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12m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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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감과 러브레터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유흥과 환락의 도시 서울.
그러나 이런 서울에도 엄연히 청정구역은 존재하였으니, 그는 절도 아니요 성당도 아니요, 바로 서울 변두리에 있는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기숙사제 사립 하늘여고다.
전원 기숙사 생활 의무, 각종 통신기기 휴대 불가, 외출은 한 달에 단 한번, 이성교제 절대 금지. 이런 시대착오적인 교칙과 더불어 교복 역시 족히 백 년 정도는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디자인이다.
이쯤 되면 아펜젤러가 배재학당 설립할 때쯤에 세워진 유서 있는 학교에 틀림없을 것 같지만 (실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하였지만), 사실인즉슨 하늘여고는 생긴 지 십 년도 채 안 되는 학교다. 그럼 이 고풍스러운 교칙과 교복은 다 어찌된 영문인고 하니, 설립자인 이사장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결과였다. 소싯적에 여학생을 짝사랑했었다나.
어쨌든 이 사립 하늘여고에는 교칙과 교복만큼이나 학생들을 괴롭게 하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는 바로 수학교사 겸 생활지도교사 겸 기숙사 사감을 맡고 있는 봉선화 여사, 별칭 B사감이다.
올해로 서른셋인 그는 아가씨다운 맛은 약에 쓸래야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십 년래로 염색약이라곤 맛도 못 보았다는 듯이 새까만 머리는 언제나 한 줄기로 질끈 동여매어 등 뒤로 늘어뜨려져 있었고, 입는 옷은 언제나 검거나 희지 않으면 갈색, 그도 아니면 회색. 거기에 언제나 끼고 다니는 조영남 스타일의 커다란 뿔테안경까지. 그나마 머리가 길다는 것 하나가 그가 아직 시집 아니 간 처녀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 B사감이 학생 지도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날이 일 년이면 몇 차례 있었다. 특히 오늘은 성탄절 다음으로 최고수준의 경계가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바로 이른바 백절白節, 즉 화이트데이. 이 날의 B사감의 경계수준은 흡사 진돗개 하나에 준하였다.
“꽃 배달 왔습니다!”
공포의 백절 당일, 멋모르는 퀵서비스 기사의 해맑은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을 때 여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리 들어오세요.”
B사감의 눈동자가 두꺼운 뿔테 안경 안에서 번쩍, 하고 날카롭게 빛났다. 학생들은 등줄기에 오한을 느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은 누군가의 제삿날이로구나. 하필 B사감이 맡은 수학 시간에 꽃 배달이 올 게 뭐란 말인가.
“오토바이로 산길 올라오기 힘들었겠어요. 많이 바쁘시죠?”
B사감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퀵서비스 기사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덕분에 맑은 공기도 마시고 좋네요, 하하.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하얀 블라우스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정 통치마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들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흘낏거리며 퀵서비스 기사가 대꾸하였다.
“그런데 누구한테 온 꽃인가요?”
“여기 3학년 1반 맞죠? 김태희 학생한테 왔네요.”
순간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던 학생 하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설사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가 명부를 펼치고 제 이름을 불렀대도 이렇게 기겁을 하지는 아니하였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퀵서비스 기사가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교실을 나갈 때까지도 웃는 낯이었던 B사감의 안색은 교실 문이 닫히자마자 백 팔십 도 돌변하였다.
“김태희, 일어서.”
호명당한 학생은 안절부절 못하며 일어선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B사감이 나직이 묻는 말에 학생의 이마에는 한줄기 진땀이 흘러내린다.
“3학년 교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구나. 천지 분간 못하는 1학년도 아니고, 장사 하루 이틀 하니? 그것도 소포나 택배도 아니고 감히 꽃 배달을 보내? 남자친구 단속 제대로 못 시켜?”
속사포 같은 B사감의 매서운 추궁에 학생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였다.
“잘못했어요. 전 진짜 아무것도 보내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
말하다 말고 학생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일은 늦었다.
“어머, 너 진짜 남자친구 있었니?”
B사감은 커다란 사건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호들갑스레 말했다. 그리고 곧이어 싸늘한 목소리로 죄인에게 엄숙히 선고를 내렸다.
“교칙 제 3조 1항 위반에 의해 석 달간 외출 금지. 그리고 추가로 교내 봉사 3일.”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마디에, 불쌍한 학생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벌벌 떨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달에 딱 한 번 있는 외출. 그 날이 되면 하늘여고 학생들은 아침부터 샤워를 하고 꽃단장을 한다. 유관순 열사 코스프레 찜 쪄 먹는 교복은 어찌하지 못할망정, 선생들 몰래 투명 마스카라도 하고 립글로스도 바르며 제법 모양을 낸다. 그리고 운동장에 학교에서 대절한 버스들이 도착하자마자 앞다투어 올라타고 산길을 내려간다. 그리고는 버스가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거리로 우르르 뛰쳐나가는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행인들은 마치 삼일절 만세운동의 재현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이렇게 외출해서 부모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학생은 적고, 대부분이 샛길(B사감의 한탄을 빌면)로 빠진다. 노래방으로, 피씨방으로, 그리고 몰래몰래 숨겨놓았던 남자친구의 곁으로. 학교에서는 인터넷은커녕 전화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는 학생들은 이 외출하는 날만을 한 달 내내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 마당에 무려 석 달 동안이나 외출 금지라니! B사감의 피도 눈물도 없는 처사에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눈이 마주쳤다가 불똥이라도 튀었다간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행은 한 학생으로 끝이 나지 아니하였다. B사감은 갑자기 허리를 숙여 교탁 밑에서 택배 박스와 사탕 바구니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리고는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영애, 신민아, 최지우, 윤은혜, 성유리 일어서.”
이름이 불린 학생들의 얼굴은 하나씩 흙빛이 되었다. 기어이 이들에게까지 외출 금지 두 달씩을 먹이고 나서 꽃과 사탕과 편지를 모조리 압수하고야 만 B사감은, 그제야 기나긴 설교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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