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p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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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눌러주면 조..좋다고(수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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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감사해요(쑥스)
ㅋㅋㅋ저도하트눌럿어요!
하트 눌렀습니다... 이제 수줍은 고백을 기다릴게요..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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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돈 원양 (夏侯惇 元讓) A.D.? ~ 220
이 칼럼에서 앞서 다뤄진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나아가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대부분, 본래의 생애와 인물됨이 평가절하 내지는 너프를 잔뜩 받거나 또는 버프를 이빠시 받은데 비해... 버프or너프를 떠나 그 실제와 소설 속의 이미지 차이가 확연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오늘의 주인공인 "하후돈"이다. 오늘날 중국 안휘성 보저우시인 "패국 초현" 출신이며 조조와 동향이고 여기는 당시 서주의 소패 인근인데, 그때의 이 곳은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과 후한의 수도인 낙양, 그리고 업과 허창과 함께 후한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인 꽤나 잘 나가는 동네였다. 도시남자 하후돈은 어려서부터 터프가이의 싹수를 뽐내며 자란 대개의 무장들과 다르게 어린시절부터 학문을 배우던 나름 곱상한 유년~청소년기를 보냈고 대체로 학당에 나가 공부하고 교육받던 당시의 학생들과 달리 집으로 스승을 모셔 배우는 '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은근 좀 사는 집 아들이였던거 같다. 하기사, 파탄에 가까운 후한 말의 배곯는게 일상인 여느 백성들에게 교육이 사치였던 시절, 공부를 했다는 자체가 중산층 이상은 되었다는 반증.(올~~) 그러던 돈이가 14세 때.... 어떤 이가 그의 스승을 하후돈 앞에서 모욕하자, 그 자리에서 패죽였다는 기록을 보건데 단순 중2병을 넘어 이미 그 나이 때부터 완력도, 의기도 남달랐던 슈퍼청소년이였던거 같다. 지금 만약 어떤 중학생이 누가 지네 담임 흉본다고 그 사람을 때려 죽이면 바로 소년원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하후돈이 강직하다며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을 칭찬한걸 보면..... 진짜 후한 말 중국이 개판은 개판이였던 모양.ㅋ 어릴 때부터 조조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체구가 작고 근력도 그냥저냥이던 조조의 주먹 노릇을 했던 하후돈은 그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도 조조가 거느렸던 숱한 인물들 중 가장 드높은 충성을 바친 맹목적인 조조빠였고 조조 역시 자기 휘하의 문무에서 날고 기던 무수한 쫄자들 중 하후돈을 가장 아꼈기에 그런 하후돈은 그래서인지 항상 본인의 능력 이상의 직위와 직책을 맡았었다. 연의에서는 물불 안가리고 무예와 용맹이 대단하여 조조세력의 초창기, 전투에 앞장서는 맹장으로 그려지나 사료에는 그의 군공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 여포가 활개치던 시절에는 조조와 여포의 전투에서 여포군의 사항계에 속아 인질로 잡히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하후돈을 득템하여 몸값을 요구하던 적들에게 당시 조조휘하의 '한호'라는 하후돈의 부장이 협상 그런거 없이 인질범들을 그대로 공격했고 하후돈은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ㅋㅋㅋ 물론, 한호 입장에서는 인질극에 휘둘리다 군세가 꺾이고 군법이 문란해져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 그랬고 후에 조조 또한 한호를 매우 치하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앞으로 그 어떤 인질극에서도 절대 상대와 타협없이 인질의 생존과 구출여부 떠나 공격하라는 메뉴얼을 정했다는... (하후돈 지못미;;;) 하후돈은 이 당시 여포와의 전투에서 인질로 잡히는 것도 모자라, 화살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며 "장애인"이 되는 오지게 재수 잡치는 일까지 당하고 만다는.... T-T 우리가 알고 있는 애꾸간지폭발의 하후돈은 바로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적장이 쏜 화살에 왼눈을 직격 당하자 화살을 뽑아, 딸려 나오는 안구를 씹어 먹으며 "이 눈은 아버지의 정(精)과 어머니의 피로 이루어진 것인데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겠느냐" 라고 외치고는 그대로 말달려 자기 눈에 활을 쏜 고순의 부장인 조성을 한 창에 꿰어 죽이는 그야말로 개간지의 카리스마를 뿜는 장면이 나오지만.... . 이건 진정 개소리 of the 개소리가 아닐 수 없고 하후돈이 받은 역대 최고최강의 버프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전투 중 누가 어디에서 쏜지도 알 길 없는 난전이 어딘가에 맞고 원바운드 되어 눈으로 튀었거나 또는 아슬아슬히 눈가를 스쳤거나 해서 다쳐 그리 된 것. 실제로는 눈에 화살을 맞으면 거의 즉사하거나 쌔뻑좋게 살아도 어마무시한 통증과 출혈에 의한 쇼크로 그대로 의식을 잃는다.... 아무튼 저무튼간에, 하후돈은 이렇게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요즘 기준으로 시각장애 6급에 해당하는 "단안실명 시각장애인"이 된다. 참고로 단안실명은 시각장애 중 유일하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고...ㅋㅋ 애꾸관련 이야기를 더해 보자면, 일단 한 눈이 저리되면 당장 원근감과 남은 눈의 시력도 크게 떨어지며 일상에서 남은 눈의 피로도 쉽게 온다. 저 당시의 전투는 거의 대개 칼과 창이 맞붙는 백병전! 사지 멀쩡해도 사소한 삑사리 한 번에 죽거나 병신이 되기 십상인 와중에 시야각이 크게 제한되는 애꾸는 엄청난 핸디캡이 아닐 수 없다. 설령 하후돈이 진짜 혼자 무쌍난무를 찍는 무력깡패라 할지라도 저 시점부터는 전투력이 급감했을 것이며, 실제로 하후돈은 저 시점부터 전투의 전면에 나서는 지휘관보다 주로 후방지원이나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닉 퓨리처럼 검은 안대를 차고 나와 궁예간지를 자랑하지만, 역사기록에는 안대착용에 관련된 언급이 없기에 아마 그냥 드러내고 다녔을걸로 추측한다. 하후돈이 삼국지연의나 그 후의 여러 매체들에서 맹장으로 묘사되는 이유도 "외눈"에서 오는 어딘가 모를ㅎ 오히려 강하고 거칠어 보이는 이미지에서 착안된 것. 동서양 막론, 예나 지금이나 외눈 + 검은안대는 강력한 악당보스의 뉘앙스를 갖고 있어서 지금도 영화나 만화보면 외눈들은 약국이나 안과에서 주는 하얀안대가 아닌 어디서 샀는지 꼭 검은안대를 했고 그 대상들은 해적선장, 빌런, 주인공의 동료라도 나중에 배신 때리거나 또는 악당이였다 어떤 계기로 주인공 일행되는 놈들이 많다. (하긴, 같은 애꾸라도 하얀안대 끼면 바로 환자이미지) 애꾸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어쩔 수 없는 게..ㅋ "애꾸눈"이미지는 정사나 연의나 솔직히 별반 그리 눈에 띄는 업적이 없음에도 하후돈이 조조측의 빼놓을 수 없는 장수 중 하나로 각인되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고.. 당시에야 빡치고 우울했을 하후돈 본인이겠지만 눈 하나를 내준 덕에 거의 2,000년 가까이 지난 현세에서도 하후돈을 조조측의 메이커 장수가 되게 해줬으니 너무 억울해 할 건 없지 않나 싶은ㅎㅎㅎ 훗날, 후한 최고의 아가리파이터이자, 모두까기 인형으로 유명한 "예형"이 하후돈을 "완체장군(完體將軍)"이라고 깠는데, 저 말 뜻 그대로는 완벽한 육체를 지녔다는.. 이는 애꾸인 하후돈을 비꼬아 놀리는 말이다. 혹자는 비쥬얼이 좋았던 하후돈을 허우대만 멀쩡하다며 놀리는 한편, 나름 외모는 인정한다는 말이였다고도 하는데, 사료의 원문과 예형의 스타일 및 당시 분위기를 고려 시... 그냥 비꼬고 놀린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위에서 살짝 언급되었지만, 당시 기준에 하후돈은 용모가 꽤 먹어주던 모양인지 외모의 훈훈함, 멋짐을 짧막하게나마 언급된 자료들이 있다. 성격도 대단히 좋은 양반이였던 걸로 전해진다. 조조따라 거병 후, 줄곧 조조진영에서 고위직을 맡았고 훗날 무관직의 정점인 대장군에 올랐음에도 생애동안 청렴하고 검소하여 물욕을 부리지 않았고 간혹 어쩌다 포상을 받아도 자신의 부장들과 병사들에게 배분 해줬으며, 애꾸가 된 다음 하후돈이 지나가면 종종 병사들이 "맹하후(盲夏侯/장님하후돈이란 뜻)"라며 수군대고 놀려도 앞에서는 모른체하고 막사에 들어가 혼자 분풀이를 했다고 한다. 부장들이나 간혹 병사들과도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고 웃으며 떠들기도 하여 병사들에게는 위엄 서린 어려운 지휘관이라기보다 친근한 형님 타입이였고 한중정벌 당시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순찰 중 예상 못한 코스에서 장로의 병사들과 마주해 난전을 벌이던 생사위기에 처했을 때, 부장 하나가 "장군! 에워싼 적병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라고 다급히 외치자, "다행히 내 눈에는 적병이 반만 보이니 괜찮네!"라며 위기상황에서도 농을 치는 헐리우드 액션 스타일 조크도 날릴 줄 아는 나이스가이였다. 장수들에게는 군법을 엄정히 적용했으나 일반 병사들에게는 비교적 널럴히 대하여 큰 중죄가 아니라면 되도록 너그럽게 봐주는 편이라 누가 조조에게 소원수리라도 긁었는지, 조조에게 불려가 군기강 해이유발 관련으로 지적을 받은 일도 있다. 군중에도 학자를 초빙해와 가르침을 받을만큼 학구열도 대단했고, 그래서인지.. 단지 야전임무뿐 아니라 다양한 군사관련 행정처리도 탁월했다고 한다. 토목에도 소질이 있는지, 진류태수 시절에는 가뭄이 들자 병사들 동원해 저수지를 만들었고 그때 본인도 같이 작업복을 입고 흙을 짊어 날랐다. 위에 나열된 사례들을 보면 알겠지만, 병사들과 가까움 + 후방보급임무 위주 + 군무행정탁월 + 공사에 능함 이런 특징들이 어우러져, 삼국지 좀 아시는 분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하후돈의 별명 중 하나인 "행보관" 타이틀이 생겨난 것. 실제로 군사적 업적이 거의 없음에도 조조가 그를 여러 기라성같은 명장, 맹장들의 윗자리에 앉혔던 것도 조조 역시 충성심이 드높고 관리력이 준수하며 훌륭한 인품으로 후배장수와 병사들을 아우르는 큰 형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또 그게 다행히 하후돈의 적성에도 맞았다. 조조 휘하의 장수들은 출신을 떠나 거의 대부분 하후돈을 잘 따르는 편이였고 전형적 무장임에도 책사들과도 곧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편하게 지냈던 걸로 보여진다. 서황과 장료가 조조휘하로 들어왔을 때 다른 기존 장수들에게 그들을 인사시키며 빠른 적응을 도운 것도 그였고 장합과 고람이 원소측에서 투항했을 때도 관도대전 마친 후 환영한다며 잘 해보자는 서신을 보낸 것도 그였다. 대체적인 이미지처럼 맹장은 비록 아니였으나 무장임에도 뛰어난 보급과 행정능력 및 부하나 후배들을 잘 아우름과 동시에 변함없는 조조를 향한 충성과 겸손, 청렴을 갖춘 듬직한 하후돈을 조조는 매우 아껴, 무슨 일이 있건 좋은일의 포상에서는 항상 하후돈을 챙겼고 수시로 그에게 필요한건 없는지 살폈으며 하후돈이 눈을 다쳤을 때, 하루동안 잠도 안자고 하후돈 곁을 지켰으며 하루에 세 번씩 하후돈의 부상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 부득불 하후돈을 꾸짖은 후에도 몰래 하후돈에게 사람을 시켜 선물이나 술, 고기 등을 보내 하후돈을 뒤로 달랬고 공식석상에서는 직위로 부르며 군신의 예로 대했어도 사석에서는 조조가 이름을 부르며 격의없이 대한 몇 안되는 인물이였다. 그런 아낌을 받아서인지.... 조조의 죽음이 임박한 무렵 크게 상심하여 본인도 병을 얻어 앓기 시작하다, 끝내 조조가 사망하자 슬픔 속에 지내다 결국 병상에 누웠고 조조 사후 즉위한 조비가 그를 위로하고 그간의 공로를 기려 대장군에 봉했지만 이미 병이 깊어 골골대던 하후돈은 대장군 임명 후 몇 달 뒤 사망한다. 완력에서는 허저나 전위에 비할 바 아니였다. 무예가 뛰어나 장료나 하후연처럼 전술적 활용도가 뛰어난 것도 아니였다. 장합이나 서황같이 우수한 지휘관도 아니였다. 후방에서 서포트를 잘했다한들, 행정처리가 탁월했다한들, 무수한 조조 아래의 먼치킨 문관들에 비하면 부족했다. 뭐 하나 유별난 게 없이 이도저도 아니라 할 수도 있는 그였지만 주군에 대한 깊은 충정, 부장들은 물론, 당시로서는 소모품으로 여겨지던 병사들에 대한 너그러움과 관대함 그리고 고위직임에도 늘 청빈했던 참공직자의 자질이 충분했던 그였기에 자신보다 뛰어난 숱한 이들을 제치고 철저한 능력지상주의자였던 조조의 총애를 받은 그의 행보는 그 시대는 물론, 지금도 귀감이 된다. 장애를 딛고 오로지 성실함과 인성으로 대장군이 된 하후돈의 성공스토리가 부디 여러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를 바라며 지금껏 다음 칼럼까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연재하던 것을 이번은 무리해서 바짝 당겨 연재해봤다는.....ㅎㅎㅎ . 나라 망친 아줌마 투톱의 뿌리가 뽑힌 기념비적인 현시국의 첫 주말을 부디 다들 즐겁고 알차게 보내시길!
어느 한국인 50대 게이 이야기 (2탄)
1탄은 여기서 https://www.vingle.net/posts/5922045 “저 H대 갑시다”, 헉 왠 학교, 이거 가서 무슨 괴상한 실험대상 되는거 야냐, 뭐 그런거 있잖아, 호모의 사고방식 고찰, 아님, 호모 심층분석 등등, 그래 “학교엔 왜가요” 했더니, “사무실에 놔두고 온 것이 있어” 하데. 그래, 이이가 교순가 아님, 서무실 직원인가 하는 머릴 굴리며, 그냥 따라 갔잖아, 뭐 학교서 무슨일 생길까 해서, 택시서 내려 교문을 지나 가는데 수위가 나오더니 “아이고 X선생님 이 야밤엔 학교엔 왠일” “아 사무실에 뭘좀 놓아두고 와서요”, 하구 총총총 그이와 걸어 들어간 곳은 그이의 연구실, 그이가 교수란 걸 알곤, 그냥 49점을 더 주었잖아, 양복 넥타이에 대학교수, 뭘 더 바라겠어, 바랄게 있다면, 그냥 그이 손잡고 웨딩 마치 울리고, 저 푸른 초원위에 집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년 사는거지 뭐. 연구실을 들러서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와, 둘이 청진동 가서 해장국을 먹고 하는데 시간이 자정이 훨 넘었더라구. “집에 가셔야지” “아니 좀더 얘기좀 하다가” 그날 늦게 까지 둘이서 놀았지, 그리고 새벽녁 해어지면서, 우리 또 만나기로 했잖아, 난생 첨으로 내가 집 전화 번호를 날렸고, 그이도 그이 학교 사무실 전화 번홀 내게 주었고. 그이와 헤어진 시간이 거의 3시쯤 되었었나봐, 시간을 보니 집에 갔다 교회 갈려면 시간이 넘 촉박하데, 내가 주제꼴에 교회 일부예밸 한번 도 빼먹은 적이 없거든, 교회서 쫓아내기 전 까진. 교회 다녀와 낮잠을 마악 자는데, 전화가... “나 형인데” 하는 목소릴 들으니 그이더라구, 어휴 기뻐! 그래 전활 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엄마 쳐다 보며 “엄마 고마워!” 했지. “저녁에 뭐하니, 밥먹을래 같이?” “예” “뭐 먹을까?” “형 나 생선회 먹구 싶은데” 그래 그날 명동 동서화랑서 만나 차를 마시구, 대만 대사관 앞에 있던 미락 가서 회도 먹고, 늦게까지 형이랑 졸라 놀았잖아. “나랑 사귀어 볼래? “저 한 번도 남자 사귀어 본적 없는데요” 그렇게 그이랑 나랑 사귀게 되었잖아. 그렇게 시작된 우린 일년여 동안을 사귀였구, 그 형과의 낭만으로 인해 난 엄말 협박해(대학 졸업도 앞두고 취업 문제도 있고 하는 식의 개수작으로) 내 방에 전용 전화선도 싸악 깔아 놓고, 미국에 있는 형에게 부탁해, 근사한 응답전화기도 하나 설치, 그땐 삐삐도 없었거든, 그러니 그이나 나나 서로 연락 할려면, 전화 밖에 없었으니까, 엄마가 혹시 청소라도 하시다 응답기 만지실까 응답기에 비밀번호도 달고. 우린 일주일에 작으면 두번, 많으면 세번을 만났고, 몇 달후엔 형이 날 집에 데리고 가 아주 친한 동생으로 소개해, 자연히 형네 집도 드나 들고 하는, 형을 만난 이후로 난 극장도, 공원도, 딱 끊고, 아주 정숙한 생활을 시작했잖아. 87년 여름 방학땐, 우린 우리 둘만의 신혼 여행으로, 일본, 대만 홍콩을 놀러 다녀 왔잖아, 정말이야, 그 땐 세상서 부러운게 없더라구. 난 엄마 한테 세상구경, 그 형은 어학 답사란 말도 안되는 핑곌대고. 난 정말 그형이 넘 좋았어, 따스하고, 작은것에 신경 잘쓰고, 내가 좋아 한다면 뭐라도 구해 올라구 노력하구. 또 만나면, 밥 먹고 헤어질때 까지 꼭 자기 가슴에 안고, 도란 도란 이런저런 얘기히며 “형이 정말 많이 사랑 하는거 알지” “으응 형 나두 형 많이 사랑해” 둘이서 신혼 여행이랍시라구, 해외 여행을 다녀온후, 나 취직 되었잖아. 복학 하구나서, 교수의 추천으로 모 신문사서 하는 대학 논문 경연 인가 하는데에다 글을 냈는데, 글쎄 그게 당선이 되고, 기쁜 마음에 상금을 받으러 갔는데, 거기 심사위원중 한명이 나한테, 올림픽 조직위원회 일해 볼 의향이 없냐고 하데, “아직 학생인데요” 했더니 “조직위서 일하면 학교는 한달에 한번만 가도 된다고” 하데. 서울시서 학교에 뭘 보낸데나 뭔갈 해서. “에잉 공부 하기도 싫은데, 일도 하고 돈도 벌고,학교도 안가고”, 그래서 그냥 일을 시작했잖아. 그렇게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엔 형이랑 열심히 데이트를 하는 아주 이상적인 게이 생활을 열심히 하고, 정말 세상에 남 부러울게 없는 그런 날들.... 형은 우리 사랑 변치 말자고, 내게 반지를 하나 주었구, 둘이 만나고 일년이 거의 다 되어갔나. 올림픽 개막식을 앞두고 정말 졸라 바빳어, 거의 맨날 사무실서 자구 먹구, 왠 일이 그리 많은지, 일에 치여 거의 죽어 가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형이 전화가 뜸하드라구. 내가 전화 하면, 조교가 어디 가셨는데요, 전화 달라구 메모 남겨 놓으면 전화두 안오고. 그래 내 생각엔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만 했지. 우리 사랑 변치 말자구 반지 준 남자가, 우리 사랑 변치 말자고 내가 준 혁띠 찬 남자가 바람을 피리라곤 생각을 못했지. 그래 무슨 일이 있긴 있는데 하는 생각만 있지, 일이 바빠 시간이 없으니, 어찌 해볼수가 없잖아. 형이랑 놀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거든, 술집도 가끔가고, 여기저기 드라이브가 밥도 먹고. 형이 술집 가끔 갔는데, 자연스레 나도 거기 사장, 일하는 형들과도 알게 되고 했지뭐. 하룬 출장을 잠실로 갔다가, 사무실로 가는길에, 땡땡일 좀 쳐볼요량으로 신세계 백화점엘 갔잖아. 형이 뭐가 섭섭해서 연락이 없나 하는 아주 여린 맘으로 형에게 줄 선물이나 하나 사려고. 정말 이야, 첨 해본 사랑이라 깨진다는건 생각도 못했고, 그저 그냥 그형만을 사랑하면서, 일생을 이렇게 보내도 행복하다 하는 자세였거든 그땐. 그날 나 뭐샸나구? 논노 마르시아노서 양복 샀잖아, 내가 형 양복 사이즈를 잘 알고 있었거든, 그래 선물로 주면 바지 기장은 그냥 논노서 줄여 주니까. 아주 이쁜 감청색으로, 돈도 많이 못 버는데, 졸라 큰맘 먹고 신세곌 나오는데, 입구에서 형이랑 몇번 갔던 술집 사장을 만났잖아. “에이 서방 바꼈다구 단골 끊구 미워잉” 그소릴 듣는데 그을쎄, 아주 아주 큰 돌덩이가 뒷 머릴 그냥 때리는 것 같은거야. “무슨 말이야, 우리 아직 잘 지내는데” 그 소릴 듣더니 사장이, 무슨 낌새를 챘는지 날 바로 옆 다방으로 끌고 가더라구. “정말이나 니네 둘 아직 사귀니?” “응, 근데 형이 요즘 행동이 좀” “그놈이 결국 결국 어린애 가슴에 못을 박는구나” 띵, 띵, 띵 이 내 머릴 스치고 “뭔소리 나 반지도 받았느데” “그놈 한테 반지 받은 놈이 너 하나 뿐일줄 아니, 그놈이 돌린반지들 모아 팔면, 파싸롱 하난 채리지” 하는 소릴 하는데, 그냥 눈물만 졸라 나더라구. 믿고 싶지도 않구. 그냥 앉아서 눈물만 흘리구,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는데, 내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거야. 사장이 내가 넘 불쌍했는지, 내 손을 붙잡고 롯데백화점에 있는 섬마을에 가 초밥을 사주더라구. 내가 눈물만 흘리고 있으니까 “야, 세상에 남자가 그놈 하나니, 너두 게이 생활 좀 더함, 사랑하다 차이구 걷어차구 할꺼니까, 빨리 먹고 힘내” 하데. 근데 말루만 듣고는 정말 믿질 못하겠는거야. 동경서 둘이 우동 먹으며 얼굴에 묻은 후리가께 닦아주며 행복했구, 타이페이서 콩빙수 먹으며 서로 이빨에 낀 콩 껍질 빼주며 실실 웃고, 홍콩서 배타고 아경 보며, 둘이 손 꼭 잡고 “우리 내년에 또 오자” 했던 그형이 그형이.... “솔직히 나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수 없다” 하며 내가 사장한테 사무실 전화랑 집 전활 번호 쥐여주고, 그 날을 사무실 안가고 그냥 졸라 울었잖아(물론 그 담날 사무실가서 졸라 혼났음). 그날 혼자 기차타고 춘천가 이디오피아에 앉아서 커피 한잔에, 담배 한갑 놓고, 한숨쉬고, 세상 태어나 첨 으로 가슴이 아픈 경험을 하고 있는 그런날 들을 보내는데, 가끔씩 형이 전화가 와 저녁을 먹자 해도 “형 나 오늘 넘 바빠” 일부러 피하구. 전활 끊구 또 울구, 또 울구. 하룬 밤에 집에서 벽에 머리 기대고, 둘이 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보며, 울고 있는데, 형이 전활 하데 “무슨일 있니?, 요즘 얼굴두 자주 못보구, 아직 형 사랑하지?” “으응 많이 사랑해” 그렇게 전활 끊구, 넘 속상해, 궁상과 음악을 들으며 있는데,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게 꼭 전활 어디 술집 같은데서 한 것 같은거야, 음악 소리두 들리구, 사람 소리두 배경으로 들리구, 혹시 하는 생각에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갔잖아, 그 형이 자주 가던 그 술집에. (3부) 뜨윽 들어갔더니, 마담, 형들, 또 단골 형들이 주욱 둥그런 테이블 주위에 모여 앉아 있고, 그을쎄 그 형이, 구석 테이블에 아주 어린놈과 둘이 앉아 아주 다정히 맥주를 조지고 있더라구. 형은 날 보더니 아주 놀라며 “왠일이야 여긴 이밤에” “형은 여기 왠일” 하니까 머뭇 머뭇 “어 후배랑 술이나 한잔 할려구” 하더라구. 후배, 정말 밉고 못나 보이더라, 그 길로 반지를 뺐잖아 내 손가락서. “형 새 반지 사지 말구, 이 반지 줘 그리구 그 쪽두요, 이 반지 받았다 나중에 돌려 드려요, 이 형이, 이놈저놈 데리구 노느라 돈도 많이 없을거니까” 하구 반질 탁자에 던지구 나오는데, 형이 쫓아 나오며 “오해야, 내 말좀 듣고 가” “형 지금 무슨 소릴 해도 귀에 안들어와, 그냥 갈께” 그 담 날 부터 일만 넘 열심히 했지, 그냥 피곤하게 굴리고, 집에가 가슴 아플 시간도 없이 넘 피곤해 그냥 잠들고, 하는 날들, 그런데, 사건이 있고 며칠이 지난후 집에 와보니 소포가 와 있는거야. 반지도 들어 있고 편지도 있고. “넘 보고 싶다, 미안해 형이 가슴 아프게 한거, 왜 그랬는지 몰라, 용서해 준다면” 그러면서 몇월 몇일에 수유리 419 탑 근처에 있는 아카데미 하우스에 방을 잡고 기다릴테니, 꼭 오라는 말과 함께. 반질 보고, 편질 읽으니 맘이 확 무너 지는거야. 넘 기뻐서, 넘 따스해서. 거기다, 내가 서울서 제일 좋아 하는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날 기다려, 하는 생각에 맘이 설레데. 나 정말 아카데미 하우스 구름의 집서 밥 먹고 차 마시는 것 넘 좋아 했거든(아직도 서울에 있는지). 또 다른 쪽으론 한 번 바람난 인간은 바람기 재우기가 불가능하다는데 하는 생각으로 “나가지마 나가지마” 하고 또 다른 한쪽은 너 아직 그 사람 넘 사랑하잖아 “나가 나가”. 그날, 만나자고 한 날이 토요일 이였는데, 하루 종일 똥마려운 강아지 처럼 안절부절 못하다, 갔잖아. 그 형이 넘 좋아서, 그 형을 넘 사랑해서. 호텔가서 “바람둥이 형 만나러 왔는데요” 했더니 방번홀 가르쳐 주데. 방으로 걸어 가는데 방으로 걸어 가는데, 넘 많이 설레어, 거의 숨을 못 쉬겠더라구. 방 앞에 서서 똑똑 했더니, 방문이 열리는데, 형이, 내가 사랑하는 형이, 하얀 백양삼각빤스 하나만 달랑 입고 문을 열더라구. 나 그냥 쓰려 졌잖아, 그 형품에, 그형의 따스한 가슴에. 우린 다시 그렇게 시작 했구, 형은 내가 섭섭하지 않게 전화도 잘하구, 일이 있어 못 만날것 같으면 미리미리 연락주구, 난 다시 행복해 졌잖아. 세상에 부러울게 없더라구, 사랑을 다시 찾은 게이가 뭐가 더 필요해. 날 잡아 형 데리구 신세계가 바지도 줄여 주어야지 하면서. 하루는 형이 “오늘 학회가 있으니 못 만난다 우리 낼 보자” 하데 그래 일찍 집에가, 엄마랑 밥먹고 연속극 보고 있는데, 전화가 찌리링 오데. “여보세요” “형이다, 술집 형” “으응 웬일이야” “글쎄 지금 네 애인이 어떤 놈 이랑 시시덕거리는 걸 봤단다” 그냥 나가서 택실 탔잖아, 종로3가 까지 가는데, 손이 벌벌 떨리고, 마음은 벌렁벌렁. 손에 쥐여든 마르시아노 양복 가방위로 눈물이 또 뚝뚝 떨어지고. 파고다 학원 뒤쪽에 있던 술집 앞에 서서 있는데, 아무것도 안보이는거야. 사람이 지나가도, 차가 지나가도, 세상에 꼭 나 혼자인 기분. 한 삼십분 기다렸나. 그 형이, 내 사랑 형이, 어떤 놈이랑 어깰 마주하고 거의 키스를 하다시피 얼굴을 맞대고 술집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세상에 사랑은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릴 뒤집고 들어 오더라구. “형 학회 잘했니” 하며 있는힘을 다해 귓방맹이를 한대 올려 쳤잖아. 양복을 집어 던지고 등을 돌렸는데, 잡지를 않더라구. 그렇게 미워 하는데도 난 맘 속으로 “한번 잡아주지, 한번만 더 미안 하다고 하지 그럼 다시 사랑할수 있는데”, 그런데 잡지 않더라구. 난 그 길로 파고다 극장에 갔잖아, 그때 까지만 해도, 파싸롱이 새벽 4시까지 했거든, 심야상영인가 뭔가 하면서. 극장에 앉아 있는데, 싸구려 극장 화면도 울고, 나도 울고. 그렇게 그렇게, 난 첫 서방을 여의었지. 죽는 날 까지 사랑하고 잡던 그형, 좋은 걸 보면 제일 먼저 생각 나던 그형... 그러던 어느날 일요일, 그날도 어김없이 성경이랑 찬송 챙겨, 교회에 갔다가 발걸음도 가벼이 파고다 공원으로 향했지, 지금은 탑골공원인가, 두근두근, 벌렁벌렁 하는 맘을 다스리면서, 그런데 어떤 외국인이 나한테 말을 붙이는 거야. 나 정말 그때만 해두, 양놈은 에이즈, 에이즈는 양놈 이란 아주 후진 생각이 머리속에 꽉 차있는 그런 순진한 게이였거든. 그래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는데, 아니 이눔의 양키가 자꾸 쫓아 오면서 말도 걸구, 실실웃구, 웃는건 좋아서 웃는거고, 씨이발, 말은 뭔말을 하는지 모르겠더라구. 영어만 좀 하믄 “야 방세야 날 좀 그냥 놔둬” 했을텐데, 그냥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으로 여기저기 도망을 다니는데, 아아니 글씨 그이가 기냥 마악 따라오구, “Home”두 나오구, “go out”두 나오구 또 “come” 소리두 나오구 하는게, 혹시 “너 우리집 갈래?” 하는소리가 아닌가 싶드라구. 포기하지 않구 자꾸 끼작끼작 하는거야. 그래서 “Let’s go”를 했잖아. 그 한마디가, 그 “렛츠고” 한 마디가, 내 게이 인생을 화악 바꾸어 놓을 줄이야 증말 누가 알았겠어. 둘이 나와서, 그의 차를 타고 북악터널 근처 올림피아 호텔 뒷쪽에 있던 그이의 집엘 갔는데, 왠 남자 혼자 사는 집이 그리고 깨끗하고, 잘 정돈이 되어 있는지, 그이의 깔끔함이 눈에 사악 들어오데. 주스를 꺼내오구 하면서 뭐라구 씨부렁거리는데, 뭔소린질 알아 들을 수가 있어야지, 중1때부터 줄창 끼고 산게 영어 자습서 인데도, 뭐 그냥 백치 아다다 됬잖아 그냥 나, 뭔소린지도 알아 듣지도 못하는게, 그냥 실실웃고, “yes” 만 졸라 남발 했잖아. 자기 얘길 막 하는데, 내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니까, 지도도 꺼내오고, 한영사전도 가지고와, 마악 단어를 보여주고 하는데, 지도를 집는 것을 보니 캐나다 퀘백에 손가락을 뜨윽 올려 놓는 것을 보니, 아마도 퀘백서 왔다는 것 같단 소릴 하는 것 같애. “퀘백은 프랑스말 한다는데, 그럼 얘가 지금까지 불어를 씨불인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놀다 그이의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 갔는데, 침대 옆 테이블에 작은 전축이 하나 달랑 있는데, 그 옆에 민해경 테이프. 그래 내가 용길 내 물어 봤잖아 영어로 “Do You like 민해경” 했더니, 마악 웃더라구. 자는데 내등을 그 사람 배위에 사알작 데고 자는데, 또 다른 깊은 맛이 있는 것 같더라구. 전 남편이랑 여행도 가구 해서 같은 침대서 잠도 서너번 짭짤이 잤는데, 그인 항상 등을 돌리구 잤더든, 근데 이 양키 그인 내 뒤에서 날 꽉 껴안구 자는데, 좋더라. 늘어지게 자구, 아침에 일어 났는데, 글쎄 그이가 보이질 않데. 그래 빤스만 덜렁 입구 겨나와 보니까, 글쎄 그이가 부엌서 아침을 만들고 있드라구. 등치는 산더미만 한게, 부엌서 후라이팬 들고 설치는걸 뒤에서 보는데, “참 귀엽다” 하는 생각이 들고, 그으래 양키들 무서워만 할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하데. 그렇게, 그렇게 그이와 사귀게 되었잖아, 영어 한마디 못하며,둘이 만남 영어사전 팍팍 찾아가며 말도 안되는 대화졸라 하구, 내가 그때 대학 4학년 이였는데, 공부에 관심 없는 놈이, 대학 4학년이라구, 뭔 걱정있었겠어. 나 대학 4학년 초에 종로 3가에 있던 요리학원 취미반 다녔잖아, 두달동안, 엄마한텐 취업준비 한다고 학원 간다고 돈받아, 요리학원 등록 했잖아, 왜냐구? 게이로 혼자 살 생각하니까, 밥도 할줄 알아야, 맛있게 먹고 놀거 아니야, 그래서 요리학원 취미반을 두달 동안 열심히 다니며, 열심이 배웠잖아, 보다 낳은 내 게이 인생을 위해. 참 좋더라구, 첨엔 양키라 무서워서, 걱정 했는데, 사귀고 보니까, 좋은 점이 더 많더라구, 집에서 편히 놀수 있다는 것…. 그이는 소공동서 사무실을 운영 했는데, 가죽옷 밍크 같은 것들을 캐나다에 수출하는 오파상 비스므리 한 일을 했었고(그이의 설명듣고도 못알아 듣고, 사무실 놀러가 직원이 설명해 주어서 알았지), 나인 30대 후반, 그이가 내 학교 시간푤 알고 있어(내가 보여줬지), 학교가는 날은 수업 마치는 시간엔 여지없이 그이가 차를 끌구와 벙실벙실 웃으며, 차에서 날 기다렸고, 난 친구들에게 “나 요즘 영어공부 하잖아, 취업할람 영어좀 해야지” 하는 개소릴 남발하며, 그이와 데이틀 즐겼지. 말도 안통하고, 서로 할줄아는 것은 바디 랭귀지 박에 없었지만, 나 그이 사랑했잖아. 그이도 날 사랑하는 눈치였고, 매일 만남 내게 영어 가르쳐 준다고, 집에서 둘이 식탁에 않아 책 펴놓고, 몇 마다 하고 그렇게 맨날 노는데, 그이가 전활 집으로 하면, 내가 내방서 되지두 않는 영어로 전활 받음 엄만 날 쳐다 보시며 “참 아들 하난 똑똑 하게 났다니까 내가, 미국가 공부 안해 보구두, 우리 앤 저렇게 영어 잘하니” 대견스러워 하시면서, 그냥 내가 엄마 “영어학원” 소리만 나면, 그냥 학원빌 팍팍 주시구. 그렇게 놀며 2학기가 시작되었고, 남들은 다 취업 준비다 뭐다 해, 도서관서 밤을 세는데 난, 그이 만나 놀랴, 일주일에 삼일 용산 미군부대에 있는 버거킹서 알바하고. 거긴 무슨 줄이 있어야 취직이 되는 곳이었는데, 그이가 아는 사람 소개로 날, 그때 아마 알바로 한 시간에 700원 인갈 주었거든 서울서, 근데 거긴 한시간에 삼불오십센트주데, 거기다 보너스가 일년에 600프로구. 아 행복한 나날들, 학교 잘다녀, 그이가 맬 학교로 아님 용산으로 차끌고 데리러와, 또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돈도 좀 벌구, 매일 매일 행복했지 뭐. 그렇게 그이랑, 한 일년이 조금 안되는 시간을 사랑했구, 시간이 지날수록 영어로 똥오줌 가릴지도 아는 수준이 된 어느날, 그이가 하얏트 호텔에 가서 밥을 먹자고 하데, 그이가 하얏트에 있는 헬스 크럽을 다니고 있었거든.., 그래 둘이가서 밥을 먹고 커필 마시며 앉아 있는데. 왠 아저씨가 오데, “아 왠일이세요” 알고 봤더니 그이 사무실서 일하는, 그이 사무실 직원들이 그이가 게이인걸 다 안 관계로 난 저절로 그냥 커밍아웃 했었잖아 그이 사무실 직원들에게. 그 아저씨랑, 셋이 앉아서 얘길 하는데, 알고 봤더니 그 아저씨가 통역을 하러 놔왔드라구. 쪽팔려! 일년을 넘게 데이트하구, 만나구 했는데, 말이 안 통해 삼자가 나와서,, 휴우… 그 아저씨왈... 제임스가 캐나다에 돌아 가야 하는데, 나랑 같이 가고 싶다는 내용을 통역을 해 주시데, 정말 할말이 한 마디도 없두라구, 해외라구 해봤자, 일본 동남아 서너나라 가본거, 대학 일학년때 미국 한번 가본거(엄마랑, 누나, 형 만나러) 밖에 없는데. 나 정말 제임스 좋아 했는데, “으익 씨이발 또가”하는 생각이 들며, 참 많이 속상하드라. 아니 팔자가, 왜 이꼴인가 하는 생각이 마악 들구, 첫 서방은 난봉꾼이요, 둘짼 졸라 좋아 할만 하니깐 간다 그러구. 씨이발 소리가 막 나는 거야. 많이 속상하더라, 한국 사람이 아니어서, 언젠간 갈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간단 소리가 나오니, 눈물도 나구, 마구 마구 가슴도 아프구, 그이가 사무실 정리하느라 바쁘구, 난 졸업이 코앞에와 , 공부도 못하는게 논문 쓰느라 죽을똥 살똥 하구. 일하랴, 졸업논문쓰랴, 그이랑 이별준비 하랴, 그런 날들을 보냈지. 결정을 못하겠더라구, 세상 태어나 첨으로 누군가가 날 좋아해, 같이 가서 살자는 얘길 했는데, 선뜻 결정을 못하는 내가 넘 밉더라구, “에이 일본만 되두, 갈수 있는데” “아니 미국만 해두 나 가는데” 이런 생각이 마구 들고, 생각을 해봐, 캐나다에 서방하나 달랑 믿고 갔다가, 깨지기라도 함, 캐나다서 집에 올람 좀 멀어, 일본이야 현해탄 건너 수영이라도 해 서울에 돌아오지, 미국은 형이랑 누나 한테 감 되지 하는데, 캐나다.. 그이는 가는게 싫었구, 난 보내는게 싫었구, 그래 둘이는 시간만 남 같이 죽자사자 했잖아. 난 거의 학굘 그이의 집에서 다니구, 둘다 친구두 안 만나구, 간다는 말이 나온뒤 시간이 정말 잘 가데, 한것없이 시간은 가구, 난 결정을 못내리구, 그이는 내가 부담가질까봐 조르지도 못하구. 그날, 괴상한 트럭이 와서 그이의 짐을 실어낸 날, 나 그냥 주저 앉아서 넘 많아 울었잖아. 그의 집 베란다에 앉아서 줄줄 눈물 흘리는데, 그이가 와서 날 뒤에서 껴안으며 축축한 눈물을 흘리는데, 그 큰 남자가 눈물을 내 목위에 뿌리는데, 가슴이 무너지데. 그냥 둘이 서로 얼굴 마주보며 “I love you” 소릴 수십번 하구, 둘이 부둥켜 안구 그냥 울었지 뭐, 용기 없어 님 못 따라 가는 주제에 뭐 할말이 있었겠어. 가자구 떼 못쓰는 용기없는 그이가 무슨 할말이 있었겠어. 그리구 나서 사일을 소공동에 있는 프라자 호텔서 지냈잖아, 난 일두 안하구, 학기말인데 학교두 안가구, 둘이서 걷구 또 걷다 치치면, 그냥 주저 앉아서 얼굴만 쳐다보구, 할말은 많은데, 난 영어를 못해 표현도 못하고, 그인 한국말을 몰라 못하구. 그이가 떠나기 바로 전 날, 나한테 편지 한통을 주데. 그 편질 전해 주는데, 그이 제임스 눈이 버얼게 지며, 날 쳐다 보는데, 심정 같아선 “썅 그냥갈까. 주제에 이런 님 어디서 만날려고” 하는 생각이 가슴을 쥐어짜고. 편질 열어 봤더니, 대한항공 표드라구, 뉴욕을 들려서 퀘벡 까지 오고가는, 오는날 가는날도 없이 그냥 달랑 표한장 이랑, 편지. 이런 내용의 “자기야, 자구 있는 애기람, 그냥 달랑 안고 갈텐데, 말 못하는 동물 이라면 그냥 비행기에 실어 데리구 갈텐데, 사는 마지막 날 까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과 같이 갈수 없는게 넘 슬프다” 얼추 이런 내용의. 나두 편지가 있었거든, 그이가 짐 싸기 시작할 때부터 짧은 영어로 개발 세발 쓴게. “자기야, 갈수있는 용길 내지 못하는 내가 정말 밉다, 캐나다가 내 모든걸 버리고 가기엔 넘 생소하구, 멀기두 하구, 자기랑 같이 못가는 나 미워하지 말구, 둘이 보낸 추억만 잘 간직하구 살다, 또 만나자” 얼추 이런 내용의 편질. 가는 그이에게 난 민해경 이름이 들어간 모든 테이프랑 판을 선물 했잖아, 유달리 뭔 소릴지도 모르며, 민해경의 목소릴 좋아 했던 그이였거든, 시내를 다 뒤져, 민해경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은 다, 그리구 그인 나에게 방학하면 꼭 자기 보러 오라구 날짜 없는 비행기표를 주구. 그이가 떠나 던 날, 참 신기하게 하루종일 하늘이 어둡데, 비도 오지 않는게 구름이 낮게 끼구, 날씨두 춥구, 마음도 춥고. 공항을 가는 택시 안에서, 나 정말 안 울을라구, 졸라 노력했는데, 제임스가 내손을 꽉 잡구 코를 벌렁 벌렁 거리며, 눈물을 흘리더라구, 그걸 보니까 물터진 뚝방 처럼 내 눈에서두 눈물이 줄줄 또 흐르구, 둘이서 택시안에서 손 잡구 우는데, 운전사 아저씨가 흘끔 흘끔 뒤를 보며, “꼴갑들 하네” 하는 시선을 보내구. 그이가 보딩패스를 받구 나니까, 정말 이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데. 이별은 눈에는 안보이구, 가슴만 아프게 하는것인줄 알았는데, 이별이 보이데. 둘이서 공항 구석에 주저 앉아, 꼭 손을 붙잡고, 아무말도 못하고, 서로의 눈만 쳐다보며, 난 그이에게 안녕을 고하구, 제임슨 나에게 안녕을 고하구. 그이가 비행기 타러 들어갈 시간이 됬는데, 넘 슬퍼 눈물도 않나구, 넘 가슴아파, 아픔도 안 느껴지구, 그렇게 비행기 표 보여주고 들어 가는 입구에 서있는데, 그이가 “wherever I am, whatever I do, you will be right here in my heart” 하면서 내 손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대드라구, 참으려 노력 했던 눈물이 솟구, 그이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아주 큰 뽀뽀를 하더라구. 여기 저기서 “으잉, 망측, 왠 제수, 흉해” 소리가 막 들리구, 난 아랑곳 하지 않구 그냥 그이랑 마지막 뽀뽀를….. 그렇게 제임스는 가구, 눈물이 마를 때까지, 난 공항 밖에서 울다 택시를 탔지. 제임슨 가구, 난 마지막 방학을 했구, 제임슨 가서 거의 매일을 빼지 않구 전활하구, 난 전화만 끊고남, 베개 껴안고 혼자 울구 또 울구. 방학 하자 마자 나 뭐 했냐구, 대한항공에 갔잖아, 제임스가 준 비행기표 들구, “이걸루 캐나다 갈수 있나요” 그래서 나 갔잖아, 캐나다에, 제임스랑 편지랑 전화로 주고 받은 계획이 뉴욕서 만나 놀다, 뉴욕서 캐나다로 가는 걸구 하구서. 아주 추운 1월 어느날 뉴욕 캐네디 공항에 도착 했는데, 그 산더미만 한 그이가, 나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그이가, 벙실 벙실 웃으며, 날 기다리드라구. 날 번쩍 안아 들면서 넘 기뻐 하는 모습을 보며, 나두 기뻤구, 둘이서 뉴욕을 마악 쏘아 다니면서, 노는데 넘 행복하드라. 그이가 한국을 떠나구, 내가 그일 만나러 뉴욕에 올 때까지 정말 생각이 많았거든, 둘이는 알구 있었구, 이미 서로 편지로 얘길해서, 뭐냐면 내가 캐나다로 와 살수 없다는 걸. 그럼 왜 갔냐구? 그냥 둘이 좋아서, 그냥 둘이 정이 넘쳐서. 그렇게 뉴욕서 놀다, 캐나다 퀘벡가서, 제임스 가족도 만나구 놀다가, 돌아오는데, 그 땐 별로 많이 안 슬프드라구, 그냥 둘이 현실이 무언지, 둘이 같이 살수 있는 방법이 없는걸 확실이 인식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두 나 쪼금 울었지, 공항서. 그래두 섭섭해서. 제임스랑 사귀며 넘 뼈져리게 느꼈지. 그래서, 난 캐나다서 돌아오자 마자 영어 공부 시작했잖아. 별다른 재주도 없고, 취직 면접 제출 불가능 판정의 성적증명서를 받은 내가, 먹구 살라면 영어라두 하는 생각으로. 꼬박 6개월을 하루에 15시간 씩, 하루도 빼놓지 않구 집에서 공부 했잖아, 엄마 한테 “너 제정신이니” 소리들어가며, 테이프 듣구, 쓸데없는 영어잡지 읽구, AFKN 졸라 보며, 하루두 안 빼고 6개월을 방에서만 보냈잖아. 영어 잘해야, 행복하게 잘 산다라는 생각하나, 영어 잘해야 취직 할수 있다 하는 생각으로. 정확히 6개월을 그렇게 방구석서 보냈지. 그리고 취직을 했는데... (4부, 마지막회) 신기해 사는게, 그렇게 놀다 와서 취직을 했는데, 글쎄 내가 영얼 몇마디 한다구 회사서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지사로 날 보낸 것 있지. 그래서 필리핀서 일년반 살았잖아. 필리핀에서 일을 할 때, 마카티라는 동네서 살았는데, 회사서 아파트를 준비해 거기서 한국서 같이간 과장이란 놈이랑 함께 살았잖아, 결혼두 하구, 자식도 있는 사람이였는데, 그렇게 여잘 밝히드라구, 하여간 퇴근만 하면 맛사지, 술집 등등, 자칭 변강쇠, 그래 이 핑계, 저 핑계대구, 혼자서 놀기를 시작 했지, 혼자서 마비니(서울의 이태원쯤) 가서 세이키스 피자가서, 라이브루 음악 들으며, 피자먹구, 맥주 마시구, 그리구 토요일엔 웨스틴 호텔 로비가서, 맥주 마시며, 라이브 음악듣구, 그렇게 자꾸 혼자 노니까, 이 과장이란 사람이, 삐진 것 같드라구. 말두 시큰둥하게 하구, 괜히 아무일두 아닌 것 가지구, 집에서 삐지구, 생난릴 치는데, 뭐 내가 할말이 있었겠어, 그래두 상산데, 까라문 까야지. 정말이야, 첨엔 해외근무라구 해서 마악 좋았었는데, 막상 필리핀서 사니까 재미가 넘 없드라구, 정말 혼자서 노는 것두 하루, 이틀이지, 하루저녁, 과장이랑 아리스토크랏 이라는 식당엘 갔는데, 밥을 먹다가 과장이 “자네 호모지” 하데. “왜요?”그냥 긍정두 부정두 안하구 답을 했잖아. “맛사지도 안가구, 혼자서 마비니 가서 놀구….” “혼자 마비니 가서 놀문 다 호몬가요?” 하믄서 아무 말을 안했잖아. 그리구 그 과장두 더 이상 말이 없데. 과장은 3개월에 한 번씩 한국에 다녀 왔는데, 하여간, 필리핀 간지 약 9개월 만에 첨으루다 서울에 다니러 왔는데, 본사 남자 직원들이 날 보는 눈빛이 곱지가 않더라구, “아하 방세들, 신입인 내가 필리핀을 가서 부러워서, 후진것들” 이렇게 자위 하며, 놀다 다시 마닐라에 왔구, 뭐 별루 과장 이란 인간두 내게 신경 쓰는 것 같지두 않구, 내 사생활이 어떻건, 그 사람한테야 상관 없는 일이잖아. 내가 뭐 자길 좋아한다구 한것도 아니구, 하여간 정확히 일년 반 동안 필리핀서 일하구, 서울 본사로 왔는데. 날이 감 갈수록, 나랑 놀아주는 남자 직원들이 없는거야, 넘 신기하데. “으윽, 내가 뭐 잘못했나, 내가 넘 잘생겨서, 이놈들이 질투를” 회식을 하구, 어딜 놀러가두 지네끼리 쏘옥 가구, 나랑 당구 졸라 치던, 직원애들두, 당구 한 번 치잔 소릴 않하구. 내가 왕따 당하는게 피부루 콱콱 느껴지데. 하루는 친하게 지내던 여직원 한명이 “저 오늘 저녁줌 사주시면 안돼요” 하데 그래 둘이서 저녁을 먹구, 차를 한잔 마시는데 “대리님 넘 속상하시겠다..” “왜? 뭐 때문에?” “모르세요” “뭘” “어머머 정말 모르세요, 김과장이 회사에 좌악, 대리님 호모라구 소식 전하구 다닌 것”, 엄마야, 졸라 황당하데, 지가 무슨 증거루다가, 설상 지가 무슨 증거가 있어두, 개인 사생활을 지 맘대루 떠들구 다니나, 하는 생각 때문에. 그 얘길 듣구 나니, 정말 회사 출근 자체가 힘들어 지드라구, 일도 손에 안잡히구, 그 김과장 새끼만 보믄, 손이 부들부들 떨리구 “저 새끼 집에가 확 다 불어, 그 개새끼가 필리핀서 어떻게 살았는지” 하는 생각만 졸라 들구. 너무 속상하구, 분해서, 더 이상 출근을 못 하겠더라구, 맘 같아서야 이런일루 지면, 게이인생 끝이다 하는 생각두 굴뚝 같았는데, 그렇게 하기두 싫구. 그래서 사표를 냈잖아. 사표를 내가 낸다는 소문이 돌자, 정말 모든 남자 직원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도는 듯 하데 “다행이야, 변태 새끼가 없어지다니, 아휴 저 찝찝한 것 때문에 힘들었었는데” 하는 그런 표정들 있잖아. 너무 화가 나구, 분해서, 정말 몇일을 잠두 잘 못자구, 밥두 잘 못먹구 하다, 마지막 날 책상을 다 정리하구 나오면서, 회사 곳곳에 편지를 붙이구 왔잖아. “여러분 호모 대리는 갑니다, 김 과장님 넘 감사드리구요, 제 입으루 말하기 힘들걸 대신 다 해주셔서. 근데 세상에 호모는 저 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족중에두 있을수 있구, 여러분의 자식중 한명이 호모 일수두 있습니다. 세상에 10%가 호몬데, 여러분 가족중에 한 명이 호모람, 제게 한 것 하지 마시구, 잘 감싸 주시구, 이해해 주세요, 싸우지 못하구, 내 권리를 찾지 못하구, 그냥 퇴사 하는 제가 미울 뿐입니다”라는 편지를. 물론 사장실에두 한 통을 전하구. 엄만 이핼 못하시구, 내가 회사 그만 둘걸 넘 속상해 하시드라구. 엄마한테 “엄마, 나 호모라구 회사에 소문나 그만뒀잖아” 소릴 못하겠데. 그렇게 퇴사를 하구 나니까 정말 한국이 싫어 지더라구, 어디감 또 그런일 안 생기겠어 하는 생각에. 그래 마음도 달래구, 좀 놀 겸, 미국에 갔잖아, 엄마 한테 미국에 있는 조카들이 넘 보고 잡아 하는 핑계를 … 그리구 다시 취직을 했잖아, 그리구 차두 사구. 서울서 길 뛸람 젤 필요한게 차드라구, 그래 장안동 가서 중고 콩코드를 샀잖아. 차 사구 나니까 남 부러운게 없데, 토요일 아침 서울서 출발해, 대구 가서 바 뛰구, 정말 졸라 놀구, 대구 한일극장 건너편에 있던, 자칭 원조 따로국밥집서, 밥먹구, 거기서 부산가 보림극장 뛰구, 데레사여고 들어가는 골목 근차에 있던 게이 술집가서, 말빨이 정말 넘어갈 정도루 쎈 부산 문딩이 형들이랑 놀다, 부산 역전 아리랑 호텔 가서 자구, 그러다 피터를 만났잖아, 일본 후쿠오카 사는 피터를, 태어나긴 덴마크서 태어나, 어려 미국이민와, 일본서 교수하던 피터를 파고다 공원서 만났잖아. 일년에 서너번은 다니러오구, 피터가 첨엔 날 살살 피하더라구, 그래도 뭐 내가 미모가 있으니까, 다 넘어 오더라구, 경국지색 뭐 그런 말들 있잖아. 사실 내가 생긴 건, 씹다 버린 장아찌 같지만, “흥 내 미모가 파고다 최고다” 하면서, 얼굴 빳빳이 들구 다녔거든 그래서 또 피터를 사귀게 됬잖아, 그것두 아주 오래 동안. 난 한번 누구 좋아함, 정말 졸라 좋아 하거든, 눈에 보이는 것두 없고. 피터는 날 좋아 하면서도, 일본에 산다는 이유로, 내게 많은 자유를 줬고, 둘이 거의 매일 통화하구, 편지두 자주 주고 받고, 한 달에 한번 꼴루 일본엘 갔잖아, 나중엔 공항서 여권에 도장 찍어주는 직원이랑, 인사를 할수 있는 지경이 될 정도루 일본을 갔잖아, 뭐 후쿠오카야, 말이 국제선이지, 거의 제주도 가는거잖아 금요일 저녁 뱅기를 탈람, 사무실서 늦어두 4시엔 도망을 나와야 하는데, 어휴 참 많이 힘들었네, 말이 한 달 한번이지, 왕복 뱅기삯, 이박 호텔비 또 먹는것, 쓰는것 등등, 돈두 졸라 들두라구, 연휴란 연휴는 다 일본서, 휴가는 일본가서.. 가족 버리구. 그럼 어때, 좋아 하는 사람 만나 행복 하믄 되지 하는 생각으로 현해탄 건너 다니는 짓을 글쎄 96년 8월 호주로 야반도주 하기전 까지 했잖아. 후쿠오카 도착해, 시내 들어가, 조금 있으면, 피터가 오구, 늦은 저녁 먹구, 그이가 단골로 가끔 가던 옥터보 숏바 가서 술두 한잔 씩 하구, 난 혼자서 빠찡고두 하구, 그러다 나중엔 술집 주인이랑 넘 친해져, 그 술집 주인이 호텔비 아깝다고 몇번 재워줬잖아. 넘 좋은 날들 이였다고 생각해,,, 그 때가 피터는 첨 날 만날땐, 사랑에 빠지지 않을려고 노력을 했는데, 한 번 불이 붙으니까 넘 뜨거워 지더라구, 날이 가구 서로 정도 깊어 가면서 방방 뜨던 그이 입에선 쓸데 없이 기다리란 소리만 졸라 하구. 신기한건, 낼 나랑 함께 살것 같이 행동하던 사람의 입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만 자꾸 하는데, 듣는 내 입장선 기분이 별로 안 좋드라구. 뭐 내가 같이 살아달라구 빈것두 아니구, 매일밤 물떠 놓고 정성 들인것두 아닌데, 자꾸 그인 나한테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들드라구. 속만 타구, 죄책감만 들구. 그렇게 시간은 가구, 결정된건 하나두 없구,,,, 그러다 둘이서 시드니로 96년 6월에 휴가를 갔잖아. 그때, 난 이미, 이이랑은 정리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 있었고, 그인 그냥 좀만 더 기다림 하는 소릴 달구 살구. 시드닌 두번째로 간건데 그때, 공항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넘 괴상한 기분이 들더라구, 아주 친근한 기분, 한 번 밖에 다녀가지 않았는데 꼭 오랫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 아주 따스한 기분이 드는게, 신기하게 전혀 서먹 하지가 않데... 한국에 돌아와, 그이는 후쿠오카로 돌아가구, 나 짐싸기 시작 했잖아. 호주루 이사 갈라구. 그때 정말 한국서 사는게 정말 피곤해 지구 있었거든. 숨어 게이생활 하는것두 넘 피곤하구, 매일 결혼 소리 듣는것두 싫구... 내가 호주로 이살 간다 하니까, 친구는 방방뜨구, "가긴 어딜가 이놈아, 니가 거기에 남자가 있니 가족이 있니" 하면서 걱정하구. 내가 게이인걸 아는 친구 놈들은 "정말 갈꺼니 하며" 걱정의 눈빛만 보내구. 휴가 다녀와 거의 한달만에 사표내구, 짐정리 하구, 호주로 도망 가는데 까지 채 3개월이 안 걸리데. 집에서 다들 뒤집어 지시구, 특히 엄만, 은근히 내가 미국가 살길 원하셨는데, 갑자기 호주 소리가 나오니까 "너 제 정신이니" 소리만 하시면서두, 말려봐야, 힘만 낭비 하시는걸 넘 잘아시니까 말리지두 못하시구, 그냥 걱정만 하구. 전세루 살던 아파트, 전세 빼달라구, 누나에게 부탁하구, 거의 준비 다하구 난 그이보러 후쿠오카에 갔잖아. "나 호주간다, 살러" "으잉, 왠 자다가 봉창 뚜드리는 소리, 좀 만 기다림..." "기약없이 기다리는 것두 싫구, 진짜루 게이답게 살아 보구두 싶구, 그래서 나 가. 그러니 잡지마" 했더니. 그이가 마악 화를 내데,,, 둘이서 보낸 시간이 얼만데, 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등등 소릴 하면서, "난 너한테 하나두 바란게 없잖아, 내가 언제 나랑 살잔 소릴 했니, 아님, 니가 죽도록 좋으니까, 죽는 날까지 너만 기다릴께 한 적도 없구, 사랑한 만큼, 내가 행복하길 원하는 만큼, 그냥 내가 행복하게 그냥 보내줘". 그랬더니, "니가 좋아 하는 차 사줄께 가지마" 하데. 나 정말 사브 차를 넘 좋아 했거든, 중학교 때 엄마 따라 일본가서 한번 보구, 그래 저 차다 하는 생각으루, 정말 한땐 돈 벌어 사브 사는게 소원일 정도루. 근데 너무 싫더라, 내가 몸 파는 것도 아니구.. "내가 너 한테 몸 팔았니, 좋아서 사랑했는데, 좋아서 번 돈 다버리며 물건너 다녔는데, 행복해라 소린 못하구, 차 사줄게 가지말라니..“ 넘 실망 스럽구, 속상하드라구. 얼마나 내가 가는게 속상해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두 넘 싸구려가 된것 같아, 많이 속상 했잖아. 그렇게 한국을 떠났잖아. 밤 비행기 타구, 혼자서 혼자서 외로이 "내 인생은 나의것" 을 외치며... 가방 하나 달랑 들구, 아무도 연고가 없는, 그 먼 시드니루 비자두 관광비자 하나 달랑 들구.... 게이처럼 살아 볼라구, 좋아 하는 사람 만나 손잡구 길도 걸어 보고, 정말 좋음, 결혼도 해볼라구. 나 정말 센가봐. 다른 게이들은 힘들어두, 눈치가 보여두, 한국서 지지고 볶으며 잘 사는데 그렇게 혼자 한번 벅차게 살아 보겠다구, 그 먼나라에 갔으니. 시드니에 도착해 한 달 반쯤 걸렸나봐, 취직하구, 정착 하는데. 잘 살았잖아 시드니서, 행복하구, 데이트두 질리게 하구 차이구, 차기두 하구, 결혼 하자구 청혼두 받아보구... 기냥 맨 땅에 헤딩 하듯이 그냥 그렇게. 근데 사는데 무서운게 없는것 같아, 어디가든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 보단 훨 많은것 같구, 피부색이 틀려두, 머리색이 틀려두, 좋은 사람들은 항상 따스하고, 싸가지 없는 것들은 어디가나 다 똑같구. --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뒤에 더 있었는데 보관하지 못함. ㅠㅠ 사이트는 사라짐. 원덬이 10년 전에 퍼다 보관하고 있던 글이야. 아마도 글쓴 분은 1960년대 초 태생으로 추정되며 (현재 50대 후반) 지금은 시드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애인과 살고 계신다고 함. 악플이 너무 달리니까 그 이후로 글을 그만 쓰더라구. 원덬은 자기 과거사를 남기지 못한 게이 윗세대에게서 들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구술사료격으로 생각하고 보관하고 있었음... 그리고 이건 근황이래요
실제 흥신소의 데이트폭력 사례.txt
올해 30살 동갑내기 커플이 있었습니다. 연애만 2년 한때는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릴 정도로 싫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남성의 집착이 시작이 된 건 연애 1년이 막 지난 시점 친구의 결혼식 뒤풀이 장소에서 친구들과 늦은시간 까지 술을 마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날은 당연히 남자친구에게 결혼식이 끝나고 뒤풀이 장소에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였고 설명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성의 집은 부산 결혼식과 뒤풀이 장소는 대구의 시내였다고 합니다. 뒷풀이 장소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있고 분위기도 한참 좋을 때라 남자친구와의 카카오톡을 제대로 주고 받지 못 하였지만 전화나 영상통화는 빠짐없이 받으며 남자친구를 안심 시켜주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술자리 또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분위기가 깨지도록 핸드폰만 계속 볼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남자친구는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 이였습니다. 뒤풀이가 시작된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남자는 여성에게 10번이 넘는 영상통화를 하였지만 여자는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남자를 안심 시켜주기 바빴다고 합니다. 그렇게 12시가 되자 남자는 여성에게 바로 집 귀가를 권했지만 차량이 없던 여성은 여성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대구에서 자고 다음날 오후에 부산으로 내려가겠다고 이야기를 하자 남자는 흥분을 하며 어떤 새끼와 같이 있으려 하냐며 쌍욕을 해댔고 그렇게 싸움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 날 결국 술자리에서 남자와 싸우느라 혼자 핸드폰만 만질수 밖에 없었고 남자와 이도 저도 아닌 사이가 된 상태로 여성은 친구 2명과 함께 대구의 모텔에서 하루를 보내고 부산으로 돌아왔고 집 앞에서 남자의 차량이 보였습니다. 여성을 본 남자는 여성을 데리고 여성의 집으로 들어가 쌍욕을 하며 어제 누구와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하라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고 여성은 남자를 안심 시키며 어제의 상황을 빠짐없이 설명해야 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 여성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마냥 남자의 화를 풀어주며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면 사정을 해야 했고 이 일이 있고 약 1년이 넘게 남성의 집착은 끝이 없었습니다. 집착에 못 이겨 이별을 이야기 했지만 매번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집 앞과 회사까지 찾아와 자살을 하겠다는 협박과 스토킹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현재도 헤어졌어도 헤어진 게 아닌 삶과 지옥에 살고있는 여성은 스토킹에 못 이겨 남성을 떼어놓기 위해 저희 흥신소에 문의를 주셨고 부산에서 대면 상담 후 업무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요원이 여성의 문자와 통화 녹음 등을 확인한 결과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저희는 여성 요원 2명과 남성 요원 4명을 투입하여 업무를 진행하였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여성 요원 1명이 함께 여성분의 집에서 숙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날 남자는 여성에게 연락하여 집에 친구가 와 있냐는 질문에 모든 요원이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날 집 주변에 남성이 없는 것을 확인을 하였고 남성의 동선을 확인 해야하기 때문에 남성 요원 1명과 여성 요원 1명이 남성을 미행하고 있던 상황이라 남성이 여성의 집에 누가 들어가고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남성의 질문에 저희 요원들과 의뢰인 여성분이 많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저희 요원들은 여성의 집에 몰카가 설치되어 있다고 판단을 하였고 즉시 고속버스 택배로 저희 몰래카메라 탐지 장비를 전달 받아서 여성의 집에 몰래카메라가 있는지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천장에 달려있는 소방 장비에 몰래카메라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카메라가 남성이 달았다는 증거가 없으면 신고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우선 남자가 여성의 집에 몰래카메라를 달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당연히 남성이 여성의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고 판단이 되었기에 먼저 남성을 미행하고 있던 요원 2명에게 남성을 당장 잡아서 핸드폰을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저항을 하던 남성은 저희 요원의 설득에 이기지 못하고 실토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게 되었고 해당 증거를 토대로 경찰서에 신고 접수를 하였고 부산에서의 업무를 종료하였습니다. 디미토리펌 흥신소가 이런것도 해주는구나 일처리가 생각보다 놀라운데 ㅎㄷㄷ 요즘 헤어질 때 안전이별하라고 하는 게 진심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님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조오오온나 많으니..
어느 일본도시의 캐릭터 맨홀 테러사건.txt
5년 전, 일본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에 설치된 러브라이브 선샤인 캐릭터 맨홀 11종. 팬들이 3400만엔을 클라우드 펀딩으로 모금하여 완전자비로 설치한 물건. 덕후들이 스스로 관광 컨텐츠를 만들어준 셈이라 시에서도 반기며 홍보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했고, 주민반응이나 관광효과가 은근 좋아서 뉴스도 여러번 타게됨. 결과 다른 시에서도 따라하며 일본 지자체에서 캐릭터 맨홀 붐이 일어나기도 함. 덤으로 설치 초창기에는 팬들이 찾아가서 맨홀을 깨끗히 닦아주는 유행도 퍼지며 별개로 화제가 되기도. 암튼 지역와 오타쿠 서로서로 행복하게 끝난 사업... 이였는데.... 분위기가 좋은걸 본 관종들이 찾아가 맨홀을 긁거나 페인트를 뿌리는 테러사건이 발생. 성지순례하는 덕후를 생각해 인적이 드문 공원이나 시골쪽에도 설치한게 범죄의 표적이 됐던 것. 설치로부터 열흘도 안 된 시점이였다. 소식을 들은 팬들이 곧바로 찾아갔지만 긁힘과 페인트가 물수건으로 없어질리가.... 그리고 이런 사건이 벌어진 누마즈시는 절대로 이걸 단순한 소동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건이 알려진지 얼마 안 된 새벽에 시의원들이 달려가서 현장을 둘러보고 피해현황과 복구일정을 확인하며 심상치 않은 상황을 공유. 아침이 되자마자 누마즈 시청에선 맨홀의 회수, 피해현황, 향후대응에 대한 성명을 발표. 이어서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장을 접수하였다. 덕분에 트위터에서 '다음엔 정x을 뿌려줄것'이라며 낄낄대며 상황파악도 못하던 테러범들은 누마즈시가 전력으로 휘두른 공권력 풀스윙을 처맞고 모조리 체포당했다. 이후엔 추가피해 방지를 위해 기존 위치에는 색이 없는 맨홀이 설치되게 되었고 컬러 맨홀은 인적이 많은 역앞 상점가와 전시관에 설치한 뒤 CCTV로 24시간 감시하여 테러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출처 : 더쿠 오.. 지자체가 일을 아주 잘 하네요.. 남의 기쁨과 성의를 왜저렇게 망치고싶어할까요 참 할짓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이다엔딩이라 다행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