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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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마음, 아동심리 등으로 검색해보면, 엄마들의 질문글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했어요, 왜 이럴까요? 우리 아이가 그린 그림이에요, 마음을 읽어주세요, 등등 '내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특정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알고 난 후에는, 아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말을 잘 듣게 할 것인지를 추가로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통제할 대상이 아니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달라고 하기 전에 읽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주양육자가 모르는 것을 타인이 알아줄 수는 없다. 물론 전문가에게 맡길 수는 있다. 하지만 늘 일시적이다.전문가가 따라다니면서 아이의 마음을 읽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이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찾고자 함일 것이다. 그런데, 왜 아이의 행동이 나를 납득시켜야 한다고 여기는가? 물론 아이의 행동이 유별나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정도라면 교정이 필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아이가 이 행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아이를 부모가 '어찌 해야하는 종속된 존재'로 보는 시각을 버리고, 동등한 개체로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시야를 가져야 비로소 소통이 시작된다.
아이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고, 생각보다 더 담담하고, 나름의 세계를 확실히 갖추고 있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다. 단지 생각하는 체계가 조금 다를 뿐이다. 어른끼리도 서로 마찬가지이다. 모두 각자의 생각하는 방식, 행동하는 패턴이 있고, 그것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크게 거슬리는 것이 없고, 대충 상식 선에서 얼추 맞는다 싶으면 무난하게 지내고, 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많으면 가치관이 안 맞는다느니, 저 사람 성격 이상하다느니 하면서 밀어내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관계의 모습이다. 하지만 나와 '다른' 것일 뿐 어디에도 옳고 그름의 기준점이 없다. 내가 옳다고 외치는 인간들만 있을 뿐이다.
아이에 대한 어른의 태도도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이는 아이만의 생각하는, 행동하는 방식이 있다. 그럼에도 어른은 자기의 기대와 다르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문제시'한다. 여기에서 더 이해해야 하는 부분은, 이미 살아 오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외부의 사람, 환경 등과 교류하는 경험이 있는 어른과는 달리, 아이는 이걸 배워가는 과정에 있기에 많은 것에 '무지'하다는 점이다. 아이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는 시행착오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는 감정과 사고를 들여다보는 자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스스로 성찰하면서 생각을 가늠하고 주변을 눈치껏 재보면서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이다. 이때의 반응을 통해 '이건 통하는구나, 이건 아니구나'하면서 학습을 한다. 이 과정이 어른에게는 당혹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아이가 사용하는 소통법은, 발달 단계에 따라 달라지지만 주로 우는 것, 거부하는 것, 침묵을 지키는 것 등 부정적인 것에 맞추어져 있다. '엄마 나는 지금 이런것을 원하는데 엄마가 해주지 않아서 서운해요, 엄마 이런걸 해주면 좋겠어요, 사랑해요.'같은 말을 하는 아이는 백마탄 왕자님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설정이자 영화에나 등장하는 캐릭터라고 보면 된다. 아이들은 떼쓰고, 반항하고, 삐지고, 울어제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원하는 것이 더이상 주어지지 않고,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생기는 좌절감을 표출하느라 그렇다. 아기 때에는 배고프거나 엉덩이가 축축할 때면 누군가가 와서 배를 채워주고 엉덩이를 산뜻하게 해준다. 엄마(혹은 주양육자)는 아기의 상태를 늘 살펴보며 부족한 것이 생길때마다 채워준다. 아기는 자기의 욕구가 생길 때마다 착착 신기할 정도로 채워지는 이 세상은 '살만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욕구지연' 상태라 불리우는 때가 찾아온다. 앙앙 울어도 엄마가 늦게 나타난다. 가끔은 기다려야 하고, 웃어주면 더 예쁨 받고,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내가 원하는 반응이 늦게 오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완벽한 보호 상태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의 욕구도 늘 채워지는 것이 아니며, 이걸 채우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어떤 행동을 나의 노력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건 아이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다. 어른 역시 이걸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뭔가를 해주지 않는 것에 분노하는 자기애적 성격장애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사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아이와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보다 영리해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셈이다. 그래서 세상에의 적응, 개인의 성장은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되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이타주의로 가는 것을 '성장'의 척도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아이는 자기의 욕구와 세상과의 조율 사이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며, 좌절이 올 때마다 부정적인 반응(울기, 거부하기, 침묵, 이상행동 등)으로 좌절감을 표현하고, 또 해소한다.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응하고 있는 것이니, 응원해 줄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는 둥 하며 이 상태를 '문제'로 바라본다. 지금은 문제로 삼고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니라, 아이가 느낀 좌절감에 공감해주고 이것을 스스로 잘 소화할 수 있도록 격려할 때이다.
상담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도 그러했다. 어른이 보기에는 '문제'가 있거나, 심각해 보이는 무언가는 아이들에겐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저 어른이 보기에 거슬릴 뿐이다. 한 사춘기 소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복지센터의 선생님)들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요.'
내가 교사에게서 느낀 것도 비슷했다.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때 생기는 좌절감을 어떻게 해소해야하는지 몰라 감정적으로 화내는 방법만 사용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한 적이 있는 그 아이는, 치료를 받기도 했고, 스스로 노력해서 이를 극복할만큼의 힘이 있는 아이였다. 같은 반에서 늘 혼자 지내는 남학생을 보면 옛날의 자기가 생각난다며, 그 친구에게 '네가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봐, 친구는 꼭 만들면 좋겠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할 정도로 멋진 내면의 힘을 가진 아이였다. 단, 친구를 사귀는 사회화가 조금 늦어져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의 방법을 다소 거칠게 사용했는데, 그 아이가 가진 힘에 집중하여 지지한다면 충분히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며 '적절한 소통법'으로서 자기가 쓰는 방식을 수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학교나 센터에서 아이를 보는 시선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아이'였다. 아이는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자기를 문제시하는 어른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마음을 닫는다.
반면, 어른 보기에 '좋은' 행동을 하면 괜찮은 아이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어른스럽고 얌전하다고 평가받는 아이이며, 특별한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이라는 것이 분명 있었다. 그건 타인 욕구에 대한 민감성이었다. 가장 맛있는 먹을 것을 양보할만큼, 상대방과 무난히 지내기 위해선 자신의 욕구를 뒤로 미룰 때도 있어야 함을 안다는 것은, 그 나이에 체화되기엔 빠른 특성이었다. 아이는 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말하고, 지레 눈치 보거나 겁먹지 않고 저질러 보는 아이다움을 더 경험하는 것이 필요했다. 어른 보기에 적절치 않을거라 본인이 예상하는 부정적인 말도 계속 해봐야 했고, 그렇게 솔직히 말했을 때 받아들여지는 경험 역시 해보아야 했다. 아빠와 사별한 엄마는, 아이가 아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고, 아이는 아빠를 그리워하는 것에 비해 아빠에 대한 이미지를 별로 크게 갖고 있지 못했다. 아빠 이야기를 할 때의 엄마의 반응에 민감하게 따라가다보니, '어른스러운' 아이가 된 셈이다. 엄마는 의도치 않게, 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선별'하여 내게끔 한 셈이다. 그것이 아이에게 정말 절실히 필요한 욕구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보기에 적절했기에, 문제되는 행동은 전혀 없었다.
아이가 괜찮고 아니고는, 어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결정하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 속에 어떤 상황이건 헤쳐나갈 '힘'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어른이 할 가장 최우선의 일이고, 이것이 있다고 판단되면 아이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힘이 없을 때가 진짜 문제다. 우는 것도, 떼 쓰는 것도, 친구를 때리는 것도 힘이다. 단지 방향이 살짝 틀어진 힘이다. 이 힘을 그 아이가 주변과 잘 어우러지도록 쓰게끔 돌려놓는 외부의 힘(어른이 진짜 사용해야 하는 힘, 통제나 훈육 말고)은 아이의 욕구에 대한 '공감'이다. 그 공감을 잘하기 위해서는 아이의 행동을 잘 관찰해야 한다. 자주 쓰는 말, 행동, 눈빛 등 모든 것이 관찰의 대상이다. 그래서 '놀이'를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에게 있어서 놀이는 자기의 욕구를 무대에 세워서 한 편의 극으로 만들어내는 예술이나 마찬가지다. 엄마가 놀아주는-이라며 교육교재로 놀아주고 가르쳐주는 것은 '같이 엄마와 뭔가를 한다'는 것 외에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뭔가를 습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라면 반쪽짜리 놀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색칠 놀이를 하더라도, 아이가 자기만의 색을 칠하는지, 원래 색을 보고 칠하는지, 엄마가 얼마나 개입하는지, 엄마가 한마디 하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혼자 하고 싶어하는지, 엄마랑 같이 하고 싶어하는지 등등이 모두가 욕구의 표현이고 주옥같은 정보이다. 글자 몇 개 가르쳐놓고 '좋은 엄마'가 된 것인양 뿌듯해하는 엄마들은 좀 더 아이의 욕구를 봐주면 좋겠다. 어른이 보는 아이와 아이가 보는 아이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얼마 안된 상담 케이스에서 뼈저리게 느껴서 감히 주장한다. 아이의 발달 단계에 맞춘 교구 선택이 중요한게 아니라,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된다면 비싼 교구도 뭣도 필요없고 나무토막, 솔방울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놀이를 할 수 있다. 엄마를 위한 놀이가 아니라 아이를 위한 놀이를 해야 한다.
아이의 마음은 어른의 마음과 같지 않다. 아직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의 마음은 아이의 마음과 본질적으로 같다. 이미 경험한 것이고, 본능적인 차원에서는 나한테 이로운 것은 기뻐하고, 내가 싫은 것은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지 어른은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고 복잡할 뿐이다. 그렇기에 아이의 마음은 어른이 이해할 수 있고, 가늠해볼 수도 있다. 어른 생각에 '이래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아이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옳은 것을 본능적으로 선택해서 하고 있다'고 믿으면 된다. 그 선택이 실질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 공감이라는 약을 써볼 수 있다. 아이는 어른과 달리 꽉 막혀 있지 않고 말랑말랑해서, 진심으로 다가가면 얼마든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 그 수용성과 순수함을 통해, 어른이 오히려 아이를 스승 삼아 배우게 되는 것이 생긴다.
아이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보석같은 존재이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지만, 특히나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아이가 있는 집에는 인생의 커다란 스승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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