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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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 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오직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앙드레 고르의 길지 않은 편지, <D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독일의 압제를 피해 열 여섯 살 때 스위스 로잔으로 떠났다. 거기서 대학을 나왔고, 스물 셋에 사르트르를 만나 실존주의에 입문한다. 그 다음 해, 아내가 될 도린(그녀가 바로 'D'다)을 만났고, 한 눈에 사랑에빠졌으며, 2 년 간의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한 해에 파리로 이주해, <파리 프레스> 등의 기자를 지냈고,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창간했다. 탐사 취재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다. 60년대 이후로는 신좌파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68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 생태주의를 선구적으로 주창한 최초의 이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생은 본인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청년기 이후 질곡이 별로 없는 유복한 생애로 읽히기도 한다. 기자로서 그는 높은 명성을 얻었고, 논문과 이론으로서도 출간하기까지 고생한 초기를 제외하면 그 후로는 수월하게 유럽의 주목을 받아왔다. 사르트르는 고르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으로 꼽기도 했다. 젊은 시절 떠돌기는 했어도, 충분히 빛난 삶이었다. 그는 2007년 9월 22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삶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더없이 아름다운 선택이었다. 예순 넘어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한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자, 모든 직책을 내던지고 자택에 칩거해 20여 년간 바로 곁에 있으면서 간호했다. 책 말미에는, 앙드레 고르가 그의 아내 도린을 한 손으로 꼭 껴안고 있는 말년의 사진이 실려 있다. 행복이라는 추상명사를 몸으로 표현하면 저런 것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푸근하고 따스한 장면이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길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2006년 3월 21일 ~ 6월 6일"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쓴 바 그대로, 그는 도린의 고통이 너무 심해지자,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80여쪽의 이 길지 않은 편지는 그가 병든 아내 옆에서, 그녀의 생과 자신의 생을 한데 합치고, 그녀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한데 합쳐서, 온전히 그 둘의 것이었던 삶을 그녀를 만났던 때부터 다시 돌아본 기록이다. 여든 넘어서도 변함없는, 아니 더 열렬해진 이 로맨티스트는 60여 년 동안 도린을 사랑하고서도 끝내 모자라, 그 사랑을 기념하고 연장하는 방식으로 함께 죽는 것을 택했다.
온 삶으로 쓴 연애편지인 이 책은, 읽는 내내 독자를 매혹하고, 무언의 숙제를 던지며, 다시 살아가겠다고 결심할 것을 추동한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약속이란 덧없는 것이며, 사랑이란 한 때의 감정이라는 세속의 일반론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속절없이 빨려들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공간은 갑자기 닥친 추위 때문이었는지 시끄러운 노인들이 몰려 들어와 시장 한복판처럼 웅성거리던 난장의 도서관이었는데 그 안에서 나는 마치 캡슐에 갇혀 우주를 유영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완벽하게 떨어져 있었다.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아주 명확한 행동으로 끝마치는 고르와 도린의 사랑이 책에서 너무나 생생하여 오히려 내가 속해 있는 욕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삶은 외롭고, 우리는 늘 엇갈린다.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믿어야만 한다는 누군가의 말도 있었지만 관계라는 녹록치 않는 그물에서 늘 혼자만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내게도, 앙드레 고르가 들었다는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결심이, 약속이, 대단원이 된 그 노래.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둘 사이에만 속한 삶도,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구나. 뒤늦게 읽었다. D에게 보낸 편지, 황홀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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