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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쓴 소설을 보았다. 출간된 형태는 아니다. 일반적인 단편소설의 절반쯤 되는 분량의 소설이었다. 소설은 아주 잘 조직되었고, 아귀가 잘 맞았고, 특유의 분위기도 있었다. 시인이 쓴 소설 같았다. 시인이 소설을 쓰면 보통은 아주 유려한 수묵화를 보는 느낌이기도 하다. 물론 작품이 어느 정도 성공했을 때의 경우다. 시인이 소설을 써서 망치는 경우는 대개 자의식 과잉으로 점철되어 있을 때이다. 앞서의 소설은 충분히 절제되어 있었고, 한 편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림 같다는 것은 촘촘한 서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소설이 반드시 서사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고루한 얘기지만, 철저히 의도적이지 않을 때는 그 생명력이 길지 않다. 이것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 투의 장시에 가까워보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장르의 파괴나, 장르의 결합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그럴 경우에도 각 장르의 이해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장진 감독인데, 연극으로 시작해 영화판까지 갔던 그는 좋은 각본가이지만, 그의 영화가 요즘 영 형편없어지고 있는 것은 연극과 영화의 장르 구분이 특별한 의도없이 전혀 되지 않고 있어서라고 본다. 그의 모든 영화는 연극적 요소가 강하지만, 그 접점이 가장 성공했던 사례는 <아는 여자> 정도였던 것 같다. 연극은 연극답게, 영화는 영화답게, 시는 시답게, 소설은 소설답게. 그 장르 안에서 납득이 되어야만 그 수명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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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촬영이 있어 사무실에 Y 시인이 방문했다. 그는 나이가 50대인데 관리가 너무 잘 돼있어 좀 많이 놀랐다. 수트 핏이 너무나 좋았고, 특별히 과장할 것도 없이 그 실루엣이 MC 유재석과 흡사해보일 정도였다. 아, 그래. 사람은 관리를 해야 한다. 이런 시인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시대가 변했고, 이제는 시인의 이미지가 좀 바뀔 필요가 있다. 내일은 최근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을 만나기로 했다. 그는 내 대학 후배이기도 하다. 내가 한 잔 사겠다고 했다. 앞서 이미 두 명의 시인이 그에게 축하를 해줬다는 소릴 들었고, 한 명은 거금 10만 원을 들여 회를 사줬다고 한다. 나는 질 수 없어 반드시 11만원 어치를 먹으라고 했다. 그는 다음주에 시상식이라는데, 신문사에서는 반드시 혼자만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그럴 거면 아예 하지 않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언론에 내보낼 사진은 찍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가 바꿔놓은 또 다른 형태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시인은 차라리 자신 혼자 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시집 표지 디자인과 조판된 본문을 받아 검토했다. 오래전부터 그려온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낯설었다. 감동의 눈물 같은 것은 흘리지 않았다.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 생기면 이상하게 우울감만 짙어진다. 분명 기쁘긴 하지만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다. 코로나 블루 시대, 나는 시집 블루에 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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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제법 풀렸다. 새해가 되고 열흘이 지나 처음으로 책을 펴들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부터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시집이 나오면 보내 줄 지인 명단을 추려보았다. 그러면서 역시나 자연스레 문단의 이상한 문화를 떠올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시인들끼리 품앗이하듯이 서로의 시집을 주고받는 문화. 이게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지만, 간혹 들려오는 말로 시집을 보내주지 않으면 서운해한다는 시인들이나, 그나마도 여기까지는 양반인 것이 아주 당당하게 시집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이건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문화는 개인이 자신의 책을 홍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책이 나온 줄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조차도 사실 독자로서의 나태함이 아닌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어떤 책들이 나오고 있는지도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쓰는 자는 독자가 아닌가? 떠먹여 줘야만 읽는 사람이라면 굳이 책을 보내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시집이 읽고 싶으면 사서 보는 문화가 생겼으면 한다. 시인이 자발적으로 보내주는 것은 하등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소 강제적인 분위기에 동조해야 하는 것은 분명 문제다. 물론 누군가는 강제성이 없다고 할 것이다.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내면 그만이기도 하다. 하지만 배송 명단을 작성하며 계속해서 신경을 쓰고 있는 이 상황 자체에 이미 강제성이 있다. 어차피 모두에게 보내주는 것은 당연히 무리이고, 그러다 보면 선별하게 마련인데 누구는 보내주고 누구는 보내주지 않고, 이런 상황도 난감하기 그지없다. 가장 좋은 것은 궁금하면 직접 사서 보는 것이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도서관에 신청해서 보든지. 독자들이 자신의 시집을 구매하기 원한다면 스스로도 다른 시인의 노력에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시인의 고통을 가장 잘 아는 시인이 그러는 것은 아이러니다. 품앗이하듯이 시집을 보내주기보다는 서로의 시집을 사서 보는 정성을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이상적인 문화는 아닐까. 직접 구매했으니, 아무래도 집구석 어딘가에 내팽개쳐놓기보다는 읽어볼 확률도 높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