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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제에 대해 행자부[박근혜 정부]의 안일한 인식이 안타깝다..." - 강제동원 조사위 이대로 해산?!!

대한민국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日帝强占下强制動員被害眞相糾明委員會)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 관한 특별법(日帝强占下强制動員被害眞相糾明等에關한特別法, 2004년 2월, 당시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을 비롯한 69명이 발의하여 제정)에 따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2004년 11월 10일 국무총리 직속으로 발족한 독립기구
<과거사 관련 위원회 4~5년 시한부 존속 후 속속 폐지>
- 친일반민규명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4년 3월 특별법 공포, 2005년 5월 발족 ~ 2009년 11월 활동 종료)
- 친일반민재산조사위(친일반민족해위자재산조사위원회): 2006년 7월 출범 ~ 2010년 10월 해산)
-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5년 12월 출범, 2010년 12월 해산)

<강제동원 피해조사위 곧 활동 종료…연장 논의도 없어> - 2015.11.6 JTBC

2010년 한시적 기구로 출범해 6개월에서 1년 반마다 시한을 연장해왔는데 이번에는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행정자치부도 위원회 역할은 끝났단 입장입니다.
위원회는 그동안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해 2745위를 찾아냈지만 아직 봉환 협의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대대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해 126만 위의 유해를 수습한 일본 정부와 아직도 6·25 전쟁 참전 군인의 유해를 수습하는 미국과는 비교됩니다.

박인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 위원장 : 위원회가 없어지면 그 조사기능도 중단이 되죠.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우리 정부에게 증거를 대라고 하는데….

정부는 소극적인 가운데 도리어 일본의 지식인들이 위원회의 상설화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우리 국회에 내기도 했습니다.

<'日 지식인도 나섰는데'…강제동원 조사위 해산될 듯> - 연합뉴스 2015.11.29

활동기간 연장·상설화 법안 안행위 법안소위 통과 불발
박인환 위원장: "안일한 역사인식 안타까워"

행자부: "더는 연장 안 돼"

일제시대 강제동원 관련 조사와 보상을 맡은 위원회가 활동기간을 연장하려는 일각의 노력에도 결국 연말 해산 수순을 밟게 됐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장 박인환)를 상설화하는 법안이 국회 상임위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29일 위원회와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행정자치부 등에 따르면 국회 안행위는 위원회를 상설화하는 내용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26∼27일 법안심사소위에 상정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해 통과시키지 못했다.
형식적으로 이 개정안은 '계속 심사' 상태로 남았지만, 정기국회가 다음 달 9일 끝나고 위원회 활동기간이 다음 달 말로 종료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연내 법안 처리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여야가 모두 이 법안 처리에 적극적이지 않거나 반대 견해를 보이고 있어 설령 시한이 충분하더라도 처리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법안심사소위에 참석했던 안행위 관계자는 "정재근 행자부 차관이 '수차례 위원회 활동기간을 연장했으니 더는 (연장이)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라며 "새누리당 조원진 원내부대표도 소위에 참석해 연장은 안 된다는 당의 방침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야당에서는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우당 이회영 선생 손자)가 위원회 활동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고 올해 9월 정부에 요구했으나 소위에 참석한 새정연 의원들은 연장에 미온적이거나 반대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일본의 시민사회 단체와 역사연구자들까지 나서서 한국 정부에 위원회 존속을 청원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산 위기에 직면한 위원회의 박 위원장은

"정부가 신고받아 작성한 '일정시 피징용·징병자명부'에 대한 조사를 10%밖에 마치지 못했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료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해야 한다"며 "역사 문제에 대해 행자부의 안일한 인식이 안타깝다"

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일본이 올해 7월 '군함도' 등 강제동원 현장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10월에는 태평양전쟁 전몰자 유골 수습에 한국인을 배제한다고 밝히는 등 역사 왜곡에 나서는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없애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행자부는 위원회가 이미 역할을 다했으니 존속 기간을 연장하거나 상설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위원회 해산 후에는 행자부 과거사지원단에 가칭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지원과'를 신설해 업무를 계속하고, 일부 업무는 민간재단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등에 이관하겠다는 방침이다.
유족단체들은 유골 봉환 등을 위해 위원회 존속을 요구하고 있다.
신윤순 '사할린 강제동원 억류 피해자 한국 잔류 유족회' 회장"위원회가 없어지면 피해자들의 유골을 수습할 길이 사실상 사라진다"며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해서 억울하게 끌려가 죽은 국민의 유해조차 찾지 못한다면 국가의 책무를 다한 것이 맞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백장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연합회 대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를 계속해서 처리해줄 수 있는 가장 전문성 있고 노하우가 있는 곳이 위원회"라며 "그렇기에 위원회는 존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이주성 특별위원 겸 간사는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 업무는 다 끝났고, 위원회가 활동기한을 연장하려는 것은 자기들 '밥그릇'을 지키려는 것"이라며 "혹시 남은 업무가 있더라도 행자부와 재단이 맡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유족단체들은 조만간 기자회견과 집회를 열어 행자부에 위원회의 활동기간 연장과 상설화를 재차 요구할 방침이다.
"국민 여러분,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는 애국선열에 대한 존경만큼이나 얼굴을 들기
어려운 부끄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광복 예순 돌을 앞둔 지금도 친일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고, 역사의 진실마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국선열들이 하나뿐인 목숨까지 내놓고 투쟁했던 그 시간에 민족을 배반하고
식민통치를 앞장서 대변했던 친일행위가 여전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습니
다. 더욱 부끄러운 일은, 역사의 바른 길을 걸어온 독립투사와 그 후손들은 광복
후에도 가난과 소외에 시달리고, 오히려 친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
으로 행세하면서 애국지사와 후손들을 박해하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한때는 친일 인사가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심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
도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3대가 가난하고 친일했던 사람은 3대가 떵떵거린다는
뒤집혀진 역사인식을 지금도 우리는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진상이라도 명확히 밝혀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 와서 반민족 친일파를 처벌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올바른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입
니다. 역사는 미래를 창조해 나가는 뿌리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와 양심이
살아 있는 바른 역사를 가르칠 때 그들이 바른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
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59년 전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유도 바
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걱정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화합하고 포용하자고 하십니다.
런데 왜 진실을 밝히는 일에 의견이 갈리고 대립이 있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합심해서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밝혀져서 부끄러운
일이 있다 해도 회피할 일이 아닙니다.
밝힐 것은 밝히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합니다. 그 토대 위에서 용서하고 화
해할 때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반민족 친일행위만이 진상규명의 대상은 아닙니다.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침해와 불법행위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진상을 규명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분열과 반목도 우리의 굴절된 역사에서 비롯된 것입니
다. 친일과 항일, 좌우 대립, 독재와 민주세력간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대결의
시대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특히 과거 독재정권이 정략적인 목적으로
지역을 가르고 차별과 배제를 되풀이하면서 갈등과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졌습
니다.
이제 이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풀어 가는 성숙한 민주주의 문화를 뿌리내려야 할 것
입니다. 부당한 차별을 바로잡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합니다."
- 2004.8.15 제59주년 광복절 경축사 中
"국민 여러분,
우리가 역사에서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는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 그리고
독재 시대의 억압과 저항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정리와 청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친일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분열과 갈등이 광복 6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해방은 되었으나 좌우 대결에 매몰되어 친일세력의 득
세를 용납하였고, 그 결과로 친일세력을 단죄하기는커녕 역사의 진실조차 채 밝
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작년에는 우리 국회가‘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을 만
들고, 올해에는‘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을 만들어서 그동안 미루
어 왔던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밝히고,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
동사의 나머지 한쪽도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면 과
거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이제 정리되는 국면으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국회에 계류 중인‘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에 관한 특별법’까지 통과되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서 치부한 재산을 그 후손들이 누리는 역사의 부조리도 해소될 것입니다.
해방 후 좌우의 대립과 독재∙반독재 간의 오랜 대결도 갈등과 대립의 문화를 남겨 놓았습니다. 좌∙우익은 서로를 용납하기 어려운 가치체계를 가지고 테러와 학살까지 일삼았습니다. 독재정권도 도청과 감시, 체포와 투옥, 고문과 협박도모자라서 마침내는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만들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자연히 여야의 정치적 대립과 반독재 운동도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야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을 변절과 야합으로 생각하
는 사고가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관용을 모르는 바로 이와 같은 대결
문화의 잔재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화를 극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민주주
의 발전은 지체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잔재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직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사
건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그에 따라 피해자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했으며, 국가
의 책임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 또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을 통해 진상규명과 역사적인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잘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이 청산의 과정에는 몇 가
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피해당하고 고통받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여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철저한 진상규명과 사과, 배상 또는 보
상, 그리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국가권력의 정당성과 신뢰를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국민에 대한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로 국가의 도덕성과 신뢰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국가는
스스로 앞장서서 진상을 밝히고 사과하고, 배상이나 보상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
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과거사정리기본법에 규정이 있고, 올 연말에 출범할 과거사정
리위원회가 타당성 있고 형평에 맞는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로서도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보완하는 법을 만드는 방안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입법을 할 경우에는 확정판결에 대해서도 보다 융통성 있는 재심이 가
능하도록 해서 억울한 피해자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에 더해서 국가권력을 남용하여 국민의 인권과 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한
그러한 범죄에 대해서는, 그리고 이로 인해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의 배상과 보
상에 대해서는 민∙형사 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거나 적절하게 조정하는 법률도
들어야 합니다. 더 이상 국가권력을 남용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놓고
나 몰라라 하고 심지어 큰소리까지 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국가의 신뢰를 회복하고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 2005.8.15 제60주년 광복절 경축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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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 암페타민이라는 마약이 있어 종주국 : 일본 증상 : 강력한 환각, 각성 특징 : 만들기 쉽다 존나 쉽다 개개개개개 쉽다 메스암페타민은 일본 의사가 1893년 감기약을 개발하다가 발견했어 성분이 감기약과 유사하다보니 아편 대마 코카인 등 원재료 중요한 다른 마약에 비해 화학지식만 있으면 쉽게 만들수 있음 울나라에서도 걍 고딩 이과생이 저거 만들었다가 걸려서 난리난적 있더라고 이 성분을 주목한 일본의 다이닛폰 제약은 메스암페타민을 첨가한 피로회복제를 만들어 대대적인 광고를 했지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건너간 히로뽕은 시험공부 중인 학생이나 장거리 주행하는 트럭운전기사들을 중심으로 남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중독현상에 대한 심각한 보고가 없었고, 위험성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https://cm.asiae.co.kr/article/2019052814320517335 히로폰 익숙하지? 맞아 흔히 우리나라에서 히로뽕, 필로폰으로 불리는 그 마약이야 이 히로뽕이 대대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바로 전쟁시기야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 추축국 가리지 않고 많은 군인들이 마약을 했어 왜냐? 피로를 빨리 회복시켜주고, 더 용감하게 잘 싸우게 해주거든 각성제 효과로 죄책감이나 피로감 두려움을 일시적으로 감춰주거나 원하는 환각을 보여주니까 당연히 만들기 쉬운 메스 암페타민, 히로뽕도 많이 사용했고 이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히로뽕은 연합국이던 추축국이던 거의 모든 전장에서 군인들에게 보급됐다. 야간행군 때 졸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시켜주고, 한편으로 병사들의 겁을 없애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각 군의 지휘관들은 중요한 보급물자 중 하나로 이 메스암페타민을 수만정씩 보유하고, 병사들의 사기와 내구력 향상 등의 목적으로 정기 지급했다. https://cm.asiae.co.kr/article/2019052814320517335 종주국인 일본은 특히 말할 것도 없었지 특히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심각한 난전, 악전고투를 겪던 일본 군인들의 필수품이었음 가미카제에 탔던 병사들도 히로뽕을 투여한 채 자살테러를 감행했고 그 전쟁의 결과는 우리도 다 아는 빵 그렇게 전쟁은 한순간에 끝났고 일본에세 남은건 패배와 반쯤 박살난 국토 그리고 군창고에 쌓인 수많은 히로뽕이었어 사실 메스 암페타민은 화학 실험으로 만들어지는 마약이야=제조하는 화학 기술자가 따로 군대에 고용돼 있었다는 거임 근데 일본 패망 후 갑자기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던 기술자들이 한번에 실업자가 된거야 굶어 죽을수는 없잖아? 그래서 기술자들은 군인을 위해 제조하던 메스암페타민을 민간에 팔기 시작했지 이미 메스암페타민이 첨가된 피로회복제가 팔리는 판에 군대에서 쓰이던 순수 메스암페타민까지 등장한거야 그러자 일본에는 이미 메스암페타민에 중독된 군인들 뿐 아니라 민간에도 많은 중독자가 발생에 큰 문제가 생겼고 1945년 패전 후에는 구 일본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필로폰 재고가 암시장을 통해 흘러나왔다. 일본 전역에 마약 중독자가 속출했다. 일본은 1951년까지 각성제 유통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1965년에는 ‘제2차 각성제 남용기’가 도래했다. 전쟁 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재건에 열을 올리는 노동자, 밤낮없이 활동하는 연예인과 그 뒤에 암약하는 야쿠자들의 손을 타고 각성제는 일본의 대표적인 마약으로 자리 잡았다. http://economychosun.com/client/news/view.php?boardName=C06&t_num=13608109 1951년 일본 정부가 금지약물로 지정해서 제조, 판매를 금지했어 어 정부가 잘했네 그..으렇긴 그런데... 2022년으로 점프해볼까? 미국은 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하드드럭+일부 소프드드럭이 불법이야 강력하게 마약을 단속하고 있고 마약 단속반은 거의 특부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님 근데 미국에서..마약을 안해?? 존!!!!나 하잖아 미국 살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상상이상으로 많음 가끔 길거리 걷는것도 무서움!!! 그것도 무시무시한 마약 갱단이 붙어서 하지 물론 미국의 마약 중독이 단순히 마약 금지때문만은 아니고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마약을 금지한다고 마약이 뚝 끊기는건 아니란거지 오히려 불법화되고 위험해지니까 폭력 조직들이 개입해 일본도 야쿠자가 메스암페타민 사업에 뛰어들었어 당연히 마약산업은 각종 불법+검은돈이 몰리는 산업이 됐음 일본 정부도 굉장히 강경해서 대대적인 체포 작전으로 5만명 넘게 체포하기도 했어 그야말로 일본판 마약과의 전쟁이었음 심지어 1960년대에는 마약 제조자에게 최대 사형까지 구형하도록 법을 개정했는데 이렇게 마약관련 법이 강해지자 마약업자+야쿠자들은 눈을 돌리기 시작했음 잠깐 2022년으로 다시 점프해볼께 미국이 마약을 많이 한다고 했잖아 그럼 이 마약은 어디서 올까? 미국? ㄴㄴ 미국 아래있는 멕시코부터 더 아래있는 중남미 국가에서 재배, 제조되서 유통돼 그래서 그 국가들은 마약카르텔에 국가가 잠식되어 있는 수준이고 미국내 단속이 엄격하고 빡세질수록 마약 산업은 돈이 되는 산업이 됨과 동시에 근처 다른 곳에서 제조하려고 하는거야 그리고 미국이 단속 빡세질수록 그 카르텔에 마약상과 마약카르텔 갱들은 더 활개치고 시민들은 더 괴로워하지 OEM이라고 알지? 주문자가 요구하는 제품과 상표명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것. 따지자면 미국의 마약은 멕시코와 중남미 국가에서 OEM 생산하여 판매되는거라고 봐야해 다시 1960년대로 가서 마약 제조업자들과 야쿠자들에게 메스암페타민 산업은 너무나 ~ 돈이 되는 산업이지만 자칫하다간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산업임 이때 얘네 선택을 고르시오 1. 회개하고 새삶을 산다? 2. 죽기를 각오하고 계속 만든다? 둘다 놉 3. 가까운 곳에 생산 기지를 만든다 돈도 되고 안전하고 개굿! 자 이제 눈치챘겠지 일본에서 제일 가까운 나라는 좆같게도 우리나라야ㅋㅋ 그것도 제일 가까운 곳은 제2의 도시 부산 일본과 가깝고 항구라 해상교통도 편리하니까 맞아 일본에 유통할 마약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조하기 시작해어 이때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마약왕인데 안봐서 뭐라 말을 못하겠다 아무튼 스토리라인이 일본에 마약 파는 내용이더라구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마약에 대한 제재가 별로 없고 큰 문제를 일으킨적도 없었어 소프트드럭이라는 대마도 시골 어르신들이 종종 키워서 사용했었고 은근히 피는 사람도 흔했으니까 그런 헛점을 이용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야쿠자 세력 및 마약 상들이 마약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그 아래 일하는 사람들도 점차 기술을 배우고 마약 장사에 참여하기 시작해 그리고 한국 조폭들의 큰 자금줄이 됐지 당시 한국에 뭐 4대 마약왕이니 마약 거물이니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걍..아오안이라 더 안찾아봄..알빠쓰레빠 방식은 이래 대만에서 원료를 사온다->부산에서 만든다->일본에서 판다 어 따지자면..가공무역?..을 가장한 카르텔이지 뭐 저기에 개입되는건 일본의 야쿠자/한국의 조폭들이었고 폭력 조직과 각종 불법이권의 돈줄이 되어준게 바로 마약이었거든 그렇게 60년대~70년대까지 일본 히로뽕 생산량의 80%를 한국, 부산이 차지헀어 그것도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히로뽕보다 한국 히로뽕이 유독 질이 좋아서 일본 시장을 장악했다고 해 참...어떻게 마약도 굳이굳이 더 잘만드네..재능낭비? 그렇게 1970년대까지 부산 지하경제는 히로뽕이 장악했고 돈이 어마무시하게 들어왔어 그렇지만 히로뽕 중독자는 우리나라에 거의 없었지 물량을 죄다 일본에 팔았거든 왜냐면 우리나라사람들은 가난했고 돈을 버느라 바쁘지 돈주고 비싼 마약을 살 여유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1980년대들어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해 1. 돈이 되니 사람이 몰리고 사람이 몰리니 기술(???)이 발전했다 =양질의 히로뽕 생산량이 늘었다 + 2. 일본에서 코리안 마약 카르텔을 눈치채고 대대적으로 한국산 수입품을 단속했다 =대부분 일본에 수출되지 못하고 부산에 물량이 남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히로뽕 물량이 촤악 풀렸지 실제 우리나라에서 다른나라와 다르게 유독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의 마약이 바로 히로뽕임 왜 오죽하면 SON of 정희, BROTHER of 근혜인 박지만 (=약쟁쓰)도 가장 많이 걸린게 히로뽕이겠어 헐 우리나라도 그럼 완전 약쟁이 나라 된거아냐? 놉 다행이 우리나라는 마약이 퍼지는 속도보다 정치 경제 사회 변화가 개빠른 나라였고 마약이 우리나라를 장악하기전 마약을 여러 선진적 체계가 빠르게 자리잡았어 단속반이 생기고, 마약단속법이 생기고 인식이 바뀌고 등 더불어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건비, 물류비, 물가 모든게 상승하다보니 계속 OEM을 하기엔 단가가 안맞았지 어쨌든 마약 산업(?)도 돈벌려고 하는건데 울나라에서 만들면 더이상 돈이 안되는거야 마이너스 수준임 걍 평범한 합법 공산품도 우리나라에서 만들면 인건비 임대료 등으로 가격이 비싸지는데 하물며 마약은.. 그래서 많은 마약 제조상들이 다른나라로 떠났고 우리나라는 다행이 마약제조국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 만약 우리가 빠르게 변화하지 못했다면, 사실 거대한 마약카르텔이 나타났을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마약 카르텔의 가장 최악의 결과는 현재 멕시코나 남미를 보면 되고 또 아프가니스탄 같은 최빈국+분쟁국가도 부자국가의 마약 OEM으로 먹고 살며 마약카르텔에 갇힌 나라거든 물론 그 흔적은 아직 남아있지만..우리나라 아직도 가장 높은 비율의 마약이 히로뽕임 히로뽕은 투약횟수, 정도에 비해 몸에 끼치는 해가 아주 큰 마약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손도 대지 말자 막간 TMI 최근 개봉한 디즈니 영화 엔칸토는 화려한 색감과 신나는 음악이 특징인데 그 밝은 연출 뒤로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어 엔칸토의 시작이 바로 콜롬비아 내전이야 주인공 가족은 내전을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이고 콜롬비아는 마약 카르텔의 큰 영향을 받은 나라고 당연히 콜롬비아 내전도 그 마약과 카르텔의 영향을 받았음 마약왕으로 불리던 나르코스가 콜롬비아 출신이기도 하고 마약과 콜롬비아는 절대로 뗄 수 없지 미국에서도 콜롬비아와 마약을 많이 연관지은 미디어, 콘텐츠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본인들도 책임 아주 크다는건 가끔 망각하는 것 같아 ㅋㅋ ㅊㅊ
주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사건(1996년)
16세기 잉카제국이 멸망했어도 그 잔존세력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페루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후잉카제국은 스페인과 대립하였다 1571년 즉위한 후 잉카 제국의 투팍 아마루는 1572년 스페인의 페루 부왕령 총독에게 끌려가서 우상숭배를 명목으로 처형을 당한다. 이렇게 후 잉카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원주민 족장 한명이 스스로를 투팍 아마루 2세로 자칭하면서 잉카제국의 승계를 주장하고 독립 운동을 이끈다 그는 흑인이나 메스티소에 대해서 차별을 철폐할것을 요구하며 거병하였지만 스페인의 페루 부왕령 군대에 진압당하고 처형당한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이르러 호세 데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의 활약으로 페루는 마침내 독립하고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페루는 여러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갔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들은 미주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는데  미국과 브라질에는 대규모 일본계 커뮤니티가 형성될 정도였다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곳은 페루였는데 이곳에서 한 일본계 페루인이 주목 받았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Alberto Kenya Fujimori Fujimori는 페루 리마에서 일본 구마모토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페루로 돌아와서 tv 토크쇼 진행자로 큰 주목을 받아서 1990년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간다 특히 페루는 신자유주의로 나라 경제가 한번 박살났었는데 후지모리는 거기에 반대하는 공약을 내놓았으며 아무튼 80년대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일본의 경제 지원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페루인들의 지지가 컸다고 한다(1990년 시점에서의 페루인들 생각이 저러했다고 하는거지 실제로 어떠했냐 앞으로 어떻게 따지냐를 이야기하는건 무의미함) 그리고 실제로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페루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96년.... 1996년 12월 일본의 덴노인 아키히토 생일 축하연이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열렸고 페루에 주재하고 있는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때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의 조직원들이 일본 대사관으로 쳐들어가서 대사관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들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은 과거 페루의 독립운동을 이끈 투팍 아마루 2세의 이름을 따와서 만들어진 페루의 좌.파 반군 조직이였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에 소속되어있던 인원의 석방과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의 경제 정책을 자신들의 요구대로 전환 시킬것등의 조건을 걸고 페루에 주재한 외교관들(주 페루 대한민국 대사 포함)과 일본인 주재원등 600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후 페루 정부는 어떻게든 인질들을 빼내기 위해서 테러범들과 협상을 했으며 주 페루 한국 대사는 운좋게도 4일만에 탈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주 페루 쿠바 대사가 한국 대사에게 먼저 나갈수있도록 테러범들과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직접 방탄복을 입고 범인들과 협상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페루 해군 특수 작전군은 미군과 연계하여 테러범 진압작전을 3개월에 걸쳐서준비하고있었다 페루군은 주 페루 일본대사관 주변의 모든 건물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후에 주 페루 일본 대사관 건물로 통하는 터널을 파기 시작한다 이 당시 인질들은 대사관 2층에 모여있었으며 인질들이 1층에 대부분 모여서 운동을 하는 시간에 맞춰서 대사관 지하까지 파둔 터널을 폭퍄시켜서 개통을 하였다 페루군은 대사관으로 진입 투팍 아마루 해방 운동 단원들을 차례차레 사살하였으며 페루군 2명이 이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 단원은 총 14명이 사살당한다. 결과적으로 페루군은 인질 전원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중 하나로 평가받게된다. 거기에 페루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인기는 더욱 치솟기도하였다. 그러나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이후 온갖 부패에 연루하여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다시 페루로 돌아와서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군사갤러리 ㅇㅇ님 펌
우러전쟁 이야기 (갈려 나가는 기갑)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흑토 때문에 이질적인 지형을 갖고 있음. 이 이질적인 지형은 우러전쟁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 그것은 바로 라스푸티차라고 불리는 광역 슬로우 디버프임. 기갑의 이동을 제한하는 라스푸티차는 봄과 가을에 발생하고 겨울이 따뜻하면 겨울에도 발생함. 우크라이나군, 러시아군 모두 이 라스푸티차라는 페널티에 걸려 있음. 요즘 러시아군이 무리한 공세를 하다 많이 갈려 나가는 중이라 지형 페널티를 받고 갈려 나가는 우러전쟁 기갑에 대해 쓰려고 함. 우러전쟁 기갑은 진흙탕 서핑을 하고 싶지 않으면 길 따라 기동해야 함. 근데 우크라이나 도로는 협소하고 길이 많지 않아 진격로가 제한됨. 제한된 진격로, 좁디좁은 길, 거지 같은 도로. 기갑이 갈려 나가기 딱 좋은 조건임. 박살 난 선두 전차 때문에 잠시 멈춤 러시아 전차. 어버버하다가 결국 포격 엔딩을 맞음. 우러전쟁, 기갑 부대의 진격을 막는 방법. 대전차 지뢰든, 장애물이든 뭔가로 길을 막는다. 길이 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기갑 부대를 차근차근 박살 낸다. 원숭이도 할 간단한 방법인데, 이게 계속 통하는 상황임. 그렇다고 도로가 아닌 진흙밭을 통과하는 것도 미친 짓임. 라스푸티차 때문에 굼벵이 속도로 진격하다 쓸려나감. 또 우러전쟁 기갑을 위협하는 문제점이 하나 더 있는데 너무 탁 트인 개활지라는 점임. 이런 전장은 공군이 활약하기 최적의 지형인데 아쉽게도 우크라이나, 러시아나 공군이 없음. 탁 트인 개활지여서 생기는 단점. 드론 정찰에 너무 쉽게 잡히고 조금만 멈춰 있으면 포격 맞아 사망임. 드론 정찰로 러시아 기갑을 찾을 우크라이나 보병대. 대전차 미사일 사격으로 깔끔하게 제거함. 라스푸티차로 인한 슬로우 디버프 & 개활지로 인한 엄폐 불가 때문에 기갑이 매우 취약함.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우러전쟁에서 기갑이 쉽게 터져나가고 있음. 날씨와 지형을 면밀히 살펴보고 상황에 맞춰 운영해야 하는데 무지성 돌격하다 갈려 나가는 중임. 그리고 러시아제 기갑은 종이 장갑이라고 할 정도로 장갑이 약해서 포격 몇 방에 쉽게 궤멸되는 편임. 궤멸된 기갑부대에 놀라 달아나는 러시아 병사들. 이게 우러전쟁 전선이 교착 상태인 이유임. 기갑이 힘을 쓰기 힘든 조건이 너무 많음. 다만 우러전쟁에서 기갑이 쉽게 갈려 나가는 것은 기갑 자체의 문제라긴 보단 전장 상황을 무시한 무지성 작전 탓이 큼. 겨울 라스푸티차 기간에는 존버하고 강추위 시기에만 공세했으면 저런 일 없었음. 기념일 따위의 정치적 목적으로 무리하게 작전하는 게 문제임. 우러전쟁에서 기갑이 너무 쉽게 박살 나고 있지만 기갑 자체의 문제라기 보단 무지성 운용이 문제이며 기갑은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 3줄 요약 1. 우크라이나는 기름진 흑토 때문에 라스푸티차가 매우 매우 심함. 2. 제한된 진격로, 거지 같은 지형 때문에 기갑이 무수히 많이 갈려 나감. 3. 날씨와 지형을 면밀히 살펴보고 진격해야 하는데, 무지성 돌격하다 궤멸됨. 군사갤러리 후지토라님 펌
바다속의 돌고래를 촬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카메라 퀄리티
아프리카 동부 모잠비크의 바다. 우리가 돌고래하면 흔히들 떠오르는 병코 돌고래 가다가 대왕 조개 발견.. 대왕 조개 안에서 뭐가 나옴... 앵무조개.... 2마리.. 흥미를 느끼는지 유심히 본다 사실 이거 둘 다 카메라임 ㅋㅋㅋㅋㅋ 돌고래를 촬영하기 위한 카메라 앵무조개 카메라가 보는 시점.jpg 이런 위장 카메라의 장점 태어난지 몇주되지 않은 엄마 뱃속에 있던 자국이 아직 몸에 그대로 남아있는 작은 아기 돌고래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 아기있는 엄마 돌고래는 인간 주변에 웬만해서는 가까이 안가니까요 그리고 바닥에는 가오리 1마리... 얘도 카메라.... 바닥에서 병코돌고래를 쫓아다니며 촬영함 그리고 물위에는 거북이 한마리.... 가 아니라 사실 얘도 카메라.. (말 안해줬음 진짜 거북이인줄) 둘 다 거북이 카메라가 보는 시점.jpg 돌고래 눈매가 ㅋㅋㅋ 누가 그린거 같음 ㅋㅋㅋㅋㅋ 한편 중앙 아메리카 부근의 어느 바다.. 돌고래 한마리가 보임... 은 얘도 사실 카메라. 시속 25km의 속도를 낼 수 있음. 지금 사진에 보이는 돌고래는 병코 돌고래가 아니라 얼룩 돌고래.. 얼룩 돌고래는 돌고래 중에서도 유일하게 회전 점프를 즐겨하는 돌고래임 물론 다른 돌고래들이 회전 점프를 안한다는건 아니지만 얘들은 회전 점프가 주된 점프 요런 점프~🐬 이젠 뭐 말 안해도 알겠죠? 얘도 카메라임. 입 안의 렌즈로 촬영함 돌고래 카메라가 수면 쪽에서 촬영을 담당한다면 이 가짜 참치 카메라는 수중+돌고래 무리 사이에서 촬영을 함 이런 식으로 무리에 끼여서 촬영 저 돌고래들 얼룩 돌고래임.. 참치 카메라의 시점.jpg 산호초 사이에 오징어 한마리 등장🦑 이제 말 안해도 알듯.. 카메라임 오징어 카메라의 시점.jpg 저 물고기는 다 크면 크기 2미터에 몸무게 100kg이 넘는다는 감자바리 문제는... 오징어가 주된 먹이ㅋㅋㅋㅋㅋㅋㅋㅋ ㅌㅌㅌ💦💦💦 시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상탈출 해서 다행히 잡아먹히진 않았음. (거북이나 가오리에 비해 오징어는 먹이로 하는 해양생물들이 몇몇 있어서 이런 탈출기능 탑재가 필요 ㅋㅋㅋ) 개빠르네.. 죽다 살아남🦑 이 참치 카메라가 밝혀낸 게 뭐냐면 일반적으로는 돌고래는 소규모 무리를 이루고 산다고 알려졌는데 깊은 바다에서는 무리가 모이고 모여서 수백마리들이 뭉쳐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냄. 쟤들은 얼룩 돌고래... 한 앵글에 다 못담음.. 이거 다큐 나레이터 말로는 약 3천마리가 뭉쳤다고 함 촬영중인 거부기 마지막은 주변에서 사랑을 나누던 거북이 커플이 있었는데 암컷 거북이가 교미 도중 거북이 카메라한테 관심을 가짐 몇분 동안 거북이 카메라 주변을 서성이다가 돌아갔다는 후문 출처
기존나쎈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jpg
때는 1887년.. 5년전에 구식 군인들이 일으켰던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허겁지겁 부르긴 했는데.. 청나라는 군대 진압했으면 좀 꺼지지 조선에 눌러앉아서 온갖 간섭을 하려 했고 일본은 임오군란때 죽은 일본인과 불탄 일본 공사관을 들이밀며 배상 요구를 하려 한것임 심지어 언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지들 군대도 조선에 주둔시키겠다는 말같지않은 요구도 해버림 하지만.. 고종 고종은 쩔수 없었다.. 그 뒤로 조선은 지겹도록 청나라와 일본 간섭에 시달리게 됨 *잠시 당시 관계 설명* 이 당시 청나라는 서양 국가들에게 탈탈탈 털리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들 따까리 자리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하지만.. 원래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사대관념에 입각한 조공책봉 관계, 즉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보살펴주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는 그런 관계임. 말그대로 힘에 의한 관계라기 보단 이념에 따른 자발적 관계이고, 당연히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었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청나라가 자꾸 선넘더니 무력을 앞세워 국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는 것! 이때부터 조선인들도 머야시발;;하면서 청나라와의 전통적 관계를 끊고 동등한(=근대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조공을 철폐하려고 하는 등 한발자국씩 나아가던 시기였음 ~다시 돌아와서~ 조선의 여러 관료들은 청나라를 비롯한 외세의 개입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 시점에, 어떻게 하면 조선이 자주독립을 지키며 근대화를 이뤄낼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 또 고민했음 그 당시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외교> 조선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제질서에 편입하고자 했음 그렇게 해서 청나라에도 조공책봉 사신이 아닌 동등한 주청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고, (물론 청나라는 전통 질서에 혼란 생긴다고 싫어했음 ㅎㅎ 우짤) 도쿄에도 주일 외교관을 파견하고자 했었음 하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바로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 주미특파전권대사 박정양을 파견했다는 것임 고종이 주미 대사를 파견한 것은 미국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함으로써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주변국에게 보여주고, 서양의 현재세력 관계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고종의 빅 픽쳐 ㅎㅎ 조선은 당연히 파견하기로 결정한 후에 청나라한테도 알려줬음 : 정양이 일행 미국에 보낼거임 ㅎㅎ 위안스카이(원세개) : 미쳤습니까 휴먼? 갑자기 청나라가 존나게 시비를 거는거임;; 대충 뭐라고 했냐면 조선이랑 미국 사이에는 상민도 없고 무역도 안하는데 전권공사는 왜 보내? 돈도없으면서 외교사절은 무슨 ㅎㅎ 낭비 ㄴㄴ 아니 그리고 니네 왜 우리한테 허락 안받음?? 이거 무효야 무효 응.. 개소리 한거임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미국 공사나 고문관도 청나라가 조선과 미국의 조약을 방해하는건 조약 위반이고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니 냅둬야 한다고 항의했음 이 민폐국 때문에 자꾸 출발이 늦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청나라가 요구하는 영약삼단을 받아들임 고종은 청나라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박정양 일행에게는 “짐의 뜻을 잘 헤아려 처신하라”고 거듭 당부했다고..(대충 영약삼단 지키지 말라는 뜻) 영약삼단이란?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대한제국 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 ③ 대한제국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한줄요약: 청나라가 미국에서 조선이 자기네 속국이라고 홍보하기 위해 세가지 약속 지키라고 협박함 조선이 자주독립국인걸 보여주고자 했던게 어지간히 아니꼬웠나 봄 ㅎㅎ 어찌됐건 우여곡절 끝에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 청나라와의 약속 중 첫번째인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를 지켜야 할 차례였음 (조까~) 하지만 기존나쎔 박정양은 청나라 공사가 아닌 미국의 국무부 장관를 먼저 만나러 가면서 영약삼단을 무시해버림 당시 일행 조금 화난 위안스카이 : 영약삼단 지키라해;; 거슬린다해;; 박정양은 청나라가 항의하자 “님 ㅠㅠㅠㅠ 쏴리쏴리 ㅠㅠㅠㅠ 뚜이부치 ㅠㅠㅠ 정부가 청국 공사 먼저 만나러 가라고 나한테 말 안해줬음ㅠㅠㅠ 일부로 그런거 아님 ㅠㅠㅠㅠ” 이라고 해명함 청나라는 그냥 흠....하고 넘어가게 됨 하지만 그 뒤로도 박정양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날 때 청의 외교관을 대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워싱턴에서 공사관의 부임 순서에 따라 방문하는 관례에 따라 28개국 중에 18번째로 청의 공사관을 방문했음 이후에 청국 공사에 방문한 박정양은 더 이상 “몰랐다”고 할 수 없으니 솔직하게 “미국에 도착해서 미국 국무부가 아닌 청 공사를 먼저 방문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이고, 이는 미국이 조선과의 교류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조선과 미국의 국교라는 파견 명분을 해칠 수 있으므로 영약삼단을 지킬 수 없었다.” 고 말했고, 너무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청나라에서도 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었음. 하지만.. 그 뒤로도 복장같이 사소한 걸로도 다 트집을 잡아서 시비를 걸었음 ㅎㅎ 물론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압력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이는 엄청난 의의가 있는 행동이었다는 점 왜냐하면 청의 요구를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외교 활동을 했기 때문임 청나라 공사의 요구들을 거절하고 당당하게 단독으로 활동하며 자주적 외교와 독립국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 (워싱턴 대한제국공사관) 당시 주미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상재가 작성한 편지를 보면 "이곳의 인물 풍속 정치 법령은 오로지 우리나라와 일체 상반된다. 날마다 귀와 눈이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것"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중국공사가 매번 체제사로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청나라가 가지가지 간섭해댔던 시절에도 우짤? 마인드로 조선의 외교를 위해 힘써줬던 그 옛날 기존나쎔 조선 외교관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가져와봄 마무리는 이상재의 편지 중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 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使命)을 욕보이는 것이다." 문제시 삭제 출처
막걸리 좋아해? 전국 지역별 특색있고 특산물로 제조한 막걸리 모음.JPG
서울 한강주조 나루생막걸리 6% / 11.5% 서울 성수동에서 재배한 경복궁 쌀로 만든 서울 1호 특산주 경기 배상면주가 느린마을 막걸리 6% 무 아스타팜, 단맛과 부드러운 맛이 특징 김포 금쌀 탁주 김포선호 생 막걸리 6% 70년 전통과 역사가 있는 명문가 막걸리, 김포에서 자란 금쌀로 제조 천연감미료 사용 포천 일동 담은막걸리 화이트 6.5% 하얀 구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90년 전통 막걸리 청계산의 맑은 물 사용,합성감미료 X 충청남도 사곡양조 공주 알밤 밤막걸리 6% 막걸리 제조에 사용하는 밤은 품질이 좋은 최상급 밤을 사용 진한 밤맛이 특징 한산모시 생막걸리 5% 한산에서 난 모시잎을 사용해 만든 막걸리 모시잎을 사용해 은은하게 퍼지는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 이상헌 탁주 14% 충남 아산에서 난 쌀로 만든 탁주 엄선한 누룩을 사용해 백여 일 간 발효해 만들어 프리미엄 막걸리라 부른다 모든 공정 수작업이라 한정된 수량만 제조 충청북도 장희도가 세종대왕 어주 13% 유기농 쌀(현미 찹쌀)로 만든 막걸리 ,초정 약수 사용 무 첨가물 용두산 강냉이 막걸리 6% 제천 100년 전통 양조장에서 제조한 막걸리 옥수수가 들어가 옥수수 향과 걸쭉한 느낌이 드는 막걸리 명세주가 가덕 순쌀막걸리 6% 우렁이 농법으로 재배한 친환경 충북 청원쌀을 사용 100% 우리 쌀로 만들어 깔끔한 맛이 특징 전라남도 담양죽향도 대대포 생막걸리 6% 미네랄,비타민이 풍부한 지리산 벌꿀과 댓잎을 첨가해 감칠맛이 있는 막걸리 인공 감미료 X 편백 숲 산소 막걸리 딸기 스파클링 6.8% 전남 장성군 특산물인 딸기를 사용해 제조 딸기향이 느껴지며 스파클링이라 청량한 맛이 특징 남도 탁주 정고집 나주 쌀 생 막걸리 5% 다른 막걸리와 다르게 백설기와 찐쌀을 사용해 제조 전라북도 국순당 자연담은 복분자 막걸리 6% 국순당 고창명주에서 제조 고창에서 재배한 쌀과 특산물인 복분자로 만든 막걸리 복분자 우유를 마시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함 전주 애모주 1.5% 생강,계피,대추,배 등을 넣어 제조 계피와 대추향이 강한 막걸리 내변산 쌀 바나나막걸리 4% 바나나 맛이 아닌 바나나 향에 가까운 막걸리 바나나 탄산맛을 느낄 수 있고 얼음 넣어 마시면 좋다고 한다 경상남도 금정산성 토산주 막걸리 8% 대한민국 1호 민속주 이화백주 순탁주 6% 우리 쌀에 옛날 누룩을 100% 사용하며 서로 마실수록 이롭다는 뜻을 담고 있음 햅쌀을 사용해 제조하고 막페인(막걸리+샴페인)이라고 부름 복순도가 손막걸리 6.5% 100% 우리쌀로 빚어 호불호가 적은 막걸리 경상북도 두술도가 희양산 막걸리 9 / 15% 희양산 주변에서 재배한 쌀과 우리밀 누룩을 사용 요구르트처럼 담백한 맛을 내는 게 특징 문경주조 오미자 생막걸리 6.5% 우리 쌀과 문경 동로산에서 자란 오미자로 빚은 막걸리 분홍분홍한 색감이 이쁘다 문경주조 문희 13% 재료를 세번에 담는 전통 삼양주 기법으로 빚은 막걸리 90~100일간 황토방에서 숙성해 진짜배기 막걸리만 추출함 강원도 호모루덴스 12% 유희의 인간이라는 뜻을 지닌 막걸리 강원도 홍천 한의사가 만든 막걸리로 유명하다 삼양주 기법으로 지어 맛이 풍부 전통주조예술 만강에 비친 달 10% 홍천 특산물인 단호박을 사용해 제조 백자주 막걸리 10% 백자란 잣나무 열매 잣을 가리키는 말로 홍천 명물 잣을 사용해 제조 제주 낙화곡주 우도 땅콩 생막걸리 6% 우도 명물 땅콩을 사용해 제조 땅콩을 사용해 땅콩 특유의 고소한 맛이 특징 출처
2차대전 때 미해군 수병들은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보자
이 글은 2차대전 시기만 다룸, 미해군 수병들은 평균적으로 4,000칼로리를 하루에 소비하는데 이런 폭발적인 열랑의 소모를 메꾸기 위해서 미해군은 새로운 직별을 1900년대에 창설함, 조리병에서 시작해서 제빵사, 요리사, 도축업자, 그리고 조리최선임 담당관이였음, 최선임 담당관은 함선의 식량 수량을 확인하고 조리병들한테 재료를 배분하고, 또한 주방에선 주방장을 도와 식단을 짜기도 함, 대부분의 배는 조리장, 빵집, 그리고 정육소가 있었음, 대부분의 장구류는 수백명의 수병들의 수요를 맞춰서 거대했음, (BB-35 텍사스의 조리실) 조리실은 오븐과 구이용 팬, 그리고 사람만한 찜통이 있었음(위 사진에서 보이는 흰색의 통들), 제빵사는 사람만한 혼합기와 도축업자는 소고기를 한번에 썰수 있는 톱을 배당받았음, (BB-55 노스캐롤라이나의 제빵소) 요리책은 수준급의 식사와 효율성을 위한 조리법으로 구성되었음, 조리법은 기본이 100인분이였음, 조리법에는 가끔가다 비엔나 소시지와 고구마같은 괴식이 나오기도 했지만 영양학적으론 필요한 식단이였음, (BB-55 노스캐롤라이나의 감자 깎기실) 감자 깎기는 매체에서 흔한 처벌 수단으로 나타나지만 의외로 효율성이 영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기계식 감자 깎기 기계를 도입했음(사진 왼쪽의 흰색 기구) 전투배치 상황에서도 조리병들은 수병들을 위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하며 일했음, 2차대전 미해군의 식단 예시는 다음과 같았음, 봄, 금요일의 식단으로는 아침 반으로 자른 자몽, 밀로 만들어진 시리얼, 구운 콘밀 무쉬, 메이플 시럽, 바삭한 베이컨, 버터, 토스트, 우유, 커피 점심 토마토 주스, 연어 구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자요리, 버터랑 같이 볶은 당근, 견과류와 포도를 넣고 섞은 샐러드, 스펀지 케이크, 빵, 버터, 커피 저녁 양배추와 함께 구운 소고기, 웨지감자 비슷한 구운 감자, 양상추 심지 샐러드와 1000드레싱, 반으로 자른 배, 코코넛 버터 쿠키, 빵, 버터, 코코아 이외에도 아침, 점심, 저녁의 구성은 다음을 따라야 했음, 아침 과일:신선한, 동결된, 가루형, 건조, 혹은 통조림 과일은 에피타이저와 영양학적 이유로 포함되지만 굳이 아침에 제공될 필요는 없고 식단에 따라 조정될수 있음, 시리얼:시리얼은 힘의 근원이며 또한 우유와 함께 먹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상황에 따라 뜨거운 혹은 차가운 우유와 배식됨, 주식:주식은 햄이나, 베이컨, 계란, 소시지, 크림 건조된 소고기, 구운 무쉬, 프렌치 토스트, 핫케이크, 아니면 다른 음식이 올라갈수 있음, 프렌치 토스트나 구운 무쉬가 올라간다면 잼이나 시럽, 젤리도 같이 배식되었음, 빵:빵은 토스트나 롤케이크, 옥수수빵, 비스킷, 혹은 커피 케이크 형태로 배식됨, 도넛이나 팬에 구운 빵도 배식될수 있음, 잼과 젤리:잼과 젤리는 버터를 대체하여 배식될수 있음, 음료류:음료는 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가 배식되었음, 점심 수프:수프는 아침이나 저녁식사라도 배식받을수 있음, 만약에 야채수프가 배식된다면 샐러드도 같이 배식되었음, 수프는 수병들의 주된 야채 섭취원중 하나임, 고기:고기는 언제나 가장 선호되는 음식임, 해군에서 구매되는 고기는 최상급이지만 부주의한 요리 방식으로 많은 양이 낭비될수 있음, 과조리를 삼가하며 배식됨, 그래이비:그래이비 소스는 고기와 함께 배식됨, 좋은 그레이비는 부드럽고 간이 잘되있으며 느끼하지 않음, 뜨겁게 배식할것, 채소:감자를 제외한 초록색 혹은 노랑색의 채소는 맛과 비타민적인 요소로 필요함, 절임:절임은 샐러드를 대체하여 나올수 있음, 주로 당근 절임과 양파, 무, 순무, 양배추 절임이 배식됨, 피클이나 비트도 배식될수 있음, 샐러드:고기나 초록색 채소, 과일로 만들어진 샐러드는 차갑고 아삭한 상태로 배식됨, 디저트:디저트는 행복감을 위해 필요함, 대부분은 단 디저트를 선호함, 무거운 식사에는 가벼운 디저트가 배식됨, 음료류: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 그리고 과일음료가 배식됨, 저녁 주식:고기는 보급품 현황에 따라 쓰일수도 안쓰일수도 있음, 저녁은 대부분 점심보다 가벼웠음, 하지만 수병들의 일과에 따라 변동됨, 고기와 쌀, 마카로니와 치즈, 찹 수이, 크림 소고기, 걸쭉한 차우더, 베이크드 빈즈, 그리고 비슷한 요리들이 배식됨, 또한 점심으로부터 남은 재료들이 재활용됨, 샐러드:채소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 혹은 주방장이 만든 샐러드는 주식과 함께 배식되며 영양학적으로 중요함, 디저트:디저트는 저녁의 양과 칼로리 수준에 따라 변동됨, 음료류: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 그리고 과일음료가 배식됨, 날씨에 따라 냉차나 차가운 과일음료가 배식되었음, 이런 식단들은 함의 보급품 현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었음, 미해군 수병이 배식이 권장된 음식의 수량은 다음과 같은 우유:470ml 계란:1알 육식류:1번 이상의 배식 콩류(땅콩버터 포함):주마다 1~2번 버터:20~50g 시리얼과 빵:2번 이상의 배식 과일:2번 이상의 배식, 귤류는 자주 배식할것, 채소:감자를 제외해서 2번 이상의 배식, 초록색 혹은 노랑색 채소는 날마다 샐러드 형태로 배식 (이오지마로 항해하는 배 안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수병들) (미해군 바지선 Quartz에서 아이스크림 배식을 받는 수병들) (해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인 조세프 클린턴 클리프턴 대령이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퍼먹는 모습) 아이스크림은 미해군의 거의 모든 함정, 심지어 잠수함에도 제조기가 달렸을정도록 아이스크림 보급에 열정적이였음, 육군만해도 3척의 아이스크림(그리고 냉동식품)보관용 바지선을 건조해서 운영했을 정도로 미군 전체가 아이스크림에 열광함, 미해군은 구축함 선원들한테 추락한 조종사 1명마다 일정량의 아이스크림 보급을 약속함, USS Hancock의 선원이던 Daniel W. Klohs가 2005년 사망하기전 쓴 회고록에 따르면, 조종사 1명당 25갤런의 아이스크림과 함장과 부장한테는 2병의 위스키를 보급하는게 맞지만 아이스크림은 10갤런씩 포장되어 왔기 때문에 총 30갤런을 보급받음, 또다른 선원인 Tom Kocurko의 회고에 따르면 조종사 1명당 10갤런의 아이스크림을 배급받았기 때문에 그 당시 농담으로 하나 격추시키진 말이 나왔다고함, 다만 조종사들은 자신이 고작 아이스크림에 비교당하는게 좀 아나꼬왔음, 미해군 조종사인 중령 Norman P. Stark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해군 구축함인 USS Yarnall에 구조당했을땐 수병들이 잃어버린 형제라도 찾은듯 반겨줬다고함, 그 당시엔 몰랐지만 조종사 1명당 10갤런 아이스크림의 가치가 있다는걸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함, 항모로 복귀하고 USS Yarnall의 수병들이 떠나면서 던진 말에 비로소 자기가 10갤런의 아이스크림의 가치를 가진걸 알고 불쾌한 표정을 지음, 또다른 유명한 이야기로 1942년 렉싱턴이 침몰하던중 수병들은 조리실 냉장고로 뛰어가 빠루를 가지고 냉장고를 따기 시작함, 그렇게 따인 냉장고에선 수병들이 주변에 잡히던 모든것을 동원해서 아이스크림을 주워 담음, 심지어 땀범벅인 헬멧에다가 담아서 깨끗이 핣아먹은 수병도 있었다고 전해짐, 미해군 공식 페북 계정 피셜론 미해군 수병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스크림 보급선에서 2명의 장교가 끼어들자 뒤에서 뒷통수에 쌍욕을 갈김, 쌍욕을 갈긴건 다름아닌 해군 대장 윌리엄 할시였음, 2명의 장교의 행방은 지금까지 전해지진 소식이 없음, USS Quartz는 미해군이 바지선을 개조해서 아이스크림 보급함으로 만든 예시임, 2000갤런(7,570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수용하고 7분마다 10갤런(37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생산했음 (2차대전때 현역이던 USS Quartz와 현재 브리티쉬 컬럼비아에 방치된 USS Quartz) 1945년 추수감사절 당시에 미해군이 소모한 음식의 수량은 약 7,400명이 600마리의 6.8kg짜리 칠면조를 먹어치우고 또한 같이 먹어치운 음식의 수량은 다음과 같음, 1,300kg의 컬리플라워, 680kg의 방울다다기양배추, 907kg의 감자, 90kg의 크랜베리, 450kg의 견과류, 1,580kg의 사탕류, 1,136kg의 아이스크림, 378kg의 홀스레디시 소스, 1,000개의 호박파이, 12,000개의 롤케이크, 378kg의 피클, 그리고 전원한테 공짜 담배 1갑이 배급됨. 군사갤러리 ravdozka님 펌
프랑스가 만든 민항기, 다쏘 머큐리를 알아보자
1970년의 항공 산업은 보잉, 록히드마틴, 맥도널 더글라스 등등 여러 미국 기업들이 피터지게 싸우던 시절이였음. 보잉은 747-100의 엔진 문제 등을 개선한 747-200을 출시하고 중단거리 시장을 노린 737 오리지널 시리즈를 런칭했음. 록히드마틴은 늘어나는 항공 수요에 맞춰 첫 광동체 여객기인 L-1011을 출시했고, 맥도널 더글라스는 록히드마틴이 첫 광동체 여객기를 런칭했다는 소식에 허둥지둥 DC-10의 개발을 진행시켜 출시하게 됨. 우리가 알아볼 프랑스의 여객기, 다쏘 머큐리는 보잉의 중단거리 시장을 노린 737 오리지널을 경쟁 상대로 삼고 개발을 시작함. 프랑스의 기업 다쏘는 보잉에 견주는 유구한 항공 산업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기업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설립된 다쏘는, 세계대전 후 첫 제트전투기인 우라강을 선보이고, 그 뒤 미라주 시리즈를 런칭하며 그 당시엔 베스트셀러 급으로 팔려나가게 됨. 특히 미국, 소련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제3세계 국가들이 미라주를 사들였고 이는 다쏘가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는 발판을 깔아줌. 이러한 성장세에 한껏 고무된 다쏘는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첫 협동체 민항기, 머큐리를 런칭할 계획을 세우게 됨. 당시 다쏘가 얼마나 의욕적이였는지, 공장도 먼저 세우고 초도비행도 계획 수립 후 4년만에 이루어 낼 정도로 빠른 개발 과정을 보여주었음. 또한 다쏘 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 중 하나인, 다쏘시스템의 그 당시엔 최신 기술이였던 컴퓨터 설계로 머큐리는 경쟁 기종으로 지목했던 737 오리지널보다 속도도 빠르고 비행 효율도 좋은 항공기를 완성하게 됨 바로 이 항공기가 다쏘의 첫 협동체 민항기, 머큐리임. 앞서 설명했던 장점만 보면 출시하자마저 무지막지하게 팔려나갔을거 같지만, 머큐리엔 장점을 쌈싸먹어버리는 매우 큰 단점이 있었음. 바로 항속 거리, 즉 비행기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냐가 심각하게 조루였던 것! 이 항속 거리가 얼마나 짧았냐, 수치상으로는 1700km~2100km 이였음 수치상으로는 실감이 안나니 우리에게 친숙한 노선으로 따지면, 인천-나리타를 겨우 오갈 수 있는 수준이였던 것. 유럽 대륙으로 따져도 주요 도시를 겨우 연결할 수 있는 수준이였음. 머큐리의 경쟁 상대였던 보잉 737 오리지널 중 하나인 737-200이 4,300km을 날아갈 수 있었던 걸 보면 말 다했지. 이런 하나의 거대한 단점을 안고 시장에 나온 머큐리는 말 그대로 대폭망. 사진에 나와 있는 항공사인 에어인터가 이 항공기의 유일한 고객이였음.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정부의 자금도 투입된 탓에 에어인터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 항공기를 구매할 수 밖에 없었음. 게다가 이 항공기가 출시된 시기인 1970년대엔 오일 쇼크로 인해 불경기가 찾아왔고, 당시 달러화가 평가 절하되어 각국의 항공사들은 신뢰성 있는 737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음. 최종적으로 다쏘 머큐리는 유일한 고객 에어인터의 주문량 10대 + 시제기 2대를 합해 총 12대만 생산된 체 생산을 중단하게 됨. 사실상의 사망 선고가 내려진 셈. 에어인터가 주문한 머큐리들은 1995년까지 하늘을 날다가 퇴역하게 됨. 이렇게 커다란 실패를 안겨준 머큐리는 다쏘의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줄 알았으나, 오히려 커다란 결실을 맞이하게 됨. 머큐리의 실패 이후 프랑스도 유럽연합의 항공기 제작사인 에어버스와 함께하게 되면서 다쏘 머큐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협동체 여객기를 설계하게 되는데... 이는 737 시리즈의 유일한 라이벌로 불리게 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A320 시리즈임. 어찌보면 다쏘의 노력이 완전히 헛되게 된 것은 아니게 된 셈이다. 지구촌갤러리 코마츠타미나루님 펌
19세기 프랑스의 시체 관람
1886년 8월, 프랑스 파리 한적한 외곽에서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시체가 발견됐다. 프랑스 신문사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호기심 가득한 파리 시민들은 소녀의 시체를 보기 위해 시체 안치소로 몰려 들었다. 무려 1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시체 안치소로 몰려들면서 인근 교통이 전부 마비되었다. 자신이 먼저 보려고 주위 사람들을 밀치는 바람에 이곳에서 저곳에서 드잡이질이 벌어졌고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옷이 찢어지거나 기절하는 사람하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소녀 시체에 대한 관심은 이상할 정도로 고조된 편이지만, 사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 관람을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 벽으로 만들어진 시체 관람소는 파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 명소였다. 시체 안치소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창으로 도배한 용도는, 신원 불명 시체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돕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 그런 식으로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었다. 관광 명소가 될 정도로 사람들이 왕창 몰려 들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한가지, 죽은 자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은 자의 사인이 극적이거나 수수께끼일수록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언론사들은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대서특필하며 온갖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틀 뒤 세느강 가에서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 시체가 발견되자 어떤 프랑스 일간지는 두 소녀를 엮어서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자매'라는 소설을 기사로 내보기도 했다. 이 기사가 나가고 소녀들의 시체를 보려는 구경꾼은 한층 더 늘었다. 1885년, 미국인 기자가 묘사한 파리 시체 안치소의 정경을 쓰자면,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치켜세운 신사들은 시체를 구경하며 히히덕거렸다. 노인들은 장터에서 물건을 흥정하듯 큰소리로 시체의 사연을 떠들었다. 창백한 안색의 귀부인이 동정어린 어투로 죽은 자의 명복을 빌었으나 시체 구경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시체가 옮겨질 때마다 양팔을 휘두르며 환성을 내질렀다. 오로지 시체 구경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방문객 숫자가 늘어나자, 파리 시청은 시체 안치소의 관람 구역을 확장했다. 노점상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체 안치소 주위에 몰려들었다. 시체 안치소는 일주일 내내 아침 9시부터 새벽까지 개장했으며, 시체를 보기 위한 관광객은 더욱더 늘어났다. 어떤 시기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하는 관광객보다 시체 안치소를 구경하려는 사람 숫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시체 안치소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면서 시체의 유류품 역시 관광 상품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시체 안치소는 마치 백화점 쇼윈도 같은 형태로 재개장되었다. 초기에는 시체의 부패를 늦추기 위해 천장에 달린 수도 꼭지에서 차가운 물을 시체 위에 방울져 떨어지게 하는 방식을 취했으나, 1882년, 본격적인 냉장 시스템의 도입으로 시체 안치소의 시체들은 좀 더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 파리 경찰은 시체 관람을 범죄 수사에 활용하기도 했다. 1888년, 살인 용의자를 시체 안치소에 데려가서 희생자와 대면시키는 행위를 공식 절차에 추가 시켰다. 제 아무리 완고하게 무죄를 주장하던 용의자도 밝은 빛 아래에서 희생자의 유해를 마주하고 나면 금방 죄를 자백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시체 관람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점차 인기가 사그라들다 1940년대를 전후해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출처:한류열풍 사랑
이자성의 난과 청나라 침공
이렇게 보면 오삼계도 나름 청나라에 투항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가 아직까지도 '한족의 배신자'라고 불리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 전체에 이제 청나라 군대를 견제할 세력이 없다보니까 청나라 애들이 아주 구석구석까지 약탈해버리거든요 청나라 침공기는 그야말로 한족 수난기로, 중국 전체에서 약탈, 방화, 강간, 학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정작 오삼계는 이후 청나라한테 번왕 칭호까지 받고 한족 독립군을 진압하면서 잘먹고 잘삽니다 이러니 다른 한족 애들이 오삼계에게 치를 떨만 하죠 어째서 치밀하던 이자성이 마지막 순간에 군을 조율하지 못했느냐에 대해선 여러 추측들이 있습니다 1. 황제의 비자금을 보상으로 약속했으나, 애초부터 황제가 비자금을 군자금으로 다 써버린 탓에 농민군이 빡쳤다 2. 농민들이 북경의 귀족들에 대한 원한이 특히 깊었기에, 그들을 약탈하는 것을 일종의 보상으로 약속해주었다 3. 이자성도 마지막에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생각에 방심했다 개인적으로 전 1번 추측이 제일 마음에 드네요 사실 원숭환 숙청은 숭정제의 실책이 맞긴 합니다. 숭정제가 쉴드 칠 구석이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이전 황제들, 그니까 아예 나라를 다시 세울 노력도 안한 만력제와 비교해서 그런거고, 숭정제 자체도 '유능하다'고 보기에는 성격에서 조금씩 흠이 보이지요 (출처)