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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서 낭만 넘쳤던 순간 10가지
1. 축구 역사상 최고의 낭만 수비수  2015년, 이탈리아 1부리그 세리에A 소속 '파르마'는 재정악화로 인해 아마추어 리그인 4부리그로 강등됐다. 이에 소속 선수 모두가 자유계약(FA) 신분으로 풀렸고, 팀을 떠났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로 루카렐리.  센터백이었던 그는 여러 팀을 전전하다 파르마에서 처음으로 1부리그 주전이 된 선수였다.  그는 모두가 미쳤다고 할 결정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 심장이 시키는 대로 파르마에 남는다."  아마추어 리그인 4부리그로 강등된 팀에 잔류한 그는 주장을 맡았고 리그 전경기를 선발 출장해 4부리그로 강등된 팀을 다음 시즌 곧바로 3부리그로 승격시켰다. 그 다음시즌에도 모든 경기를 뛰며 팀을 2부리그로 이끌었다. 그리고 2부리그 막바지, 주장이자 팀의 핵심이 된 그는 이번에도 대부분의 경기에 출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나이 40세. 더 이상은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반월판 부상을 당해 더 이상의 시즌을 소화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겠습니다. 반월판은 저를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루카렐리의 부상으로 수비 불안에 처한 팀의 성적은 하락세. 마지막 라운드인 38R를 승리하고 경쟁팀이 승리하지 못해야만 승격인 상황에 몰렸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났다.  루카렐리는 불혹의 나이라는 40세의 신체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빠르게 부상에서 회복해냈고 38R에 선발출장 해 팀의 무실점 승리를 이끌었다.   반면 경쟁팀은 89분, 경기막판에 동점골을 허용하며 무승부.  파르마는 다시 1부리그로 복귀하였고, 루카렐리는 마침내 약속을 지켰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팀을 위해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낸 루카렐리는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파르마는 그의 등번호 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모두가 나를 미쳤다고 했다.  나의 아내와 서포터들마저도. 오직 아들만이 나를 응원해줬다." "하지만 나는 약속했다.  파르마를 다시 1부리그로 데려가겠다고. 그리고 나는 약속을 지켰다." 이 위대한 팀의 주장이었던 것, 그리고 이 아름다운 셔츠를 입었던 것, 내가 축구선수 알렉산드로 루카렐리로서 충실히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은퇴사 중에서- 2. 트레제게의 눈물  2006 독일월드컵 결승전  프랑스 VS 이탈리아  양 팀은 치열한 경기를 펼쳤고 승부차기에 이르기까지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축구선수들에게 최악의 악몽일 순간. 프랑스의 트레제게는 승부차기에서 실축했고 이탈리아가 우승을 차지한다.  프랑스 대표팀은 빈손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직후 선수단 해단식.  아나운서가 고생한 선수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였다. 그렇게 트레제게의 이름이 불렸다.  어두운 표정으로 국민들 앞에 선 그가 한 첫 행동은 사과였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뜨거운 환호와 격려로 그를 맞이했다. 이날 트레제게는 그 어떤 프랑스 선수보다 큰 박수를 받았다.  이를 본 트레제게는 눈물을 머금고 사과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그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놓였던 것인지,  동료들의 품에서, 실축 당일에도 흘리지 않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3. 평생의 적, 라이벌. 그러나...  이탈리아 수비수의 전설, 파울로 말디니.  그는 1979년 AC밀란의 유소년 선수로 입단하여  2009년 AC밀란의 주장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말디니의 은퇴소식이 발표되던 날  AC밀란의 라이벌, 인터밀란의 홈구장에 인터밀란 서포터즈가 건 걸개 "말디니. 20년의 라이벌. 그러나 그대는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또다른 원클럽맨.   1989년 AS로마의 유소년으로 입단하여 2017년 AS로마의 레전드로 은퇴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원클럽맨, '로마의 왕자' 프란치스코 토티.  역시 그의 은퇴 소식이 들려오던 날, 로마의 라이벌 라치오 서포터즈가 내건 걸개  "평생의 적이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잘가라, 프란치시코 토티!"  4. 감독과 선수의 가장 드라마틱한 마지막 인사  인터밀란에서 트레블을 달성하고 레알마드리드로 떠나던 조세 무리뉴. 그리고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마테라치. 마테라치를 발견한 무리뉴는 차를 세우고, 두 남자는 눈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5. 패배의 직감  2018 러시아 월드컵 16강, 프랑스 VS 우루과이 후반 41분, 0-2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며 경기에 임하는 우루과이의 히메네즈  6. 49800번째 서포터  스페인 라리가 소속 발렌시아의 홈구장 메스티아에 있는  49800개의 좌석 중 하나는 동상의 자리이다.  동상의 주인공은 비센테 나바로.  그는 1928년 태어나 2016년에 사망하기까지 평생을 발렌시아의 팬으로 살았다. 그는 항상 같은 자리의 시즌권을 샀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1981년,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2016년 그가 사망한 이후 구단에선 그 자리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발렌시아의 서포터들은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동상에 스카프를 둘러주거나, 꽃을 두고 간다. 비센테 나바로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아, 메스티아의 49800석의 1석을 채우고 있다.  7. 3전 3패, 2득점 11실점. 파나마의 첫 월드컵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낸 파나마.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울려퍼치는 파나마의 국가를 부르는 선수들 해설을 하던 파나마의 선배 축구선수들 또한  들려오는 국가와 후배들의 눈물에 벅차오름을 누르지 못한다. 6-0으로 지다가도 한 골을 넣으면  파나마의 서포터들은 기뻐하며 월드컵을 즐겼다.  3전 3패, 2득점 11실점.  마지막 경기를 끝낸 파나마 대표팀은 모두가 둘러앉아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고 그렇게 아름다웠던 자신들의 첫 월드컵을 마무리했다. 9. 모든 축구선수가 꿈꿀 은퇴의 순간 2019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마르쿠스 로젠베리. 그는 마지막 경기였던 유로파 조별예선 말뫼 VS 디나모 키예프에서  95분 극적인 역전골을 넣은 뒤 팬들의 품에서, 팬들과 포효하며 은퇴하였다.  10. 피로 세워진 구단의 낭만 독일 분데스리가의 유니온 베를린.  독일에서 여전히 가난한 동독 지역의 팀.  이 팀은 가난했고, 그 가난으로부터 역사를 만들었다.  어느 수준으로 가난했냐하면, 경기장이 저랬다.  돈이 없어서 라이선스를 따지 못해 3부리그를 우승하고도 2부리그 승격이 두 번이나 거부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열정적인 베를린의 서포터들은 이 팀을 사랑했다. 그러던 2008년에, 이 가난한 팀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위 영상의 경기장이 보다시피 너무 낙후되어,  리그 참가팀이 의무적으로 맞춰야 할 경기장의 안전기준에 못미쳐 리그 참가가 거부된 것이다.  해결책은 구장 재건축인데, 이 팀에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프로 구단 해체의 결말 밖에 없던 상황.  이에 서포터들이 나섰다. 우니온 베를린의 서포터들은 헌혈로 피를 모아가면서 경기장 건축비용을 모금했다. 그렇게 돈이 모이자  수 천명의 서포터들이 무급으로 경기장 건축 현장에 나와 막노동을 해가며 경기장을 지었다. 결국 우니온 베를린은 살아남았고, 언론으로부터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피로 세워진 구단'  그리고 10년 후...  우니온 베를린은 120년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1부리그 승격에 성공한다.  관중석의 팬들은 모두 피치 위로 뛰어나와 자신들의 지켜낸 구단의 승격을 축하하였다.  동독 출신 클럽의 다섯 번째 분데스리가 승격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다음시즌 1부리그에서의 첫 경기  우니온 베를린의 팬들은, 꿈에 그리던 1부리그 승격을 자축했다.  팀의 1부 승격을 보지 못하고 먼저 떠난 친구, 가족들의 사진을 들고서.  먼저 떠난 이들과 함께 승격을 축하한 이날, 많은 베를린의 팬들이 눈물을 참지 못했으며 또 많은 축구팬들을 울렸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22-23시즌,  우니온 베를린은 리그 1위이자 극강인 바이에른 뮌헨을 승점 1점차로 추격하는 2위를 기록 중이다. 이 낭만의 팀이 과연 다시 한 번 기적을 쓸 수 있을지, 자켜볼 일이다.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해외 축구계에서 전해져오는 전설 같은 일화.jpg
해외 축구계에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패스를 하다보면 언제간 무조건 골을 넣어주는 영혼의 단짝 공격수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그와 함께하면 유럽 전장을 호령하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 할수있다는 전설 베컴,스콜스,솔샤르는 요크,콜을 만나 그 꿈을 이뤘다고 했고 사비에스타는 메시를 만나 꿈을 이뤘다고 했고 모드리치,토니 크로스는 벤제마를 만나 꿈을 이뤘다고 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 그 꿈을 꾸는 또 한명의 사나이가 있었다. 내 이름은 김덕배 내꿈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공격수를 만날수있겠.. 뭐해 임마 패스 안주고 ㅎㅎ 당신은 메시의 절친이자 마라도나의 전 사위 아게로..! 당신이 설마 나의 영혼의 파트너? 좋아 간다!! 받아라!! 간다!! 아 ㅅㅂ.. 아니 이걸 왜 놓쳐!! ㅈㅅㅈㅅ.. 패스가 좀 약했다. 지 슛팅이 쎘으면서 지ㄹ한다.. ㅅㅂ.. 덕배 패스패스!! !!! 당신은 잉글랜드의 신성 제 2의 존반스! 좋아.. 다시 한번 간다.. 받아라 자 간다 이걸 막네.. ....... 패스를 발 밑에 주면 어뜩함 공간으로 줬어야지 시발.. 그럼 그렇지 이런 새끼들이랑 챔스는 무슨 .. 맨시티 제 2의 네이마르 브라질의 신성 가브리엘 제수스 영입! 헤이 덕배씨 패스만 주세요 골은 내가 넣어드릴테니깐 ㅎㅎ 나는 득점왕 너는 도움왕 ㅇㅋ? !!그대가 혹시 나의 영혼의 단짝? 손케,마누라 디졌다 ㅋㅋ 나도 최고의 파트너를 얻었다고!! 가자!! 제 2의 네이마르 !! 아.. 정면이네 .....?제 2의 네이마르 아니었냐 너? 아 패스를 그렇게 쎄게 주면 어뜩함 제 2의 네이마르? 걔 레알 갔는데?ㅋㅋ ㅅㅂ 내 인생이 그러면 그렇지 그런 전설따윈 믿는게 아니었어.. 헤이 브로 왜 이렇게 시무룩해있어? 덕배:실바슨배님.. 슨배님도 그 전설 들어보신적 있죠? (중략) 실바:아 있지 나도 그걸 듣고 꿈을 키웠고 한때는 그 파트너를 만난줄 알았어.. 세르히오 아구에로 .. 하지만 그는 전설의 공격수가 아니었어.. 아니 어쩌면 내가 그 자격이 될수없는 패서였을지도.. 아..! 그래 문제는 나였을지도.. 나조차 전설적인 패서가 아닌데 .. 챔스 우승은 그저 허황된 꿈이었는지도 몰라 그 전설도 선택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였을수도.. 그래 ㅅㅂ 다 포기하자 .. 그 꿈.. ???뭐해 패스 안주고 ㅅㅂ ㅋㅋ 어차피 줘도 못넣을꺼면서 자 받아라 아우!! 골대 존나 작네!! 헤이헤이 슛! 하 .. 못넣을거 알고 주는게 더 힘드네 아 수비수 ㅈㄴ 많네.. 쏘리쏘리요 ㅋㅋㅋㅋㅋㅋㅋ 그럴줄 알았다 그렇게 패스를 뱉어내던 두 바보들도 떠나고 나의 꿈도 희미해질때쯤 이상한 놈이 나타났다. ㅎㅇ여 그냥 패스 아무렇게나 주세요 아무렇게나 넣으면 되니 ㅎ 이번에도 허세만 찬 당돌한 신인의 패기라 생각했다. 시작해볼까? ? 패스 패스 응? 여기서? ?내가 뭘 본거지? 뭐해 패스패스!! 골을 .. 넣는다고? ㅎㅎ 골 넣는게 공격수 아니에요? 패스 ㅈㄴ 잘하시네 내 패스 안 약함? 안쎔? 너무 짧거나 길지 않? 뭔 소리에요 ㅋㅋ 패스가 약하면 제가 강하게 받으면 되고 패스가 강하면 제가 약하게 받으면 되고 패스가 짧으면 한번 치고 나가면 되고 패스가 길면 논스톱으로 때리면 되죠 ㅎㅎ 아.. 어디서 패스 라이팅이라도 당하셨었어요? !!!! 내 패스가 잘못된게 아니었구나 .. 덕배형 뭐해요 빨리 패스 주세요! 응.. 여기 ㅅㅅ 한골 추가요 (하늘을 바라보며) ........ 실바씨.. 어.. 어쩌면 그 전설이 정말인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혹시라도 만약이라도 .. 나에게.. 덕배형 뭐해요 빨리 골넣으러 가요 ㅋㅋ 응!!! 도탁스펌 패스라이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터짐 ㅋㅋㅋㅋㅋㅋㅋ덕배행복축구하자 ㅋㅋㅋㅋㅋㅋ
해외에서 마주친 대중교통에서 말 잘듣던 동물들.jpg
비행기안에서 만난 인자한 표정 역시 동물들도 창가쪽을 좋아하나보다 비행기 승객, 페퍼 아테나의 첫 여행. 많이 긴장했지만 얌전히 잘 도착했다고 박제수준으로 얌전하던 큰까마귀 심야기차를 타고 이동중 기차 좌석사이에서 발견한 귀여운 얼굴 안내견 악셀. 주인의 발을 베개삼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뉴욕 지하철에서 인사하는 법 라마의 애완동물화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듯 하다 맨체스터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주인과 같이 기절한 댕댕이 지하철 안에서 보호소에 있던 강아지가 유람선을 타고 입양되어지려고 이동하는중 지하철에서 만난 녀석 지루하지않던 비행기 여정이었다 여정이 끝날때까지 미소를 유지하고있던 안내견 3시간동안 움직이지도않고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옆에서 보고만있어도 즐거워서 비행기에서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게 만들어준 댕댕이 이 자세로 벌써 2시간동안 저러고있던 보기좋은 강아지와 주인 오전 비행기 첫손님 기차에서 사귀게 된 새로운 친구 손잡고 지하철타던 주인 비행기에서 겁나 귀여운 강아지 옆에 앉는 행운을 누렸다 기차타는 내내 느껴지던 시선 좋아 자연스러웠어 버스에서 잠깐 졸고있던 두 절친 병원에 방문하기 위해 이동중이던 조이. 심지어 명함까지도 있었다.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는 방법 이동중이던 경찰견 비행기 타기 싫다고 말하는듯한 눈빛 로마 지하철에서 지하철에서 본 애완오리
미국 법정에서 바보같은 질문과 답변
이하의 속기문들은 Salt Lake Tribune에 실린 것으로, 실제 법정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며, 미국 법원의 사건사고(Disorder in the American Courts)라는 책에서 더 많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1. Q : 박사님! 누군가 자다가 사망하면 다음날 아침까지 그 사람은 그걸 모른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A : 당신 변호사 시험 통과한 거 맞아요? 2. Q : 증인은 증인의 사진이 찍혔을 당시 현장에 계셨습니까? 3. Q : 혼자 하셨나요, 아니면 단독 범행? 4. Q : 충돌 당시에 두 차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죠? 5. Q : 그 계단이 지하실로 통한다고 하셨습니까? A : 예. Q : 그렇다면 그 계단은 지상으로도 통합니까? 6. Q :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A : 중키에 수염이 났습니다. Q : 남자였나요? 여자였나요? A : 아…남자이길 바라야죠. 7. Q : 당신은 그 곳을 떠나기 전까지 그곳에 있었다지요. 사실인가요? 8. Q : 자살을 하신 것이 몇 번인가요? A : 네 번이요(...). 9. Q :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죠? A : 그가 저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네 년을 죽여버릴 거야. 넌 내가 누군지 봤으니까." Q : 그래서 당신을 죽였나요? 10. Q : 그 20살 먹은 막내 아들,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A : 당신 아이큐랑 똑같소, 20. 11. Q : 전쟁에서 죽었다는 사람이 당신이었습니까, 아니면 당신 동생이었습니까? 12. Q : 자식이 3명 있다고 하셨죠? A : 네. Q : 아들은 몇 명입니까? A : 1명도 없어요. Q : 그럼 딸은 몇입니까? A : ...재판장님, 변호인 변경을 요청합니다. 변호사 좀 바꿔 주세요. 13. Q : 지금 임신 몇 주차인지 아십니까? A : 3월 12일에 3달째가 돼요. Q : 그러면 수정이 이뤄진 건 1월 12일쯤이겠군요. A : 네. Q : 그 때 뭘 하고 있었습니까? A : 섹스하고 있었죠(Getting laid). 14. Q : 박사님, 지금까지의 부검 중,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건 몇 번이나 되십니까? A : 내가 한 모든 부검은 다 죽은 사람한테 한 거요. 산 사람들은 너무 반항이 심해서 말이오. 15. Q : 박사님, 부검하시기 전에 맥박을 재보시나요? A : 아니요. Q : 혈압은 측정합니까? A : 아니요. Q : 호흡이 있는지는 확인하십니까? A : 아니요. Q : 그렇다면, 부검을 받는 사람이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군요? A : 아니요. Q :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A : 그 사람의 뇌가 내 책상 위 포르말린 통 속에 있었으니까요. Q : 그래도 환자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 않습니까? A : 아마 살아서 어디선가 변호사 짓을 할 수는 있을 거요. 16. Q : 첫 번째 결혼이 어떻게 끝났죠? A : 배우자(남편)가 죽었죠. Q : 내외분 중 어느 쪽이 죽은 거죠? A : 맞혀 보세요. 17. Q : 답변은 모두 구두로 해주십시오. 학교는 어디를 나오셨습니까? A : 구두 18. Q : 증인이 앓고 있는 건망증이 기억에 영향력을 미친다구요? A : 네. Q : 어떤 영향을 미치죠? A : 뭘 들어도 자꾸 잊어 버려요. Q : 그럼 그 동안 잊어 버린 것들의 예를 들어 주세요. 19. Q : 현재 당신과 살고 있는 둘째 아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 A : 글쎄요... 기억이 잘... 아마 35살, 아! 39살일 거에요. Q : 그렇군요. 그럼 올해 들어 아들과 몇년째 살고 계시죠? A : 45년이요. ------ 번외 A : 사망신고하려구요 B : 본인이신가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서 범인이 증인의 말실수를 유도하려는 의도도 있다고는 하는데 ㅎㅎㅎㅎ
안정환 멘탈 일화.txt
1. 거주할 집이 없어서 돈암동, 흑석동, 신길동, 부천, 수원 등 초등학교때 이사를 무려 14번이나 함. 옷이 한 벌밖에 없어 일주일에 닷새 씩 똑같은 옷을 입어 친구들이 놀리면 안정환은 이렇게 말했다고함. “나는 똑같은 옷이 다섯 벌이야.” 2. 수원에서 이모집에 얹혀 살 때,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2시간반 거리를 혼자서 통학을 함. 얹혀살면서 새벽부터 학교에 간다고 부산떠는게 눈치 보여 밤 늦게 몰래 남아 학교창고에서 지냄. 그때 당시 나이는 초등학교 4학년. 11살. 3. 항상 배고팠던 안정환은 수퍼마켓 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음.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싶었기 때문. 4. 어린 시절 흑석동 판자촌에서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키워준 외할머니가 안정환이 축구 선수가 되는 걸 반대했음. 이유는 가뜩이나 잘 못먹는 애라서, 운동까지 하면 배가 더 빨리 꺼질까봐 걱정해서. 5. 노량진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 끝나면 곧바로 한강둔치로 갔음. 옛날에는 무당들이 한강 주변에서 굿을 자주 열었는데 굿이 끝나면 떡과 과일을 그 자리에 놓고 갔기때문. 안정환은 굿판에 남은 음식들로 허기를 채웠음. 이마저도 없을 때면 배추밭에 가서 배추 밑동을 뽑아 먹었음. 6.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오렌지를 고등학교 청소년대표팀에 들어가서 처음 봄. 생전 처음 본 오렌지가 너무 맛있어서 안정환은 남은 오렌지를 남몰래 가방에 싸와서 외할머니에게 드림. 7. 아버지는 일찌감치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도박에 푹 빠져있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빚독촉에 시달림. 안정환은 중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을 하면서 축구를 했고 지하철 5호선 목동역을 본인이 지었다고 언급함. 대학교 때는 술집 주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이때 요리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말한 적 있음. 8. 안정환이 초등학교 4학년때 6학년 축구부랑 달리기를 해서 이겨버림. 그걸 본 감독이 축구부에 들어오면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다고해서 축구를 시작함. 안정환은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시합이 끝나면 자장면도 사 준다고 하더라고요. 빵과 우유, 자장면에 혹했죠.” 9. 은퇴 이후 K-리그 홍보대사를 맡았는데, 지원금은 0원. 모든 것을 개인 사비와 개인 운전으로 전국을 누빔. 상주에 갔을 때는 상주스탭 및 팬분들과 저녁 늦게까지 막걸리 파티를 하고 상주 시내 모텔 일반실에서 하루 묵고갔다는 일화는 유명함. 10.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유명 대학교에서 그를 스카우트 하려했지만 축구에서 다소 변방이었던 아주대학교를 선택함. 조건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입학한다는 것. 1997년 대학 선발로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날 곧바로 이동, 대학축구연맹전 결승에 나서 두 골을 기록한 건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11. 안정환은 이탈리아 구단 페루자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결국 방출당했는데. 이유는 괘씸죄로 2002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는 것.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안정환에게 살해 협박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그의 차를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12. 안종복일당(당시 에이전트)과 부산대우에 배신 당해서 국제 소송으로 페루자에 380만 달러(한화 약 35억 원)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음. 35억 원을 갚지 못하면 안정환은 그 어떤 곳으로도 갈 수 없는 처지였는데 연봉 대부분을 어머니 빚 갚는데 써서 돈이 없었음. 사실 페루자만큼이나 커리어 꼬이게 만든 주범이 안종복인데 안정환은 그 어떤 인터뷰에서도 안종복을 언급하지 않음.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안정환은 안종복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겼다 함. 13. 한국에서는 이 상황을 안타까워했지만 어느 한 곳에서도 안정환에게 손을 내밀지 않던 그때 일본이 움직임. 스포츠 매니지먼트사가 아닌 PM이라는 일본 연예기획사였음. 35억 원이라는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J리그로 갔고 시즌이 끝나면 예능 프로그램과 광고 출연에 이용 당함. 14. 당연히 일본에서 본전을 뽑아야 하는 PM은 첼시와 라치오, 발렌시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샬케04, 블랙번 등 유럽 구단의 입단 제의를 모두 거절했고 최전성기에 있던 안정환은 어쩔 수 없이 유럽 진출의 꿈을 접고 J리그에서 3년 동안 뛰어야 했음 (경기 없는 날에는 회사로 출근해서 연예인 스케줄을 함. 그런데도 일본에서 97경기 50골 넣음) 15. J리그 진출 3년 만에 요코하마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35억 원을 다 갚고 자유가 됐는데. 이때 안정환의 나이는 이미 서른줄이었음. 당시 나고야에서 30억 원의 연봉을 제시했지만 뿌리치고 연봉 8억원에 프랑스구단 메츠로 유럽 복귀함. 이때 좀더 상위 팀의 이탈리아구단에서도 러브콜이 왔었으나, 메츠 구단주가 안정환을 만나기 위해 국경넘어 8시간을 운전해왔고 이에 감동한 안정환이 메츠를 선택했다는 일화가 있음... 16. 프랑스에서 에이전트에 2억원대 사기를 당하고도, 6개월을, 독일월드컵 끝날때까지도 내색하지 않다가 월드컵끝나고나서 소송검. 참고로 2002 이전 페루자에서도 주급을 받지 못한 적 있었는데 이때도 내색 안하다가 국제소송 중에야 밝혀진 바 있음. 17. 2007년 K리그 수원에 입단, K리그에 7년 만에 복귀함. 수원 시절 2군 경기에 나서 가족에 대해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내뱉은 상대팀 팬과 충돌해 중징계를 당함. 그 어떤 비난도 묵묵히 감수했던 안정환이지만 차마 가족을 욕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었던 것. 경기 도중 관중석에 올라갔다는 이유로 1천만원 벌금을 내고 북페에 사과문을 게시함. 정작 문제를 일으켰던 팬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음. (욕 한마디도 안했는데 언론에서는 삐~ 처리하면서 욕한거처럼 함) 18. 다롄에서 중국 생활하는 내내 연봉의 일부를 고아 및 어린이 병원에 기부하고, 매달 한번씩 찾아가서 봉사함. 팀에서 한게 아니라 혼자 자발적으로 다롄에서 구단용품 가지고가서 아이들한테 공짜로 뿌림. 자기 옛날 생각난다고. 2021년 FIFA는 공식SNS에 '역대 best 19번' 12인을 선정하여 업로드하였는데 이곳에 안정환은 메시, 포그바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림. FIFA 선정 8대골에도 안정환의 이탈리아 골든골이 선정됨. 커리어만으론 평가하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비운의 판타지스타 안정환 출처 : 더쿠
어린시절 가난했던 손흥민 일화.txt
< 손흥민 에세이 일부 발췌 > 우리집은 가난했다. 내가 갓난아이였을 때는 컨테이너에 산 적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세 가지 돈벌이를 하시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학원은 꿈도 꾸지 못했고, 또래 아이들에게는 일상적이었을 게임이나 여행, 놀거리들을 나는 별로 해 본 기억이 없다. 축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며 소형 중고차 한 대를 구해오셨다. 120만원을 주셨다고 했다. 비가 오면 창문 틈으로 빗물이 줄줄 샜지만 그래도 자가용이 생겼다며 우리 가족은 좋아했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차가웠다. 주위에서 아버지가 '똥차'를 몰고 다닌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17세 함부르크 유소년 시절 > 독일 유소년 구단 시절은 참 힘들게 버텼다. 한국 식당에 갈 돈이 없어서 허기를 꾹꾹 참았다. 유럽에서 뛴다는 판타지의 실사판은 늘 배고픈 일상이었다. 구단 전용 숙소에서 지내야했는데 나처럼 없는 형편에는 감사했으나, 숙소의 식사가 한국인 청소년에게는 너무 부실했다. 시내 한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엔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불가능했다.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싶어 인터넷으로 음식 사진을 검색해 구경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걱정하실까 봐 그런 얘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한국일을 정리하고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끌어모아 독일까지 날아오셔서 숙소 근처의 가장 싼 호텔을 거처로 삼으셨다. 그때까지 유소년 신분이었던 나는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1군 선수가 되고,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넣고, 함부르크 팬들을 열광시킬 때도 나와 아버지는 어렵게 지냈다. 가족과 함께 지낼 집도 없었고, 아버지는 자동차가 없어서 매일 호텔과 클럽하우스, 훈련장 사이를 몇 시간씩 걸어다니셨다. 훈련이 시작되면 갈 곳이 없어 혼자 밖에서 몇 시간씩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셨다.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내가 함부르크 1군에서 막 데뷔했을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 실제 생활은 정말 차이가 컸다. 함부르크에서 골을 넣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2011 아시안컵에 출전하고,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며 한국 언론으로부터 칭찬이 쏟아질때도 나와 우리 가족은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숙소에서 사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 밥솥을 벽장 안에, 밑반찬을 책상 아래 숨기며 생활했다. '라이징 스타' 아들을 둔 아버지는 매일 몇시간씩 추위를 뚫고 먼 거리를 걸어다녔고, 어머니는 한국에서 매일 마음졸이며 기도만 하셨다. TV뉴스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신성 손흥민의 일상은 대중의 짐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2019년의 손흥민은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이에요. 프리미어 리그의 인기 팀에서 뛰는 프로 축구선수죠.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에서 뛰어봤어요. 남들이 보기에 이런 제 모습이 화려해 보일지 몰라요.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겉모습입니다. 힘들었던 과거와 뒤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죠. 지금까지 어려웠던 날이 훨씬 많았어요. 좌절하고 눈물을 흘린 순간도 많았고요. 사실 지금도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고 있어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죠. 제 인생에서 공짜로 얻은 건 하나도 없었어요. 드리블, 슈팅, 컨디션유지, 부상방지 전부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믿어요. 어제 값을 치른 대가를 오늘 받고, 내일 받을 대가를 위해서 오늘 먼저 값을 치릅니다. 후불은 없죠. 저는 지금 자제하고 훈련하면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어요. + 어려운 시절을 겪어봐서 그런지 어려운 환경에서 축구선수가 되고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해 좋은 환경에서 축구할 수 있도록 아카데미 설립했다고 함. 사실 대안학교까지 생각했는데 절차가 까다로워서 못했다고 손아카데미 현재 상황 = 아카데미에서 키운 애들 독일로 3명 보냈고 올해,내년에도 유럽 진출할 계획 "현재 아카데미 출신 3명이 독일에 가있고, 올해와 내년에도 출국 예정인 아이들이 있어 외국어가 가장 시급하다. 몇몇 학부모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외부강사를 초청해 외국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아카데미에서는 협소하나마 공간을 지원해 축구에 전념할 수 있는 부분을 충족시켜드리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사실 대안학교도 생각해봤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게 너무 하고 싶었는데, 조건이 너무 까다롭고 힘들었다. 우리가 부족해 하지 못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출처 : 더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