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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재 최선생 묘소

[네이버 지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7-8 http://me2.do/xUrkMq49 옥류동 최학자로 익히 들어왔던 분인데 뜻하지 않게 묘소를 발견?했습니다.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564340&cid=46649&categoryId=46649 左旋水인데 巽巳 生向이 나오니 禄存消水自生向 터입니다. 得水는 癸丑方이고 破口는 丙午가 됩니다. 앞에 南固山을 案山으로 삼았으나 한벽루 쪽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생기도 50여회로 약하지 않으나 안타깝게 자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坐向과 穴 모두 제자리가 아닙니다.(50X)
최학자를 봉향하기 위해 전국 유림의 성금으로 건축했다는 옥동사王洞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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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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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발총을 든 소녀
이 사진은 도대체 누구인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아마 알고 계실 텐데 당시 11월 초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촬영한 반소련 저항군 일원 중 하나이다. 이름은 Szeles Erika Kornélia, 셀레시 에리커 코르넬리어(참조 1)이다. (헝가리어는 성씨가 앞에 오는 거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어디에 실렸는가? 덴마크의 오래된 주간지, Billed Bladet의 1956년 11월 13일자로 나와 있었다고 한다. 촬영자는 Vagn Hansen. 문제가 있다. 잡지가 나온 11월 13일은 이미 셀레시 에리커가 목 뒤로 총을 맞아 사망한 이후였다(참조 2). 일단 셀레시 얘기부터 해 보자. 그녀는 1941년생이고 유태계 가족에서 태어났었다. 그래서 잠시 세이브더칠드런 덴마크 지부로 보내서 살려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덴마크어를 좀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연히(?)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사망했고 어머니가 무남독녀로 홀로 키워낸다. 당시 사정에 맞게 크고 나서는 고등학교까지 진학하지는 않고 조리학교에 들어간 다음, 한 호텔에 보조 요리사가 된다. 그당시 서너살 위의 한 오빠와 사귀면서 사상전향(?)이 일어난다. 유태계 집안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상당한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딸인 에리커는 급격한 반공주의로 바뀐다. 그래서 당시 소련의 억압에 대해 반항했고 급기야는 반항군에도 들어간 것. 어차피 헝가리군을 당시 소련이 해체시켰기에 반항군은 군 출신도 많았다. 이때가 10대 중반, 헝가리 혁명의 시기인 1956년이다. 다르게 보면 스탈린 사망 이후, 헝가리가 간이 커졌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아직 너무나 어린 나이인 15세여서 반항군 내에서는 에리커가 전투병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나 하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간호 보조로 역할을 바꾼다. 바로 그당시 Vagn Hansen을 포함한 덴마크 저널리스트들이 멋대로(외교관 차량을 위조(!)해서 들어갔다, 참조 3) 헝가리에 들어갔었고, 아직 편제가 바뀌기 직전의 에리커를 촬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리커는 수 일 후, 적십자 마크를 달고 쓰러진 반항군을 구하러 다니다가 소련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11월 7일이었다. -------------- 1956년 당시 에리커의 사진이 나온 잡지를 본 Henning Schultz는 이 소녀에 대한 동경과 사랑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도대체 이 따발총을 들고 다부진 표정을 한 소녀는 누구일까? 문제는 잡지 사진에 이름만 덩그러니 있다는 점이었다(참조 4). 과연 그 때 살아있기는 했을까? (답: 사망했다.) 에리커 사진에 대한 집념을 갖고 있던 그는 지리학자로서 은퇴한 이후인 2000년대 후반부터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그 잡지를 여러 권 갖고 있던 그에게 있어 그녀는 일종의, 헝가리 혁명의 상징(참조 4)이었다. 슐츠는 헝가리 언론사와 정부, 박물관 등 여러 군데에 의뢰를 했고 그제서야 초등학교 동창, 포크댄스 그룹의 일원 등등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때에서야 자세한 신원을 알 수 있었다(참조 5). 2008년, 슐츠의 도움을 통해 사진 촬영가였던 Vagn Hansen은 공식적으로 이 사진을 포함한 헝가리 혁명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헝가리 역사 박물관 측에 기증한다(참조 6).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헝가리 혁명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 참조 1. 한국에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는 하다. 자유를 향한 '혁명의 순간' 사진으로 남았다(2016년 11월 7일): http://naver.me/FcUMXfsQ 2. The heroes of 1956: The girl, who was already dead when her photo went around the world (2016년 10월 17일): https://dailynewshungary.com/heroes-1956-girl-already-dead-photo-went-around-world/ 3. »Pressefotograf var det værste. Jeg ville være fin portrætfotograf på femte sal”(2005년 5월 25일): https://journalisten.dk/pressefotograf-var-det-vaerste-jeg-ville-vaere-fin-portraetfotograf-pa-femte-sal/ 4. "Vörös hajú, szeplős, zsidó származású kislány volt" - Rábukkantunk a forradalom titokzatos jelképére!(2008년 11월 2일): https://mazsihisz.hu/hirek-a-zsido-vilagbol/archiv/voros-haju-szeplos-zsido-szarmazasu-kislany-volt-rabukkantunk-a-forradalom-titokzatos-jelkepere 5. https://hu.wikipedia.org/wiki/Szeles_Erika_Korn%C3%A9lia 6. AJÁNDÉK DÁNIÁBÓL(2008년 3월호): http://fotomuveszet.net/korabbi_szamok/200803/ajandek_daniabol
시크푸치의 모닝레터_1204. 국민과 국가의 주권 회복 역사
어제 박근혜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민심은 사법부에서 청와대 앞 백미터 까지 집회를 허용함에 따라 효자치안센터 앞에 세워진 경찰차벽에 꽃스티커를 부착해 평화집회의 기조를 유지하는 한편, 세월호 참사일인 4월 16일과 같은 416개의 횃불이 서울 광화문 광장을 환히 밝혔습니다. 특히, 어제의 6차 촛불집회는 다섯가지의 변화된 양상을 보였는데요 첫째, 정적인 촛불에서 역동적인 횃불로 바뀌었고 둘째, 시위 규모는 서울 170만명에 이르고 부산, 대구와 춘천 등 지방에서 사상 최대규모로 60만명이 거리에 나와 230만명에 달했고, 셋째 청와대 코앞 100m 앞까지 진출해 늦은 저녁까지 촛불을 밝혔지요. 넷째, 대통령 탄핵안 합의도출에 실패한 정치권의 배반에 분노한 국민들은 '박근핵닷컴'이라는 국민청원 사이트에서 지역구 소속 국회위원에게 약 60만건에 이르는 대통령 탄핵 청원을 보내며 의회에 경고했고, 마지막으로 촛불은 광화문에서 의회와 정당의 본거지인 여의도로 향해 새누리당 해체를 요구했습니다.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규탄을 했고, 최근 참화를 당한 서문시장을 불쑥 방문한 대통령의 행보에 분노한 대구 시민들도 최대규모로 운집해 새누리당사 현판에 시민환관당이라는 현수막을 내걸며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최근 대통령 담화문에서도 자진 하야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고 집권당 정치인들과 함께 거짓말만 반복하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국민들의 주권 회복을 위한 함성은 이토록 성난 민심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는 것 같네요. 현대사에서 1960년 이승만 정권을 쫓아낸 4.19, 87년 노태우 정권에게 6.29 항복 선언을 받아낸 6.10, 79년 부마항쟁과 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 민주주의의 위기 때마다 국민이 국격을 실추한 국가를 지켜왔지요. 근대사에서도 외세에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권 회복의 역사는 조선 왕조로부터 이어져왔는데요. 지난 3일 재방송으로 보게된 KBS 1TV의 신개념 문화재 경연 2부작 파일럿 ‘천상의 컬렉션’에서는 배우 안내상이 영화 <덕혜옹주>에서 친일파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그려졌던 고종 황제의 비밀 어새를 선보이면서 제국익문사라는 비밀 결사조직을 결성해 국새보다 1/4 작게 제작된 비밀 어새를 통해 국가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문화재 배틀쇼로 일컫는 이번 프로그램은 세 명의 문화재 호스트가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한 수많은 보물 중 하나를 소개하고, 현장평가단 100명이 투표를 통해 그 중 최고를 가리는 경연 프로그램인데요, 안내상의 ‘고종 황제 어새’와 함께 영화감독 장진은 비운의 왕자 안평대군의 꿈이 담긴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톱모델 이현이는 경주 계림로에서 발견된 아랍 양식의 '황금 보검'을 선보이며 경연을 펼쳤지요. 고종황제는 제국주의와 친일파의 감시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외교 행동으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과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도와달라는 간절한 호소를 담은 편지를 세계 각국의 지도자에게 보냈고 가장 마지막 칙서는 국내에 파송된 선교사 헐버트에게까지 총 17통의 편지가 보내졌다고 해요. 특히, 장진 감독이 소개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400년전 문화재가 약탈된 것으로 추정되며 1955년부터 일본 덴리대학이 소장해왔지만 이젠 더이상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여 문화재 환수, 즉 문화 주권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에 마음이 울컥해졌습니다. 해외에 유출된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찾아오는 문화 주권 프로젝트는 MBC에서 방송했던 예능프로그램 '!느낌표'에서 '위대한 유산 74434' 코너로 방송된 바 있었죠. 2001년부터 2007년 11월 가을 개편에서 두 자릿 시청률로 폐지될 때까지 해외의 7만점이 넘는 우리 문화재들을 소개하고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독도 침탈 등 역사 왜곡의 현주소를 전하고 그 가운데 국민의 성금을 모아 일본에 보관돼 있던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를 환수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토록 반대했던 국정화된 역사교과서가 친일파와 박정희정권을 미화하고 진취적인 고대 역사를 축소하는 등 편향적인 내용으로 만들어졌다고 공개돼 촛불시위에서는 국정교과서 폐기도 촉구하고 있는데요, 방송에서 소개된 고종황제의 이러한 독립운동 역사가 기록된다면 고종을 더 이상 무기력한 설움많은 망국의 군주로만 기억되진 않을 것 같았어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등 지금 이시간에도 역사는 새로 쓰여지고 있지만 한 편에서는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죠. 이제부터라도 우리 스스로가 주권회복의 역사를 기억하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을 자각하며 더 나아가 역사와 문화 주권도 회복해야할 것 같아요. 국민과 국가가 하나되는 그날을 기원하며.. From Morningman.
[펌] 공무원들을 쥐어짜냈던 중국의 흙수저 출신 황제
출생, 1328년 원나라 말기 심한 기근에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는 막장 상태의  사회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이름 중팔. 소작농인 부모와  농사일, 목동일을 하면서 지독한 가난을 겪음 유년기,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상태에서 천연두까지 걸렸으나 이겨내고 살아남.  얼굴이 곰보로 모두 얽어버림. 10대 초반, 지주의 소를 치던 중 너무 배가 고파 친구들과 송아지 한마리를 잡아먹음.  자신이 대표로 몽둥이로 개맞듯이 맞음. 17세, 심한 가뭄과 전염병으로 부모, 형 전원 사망. 마지막까지 막내 중팔과 함께  살아남았던 중팔의 형은 13알의 마지막 볍씨로 풀죽을 쑤어 중팔에게 주었고  형 자신은 배를 곪다가 사망. 재산이 없어 부모와 형의 묘를 세울 땅도 없었고 유계조라는 사람에게 땅을 빌어  귀퉁이의 땅을 얻음. 찢어진 옷 몇벌을 겨우 구해 시신을 덮고  손수 부모와 형의 시신을 매장하고 장례를 치룸. 17세 이후, 절에 가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머리를 밀고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감. 절에서 마당을 쓸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고 죽을 얻어먹음. 그곳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고 서적을 읽음. 절이 어려워지자, 탁발승(당시에는 거렁뱅이 취급)을 하며 전국을 4년동안 떠돌아다님.  민심이 흉흉하던 때라 바가지로 물을 맞거나 침을 맞는 수모를 당하기도 함. 24세, 곽자흥의 홍건군 휘하에 말단 병졸로 들어가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 2인자의 자리까지 오름. 처음 홍건군에 투신하였을 때, 외모 때문에(...) 첩자로 의심받아 포박 당하여 끌려갔으나  곽자흥이 그의 담력과 총명함을 알아보고 천거함.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당시 기준으로 늦은 나이에 결혼. 27세, 곽자흥이 죽자 곽자흥이 이끌던 홍건군 군단의 지도자로 추대됨 28세, 남경 점령. 남부의 대 군벌 중 하나로 부상 35세, 최대의 라이벌 진우량을 파양호 대전에서 격파. 36세, 진우량의 세력을 모두 흡수하고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오름. 39세, 또 다른 군벌 장사성을 격파하고 남부 패권 장악 40세, 25만의 대군으로 북벌 단행, 원나라 잔존 세력과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고  베이징 (대도) 점령.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몰아내고 명(明) 건국. 그 이름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 중국 역사상 평민으로부터 시작해서 황제가 된 인물들은 있지만, 대부분 젊은시절에도 세력을 키울만한 기본적인 밑천은 가지고 있었다.  평민에서 황제가 되었다는 한 고조 유방조차도 말단이나마 관직이 있었고,  장인이 지역 유지였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징기스칸과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 고생을 겪었지만 유목세계에서 귀한 혈통을 이었으며 둘 다 부족장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가난한 천민에 가까운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홍건적에 투신하기 전까지는 세력도 배경도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가 된 이후, 부모의 묘자리를 내어준 유계조에게 엄청난 포상을 내렸으며 절에서 있던 시절, 가장 힘들었던 일이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에 있는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편하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게 만들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출신 성분과 이후의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 공신들을 쥐 잡듯이 족쳤기 때문이다.  백성들에겐 명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한 엄청난 워커홀릭으로 유명했다. 그 자신부터 관리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신념을 유지했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그 자신조차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소화했다.  태어날 때부터 황실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란 그 아들들이나 손자부터는  생전 주원장의 그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보조하는 신하를 두기 시작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승상제도처럼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주원장은 죽을 때까지 승상을 두지 않고 본인이 업무를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얼마나 업무를 처리하는지 계산을 해봤는데  8일 동안 3,391건의 문서를 처리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처리한 것이 400건이 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라서 누가 글자는 1만 5천자나 되는데 내용은 쥐뿔도 없고 쓸데없는 문서를 올렸다. 주원장은 노발대발하며 그를 숙청해버렸다. 건국군주임에도 후비를 많이 들이지 않은 군주로도 유명한 주원장은,  당시 황후와의 의리를 지킨 점 때문에도 당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주원장은 자신이 쥐뿔도 없던 시절부터 뒷바라지를 해 주던 마 황후가 사망하자  그녀의 죽음을 매우 비통해 하였으며, 약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마 황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 후비를 들이지도 않았으며 일에 몰두했다. 숙청과 후계 구도 실책으로 후대 신하들에게도 엄청나게 부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대 백성들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받던 황제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밀병기가 된 원시 OMR카드
18세기 말 미국 당시 미국은 급격히 늘어나는 사람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나라에 몇 명이 살고 있는지 조사해야 하는데 엄청난 이민 열풍으로 온 세상의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니까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미국 인구 조사국의 반응은 매우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조사 방법은 집마다 찾아가서 펜이랑 종이를 들고 머리 수를 센 다음 전국의 종이를 모아 합계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1년에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주를 하는 판국에  인구조사를 하더라도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결과는 부정확해지고 만들면 또 새로 만들어야 되는 매우 비효울적인 일이었다. 인구조사국은 자기들이 직접 수를 세는 대신 공모전을 열어서 제일 빠르게 인구를 조사하는 사람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기로 결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공모전을 유심히 보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통계학자이자 발명가였던 허만 홀러리스였다. 홀러리스는 일정한 크기의 종이에 조사할 항목인 나이나 성별을 적고 규칙적으로 구멍을 뚫어서 이 구멍의 위치로 정보를 확인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것이 바로 천공카드 시스템이었다. 순식간에 수 많은 정보가 처리되는 천공카드 시스템을 바탕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자 이전까진 작성 하는 데만 7년이 걸린다는 인구조사는 단 6주만에 끝나게 됐다. 신세계를 경험한 인구 조사국은 홀러리스에게 만장일치로 상금을 수여했고 홀러리스는 상금을 바탕으로 이 천공카드를 읽는 기계에 특허를 내고 1896년에 회사를 차려 천공카드를 관공서에 팔며 아주 막대한 돈을 벌게 됐다. 그리고 이 회사는 합병과 인수를 거쳐 이후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국제 사무기기 회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바로 'IBM'으로 말이다. IBM이 천공카드 사업을 전세계로 확장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던 순간 이것을 매우 유심히 보던 한 인물이 있었다.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당시 히틀러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기 전 독일의 지도부는 홀러리스의 천공 카드시스템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단지 간단하게 숫자를 세는 기계가 아니라 특정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곧 이것을 자신들의 엄청나고도 무시무시한 계획에 사용하기로 한다. 1939년 인구조사를 위탁받은 IBM의 독일 지사인 데호마그는 무려 75만명에 달하는 인구조사원들을 고용한 후 독일 전역에 퍼져 매우 특정한 사람들의 데이터 목록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이 모은 것은 바로 집시 유색인종 공산주의자 그리고 유태인의 목록이었다. 이 목록들은 1942년 독일이 실시했던 인종청소의 살생부 역활을 톡톡히 해내게 됐고 그들이 점령한 지역 어느 곳 에서나 이 천공카드가 사용됐다. 학대와 처형방법의 규정은 총 16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됐고 천공카드로 인해 결과적으로 약 20만명의 달하는 사람들이 말 그대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어두운 과거를 뒤로한 채 이후 IBM은 기존의 천공카드 식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OMR 시스템을 개발하게 되어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 이 편리한 천공카드는 어떤 사람이 어떤 목적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희대의 발명이 되었고 희대의 학살도구가 되기도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수 없다. [출처 - 개드립]
[펌] 찰떡같이 말해줘도 개떡처럼 알아듣는 대일본제국
성형작약탄이라는 신통한 물건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지루하니까 생략하고 폭발력을 사방으로 분출시키는게 아니라 한점으로 모아서 엄청난 관통력을 얻은 탄이라고 생각하면 됨 독일군이 발견하고 독일군이 제일 쏠쏠하게 써먹었다 가끔 2차머전 영화에 보면 뜬금없이 나치들이 존나 큰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보이는데 이게 성형작약탄임. 이렇게 멀리서 발사하는 형태도 있었지만 좀 더 구식인 형태로는 그냥 땡크 옆구리에 철썩 붙여서 터뜨리는 흡착지뢰도 있었다. 자석이 들어있어서 전차 옆구리에 갖다 붙이면 알아서 찰싹 붙는다. 이 상태에서 터뜨리면 아무리 두꺼운 양키나 쏘련 전차라도 구멍이 뚫리는 물건이다. 물론 개 위험하다. 전차말고 이거 들고 있는 불쌍한 나치 가 미친듯이 굴러다니는 탱크에 이거 붙이려고 개다리스텝으로 뛰어당기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드물다. 뭐 그래도 독일은 이거라도 있어서 제법 괜찮게 버틴 편임. 태평양에서 미국 땅크들에게 고통받는 일본은 상황이 훨씬 안 좋았다. 일본 친구들로 말할 거 같으면 미국 땅크는 지옥에서 올라온 디아블로 같은 존재였음. 땅크가 뒤지질 않아 일본은 양키 땅크를 잡으려고 폭탄 껴안고 궤도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관측창에다 총검을 쑤셔넣으려고 시도하고 심지어는 청산가리 유리병을 해치에 넣어서 안에 있는 양키를 독살하려고도 시도했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얘네는 왜 탱크도 근딜로 잡으려고 지랄할까. 물론 기술력이 똥이라 그렇다.  이 꼴을 보다 못한 독일군이 저 모자란 놈들이 그래도 하나 밖에 없는 친구니까 도와주겠다며 흡착지뢰의 설계도를 보내준다 성형작약탄에 자석 붙이고 땅기면 되니 설마 아무리 멍청이들이라도 이걸 못 만들진 않겠지 싶었을 것이다 물론 못 만듬 2차머전 최대미개국 대일본제국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은 아닌가? 어케어케해서 성형작약탄 부분까진 만들었는데 자석을 못 만들었다. 보통 폭탄보다 자석이 더 만들기 쉬울 거 같지만 아무튼 그런 고로 폭탄을 들고 있어봐야 땅크한테 붙일 수가 없었음.  그래서 일본은 포기...하지는 않고 참으로 일본스러운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자석의 용도가 터질 때까지 땅크에 달라붙어 있는 용도가 전부라면 그걸 굳이 자석으로 할 필요가 없잖엉 인간한테 들고 꼬라박으라고하면 되지 그리하여 성형작약탄을 죽창 끝에다 달아서 탱크한테 찔러넣는 대전차죽창 자돌폭뢰가 개발된다. 사용법은 존나게 간단했는데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하고 지나가는 탱크에 달려들어 꼬라박으면 된다. 성형작약탄이라 관통력은 개확실하니 전차는 확실히 죽고 이거 들고 있는 새끼는 더 확실하게 야스쿠니로 즉시사출된다. 정말 일본스런 병기다. 뭐 여기까진 자돌폭뢰가 존나 유명하기도 하고 나무위키에만도 쳐봐도 나오는 내용이다. 근데 잘 안 알려진, 존나 스케일이 큰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자돌폭뢰가 가끔 가다 로또샷 터져서 무적으로 보였던 양키 탱크를 잡는 모습을 보자 눈이 돌아간 윗대가리들이 어마어마한 계획을 내놨다. 탱크도 잡는데 항공모함이라고 못 잡겠냐? 이 미친 놈들이 존나 큰 성형작약탄을 만들어서 항모에 꼬라박기로 한 것이다. 다들 알겠지만 일본은 열심히 카미카제로 양키 항공모함에 꼬라박고 있었지만 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효과는 별로 없었다. 온몸을 떡장으로 두른 항공모함에 쥐톨만한 비행기로 꼬라박아봤자 항공모함이 입는 피해는 페인트칠을 다시해야 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음 왜냐면 비행기는 가볍고 가벼운 놈이 전속력으로 꼬라박아봐야 관통력엔 한계가 있으니까 근데 나치들이 보내준 신통방통한 관통력을 자랑하는 성형작약탄을 보고 이거라면 항모에 빵꾸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병신들의 폭주가 시작된 것이다 근데 육지에서라면야 불쌍한 일본인 하나 골라서 성형작약탄 들고 꼬라박으라고 할 수 있지만 바다에서는 어떻게 할 거 같음 당연히 카미카제죠 시바 보통 비행기도 아니고 존나 큰 폭격기를 통째로 개조해서 비행기 자체를 성형작약탄으로 만들어버렸다. 저기 등짝에 동그랗게 튀어나온 부분 보이냐? 저게 통째로 성형작약탄임. 이게 자랑스런 대일본제국의 일격필살항모격침병기 '벗꽃탄'이었다 물론 무인비행기는 당연히 아니다. 안에는 이 존나 큰 빅-성형작약탄을 항공모함까지 배달하는 불쌍한 파일럿이 들어있다. 이 새끼들 자폭 집착은 진짜 답이 없다. 이거 몇 대만 있으면 양키 함대는 모조리 용궁행 게이바로 보낼 수 있다며 득의양양하기 시작한 일본이었지만 이따위 곱추 비행기로 항모를 격침시킬 수 있는게 말이되냐며 상식적인 딴지를 건 사람도 있었음. 그래서 이 굉장하신 자폭무기가 항모를 한 방에 격침할 수 있다면서 쇼를 보여주기로 한다. 물론 실험목적이니까 미군이 아니라 지들 물건을 상대로 쇼를 해야 했음. 그래서 이 븅신들은 안 그래도 배 부족해서 난리인 주제에 항모 한 척을 통째로 벚꽃탄 실험용도로 날려버린다. 진짜로.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자폭무기 실험한답시고 지들 항모를 날려버렸다고. 뭐 일단 저렇게 존나 크게 만든 폭탄을 꼬라박았으니 일단 침몰하긴 했고, 일본 친구들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이 물건의 양산에 들어갔음. 그리하여 1945년, 항복이 임박한 일본인들의 절박한 기원을 담아 제작된 벚꽃탄들이 일제히 양키 항공모함을 목표로 날아오름 그리고 전부 가던 도중에 추락해서 행방불명됨 이 새끼 생긴 꼬라지 봐라 등짝에 저런 종양을 달고 멀쩡히 비행할 수 있겠냐 결국 항모 한 척을 꽁으로 날려먹고 수십대의 폭격기를 자폭무기로 개장해서 얻은 전과는 0였다 참으로 일본스런 결과였다. 찰떡같은 기술력을 전해줘도 개떡같이 알아먹는 놈들한텐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나 웃긴 반전이 있는데 이거 일본 육군에서 개발한 무기다. 해군이 아니라.  [출처 - 소녀전선2 마이너갤러리 고질라맛스키틀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