 선생은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1921년 8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김마리아 선생은 중국 남경대학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3년 미국 유학을 위해 중국 상해를 떠난 김마리아 선생은 미국에서의 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7월 귀국한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1944년 3월 13일 순국하게 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더쿠 스퀘어방
레고로, 인증샷으로…100살 임시정부 기념하는 네티즌들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이 된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00주년이라는 뜻깊은 날을 앞두고 네티즌들은 10일 SNS를 통해 자랑스런 대한민국 역사를 기념하며 기리고 있다. 브릭사진가로 활동하는 이제형 씨는 이날 오후 자신의 SNS에 두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 씨는 "19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라며 "2017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임시정부를 방문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긴 시간을 초월해 대한민국의 진정한 독립에 애쓰는 분들이 공존하는 모습에 감동해서 브릭(레고)을 이용해 이 사진을 재현해봤다"고 말했다. 이 씨의 작품은 중국 충칭 연화지 청사에서 환국기념사진을 찍은 임정 주요인사들과 지난 2017년 이곳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일행의 사진을 재현한 작품이다. 이 씨는 CBS노컷뉴스에 "3.1 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서 개인적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레고 사진으로 독립운동을 표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라면서 "독립운동을 공부하며 그동안 독립운동의 행적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라고 밝혔다. 이 씨 외에도 많은 네티즌들이 자신의 SNS에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인증샷을 올리며 이를 기념하고 있다. SNS에서 #임시정부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이 같은 결과를 찾아 볼 수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직접 찾아 인증샷을 올린 네티즌이 있는가 하면, 전국 곳곳에 설치된 임시정부 기념물을 찾아 포즈를 취하고 인증샷을 올린 네티즌도 많았다. 한편, 정부는 11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진행한다. ㅊㅊhttps://www.nocutnews.co.kr/news/5132837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근력운동
골프의 비거리는 단순히 몸통을 비트는 힘이 강하다고, 허리 휘어지게 돌린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 유연성, 순발력의 3박자가 잘 맞아야 회전력이 비거리로 이어집니다. 회전력을 높이려면 몸통과 엉덩이에서 나오는 힘이 몸 전체로 전이될 수 있어야 하죠. 전이되는 속도도 빨라야 하고, 타이밍도 잘 맞아야 합니다. 오늘은 골프 비거리에 도움이 되는 하체와 몸통의 힘을 키우는 운동방법을 소개합니다. 꾸준히 엽습해서 필드에 나가보면 퍼팅하는 순간, 느낌이 올 거예요. 월 - 바벨 굿모닝 10회 5세트, 행 레그레이즈 10회 7세트, 케틀벨 스윙 100회 3세트 화 - 케틀벨 러시안 트위스트 10회 5세트, 케틀벨 한 다리 데드리프트, 플랭크 수 - 휴식 목 - 데드리프트 체중의 55%로 5회 5세트, 케틀벨 우드 찹 좌우 각 5회 5세트 금 - 바벨 굿모닝 10회 5세트, 플로어 와이퍼 10회 5세트, 케틀벨 스윙 100회 3세트 본 프로그램의 유효기간은 최소 3개월 이상이다. 이 프로그램을 실행할 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다. ·백 스쿼트와 데드리프트는 1주차에 시작 무게를 위와 같이 설정하되, 너무 무겁다고 느껴진다면 얼마든지 낮춰서 시작해도 괜찮다. ·백 스쿼트와 데드리프트는 매주 무게를 중량해서 실시하며, 일주일 사이에 증량 폭이 4kg이상을 넘지 않게 한다. ·케틀벨 1세트에 해당하는 100회 스윙이 중간에 쉬지 않고 한 번에 가능하다면, 더 무거운 무게로 실시한다. ·바벨 굿모닝은 빈 바벨로 실시하거나 가볍게 실시한다. ·수요일은 무조건 휴식을 취한다. ※ 위 콘텐츠는 《강한 형님들의 진짜 운동》에서 발췌·편집한 내용입니다.
광주 상무대 포병학교에서
이건 실화이고요 제가 군대 후반기훈련때 본 귀신이야기입니다. 전 2007년 4월 논산에서 5주 훈련을 바치고 155mm 자주포 조종수로 주특기를 받아서 광주 상무대 포병학교에 입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이등병의 천국이라고 하지요 말 그대로 정말 편한 곳이었습니다. 5시만 지나면 px도 자유롭게 갈수았고 훈련소에선 꿈도 못꾸었던 전화도 맘대로 쓸수있었지요..ㅎㅎ 앞으로 포병학교에 가실분도 있겠지만 거기 학교 안에서도 생활을 하는대 여러 분담일이 나눠집니다. 뭐 청소조 식사조 교육준비조 뭐 등등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전 식사조였습니다. 식사조는 동기들이 식사를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조였죠. 설거지에 식당청소를 하는건데 제일 좋았던건 다른 조와 달리 식사조는 저녁에 보초를 안섰습니다. ㅋㅋㅋㅋ 그래서 바로 하겠다고 했죠... 입교한지 2주차정도 되었을때 전 보초도 안서니깐 아주 푹 자고 있었죠 전 성씨가 고씨입니다. 거기선 생활관에서 순번을 성씨로 정해놨죠. 같은 생활관에 강씨 친구가 있어서 전 2번 그친구는 1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잘때도 옆에서 잤죠.. 이친구를 언급하는이유는 뒤에 이야기 해드릴게여~~ 초번초 근무자가 온도체크를 하고 나가는걸 보고 잠이 들었습니다.. 근데.... 갑자기... 딱...탁탁?.. 타다타다닥.. 하는소리 왜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는 소리..? 아 쓰면서도 소름돋네... 시불ㅜㅜ 아그래서 잠결에 뭔소리야.. 이게 하면서 옆에 강씨 친구쪽으로 고개를 돌렸죠. 군대에선 보통 수면등을 틀고 자기 때문에 그친구가 아주 환히 잘보였죠.. 근데.. 그 친구 배 쪽에 손목 까지만 있는 손이 왔다갔다... 하더라구요... 정말 눈을 몇번을 떳따 감았는지 모릅니다.. 그 손이 그친구 배에서 움직이다가 그 친구 얼굴까지 갔다가 멈추고 그러다 침상쪽으로 내려와서 걷다가 다시 친구 배로 올라가는걸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ㅜㅜ 전 어렸을때부터 신앙이 있어서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가 계속 옆에서 들리네요ㅜㅜ 첫째주에 사랑니를 뺀다고 의무대에서 피를 많이 흘려서 헛것이 보이나 헌데 지금은 난 너무나 정상인데.. 그렇다고 내가 지금 가위가 눌린것도 아니고... 도대체 저건 뭐지...ㅜㅜ 거짓말 안보태고 한 20분정도는 계속 그 소릴 듣다가 불침번이 들어오자 멈추더라구요... 전 태어나서 귀신을 정확히 두번 본것 중에 한번이고요.. 정망 그것의 정체를 알고싶습니다.. 엄청 신기하고 기이한일은.. 이 손가락 귀신이 유투브 어느 채널에 다른 분도 체험했더란 사실.. 그 사람은 초소에서.. 도대체 뭐.지 https://youtu.be/fOeO3mio7Lg 여기서 겪은 사람 나랑 같은걸 겪었내요... 한범 들어보세요ㅜ ㅜㅜ 진짜 신기
진짜 별이 됐으면...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의 하루일 뿐인데 마음이 무거운 아침입니다 노틀담 성당이 불에 타서요? 물론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이 불에 탄것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것보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우리의 아이들이 아무의미도 없이 사라져 갔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삶에 무게에 허덕이며 살다보니 그 날의 안타까운 일들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보고 나도 똑같구나 생각 했습니다 아침에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그날 그때 잠수부로 고생 하시고도 대접은 커녕 오히려 국가에 소송을 당하신 분이 나오셔서 하신 말씀중에 울컥한 부분이 유리를 깨고 들어가 아이들을 처음 수습하는 부분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다~ 지난 이야기 보상도 끝났고 앞으로 할 일도 많은데 과거에 묶여 있다고 그러면서 유가족들의 쓰린 가슴에 소금을 묻혀서 비비기 까지하는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는 죽어서야 그 고통이 없어질까 그 분들은 아직도 진행중일 겁니다 그 분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는 방법은 우리가 조금의 힘을 보태서 한 점의 의혹없이 그 날의 일들이 밝혀지면 그것으로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분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재수사 촉구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우리 빙글님들의 한사람 한사람의 힘을 보태드리는건 어떨런지요 그래서 진실이 밝혀지면 그제서야 아이들도 진정 별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http://www1.president.go.kr/petitions/577697
제목짓기 고민되는 썰
안녕하세요. 처음글을 써보는데 그냥 평범한18살이에요. 글쓰기 편하게 음슴체로 할게요. 나는 어릴때부터 이상하게 귀신보이고 환청들리고 가위눌리고 삼박자가이루어졌음 초등학교 2학년쯤 여름방학이었음 노는걸 좋아하는 나는 어김없이 친구랑 집앞 놀이터에서 BB탄총으로 총싸움하고있었음 놀다가 이상한냄새가 나길래 호기심에 냄새나는쪽으로 갓음 이상한사람이 누워서 하늘을 보고있는거임 정신나간사람인가 생각하고 경비아저씨불럿음 경비아저씨가 계속 부르는데 미동조차없는거임 그래서 경비아찌가 저기요 하면서 흔드는데 힘없이 굴러가는거임 이때 경비아찌랑 나랑 느껴지 아 시체구나 하고 경비아찌가 경찰에 신고하고올테니 자리좀 지키고있으라고 하고 가심 그렇게 혼자 경비아찌 기다리다가 뒤돌아봤는데 나랑 그 시체랑 눈이 마주침 그순간 공포감에 휩쓸려서 2분동안 부동자세로 눈마주치고 있었음 그렇게 경찰이오고 구급차로 시체실려가고 나랑 경비아찌 상황진술하고 집을가서 너무 피곤해서 밥도 안먹고 잣는데 가위가 눌린거임 아무도없는 그냥 하얀배경이었음 그배경 저멀리에서 그시체가 걸어오는거임 오더니 하는말이 " 한평생 혼자였어 죽을때까지 혼자가기 외로워 ..같이가자 " 이러는거임 무슨 오지랖인지 몰랏는데 같이 가줬음 한참을 걷다가 몸이 아른해지는거임 왠지모르게 편안하고 그렇게 걷다가 엄마가 우는소리를 듣고 가위에서 깨게됨 깨고 일어나니 병원이었음 엄마가 밥먹으라고 불럿는데 안일어나길래 흔들어서 깨웠는데 내몸에 힘이 싹 빠져있고 숨을 안쉬더래 그래서 바로 병원 데려갓는데 난 3~4분 가량 숨을 안쉬었고 병원에서 죽었다고 판단하고 다포기할때 내가 엄마울음소리 듣고 깬거임 엄마울음소리 못듣고 계속갓으면 난 지금 어디에있었을까?
정욱 중덕 (程昱 仲德) A.D.141 ~ 220
난 여기 접속해서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대략 평균 연령대가 어찌 되는지를 잘 모르겠다만... 삼국지를 좋아하되,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이면 왠지 삼국지를 처음 책(만화책)으로 접했을 확률이 높겠고, 나이가 좀 적은 분들이라면 아무래도 게임으로 먼저 접하다 흥미가 커지며 그 후에 책을 접하지 않았을까 싶다. 난 삼국지를 처음 책으로 접하다 꽤 시간 흘러 게임을 해보게 되었는데(KOEI 三國志2) 당시 상당히 충격적인 부분은 바로 "능력치" 였다... 사실.. 게임속 인물들의 능력치를 접하기까지 책이나 만화속에서는 일정 레벨 이상의 네임드 인물들의 우열을 가려내기가 상당히 어렵다. 주유와 순욱 중 누가 더 뛰어난지, 장료와 방덕 중 누가 더 대단한지, 이건 알길이 없고 저마다의 상상과 추정으로 가려진다. 그러니 토론도 가능했다. 헌데 이 능력치가 매겨지며 내신등급처럼 인물들의 우열이 가려지게 되었고 이 기준은 투명하지 않음에도 게임 접해본 이들은 이 능력치로 인물들을 판단하게 된다. . . . 오늘의 주인공 "정욱" 역시 그런 능력치 시스템의 나름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해보며 긴 서론을 써본다. 수 많은 삼국지 게임들 있으나 가장 흥한 일본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를 예시해보자면 책사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능력치인 "지력"부문에서 정욱은 평균 90~91 가량인데, 그럼 과연 그는 동게임내 지력 평균치가 93~94인 순유나 95~96의 서서나 종회, 가후 등보다 못한 책사였을까?.... . . . 물론, 명확한 정답이야 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저 질문의 대답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이며, 소설 속이나 게임 속 정욱이 아닌 역사 속의 정욱에 대해 한 번 이야기 해보기로~ 정욱(程昱)은 본명이 아니며, 본명은 "정립(程立)". 그러나 정욱이란 이름이 차명이나 가명은 아니고, 중간에 개명을 한건데 욱은 주군 조조가 지어준 이름! 어차피 당시는 이름으로 부르기보다 주로 자를 불렀으며 연의에는 이런 디테일한 스토리는 안나오니 정욱의 개명전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엥간한 삼국지 빠돌이여도 거의 없다. 정욱 자체가 본인의 활약 및 능력과 별개로 별 다른 팬덤도 없는 비인기 인물이라 더욱...(T-T) . . . 현재의 중국 허난성의 구석진 작은 동아현이란 곳이 정욱이 나고 자란 고향이며, 황건적의 난 당시 지략으로 고향을 지켜내 이미 허난성의 당시 지명이던 연주에서 유명인사였다. 집안도 비교적 괜찮던 부유층이였고 본인의 학식과 지략도 출중하며 당시로는 진짜 어딜 가도 눈에 띄는 "거한" 이였는데.... 역사기록을 보면 8자 3촌으로.. 당시의 도량형을 참고, 현재의 수치로 환산해보면 거의 2m에 가까운 거인이다. 당시에는 좀 키가 꽤 크다 싶으면 일종의 감탄사처럼 "8척 거한"이란 표현을 썼기에, 사료에 8자(척)라 해서 건강검진 때 디지털 신장측정기로 잰거마냥 정확한 8자는 아니였겠지만, 정욱의 기록에는 굳이 8자 뒤에 "3촌"이라는 추가 단위가 붙은 것으로 볼 때 거의 정확한 신장측정이 맞다고 보고 있다. 심지어 덩치도 상당히 좋았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하승진같은 정도의 덩치로 보였을 듯.. 보통 삼국지보면 힘쓰는 장수들이 덩치좋고 머리쓰는 책사들은 왜소하고 그럴거 같은데, 정욱은 본인이 임관해 있을 당시의 어지간한 위나라 무장들보다 체격이 컸을 듯 싶다. 연주의 유명인사다보니 일찍부터 여기저기서 오퍼를 받았고 첫번째는 후한 말 연주자사였던 "유대" 였는데, 당시의 유대는 한나라의 칙명을 받고 부임한 그냥 공무원 도지사같은 개념으로 와있었고 당시 원소나 공손찬같은 자기의 세력적 홈그라운드에서 터잡은 군벌은 아니였다. 당연히 별 큰 능력이나 야망은 없었고 정욱 역시 아쉬울게 없어 오퍼를 거절한다.(나같아도...;;;) 이후에 유대가 원소와 공손찬이라는 당시의 두 고래 사이에 끼어 난감한 상황 속에 정욱에게 자문 구하고 정욱이 해준 조언을 따르자 어려움 피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재차 유대는 정욱에 스카웃 제의하나 역시 거절... 이후 유대가 황건적 잔당들 토벌 중 사망(...)하고 비어있던 연주에 진입한 조조가 정욱에 오퍼넣자 바로 응하는데, 이 당시 정욱은 꽤 비판을 받았고 이유는 유대의 청을 두 번이나 거절하며 내세운 이유가 "재야에 그냥 남고싶다" 라는거였는데 조조의 청은 거절없이 바로 응했기에! (나같아도...;;;) 그런데 이미 이때 정욱은 나이가 꽤 있었다. 이 당시가 거의 190년대 중후반이고 정욱은 조조보다 무려 14세 연상이이였으니 거의 50대 초중반의 나이. 후한 말 ~ 삼국시대의 높은 영유아 사망률 탓이라곤 해도 역시 노인사망률도 높아, 평균 수명이 50 안팎이던 시기인점 감안하면 거의 인생 끝자락에 사회생활 시작... . . . 조조가 직접 스카웃한만큼 시작부터 제법 높은자리서 시작은 물론, 초장부터 대활약한다. 여러가지 크고 작은 활약들이 있고 공적을 세우지만 그런건 삼국지 읽어보면 대강 다 비슷하게 실려있고 이 칼럼은 그런 삼국지를 읽어도 잘 모르겠고 세세히 안나오는 개인적 성향 위주니까 안쓸란다ㅋㅋㅋ 게임만 하신 분들 입장에서는 좀 의아할 수 있지만 정욱은 그냥 안전한 후방의 주군곁에서 이런저런 꾀만 내는 전형적인 책사타입이 아니였고, 본인이 직접 전장에 나가 상황 판단하여 병력을 통솔하는데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조조의 네임드 책사들인 순욱, 순유나 곽가와 가후 등이 대개 후방책사들이였던 점으로 비춰, 이는 정욱만의 특징. 임관 초기의 조조는 아직 원소에게 쫄려가며 여포에게 시달려가며 유비를 신경쓰며 원술도 그냥 넘겨볼 수는 없던.... 비록 포텐은 충만할지언정 당장의 세력이 큰 시절은 아니였고 조조가 초기거점 삼은 연주 자체가 사방으로 교통 트인 평야지대라 처신 잘못하면 여러 세력의 다굴을 당하기 최적인 곳이여서... 초반의 정욱은 본인도 전장에 나가 직접 적진을 살펴가며 참전해 공을 쌓았다. 일단 본인의 피지컬도 상당하다보니 무예가 출중하진 않더라도 워낙 또 시기가 시기다보니 어느정도의 기본 호신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 조조 휘하의 대표적인 반유비파 책사였다. 그것도 아주 급진적이라 아직 세력이 크지 않을 때 일찍 유비를 죽여야(?!)한다는 주장을 해왔고, 당시는 뭐든 일단 명분이 중요했는데, 정욱은 그런 명분이 없더라도 일단 찬스오면 죽이고 보자는 식으로 유비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는데... 유비의 세력이 소수의 어설픈 떠돌이집단이던 시절부터 줄창 유비살해주장론자였던걸 보면 사람보는 안목도 굉장했다는 증거! 정욱이 조조 휘하에서 공은 정말 많이 세웠다. 그런데 이게 확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정욱은 타자로 치자면 홈런을 치는 슬러거가 아닌 주로 안타와 타율 위주의 교타자같은 타입에 기인한다. 정사내 정욱전이나 여러 위와 관련된 사료들에는 정욱이 결코 순욱, 순유, 곽가, 가후 등에 뒤지는 책사가 아닌데도 삼국지연의 상에서 이렇다할 기억남는 대활약이 없기 때문에 저평가가 되는것 같은데... 연의는 다 알듯 소설이며 팩트전달보다 재미가 먼저다. 그렇다보니 잘잘한 활약이 많은 정욱이 돋보이기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 . . 인성이 존니 별로였는지, 내부의 적이 상당히 많았다.... 애초에 연주의 호족집안 출신, 게다가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주군인 조조보다도 14살 연상이니 그가 임관한 당시 어지간한 조조의 휘하들은 문무막론 정욱보다 많이 어리다보니 거기서 오는 꼰대기질... 작전회의시에도 누군가 자기의 의견을 반박하면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으며, 상대를 비꼬듯 말하기도 잘 했다. 딱히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이도 없었고 자기와 격차가 좀 난다 싶은 이들은 아주 하대했다. 그러다보니 임관 초기부터 위가 건국된 이후까지도 주위의 이런저런 비판상소가 조조와 그 후의 조비에까지 계속 올라왔다. 물론, 일만 잘 하면 여타 프라이빗한 부분은 일절 노터치였던 조조는 흘려들었고 정욱에게도 이와 관련 일절 말이 없었다. 그런 못되먹은 성깔에서 기인한건지 모르겠지만, 조조의 책사들 중 책략에 있어서 가장 인정이 없었다고 한다. 지가 주위 평판 신경 안쓰고 막 산다고 남들도 다 그런줄 아나, 세상의 평판을 무시한 지극히 실리적인 제안을 많이 했다. 당장 위에 언급된 유비살해만 봐도 그냥 일단 죽이고 보자는 식이였는데... 조조 역시 전형적인 실리주의자라고는 해도 그때껏 자기와 자기세력에게 별 악영향도 없고 인망도 높던 유비를 다짜고짜 죽였다가는 뭔 소리를 들을지 몰라 속으로는 맞다고 여겨도 감히 실행에 옮기진 못 했다. 정욱이야 아무리 날고 긴들 그냥 지금으로 치면 "직원", 조조는 "사장" 이였던건데, 직원과 사장은 능력여하 떠나 서로의 시야나 관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 . . 그리고 그 당시에 세상의 "평판"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중요하디 중요한 요소였다. 저 당시 중국은 무정부상태나 진배없던 후한 말, 그리고 황건적의 난과 각지의 군웅할거 등 삼국시대 정립이 되기까지 말 그대로 "개판 of the 개판" 이였기에 사람들이 막 살았다. 그렇기에 그 와중에도 대의명분과 정의 등의 고결한 가치를 소신삼아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자기가 위험해 지더라도 저런 신념을 지키는 이들은 존경과 우러름을 받았다. 그리고 나름의 인재라 불릴만한 이들 역시, 자기한테 얼마줄지, 뭐해줄지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옳은 주군 아래, 바른 일을 한다는 명분을 따라 임관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연히 세력이 엇비슷하면 무조건 반드시 꼭 명분이 앞서고 평판이 좋은 이를 따랐다. 더구나 무장들보다 많이 배우고 공부한 문관들의 경우, 이런 현상이 심했으며, 아무리 무력이 중요하던 시절이나 현실은 게임과 달라 좋은 무장보다 더 필요하고 또 부족했던게 좋은 문관(행정가, 책사 등)이였다.. 예를 들어, 장수가 오호대장군 + 책사가 당신네 회사의 당신 맞고참인 쪽과 장수가 당신네 회사의 당신 맞고참 + 책사가 제갈량 & 방통이면 후자가 전투에서 승리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다. . . . 그러다보니 평판이 나쁘면 인재가 모이지 않고, 병력징집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호족들의 물질적 지원 및 백성들 대상 세수확보까지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른다. 게다가 전황이 불리해지면 이탈자나 배반자도 높은 확률로 다수가 생겨나 조금만 불리해도 세력와해가 가속된다. 심하면 군주의 신변안전도 보장이 어려워진다. 이렇게 평판이 몹시 중요하던 시기에 그런건 싹 치우고 목적지향성이 과도한 경우가 많았던 정욱의 책략이 반려되거나 다른 책사의 보완책과 더불어지는 경우가 꽤 있었던거 같다. 그러고보면 정욱도 주인을 잘 만난거다. 유비나 손권 휘하였다면 중용받지 못했을거고 원소나 원술을 모셨으면 본인의 목숨도 위험한 상황을 맞았을 수 있었겠으며 동탁을 따랐다면 인성개막장의 동탁에 인정없는 정욱의 책략이 더해지며 레드스컬 아래의 졸라박사같이 되었을 듯.... 늦은 나이에 조조 휘하에 들어가긴 했으나, 그만큼 또 오래 살아서 일흔 아홉에 사망하여 천수를 누렸다... 인성 더러운 이들이 한때는 잘 나가다가도 막판에 험한 꼴 겪거나 비참한 말로를 겪는 경우가 있지만 다행히 정욱은 본인이 권력을 잃거나 하진 않아 고위직에 몸 담다 편히 죽었다. . . . 우리 주위에도 돌아보면 정욱같은 타입의 모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정욱처럼 실력과 재능이 겸비되면 뒤에서나 속으로는 욕해도 앞에서는 모두 그와 친하게 지내려 하거나 잘 하려고 한다. 역시 정욱같은 이들도 자신이 부진해지는 순간 바로 나락이란 걸 알기에, 더 악착같이 일하고 목표를 향해 수단방법, 물불 가리지 않고 나아간다. 그러다보니 계속 평판이 좋을 수 없는 악순환이..... 어쩌면 그 능력과 실적에도 불구하고 연의에서 좋은 대우를 못 받고 또 그 탓으로 현세에도 비인기 인물이 된 것 역시 그의 인성탓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빠가 겪은 실화
이번 이야기는 조금 짧아요! TMI : 아빠가 어렸을 적 이야기 입니다 이야기 시작할게요! 할머니가 잠을 자다가 계속 쿵쿵 되는 소리에 잠을 깨셨대요. '아빠나 고모가 뛰어다니나?' 하는 생각으로 일어나서 살펴봤는데 아빠가 계속 벽에 머리를 박고 있었대요. 할머니는 너무 놀라서 빨리 아빠를 흔들어 깨웠는데,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있었다고 해요. 일단 아빠를 자리에 눕히고 다음날 아빠한테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물어봤대요. 아빠는 할머니를 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귓가에 대고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일어나면 목소리가 안들려서 다시 자려고 누우면 더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어요. 조금이라도 듣고 싶지 않아서 일어났는데 그래도 계속 들렸어요. 근데 갑자기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어요. 누가 끌고 가는 것처럼 멋대로요. 그 여자는 계속 웃었어요. 그 여자가 몸을 조종하듯이 내 머리를 잡고 계속 벽에 쳤어요. 난 이상하게 계속 잠이 쏫아졌어요. 처음 벽에 머리를 박았을 땐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니 느낌도 나질 않았어요. 그 상태로 자고 있는데 엄마가 나를 깨웠어요. 진짜 무서웠어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영적인 존재라 생각하고 아빠와 함께 무당을 찾아갔대요. 무당은 아빠를 보자마자 굿을 해야겠다고 말했대요. 무당은 할머니 집에서 굿을 벌였고 아빠는 더이상 귀신을 보거나 느끼지 못했다고 해요.
정신분열증 화가 루이스 웨인의 작품들.jpg
19세기 영국, 고양이를 좋아했던 화가 루이스 웨인. 최초로 의인화 고양이를 그린 사람이기도 하다. 어릴때부터 미술과 음악에 재능이 있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본래 꿈이었던 음악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한다. 루이스가 23살이 되던 해에  10살 연상의 아내와 결혼했지만, 곧 아내는 유방암에 걸려 힘든 투병을 시작했다 어느날 부부는 밤산책을 하다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고 루이스는 그 고양이를 거둬 피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키우기 시작했다. 루이스의 아내는 투병을 하는 동안  고양이 피터를 보면서 기운을 찾았다. 루이스는 고양이를 예뻐하는 아내를 위해 고양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이를 본 아내가 매우 좋아했다 루이스의 그림을 보던 아내는 이 그림들을 잡지와 신문사에 내보자고 했고, 루이스도 이에 동의해 자신의 그림들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다 루이스의 귀여운 고양이 그림들은 출판과 동시에 큰 인기를 누렸는데 아쉽게도 아내는 그림이 출판되기 직전에 죽었다. 하지만 고양이 그림세로 유명세를 얻은 루이스는 더 다양한 고양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아내가 죽은 후 적적하던 루이스는  고양이 피터에게 안경을 씌워주기도 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여기서 영감을 받아 의인화한 고양이 그림이 탄생하게 된다 의인화 한 고양이의 모습은 전에 없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19세기에는 흑사병의 원인이 쥐라고 생각하여 가정집에서도 흔히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고양이가 친숙한 동물이었고 이런 의인화한 모습이 특이하고 코믹하여 더욱 인기가 많았다 그림들은 상당히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루이스는 오로지 그림과 고양이밖에 몰랐고 저작권에는 관심이 없었던 탓에 그의 그림은 무단으로 도용되고 복제되었다. 다시 그림을 팔려고 해도 이미 복제된 그림이 너무 많아 희소성이 떨어져 헐값에 팔리기 일쑤였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결혼도 하지 않은 동생들과 어머니까지 다섯명을 부양해야 했던 루이스는 큰 자금난에 빠졌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게 된다 이 후부터 루이스의 고양이 그림은 점점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루이스 웨인에게 큰 전환점이 찾아온다 바로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에 의한 환청, 망상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그림을 놓지 않았던 루이스 웨인. 점점 고양이 그림들은 기호, 패턴화 되기도 하였고 배경은 단순해졌다. 그리고 말년에 가까워올수록 고양이 그림은 점점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해진다 현재 루이스 웨인이 그린 그림들의 변화는 심리학 교과서에 활용되기도 한다. 그는 냅스버리 병원에서 평화로이 마지막 생애를 보냈다.  병원 안의 정원과, 그 안에 있는 수많은 고양이들로 그는 안정을 되찾았으며,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다. 사망 이후에는 그의 아버지와 같이 묻혔다고 한다. [출처 : 더쿠넷] 이미 예전에 서프라이즈에도 나왔었고 꽤 유명한 이야기지만 갑자기 생각나서 가져와봤습니다. 언제봐도 오싹하네요. 안타깝기도 하고... 다만 저 기하학적인 고양이그림들 중 일부는 정신분열증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의 직업에서 영감을 받은 고양이 직물 패턴이라고 하네요.
현상금 320억이 걸렸던 우리나라 사람.jpg
약산 김원봉 선생님, 현상금 약 100만원 (현재 금액으로 약 320억) 일본제국에 의해서 역대 최고액의 현상금이 걸렸던 독립운동가. 이 기록은 반세기 이후 오사마 빈라덴에게 540억의 현상금이 걸리기 전까지 전세계 역사상 최고액이었다. 흠좀무 여담이지만 이러한 현상금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김원봉은 2시간 넘게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잠도 제대로 이어서 못잤다는 소리;;) 김원봉은 의열단을 창설하여 항일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은 일제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 그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총구를 겨눌지 몰랐기때문이다. 의열단원들은 모이면 항상 사진을 찍는것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들이 일제에 의해 언제 죽을지 모르기때문에서였다.  중국과 연줄이 있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조선의용대를 편성, 대장으로 취임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선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김구를 비롯한 보수 진영과 마찰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때 좌우익의 갈등은 독립운동사의 오점이었다.) 해방후 귀국한뒤 좌우익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족주의민족전선에 합류했다. 1947년 3월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단체에서 주도한 총파업에 연루되어 대표적인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게 '빨갱이 두목'이라는 소리들으면서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뺨을 맞아 충격을 받는다. 친일경찰 노덕술 (좌측)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 경찰에 당하지도 않은 수모를 해방 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한테 당한 치욕적인 수모였다. 의열단 동지의 회고에 따르면 풀려난뒤 김원봉은 술만 마시며 사흘을 연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친일파와 우익들의 정치테러 표적이 되어 지속적인 테러를 당했다. 아이러니한건 김원봉을 고문하라고 지시내린 장택상은 독립운동가 출신(...) 그런데 좌우갈등때문에 같은 독립운동가들끼리도 죽이던 시대니, 별 무리는 아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는데 그대로 잔류하여 월북인사가 된다. 그러나 김원봉은 이름높은 독립운동가였으나 김일성과 연줄이 없었기에 명목상의 고위직만 맡다가 숙청되었다.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목으로 형무소로 끌려가 거기서 울분을 참지못해 청산가리를 입에 털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김원봉은 한많았던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ㅊㅊ 쌍화차코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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