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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ew : 핑앤퐁(Ping N Pong)

슈퍼프릭 레코즈(Superfreak Records) 소속의 프로듀서, 비앙(Viann)과 비주얼 아티스트 레어버스(Rarebirth)는 최근 그들의 협업 프로젝트 핑앤퐁(PingNpong) 시즌2를 성공리에 마쳤다. 일주일에 한 개씩 작업물을 공개한 시즌1과는 달리 시즌2는 조금 달라진 기획으로 VISLA와 함께 진행했다. 이들은 약 1년에 걸쳐 모두 10개의 트랙과 영상을 발표했다. 또한, 이번에는 비앙과 레어버스뿐만 아니라 많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참여해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놀라운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작지만 묵직한 발자국을 남긴 핑앤퐁의 주역인 비앙, 레어버스와 지난 1년을 뒤돌아봤다.
약 1년 반 동안 꾸준히 온라인상에서 작품들을 공개해왔다. 왜 프로젝트 이름을 핑앤퐁이라고 지었나?
레어버스(이하 레): 경리단 길에 있는 핑퐁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작된 프로젝트다. 마치 탁구 할 때 랠리(Rally)를 하는 것처럼 비앙이 내게 음악을 들려주면 나는 그 음악에 영감을 받은 아트워크를 제작하거나 내가 아트워크를 보여주면, 비앙이 트랙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핑앤퐁 뒤에 붙는 숫자 51의 의미는 무엇인가?
비앙(이하 비): 핑앤퐁을 결성한 날이 5월 1일이었다.
핑앤퐁 시즌1은 트랙과 아트워크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공개됐다.
레: 탁구로 치면 랠리처럼 빠른 속도로 결과물을 내자는 의도였다. 지금껏 묵혀둔 작업도 아깝고 해서 빨리 소비해버리고, 피드백도 얻고 싶었다.
(동영상)핑앤퐁 시즌2 전곡 플레이리스트
시즌 2는 속도보다 퀄리티에 더 신경을 쓴 프로젝트로 성격이 조금 변했는데.
비: 처음에는 답답했다. 그러나 영상을 만들고, 피처링 아티스트와 조율을 하면서 일주일에 하나씩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핑앤퐁 프로젝트에 영감을 준 아티스트가 있나?
비: 래퍼 존 웨인(Jone Wayne)이 매주 작업물을 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사실 그걸 보고 시작한 건 아니다. 그냥 둘이 뭔가 해보자는 식이었다. 국내에도 이런 형식의 프로젝트가 몇 개 있던 거로 아는데, 마무리를 지은 건 핑앤퐁이 처음일 거다.
레: 이런 식의 프로젝트는 시작이 거창한 경우가 많다. 티저 영상도 만들고, 뭐도 만들고 하는데 결국엔 흐지부지되어서 사라진 프로젝트를 많이 봤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빼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자는 생각으로 진행했다.
비: 레어버스 형이 요즘 시대에 맞게 결과물을 SNS를 통해 빨리 소비하자고 했다. 사운드클라우드 타임라인을 보면 하루만 지나도 수많은 곡이 발표되고, 또 사라지곤 한다. 그렇다면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이런 흐름에 맞춰가고 싶었다.
레어버스와 비앙은 둘 다 슈퍼프릭 레코즈(Superfreak Records) 소속이다. 많은 멤버들 중에서 왜 둘만 같이 한 건가.
비: 당시 슈퍼프릭 레코즈가 잠시 침체기가 왔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뭔가 더 열정적으로 몰두할 곳이 필요했고, 나와 뜻이 맞았던 레어버스 형과 바로 핑앤퐁을 시작했다.
레: 그때 비앙은 닥치는 대로 작업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나도 동참했다.
10개의 트랙 중 가장 재미있게 작업한 작품을 꼽자면.
비: 첫 번째 트랙 “Camilla Akrans”다. 바이올린을 보탠 Tunnelno5와 평소 친하게 지냈는데, 그 덕에 호흡을 제대로 맞추면서 핑앤퐁 기획 의도에 맞는 작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글리덕(Ugly Duck)과 한 작업이다. 데뷔하기 전에 가장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래퍼가 오디(Odee), 어글리덕(Ugly duck) 그리고 키쓰 에이프(Keith Ape)였다. 키쓰 에이프를 제외하곤 모두 성사되어 기쁘다. Roci Eycko와 함께한 “Trilluminati”도 기억에 남는다.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기존의 비트를 재차 수정했고, 결과적으로 단점이 많이 보강된 트랙이 나와서 기뻤다.
레: “Broken that fountain”이다. 일단은 가사가 있는 트랙은 비주얼을 어느 정도 거기에 맞추게 된다. 그런데 이 트랙은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라 이미지로만 다가갈 수 있어 표현의 자유가 많이 주어진 것 같다. 킬라송(Killah Song)형에게 드럼을 부탁했더니, 다른 악기 연주자까지 섭외를 해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난항을 겪은 트랙은 없었나.
레: 래퍼 넉살(Nucksal)과 함께한 트랙, “The City/Hasoogoo”의 비주얼 아트를 만들 때 가장 힘들었다. 당시 내가 개인적으로 좀 우울한 시기였다. 이 영상은 카메라를 하나 들고 밖으로 나가서 무조건 오늘 찍은 소스들로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만든 거다. 곡의 콘셉트가 ‘City’인걸 고려해서 산에 올라가 도시를 바라본 장면, 도시를 걸으며 보이는 것들을 찍었다.
비: 하나를 꼽기보다는 비교적 덜 친한 사람과 작업할 때 조금 힘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도움받는 입장이다 보니 까다로운 요구를 하기가 죄송스러웠다.
핑앤퐁 시즌2에서 꼭 같이 해보고 싶었던 뮤지션이라면?
비: G2와 키쓰 에이프.
레: 알엔비 뮤지션과 함께하고 싶었다.
(동영상)“Comfuture(Feat. PNSB)”
최근 핑앤퐁 시즌2를 앨범 단위로 각 음원사에 등록했다. “Comfuture(Feat. PNSB)”를 타이틀로 정한 이유는?
비: PNSB가 참여한 “Comfuture”는 사실 고등학교 때 만든 비트다. 누구한테 들려주기 부끄러워서 안 쓰고 있다가 편곡한 버전을 PNSB에게 보냈더니 자신의 스타일에 알맞게 흡수해서 랩을 하더라. 그때 이 아티스트가 비범하다는 것을 느꼈다. 비주얼도 트랙에 맞게 잘 뽑힌 것 같고 리스너의 반응도 좋아서 타이틀로 정했다.
핑앤퐁 프로젝트에서 하우스, 저지 클럽, 힙합 등 다양한 사운드를 다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비앙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거친 질감은 리스너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비: 개인적으로는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크게 신경 쓰지는 않지만, 앞으로 나올 음악의 색깔을 지켜봐 줬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회색 빛깔의 음악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가벼운 건 예술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또 반면에 너무 어두워서 청자들이 외면하는 음악 역시 예술이 아닌 것 같다.
기린의 “Jam” 리믹스에서 선보인 저지 클럽은 상당히 신선했다.
비: 저지 클럽이 당시에 반짝하고 유행할 때,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번 해봤다. 또 테크노, 하우스 음악에 완전히 빠져있을 때 AiAiAi의 도움을 받아 만든 1번 트랙 ”Camila Akrans”도 나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1번 트랙을 듣고 이번 핑앤퐁 시즌2에서는 기존 비앙과는 다른 스타일의 트랙이 많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시즌이 끝나고 나니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비: 참여한 게스트의 성향 때문인지 하우스나 새로운 바이브를 가진 곡들을 집어넣을 곳이 없었다. 사일리(Sailli)의 플루트와 함께 만들어보고 싶은 하우스 트랙이 있긴 했는데….
요새는 어떤 비트를 만드나?
비: 나는 최근 영화 ‘Straight Outta Compton’을 보고 다시 완전한 힙합으로 돌아왔다. 앨범을 만들거나 거창한 작업을 할 생각은 없다. 일단은 학업도 마무리하면서 좀 쉬고 싶다.
(사진)핑앤퐁 시즌2 트랙 아트워크
핑앤퐁 시즌 1에서는 트랙에 영감을 받은 이미지 작업을 했고, 시즌 2부터는 모든 트랙에 영상 작업을 시도했다. 다양한 콘셉트와 영상 기법이 인상적이었다.
레: 지금껏 내가 해오던 작업에서 벗어나 영상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며 많은 걸 느꼈다. 기린의 “Jam (Remix)” 트랙 같은 경우에는 3D 영상인데, 작은 원소가 차츰차츰 완성된 형태를 갖추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보면 아쉽지만, 그때는 최선을 다한 작품이었다.
가장 아쉬운 작품은 “Jam (Remix)” 영상이었나?
레: 가장 큰 모험이자 가장 아쉬운 영상이다. 욕심이 너무 과했다. 더 멋지게 만들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전공이 3D라 자신 있었는데, 애니메이팅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영상 한 편을 제작하는 데 얼마나 걸렸나.
레: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평균 2주로 잡으면 1주일은 소스를 찾고, 1주일은 영상을 제작한 것 같다.
최근 MHV-황지석과 정충진이 이끄는 영상 프로덕션-가 만든 VHM(Very Happy Magazine)에서 촬영 기반의 영상도 선보였다.
레: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고, 다양한 영상을 통해 나를 보여주고 싶다. 특별히 촬영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닌데, 아이디어가 생기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Broken that fountain”과 “Trilluminati”의 비주얼은 10개의 영상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제작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려줄 수 있나?
레: “Broken that fountain”의 경우에는 일단 아프리카 전통 탈을 수집했다. 이미지를 약 200개 정도 모았는데, 다 쓰지는 않았다. “Trilluminati” 영상은 중국 전통 무용수 영상에 이펙트를 준 것이다. 원본 영상을 우연히 접하고 나서 이걸 만지면 재미있는 영상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핑앤퐁의 비주얼 아트가 뮤직비디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레: 핑앤퐁 영상은 아무래도 비앙과 나의 협업이었기 때문에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앙의 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비주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핑앤퐁 시즌3도 계획 중인가?
비: 일단 지금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각자의 작업에 더 치중하려고 한다.
레: 개인적으로 탁구를 워낙 좋아해서 나중이라도 계속 이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다. 핑앤퐁을 의류 라인으로 풀어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웹상에서 진행된 프로젝트가 음원 등록까지 이어진 케이스다. 처음부터 기획한 것인가?
비: 사실 처음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하. 음원으로 발매하지 않고 끝내도 아름다운 프로젝트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음원을 등록하면서 어떤 기록을 남기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모든 트랙의 비주얼을 VHS 비디오테이프(사진2)에 담았다.
레: 물론 지금 시대에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런 작업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비: 단순한 비트메이커가 아닌 프로듀서로서 한 명의 아티스트를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마치 닥터드레처럼 래퍼 한 명과 풀렝스 앨범을 만들고 싶다.
레: 지금처럼 다른 아티스트의 앨범 커버를 만드는 일도 좋지만, 내 작업들이 단편적으로 끝나는 게 아쉽다. 만약 한 뮤지션이 정규 앨범을 낸다면 그 전에 공개하는 싱글부터 시작해 뮤직비디오, 앨범의 모든 비주얼 요소를 감독해보고 싶다.
진행/텍스트 ㅣ 최장민 권혁인
사진 ㅣ 김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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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이하이양의 연세대축제 공연이 화제인데요, 여러 기사중에 허핑턴포스트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이하이를 감동시킨 학생들의 떼창(영상)" 가수 이하이와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갑자기 일어난 음향사고에 무반주 공연과 ‘떼창’을 선보였다. 지난 22일 유투브의 ‘Yein Chung‘이라는 유저는 이하이가 연세대학교 축제에서 선보인 무대 영상을 공개했다. 이는 이보다 하루 앞선 21일 촬영된 것이다. 영상에서 이하이는 ‘원, 투, 쓰리, 포’를 부른다. 갑자기 반주가 끊어지고, 이하이는 침착하게 마이크를 객석의 학생들을 향해 돌린다. 이에 학생들은 환호하며 ‘떼창’을 선보인다. 곧 반주가 나왔으나 계속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이하이는 무반주로 노래를 이어가고, 학생들과 함께 주고 받으며 무반주로 노래를 마친다. 노래를 마친 뒤 이하이는 “어떻게 된 건가요? 너무 좋아”라고 말하고, 학생들은 이하이의 이름을 외친다. 이 영상은 유투브에서 37만7천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댓글에는 국내를 넘어 해외의 팬들까지 “멋지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출처 http://m.huffpost.com/kr/entry/10124472 이 영상은 이하이양의 공연전체가 담긴 풀영상입니다. 1,2,3,4를 무사히(?) 마친 후 앵콜로 나는 달라를 불렀는데요 중간에 사회자가 올라와 공연을 끊습니다. 그 이유가 한 학생이 노래를 듣다가 실신을 했다는 거였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은 공연이었지만 연세대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끌어냈고 인상도 깊게 남겼다고 하네요.
애비로드에 대해
존 레논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비틀스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다”는 말을 해서 욕을 많이 먹었다. 서양인들이 신으로 여기는 예수를 감히 인간과 같은 급으로 비교한 발언은 신성불가침 영역을 건드린 금기어였다. 예수는 ‘유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인류 보편의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찬송가 대신 비틀즈를 흥얼거리게 되었다고 한들, 너의 음악에 영혼을 팔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하듯 욕했을 것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예수의 흔적을 보기 위해 순례길을 떠나고는 했다. 당시의 순례는 오늘날의 여행처럼 몇 박 몇 일로 예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 험한 길을 걷다 보면 여정은 기약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드는 일이라 전 재산을 쏟아 부은 이도 많았다. 목적지는 죽은 예수나 성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당이었다. 지친 여행 끝에 도착한 성소에는 예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썩은 나뭇가지나 천 조각이 보관되어 있었다. 낡아빠진 소품 앞에서 그들이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성소 방문이란 동시대 사람들이 단체로 열망하는 집약적인 목표였다는 사실만이 추정 가능한 역사로 남아 있다.     신에 대한 대중적인 열망은 오늘날 ‘셀러브리티’로 불리는 유명인들에게로 옮겨갔다. 경건한 예배당과 비명 소리 가득한 콘서트 장은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이지만, 닿을 수 없는 영역의 대상에 대한 열망에 관해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스타에 대한 추종 심리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식당이나 거리에도 어려 있다. 미국 전 대통령 오바마가 머물렀던 식탁을 유리관에 전시해 놓은 베트남 식당의 의도는 분명하다. 유명인이 강림했던 흔적으로 손님들을 끌어보겠다는 의도가 유난스럽게 전달된다. 같은 인간을 요란하게 떠받드는 방식은 때론 굴욕적이다. 내가 앉은 자리는 일어나자마자 원상복귀 되는데 누군가의 자리는 그대로 보존되다니. 귀족을 모시는 하인 곁에 선 농부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사실 유명세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불행의 조건에 가깝다. 자신을 볼 때 끊임없이 불특정 다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니까. 대신, 죽음이 이르렀을 때. 그동안 괴롭힌 대가를 보상하듯, 만인의 뇌에 그의 이름이 자리할 특실이 마련된다. 이름이 알려진다는 건 그런 일이다. 죽으면 땅 밑에서 사라지는 법인데. 유명한 이름은 누군가의 뇌를 무덤으로 삼는다.     셀러브리티에 대한 부러움은 유치하게도, 유명인이 머물렀던 자리에 앉아 그들이 받았을 시선을 간접 체험해보는 쪽으로 흐른다. 다소 허황된 마음을 벗어나면 현실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선택을 따라해 보고 싶은 계산이 선다. ‘돈 많고 바쁜 사람이 선택한 곳'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삶의 선택권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제 3자’가 주도하는 이 기막힌 심리는 유명인의 ‘영향력’이라고 불리며 온갖 마케팅에 이용되고는 한다.   이 심리는 경매시장에서 살짝 다른 방향으로 틀어 극도로 과열되고는 한다. 몇 만원이면 살 수 있는 화장품이 마릴린 먼로의 것이라는 이유로 몇 천만 원에 팔리는 현상은 그 세계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미스테리다. 경매 시장은 유명인의 손을 닿는 건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해 버리는 동화 속의 왕과 같은 손으로 만들어 버렸다.      비틀즈 역시 일찌감치 황금손이 된 케이스다. 멤버들의 사인이 담긴 야구공은 경매시장에서 1억 원에 팔렸고 조지 해리슨의 기타는 5억 3100만원에 낙찰됐다. 영국의 토마스라는 사람은 앨범 <애비 로드>를 녹음할 당시 비틀즈가 ‘화장지의 질이 억세고 반짝반짝 빛이 난다’는 이유로 사용을 거부했던 두루마리 화장지를 ‘한 칸에 180만원’이라는 가격으로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애비로드를 표지로 한 12번째의 앨범 재킷을 찍을 당시, 이미 무명의 신인이 아니었던 멤버들은 금손을 가진 왕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비틀즈가 걷기 전의 ‘애비로드’는 세상에 깔린 횡단보도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도시의 질서를 위해 표시된 획일화된 기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틀즈의 앨범 표지를 장식한 이후, 애비로드는 낭만 어린 역사적 장소로 부상했다. ‘횡단보도를 일렬로 걷는’ 동작은 하나의 문화적인 약호가 되었다. 심슨 패밀리까지 그 패러디 대열에 합류했을 때. 런던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고작’ 횡단보도 위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물론 <애비로드> 표지에는 단순히 비틀즈의 유명세를 입은 그 이상의 매력이 있다.       예수의 탄생 기점을 중심으로 BC와 AD를 나누는 것처럼, 애비로드를 기준으로 비틀즈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되짚어 보면 <애비로드>를 찍기 한참 전의 데뷔시절이 있다. 데뷔 앨범이자 1집 앨범인 <플리즈 플리즈드 미>에는 세상에 얼굴을 알리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천진난만한 청년들의 얼굴을 특이하게도 아래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는 순수하고 활기 넘치는 ‘앳된’ 멤버들의 얼굴이 그대로 담겨 있다.  반면, <애비로드> 앨범 재킷에는 멤버들의 얼굴을 알리려는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들 카메라 따위는 보지 않고 무심한 시선으로 갈 길을 갈 뿐이다. ‘횡단보도를 일렬로 걷는다.’는 설정 외에는 과한 연출이 들어가지 않아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심하고 시크 한 표지를 다른 류의 앨범 재킷과 비교해 보면 비로소 우리가 이 사진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한때 나는 웨스트라이프의 열성팬이었고 그들의 포즈에 미치도록 열광하기도 했지만 현재로서는 5초 이상 똑바로 바라보기 있기 힘든 취향이 되었다.(그러나 나는 웨스트라이프를 좋아한다. 문제는 사진이다.) 연출된 각도와 지나친 자의식으로 점철된 이미지는 이들의 앨범에서만 발생하는 재난이 아니다. ‘매력’이란 무기로 승부해야 하는 수많은 아티스트의 이미지마다 이런 류의 식상한 컨셉은 넘쳐난다. 그들의 내면이 실은 이런 방식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일정한 포즈를 요구하는 사진작가에 의해 억지로 꾸며졌다는 점에서 진실하지도 않다.       <애비로드>가 좋은 점은 멤버들의 자신감이 ‘가짜’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치켜세운 어깨와 당당한 보폭. 자신을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의식은 레논의 잔뜩 치켜 올라간 어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차의 질주를 강제적으로 제한하는 ‘STOP’ 싸인 위에 선 비틀즈는 누구보다 횡단보도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횡단보도는 교통‘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든 일종의 규칙이다. 기존 질서에 대항하며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는 히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비틀즈가 질서와 체계의 상징과도 같은 횡단보도 위를 걷는 모습은 다소 이질적이다. 아니 어쩌면. 횡단보도는 인간성의 회복을 주장했던 히피 정신에 들어맞는 코드로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대량생산체제와 기계화의 대표주자인 자동차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점을 재조명한다면, 횡단보도는 초록 신호등 앞에서는 오롯이 인간의 것이 되어야 하는 인간을 위한 방어체계다. 어쩌면 <애비로드>는 휴머니즘을 말하고자 하는 비틀즈의 고도의 인권운동 전략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소문대로. 사이가 틀어진 비틀즈가 오랜 시간 촬영하기에는 피차 껄끄러워 스튜디오 앞에 있는 횡단보도에서 급히 찍은 사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때의 비틀즈는 마치 그들의 실제 관계를 연출에 도입한 듯, 더 이상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는다. 한 팀처럼, 동지처럼, 함께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는다. 각자의 길을 갈 뿐이다. 횡단보도가 끝나는 지점에서는 뿔뿔이 흩어질 행인들처럼.      어느 날 우리는 서른이 되었고 결혼까지 한 뒤 모두 변했다. 이미 우리는 비틀즈의 삶을 지탱할 수 없었다. 링고스타, 비틀즈 전 멤버  <애비로드> 앨범 발표 후 1년만인 1970년, 4월 9일.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해체를 선언했다. 세월은 흘러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늙었는데 비틀즈의 명성은 그들의 삶과는 별개로 여전하다. 인류의 해마에 들어앉아 아무도 잊어주지 않는 리듬을 무한반복하고 있다. 잡아먹는 포식자가 드문 덕분에 때론 백년을 넘게 사는 거북이처럼. 비틀즈를 집어 삼킬 만 한 건 없다. 최신 곡에 밀려서 사라지는 몇 달 전의 노래 같은 게 아니니까. 최신인기 곡이 비틀즈를 밀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애비로드 위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애비로드를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중세시대에 마침내 성소에 이르렀던 순례 객처럼,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 평범한 횡단보도에 마침내 다다르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이상주의, 히피 [ hippie, hippy ]
히피hippie; <사회> 기성의 가치관ㆍ제도ㆍ사회적 관습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ㆍ자연과의 직접적인 교감 따위를 주장하며 자유로운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젊은이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나 전 세계로 퍼짐. ---------------------------------------------------- 종종 예전의 가치들이 더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1960년 15세에서 25세 젊은 청소년들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더 이상의 폭력을 거부하고 삶의 필요요소이자 중요요소인 평화, 사랑, 화합, 자유를 함께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히피 운동이다. 그들은 문화의 차별, 인종의 차별, 계급의 차이도 없는 세상을 지향하며 오직 전쟁을 반대하고 세계의 평화와 사랑, 자유를 모토로 삼았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그들에게 음악은 어떤 차별과 경계도 없이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수 있는 도구였고 곧 히피들이 추구하는 이념과도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통해 모두가 하나 된 세상을 꿈꾸는 것, 누군가는 너무나 이상에 젖은 헛된 꿈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그러한 이상을 당시 전 세계가 품었다는 것이 그 꿈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그 마음을 지금 이 세상이 언젠가 다시 품을 수 있길.
[이십세기 힛트쏭] 사실 90년대 세계관 깡패는 오렌지족이 아님.jpg
힛트쏭 보다가 흥미돋이어서 가져옴 오렌지족 얘기가 왜 나왔냐면, 이현우가 당시에 오렌지족으로 오해를 사고 있었다 함 다들 오렌지족 대충 뭔지 알거임 (밑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음) 자기는 아니라 함 (이현우 = 가수) 근데 왜 하필 🍊오렌지🍊..? 지금이야 오렌지가 흔하고 국산과일 느낌도 나는데 80년대 말~ 90년대 초 당시만해도 외국 대표과일은 오렌지였음 외국물 먹은거 같은 세련된 이미지 = 오렌지족 이렇게 된거 오렌지족은 청담, 압구정에 하루종일 있음 그런데 오렌지족만 있는게 아님 낑깡족 = 뚜벅이, 소형차 이하 (뚜벅이는 어디 슬퍼서 걸어다니겄냐ㅠ~!) 오렌지족 = 고급 국산차, 외제차 타야함 하지만! 90년대 세계관 최강자는 자몽족 비싼차는 기본, 기사님이 있어서 문 열고 닫아줘야함 아 커서ㅋㅋㅋㅋㅋㅋㅋ 스키장비 대여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하고 스키장을 자주가냐 안가냐 이것도 부의 척도중 하나였음ㅋㅋㅋ 명품 휘감지 않으면 입구컷 만원짜리 몇 장 가지고 기웃거리면 낑깡 (나는 낑깡 중의 낑깡...) https://tv.naver.com/v/14607968 압구정 오렌지족도 당시에 용돈이 몇 백이었다던데 자몽족은 씀씀이가 더 큰거니까 장난 아니었을듯ㄷㄷ ​
2pac
The Notorious B.I.G.와 더불어 힙합계의 양대산맥. 서부 힙합의 제왕 힙합계의 엘비스 프레슬리 혹은 비틀즈의 존 레논격인 존재입니다. 그는 특히 존 레논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자신이 만든 노래에 사상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등 마치 사회운동가와도 같은 음악 활동으로 대중의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뒤 이른 나이에 총탄의 이슬로 세상을 떠났다는 점입니다. 본명은 투팍 아마루 샤커(Tupac Amaru Shakur). 가끔 2pac에서 2를 '이'로 잘못 읽어서 실수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설마) 친형은 떠그 라이프의 멤버 모프림 샤커. 그의 이름은 잉카의 마지막 황제였던 투팍 아마루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예명도 본명의 Tupac을 변형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본토에서는 아직도 Tupac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더불어 마카벨리라는 예명도 있습니다. 이 예명은 그가 데스 로우 레코드에 영입된 후 마키아벨리즘에 심취하여 지은 예명이라고 합니다. 뉴욕에서 랩하던 시절엔 MC 뉴욕이란 예명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71년 6월 16일에 뉴욕에서 출생했으며, 1996년 라스베가스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에서 젊은 나이에 살해된 비운의 천재 랩퍼입니다. 스눕 독, 닥터 드레 등과 함께 웨스트 코스트를 대표하는 랩퍼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러나 팍의 초창기 음악 성향은 그의 고향인 뉴욕에 있는 래퍼들의 영향을 받은건지 웨스트 코스트 랩과는 거리가 있어보입니다. MTV에서 베스트 래퍼를 뽑으면 여전히 5위권 이내, 1위 아니면 2위 하는 인물입니다. 전세계 힙합계를 통틀어서 최고의 랩퍼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20살이 되던 해까지 8번의 체포 경력을 가졌으며 8개월 동안 수감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따라하다가 인생 종치는 일이 없어야 하겠죠...;; Digital Underground의 수장 쇼크 G에게 프리스타일 랩을 들려준 뒤, 그의 로드매니저로 일하다가 'Same Song'에 객원 래퍼로 피쳐링을 하면서 데뷔 했을때는 그저 그렇게 히트를 쳤고 'Strictly 4 My N.I.G.G.A.Z'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강도에게 총을 맞았다 되살아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 사건 당시에 절친이었던 비기(Notorious B.I.G.)와 배드 보이 소속사 사장인 션 콤즈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비기가 투팍을 총으로 쐈다는 언플이 나오면서 투팍은 비기를 범인으로 간주하지만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마는데... 이 사건은 서부, 동부의 힙합 지역 감정이 생겨난 원인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야기로 따르자면 건물에 괴한이 칩입하자 비기가 친구인 투팍을 구하러 총을 가지고 가다가 경찰의 조사를 받아 오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배신감을 느낀 투팍이 비기와 퍼프 대디를 죽이려고 총을 가지고 가려다 경찰에 저지되었다고 합니다. 팍은 이 사건을 모토로 'Holla at me'라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 뭘 봤는지 총격사건 직후에 낸 앨범 'Me Against World'가 히트를 쳤지만 이 앨범이 나온 후 활동하기도 전에 투팍이 강간죄로 구속되어서 교도소로 갔고 이 앨범이 히트를 쳤을 때는 투팍이 교도소에서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데스 로우 사장인 슈그 나잇이 투팍을 보석금에 풀어주고 투팍은 유명 힙합 소속사 데스 로우로 이적을 합니다. 자유를 얻은 투팍은 비기에게 분노하게 되고 아웃로우즈 컴필레이션 앨범에 비기와 퍼프 대디, 배드보이 레코드, 동부 힙합을 디스하는 곡인 'Hit'em up'를 넣게 됩니다. 그러나 사태가 심각해지다 보니 동부 힙합과 협동하는 곡을 만들고 화해하려고 했으나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팍과 비기의 비프가 동서부 힙합 전쟁의 시초로 잘못 알고있는데, 사실 투팍 이전에도 서부 힙합이 부흥할 때 동부 래퍼의 대선배격인 Tim Dog이 폭력적이고 물질만능주의적인 서부 힙합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Fuck Compton'이라는 곡으로 당시 서부 힙합의 대표적인 그룹 N.W.A와 그들의 고향 컴튼을 깐 적이 있습니다. 1집 2pacalypse Now (1991년) 투팍의 데뷔 앨범이며 약 5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사회 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이나 경찰을 비꼬는 가사가 나옵니다. 이 앨범을 들은 한명이 경찰을 쏘거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할 정도니 말이죠. 실제로 한 소년이 경찰에게 총을 쏜 후 3번 트랙곡인 'soulja's story'가 그에게 '경찰을 쏘게할 동기를 주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일부 정치가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당시 부통령이였던 댄 퀘일은 공중파방송에서 투팍을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불매운동까지 벌일 정도로 사회의 파장을 일으킨 앨범입니다. 그리고 1년 뒤...전설이 된 그의 데뷔작이긴 하지만 사회작 파장에 묻혀 대중의 인지도는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앨범이 알앤비 차트 13위에 오른 적 있으며 싱글인 'BRENDA'S GOT A BABY'이 3위를 차지한 적 있습니다. 대부분 국내 리스너들에게도 별로 언급되지 않는 앨범이기도 하지만 매니아에서는 호평을 받는 앨범이기도 합니다. 2집 Strictly 4 My N.I.G.G.A.Z. (1993년) 1집보다 더 과격하게 변해서 돌아온 노래. 1집의 노래들이 경찰과 백인들을 비판하는 한편 '흑인들이 이대로 가난하고 무식하게만 살 수 없다. 우리 스스로 변하자.' 같은 메세지를 전하는 것에도 초점이 맞춰진 것과 달리 2집의 노래들은 사회를 까는 과격한 가사 자체에 중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도 어느 부분에서는 1집보다는 많이 순해진 앨범. 수록곡 중에선 1집의 메시지가 여성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흑인 여성들에게 힘을 내라고 전하는 'keep ya head up'과 파티송인 'I get around'가 가장 유명합니다. 3집 Me Against The World (1995년) 4집 'All eyes on me'와 함께 투팍의 최고 명반 중 최고로 꼽힙니다. 투팍이 가진 서정성을 가장 잘 표현한 앨범으로 1, 2집이 사회적인 분노를 담았다면 3집의 경우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Dear Mama' 같이 시적인 내용이 주가 되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앨범의 전곡에 샘플링이 사용되었습니다. 앨범은 차트에서 장기간 머무르며 수백만장을 팔았지만 정작 투팍은 앨범이 나올 쯤에는 감옥에 있었다고 합니다. 별다른 활동 없이 앨범만 수백만장을 판 것입니다. 4집 All Eyez on Me (1996년) 데스 로우 레코드가 보석금을 내고 투팍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투팍과 계약한 뒤 투팍이 그곳으로 소속사를 옮기면서 발매한 앨범입니다. 힙합 앨범 사상 최초의 더블시디로 제작 되었습니다.(이로 인하여 더블앨범 제작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톱스타 반열에 올라서 투팍의 위치를 대변해주는 앨범으로 Dr. Dre 같은 최고의 프로듀서가 만든 비트와 조지 클린턴이나 로저 트루먼 같은 전설적인 뮤지션들까지 참여해서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피쳐링진도 스눕 독과 독 파운드 같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서부 힙합 뮤지션과 더불어 메소드 맨 & 레드맨 같은 동부 힙합을 대표하는 래퍼들까지 참여하였습니다. 상업성과 작품성 모두를 겸비한 앨범으로 극찬을 받았으며 지금도 최고의 힙합 앨범을 꼽을 때 베스트 5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앨범이기도 합니다. Makaveli - The 7 Day Theory (1997년) 투팍 사후 1주일만에 발매된 앨범입니다. 원래 발매 예정이었으나 앨범 발매 직전에 투팍이 사망하였습니다. 특이하게 투팍이 아닌 아웃로우즈 시절 예명인 마카벨리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으며 'All Eyes on Me' 같이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예전의 과격함을 부각시킨 앨범입니다. 자신의 크루인 'Outlawz'를 제외하고는 다른 뮤지션의 참여도 없었지만 앨범 자체의 평가는 상당히 좋습니다. 동부 힙합을 디스하는 듯 나스에 대한 디스곡도 존재합니다. 참고로 나스는 이걸 듣고 울었다고 하네요. R U Still Down (1997년) 투팍이 데스로우로 소속을 옮기기 전에 녹음해뒀던 미발표곡 모음집입니다. 앨범에 수록곡들이 예전 앨범보다 못하더라도 'Do for love'와 같이 명곡이 있어서 들을 만한 편. Greatest Hits (1998년) 사후에 나온 베스트 앨범 미발표곡 중 하나였던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Changes'가 대히트를 쳤습니다. 아마 투팍의 대박을 친 곡들은 여기에 다 수록되어 있으니 베스트 앨범 중에서 입문자에게나 매니아에게도 소장가치가 상당히 있는 편입니다. 2pac & outlaws - Still i rise(1999년) 그의 크루인 'Outlaws'와 함께 합작한 앨범. 투팍의 전담 프로듀서나 다름없는 Johnny J가 대부분을 프로듀싱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keep ya head up'의 후속곡 격인 'baby don't cry' 수록. Until the end of time(2001년) 역시 미발표곡 모음집. 평가는 그저 그렇고 프로듀싱을 전부 다시 했지만 사람들의 평가는 이전곡들이 더 좋았다고... 그러나 투팍의 이 사후 앨범은 계속해서 차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Better dayz (2003년) 미발표곡 중 이때부터 음악 퀄리티가 하락하기 시작... 그냥 이전 곡이 낫습니다. 투팍의 앨범이면 무조건 사겠다는 열혈팬이 아니라면 소장하지 않는 것이 좋을 정도. Nu-Mixx Klazzics (2003년) 투팍의 리믹스 앨범. 그러나 원곡을 너무 망치고 리믹스도 좋은 편이 아니라서 까이고 있는 앨범. Resurrection (2003년) 영화 투팍의 O.S.T라고 하지만 투팍의 목소리를 갖다 붙인 곡도 있습니다. 평판은 좋지 못한 편. 2pac Live (2004년) 투팍의 라이브 앨범. 정식 라이브도 아닌데 짜깁기로 발매한 앨범(...) Loyal to the Game (2004년) 미발표곡. 에미넴이 프로듀서를 했지만 투팍이 랩한 것에 그냥 음악 덧붙인 수준. Pac's Life (2006년) 미발표곡. 쓰레기 앨범입니다. 투팍의 어머니가 투팍을 너무 추모하고 싶었는지 장르를 따지지 않고 아무나 다 피쳐링을 시켜서 그런지 앨범이 개판입니다. '2pacalypse Now'부터 'All eyez on me'까지는 투팍이 생전이 발매한 스튜디오 정규 앨범이고 그 다음부터 나오는 앨범은 거의 미수록곡을 짜깁기해서 나온 곡입니다. 지금은 거의 망해가는 데스 로우가 아마루 레코드와 힘을 합쳐서 짜깁기 앨범을 만들어 내려는 중(...). 2010년에 투팍 사후 앨범 미발표곡으로 닥터 드레와 제이지를 디스한 'war gamez'라는 곡을 공개했습니다. 죽어서도 이지 이와 더불어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더 게임 같은 베테랑이나 켄드릭 라마, 스쿨보이 Q 등의 최근 뜨고있는 신인들에게도 상당한 리스펙을 받으며, 극단적인 경우는 이분의 스타일을 말 그대로 벤치마킹한 소위 짝퉁 투팍 래퍼도 있을 정도. 대표적으로 자 룰 등이 있습니다. 이 작자는 아예 뻔뻔하게 팍의 랩 자체를 모창했습니다. 심지어는 인터뷰에서 자기가 투팍이라고.... -ㅅ- ;; (요즘 누굴 보는거 같은 느낌은 기분탓이겠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2년 4월 15일 코아첼라 뮤직페스티벌에서 홀로그램으로 2pac을 복원해 Snoop Dogg과 함께 'Hail Mary', '2 of Amerikaz Most wanted' 2곡을 부르게 했습니다. 1년동안 40만달러를 투입해서 만들었다고... 이에 대해서 갑을론박이 오고갔으나 공연 반응은 괜찮은 듯 합니다. 일본에 방문 한적이 있습니다. (한쿡은....) 여기서부터는 여담이지만 ... 이 시대, 그리고 서부 힙합이 늘 그래왔듯이 가사에는 폭력과 마약 그리고 섹스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흑인의 인권에 대한 내용, 여성 보호에 대한 내용들을 다뤘습니다. 그의 슬로건인 "깡패 같은 삶(Thug life)"라는 말 자체가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자신같은 사람을 일컫는다고.... 험난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상당히 시적인 가사를 써서 이 분야에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생존설도 돌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론 대표적으로 사후에 발표된 뮤직비디오에 투팍이 신고 나온 신발은 투팍 사망 전에는 발매되지 않은 모델이라는 점, 사망 후 바로 화장되었다는 점, 사고 당시 경찰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등등 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자메이카에서 살아있는 투팍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또는 쿠바 그들이 말하기론 2014년에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데 이미 2015....(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사후에도 앨범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생전에 이미 수백곡을 녹음해놨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계속 앨범이 나오고 있다는 것. 이 쯤 되면 생존설이 생길 만도 합니다. 미스터리 갤러리의 유명한 고인드립 꾸준글 중에는 '투팍은 살아있다'라는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꾸준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곡들은 앨범에 발매되지 않을 만한 퀄리티라는 점, 같이 껴서 나오는 기존곡들의 리믹스가 개판이라는 점 등에 의해 사후 앨범은 계속해서 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랩퍼라는 위상에는 변함이 없을 듯 하네요. 그러나 엘비스 프레슬리, 커트 코베인, 가장 최근의 마이클 잭슨의 사망 당시에도 생존설은 돌았습니다. 지금껏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세상을 떠났음이 확실한거 아닐까요. 그가 화장한 것을 본 사람도 있으니 죽은 것이 맞습니다.(솔직히 생존설이 돌고 살아 나온 가수가 있었나? )이런 쓸데없는 추측보다는 구글링만 해봐도 2pac 부검 사진이라 검색하면 나옵니다. 물론, 생존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부검사진이 조작 되었다고 말한지만 말이죠. 궁금한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영문의 압박....) http://www.egotripland.com/evidence-2pac-tupac-still-alive/ 이걸 투피에이씨로 읽느냐 투팍 이팍 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힙덕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골라낼 수 있다고 합니다. 가끔 자기가 힙합 매니아라고 하는 사람한테 읽으라고 해보는 것도...ㅋ (빙글러들은 없을듯함 ;;;) 이승철은 슈퍼스타k2에서 투팩이라고 읽었다고 합니다. 음악에 입문하기 전에 투팍의 시를 담아낸 '콘크리트에 핀 장미' 라는 책도 발간되었습니다. 타임지에서 선정한 미해결 힙합 살인사건 탑 10중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