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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라' 의 원조

<1919년 3.1 항쟁에 대한 이완용의 경고문[망언]>
- 4월 5일 제1차 경고
오호, 조선 동포여. 세상 말에 죽음 중에서 삶을 구한다는 말이 있더니 지금에 조선인민은 삶 중에 죽음을 구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얼핏 알아듣기 용이하도록 일언을 진하노니 제군은 잠깐 정신을 수습하고 잘 듣기를 바라노라.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이 허설許說이라 망동이라 하는데 대하여는 각 유지인사의 천언만어가 끊이지 않아도 일향자각치 못하니 근자에 여余(=이완용)가 다시 말해도 제군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스스로 의심하여 췌언(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거니와 여余는 반대로 제군에게 일문하노니 조선독립이 작일昨日에 되었다 하는 말인지 일후에 될 희망이 유有하다는 말인지 알지 못하거니와 작일에 독립이 이미 되었다 할지라도 만세삼창한 후는 각기 돌아가 맡은 바 일을 수행할 것이요, 일후에 희망이 있다 할지라도 성사 전에 만세만 호창呼唱하여 과월부지跨月不止(한달이 넘도록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킴)하는 것이 무슨 의미리오.
처음에 무지몰각한 아동배가 선동하고 그 후에 각 지방에서 역시 소문을 듣고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이 진압하려면 피해가 없겠냐마는 몰각자 부류를 돌아가게 하고 관대한 수단을 사용하여 일차 유고諭告와 이차 유고가 내려와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기자기질其子其姪(어린 것들)이 여전히 몰각한 행동이 있어 일차 효유하고 효유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그것을 책責하니 책한 후에 따르지 않으면 필경에 달지초지撻之楚之(매를 들어 때린다)는 어린 것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어린 것들을 선도코자 함이요, 둘째, 다른 어린 것들에게 오염치 못하게 함이라.
이차 유고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관청을 침범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니 당국에서 엄중이 조치함은 부득이한 것이니라. 근일에 모모처에서 듣기로는 많은 인민이 죽고 다쳤다하니 그 죽고 다친 인민 중에는 혹 주창한 자도 있겠지마는 그 다수는 부창부수한 자로 여余는 믿고 있노라. 농사 때가 임박하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 즉 안락이 있을 것이요, 망동을 따라하면 즉 죽고 다침이 목전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함이 아닌가. 자신이 삶 중에 죽음을 구할 뿐아니라 망동함으로 인하여 그 부근에서 횡액으로 죽고 다침에 이르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눈뜨고 못 볼 일이오, 귀로도 듣지 못 할 일이로다.
안심하고 진정하라. 한때가 지나면 한때에 해가 있고, 하루가 지나면 하루에 해가 있을지니, 오호, 동포여. 여余의 말을 잘 듣고 일후에 후회치 말지어다. 이번 권고에 대하여 만약 이견이 있는 사람은 본인과 한번 만나 의견을 나누기를 희망하노라.
- 4월 9일 제2차 경고
지난번에 본인이 동포에게 경고한 목적은 단순히 인민의 사상이 없게하고자 함이라. 경고문을 열람한 제군 중에 회답함을 본즉 혹은 시세의 언론도 있으며 혹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단지 매국적賣國賊의 말이 이목을 더럽게 한다 하며 혹은 위협의 언어도 있으며 그 중에 혹은 경고의 의미가 유리한 줄로 용인하는 사람도 있으니 오직 원컨대 본인은 성심으로 경고함을 제군이 채납하여 생명의 다수를 구하면 본인의 목적은 가히 도달할지라 고로 다시 지난 말을 되풀이하노라.
본인의 경고에 대하여 여하한 언론이던지 서신이 본인에게 직접 도래하니 마음에 심히 활연豁然하도다.
소요 당초에는 당국에서도 관대한 수단을 사용할 방책이오 또 조선인 측에서도 인민에 위험함이 없게 조처할 뜻을 당국에 진정하였으나 한 달여 된 금일에 이르러서는 당국에 대하여 다시 용훼容喙할 여지가 없도다. 근일 각 신문지상으로 제군도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각처의 언론이 더욱 엄중하니 본인도 조선인이라 책임상으로든, 인정상으로든 그 위험이 눈앞에 임박함을 아는 이상에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음이라. 매국적의 경고라하여 자신의 안위에까지 유관함을 듣지 않는 것은 생각없음이 심하지 않은가.
본인은 천만인 중에 몇이라도 유리한 줄로 용인하면 이 경고의 효과가 적지 않다할지로다. 구구한 소망은 일반 동포가 용인하고 안심 진정하여 사상의 화를 피하게 하고자 하는 진심밖에 없음이라. 지성이면 감천이라하니 제군이 느낄 때까지 위협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경고하노라.
- 5월 30일 제3차 경고
근래 각 지방의 소식을 들은 즉 소요가 점차로 안정한다 하여 혹자는 말하되 군대가 증파되어 그 위력에 기인함이라 하나 제군이 진심으로 지난 잘못과 오늘의 시국을 자각함에 주인함인 줄로 확신하고 상심을 흔쾌함으로 눌러버리노라. 소요 당시 본인의 양차 경고에는 단 조선독립지설이 허망하니 망동하여 생명을 사상하는 화에 스스로 빠지지 말라고 위급함을 구하려는 뜻으로만 설법하였거니와 오늘날 제군이 전 죄를 후회하는 때를 당하였기에 본인은 다시 일언을 진술코자 함은 독립지설이 허망함을 여러 사람에게 확실히 깨닫게 함에 즉 우리 조선민족의 장래 행복을 계획 도모함에 안전케하기를 위함이로다.
이번 조선독립지설은 구주대전(1차세계대전)의 여파라 하리로다. 최근에 밖에서 수입된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에 부적당하다는 언론은 본인이 다시 췌언을 하지 않거니와 대저 조선과 일본은 상고 이래로 동종동족同宗同族이며 동종동근同種同根임은 역사에 있는 바이라, 그런 즉 일한병합으로 말하자면 당시에 안으로는 구한국의 사세와 밖으로는 국제관계로 천사만량할지라도 역사적으로 당연한 운명과 세계적 대세에 순리하여 동양평화가 확보되는 것이 조선민족의 유일한 활로이기로 단행됨이요, 또한 지리상으로 말하자면 일한공동의 이해와 공동의 존립을 위하여도 순치보거의 접밀한 관계가 있어 양국이 흥망성쇠를 같이 하자는 정신으로 단행된 것인즉 아무리 세계에 여하한 신주의가 설혹 현실이 된다고 가정하기로 이를 다시 분리하여 양자의 자멸을 스스로 취할 이유는 결코 없으리니 제군은 이에 십분 깨달음 얻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아아, 우리 조선이 국제경쟁이 과격하지 아니하던 시기에도 일국의 독립을 완전히 유지하지 못했음은 제군의 아는 바라, 하물며 오늘날처럼 구주대전으로 인하여 전세계를 개조하려는 시대를 당하였으니 우리가 이만천여 방리에 불과한 강토와 천백여만 정도의 인구로 독립을 높이 외침이 어찌 허망타 아니하리오.
이는 필시 제군이 세계의 대세는 알지 못하고 단지 평일의 감정이 쌓였다가 풍문을 듣고 일시에 뿜어냄이라, 본인은 제군의 그 정신을 십분 헤아리노라. 제군이여, 다시 냉정한 두뇌로써 우리 조선민족의 장래와 동양평화의 영원한 대계를 깊이 헤아리고 숙고하며 현재 우리의 경우와 실력과 형세의 나아갈 바를 몰각치 말지어다. 만약 혹시 의연히 전후의 이해를 구분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는 도배가 있을지면 그것은 즉 조선민족을 멸망케하며 동양평화를 파괴하라는 우리의 적으로 봄이 마땅하리로다.
본인이 들은 바에 의하면 내지인(일본인)이 항상 말하되 대화민족大和民族은 최후의 일인이 피흘릴 때까지라도 동양평화의 영원한 대계를 변치 아니할 것은 이미 지나간 일국의 존망을 목도하여 진력 교전한 갑오(청일전쟁), 갑신(갑신정변) 양 전역의 의의가 모두 동양평화를 위함에 있다 말하니 제군은 일체의 감정을 버리고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라. 우리 조선인이 동양평화를 위하여 이미 지나간 어느 때에 여하한 노력을 한 바가 있었는가? 동양평화에 대하여 노력한 공적은 고사하고 자국의 보유도 항상 남의 힘에 의지하다가 오히려 동양평화의 겁난을 야기하는 근본의 이유를 만든 역사가 있을 뿐 아니뇨. 제군이여, 이것은 우리가 기피치 못할 사실이라, 고로 본인이 지난번 경고문 중에 어떤 이유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하고자 하느냐 함은 실은 동양평화의 대이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부지리를 획득코자 하는 자에게 피동하는 무지몽매한 도배에게 경고한 의미가 여기에 있노라.
상천上天도 이에 동쪽을 돌아보면 공동존립과 공동이해를 위하여 두 땅의 분립을 불허하실지니 우리 조선인은 반드시 일한병합의 의의와 그 정신이 유효케 실현할 방면에 향하여 노력함이 우리의 장래 행복을 도모 계획하는 최산의 양책인 줄을 깊이 믿을지어다.
병합 이후 근 십년에 총독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향유한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인이 공감하는 바이나, 그때로부터 금일까지 방침을 일정불변함에 비하여 제군의 민도는 날로 나아갔으니 그 시종 일관한 방침에 대하여는 제국신민으로써 요구코자할 점이 필히 많았다 하리로다. 즉 제군이 항상 논하는 바, 지방차치의 문제, 참정권, 병역, 교육, 집회, 언론 등의 각 문제가 많으나 이는 제군의 생활과 지식 정도를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할진대 동정도 가히 얻을 듯하도다.
본인의 소신을 기탄없이 개진할지면 실은 당국에서도 수년 내로 연구 중에 있는 안건도 있으나 단 그 시행조치를 행할 시기의 빠르고 늦음이 있을 뿐이라 본인이 결코 당국을 위하여 변호하는 말이 아니라 각 신문 및 잡지 상에 내지인의 여러해 전부터 제군이 요구코자하기 이전보다 언론하여, 여하한 점은 급히 조선인에게 그렇지 아니함이 불가하다고 창도하였음은 제군도 살폈으리로다.
혹자는 일·조선인이 이번 소요를 야기하였으므로 내지인은 이에 따라 조선인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리라 말하나 이는 자기의 지난 과거를 고쳐 깨닫는 동시에 나타나는 일상적인 심리이니 제군은 결코 의심하여 걱정할 바가 아니요, 제군의 최급무인 실력을 양성할 뿐이라 하겠노라. 왕왕 내지인 중에도 동양의 영원한 대계를 이해하지 못하며 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人하시는 성지를 망각하고 조선인을 대하면 일본인이 종족 우열한 다름이나 있는 듯이 표하는 태도가 혹 있다하나 제군이여, 우리가 내지인에 비하여 아직 실력의 차이가 없지 않다 못하리니 도량을 크게 하고 저들에게 가급적으로 반성을 촉구하며 이해를 구할 것이요, 결코 일시적인 감정의 부림을 받아 일시동인하시는 성지를 저들과 같이 오해치 말지어다.
해외에 있는 조선인 중에 혹자는 신정치 이후로 조선내지의 사정에 어두워 반대하는 자가 있어 약간의 금전으로 의외의 행동을 감히 지어내어 우리에게 화를 미치게 하나니 현명한 제군이여, 오늘 이후에 이와 같은 불의의 일이 혹 있을지라도 이번 일을 되돌아보고 십분 근신할 지어다. 제군의 영원한 복지를 증진케하며 전도의 광명을 개척하며 욕망을 도달케 하며 기 원동력은 위에 진술한 바 최급선무인 실력을 양성함에 있으니 제군은 더욱더 노력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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