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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역사를 왜 배우는 지 가르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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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발전과 진보를 해야할 판에 이 무슨 행보인지 .. 대한민국이 걸어가는 길은 어디가 끝인지요??
10살 아이의 시각으로 역사의 이해를 돕고자 한 글에 저급이란 표현이 더 불편하네요. 저도 어릴적 불량식품 섭취 해봤는데 그렇다면 불량식품 섭취자도 저급한 사람이 되는 거냐 따지는 것과 같은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듭니다.
국정화 안했으면 좋겠다 정말 진심으로
나라가왜이모양이냐
그런 과자...제대로된 과자를 아이들에게 먹으라고 줘야하지 않나요?...싸구려나 불랑과자라면 자기자식에게 사서 먹일 수 있나요? 비유가 좀 저급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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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쓴 문지원 작가가 18살 때 고등학교를 자퇴하면서 썼던 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쓴 문지원 작가가 18살 때 고등학교를 자퇴하면서 <당대비평>에 썼던 글. 지금 - 학교는 반드시 붕괴되어야 한다. 자퇴한지 넉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영등포에 있는 하자센터(서울특별시립 청소년 직업체험센터) 영상 디자인 작업장에서 공부하고 있다. 하자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배우는 동안 내가 얻은 것은 '세상을 낯설게 볼 줄 아는 힘'과 '혐오할 것을 혐오할 줄 아는 예민함', 그리고 '나의 언어'이다. 십 년이 넘는 학교생활 동안 내 몸은 온통 싫다고, 여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나의 교육 받은 이성은 그걸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했다. 언론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대고 있는 제도교육의 모순에 관한 이야기는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 죽은 말이다.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의 입에서 학교의 역겨움과 남성주의와 안이함과 무지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올 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언론과 학교에 의해 세뇌된 죽은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의 가슴으로 느끼고 찾아낸 자신만의 언어일 때 학교는 쓸모 있는 배움의 공간으로 남을 수 있다. 이제, 힘겹게 찾은 내 언어로 말한다 - "학교는 늙은 아버지 같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늙은 아버지들이 당대비평을 내던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나는 왜 아버지를 비판할 수 없나? 나는 왜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하나? 나는 왜 아직도 아버지의 인생경험에 근거한 삶을 살아야만 하나? 아버지와 다른 꿈을 꾼다는 이유로,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해와 동의를 빌어야만 하며, 그 모든 짐을 혼자 져야만 하나? 아버지는 세상을 잘 알아서? 아버지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서?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 쌓인 권위의 무게와 전통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그 내용이야 어떠했든 나는 존경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내가 학교에 안 가려고 발버둥쳤던 건 거창한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학교가 너무너무 싫고 내가 더 이상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다만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로 하여금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그것은 바로 학교의 권위다. 그것도 현실을 편견 없이 볼 줄 아는 능력 따윈 잊어버린, 다양한 생각과 언어를 길러내는 힘 같은 건 알지도 못하는, 무능하고 늙은 권위다. 그리고 아직도 학교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은 권위의 족쇄에 온 몸과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힌 채 괴로워하고 있다. 또는 착각하고 있다. 이제, '나'들의 언어를 찾기 위해 말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몸으로 삶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나'들의 이야기를 인정해야 한다. '나'들이 숨쉴 수 없는 사회, '나'들이 깨달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는 사회, '우리'가 아닌 '당신'이 지배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학교라면, 학교는 반드시 붕괴되어야 한다. 전문은 여기에서 와 18살에 이런 생각을 글로 . . *_* 우영우 속 방구뽕이 자캐였다니 !
뭉크, ‘절규’에 적힌 메시지의 미스터리가 풀렸다.
[아이디어 래빗]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가 제작한 대표작 ‘절규(THe Scream)’를 둘러싼 의문의 메시지 미스터리가 풀렸다. 작품 ‘절규’에는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Can Only have been painted by a madman)’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어 미술계에는 다양한 추측이 제기되어 왔다. 미술학자 일부는 뭉크에게 악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작품을 훼손하고 뭉크를 비하하기 위해 이 같은 메시지를 적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연필로 쓴 메시지는 사실 뭉크 본인이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의 연구를 담당한 큐레이터 ‘마이 브리트 굴렝’은 “글자 하나, 단어 하나까지 매우 신중하게 분석했다. 이것은 뭉크의 필체와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라며 “의심할 여지 없이 뭉크가 쓴 것이 맞다. 만약 작품을 훼손하기 위한 의도였다면 뭉장을 더 크고 선명하게 표현했을 것이다”고 전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Can Only have been painted by a madman) 해당 글귀는 1895년에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이 완성된 1893년부터 2년이 지난 후인데, 당시 오슬로대 학생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는 뭉크가 비정상적이고 미친 남자라는 주장이 등장했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당시 미술계에서는 뭉크의 정신 상태가 의심이 된다는 이야기가 다수 등장했었다. 작품 ‘절규’가 그의 상태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뭉크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지자 해당 문장을 작품에 추가한 것으로 예상된다. 연구를 담당한 ‘마이 브리트 굴렝’은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라는 문장은 자신이 정신병자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격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 섞여 있다”라며 “이 문장을 쓰면서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지를 스스로 통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글: Idea Rabbit News Editor]
화학전의 아버지이자 인류의 구원자
역사상 최초의 가스 공격은 벨기에의 소도시 이프르 근처에서 이뤄졌다. 1915년 4월 22일 목요일 아침, 잠에서 깬 프랑스 병사들은 거대한 초록빛 구름이 무인지대를 건너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구름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나뭇잎은 시들었고, 새는 하늘에서 떨어져 죽었다. 파인애플과 표백제 같은 냄새가 병사들의 목구멍을 채웠을 때 폐에서는 가스가 점액과 반응하여 염산을 발생시켰다. 그날 염소 가스 6000통을 개봉한 독일 병사 중 한 명인 빌리 지베르트는 이렇게 썼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모든 야포, 모든 기관총, 모든 소총이 불을 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가스를 멈출 순 없었다. 바람이 가스를 프랑스 전선 쪽으로 계속 밀어갔다. 그러다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해졌다. 얼마 뒤 시야가 걷혔고 우리는 빈 가스통을 지나쳐 걸어갔다. 우리가 본 것은 총체적 죽음이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짐승도 굴에서 나와 죽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모든 나라는 가스 공격 금지 조치를 받아들였다. 강제 수용소에서 가스를 쓰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던 히틀러조차 전장에서의 사용은 거부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보병으로 참호에 배치되어 그 효과와 죽음의 고통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 스스로도 약하게나마 피해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프로 공격을 감독한 인물은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였다. 그는 이 임무의 성공으로 전쟁부 화학 부서의 책임자로 승진했으며 빌헬름 2세와 만찬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아내의 분노였다. 독일 여성 최초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클라라 이머바르는 실험실에서 가스가 동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았을 뿐 아니라, 현장 시험 중에 바람 방향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하마터면 남편을 잃을 뻔했다. 하버는 목숨을 건졌지만 학생 하나는 독성 구름을 피하지 못했다. 그 학생이 땅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며 죽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버가 이프르 학살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클라라는 하버가 인간을 대규모로 몰살할 수단을 고안하여 과학을 왜곡했다고 비난했다. 하버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이틀간의 휴가 기간에 친구들을 홈 파티에 초대했다. 새벽까지 계속된 파티가 끝나갈 무렵 그녀는 남편에게 지급된 리볼버로 자살했다. 이튿날 프리츠 하버는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한 채로 동부 전선의 가스 공격을 감독하러 떠나야 했다. 그는 전쟁 기간 내내 아내의 혼령에 시달렸다. “며칠에 한 번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 나가있는 게 도움이 된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매 순간이니까. 하지만 기진맥진하여 본부에 돌아와 있을 땐, 명령서와 전보 사이로 그녀의 머리가 나타난다." 1918년 휴전 이후, 연합군은 프리츠 하버를 전쟁 범죄자로 규정했다. 그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에 자리잡았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의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907년, 하버는 식물 생장에 필요한 주요 영양소인 질소를 사상 최초로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 하버가 실험실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독일의 화학 대기업의 수석 공학자 카를 보슈는 수백톤의 질소를 생산할 수 있는 산업 공정으로 발전시켰다. 하버-보슈 공정은 당시 언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기에서 빵을 끄집어낸",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이다. 하버의 연구가 없었다면 천연 비료에 의존하여 농사짓던 수억 명이  비료 부족 사태에 맞닥뜨려 영양 결핍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가용 질소의 양이 두 배로 증가하자, 16억 명이던 전세계 인구는 100년도 되지 않아 70억 명으로 늘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하버가 발명한 질소 비료로 재배된 작물을 먹고 산다. (물론 하버의 원래 목표는 굶주린 대중을 먹이는 것이 아니었다.  1차 대전에서 영국 해군에 의해 칠레산 질산염의 운송이 차단되더라도 폭약을 제조할 수 있도록 원재료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에펨코리아 Nalchi님 펌
최고의 협상가는 자기 내면과 먼저 협상한 평온한 사람이다.
1981년 로저 피셔와 윌리엄 유리가 집필한<Getting to Yes>는 지금까지 무려 1300만 부가(영어판 기준) 판매되었고 전 세계 34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협상의 바이블로 칭하기에부족함이 없는 도서다. 하버드대학교 협상 프로젝트 설립자인 윌리엄 유리는 이 책을 출판하고 지난 40년간 전 세계 비즈니스 현장과 최악의 분쟁지역을 누비며 협상 전문가로 치열한 활약을 펼쳤다.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전 세계의 여러 이슈에 전문가와 의견을 나누는 유명 팟캐스트 ‘글로벌 임팩트 쇼(Global Impact Show)’에 출연해 ‘두 국가 간 협상’에 대해 협상전문가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청취자들은 “윌리엄 유리는 언제나 평화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데 영감을 주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윌리엄 유리는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원하는 것을 얻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상대방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협상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자극에 반사적, 감정적으로 반응하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기질, 바로 그것이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임을 알게 되었다. 비즈니스 현장, 가족 간 다툼, 국가 간 분쟁 등 다양하고 수많은 사례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협상 상대방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려는 3A(공격Attack, 회피Avoid, 수용Accomodate)함정에 빠짐으로써 스스로 협상에서 패배하거나 양쪽 다 지는 결과를 수도 없이 봐왔다고 얘기한다. 따라서 협상에 임할 때, 자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어떻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 나 자신으로부터 먼저 ‘예스’를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간의 경험을 정리해서 <Getting to YES with Yourself> (한국어판 제목은 <윌리엄 유리 하버드 협상법>)를 출간했다.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예스를 이끌어 내는 협상법을 정리했고 이것이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내가 깨달은 부족한 그 무엇은 바로, 가장 우선시 되고 중요한 '나 자신과의 협상'이었다.  나 자신으로부터 예스를 이끌어내는 것이 곧 다른 이들에게서 예스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번 책을 전작 <Getting to Yes>에서 채우지 못한 절반의 부족한 부분이라 생각하며 집필했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지만 , 과거의 나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40년 만의 후속작은 <타임>지가 선정한 최고의 협상책 중 한 권으로 선정되었고 윌리엄 유리는 이 책에서 직접 겪은 풍부한 협상 경험을 다양하게 풀어놓는다. 하버드에서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인간과 인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툼과 분쟁을 오랫동안 연구하며 자신으로부터 예스를 이끌어내는 협상법 6단계를 완성했다. 윌리엄 유리는 자신으로부터 예스 이끌어내기가 쉬워 보여도 자기 자신에 귀 기울이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갈등 상황에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각각의 단계는 운동선수가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는 이치와 같아서 더 많이 단련할수록 강해지며 결국 자신이 바라는 목표를 이루게 해준다.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예스는 여섯단계를 거쳐 하나의 내면의 예스가 되어 타인으로부터 손쉽게 예스를 이끌어낼수 있게 된다.  윌리엄 유리가 말하는 협상은 내가 이기고 상대방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상대방이 이겨서 결국은 모두 이기게 되는 윈윈윈 이다. 이것은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협상을 떠올리면 파격적인 반전이다.  협상은 원래 상대방과 하는 것이기에 지금까지 모든 협상책에서 얘기한 핵심 포인트는 상대방이었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의 저자 스튜어트다이아몬드 교수는 다음과 같이 협상을 정의했다. "진정한 협상이란 ‘상대의 감정이 어떤지 헤아리고 기분을 맞춰가면서 호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뒤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얘기한 내용과 전 세계를 누비며 풍부한 현장경험을 쌓은 협상전문가의 관점은 그 시작부터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내 친구인 제리 화이트는 예루살렘에서 유학하던 중에 골란 고원으로 캠핑을 갔다가 중동전쟁때 묻혔던 지뢰를 밟았다. 그는 두 다리를 잃었고 생명까지 위태로웠다. 그가 여러 달 병원 침대에 누워 회한과 분노, 씁쓸함 그리고 자기 연민 같은 복잡한 심정으로 뒤엉켜 있을 무렵, 옆 침상에 있던 군인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제리, 이 일은 자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 아니면 최고의 일이네, 자네가 결정하게!" 제리는 그 군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이 겪은 불행이 타인 탓만 하는 희생양의 역할로 전락하지 않도록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리는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고 주변 상황을 변화시켰다. "난 불운으로 인해 인생을 망쳐버린 냉소적이고 징징대는 제리라는 내 이미지가 싫었어." 그는 <나는 부셔지지 않으리>라는 감동적인 책도 출간했다. "살아가야 할 인생이 있었고 뛰건 구르건 어쨌든 내 인생이었고 난 되돌리려 했다." 그 결과 제리는 자신과 자기의 인생에서 예스를 얻었다. 물론 이것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제리는 삶이 계속되도록 그의 불운한 사고에 대응했다. 이로 인해 제리는 세계적으로 전쟁이나 테러로 인한 지뢰 부상에서 살아남은 희생자들을 돕는 생존자단체를 공동 설립했고, 이 단체는 노벨상 산하에서 지뢰를 금지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제리는 공공서비스 분야에 관여해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소하는데 힘쓰고 있다. 그 자신에게서 예스를 이끌어낸 것이 남들로부터 예스를 얻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가 해온 일은 사회 전체의 예스를 구하는 데 일조했다.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향하던 원망이 엄청난 에너지가 되어 분출된다. 무책임하고 남 탓하는 것으로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자신을 희생양으로 가둬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벽은 깨지고 자유로워진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럴 만하건 아니건 인생을 결정하는 요인은 자신이다. 우리 마음대로 닥친 상황을 선택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문제를 대응하는 태도는 결정할 수 있다. - 출처). <윌리엄 유리 하버드 협상법> 중에서
19세기 프랑스의 시체 관람
1886년 8월, 프랑스 파리 한적한 외곽에서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시체가 발견됐다. 프랑스 신문사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호기심 가득한 파리 시민들은 소녀의 시체를 보기 위해 시체 안치소로 몰려 들었다. 무려 1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시체 안치소로 몰려들면서 인근 교통이 전부 마비되었다. 자신이 먼저 보려고 주위 사람들을 밀치는 바람에 이곳에서 저곳에서 드잡이질이 벌어졌고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옷이 찢어지거나 기절하는 사람하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소녀 시체에 대한 관심은 이상할 정도로 고조된 편이지만, 사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 관람을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 벽으로 만들어진 시체 관람소는 파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 명소였다. 시체 안치소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창으로 도배한 용도는, 신원 불명 시체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돕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 그런 식으로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었다. 관광 명소가 될 정도로 사람들이 왕창 몰려 들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한가지, 죽은 자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은 자의 사인이 극적이거나 수수께끼일수록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언론사들은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대서특필하며 온갖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틀 뒤 세느강 가에서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 시체가 발견되자 어떤 프랑스 일간지는 두 소녀를 엮어서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자매'라는 소설을 기사로 내보기도 했다. 이 기사가 나가고 소녀들의 시체를 보려는 구경꾼은 한층 더 늘었다. 1885년, 미국인 기자가 묘사한 파리 시체 안치소의 정경을 쓰자면,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치켜세운 신사들은 시체를 구경하며 히히덕거렸다. 노인들은 장터에서 물건을 흥정하듯 큰소리로 시체의 사연을 떠들었다. 창백한 안색의 귀부인이 동정어린 어투로 죽은 자의 명복을 빌었으나 시체 구경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시체가 옮겨질 때마다 양팔을 휘두르며 환성을 내질렀다. 오로지 시체 구경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방문객 숫자가 늘어나자, 파리 시청은 시체 안치소의 관람 구역을 확장했다. 노점상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체 안치소 주위에 몰려들었다. 시체 안치소는 일주일 내내 아침 9시부터 새벽까지 개장했으며, 시체를 보기 위한 관광객은 더욱더 늘어났다. 어떤 시기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하는 관광객보다 시체 안치소를 구경하려는 사람 숫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시체 안치소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면서 시체의 유류품 역시 관광 상품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시체 안치소는 마치 백화점 쇼윈도 같은 형태로 재개장되었다. 초기에는 시체의 부패를 늦추기 위해 천장에 달린 수도 꼭지에서 차가운 물을 시체 위에 방울져 떨어지게 하는 방식을 취했으나, 1882년, 본격적인 냉장 시스템의 도입으로 시체 안치소의 시체들은 좀 더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 파리 경찰은 시체 관람을 범죄 수사에 활용하기도 했다. 1888년, 살인 용의자를 시체 안치소에 데려가서 희생자와 대면시키는 행위를 공식 절차에 추가 시켰다. 제 아무리 완고하게 무죄를 주장하던 용의자도 밝은 빛 아래에서 희생자의 유해를 마주하고 나면 금방 죄를 자백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시체 관람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점차 인기가 사그라들다 1940년대를 전후해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출처:한류열풍 사랑
우러전쟁 최신 근황 (일보 후퇴)
우크라이나 북부 스바토베-크레미나 전선은 우크라이나군이 그나마 공세를 하던 전선이었음.  스바토베-크레미나를 탈환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교착 상태가 너무 길었음. 북부 전선의 교착 상태가 많이 길었던 게 러시아 참호선이 워낙 촘촘히 깔려 있어서 그럼.   그래도 뚫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음.  왜냐하면 러시아 동원병들의 숙련도가 부족해서  우크라이나 군이 충분히 이길만하다 싶었음.  전차 조종을 똑바로 못해서  아군 보병 밀어버리는 러시아 전차. 대전차 로켓 후폭풍으로 아군 골로 보내는 러시아 병사. 로켓 후폭풍을 전혀 모르는 러시아 병사. 레알 어이 털리는 장면임. 포격 당하자 모랄빵 터져 도망가는 러시아 동원병들. 도망가는 아군보고  모랄빵 터져 같이 도망가는 동원병들.  러시아 동원병이 이 정도 수준이면  우크라이나군이 할만하다 싶었음.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이  크레미나 코앞까지 도달했고 크레미나 시내에 러시아군 포격이 떨어져서  탈환할 수 있겠다 싶었음.  훈련 부족, 장비 부족, 보급 부족에 시달리는 러시아 동원병.  북부 전선에 이런 동원병들만 있었으면  우크라이나군이 쉽게 이겼을 텐데,  아쉽게도 러시아군이 새로운 카드를 들고나왔음.  러시아군의 최신형 전차 T-90M이 북부 전선에 대량 투입되었고 러시아 공수부대가 대거 투입되었다고 함.  T-90M 전차의 능동 방어가  북부 전선에서 첫선을 보였고  러시아군의 희귀 장비인 BMPT 터미네이터도  북부 전선에 대거 투입되었음.  러시아군은 동원병으로 시간 벌이를 한 후에 정예 병력과 최신 기갑을 투입해 성공적인 방어 작전을 했음.  우크라이나군이 한방 크게 먹은 셈. 이렇게 북부 전선에 새로운 러시아군이 출현하자 우크라이나군은 공세를 멈추고 방어로 전환했음.  러시아군이 수비 대신 공세를 펼칠 것으로 판단함.  크레미나 코앞까지 갔던 우크라이나군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방어하기 좋은 위치로 이동했음.  러시아군의 혹시 모를 2월 공세를 대비하는 모양새임.  지켜보는 내가 허탈할 정도로 깔끔한 후퇴였음. 러시아군은 생각보다 저력 있고 우크라이나군은 뒷심이 부족함. 서방세계의 지원이 도착하기 전엔  우크라이나의 공세가 없을 것 같음.  우러전쟁은 교착 상태로 길고 지루하게 이어질 느낌임.  3줄 요약 1. 스바토베-크레미나 전선은 우크라이나군이 그나마 공세하던 전선임. 2. 크레미나 코앞까지 진격했는데, 러시아 정예병이 투입되자 바로 퇴각함. 3. 러시아군의 2월 공세를 염두한 것 같음, 서방 지원이 도착하면 그때 다시 진격할 듯. 군사갤러리 후지토라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